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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우리 시대

정치와 탈근대 3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

번역: 연구공간 L 기획, 주현이승준 옮김

 

서문

「스피노자와 우리 시대

 

 

4. 살아있는 유물론이라는 대안

 

우리는 이제는 다른 도전과 만나기 위해서 스피노자의 사상에 대한 개체주의적 해석에서 다른 곳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야 한다. 즉 스피노자의 정치사상에 대한 정의를 존재론적으로 중립적인 지형으로, 말하자면 다시 한번 형이상학적으로 개체주의적인 지형으로 인도하려는 지극히 복잡하고 연결된 작용 쪽으로 말이다. ‘존재론에 맞서는 형이상학’.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스피노자의 사상을 파고들어 그의 존재론과 집중적으로 대면함으로써 개체주의적 스피노자를 구축(이것도 스피노자를 왜곡하는 하나의 방식이긴 하다)하기 보다는, “근대 사상일반에 의지함으로써 개체주의적 입장을 앞세운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비판적철학적개념적 입장을 피하면서 우리에게 관념의 역사의 문체로 [스피노자를] 역사화하는 백과사전적 프로필을 제시한다.

 

그 결과 우리는 개체주의적 스피노자라는 인물을 근대의 이상형으로 제공받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근대적인 인물이 된다. 즉 그는 근대 사상 내에서 혹은 그것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대안이 아니라, 근대 자체이다. 근대인은 단지 홉스와 헤겔만이 아니다. 스피노자도 근대인이다. 더군다나 그는 근대적이면서 전복적이다. 마거릿 제이컵[각주:1]과 조나단 이스라엘[각주:2]이 이를 잇는 작업을 했다. 그들은 탁월한 역사가들이지만 그들이 발 디딘 땅은 그들이 인식할 수 없는 지뢰로 가득하다. “근대의 형성에 관한 그들의 공유된 주장은 그들이 강력하게 주장한 가설의 휘장이다. [그들이 보기에] 스피노자의 철학은 급진적 계몽주의의 토대이고 스피노자주의는 계몽의 시대의 살아있는 구조를 대표한다. 불행히도 이러한 주제는 지지받지 못할 것이며, 또한 부분적으로는 거짓이다. 나는 여기서는 이 논쟁의 세부사항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로랑 보브가 엄격한 철학 문헌학의 관점에서 이것에 대해 호의적이면서도 가혹한 평론을 쓴 바 있기 때문이다.[각주:3] 또한 앙투안 라일티의 놀라운 분석은 간단히 말해 역사문헌학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했다사실상 허물어 버렸다.[각주:4] 내 입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스피노자주의는 실제로 급진적인 철학적 논쟁의 노선에 포함된다는 것인데, 이 노선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역사 내내 무신론자, 범신론자, 프리메이슨과 공화주의자들이 채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스피노자 철학이 제기한 문제가 아니다.

 

스피노자가 제기한 문제는 근대의 핵심에 민주주의 사상의 가능성이 존재하는지, 다중에 의한 통치라는 가설이 존재하는지, 공통적인 것의 제도화가 가능한지의 여부이다. 그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주권적 초월성의 주장과 모순되면서 내재성으로 귀결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혹은 윤리적인 것(특히 윤리-정치적인 것)을 신체들 안에, 욕망의 물질성 안에, 그리고 신체들의 마주침과 충돌의 흐름 안에 기초짓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 혹은 그것의 필연성의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를 고독에서 해방시키고 세계를 함께 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이 이러한 발전의 근거로 부과될 수 있는 방식의 문제이다.

 

 

스피노자 이전과 이후의 근대 역사에서 이런 유형의 추론이 간간이 단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스피노자적인 그러한 정치적 추론이 르네상스 위기에서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19세기 노동자 봉기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 동안 결코 지배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배적이었던 정치적 이성의 흐름은 홉스, 루소, 헤겔로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물론 우리는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개체주의자였으며 따라서 계약주의자였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이 기회주의자, 초월주의자, 변증법주의자였다는 것은 그들이 주권을 근거짓고자 노력한 것만큼이나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부르주아적 개체주의와 주권 권력의 종합 위에 근대가 구축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데카르트는 그 누구보다도 이 이분법의 중요성을 조명하면서도 동시에 이 모순을 세상과 격리된 신학의 벽 안에 합리적으로 가둬두었다.[각주:5] 스피노자는 이 변증법을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그 바깥에 있다. 그러나 그가 근대 바깥에 있는 것은 그가 근대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급진적 개체주의는 그에게는 낯선 것이다. 그가 계약주의에서 경멸하는 것이 그가 계몽주의의 유물론에서 경멸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유물론은 18세기 사상의 저 지독한 개체주의적기계론적물리적 유물론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유물론은 베이컨의 유물론이 지닌 새롭고 생생한 힘이나 마키아벨리나 갈릴레오의 유물론(여전히 인본주의적이긴 하지만)에 훨씬 더 가깝다. 그것이 전부이지 그 이상의 것은 없다. 스피노자는 근대의 대안이다. 그가 근대 안에 있는 것은 오로지 근대가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가치들근대는 자기 자신의 토대에서 이 가치들을 배제했기 때문이다에 시선을 두려고 자신을 훈련시키려 할 때뿐이다.

 

바로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스피노자의 유물론이 가진 문제는 그것이 계몽주의 유물론의 차원과 인물을 훨씬 뛰어넘지만(이 관점에서 보면 디드로만이 진정으로 스피노자적이다), 명확하게 접근된 적은 전혀 없다는 데 있다. 아니 정반대다. 대조되는 두 항의 자리가 뒤바뀌고 계몽주의의 유물론이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스피노자의 내재주의에 유물론적 특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주저함이 있기(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때문이다. 마치 유물론은 18세기(확대하면 19세기까지)에 고유한, 논쟁적이고 기계적인 특수한 버전의 유물론과는 절대 다를 수 없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특수한 유물론(여기서 나는 구체적으로는 19세기 버전의 유물론을 생각하고 있다)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종교적인 논쟁의 평민적 산물이거나 아니면 과학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려는 시도의 끈질기게 살아남은 잔여물이다. 우리의 출발점이 그런 식으로 터무니없다면 내재주의와 유물론을 결합시킬 가능성을 상상하기란 당연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물활론이나 존재론은 비록 원시적이긴 하지만 이러한 접합[내재주의와 유물론]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에피쿠로스에서 루크레티우스로 이르는 길은 이러한 사유의 축을 따라 일어나지 않았던가? 또는 다시금 우리는 파리와 파도바에서의 후기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그리고 바로 근대 사상의 핵심에 있는 유럽 인본주의의 성숙에서, 정확히 이러한 활력이 넘치는 유물론적 내재주의가 삶의 새로운 역능에 대한 해석을 성취하려고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존재론의 이러한 비밀스런 흐름으로부터 뭔가를 끌어내려는 스피노자의 노력(근대를 근거지우지만 근대 안에서는 스스로를 완전히 실현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 바로크 양식(그리고 절대주의적 주권)의 승리에 맞서 르네상스(및 인본주의)의 실패 안에서조차 그 출구를 방어하는 그의 능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체주의에 반대하여) 특이성과 공동체가 접합된 자유의 종교에 대한 그의 제안, 이 모든 것이 스피노자의 내재주의와 유물론을 근대의 구조에 끼워 넣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그것을 탈근대 쪽으로 열리게 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1960-1970년대에 우리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심대한 위기의 시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의한 자기비판의 시대를 겪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반성의 스피노자적 기원을 재발견할 수도 있다. 간단한 사례가 하나 있다.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발전에서 근본적 휴지기(休止期)”를 상정했을 때, 그는 당시로서는 성숙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방법론과 초기의 인간주의를 단절시키는 해법이 스피노자의 언어로 해석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 그는 자신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전회의 가장 급진적인 국면에서 이러한 종류의 것을 제시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유물론을 교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만든다.[각주:6]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이러한 암시는 놀랍도록 강력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스피노자의 내재주의가 우리를 결국 모든 형태의 변증법에서, 모든 목적론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점, 그의 유물론은 협소하지 않고, 우발적이며 존재의 잠재성(virtuality)에 개방적이라는 점, 내재주의와 유물론의 접합을 공언한 이후에는 인식은 저항에 의거하고 행복은 다중의 합리적 열정에 의거할 것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인류해방을 위한 투쟁의 장면이 확대되고 비판이 탈근대적 국면에 접어든 자본주의 발전(자본이 실질적으로 사회를 포섭하는 시기, 자본주의가 제국적이고 탈식민지적 국면에 들어간 시기)에 대한 비판이 될 때, 스피노자의 매트릭스는 마르크스주의적 휴지기를 명백하게 기각시킨다. 여기서 분명하게 표명되는 것은 존재론적 장치의 유물론, 주체성 생산의 유물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해방에서 시작하는, 반목적론적이면서 내재주의적인 차이의 사유를 구축한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역사적 이행이다. 바로 이 순간 스피노자의 새로운 유물론은 그 열매를 맺기 시작하며, 바로 여기서 그것은 우리에게 실체의 접합을 통해 양태들의 생산성을 즉 각각의 양태들이 드러내는 특이하고 혁명적인 주름을 보여준다.

 

요약해보자. 개체주의를 스피노자 사상의 전면에 내세우려는 분석이 스피노자를 근대의 광범한 주류 내에 위치시킬 수 없는 것처럼, 다소간 목적론적인 관념의 역사에서 접근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17세기에 살았고 따라서 근대 시기에 살았던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것은 연대기적 의미에서만 그렇다. 스피노자는 실제로 근대적 사유의 모든 패러다임과 대립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그는 그 패러다임에 맞서 자신의 존재론을 세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근대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즉 그의 세기 안에서의 단절을 대표한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의 우리를 탈근대로부터 바라보며 손짓을 보낸다. 개체의 역능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과 사랑의 역능으로부터 말이다.

 

 

5. 긍정의 존재론을 두려워하는 이는 누구인가?

 

스피노자의 정치적 존재론이 지닌 구축적인 측면이 확고하게 진술됨에 따라 (그리고 이 구축적 측면들의 근본적으로 반-개체주의적인 성향이 강조됨에 따라) 이제 우리는 이러한 존재론을 향해, 즉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존재관에 반대해 어떻게 일정량의 맞불이 켜지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맞불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그리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옹호한) 스피노자에 대한 독해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 르네상스의 이론적정치적 효과에 반응한 것이었다.

 

첫 번째 반격은 이렇다. [스피노자를] 플라톤화하려는 시도, 이것은 가장 화가 많은 부류의 신학자들이 스피노자의 실체를 보잘 것 없고, 미분화되고, 접합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빌어먹을 유대인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캠페인에서 부단히 연습했던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유형의 독해를 반어적 재미를 주며 무너뜨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와 동일한 신학적 색조로 비명을 내지르면서, 이러한 해석적 입장의 최후의 승리자로 자처하는 알랭 바디우가 있다.[각주:7] 초창기 주체이론(1982)에서 바디우는 알튀세르와 들뢰즈를 동일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일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들이 스피노자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스승이라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가 스피노자의 대담함에 어떤 도덕적 가치를 부여했다면, 그것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냉소적인 방식으로 스피노자와 말브랑슈를 저속하게 비교하는 일을 직접적으로 설정할 수 있을 때뿐이다. 바디우의 글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1982년경에는 말브랑슈[와 스피노자]를 잘 알고 있었다고 가정하게 만들며, 그래서 우리도 그럴 거라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1968년 이후 그리고 1968년의 메아리로 생산된 스피노자에 대한 독해들이 그에게는 저 멀리 떨어진 은하계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그것들을 한참 뒤에야 읽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는 들뢰즈: 존재의 함성(1997)에서 여전히 들뢰즈가 읽어낸 스피노자를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한다(그가 들뢰즈를 마오주의적 영향권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바디우는 결국 자신의 일시적 존재론(1998)에서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자세히 해명한다. 그는 먼저 사건이 이질적인 다양성에 열려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 다음, 들뢰즈가 스피노자에 대한 독해를 하면서 되기 형태의 (비합리적) 존재론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하고, 또한 스피노자를 스스로를 자기 안에 가둬두는 폐쇄된 존재론을 발전시킨다는 이유로 비난한다. 바디우의 사건의 존재론이 어떻게 모든 유물론적 참고문헌을 회피하면서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오로지 신비주의적 단언 즉 크레도 퀴아 압수르둠’[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만이 설명할 수 있는로 도피하는지를 주목하는 일은 흥미롭다. 이것은 말브랑슈의 귀환이 아니던가.

 

 

 

그리고 점점 나아진다. 어떤 이탈리아 철학자(스피노자에게 절반은 플라톤적으로, 절반은 하이데거적으로 접근하는)는 신과 무()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는 극단적 강요를 받는다고 느낀다. 그렇게 엠마누엘레 세베리노(그가 그 철학자다)는 스피노자가 종교의 실체에서 신성을 배제할 때 그는 불가피하게 무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각주:8] 누군가는 그 이유를 감히 알고 싶어질 것이다. 세베리노는 자연스럽게 스피노자의 철학이 예수 그리스도 이래로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대안적인 체계를 대표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한다. 그러나 반동적인 철학사가들이 이 강력한 대안적 급진성을 중립화하기 위해 종종 그랬듯, 그는 스피노자의 내재성이 무를 향하는 경향이 있고, 또 생산의 절대자가 파괴의 절대자와 혼동되는 것처럼 보이며, 그래서 이 대립적 충동은 결정적이면서도 가장 심각하게도 이 세상의 사물들이 무라는 확신을 공유한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중립화의 노력이 도달한 가장 정교한 형태는 헤겔의 것일 텐데, 그는 우리는 스피노자가 되지 않고는 철학을 할 수 없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으로, 이것은 절대자로의 몰입만이 그리고 절대자 자체가 철학으로의 문을 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즉시 이렇게 덧붙인다. 스피노자는 삼위일체론자도 변증법론자도 아닌 유대인이기에 이러한 절대적 성격을 발전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더구나 그는 그렇게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는 불쌍한 폐결핵 환자일 뿐이라고. 농담 한번 고약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논쟁은 계속 반복되고 있으며, 또한 존재 속에서 죽음을 향한 경향을 보는 이들은 존재와 비존재를 혼동하면서 이 저자가 말한 자유인은 죽음을 가장 적게 생각한다.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의 숙고이다[각주:9]에 대한 비난을 자랑스레 떠벌린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사물을 참되게 인식하는 한 신의 무한한 지성의 일부임을 덧붙일 수 있다.”[각주:10] 따라서 그것[우리의 정신]은 신의 역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낸 이러한 자연, 이러한 물질은 그러한 역능을 가지고 있다.

 

논의를 이어가 보자. 현재 우리의 지평은 스피노자의 역능이 발현되는 역사이기 때문에 스피노자의 유물론이 오늘날 무엇일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에 대해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우선 그것이 관성적/비활성적 객체의 유물론이 아닌 것은 그것이 필연적인 인과관계에서 발생하는 유물론이 아닌 것과 같다. 그와는 반대로 스피노자의 유물론은 능동적 차이의 유물론이자 주체적 장치의 유물론이다. 즉 실체를 구성하는 양태들의 활동을 통해 물질을 생산력으로 단언하는 유물론이다. 1968년 이래로 이러한 해석 노선이 스피노자 독해의 전 영역에 스며들었고, 그래서 오늘날(또는 미래에) 누군가가 그가 성취한 것의 영향력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그가 스피노자주의자일 수 있는지말하자면 그가 스피노자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것[스피노자주의]은 실체를 일자(the One)로 보려는 경향과 대립해 있으며, 더 일반적으로는 스피노자의 존재가 가진 역능을 중립화하려는 시도와는 반대편에 있다. 이것이 내가 이 책 2장의 스피노자와 하이데거에 관한 글에서 쓰고자 했던 바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디우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스피노자의 반대편에 그렇게 서 있는 그는 반-유물론자일 수 밖에 없다!

 

내가 특히 소중히 여기는 세속적 유물론자인 스피노자에 대한 공격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측면이 있는데,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전의 공격보다 더 세련되고 그만큼 위험하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존재의 생산성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피노자에게 있어 내적 접합, 유동성의 정도, 존재의 필연적 규정 내에서의 대안 등이 확실히 고려된다. 그들이 반박하는 것은 스피노자주의의 존재론적 지평을 그 기반으로부터, 혹은 더 정확히는 아래로부터 횡단할 바로 그 가능성이다.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내가 염두에 두는 저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된 일은 스피노자의 완전한 절대 민주주의’(democratia omnino absoluta) 기획에 대한 강력한 해석 일체를 비판하는 데 있다.[각주:11] 그들이 관심을 가진 이러한 관점을 채택하는 일은 실제로 스피노자의 유물론을 역사철학으로 변형시키는 것과 같다. 이런 식의 비판은 몇 가지 축에 의존한다. 하나는 스피노자 해석의 새로운 조류, 특히 들뢰즈의 해석이 추정컨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역동적이고 반위계적인 것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기하학적 방법(mos geometricus)을 사용한다는 주장이다. 다른 것은 푸코의 개념적 어휘가 포텐티아와 포테스타스의 관계를 새로운 이항적 용어인 생명정치적 활동/생명권력의 행사로 바꾸려고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존재론적으로 창조적인) 포텐티아와 (기생적인) 포테스타스 사이에 절대적 이율배반이 있다고 묘사된다. 비판자들이 정치적인 관점에서(그리고 들뢰즈와 나와 관련해서는 우리의 스피노자 해석에 기초해) 들뢰즈, 푸코 그리고 나 자신의 것에서 나타나는 사유-세계의 이론적 수렴에 주목하는 것은 옳지만, 그와 정확히 동일한 이유로 포텐티아/포테스타스 관계를 이율배반적 한계로 밀어붙이는 것은 오류이다. 노동과 자본처럼 영원히 공존하는 삶정치와 삶권력의 이분법은 들뢰즈에게서는 열려 있고 카오스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푸코에게서는 계보학적 방식으로 구축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역능의 축적이 될 수 있는 다른 뭔가가 있는가? 단지 포테스타스 안에서, 포테스타스에 맞서는 포텐티아의 활동만이 있을 뿐이다.

 

제국다중그리고 특히 최근에 발간한 공통체에서 마이클 하트와 나는 포텐티아와 포테스타스, 삶정치와 삶권력의 상호 작용 및 분리가 의미하는 바를 강조한 바 있다. 우리가 했던 것은 미국의 실용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습관과 부르디외가 말한 의미의 아비투스를 반복함으로써 포텐티아와 포테스타스가 맺는 관계 및 그들 간의 차이가 지닌 (내적인) 구성의 단계를 되짚는 것이었다. 역능의 두 가지 효과(즉 두 가지 특성)가 지닌 이율배반은 존재론적 이원론으로 규정될 수 없다. 그것은 자기생산을 멈추지 않는 [역능의] 대조이자,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지속적으로 해소되며 또 다른 수준에서 즉시 재형성되는 [역능의] 갈등이며, 코나투스에 기초해 뻗어나가 쿠피디타스를 횡단하고 아모르의 표현에 도달하는 궤적의 난관과 장애물로서 출현한 윤리적 긴장이다. 포텐티아와 포테스타스의 관계가 이후에 비대칭적인 것으로 인식된다면, 그것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쿠피디타스로서의 포텐티아가 결코 나빠질 수 없고 늘 초과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나쁜 것은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포텐티아는 공통적인 것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 포텐티아는 실제로 공통적인 것의 방향에서 열정의 축적을 지시한다. 포텐티아가 공통적인 것을 위한 투쟁을 수행하고 그것을 합리성에 대한 사랑의 의식으로 이끄는 것은 주체성의 항구적 생산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비판이 의존하는 둘째 축은 우리가 스피노자의 역능의 발전에 가치를 매기는 방식에서 법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요소가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에 반대하는 저자들은 절대 민주주의가 우리의 용어로 세워지게 놔둔다면 그것이 도달하는 함의는 개인과 사회 세력을 갈등에 빠뜨리고 스피노자의 윤리적 지형을 특징짓는 현재 진행 중인 과정을 부당하게 중단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제도의 법적 유효성이 스피노자에게서는 불분명한 품행들의 품행으로만 특징지어질 수 없으며, 또한 정치적 구성과 법적 체계가 맺는 관계가 정적인 관계 내에서 혹은 달리 말해 기술적 유효성의 조건 하에서 정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루만이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구성은 늘 움직이는 것이지 어떤 결과나 구성권력”, 법의 항구적 원천이 아니다. 따라서 법 체계는 오로지 구성적 역능의 연속적 행동을 통해서만 유효한 것이 된다.

 

스피노자의 가장 위대한 해석가 중 한 사람이자 아마도 탈근대 스피노자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궤적에 대한 몇 가지 소견으로 마무리하자. 마트롱은 문헌학적 기교의 위대한 표본인 것이 확실한 마르샬 게루의 제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렇게 지적 계보를 따지는 건 무의미한데, 마트롱의 문헌학이 늘 정치적 영혼을 갖고 있었고, 또 그 덕분에 근대철학에서 창출된 정치적 분기점을 스피노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1968년 이후 철학에서도 동일한 분기점이 나타나는데, 당시는 스피노자주의가 하이데거주의에 맞서 새롭게 꽃을 피워, 철학에서는 하이데거주의적 신비주의에, 정치학에서는 슈미트주의적 냉소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적 현실주의를 강조할 수 있게 되었던 시기다. 1970년대에 스피노자를 재발견하는 일이 지닌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해보자. 당시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 작별을 고하는 순간이었으며, 이때 스피노자주의가 위기(krisis)의 사유의 모든 변종들, 강한사유와 약한사유를 거부할 수 있게 했다.[각주:12] 질서를 회복하고 자본주의의 경제적 무기의 무례한 행사에 복종해야 할 필요성을 고통의 전율로 찬양하는 대신에, 치열한 투쟁의 시대에 대한 기억이 허우적거릴 수 있는 존재관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바로 스피노자주의라는 지형 위에서 혁명적 관점을 재건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마트롱과 그의 제자들이 가르쳐주었듯이,[각주:13] 존재는 슬픔의 파괴를 위한 수단이고 욕망은 자유와 기쁨의 집단적 구축을 위한 장치이며, “절대 민주주의즉 투쟁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의 유일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6. 오늘날 스피노자는 어떻게 사용되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이미 일부 응답했다. 이 응답이 더 세심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본질적으로 존재론과 정치학으로서 오늘날의 유물론은 현실 사회주의라는 요동치는 난파선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붕괴는 소비에트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독단적 경거망동에 의해서만 준비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훨씬 더 강렬하게) 그것의 서구적 판본인 비판적 유물론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때 내가 말하는 비판적 유물론은 프랑크푸르트학파, 즉 소외와 물화를 총체화하는 학파, 자본 아래로의 사회의 실재적 포섭을 식별해내지 못하는 학파의 비판적 유물론이며, 어쩌면 테러라는 끔찍한 대안을 빼면 대안이 없는 관점, 이른바 이성의 비관주의의 승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각주:14] [그들이 보기에] 자본주의적 권력의 진보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유 시장, 제국의 세계화, 복지국가라는 보장자(gurantee)의 파괴 등이 스스로를 비판적이라고 자부하는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의 산물이다. (이것은 곧바로 부르주아 정치이론의 선택을 받았다.) 역설은 이 심연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유일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하이데거적 목자의 선전이나 일련의 다른 신비주의적 기대가 제공한 지침뿐이라는 데에 있다. 여러 포스트구조주의 철학들은 자본 아래 포섭된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틈새를 찾았고, 기껏해야 우리에게 벤야민식 절망의 반복을 제공했다. 아니 최악의 경우 그것은 쇼아(Shoah)[홀로코스트를 나타내는 히브리어-옮긴이] 공포의 반복이라는 유령을 휘둘러 댔다. 그렇다면 이 악몽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들뢰즈와 가타리 사이, 다른 한편으로는 데리다와 푸코 사이에 탈출구가 있었다. 푸코에게서는 이 출구가 삶정치의 조직 내에서 주체성 생산의 새로운 지평의 형태를 취했다.[각주:15] 신체, 삶정치, 주체성. 이것들에서 우리는 코나투스, 양태적 지평을 가진 아페티투스, 쿠피디타스, 아모르의 현대적 등가물을 본다. 바로 이것들이 절대적 자본주의라는 절망적 일원론을 벗어던지고, 다시 스피노자가 되살아나 철학적 단계의 최전선에서 저 살인적인 세계와 단절할 가능성을 묘사하는 곳이다. 마트롱이 이러한 분석의 맥락에 자신의 입장을 취하기에 앞서, 그는 이미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에서 제도의 생산, 국가의 형성 그리고 인간 협력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규정 등에서 정서의 역할에 대해 독창적이고 놀랍도록 심오한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는 이 도식을 서양 역사의 함수로 발전시켰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그리스도와 무지자들의 구원(1971)에서 마트롱은 스피노자 연구에 불을 밝히는 새로운 필라멘트를 켰다.[각주:16] 이 필라멘트는 샹탈 자케가 멋지게 기술했듯이, “시간, 지속, 영원에 관한 것, 역능과 행동에 관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몸과 마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각주:17] 이 각각의 주제들은, 마트롱과 그의 제자들이 수행한 엄청난 조사의 결과로서 그 자체로도 긴 주석을 달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나는 여기서는 유물론이 스피노자주의의 논리적존재론적 렌즈 아래 놓일 때 어떻게 최소한 그것의 전통적인 변증법적 지위를 포기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반대로 유물론이 어떻게 구성적주체적 기획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지만을 간단히 강조하고 싶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스스로를 우리 시대,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계급투쟁의 새로운 형상으로 만들어 낸다. 이러한 전회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끊임없이 다시 출현하는 신학-정치적 차원에 맞서 그리고 정치를 주권으로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가 말했듯 치안으로 반복적으로 다시 제안하는 것(이는 물론 우파로부터 나오지만, 또한 최근에는 점점 더 좌파로부터 나온다)에 맞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세우기 때문이다.[각주:18] 자유의 정치적 지평을 구축하고 싶다면, 이제는 이러한 이론적 환영을 끝장내야 한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다. 이러한 지형 위에서 우리는 어떻게 스피노자를 따를 것인가? 이러한 생산적 관계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다중의 편에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지닌 긍정성을 누가 보장하는가? 다중이 민주주의를 생산하는 대신 단지 떼거리, 순전한 평민적 무질서의 고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곳은 그람시와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인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죄가 범해지는 곳이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이 특정한 저자들(만프레드 발터에서 에티엔 발리바르까지)[각주:19]이 다중 앞에 제시한 선택지스스로가 떼거리라고 자임하거나 아니면 진정한 해방운동이라고 자임하거나는 우리가 그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윤리적 지침으로 받아들일 경우에는 일종의 철학적 진흙탕에 빠지게 만든다. 다중이 스스로를 해방운동이 아니라 떼거리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선험적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스피노자가 불합리하고 살인적인 대중을 최후의 야만인들’[ultimi barbarorum]이라고 비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곧이어서 야만인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대중의 공포라고 명시한다. 원하는 바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다중 자신에게 달려있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다중 쪽으로 돌리기에 앞서 악당처럼 행동하는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했다. 더욱이 우리가 이 선택지를 실천적 관점보다는 이론적 관점에서 검토한다면,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실제로는 단지 초월성의 제안, 즉 스피노자 존재론에 가한 역공에 불과하다. 그들은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는 척하지만 다시 한번 우리에게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로서 홉스의 주권에의 양도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제시된 선택지의 실제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일은 매우 쉽다. 그것은 대체로는 법 실증주의다. 그리고 법 실증주의는 스피노자가 우리를 초대한 윤리적 실험에 가깝기보다는 헤겔주의나 실증주의의 역사철학(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찬양하는 일에 참여하는 한에서)에 훨씬 더 가깝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유의 대장정의 보장자는 유물론과의 더 깊은 겨루기를 통해, 즉 노동생산기술의 변형 및 정치적 인간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효과들을 통해 출현할 수 있다.

 

나는 실제로 주체성 생산에 관해 매우 구체적이고 또 엄격하게 내재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할 때 굳이 역사철학에 관해 얘기할 필요가 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러한 주체성 생산은 충분히 근거지어져 있고 물질적으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실제로 그것은 때때로 발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실존의 사회적 조건이 우리에게 이러한 현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다중의 이론(그리고 결국 다중이 자유의 대장정을 이뤄낼 것이라고 보는 이론)은 물질문명의 발전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방식으로 제시된 것은 착취에 맞서 투쟁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라는 대안이다. 우리의 주장이 유물론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덧붙여야 할 것은, 속물적이지 않은 모든 철학, 이데올로기적 침묵에 완전히 질식되지 않은 철학은 스피노자가 의도했듯이 피억압자의 편에 설지 아니면 압제자의 편에 설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람시가 주장한 이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는 해당 문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자.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오로지 이성의 낙관주의”(그리고 어쩌면 때로는 특정한 의지의 비관주의”)만이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나를 비판하는 이들의 마지막 주장을 살펴보자. 그들 중 일부는 절대 민주주의를 향한 이러한 긴장이 실제로 다른 정치신학을 덮기 위한 망토에 지나지 않는지 여부를 궁금해하는 척한다. 비판자들은 이렇게 지적한다. <네그리와 그의 친구들은 어쨌든 다중은 문제가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 자신의 좋은발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 다시 말해 다중이 ()”에 다가갈 것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 마주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러분 절대민주주의를, 더 이상 정부 형태가 아닌 이들 만인에 의한 만인의 자유의 경영 자체인 그러한 민주주의를 선택하십시오. 비판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 좋다. 그러나 정치가 주권 없이 생각할 수 없기에 네그리가 절대 민주주의(그리고 민주적 다중)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분명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은 실제로 의지적이거나 미리 결정된 해답을 결코 찾을 수 없는 끝이 없는 갈등의 관점이다. <네그리는 인류의 집단적 해방을 위해 유토피아적이고 이용할 수 없는 존재론적 보장자에 손 내밀고 있지 않은가? 네그리가 퍼뜨리고 있는 것은 그저 소박하고 단순한 정치신학에 불과한 것 아닌가?>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왜곡된 상상에 애써 응답하는 것은 거의 가치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해 보겠다. 그렇다면 정치신학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단 하나의 정치신학만을 알고 있는데, 그 신학에는 대칭적인 양극단에 장 보댕과 스탈린이 각각 서 있고, 그 사이 어느 틈에 칼 슈미트가 자리를 잡고 있다. 정치신학은 집단적 정치질서가 일자, 지상의 신에게서 벗어날 모든 가능성을 부인한다. 바로 그것이 정치신학이 의미하는 바의 서구적 규정인데, 그것은 가톨릭, 사회주의 및 파시즘 등의 변종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와 정반대로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 이론은 주권이론 및 일자의 통치이론들의 고전적 삼권분립과 깨끗이 단절하는 새로운 정치형태를 발명하려는 시도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절대자가 자유로운 특이성들의 존재론적 조직이라면, 권력-포테스타스는 특이성들의 행위를 그들의 해방에의 추구로 제한하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적이며, 실제로도 그는 그렇게 주장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나는 오늘날 포테스타스에 도전하고 자유의 긍정에서 행동하려는 사회운동들은 스피노자의 명제를 문자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그러한 명제에 신학적자격을 부여하고 싶고 그래서 조롱받을 각오가 섰다면 그렇게 하시라. 그러나 적어도 동시에 스피노자에게 진정한 자비를 베푸는 척하지는 말자. 스피노자의 사상은 그것이 지닌 돌이킬 수 없고 전복적이며 저주받은 성격으로 인해 신학적 타협에 의한 복권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현실주의라고 불리는 것의 모호함에 대해 한두 마디하고 끝맺자. 정치학이 이른바 정치적 현실주의의 지평 내에서조차 끊임없는 개인 간 갈등을 규제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 해도, 왜 이 갈등의 지형은 그토록 밋밋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는가? 그 지형에서 벌어지는 해방적 긴장은 왜 그토록 급격하게 맥이 빠지는가? 자유를 위한 투쟁들이 새로운 주체성과 인간학적 변신을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왜 기각되는가? 마키아벨리는 그 자신의 인본주의적 현실주의로 늘 이러한 긍정적 전망을 유지했다.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 활동을 보여주었다. 푸코는 특히 그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 중 일부에서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생산과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포텐티아 이론이 진단적이고, 비판적이며, 설명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스피노자주의로부터 그것의 본질인 쿠피디타스의 이론, 합리적 아모르의 이론, 자유와 공통적인 것의 이론을 빼앗는 것이다.

 

 

여기에 모아놓은 네 편의 글은 내가 전복적 스피노자(1994) 이후에 쓴 글들 중에서 선별된 것으로, 내가 보기에 이 글들이 앞서 간략히 그려낸 해석적 테제를 뒷받침하는 데 특히 잘 맞기 때문이다.

 

1장은 2009627일 네덜란드 라인스부르크의 <스피노자의 집>(Spinozahuis)에서 한 강의록이다. 그 배경이 스피노자 학회에서 개최한 축하 행사였기에 나는 스피노자의 별종성이 그의 사후에 겪은 운명에 대해 논했는데, 이는 후기 근대 사상과 오늘날의 시대에서 그의 별종성이 가진 비판적이고 전복적인 함의를 끌어내고 그 속에서 현재의 철학에 대한 일정한 기대를 읽어내려고 시도한다.

 

2장은 2006930일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스피노자-게젤샤프트> 9차 국제회의에서 발표한 글이다. 이 글의 목적은 하이데거의 시간의 무능과 모순되는 스피노자의 역능의 시간에 찬미를 보내고 새로운 스피노자의 탈근대 시간의 구성이라는 가설을 강조하는 데 있다. 탈근대 시대의 새로운 스피노자의 구성이라는 가설을 강조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독자인 니체가 행한 역할은 하이데거주의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적 구성을 정의한 데에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3장은 2007531예루살렘 스피노자 연구소가 주최한 국제 컨퍼런스 <사회사상가이자 정치사상가로서의 스피노자>에서 발표한 글이다. 전체 주제가 절대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나는 민주주의의 일원론적 성격, 그것의 내재적 발생의 강도를 강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및 여타 다른 곳에서 민주주의 구성의 절대적 성격을 신학적 용어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신정론적인 용어로 해석하는 스피노자 주석가를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들과는 반대로 나는 스피노자주의에서 역사와의 관계가 민주주의 개념에 깊이를 부여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4장은 200549파리 8대학에서 열린 <스피노자와 사회과학> 콜로키움에 제출한 글이다. 이 글은 스피노자 사상에서의 움직임이 사회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고독의 거부에서 다중의 구축으로, 그리하여 공통적인 것의 긍정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의 다중-만들기[faire-multitude]로 상승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구체화시킨다. 그 목표는 스피노자의 별종성이 어떻게 우리의 사회적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스스로를 규범화하지 않고도 민주주의 정치에 지속적인 자양분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 다음 회에서 1장 "스피노자:내재성과 민주주의의 이단아" 시작

 

  1. Margaret C. Jacob, The Radical Enlightenment: Pantheists, Freemasons, and Republicans, London-Boston: Allen and Unwin, 1981; second edition: Morristown: The Temple Publishers, 2003. [본문으로]
  2. Jonathan I. Israel,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본문으로]
  3. 이에 대해서는 Catherine Secrétan, Tristan Dagron, and Laurent Bove, eds., Qu’est-ce que les Lumières “radicales”?, Paris: Amsterdam, 2007를 보라. [본문으로]
  4. Antoine Lilti, “Comment écrit-on l’histoire intellectuelle des Lumières? Spinozisme, radicalisme et philosophie”, in Annales HSS, 64th year, no. 1, 2009, pp. 171-206. [본문으로]
  5. 이에 대해서는 정치적 데카르트영어판 서문을 보라. [본문으로]
  6. Louis Althusser, “L’unique tradition matérialiste”, Lignes 18, 1993, pp. 71-119. [한글본] 루이 알튀세르,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 철학과 맑스주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백승욱서관모 옮김, 중원문화, 2017. [본문으로]
  7. 이에 대해서는 Alain Badiou, Théorie du sujet, Paris: Le Seuil, 1982; Badiou, Deleuze, Paris: Hachette, 1997; Badiou, Theory of the Subject, trans. Bruno Bosteels, New York: Continuum, 2009. [한글본] 알랭 바디우, 들뢰즈: 존재의 함성,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1; Badiou, Court traité d’ontologie transitoire, Paris: Le Seuil, 1998. [한글본] 알랭 바디우, 일시적 존재론,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18를 보라. [본문으로]
  8. Emanuele Severino, “Spinoza, Dio, e il Nulla”, Corriere della Sera, 30 June 2007. [본문으로]
  9. 스피노자, 에티카, 4부 정리 67. [본문으로]
  10. 스피노자, 에티카, 2부 정리 43 주석. [본문으로]
  11. 이에 대해서는 Étienne Balibar, “Potentia multitudinis, quae una veluti mente ducitur”, in Ethik, Recht, und Politik bei Spinoza, ed. Marcel Senn and Manfred Walther, Zurich: Schulthess, 2001, pp. 105-137를 보라. [본문으로]
  12. 이에 대해서는 가령 Massimo Cacciari, Krisis, Milan: Feltrinelli, 1976를 보라. [본문으로]
  13. 이에 대해서는 Pierre-François Moreau, Spinoza: L’expérience et l’éternité, Paris: PUF, 1994 [한글본]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스피노자, 류종렬 옮김, 다른세상, 2008과 앞서 인용한 로랑 보브의 글을 보라. [본문으로]
  14. 내 생각에 조르조 아감벤과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는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분명하게 이러한 프랑크푸르트 혈통의 계승을 대표한다. Giorgio Agamben,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trans. Daniel Heller-Roaze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한글본]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이 책은 1995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Roberto Esposito, Bìos: Biopolitics and Philosophy, trans. Timothy Campbell,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8.(이 책은 2004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15.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Paris: Gallimard, 1994, 그 중에서도 특히 3권과 4권을 참고하고, 또한 1970년대 후반에 시작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록 역시 참고하라. [본문으로]
  16. Alexandre Matheron, Le Christ et le salut des Ignorants chez Spinoza, Paris: Éditions Aubier-Montaigne, 1971. [본문으로]
  17. 이에 대해서는 Chantal Jacquet, Sub specie aeternitatis: Étude des concepts de temps, durée et éternité chez Spinoza, Paris: Kimé, 1997과 보다 최근에 나온 Jacquet, Les Expressions de la puissance d’agir chez Spinoza, Paris: Presses de la Sorbonne, 2005를 보라. [본문으로]
  18. Jacques Rancière, 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 trans. Julie Rose,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 [한글본]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 2015. (이 책은 1995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19. Étienne Balibar, “Spinoza: la crainte des masses”, in Spinoza nel 350º anniversario dalla nascita, ed. Emilia Giancotti, Naples: Bibliopolis, 1985, pp. 293-320. [한글본]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 ()오웰: 대중들의 공포, 대중들의 공포: 맑스 전과 후의 정치와 철학, 서관모최원 옮김, 도서출판b, 200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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