웹진 인-무브

오프모던(off-modern) : 포스트 세미나

 

 

변건우 |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서교연 세미나 회원

 

 

 

이번 글은 '보임 시리즈' 두 번째이자 마지막입니다(그러나 이 릴레이는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서교연 아방가르드 세미나에 참여해 보임의 <<오프모던의 건축>>을 읽은 변건우 회원이 보내준 글입니다. 홍익대학교 교지 와우에 실렸던 글인데요, 더 많은 분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웹진 인-무브에도 공개합니다. 지난 번에 공개했던 이종현 회원의 글과는 아주 다른, 생생한 문제의식이 살아있는 글입니다. - 인무브 편집부

 

출처: 변건우, "오프모던(off-modern): 포스트 세미나", 와우, 2024311, 6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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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 세미나

지난가을, 서교인문사회연구실에서 주최한 아방가르드 세미나에 참가했다. 아방가르드 세미나 시리즈는 회마다 정해진 책을 함께 읽으며 아방가르드를 둘러싼 담론을 확인하고 토론하는 세미나다. 이번 책은 스베틀라나 보임의 <오프모던의 건축>이었다. 건축이라는 말에 끌렸다. 철학과 사회학을 연구하는 단체에서 건축을 다루는 게 흥미로웠다.

 

오프모던은 처음 접하는 개념이었다. ‘비판적 근대성의 옆 골목을 탐색하고 그것의 측면적 잠재성들을 추적하는 새로운 기획을 지칭하기 위해 보임이 만들어낸 신조어라는데, 무슨 말인지 와닿진 않았다. 다만, “결국 우리는 실패한 과거를 폐허로 영원히 묻어두게 될까요, 아니면 다가올 미래에 지연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라는 공지문의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실패한 과거라도 끝난 과거는 아니란 뜻인가? 이 글은 4주간 오프모던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이 내게 의미화되는 과정을 담았다.

 

 

Week 1

“나는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안in”에 있고자 골몰하는 카리스마적인 포스트비판의 저 모든 [접두어들], “포스트post” “신neo” “전위avant” “트랜스trans” 따위가 지긋지긋하다. 이들과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밖out”에 있는 게 아니라 [옆으로] “빗겨나off” 있기.”

 

어렵다. 우선 의구심이 들었다. 산업혁명 이래 우리는 줄곧 모더니즘이라는 패러다임 아래 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로운, 모더니즘이라는 주류와 무관한 흐름이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 오프모던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사후적으로 내리는 지엽적이라는 평가의 다른 말에 불과한 걸까?

 

 

 

타틀린의 탑은 오프모던의 예시로서 등장한다. 오프모던적 건축. 빗겨나 있는 건축. 타틀린의 탑은 실제로 지어지지 않았다. 에펠탑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안티테제, 혁명의 아이콘으로 등장했지만 실존하지 못하고 종이 건축의 모델로 남겨졌다. 위의 사진은 다케히코 나가쿠 Takehiko Nagakura 감독의 영화 건설되지 않은 기념비들(1999)의 스틸이미지다. 이미지 속 타틀린의 탑은 싸늘한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에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멀리 보이는 바로크풍의 건물과 조화를 이루는 듯, 혁명의 위용을 뽐내듯 서 있다. 한편으로는 유령 같기도 하다. 러시아를 떠도는 아방가르드의 유령.

 

 

Week 2

“러시아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모순적인 나머지 의도치 않게 우리 모두가 기지를 발휘하게 된다. [...] 우리의 일그러진 길은 용감한 자들의 길이다. 하지만 달리 어쩌겠는가, 우리는 두 눈을 갖고 있으며, 충직한 졸병들이나 충실하게 한 길만 가는 왕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보임은 시클롭스키의 에세이 <기사 말의 행보>를 위와 같이 인용한다. 그렇다면, 오프모던은 태도다. 체스판 위의 기사 말(Knight)처럼 일정한 궤적을 따라가지 않는 행보. 보임의 또 다른 에세이 <오프모던의 거울>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말하자면, 오프모던은 이즘이 아니라 시각의 프리즘이다. 또한 그것은 화려한 부동산 개발의 폐허들과 새롭게 재발견된 국가 유산의 건설 현장으로 가득 찬 동시대의 풍경이 재배치되는 세계 속에서 시도되는 행위와 창조의 방식이다.” 오프모던이 하나의 양식이 아닌 태도와 관점, 방식이라면 그것은 실천의 문제다. 보임은 오프모던의 관점으로 타틀린의 탑과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재해석하는 실천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21세기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나는 어떻게 오프모던을 실천할 수 있는가?

 

 

Week 3

“인간은 랭보가 한때 꿈꾸었듯이 “완전히 현대적”일 필요가 없다. 오프모던적이 되어야 한다. 체스 게임에서 옆으로 움직이는 기사 말. 근대 프로젝트의 탐구되지 못한 모종의 잠재성들로의 우회.”

 

책 말미에 부록처럼 실린 <오프모던 선언문>의 한 구절이다. 여기서 보임은 선언한다. 인간은 오프모던적이어야 한다고. 이로써 우리는 지나간 근대의 역사 중 탐구되지 못하고, 맥락화되지 못한 것들로 돌아간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는 이미 종결된 사건이므로 만약이라는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제기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오프모던의 자세는 이와 정확히 반대다. 보임은 결코 실현된 적이 없지만, 어쩌면 실현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을 되살리는 일, ”만일 그랬다면what if의 모더니티의 추론적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정치적, 이론적 맥락들을 낯설게 보도록 한다.

 

 

Week 4

“우리가 사는 세계가 너무나 골때리기 때문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계라는 게 계속 이 모양 이 꼴이었나.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100은 아니다. 전부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세미나 마지막 시간, <오프모던의 건축>의 번역자 김수환 선생님께서 세미나에 방문해 주셨다. 우리는 그간 들었던 궁금증을 정리해 몇 개의 질문으로 전달해 드렸다. 마지막 질문은 이러했다. “타틀린의 탑과 이에 대한 보임의 글이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와닿을 수 있을까요?”

 

오프모던의 자세는 하나의 원인에 하나의 결과가 따라오는 세계관에 균열을 준다. 세상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다는, 생략되어 버린 어떤 역사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도 있었다는 인식을 준다. 마치 실제로 지어지지 않은 타틀린의 탑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 속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듯한 인식을. 세상은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교과서는 역사를 인과관계에 따라 순서대로 가르친다. 당대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역사는 평평하고 매끄럽다. 오프모던은 그러한 역사관에 반기를 든다. 역사의 흐름에는 수많은 갈래가 있었고,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를 제외한 많은 갈래는 생략되어 왔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식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세계관에도 영향을 준다.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이 가능성의 전부는 아니다. 세상이 골때릴, 이 흐름에서 빗겨나서상상해 보자. 다른 가능성을.

 

 

Post 세미나 : 생략된 장면들

20241, 지하철 4호선에서 내린다. 회색 알루미늄 패널들이 요동친다. 금속이 주는 온도감은 겨울에 더 차갑다. 곡선의 초현실적인 공간이 이어진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다. 어느 세계적인 건축가의 유작은 예상대로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다양한 전시와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화려하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이곳은 이런 공간이 아니었다고 한다. 여기서 타틀린의 탑과 생략된 역사를 떠올리는 건 무리일까. 혹은 그걸 오프모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첫 번째 장면. 2004. 시장 상인들이 분주하다. LP, 카세트플레이어, 불상 등 골동품이 즐비하다. 한 해 전 일요일 새벽, 공권력은 용역을 투입해 청계천의 노점을 철거했다. 청계천의 인도는 파헤쳐졌다. 그보다 한 해 전에는 청계천 노점상 단속으로 물건을 모두 빼앗긴 한 상인이 분신했다. 청계천에서 쫓겨난 상인들은 동대문 운동장을 세계적 풍물시장으로 육성, 발전시키겠다는 시장의 말을 믿고 동대문 운동장의 주차장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몇 해 후 동대문디자인파크의 계획이 발표됐다. 운동장 내의 상인들은 또 한 번의 퇴거 명령을 받았고, 그들은 다시 저항했다. 그러는 사이 동대문디자인파크의 국제 지명 설계 공모가 진행됐고, 서울 시장은 서울을 디자인 수도로 천명했다. 세계적인 건축가의 설계안이 당선되었다. 해체주의와 곡면의 건축으로 유명한 그는 역시나 놀랄 만큼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을 들고 왔다. 20084월의 어느 날엔 시청에서 고용한 용역이 노점상을 부수는 쇠파이프 소리가 동대문에 울렸다. 당시 지방에 살던 어렸던 나는 이런 장면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이곳은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이 매끄럽고 유려하다. 이런 공간에서 그날의 장면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다. 철학자 한병철이 지적했듯 신자유주의는 매끄러움으로 표상된다.

 

 

또 다른 장면. 타틀린의 탑은 유령이 되어 러시아 미술계를 떠돌았다. 한국 건축계에도 유령이 있다면 그건 DDP 설계 공모에서 2위로 낙선한 조성룡 건축가의 설계안이 아닐까. 시작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DDP는 완공 후에도 국내 최악의 현대건축물’ 5위를 차지했다. 많은 건축가가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하 하디드의 환유의 풍경을 비판했다. 동시에 조성룡의 설계안이 당선됐다면.’ 이라는 아쉬움을 남겼다. 조성룡도시건축의 설계안 친밀한 희망의 공간은 한 장의 조감도로 남아 한국 건축의 씁쓸한 사건을 상징했다. 당연하지만 지금의 DDP에 조성룡 설계안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다만 나는 이 차가운 금속덩이 위로 잔디가 넓게 깔린 환기의 공간을 오버랩하여 상상한다. 조성룡의 안은 압도적이기보다 친밀하다. 신개발주의의 기념비인 자하 하디드의 DDP와 반대로 조성룡의 설계안은 지형으로 녹아들어 동대문의 맥락에 자신을 나지막이 바친다. 주변의 컨텍스트(맥락)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에 주변의 컨텍스트가 그렇게 아름답냐라고 반문하는 한 건축가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 건축가들의 비판과 원망이 무색하게 DDP는 서울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고 이전과는 다른 역동성이 동대문에도 생겼다. 다만 나는 다시 묻고 싶다, 신개발주의를 찬양하며 들어선 DDP가 생략한 동대문의 컨텍스트가 그렇게도 추했느냐고. 자하 하디드의 DDP를 비판하고 조성룡의 설계안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한국 건축가들의 피해의식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는 과연 무엇을 놓쳤는가.

 

조선의 군사시설이 있던 곳에 일제는 경성운동장을 세웠다.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이, 동대문 운동장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그 자리엔 DDP가 서 있다. 경성운동장부터 동대문 운동장은 한국의 모더니즘을 상징했다. 서울 시장은 과거를 탈피한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의 건축을 그 자리에 세웠다. 국가 주도 개발의 시대가 저물고 더 민주적인, 더 자유로운, 매끄러운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 DDP가 지어지기까지 몇 해의 시간은 서울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그리고 역사는 신자유주의와 신개발주의라는 흐름으로 진행하듯 보인다. 이 순간 오프모던을 떠올린다. 정말 이러한 흐름이 당연한 걸까? 정답은 모르겠다. 다만 지금의 흐름이 전부는 아니라고 되뇐다. 여기까지 수많은 대안이 있었고 우리는 그걸 놓쳐왔을 뿐이라고. 세상은 얼마든지 다르게 흘러갈 수 있었다고. 2024, 시대는 또다시 우리에게 잠재성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에 역사는 어떤 장면들을 생략할 것인가. 아니, 우리는 어떤 장면을 선택할 것인가.

 

 

 

  스베틀라나 보임, 오프모던의 건축, 문학과지성사, 2023.

  서울역사박물관, 잘가, 동대문운동장 (석별가 1), 서울책방, 2014.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문학과지성사, 2016.

  리슨투더시티 박은선 편, 동대문디자인 파크의 은폐된 역사와 스타건축가, 리슨투더시티, 2013.

  최인기, 청계천 사람들, 삶과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청계천, 리슨투더시티, 2018.

  정석,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 효형출판, 2013.

  Kyoungwan Kim, Seunghyun Na, Janggun Lee, Sunhee Park, Jongjin Lee and Seungjin Park, 동대문운동장 공원화사업 - 조성룡, 월간 CONCEPT, 101, 8(2007): 30-31.

  지현, 사람과 삶을 담아내는 것이 문화도시이다, 문화과학, 53, 3(2008): 538-547.

  정승혜, 산업화시대 문화재의 보존 및 복원에 관한 연구 : DDP 설계경기 제출안을 중심으로, 석사학위 논문, 한양대학교, 2017.

  이봉수, 신개발주의 공약은 거대한 사기다, 경향신문, 202146,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4060300045

  강성만, 신개발주의<90년대 이후 개발주의>가 민주주의를 허물고 있다, 한겨레신문, 20071219,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258102.html

  셜록현준 유튜브 채널, 20231226일 검색, https://www.youtube.com/watch?v=R1F5LbffssM&ab_channel=%EC%85%9C%EB%A1%9D%ED%98%84%EC%A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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