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이 된 인간 ― 신자유주의와 대학청소·경비·주차노동자 투쟁
고준우 | 고려대 학생 활동가 4년차
“새로운 세계의 무질서가 자신의 신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를 정착시키려고 시도하는 순간에 어떠한 부인(否認)도 마르크스의 모든 환영들을 물리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헤게모니는 항상 억압을 조직하고 따라서 신들림(hantise)을 확증한다. 신들림은 모든 헤게모니의 구조에 속해 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 중에서
신들림(들)
“어떻게/왜 운동에 뛰어들게 되셨나요?” 활동가들을 만나면 이렇게 자주 묻곤 한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활동가들의 이야기로부터 운동의 동력을 찾기 위해서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좌파로 산다는 것은 유쾌하기만 한 일은 아니다. 독재정권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는 사회진보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탄압과 폭력에 시달렸다. 형식적인 민주화를 이룬 이후에는 대중운동의 헤게모니가 소위 ‘제도권 정치’에게 넘어가면서 진보적인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다. 표를 얻어 대리인을 세우고 대리인이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만이 정치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일상 속에 착종되어 있는 사회구조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바꿔야 한다는 급진적인 주장은 힘을 얻기가 쉽지 않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활동가들이 지치지 않고 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동력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다. 그들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들에 그런 동력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둘째로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로부터 사람들이 진보적인 의식을 갖게 되는 물질적·상징적 조건들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선배 활동가들은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1980년 광주 민중항쟁의 충격, 그리고 이로부터 촉발된 대학에서의 학생운동의 경험들을 자신이 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개인적 서사로부터 우리는 사회적 맥락들을 엿볼 수 있다. 노동자들에 대한 극심한 착취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을 이룩했던 1970-1980년대 산업화, 독재정권의 사회 전반에 대한 억압과 통제, 고등교육을 이수한 사람이 소수이던 시절 소위 ‘지성인’들에게 요구되던 가치질서... 이와 같은 다양한 조건들과 그에 대응하는 개인의 선택 속에서 사회운동에 투신했던 한 개인의 삶이 주조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활동가들의 서사에서 우리는 그가 활동했던 시대를 규정하는 구조적 조건들, 특히 운동이 확장될 수 있었던(혹은 반대로 위축되었던) 조건들을 추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의 운동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도 궁리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여기서 데리다의 표현을 빌려 질문을 이렇게 다시 표현해보자. “무엇에 쓰인 겁니까? 도대체 무엇에 씌었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이때의 ‘무엇’이란 죽음과 삶, 신체와 영혼의 역설적인 결합으로 나타나는 유령(spectre)을 말한다. 유령이란 시대의 어긋남으로부터 돌출하는 것, 이미 생명을 다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 그로부터 시선을 받는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맞출 수는 없는 것, 그러나 그것의 명령을 듣지 않고는 정의(正義) 혹은 법에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앞선 선배 활동가들의 서사로 돌아가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유령들을 떠올려보자. 광주 항쟁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시민군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민군은 죽었다고, 모두 사라졌다고 말한다. 더 정확히는 이제 대한민국의 법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추모하게 되었으니 이제 더는 무장한 시민봉기와 시민불복종은 없을 것이라고, 국가질서에 저항하는 불온함은 광주로부터 모두 씻겨 내려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윤상원 열사의 환청이 들려온다. “우리들이 벌써 승리자가 되었단 말인가?” 시민군의 유령은 법의 바깥으로부터 이렇게 돌출한다. 그것은 불길한 시선으로 우리를 응시한다. 그러면서 폭력과 불평등 속에서 죽음으로 내몰리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말 것을, 법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것을 명령한다. 당장 2016년만 하더라도 집회에 참여한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고, 1980년 당시 광주 시민군이었던 민주노총 위원장이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데도 광주 시민군의 유령이 사라졌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문제도 없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 속에도 어딘가의 뒤틀림으로부터 시민군의 유령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질문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는 무엇에 쓰인 거지?” 불길한 시선을 느끼며 이 까다로운 질문에 대해 생각한다. 난 소비에트 연방이 사라졌고 덩달아 마르크스주의의 위세가 꺾였으며 결국 역사의 종말이 선언된 이후에 태어났다. 마르크스의 유령을 내쫓기 위한 “성스러운 사냥의 동맹”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이는 시대에 나는 어떻게/왜 운동을 하게 된 것일까?
2013년 겨울, 그리고 2014년의 봄
2013년, 수능이 끝난 겨울. 수시로 대학합격을 마무리한 나는 낯설고 긴 자유를 얻었다. (비록 정시를 기다리는 초조함과 대학생활을 기다리는 기대감이 교차하기는 했으나) 친구들은 대체로 운전면허나 자격증을 따거나 그동안 못 즐기던 여가생활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고, 나 역시 갑자기 주어진 시간들 앞에서 쭈뼛거리다가 대학생활을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때마침 한 가지 특이한 사건이 발생한다. 2013년 12월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하 수상한 시절에 모두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대자보가 붙은 것이다. 대자보는 철도 민영화, 국정원의 불법 대선 개입, 밀양 송전탑 건설에 대한 문제들을 차례로 비판하고서는 독자들을 향해 정치적 무관심의 뒤에 숨지 말라고 지적했다. 안녕하지 못하다면 자기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얼핏 보면 상당히 고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문체였지만 그동안 운동권의 ‘논평’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내는 이 대자보는 많은 대학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고려대학교뿐만 아니라 여러 대학으로 대자보 열풍이 번져나가면서 ‘안녕들하십니까’는 일종의 사회현상이 되었다. 이는 마치 2011년 반값 등록금 투쟁 이후 2012년 말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간 쌓여왔던 대학생들의 정치적 좌절과 열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각 대학의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안녕들하십니까’ 열풍을 바탕으로 그동안 위축되었던 운동과 정치의 새로운 발판을 만들어보고자 했다. 그 산물이 ‘안녕들하십니까’를 내세운 게릴라 집회였다. 일시와 장소만 정해두고서 사회에 불만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서 각자 자신이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공유하고 자신이 바라는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예비 대학생이었던 나는 이 집회에 흥미가 생겼고 친구들과 함께 ‘안녕들하십니까’ 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여기서 처음으로 사회에 산재한 부조리들에 대해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안녕들하십니까’의 흐름을 타고 새내기를 대상으로 진보적인 사회의제를 학습하는 세미나도 이 시기에 다수 개설되었다. 그 중 하나가 알바노조가 기획했던 ‘안녕, 새내기’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여기서 이후 운동에 함께 할 선배들과 친구들을 만나는 행운도 얻게 되었다.
한편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를 할 기회도 생겼다. 중학교 시절 알고 지내던 친구와 같은 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이 우연한 계기였다. 이 친구는 내게 대학에 들어가면 같이 학회를 하나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주었는데 그 학회가 바로 ‘정치경제학연구회’였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마르크스주의는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현실적합성을 잃어버린 비판이론이라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부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다시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에, 그리고 이전에 해왔던 인문학 공부들을 보다 심도 있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선뜻 학회를 같이 하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를 해석하고 재현하는 틀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첫 계기가 되었다.
2014년 봄. 입학은 하나의 도약이 되었다. 2013년 겨울에 마주했던 이데올로기소(ideologeme)들, 즉 집회·시위의 문화코드나 마르크스주의적 전통 하에서 발전해온 다양한 논리체계 등이 뒤엉켜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케 한 계기는 입학식날의 에피소드였다. 대학 입학식은 지금도 내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입학식 연설에서 총장은 학생들을 상대로 선공후사의 정신이나 자유·정의·진리에 대해 열심히 떠들었다. 그러나 입학식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색 리무진을 탄 총장은 빠르게 체육관을 벗어나 사라졌는데, 간접고용으로 인해 저임금과 높은 강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청소·경비·주차노동자들이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총장과의 대화를 요청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도망쳤던 것이다.
그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총장에게 그들은 어떻게 보였을까? 총장 본인과 동일한 인격으로 보였을까? 선공후사의 정신을 학생들 앞에서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본인과 동등한 인격의 사람들의 간절한 외침을 가볍게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학교의 공익(청결한 학교 환경과 직원들의 쾌적한 노동조건)을 논하자며 모인 사람들이 아니던가. 아마도 그에게 노동자들은 흰 종이 위에 새겨진 몇 줄의 숫자들, 비용들에 불과했을 것이다. 직접고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높은 비용들. 그것이 아마 총장의 눈에 비친 노동자들이었을 것이다.
입학식에서의 해프닝이 있은 며칠 후에 본관 앞에서는 청소노동자들의 집회가 열렸다. 이때 선배의 부름에 이끌려 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회에서의) 발언’이라는 것을 해봤다. 그리고 총장에 대해서 내가 느꼈던 바를 꾸밈없이 이야기했다.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대학의 어디에 선공후사가 있고 자유, 평등, 진리가 있느냐고 말이다. 이후로는 청소노동자들의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학내 곳곳에서 일어났다. 청소노동자들과 연대하는 학생들이 직접 서명판을 들고 다니면서 학생들의 서명을 받는 식이었다. 서명을 받으러 돌아다니면서 서명에 동참하는 학생들도 보았지만 서명을 거부하는 학생들 역시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에 소리 없는 혐오감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아마 머릿속에서는 청소노동자들을 직접고용하면 자신에게 등록금의 형태로 돌아올 비용에 대한 계산이 돌아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을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는 한 줄의 숫자더미로 만드는 것. 그에 대해 생각했다. 마르크스가 말했던 소외(Entfremdung)가 이런 게 아닐까? 자신이 직접 쓸고 닦고 치워서 반짝이게 만들어놓은 복도로부터, 교실로부터, 길거리로부터 재빨리 몸을 숨기기에 바쁜 사람들. 점심이 되어서야 좁은 휴게실에 모여앉아 잠깐 다리를 쉬게 하는 사람들. 투쟁 속에서 예외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만 총장에게도 학생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들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낯선 게 아니었다. 선배들이 들려준 쌍용자동차 투쟁에서, 어릴 적 신문으로 읽었던 한진중공업 투쟁에서, 재개발로 밀려나 사라진 철거민들의 투쟁에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라고 외치던 장애인들의 투쟁에서 이런 모습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결국 내게는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불행과 불안을 만드는 게 무엇인지 해석할 이론과 그 부조리를 넘어설 실천이 필요했고 2013년 겨울의 계기들은 그 도약의 발판이 되어주었다.
신자유주의와 스물세번째 인간
분노란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윤리학(ethica)』 제3부 중에서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부조리에 관심을 갖다보면 어느 순간 문득 공포에 휩싸인다.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부조리의 이면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거대한 사회구조가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전체 사회의 구조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 막연하거니와 나의 저항만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을 장벽에 가로막히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러한 좌절감을 넘어서게 하는 것은 늘 차갑게 굳어가는 마음에 불을 지피는 투쟁이었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교에는 청소·경비·주차노동자들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공공운수노조 경인지부에 소속된 각 대학들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학교 광장에 모두 모여서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집회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학생들로도 꽉 채울 일이 별로 없는 중앙광장 잔디밭을 청소노동자들만으로 꽉 채워버린, 중앙광장에 민중가요가 울려퍼지는 생경한 광경을 보면서 왠지 모를 용기를 받았다. 아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동지들)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천과 함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론들에 대한 공부도 시작되었다. 첫 시작은 정치경제학연구회에서 진행한 경제사 세미나였다. 박현채 선생이 쓴 『청년을 위한 한국근현대사』와 백승욱 교수가 쓴 『자본주의 역사 강의』를 편집한 교재였다. 세미나의 앞선 부분에서는 세계체계론의 이론적 배경을 먼저 학습하고 이후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과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의 이론을 활용해 한국 경제사의 시기적 특성들을 배워나가는 공부였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시기, 전두환 정권부터 시작된 (하지만 경제호황으로 인해 좌절된) 신자유주의적 개혁, 그리고 김영삼 정권 이후부터 이어지는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개혁 시기를 차례로 배워나가면서 오늘날 우리 시대를 결정하고 있는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 조건들에 대해서 처음으로 학습해나갔다. 세미나 발제를 준비해가면서 이론적인 내용을 현실에 적용하는 연습도 해나갈 수 있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청소노동자들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안정고용을 전체 사회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리기의 체계적 축적순환론에 따르면 세계경제의 헤게모니 순환은 크게 혁신의 도입으로 실물경제가 성장하고 이윤율이 상승하는 실물적 팽창 국면과 반대로 경쟁의 심화와 혁신의 둔화 등으로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새로운 헤게모니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는 높은 수익률의 시장을 찾아 자금이 이동하는 금융적 팽창 국면으로 나뉜다. 신자유주의는 미국 헤게모니의 금융적 팽창 국면과 함께 등장하는데 실물경제 성장이 둔화되면서 경제위기가 발생하고 이와 함께 위기를 느낀 자본은 금융자본으로의 전환을 꾀하는 한편 이윤율 보전을 위한 전략들을 강구하게 된다. 이때 자본이 고안한 전략들은 한 사회의 지배엘리트들과의 결탁을 통해 현실화되는데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의 형태를 이룬다. 이윤율 하락의 압박 하에서 각 자본은 주주들에게 돌아갈 이윤 몫을 줄이는 대신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제하게 된다. 이때 배당금과 회사의 주식가치를 단기간에 높일 수 있는 대량 정리해고 등의 전략도 서슴없이 사용된다. 이와 같은 전략들을 위해 언제든 세계시장의 수요 변동에 따라 해고와 고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고용을 유연화 하는 규제완화정책들이 도입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 정리해고법이 도입되는 등의 변화가 이를 보여준다. 이때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에 뒤따르는 사회적 안전보장책이 부재할 경우 고용불안으로부터 오는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하는 것은 전부 노동자들이 된다. 여기에 사람을 인격이 아닌 비용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불평등의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회적 조직 원리는 비단 기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대학 역시 단기 수익성과 투자의 논리로부터 벗어나기 힘들게 변해간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구조적 맥락들이 겹쳐진 가운데 나의 경험세계 안에 포착된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삶’이 위치하는 것이다.
이론적 학습을 거치며 나는 경제학적인 의미에서 좁게 정의된 정책적 패키지로서의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한 사회의 물질적 부를 생산하는 생산양식과 국가, 민족, 교육, 언론과 같은 상징적 질서에 대한 통제를 아우르는 의미에서) 특정한 사회구성체의 구성 원리로서 ‘신자유주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이성을 통해 분노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기도 했다. 공부를 통해서 나와 다르지 않은 이웃들, 평범한 사람들이 받는 고통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들이 맺는 관계들이 모여 만들어낸 사회구조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구조에 침묵하지 않고 함께 분노하는 연대(solidarity)가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이를 끊임없이 삼성 서비스센터 노동조합의 투쟁 현장에서, C&M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투쟁 현장에서 되뇌었다. 그리고 그들은 승리로 연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증명해보였다.
그러나 모든 투쟁이 승리로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2014년 11월 13일, 대법원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를 무효로 판결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정리해고에 대해 유효 판결을 내렸다. 다시금 법의 이름으로 노동자는 인격이 아닌 비용에 불과함을 확인해준 사건이었다. 그때의 충격과 분노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시인 심보선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투쟁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22명의 노동자를 생각하며 「스물세번째 인간」이라는 시를 썼다. 시는 스물세번째 인간을 마치 죽음과 삶의 어긋난 경계 위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스물세번째 인간은 등장하자마자 앞선 22명의 노동자처럼 사망자명단에 이름을 올릴지도 모른다. 스물세번째 인간은 스물세번째 죽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물세번째 인간은 사망자 명단을 불태우고 자본의 횡포에 맞서 싸우며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외친다. 그는 유령처럼 도래할 시간(“오늘 밤 이후 최초의 인간”)과 현재(“우리 모두”)와 과거(“스물두번째 인간의 부활”)를 가로지르며 존재한다. 그는 하나 이상이며/더 이상 하나가 아니며 열 명, 백 명, 천 명, 만 명으로 늘어난다. 죽음을 맞이한 22명의 부활. 죽음과 삶의 경계 위에 있는 스물세번째 인간(혹은 유령)은 이제 우리를 응시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눈물 흘릴 것을, 분노할 것을, 권력의 폭력을 온몸으로 맞설 것을, 스물세번째 죽음을 멈출 것을 요구한다. 시를 읽으며 스물세번째 유령에게 쓰인 스물세번째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나다. 이것이 나의 신들림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