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생운동 : Theoractical Moments
고준우 | 고려대 학생 활동가 4년차
들어가며
“모든 사회적 삶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유도하는 모든 신비는 인간의 실천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개념적 파악 속에서 그 합리적 해결책을 찾아낸다.”
-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8번
왜?
경계인. 나는 세 가지 경계 위에 서있다. 하나는 소속의 경계다. 지금껏 운동을 하면서 다양한 운동단체에 소속된 활동가들과 함께해왔지만 정작 나 자신은 당론이나 강령을 통해 운동방향을 공유하는 정치조직인 정당이나 운동단체에 소속되었던 적이 없었다. 기조와 내규가 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그 영향력은 덜한 학회나 학생회 조직에 소속된 경험이 전부였다. 다른 하나는 활동의 경계다. 비록 모호한 구분이지만 정치적 활동을 이론의 영역과 실천의 영역으로 나눌 때, 난 연구자라기에는 실천에 더 가까웠고 활동가라기에는 이론에 더 가까웠다. 마지막 하나는 시기적 경계다. 나는 지금 대학교 4학년으로서 졸업이라는 경계에 바짝 붙어있다. 운동에 있어서는 ‘학생’운동의 경계에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이 경계들을 통과하기 전에 ‘나이테’를 남기고 싶었다. 나이테란 나무의 생장과정에서 환경의 변화와 함께 나무줄기에 남는 동심원 모양의 무늬를 말한다. 강우량과 일조량이 풍부한 봄·여름엔 세포분열이 활발히 일어나 나무줄기에 넓은 면적과 옅은 색의 춘재가 형성된다. 그러나 반대의 조건인 가을·겨울엔 성장속도가 줄어들고 조직이 촘촘해져 좁은 면적과 진한 색의 추재가 생긴다. 추재와 춘재의 반복이 나이테를 만든다. 운동의 성장도 나무의 성장과 비슷한 면이 있다. 운동도 특수한 정세와 맞물려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가 있는가하면 반대로 성장세가 위축되고 안정화를 위해 씨름해야 하는 시기가 있기 때문이다. 시들지 않는 한 성장하면서 더 넓게 뿌리를 내리고 견고해진다는 점도 닮았다.
그러나 나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이 계절 속에서 적응해온 흔적을 남기는 반면 운동은 저절로 성장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직접 그 운동을 성찰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이후에 참고할 자료들이 남지 않는 것이다. 만약 운동의 기록들이 남지 않고 공백이 길어진다면 앞선 운동이 봉착했던 한계가 이후에도 되풀이될 것이다. 같은 동심원을 따라 끊임없이 맴돌게 되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운동을 규정짓는 한계를 넘어서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운동의 경험을 담은 기록들을 남겨야한다.
어떻게?
이제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난 내게 고유한 관점을 충분히 드러내고자 한다.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첫째, 내가 ‘직접’ 참여하고 활동한 운동들을 서술의 중심에 놓을 것이다. 만약 대상 전체를 내려다보는 조감도를 그려야 한다면, 예컨대 긴 시간에 걸친 학생운동의 역사를 균형 있게 서술해야 한다면 이러한 방법은 다소 부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실천의 영역에서 활동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감도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운동의 지형들이다. 지형이란 말에는 ‘땅의 생긴 모양이나 형세’라는 뜻도 있지만 ‘전투에서,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범위와 사격할 수 있는 범위의 장애 요소로 이용하는 은폐물이나 엄폐물’이라는 표현도 있다. 후자의 의미에서라면 지형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충분히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론과 실천 사이에 존재하는 어긋남, 인간적인 관계와 조직의 문제와 같은 운동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확인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을 중심에 둘 필요가 있다.
둘째, 구체적인 경험들을 다루면서도 그를 객관화함으로써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모든 나무들의 나이테는 생긴 모습이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나이테에서 우리는 나무가 처했던 환경을 읽어낼 수 있는데 이는 나이테를 만들어내는 특정한 기후가 광범한 지역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직접 경험했던 운동의 한계들 중 어떤 것들은 비단 나의 경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곤란을 만들어내는 특정한 사회구조의 작용에 의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활동가들에게도 비슷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글은 구체적인 운동의 경험을 기록하고 남긴다는 점에서 나이테를 남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경험이 다른 경험과 접목될 수 있는 지점들을 보임으로써 현상에 개입하고 있는 이면의 실재를 드러내는 나이테기후학(dendroclimatology)으로서의 성격도 갖는다.
결국 이는 ‘경계인으로서의’ 내 고유한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속이 없다는 점에서 난 특정한 주장이나 입장에 서서 운동을 방어해야 할 압박을 더욱 적게 느끼며 그만큼 객관화를 통해 운동의 경험을 벼려내기에 수월한 입지에 있다. 또한 이론과 실천의 경계의 애매한 위치는 (때론 어중간하게 보일 수는 있겠으나) 지나친 추상화로 인해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멀어지지도 않고 구체에 대한 지나친 천착 속에서 확장성을 잃어버리지도 않은 채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입지를 열어 보인다. 다시 비유로 돌아가자면, 물리기후학으로 빠지지도, 그렇다고 나무 하나의 나이테에만 매몰되지도 않는 영역에서 분석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Theoractical’이라는 조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론적(Theoretical)이면서도 동시에 실천적/실용적(Practical)인 성격을 글 안에 함께 담아내자는 뜻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조어는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운동의 존재양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운동은 언제나 그 운동을 견인하고 평가하기 위한 이론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실천을 통해 다시 이론이 쫓아가야 할 현실의 운동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운동의 양가적인 측면들을 글 안에 풍부하게 담아내는 것이 내 목표다.
시작하며
아무리 멋진 말들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고작 4년 남짓한 활동기간은 전체 운동사의 맥락에서 볼 때 아주 극소한 일부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일부는 이전의 의미를 새롭게 써내려가는 새로운 한 획, 이전과는 다른 전체를 구성하는 새로운 한 획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동시에 나에게는 격동의 대학생활이 전개되는 시기였고 운동을 통해 많은 성장을 이룬 시기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앞으로의 글들이 내가 지나쳐 갔고 누군가가 지나치고 있을 학생운동의 ‘지형들’을 보다 선명히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운동이 만들어낼 나이테가 나의 것보다 더 바깥으로 확장되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앞으로 다룰 주제는 이렇습니다.
- 비용이 된 인간 ― 신자유주의와 대학 청소·경비·주차노동자 투쟁
- 모순인가 실재인가 ― 세월호 참사와 이데올로기의 문제
- 기관차 아닌 혁명 ― 학회와 운동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중요성
- 소비자 혹은 표백된 주체 ― 학생운동의 위축과 차이에 대한 공포
- 인권과 정치적 인간의 귀환 ― 고려대학교 소수자인권위원회의 형성
- 국가와 복수의 문제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그리고 임대차상인 투쟁
-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