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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Writing/인-무브 대담

권한, 대의, 의사결정구조 그리고 리더십이라는 문제

by 인-무브 2025. 4. 27.

 

 

<2회차 집담회>

③ 권한, 대의, 의사결정구조 그리고 리더십이라는 문제

 

집담회 진행: 이태영
기록: 김범일, 조준희 / 정리: 김범일, 이태영


이 글은 4월 5일 토요일 오후에 진행된 「조직화의 곤경과 그 너머 - 우리 시대의 정치 조직화 집담회」 2회차 집담회의 기록입니다. 이번 집담회는 대안정치공간 모색과 다정본(다른 정치의 본령)이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두 단체가 함께 연재한 〈녹색당 12년의 실험과 가능성의 기록〉의 후속 기획으로 마련되었습니다.

2010년대 이후라는 시대적 배경 속, 각자의 자리에서 ‘조직하기’를 고민해온 분들을 모시고, ‘사람들은 어떻게 모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는 어떻게 조직하는가’ 라는 큰 질문을 쪼개며, 우리가 겪고 있는 곤경을 확인하고 극복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했습니다.

긴 시간 진행된 집담회에 함께해주신 참여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이 글은 대안정치공간
모색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내가 경험한 ‘리더십’에 대해 

“좋은 리더십이란 결국 ‘좋은 팀을 꾸릴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중장기 목적이 없는 리더십’이 중요한 시대…”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그 착각에서 오는 부담감이 리더를 지치게 만들고…”
“두 가지를 동일한 한 사람에게 기대하거나 마치 당연히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것처럼 구성된 구조가 리더십의 위기를 만든다고…”

 

태영 

이번 집담회의 중요한 목적 의식은, 2010년대를 맥락화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2010년대의 정치·사회운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포인트가 될 수 있는, 조직 내부의 의사결정 문제나 조직 내 민주주의, 특히 리더십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2010년대의 특성을 함께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리더십’과 관련된 경험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보통은 ‘나쁜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가 더 쉽게 떠오르긴 하지만, 이번에는 ‘좋은 리더십’의 경험부터 이야기해보죠. 참고로, 리더와 리더십은 서로 다른 개념이기도 하기에, ‘리더십’ 그 자체에 대해 집중해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던 리더십이었는지, 그 리더십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를 중심으로요.

 

유현

저는 과거에 교회 공동체에서 활동했는데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함께했던 임보라 목사님을 보며 훌륭한 리더십을 지니신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거나 사람 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지혜롭게 조율하면서 냉철하게 판단하는 리더십을 지니고 계셨어요.

교회 공동체의 특성상 모든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그분은 원칙에 얽매이기보다 실질적인 판단도 하셨던 것 같아요. 결국 교회라는 곳은 아프고 힘든 사람들,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일들이 생기잖아요. 공동체의 건강성과 방향성에 대한 문제를 깊이 있게 고민하고 풀어내셨던 것 같아요. 

 

태영
예전에는 그런 경계 설정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던 시대도 있었던 것 같아요. 조직의 목적의식이 뚜렷하면, 거기에 맞춰서 사람을 걸러내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여 졌던 시기 말이죠.

그런데 저한테는 오히려 그 ‘경계’ 자체가 하나의 주제가 되었다는 느낌이 있어요.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사회운동에서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걸러낼 수 있는가’, 혹은 ‘환대 해야 한다는 규범과의 긴장 속에서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들이, 그 시기의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희원

저는 애초에 '‘좋은 리더십’이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있어요. 그보다는 ‘명료한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명료하다’는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는 뜻만은 아니고, ‘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맺고 끊는 태도를 취하는 리더구나’, 혹은 ‘이 사람은 포용적인 방식으로 이끄는 리더구나’. 이런 걸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리더십이란 결국 ‘좋은 팀을 꾸릴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즉, 그 팀 안의 문화나 방향성이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리더가 자기 역할만 하고 팀은 각자 알아서 돌아가는 식이라면, 좋지 않은 리더십이라고 생각해요. 팀을 꾸리는 데 있어서 명확함이 중요한데, 그 명확함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리더’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수 있겠죠.

리더십이라는 게 원래 어려운 자리인 것 같아요.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결국은 실수하고 책임지면서 갈 수밖에 없는 거겠죠. 좋은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떠오르는 사례가 없어서 말하기가 어렵네요.

 

태영

리더십을 단순히 사람의 고유한 속성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어떤 ‘행위적 특성’이나 실천의 결과로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할지 고민 되는 지점이 있어요.

리더십이라는 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임’할 때 생기는 감각 같아요.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그 ‘자임’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느껴요. 호스트 역할을 자청하는 게 조심스러워진 것처럼요. 리더십이라는 건 어떤 감각이나 용기를 가지고 감행하고 자임해야만 가능한 것 아닐까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리더십을 계속 ‘안 갖는’ 전략을 취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우리 기억 속에 있는 리더십의 사례들은 대부분 ‘나쁜 리더십’인 경우가 많잖아요. 리더십을 자임하는 순간, 비판을 감수해야 하고 욕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 아예 리더십을 맡지 않으려는 방식도 하나의 전략이 되는 거죠. 리더십은 결국 ‘자임’하는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종건 

요즘은 ‘중장기 목적이 없는 리더십’이 중요한 시대라고 생각해요. 필요한 건 아주 단기적인 목적과,  아주 장기적인 방향성 아닐까? "5년 안에 뭘 하겠다"는 식의 계획은 자꾸 어긋나고, 지금은 그런 중장기 전략이 작동하지 않는 시대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필요한 건 아주 단기적인 목적에 충실하는 겁니다. 예컨대 작은 교회 공동체에서 "이번 주에 누가 마이크를 잡을 것인가"라는 아주 구체적이고 작은 단위의 목적이죠. 이런 작은 역할들을 잘 수행했을 때 자존감으로 이어집니다. 마치 집안일을 차근차근 해내는 것처럼요.
물론 방향이 흐트러지면 안됩니다. 전체적으로는 “우리는 저 방향으로 간다”는 장기적인 나침반을 갖고,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중장기 목표는 나중에, 한 5년 쯤 뒤에 다시 고민하자"는 생각을 자주 하고, 그런 리더십의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저는 2010년대 이후에 대학에 들어갔어요. 소위 학생운동이 잘 안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되는 일’들이 갑자기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기대 없이 자보 붙였는데 천 명이 모이는 상황도 있는 거죠. 그런 순간들을 되돌아보면 어느 정도 준비는 되어 있었겠지만 결국 ‘주어진 것’에 가까웠고, 2010년대 이후 운동에서 나타난 성과는 대부분 어떤 우연과 ‘때’, 여러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가능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 ‘때’를 견딜 수 있는 조직, 흔들림 없이 버티는 조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옥바라지선교센터’도 1년 단위로 활동을 계획했고, “10년쯤엔 어디 쯤 가 있을까” 정도의 넓은 방향만 잡았어요. 그렇게 매해 활동을 이어오다 보니 10년의 목표가 달성되었고, 또 새로운 과제가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저희 같은 골목 상권에 더 어울리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지금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과 조직 전략이 이런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태영 

결국 우리에게 “기획이 가능한가?”라는 질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이슈가 아닌가 싶어요. 특히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이 질문은 조직화의 가능성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질문이, 이번 집담회의 마지막에 우리가 다루게 될 굉장히 중요한 테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단기 목표와 초장기 비전을 설정하고, 그 사이를 실천해 나가되 방향은 유지하는 방식, 그게 결국 리더십이 발휘되는 지점일지도요. 저는 정당 활동을 하면서 중장기 혹은 중단기 비전의 필요성을 자주 말해왔어요. 변명하자면, 늘 다가오는 선거를 준비해야 하는 구조에서, 그 구상 속에서 흔들리는 경험이 많았어요. 녹색당은 ‘100년 가는 정당’, ‘녹색 세상을 여는 도토리 정당’ 같은 초창기 비전의 언어는 항상 존재해왔고, 선거 때마다 단기적 비전도 만드는데 문제는 그 사이 중장기 비전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선거철마다 조직이 흔들리고, 전체적인 방향 감각도 불분명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오늘 이야기를 들으며, 중장기 비전을 리더십과 조직문화 안에서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됐습니다.

 

혜민 

당에서 활동하면서 좋은 리더십이 때로는 나쁜 리더십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리더십이란 게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 맥락 속에서 작동하는 성격이 강하고, 그래서 희원님이 말씀하신 ‘좋은 팀을 꾸릴 수 있는 명확함’에 깊이 공감합니다.

당 활동 중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리더십의 요소는, 본인의 권한을 인식하고 그것을 적절히 나누는 능력이었어요.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할 순 없으니 역할을 누구에게 어떻게 나누고, 그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가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나눠준 역할에 따른 책임을 감당하고, 의견을 반영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당에서 주로 평당원으로 지냈지만, 한 시기에는 당직을 맡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당시 여성 대표로부터 여성본부장직을 제안 받은 과정이 있었는데요. 그 과정은 다소 비공식적이었지만, 만약 그 당시 대표가 당내 다른 간부들, 특히 남성 중심의 기존 구조 내에서 상의했다면 제가 인선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당시 리더가 제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는 느낌은 있었고, 그런 열린 자세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리더가 개방적일 때는 장점으로 작용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폐쇄적인 구조 때문에 역으로 개입하기 어려운 상황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리더는 비판 받을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권한을 나누고 책임을 공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믿어요. 특히 여성, 청년, 성소수자 등 비대칭적 의견 구조가 존재할 때 리더가 그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견인하는 것, 저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본인 또한 그런 어려움을 경험했기에  발휘할 수 있는 고유한 방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도 듭니다.

 

태영
‘힘을 인지한다’는 것이 리더십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야만 자신이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그 힘을 어디에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알 수 있고, 나아가 그 힘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도 판단할 수 있게 되니까요. 결국 힘을 인지한다는 건, 실제로 그 힘을 ‘쓴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는 어느 정도 비난을 감수하는 태도도 동반되는 것 같습니다. 그게 결국 ‘선을 타는 일’이 되는 것이고요.

 

혜민
맞아요.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가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그 리더십이 나에게도 각성의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나를 믿고 기회를 줬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 나도 그에 걸맞은 책임감을 가지게 되죠.

예전에 당 회의를 참관했을 때, 한 젠더폭력사건에 대한 당의 입장에서의 용어 선택을 두고 논의가 있었는데 저는 정식 구성원이 아니라 참관이었는데 아무래도 제가 해왔던 운동 경험이나 직책을 고려해서 대표가 공개적으로 의견을 물었어요. 당시 대부분의 의견은 A였지만 저는 B라고 생각해서 “B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무조건 B여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대표는 “그럼 B로 가죠”라며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경험은 저에게 큰 책임감을 주었고, 더 신중하게 활동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어요.

물론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과정이 폐쇄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직 내에는 다수결로 해결할 수 없는 사안들도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저에게는 이 사건이 큰 전환점이 되었고, 단순히 당 대표의 '폐쇄적인 리더십'으로 보이지 않도록, 나 스스로도 내 위치에서 페미니스트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이나 리더십을 더 잘 실천해야겠다는 각성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방식은 누군가에게는 좋을 수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좋지 않을 수도 있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느꼈어요.

 

태영
결국 정당이나 오래된 단체들 안에서는, 세대 간의 경험 차이도 리더십이 작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혜민님이 경험한 정의당의 대표 같은 경우는 본인이 활용할 수 있는 힘의 구조와 방법을 명확히 알고 있고, 그것을 학습해 온 리더십 스타일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보영님은 동세대 내에서 다양한 활동 경험이 있으시잖아요. 청년유니온,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등 여러 공동체 속에서의 리더십이나 조직 문화에 대해 느낀 점이 있다면 함께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보영
제가 주로 활동했던 건 청년 세대 조직들이었고, 그 경험 속에서 ‘좋은 리더십’은 임기를 무사히 마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어요.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임기 내에 다음 리더를 세우는 것이고요. 리더의 중도 이탈이 반복되며 리더에게 기대하는 바가 자연스럽게 작아지게 된 것 같아요.

리더가 왜 사라지는가를 고민해보면,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 착각에서 오는 부담감이 리더를 지치게 만들고, 조직을 떠나게 만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중장기 계획을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수준의 과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조직 내 합의도 쉽지 않고 사업도 생각만큼 잘 되지 않으며, 그렇게 여러 가지가 잘 안 풀려 부담감에 짓눌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사라진 리더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을 땐 무엇보다 ‘지속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기로 다짐했고, ‘우리의 방향성’은 우리의 활동을 외부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구성되는 것이지 우리가 원한다고 정해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초단기 계획을 선호합니다. 하나하나의 실천이 쌓여 결국 방향이 만들어진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방향성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대단한 목적지를 가지고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도 그렇게 조직을 바라보고 있어요.

 

태영
결국 보영님의 경험에서 보면, 리더들이 조직을 떠나는 문제는 그 ‘목적지’를 만들고 이끌어야 한다는 과도한 부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지난주에 우리가 나눴던 ‘힘 빼기’와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조직화의 전략 중 하나로서, 서로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지우지 않는 방식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는 거죠.

 

보코

‘리더십’이란 주제가 왜 반복해서 등장하는지 생각해보면, 결국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목적을 기반으로 운영을 시작하는 순간, 리더십은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요소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렇다면 사회운동 내의 리더십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하게 되는데요. 저는 다양한 시민단체, 정당 그리고 리더십을 표면화하지 않는 다양한 조직 사이를 오가면서, 리더십은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뉜다고 느꼈어요.

하나는 조직의 상태와 내부 논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하며 가는 리더십이 있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 드러나는 대표 인물이 되는, 흔히 말하는 정치적 얼굴로 기능하는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동일한 한 사람에게 기대하거나 마치 당연히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것처럼 구성된 구조가 리더십의 위기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두 역할은 본질적으로 매우 다른 역량을 요구하니까요.

현실에서는 조직 외부의 얼굴과 내부 조율자가 분리된 구조가 더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리더가 통제 없이 움직일 때, 내부에서 논의를 통해 방향을 잡아주는 리더십이 있으면 조직이 훨씬 안정되고, 저는 그런 상황에서 더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역할은 잘 드러나지 않는 리더십이고, 저도 공식 직함 없이 그런 역할을 맡았던 경험이 있었어요. 2000년대 초반에 생긴 일부 조직들은 출발 시점부터 대표 체계를 갖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아요. 공식적으로 누군가에게 권한이 부여되지 않아 생긴 공백을,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채워왔고, 그렇게 드러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 역할의 차이, 경험과 연차의 차이가 자연스럽게 생기기도 합니다.

결국 위치와 역할이 상호적으로 구성되고 그게 사회운동 안에서는 굉장히 복잡하게 작동합니다. 그래서 형식적 평등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역량을 필요한 순간에 발휘할 수 있는 구조가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정당화되고 지속될 수 있는가’에 대해 자주 고민하게 되네요.

 

2025년 4월 5일, 서울 마포구 옥바라지선교센터 사무실에서 진행한 2차 집담회 모습(사진=대안정치공간 모색)

 

‘리더 없는 사회운동’이라는 주제 

“실제로 리더가 없었다기보다는 그렇게 느껴지도록 구성된, 일종의 상징적 전략…”
“리더십이라는 것이 특정 개인이 아니라, 광장이라는 반복된 경험 속에서 공유된 규범과 학습을 통해 구성…”
“스스로를 통제하고 다잡아야 하면서도, 동시에 타인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 이중적인 리더십이 요구되는 구조…”
“중심 없는 조직, 수평적 구조를 유지하려면 결국 더 많은 노동이 필요…”

 

태영 

앞서 보코님께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두가 활동가이며, 대표 체계가 없는 단체’를 지향해온 20~30년 된 사회운동 조직들의 전략은 ‘리더 없는 사회운동’이라는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은데요. 이는 운동이나 흐름 속에서 ‘중심’이 생기는 것에 대한 비판 의식과도 연결이 됩니다. 중심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주변이 형성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중심을 비워내는 전략을 택했던 시기가 분명히 있었고, 우리가 경험한 2010년대는 그런 흐름 안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중심 없는 운동, 리더 없는 사회운동에 대한 실험과 시도들이 두드러진 시기였죠. 월가 점거 운동이나 한국의 촛불집회 같은 대중운동들을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들 운동은 중앙집중적 구조에 반대하며 등장했지만, 동시에 운동이 끝난 후 지속성의 부재나 내부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좌파 이론가는 이런 운동을 비판하며, 결국 시간이 지난 뒤 ‘그때 거기 있었다’는 회고 말곤 남는 게 없을 수도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죠.

이처럼, 리더 중심 구조를 의도적으로 밀어낸 운동들에서도 여전히 ‘중심’과 ‘지속성’ 문제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번 논의는 ‘리더 없는 사회운동’, ‘중심 없는 운동’을 주제로 삼고자 합니다. 특히, 이 문제는 두 층위로 나눠볼 수 있어요. 하나는 ‘광장’이라는 공간에서의 리더십, 다른 하나는 정당·단체 등 구조화된 조직 내 리더십입니다.

 

희원
저는 리더가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망설여져요. ‘리더가 없다는 것’이 하나의 컨셉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가 처음부터 기획해서 그 광장의 규모나 움직임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역사적인 모멘텀이 작동했고, 그 가운데 기회를 포착해 움직인 시민사회나 연대체들이 있었기 때문에 광장이 열린 것이죠. 그런데 ‘광장’이라는 상징은 누군가가 그것을 점유하는 순간 오히려 무의미해질 수 있기 때문에, ‘리더 없는’ 이라는 컨셉이 공유된 측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리더가 없었다기보다는 그렇게 느껴지도록 구성된, 일종의 상징적 전략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종건
저도 ‘리더 없는 사회운동’, ‘리더 없는 광장’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이미지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광장을 생각하면서 실제로 떠올릴 수 있는 얼굴 중에 누군가 "이 광장은 내가 주도했다" 고 주장한다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요? 그게 단순히 그 사람들이 겸손해서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그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시민사회 안쪽, 특히 코어 네트워크 속에는 특정 인물들이 있었겠지만, 대중적으로 특정 인물이 사유화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광장은 확실히 ‘리더 없는 사회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방식인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고민이 많습니다.

 

보영
최근의 광장에서 민주노총이 보여준 태도에서 새로운 자신감을 느꼈던 순간이 있었어요. 민주노총이 “우리가 길을 열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전과는 다르다고 느꼈거든요. 과거에는 깃발, 배후 세력, 이런 말들이 따라붙는 걸 의식해서 인지, 참여연대나 민주노총 같은 조직들은 전략적으로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광장이 ‘조직 없는’, ‘리더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 판 자체가 조직들에 의해 짜여 있었죠.

그런데 이번 탄핵 국면의 광장에서는, 오히려 민주노총 등 조직들이 더 적극적으로 리더십을 자처하고 전면에 나서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그건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조심스러웠던 조직들이, 이번에는 자신 있게 그 역할을 감당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리더십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태영
이 대화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리더십이라는 것을 어떤 개인이라는 주체를 넘어서서, 하나의 ‘유형’ 혹은 ‘행위 패턴’, 또는 ‘중심성’이라는 개념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까 질문을 드린 맥락에서도, 특정한 개인을 지칭한다기보다는 그런 리더십의 양식이나 흐름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였죠.

종건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번 광장에서 특정 인물을 떠올리기는 어렵네요. 특정 인물이 광장을 상징하는 리더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니까요. 결국 어딘가에서는 리더십이 작동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중심’이나 ‘리더가 없다’는 것은 실제보다 상징적 개념, 또는 전략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생각도 들고요.

 

종건
그렇게 생각하면 공감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번에 느낀 게, 마치 누가 시킨 것처럼 모두가 싸우지 않고 굉장히 질서 있게 행동했어요. 예를 들면, 경찰이 자리를 막고 있을 때 보통은 국지적인 소요라도 발생할 법한데, 이번에는 스태프들이 "싸우지 마세요", "여기서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사람들도 잘 따르더라고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이건 어떤 형태의 리더십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특정한 인물이 중심이 되어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이 광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해야 하는지를 공유하고 있는 리더십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보코
저는 특정한 리더십이 작동했다기보다는, 광장이 자주 열리면서 참여자들의 학습 속도가 빨라졌다고 느꼈어요. 초기에는 무언가를 설명하고, 부딪히고, 다툼이 생기고, 그걸 중재하던 방식이 필요했다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광장에서의 행동 양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기서 이러면 안 돼요", "담배 피면 안 돼요" 같은 이야기들이 자발적으로 나오는 거죠.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학습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리더십이라는 것이 특정 개인이 아니라, 광장이라는 반복된 경험 속에서 공유된 규범과 학습을 통해 구성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희원
확실히 예전과 달라졌다고 느꼈던 부분이 있어요. 과거 집회에서는 순서대로 발언하는 문화가 있었죠. 큰 단체나 국회의원이 나와서 이야기하는 등의 형식적인 흐름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단체에서 나온 사람들도 대부분 ‘시민’으로 소개되더라고요.

그리고 다양한 시민들이 발언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번 집회를 기획한 분들의 연령대나 감각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자기 조직화에 대한 감각이 높은 분들이 기획하고 있는 것 같았고, 참여자들도 새롭게 왔지만 빠르게 학습하는 세대라는 인상이 강했어요.

그래서 이번 집회는 우왕좌왕하는 ‘리더 없는 집회’라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다원화되고, 자율적으로 구성된 집회였다고 느껴졌습니다. 저 역시 예전 같았으면 녹색당 깃발 아래에 있어야 안전하다고 느꼈을 텐데, 이번에는 다양한 깃발들이 모여 있는 그룹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존중 받는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그 무리들이 마치 분위기 좋은 ‘반’ 같달까요. 같은 반에도 맨날 뛰노는 아이가 있고, 항상 화장하고 있는 아이가 있는 것처럼 각기 다른 무리들이 어울려 있고, 서로 친하지 않아도 편안한 공간처럼 느껴졌어요. 그런 감각이 재미있었죠.

 

태영
이어서 광장에 대한 기억을 좀 더 나눠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기억에 남는 ‘큰 광장’을 떠올려보면, 2008년 촛불집회, 2016년 촛불집회, 그리고 2024년 혹은 2025년 현재의 이른바 ‘응원봉 문화’로 상징되는 광장까지 세 시기를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 시기의 광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질적으로 매우 다른 공간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인 ‘리더’ 혹은 ‘탈중심적인 경향’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 광장은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를까요?

 

희원
탈중심적인 성격으로 본다면, 2016년이 가장 뚜렷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그 현장에 페미니스트로 참여했을 때 저는 철저히 ‘소수’로 느껴졌고, 위협적인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서 존재를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현장이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소 다원화된 감각이 있었습니다. 탄핵이라는 큰 계기로 모였지만, 그 안에서도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을 얘기하지 않으면 이 광장의 의미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무리도 분명히 있었고, 그런 흐름이 존중 받는 분위기도 느껴졌어요.

2008~2009년의 촛불집회는 훨씬 더 대중적인 움직임에 가까웠고, 개인이라기보다는 ‘시민’의 범주로 묶인 다양한 집단—군인, 엄마, 촛불 소녀들 같은—이 함께 모였죠. 그리고 그때는 분명한 아이콘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강기갑 의원이나, TV 토론에서 활약하던 논객들처럼요. 그런 ‘상징’이 분명히 존재했던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태영
정리해보면, 2016년은 가장 ‘개인화된’ 광장이었다고 볼 수 있고, 이후 지금 시점에서는 다시 ‘다원화되며 재중심화된’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희원님의 말씀처럼, 중심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중심들이 공존하는 구조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보영
형식적으로만 보면, 2016년 현장의 분위기는 지금과 또 달랐어요. 당시에는 여러 대의 트럭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집회를 진행했고, 공간도 넓게 분산되어 있었죠. 광장 안에서도 공간적으로 여유가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 집회는 장소가 광화문보다 좁은 공간에서 열렸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밀집되고 집중된 느낌이 강했어요. 모두가 하나의 본 무대를 향해 앉아 있었고, 앰프에서도 단일한 메시지와 목소리가 흘러나오면서 하나의 흐름으로 수렴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단 위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오르기는 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집중화된 구조였지만, 내용 면에서는 이전보다 더 다양한 담론들이 수용되고 있었다는 점이 이번 집회의 특성이었던 것 같아요.

 

혜민
‘리더 없는 사회운동’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낯선지 곱씹어 보게 되는데요. 여성단체에서 활동할 때를 되돌아보면 리더는 늘 존재했었거든요. 중요한 건 리더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등장하느냐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번 광장의 경우도, 남태령 집회 등 여러 국면이 있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고 운영을 가능하게 했던 활동가들이 분명 존재했고, 그 덕분에 광장이 열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탈중심적으로 보일 수 있어도 실은 보이지 않는 중심, 리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오히려 우리가 바라는 리더 있는 사회운동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리더가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안정적으로 리더십이 작동하고 있는 구조 말이죠.

한편 이번 광장에서 저는 정치에서의 리더십 부재를 더 강하게 느꼈어요. 자신이 역할을 해야 할 정치의 자리가 아니라 마치 한 명의 시민인 것처럼 광장에 등장하는 모습이 어색했습니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운동이 잘 작동해서 리더 없는 듯한 구조로 보인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저는 ‘리더 없는 운동’이란 말에 경계심이 드는 건, 역설적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리더들이 갑자기 등장해온 경험 때문이기도 해요. 예를 들어, 선거연합정당 논의처럼, 함께 해온 시민사회단체는 반대입장을 내며 활동해왔는데 갑자기 리더들이 찬성 입장을 내는 걸 보고 놀랐던 적이 있어요. 그때 “문제는 리더가 없는 게 아니라,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리더들이 너무 많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이 더 긴장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또 리더라는 이름을 단 개인들이 선거연합정당 입장 때처럼 함께 활동하던 단체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동시에 일부 리더들끼리만 개인적으로 조직화되는 씁쓸한 방식으로 전면에 나설 수 있으니까요.

 

태영

‘리더는 없어야 한다’는 규범이 일정 기간 작동했던 것 같아요. 아마 조직과 유리된 채 행위하는 리더들에 대한 불신이 누적된 결과일 수도 있죠. 그래서 역으로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리더십을 기대해왔던 것 같기도 해요.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던 ‘좋은 리더십’이란 결국 명확하고, 권한을 잘 알고, 그것을 적절히 분배할 줄 아는 것이잖아요. 그동안의 리더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더 없는 사회운동’이라는 말이 일종의 문화적 규범처럼 자리 잡았던 것 같아요.  대표가 없어야 한다, 중심이 없어야 한다는 식으로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실제로는 늘 중심성과 리더십은 작동해왔고, 중요한 건 그 작동 방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였던 것 같다는 생각과, 그리고 지금은 그 리더십이 재구조화되는 전환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장과는 달리, 좀 더 조직적인 환경에서는 리더십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이야기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유현님께서 ‘모색’에 실은 글을 통해서 녹색당에서의 리더십에 대해 언급하셨던데, 그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유현
당 안에서 ‘리더’라는 개념에 대한 인식 차이 자체가 문제였던 것 같아요. 리더라는 단어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아예 거부감을 가지는 당원들도 있었죠. 제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리더십 없는 리더’를 원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리더로서의 ‘얼굴’은 서야 하지만, 실질적인 리더십은 발휘하지 않기를 바라는 구조요.

저 역시 사무처장을 하다가 이후에는 후보로도 나섰는데, 그 경험은 제게 ‘실패의 경험’으로 남아 있어요. 후보로 나섰을 때는 대표자로서의 얼굴이 되어야 했고, 사무처장일 때는 내부에서 권한을 분배하고 일을 조직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어요. 그 두 역할이 충돌하면서 혼란스러웠고, 좋지 않은 방식으로 리더십이 작동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이 문제가 조직 안에서 어떻게 해결되어야 했을까에 대한 고민은 남아 있어요.

앞서 보코님이 말씀하셨듯이, 리더는 보통 ‘얼굴’이 되거나, 혹은 통제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대부분의 리더십 구조에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하라는 압박이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을 통제하고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기대되지만,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우도 많잖아요. 즉, 스스로를 통제하고 다잡아야 하면서도, 동시에 타인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 이중적인 리더십이 요구되는 구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구조적 모순 속에서 리더십은 단지 개인의 역량 문제로 축소될 수 없는, 훨씬 복잡하고 무거운 주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종건
지난 10여 년 동안 사회운동 전반에서 ‘탈중심화’의 흐름은 분명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녹색당이 그 사례로 말해지는데, 녹색당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진보적인 교회들 역시 ‘공동 목회’라는 이름 아래 리더십 구조를 실험해왔는데요. 결국 그 안에서도 사실상의 중심 인물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이를 억지로 숨기려 하거나, 애써 없다고 하는 방식이 오히려 실패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반대로, 중심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잘 이루어지면, 조직이 더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점도 있죠. 

 

보영
권력은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권력 관계가 생기고, 권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더 문제적일 수 있어요. 조직 안에서 리더십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이 전혀 없을 수는 없어요. 중요한 건 그 중심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공론화하고 토론하는 방식이 훨씬 건강하다는 거죠. 반대로 중심을 없애자고 선언하는 순간, 실제로는 존재하는 권력을 부정하게 되고, 오히려 내부에서 더 복잡하고 억압적인 역동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 ‘탈중심화’ 경향은 이전의 ‘중심집중적’ 조직 구조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 걸수도 있을 것 같아요. 특히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든지, 특정 인물에게 모든 기대가 몰리는 구조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시도였던 것 같아요.

 

희원
‘책임은 있지만 권한은 없는’ 리더 역할이 많아졌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해요. 즉, 누군가에게 “이 역할을 해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에 걸맞은 권한이나 자원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를 맡는 게 ‘짐’이 되어버리는 거죠. 사회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운동의 기반도 축소되면서, 리더 역할이 실제 생계 문제로 다가오는 경우도 많았고요.  

제가 활동했던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도 대표가 없는 운동을 지향했어요. 생각해보면 실제로 어떻게 조직을 운영할지는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대표 없어 보이려고만’ 했던 시기가 있었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자원이나 기회는 제한적이었죠. 반면에 이런 주제로 한때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요. 2016년에서 2018년 사이, ‘기본소득’이라는 의제보다도 ‘개인화된 운동’, ‘자기 조직화된 운동’이라는 형식 자체가 주목 받았고, 많은 매체와 기관들이 우리를 불러 이야기하길 원했어요.

저는 범일님이 쓴 글에서 ‘추첨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높은 실무 역량과 비용이 필요하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즉, 중심 없는 조직, 수평적 구조를 유지하려면 결국 더 많은 노동이 필요하고, 단순히 정치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노동’이 총량적으로 더 많이 투입돼야 하죠. 이걸 평등하게 나누려면 교육 체계도 필요하고요. 요즘 들어 활동가 시절 그걸 몰랐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제는 그런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태영
결국 ‘리더’든 ‘대표’든 ‘중심’이든, 그것은 권한과 권력의 문제이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 중요한 점인 것 같네요.

그런데 특정 시기에는 그것을 ‘없는 셈 치는 전략’을 취한 시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중심화된 전략이 조직적 실패를 맞이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탈중심화’가 규범처럼 자리 잡았던 것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 전략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느끼고 있고, 이제는 다시 그것을 재구조화하기 위한 기술과 품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버린 시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혜민
저는 리더에게 그 끝이 ‘퇴장’밖에 없는 구조도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어떤 리더가 중심이 없어 보이도록 노력했는데, 실제로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갖기 어렵고, 나눌 사람도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 자기 탓만 하게 되고, 운동을 조용히 떠나는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거죠. 그런 일이 반복되면, 계속해서 사람이 사라지는 운동을 하게 되는 거고요. 청년, 페미니스트, 사회적 소수자 등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리더일수록 더 빠르게 탈락하게 만드는 구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느 날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가 지지했던 사람 중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게 되는 거죠.

물론 그들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조정하며 바꾼 것이기도 하고, 리더로서 역할을 잘했는지에 대한 평가도 중요하지만 한편 그 구조가 이들을 너무 쉽게 소모했다는 점은 씁쓸합니다. 그래서 리더의 소진과 퇴장이라는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운동 안에서 그런 말을 자주 듣게 되잖아요. "그래도 끝까지 있어야 한다", "끝까지 남아야 한다"는 말들이요. 저는 그 말들이 참 부담스럽게 느껴졌어요. 실제로는 끝까지 남지 못하고, 상처받고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말이죠. 그래서 ‘리더를 만드는 게 어렵다’는 말을 공감해요. 어려우니 지지하는 것도 어렵고, 괜히 뭔가 사건이 발생할까봐 두렵기도 하고요.

 

태영
돌이켜보면, 최근의 경험에서 리더십을 자임하거나 감행했던 사람들이 그 커리어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네요. 손에 꼽을 정도죠. 실제로 리더십을 실행에 옮긴 이들이 결국 오랜 시간 그 위치를 유지하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녹색당 초창기엔 오히려 젊은 사람이 리더십을 인정받는 게 더 쉬운 편이었어요. 중앙당의 당직자나 후보가 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당에서 빠르게 리더가 되는 건 독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소진되고 상처받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어요.

 

혜민
저 또한 정의당에서 활동하며  비슷한 고민이 있었어요. 청년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는 요구는 분명 있었고, 그에 따라 실제로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서면 ‘혼자’가 되는 거예요. 조직화된 개인이 아니어서인지, 조직화에 대해 고민을 못해서인지, 이 영향 또한 있겠고 무거운 과제이지만 한편 이것만의 문제일까 싶기도 해요. 그리고 그 혼자가 되어버린 사람은 그 기회의 이유를 입증해야 한다는 책임을 짊어지게 됩니다. 실패의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지고, 그 부담을 홀로 떠안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리더로서 활동하며 갖는 어려움이나 가령 성차별적인 경험 역시 나눌 기회를 갖기 어려운 것 같구요.

정의당 뿐 만 아니라 어느 정당들을 봐도 그러한 것 같은데 여성 청년의 대표성은 더 가혹하게 평가를 받죠. 예를 들어, 중년 남성 정치인의 실패는 ‘그 사람 개인의 일’로 치부되지만, 여성 청년 리더가 실패하면 "우리가 여성 청년에게 기회를 줬는데 실패했다"는 식의 판단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그러다 보면 여성 리더가 감당해야할 대표성은 과도해지고, 권한이 집중되는 가운데 그만큼 더 쉽게 소모되고 탈락하기도 쉬워지는 구조인 거죠. 한편 저도 제가 당직을 맡았을 때,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자책도 많이 했던 것 같구요. 그렇지만 지겹도록 말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떠나는 판으로만 남겨질 것 같아요.

 

희원
그래서 저는 ‘실패를 함께 받아줄 수 있는 조직화’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실패가 너무 당연한데도, 그 실패를 견디고 회복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문화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걸 모른 채 그냥 밀려났던 경험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태영
최근 들어 리더십에 대한 문화적인 분위기 자체가 다시 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예를 들어, 야구계에서 제 생각엔 불명예스럽게 퇴장했던 김성근 감독이 요즘 들어 다시 '시대의 어른', '쓴소리하는 리더'로 미디어에서 호명되고 있거든요.

김성근 감독은 2010년대에 ‘선수 혹사’ 논란으로 퇴출되다시피 했던 인물인데, 3년 전 쯤 한 야구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재조명되었어요. 경기 당일까지 스타팅 멤버를 발표하지 않으며 선수에게 긴장을 유지하게 하는 방식, 혹독하지만 책임지는 리더십으로 그려지면서 어느새 신년에 보신각 종을 울리는 인물로 소환되었죠. 비슷한 맥락에서,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모니카도 떠오릅니다. 그녀 역시 빡세게 굴리고, 증명을 요구하고, 책임지는 리더십으로 인기를 얻었는데요.

우리가 한동안 ‘권위 없는 민주주의’를 외치며 밀어냈던 리더십이, 오히려 지금은 다시 갈망되는 건 아닐까 싶어요. 다시 말해, 권한을 인지하고 책임지는 리더를 다시 찾게 되는 어떤 흐름도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코
맞아요. 그런 두드러지는 리더십은 눈에 띄니까 사람들이 훨씬 쉽게 반응하죠. 반면, 실제로는 무형의 역할을 하고 있는 리더십은 눈에 잘 띄지 않아서 평가되기도 어렵고, 감동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소모되기 쉽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힘을 휘두르는 리더’가 먼저 소환되고, 좋든 싫든 먼저 반응하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권한의 집중과 분산, 그리고 의사결정 구조 

“우리가 너무 형식적 민주주의나 권한 재분배에만 몰입한 건 아니었나…”

“리더십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오히려 그것을 ‘없는 것처럼’ 여기려 했던 태도나 규범이 지금 우리가 다시 돌아봐야 할 지점…”

 

태영
결국 우리가 리더십이나 권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건 '민주주의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와 직결된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다음 질문은 권한의 집중과 분산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방금 쉬는 시간에 종건님께서 옥바라지선교센터에서의 경험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 사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네요.

 

종건
옥바라지선교센터는 2010년대에 설립된 단체인데,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대표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동아리처럼 모두가 공동대표라는 식의 가벼운 느낌으로 시작했죠. 그러다가 총회를 구성하고, 운영위원회가 생기면서 어느 정도 조직 형태를 갖추게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운영위원장을 세우지 않았고, 저는 설립자이자 사무국장으로 모든 실무를 책임졌습니다. 당연히 조직의 방향성, 정치적 결정, 내부 실무까지 모두 담당하게 되었죠. 그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권한을 어떻게 분산시킬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급하게 추진하지 않았던 것이 저희 조직의 잘한 점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저는 기본적으로 남성이었고, 설립자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권력의 상징처럼 보였거든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죠. 

한 번은 사무국장 교체를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그 이후에는 좀 더 오래 보고 사람을 키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옥바라지선교센터 출신이 아닌 외부 인물을 전임 활동가로 채용하고, 그분이 서서히 역할을 익히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시간을 들였죠. 결국 그분이 사무국장직을 승계했고, 동시에 운영위원장도 따로 세웠습니다. 운영위원장은 정치적 결정을, 사무국장은 실무를, 저는 외부 활동과 상징적 역할을 맡는 식으로 조직의 기능을 삼분화한 거죠. 이렇게 해서 권한 분산이 안정적으로 이뤄졌고, 지금까지는 10년 가까이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어요.

이 과정을 겪으면서 느낀 게, 세대 교체나 리더십 이양은 절대 급하게 해선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한 명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함께 성장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고, 다만 그 한 명에게 모든 걸 걸면 또 위험하다는 것도 함께 느꼈습니다.

 

태영
결국 리더십이나 권한의 교체가 드러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재생산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고민이 조직 내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종건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부분이 인상 깊었어요. 실제로 그걸 함께 고민하고 실천했던 소수의 그룹이 있었던 거잖아요?

 

종건
맞아요. 그런 그룹이 있었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그룹은 쉽게 교체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물론 어떤 조직에서는 그 그룹마저 교체해야 진짜 세대 교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죠. 하지만 저희는 그게 잘 안 된 다른 단체들을 많이 봐 왔어요. 실제로 세대 교체를 한다고 해놓고, 조직 안에서의 정치와 언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새로 들어오면, 결국은 다시 기존 그룹에게 의존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선출되지 않은 권력처럼 보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겐 세대 교체가 당면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어요. 더 이상 청년 조직이어야 한다는 강박도 내려놓고, 대신 옥바라지선교센터는 ‘교회 안에서 진보 담론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조직이라는 점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담론의 기준점이 되는 것. 그것만 잘 유지하면, 그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기존의 고민 그룹이 자주 만나기만 해도 큰 문제 없이 운영될 수 있다고 본 거죠.

 

태영
그런 고민하는 그룹이 가시화되어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 같아요. 왜냐하면 이런 게 경우에 따라선 ‘배후’나 ‘비선’이라고 의심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보영
맞아요. 결국 ‘세대 교체에 대한 강박’과 연결돼 있는 것 같아요. 안 해도 되는데 무조건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고, 그게 오히려 선배 세대를 한순간에 사라지는 경우도 있어요. 그럼 남은 사람들은 준비도 안 된 채 조직의 무게를 떠안게 되고, 선배 세대는 도와주려 빠진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권력은 계속 과거에 머물고 표면적으로만 자리를 비우는 경우도 많았어요. 세대 교체를 아예 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지만, 특히 청년 단체 특유의 강박적인 논리는 오히려 조직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보코

우리가 너무 형식적 민주주의나 권한 재분배에만 몰입한 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책임감을 전면에 내세워 리더를 만들고 대표성을 부여하는 방식이 오히려 사람을 떠나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자각이 들었고요. 청년 리더십 재생산 담론 역시 ‘뉴 제너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이 운동을 대표하고 책임지는 이상적 이미지와 너무 쉽게 결합된 건 아닌가 해요. 당사자의 의지나 준비 여부는 묻지 않고 말이죠.

 

태영
정말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요. 어느 시기에는 ‘모든 것이 평등하게 분배되고, 투명하게 작동되어야 한다’는 규범이 너무 강하게 작동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그런 민주적 운영은 진공 상태에서만 가능한 이상에 가까워요.

현실에서는 항상 크고 작은 권한과 책임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걸 다루기 위해서는 다른 기술과 감각이 필요하죠. 그 시기에 우리는 아마도 그런 이상을 실현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걸 진공 상태로 실현할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새로운 출발점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유현
보코님 말씀 들으면서, 지난번 얘기했던 ‘조직화’라는 주제가 떠올랐어요. 예전엔 조직화가 곧 동지를 만드는 일이었고, 그래서 리더는 자연스럽게 조직과 운동에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했죠.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조직에 속하고 싶다’보다는 ‘관광객처럼 들렀다 떠나고 싶다’는 감각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자유롭고, 자기 페이스에 맞는 관계를 선호하죠.

리더십도 마찬가지예요. 리더가 되길 원하는 사람보다, 리더를 맡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그런데 여전히 조직 내부에서는 ‘리더가 돼야 한다’, ‘다음 세대를 키워야 한다’는 기대가 남아 있거든요. 그 기대와 실제의 간극이 지금의 운동 방식과 조직 내 리더십 재생산의 가장 큰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태영
결국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리더십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오히려 그것을 ‘없는 것처럼’ 여기려 했던 태도나 규범이 지금 우리가 다시 돌아봐야 할 지점인 것 같다는 공감이 저는 들었어요. 모두의 말씀을 통해서 그런 감각이 공통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집담회를 마치며 : 어떤 리더십이 필요할까

 

태영 

그럼 이제 오늘의 마지막 질문을 드리면서 마무리를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두 차례의 집담회에서는 정치·사회운동이라는 큰 틀 아래에서 조직화, 리더십, 대표성, 권한과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희원님이 지난주에 표현하신 대로, 우리는 이 주제들을 더듬듯이 탐색해온 것 같습니다. 과거와 지금의 운동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그런 변화의 조건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공경이나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본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마무리로는, 두 차례 모두 참여해주신 분들은 전체적인 소감과 함께 이번 대화가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주에 처음 오신 분들도 오늘 나눈 주제를 중심으로 소감을 말씀해주셔도 좋고요.

그리고 오늘 이야기한 주제와 관련해서, 앞으로의 정치·사회운동 조직화에 있어 어떤 리더십이 필요할지, 혹은 어떤 형태의 리더십이 바람직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있으시다면 함께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유현

이번 두 차례 집담회는 정말 의미 있었고, 이런 자리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어요.
오늘 주제인 ‘앞으로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을 찾기는 여전히 어려워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지금이 전통적인 리더십을 다시 시도해볼 시기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녹색당에서는 ‘대안적인’, ‘보이지 않는’, ‘형식적으로 평등해 보이는’ 리더십을 10년 넘게 실험했지만, 리더십의 재생산에는 실패한 것 아닐까 성찰하게 되고, 이제는 평등함을 유지하면서도 리더십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 즉 전통적인 리더십의 장점과 새로운 감수성의 리더십이 공존하는 구조를 고민해볼 시점인 것 같아요. 물론 다른 형태의 리더십 가능성도 열어두고, 그런 대안도 계속 발견되길 바랍니다.

 

보코

아직 정리가 다 되지는 않지만, 이번 광장의 시간을 지나며 저도 몰랐던 제 안의 갈증을 발견했어요. 광장에선 다양한 개인들이 스스로의 경험을 자기 언어로 학습하고 표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민주주의를 당장 실현할 수 없다면 결국 대선인데, 그 목소리를 담아낼 사람이 없다.”

그런 인물을 내심 기다려온 것 같고, 광장에서의 ‘승리’ 이후 문이 닫히는 순간 느낀 허무감은 그 부재에서 온 건 아닐까 싶었어요. 많은 조직과 개인이 애쓰고 있다는 걸 알지만, 정치적 확신이나 연결감을 느끼긴 어려웠고, 오히려 지금이 더 불안했어요.

우리는 광장 안에서 평등과 차별에 대한 감각을 서로 다르게, 그러나 진지하게 나눴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뜨거움이 일상으로 흩어지고 운동이 다시 운동의 언어로만 머문다면, '다음 광장은 과연 어디서 열릴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들었고요. 그래서 이렇게 신뢰할 수 있는 공간에서 경험을 나눈 집담회가 너무나 귀했어요.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에 답은 없지만, 신뢰를 주고받을 수 있는 리더,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준희

오늘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감사했고, 이야기들도 정말 흥미로웠어요. 특히 보코님이 방금 말한 그 감각이 깊이 와닿았습니다. 광장이 닫힌 이후 사회운동이 그 흐름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지, 저 역시 응원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막막함을 느껴요.

그리고 리더십과 조직 구조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평등을 지향하지만 의사결정 구조는 여전히 기성 조직을 답습하고 있다는 걸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안정당을 추구하는 녹색당도 많은 면에선 민주노동당 시절의 모델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잖아요. 이런 점도 앞으로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리더의 상이 어떠해야 할지는 당장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사회의 불평등이나 권력 구조를 운동 내에서도 자주 마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떤 공인된 권위가 있는 자격을 가졌거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기반 위에 있는 사람은 운동 조직 내에서도 더 쉽게 리더십에 접근하고, 더 안정적으로 오래 활동하는 걸 보게 됩니다. 그게 당연히 개개인의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운동 차원에서는, 사회의 권력 구조나 불평등을 운동의 운영 과정에 그대로 가져오고 있진 않는지, 보완할 방법은 없는지 살펴봐야 할 것 같단 생각을 자주 합니다.

 

범일
오늘 이렇게 재미있는 주제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감사드리고요. 앞으로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저희 모색 활동에 많은 관심 가지고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특별히 어떤 유형의 능력치를 갖춘 사람이 ‘좋은 리더’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인성이 좋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맡은 바를 잘 수행하는 거 아닐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종건 

저는 지난 주에 오지 못해 오늘 한 번밖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사전에 공유된 자료를 보면서도 ‘내가 이 자리에서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어요. 요즘 거의 인생의 70%를 지하(편집자 주: 옥바라지선교센터 사무실이 지하에 있다.)에서 보내고 있는 느낌이어서요. 그런데 막상 자리에 와보니 요즘 제가 하는 고민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 자리에서도 오가고 있더라고요. 그게 꽤 위안이 되었고, 지금 우리 사회운동이 전체적으로 비슷한 지점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조금 더 넓은 자리에서 더 잘 정리되고, 좋은 결론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도 들었고요. 저는 2010년대부터 지금까지 운동을 계속해오고 있는데, 그 시기에 겪었던 많은 실패와 상처들이 결국은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사람을 잘 끌어들이는 사람이 리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식 표현으로는 '부흥'이라고 하겠죠. 물론 언어나 방식은 지금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겠지만, 사람을 만나고 설득하고 이끌어가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다시금 리더로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희원

제가 오늘 영양가 있는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와서 다양한 경험들을 함께 들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참 좋았습니다. 이야기 나누면서 두 가지 감상이 들었는데요. 첫째는, 내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늙은 세대의 위치에 놓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고, 둘째는, 운동의 출발점에서 내가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누군가가 덩어리를 짊어지고 이끌고 가는 운동’보다는, 그렇지 않은 방식의 운동, 다른 방식의 조직화를 상상하고 실천해보고 싶어요. 몇 번의 실패 경험을 통해 그 가능성을 동세대 안에서 함께 고민해왔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고요. 앞으로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지, 그것에 대한 확실한 답은 아직 모르겠지만, 다만 계속해서 시도하고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이 자리가 그런 마음을 다시금 다잡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영

개인적으로 2010년대를 연구하고 있지만, 정작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이게 2010년대적인 것이다’라고 명확히 규정하는 데에는 늘 주저함이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다양한 경험들이 어느 지점에서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그게 무척 반가웠습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제가 경험해 온 리더십이 알고 보니 수많은 반작용들의 결합이었다는 점이에요. 문제에 대한 반대로 리더십을 구성하는 방식이 꼭 답은 아니었겠구나 하는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리더십을 무조건 없애거나, 반대로 과중하게 부여하거나 하는 양극단을 피하고, 조직 안에서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는 리더십이 무엇일지 고민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혜민

한때 당에서 탈당할 때, 함께 활동하던 분들이 ‘그래도 다들 고생하고 있으니깐 그 사람들 봐서라도 버티자’ 하고 말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제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결국 우리를 망친 것 같아요.” 모두가 고생하니 버텨야 한다는 감정이 오히려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뒤로 미루는 동시에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거죠.

그래서인지 제가 요즘 드는 생각은, ‘그만둬도 괜찮은 리더십’이 필요한 건 아닐까 싶어요. 어떤 리더 한 사람이 떠난다고 해서 조직이 무너지는 구조라면, 그건 애초에 건강한 구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리더에게 모든 것을 걸어놓은 구조는 결국 리더도 망치고, 조직도 망치게 되니까요.

진정한 리더십은 리더 개인이 아니라 조직 전체로부터 나오는 안정감에서 출발해야 하고, 그래야 실패한 리더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탈락하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면, 장기적으로 사회운동 조직 안에 남는 건 준희님이 말한 것처럼 변호사나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뿐이겠죠. 그런 구조는 우리가 바라는 조직화가 아닐 것 같습니다.

 

태영 

두 번의 집담회 모두 재미있고 깊이 있는 고민의 시간이었어요. 주제가 추상적이라 이야기의 흐름을 예측하긴 어려웠지만, 함께한 분들을 믿고 질문을 던지고, 서로의 말을 주고받으며 그걸 정리해보자는 마음으로 준비했었습니다. 무겁고 어려운 주제였음에도 2주 동안 성실히 응답해준 참여자들께 감사드리고, 이후에도 함께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또 하나 돌아보게 된 건, ‘모두의 정치’와 ‘우리의 정치’를 구분해서 생각해 볼 때, 스스로는 그동안 ‘모두의 정치’에 대한 규범을 더 내면화해 온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정치가 본래 경계와 배타성을 내포할 순 있지만, 저는 개인의 존재가 잘 드러나는 정치를 더 중시해 왔던 것 같아요. 저의 녹색당 활동 방식도 그런 흐름 속에 있었고, 몸담았던 단체에서 주로 실무나 주민들과의 접점에 집중하면서도 정작 ‘우리를 만드는 정치’에 대한 감각은 가지지 못했던 건 아닐까 반성하게 됐습니다.

희원님이 말한 “완전히 개인화된 공간, 그리고 다시 다원화된 공간”이라는 표현도 인상 깊었고요. ‘모두의 정치’를 실현하려고 했을 때조차도 그 안에는 ‘우리의 정치’가 이미 작동하고 있었단 사실을 새삼 돌아보게 됐어요.
이번 프로젝트와 집담회는 결국 저 자신이 ‘우리의 정치’를 해보고 싶었던 욕구에서 비롯된 것 같고, 그건 2010년대 내내 가장 못해왔던 부분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집담회는 지난 경험을 복기하고 앞으로의 정치를 다시 상상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시간이었고,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집담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글로 2010년대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조직을 고민해 온 분들을 모시고 진행한 <우리 시대 정치 조직화 집담회>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막연할 수 있는 주제임에도 긴 시간 집담회에 함께 해주신 참여자분들과, 긴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대안정치공간 모색은 앞으로도 '정치 조직화'라는 키워드를 놓지 않고, 사람들이 어떻게 모이고, 어떻게 정치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답을 계속 찾아나가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