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혹은 관계론적 평등 이론의 탄생
김강기명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평등은 평등한가?
근대 이후 많은 의문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류 역사를 논할 때 여전히 선형적이고 진보적인 서술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평등의 점진적인 증가에 대한 서사일 것이다. 이 서사는 수천 년에 걸친 노예제, 계급 사회, 전제정치, 카스트제, 그리고 가부장제의 역사를, 현재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현실과 대비하면서, 우리 시대의 근본적 신조를 드러낸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인권 선언, 1948). ‘평등’은 현재 인류 대다수의 사고방식 속에서 인간 삶의 필수불가결한 지도 원리로 자리 잡고 있다. 심지어 가장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들조차 인간의 기본적 평등을 명시한 헌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 인류가 가진 이 평등에 대한 신념과 평등의 진보에 대한 기대감은 현재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한편으로,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함께, 글로벌 경제에서 평등의 후퇴와, 새로운 능력주의(meritocracy) 계급, 혹은 신분 질서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지구적인 경제 불평등의 범위를 감안할 때, (인권 선언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 사이의 평등에 대한 요구가 인간을 넘어 확장되어야 한다는 도전이 있다. 이 도전은 다음의 여러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우선 서구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배경에서 태어난 근대의 보편적 ‘인간’ 개념에 대한 비판을 들 수 있다. ‘인간’ 개념은 정말로 ‘모든’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가? 인간 평등의 사상이 인간 내부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가? 또한, 오늘날 평등의 요구는 (특히 기후재앙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동물과 같은 비인간적 생명체와 심지어는 무생물적 존재까지도 고려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확장되고 있다. 나아가 어떤 미래학자들, 윤리학자들은 새로운 비인간적지적 주체들, 예를 들어 일반인공지능의 출현을 예상하며 그들의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에 대한 고민을 내놓고 있다.
근대의 평등 개념을 주조한 것은 무엇보다도 근대 초기와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이라 할 수 있다. 드워킨이나 탄 등이 강조한 바와 같이, 17세기의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 이후의 자유주의는 자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평등에 관한 것이었다.[1] 그런데 오늘날 자유주의 철학은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하여 특히 ‘평등’의 원칙을 유지하는 데 있어 이전과는 다른 한계점을 노정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자유주의 사조 대부분이 붙들고 있는 두 가지 밀접하게 연관된 전제 – 이 글에서는 각각 ‘객체에 대한 전제’, ‘주체에 대한 전제’라고 부를 것이다 – 에서 찾고자 한다. 객체에 대한 전제는 ‘모든 인간이 공통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 같은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서로 동등한 대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전제를 말하며, 주체에 대한 전제는 맥퍼슨이 말한 ‘소유자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 즉 ‘각 개인이 자신의신체, 정신, 의식, 삶, 행동, 그리고 자신의 재산의 소유자라는 전제를 말한다.[2]
자유주의의 이 두 전제는 17세기 자연법 이론과 사회계약 이론의 맥락에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1651)에서 자연 상태에서 개인들의 평등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적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사람을 해 입히고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하다. 이후 로크는 『정부론』(1690)에서 이보다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인간 평등을 설명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재산과 자유에 대한 동일한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홉스와 로크에서 평등과 관련하여 주체에 대한 전제가 강조되고 있다면, 장 자크 루소와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다른 고전적 계약이론가들은 첫 번째 전제, 즉 객체 전제를 강조했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은 평등하고 평화롭고 조화로운 인간의 자연 상태를 묘사했으며, 칸트는 정언 명령을 통해 평등하고 보편적인 인간 존엄성에 대한 주장을 제시한다. 칸트에게 모든 사람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의 『도덕형이상학』(1797)은 모든 이성적 존재가 가진 자기 결정과 자기입법 및 그에 따른 인간의 자유를 주장한다.
이후 수세기 동안 자유주의는 종종 존 스튜어트 밀, 허버트 스펜서, 제레미 벤담과 같은 학자들의 소유자 개인주의적사회 분석과 연관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개인주의에 강조점을 둔 자유주의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나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평등 개념을 질식시켰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존 롤스와 그의 후예들은 자유주의 내에서 인간 평등의 두 전제를 다시금 밀접하게 결합시키려 시도했다. 롤스는 칸트의 보편적 인간 존엄성에 대한 초월적 형이상학과 달리, ‘영역적 성질’(range property)나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 같은 개념을 도입하여 기본적인 도덕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들에게 ‘동등한’ 정의를 부여한다. 이 조건들은 모든 인간 개인들이 본래적으로 기본 재화에 대해서는 동등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충족된다.
자유주의가 가진 주체에 대한 전제와 객체에 대한 전제는 분명 평등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는 삼십년 전쟁 후 초월적인 신의 이미지에 기반한 중세의 위계적 질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산물이다. 신의 계명 대신 각 개인이 존엄성과 도덕, 판단의 최종적인 주체가 되었으며, 그러한 주체인 한에서의 인간은 서로에게 평등한 대상으로 사유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두 전제는 평등 개념과의 긴장 관계에 놓여 있기도 하다. 혹자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를 방어하면서 20세기의 자유지상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의 전체 흐름에서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비대칭적으로 사유한 이단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자유주의 일반의 주체에 대한 전제, 즉 소유자 개인주의는 오늘날 평등을 주장하는 논의에 있어서도 평등의 반대편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공론장에서 특정 인간 집단(이주자나 성소수자, 장애인 등)의 평등한 권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져야 할 ‘평등한’ 의견 표현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보는 일은 이제 드물지 않다. 최근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을 캔슬 컬쳐(cancel culture) 혹은 PC주의의 ‘독재’ 속에서 살고 있으며, ‘젠더’나 ‘비판적 백인성’ 같은 개념들을 주류화한 리버럴 엘리트들에 의해 공론장에서 배제되어 있는 소수자로 연출하곤 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 정치가 자기 중심적 형태로 변모하는 것 역시 관찰된다. 지금 정체성 정치로 불리고 있는 다양한 흐름들은 원래 모든 사람의 조건 없는 평등과 연대의 기치 아래 생겨났지만, 최근 우리는 정체성 정치의 담론들이 개인들이 자신의 정체성 특성에 대한 절대적 인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변모되는 것을 종종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객체에 대한 전제는 어떨까? “인간이라는 공통된 본성에 기초한 평등”이라는 이 전제는 첫눈에는 문제가 적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특히 ‘본성’(nature)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결코 명확할 수가 없다. 근대 역사에서 자연적 평등에 대한 호소는 항상 자연적 차이에 대한 단계화와 정당화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이러한 본성 개념의 모호성은 성별, 인종, 계급 등의 조건을 이유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배제를 반영하지 않은 채, 인간을 자연적으로 평등하다고 말하는 모순적 상황을 가능하게 했다. 포스트식민주의 및 페미니스트 비평가들, 예를 들어 앤 필립스 같은 이들은 이러한 배제와 차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자유주의에서 평등의 정당화는 논거가 구조적으로는 차별을 낳는 전제조건에 의존하여 결국 배제로 이어진다는 것을 정확히 지적한다.[3] 또한 공통된 인간 본성에 대한 강조는 강한 인류중심주의를 동반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예를 들어 기후 정의나 기술과학의 변화와 관련된 평등 문제를 고려하는 데에 질곡이 되고 있다.
스피노자의 관계론 철학
우리가 잘 알다시피,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자유주의 평등 이론과 그 두 가지 기본 전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결코 드물지 않았다. 공화주의, 공동체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스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수많은 저작들이 이 문제를 다룬다. 이들 사조의 대표자들은 때로 서로 매우 다른 관점에 서서 자유주의의 이 핵심 전제들에 대한 비판에 참전하였다. 또한 20세기의 여러 젠더 연구, 비판적 인종 이론, 장애 이론, 포스트식민주의 분야의 저작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비판들을 통해 자유주의의 기본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평등 이론의 발전 뿐만 아니라, 상기한 롤스 이후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논의를 비롯한 자유주의 평등 개념 자체의 다양한 정제와 개혁 시도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래에서 이어질 논의의 주요 목적은 현대 사상에 있어 자유주의 비판 이론의 역사와 다양성을 추적하거나, 그 기본 전제에 대한 현재의 도전에 대응한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갱신 시도를 조사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이 글은 유럽 자유주의의 형성 시기인 17세기 철학 이론으로 돌아가, 이미 당시에 “공통된 인간 본성”이나 “소유자 개인주의”와 같은 전제의 바깥에서 평등을 사유할 수 있는 철학적 자원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것은 네그리가 “야생적 별종”으로 명명한 바 있는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정치 철학이다.[4]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형이상학과 이에 토대를 둔 평등주의적 정치이론은 각각 (여러 철학적 입장 가운데에서도) 그보다 한 세대 앞선 데카르트의 철학과 홉스의 정치이론과의 대결 속에서 주조되었다. 스피노자는 그의 모든 철학적 작업을 관통하여,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 끝에 부정할 수 없는 결론으로 받아들인 생각하는 ‘나’의 존재(“cogito ergo sum”)와, ‘정신’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신체’, ‘내 정신’이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는 (정신이건 물체건) 여러 실체들 간의 ‘실재적 구별’이라는 관념을 거부한다. 홉스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정신 활동을 온전히 물질적/물체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그 물체, 즉신체들의 자기보존과 이 자기보존에 종속된 정신의 활동을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개인주의적 전제 위에서 사유하였다. “내신체를 보존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 지성의 기능인 것이다. 스피노자는 홉스의 이러한 개인주의적 유물론 역시 거부하며, 이것은 이 둘의 사회계약과 정치체(body politic)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이어진다.
스피노자의 주저 『에티카』는 이러한 초기 근대의 개체주의적/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 철학들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반론을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각 개체를 각각 실재적으로 구별된 것으로 확립하는 기체(subject)이자, 인식과 행동의 주체(subject)로 사유한 데카르트의 실체(substance) 개념을 폐기하면서,[5] 모든 사물들이 하나밖에 없는 실체 – 즉 “자연” – 의변양(modifications) 혹은 양태들(modes)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실체’와 ‘양태’는 ‘내부’와 ‘외부’라는 매우 단순한 개념을 통해 정의된다.
나는 실체를, 자신 안에 존재하며 자신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 즉 자신의 개념의 형성을 위해 다른 사물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6]
나는 양태를 실체의 변용들, 즉 다른 것 안에 존재하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으로 이해한다.[7]
이 지면에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체계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다룰 수 없기에,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여기서 양태들을 존재하게 하고, 사유되게 하는 ‘다른 것’은 단지 ‘실체’만이 아니다. 사물들이 실체의 변용, 즉 양태인 이상, 그것들은 언제나 ‘다른 것’ 안에서만 존재하고, ‘다른 것’에 의해서 사유된다. 즉, 모든 사물은 자연 안에서 ‘외부적으로’, 혹은 ‘관계적으로’ 결정된다. 데카르트가 명석판명하게 이 컵은 이 컵이고, 저 테이블은 저 테이블이고, 내 정신은 내 정신이고, 내몸은 내 몸, 저 사람 몸은 저 사람 몸이라고 사유할 때 스피노자는 “그것은 한 사물을 실체의 양태로서가 아니라 자연 전체에서 분리된 실체인 냥 추상적으로 인식한 부적합한 관념일 뿐 명석판명한 인식이 아니다”[8]라고 말할 것이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에게서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이라는 개념을 빌려 스피노자의 양태 이론을 설명한다.[9] 자연 안에 있는 모든 개체들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개체화 과정”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 ‘자연’ 혹은 (유일) ‘실체’란 곧 모든 것들을 생산하는 관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개체 혹은 개인을 독립적이고, 다른 개체/개인과 구별되어 있으며, 자신에 대한 내적인식을 가진 존재로 정의하는 대신, 개체의 각 부분들이 맺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외부의 원인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차이화의 과정 그 자체로 이해한다. 한 개체의 개체성이란 외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매 순간, 매 국면마다 차이를 통해 새롭게 정의되는 어떤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스피노자는 ‘죽음’ 마저도 새롭게 정의하는데, 한 사람의 몸이 “시체가 되는 것”이라는 절대적인 죽음에 대한 개념 대신 “신체의 부분들이 자신들 사이에 다른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획득하도록 조성되는 것”이라는 상대적인 죽음의 개념만이 그의 철학체계와 화합할 수 있는것이다.[10]
스피노자는 이 존재론적 관개체성의 관점으로부터 인식론적 주체에 대한 개인주의/개체주의적 관념에 대한 거부로 나아간다. 스피노자의 인식론에서 정신은 이런 관념, 저런 관념, 이런 정서, 저런 정서를 담고 있는 단일하고, 독립적이며, 통일된 어떤 기체(subject)가 아니라 (후일의 흄의 인식론과 비슷하게)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이며,[11] 역시나 하나의 과정,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스피노자 역시 홉스와 마찬가지로 어떤 개체적 사물이나 개인의 자기 보존 노력(conatus)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 개체가 외부적 결정을 통한 개체화과정이자 관개체일 뿐이라면, 코나투스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사실 바로 이 지점이 스피노자의 존재론이 윤리학 및 정치철학으로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스피노자가 실체를 ‘자기 안에 존재함’으로, 실체의 양태를 ‘다른 것 안에 존재함’으로 정의하였음을 보았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전개하면서 이성, 능동, 지성, 자유, 덕 등의 기초를 한 개체가 ‘자기 본성만을 원인으로 할 때’라던지, 한개체의 행위가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할 때’라던지, 인간이 타인의 권리가 아래(alterius juris)아니라 자신의 권리 아래(sui juris) 살아갈 때라던지 하는 경우에서 찾는다.
오직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우리 안에 또는 우리 밖에서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올 경우, 나는 우리가 능동적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우리가 단지 부분적인 원인일 뿐인 어떤 것이 우리안에 일어나는 경우,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경우, 나는 우리가 수동적이라고 말한다.[12]
한 물체가 다른 물체들보다 동시에 더 많은 방식으로 행위를 하거나 겪을 수 있게 될수록, 그것의 정신은 다른 것들보다 동시에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한 물체의 행위가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할수록, 그리고 행위에서 그것과 협력하는 다른 물체들이 적을수록, 그 정신은 더 판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13]
각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력 아래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의 권리 아래(alterius juris) 있고, […] 자기의 천성대로 살 수 있는 만큼 자기의 권리 아래(sui juris) 있다.[14]
이런 구절들을 보면 즉 마치 양태가 ‘실체처럼’ 행위하는 것이 곧 이성, 능동, 자유 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에티카』의 첫머리부터 ‘자유’를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결정되는” 것으로 정의한다.[15] 양태를 “다른 것 안에 존재하고 다른 것에 의해 실존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인간이나 정치공동체 등 양태인 여러 개체들이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능동적일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앞서 말한 개체화의 과정은 두 가지 상이한 양상, 즉 내가 각각 내재화(internalization)와 외재화(externalization)이라고 부르는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외재화는 한 개체와 다른 개체의 관계가 외부적 관계에 머무르는 개체화를 말하며, 이것은 한 개체의 다른 개체에 대한 부적합한 인식과 기쁨 혹은 슬픔이라는 수동적 정서를 동반하는 개체화이다. 이를테면 백설공주의 신체가 사과라는 외부 대상을 마주쳤을 때 백설공주의 신체는 사과의 신체에 의해 변용되며(시각적 이미지의 형성), 그가 다른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이를테면 친절한 할머니)에 따라 그 이미지와 함께 “먹고 싶다!”로 표현되는 기쁨이라는 수동적 정서가 따라 나온다. 여기서 백설공주와 사과는 주체-객체라는 외재화된 관계속에서 두 개의 수적으로 구별된 개체로서 (재)생산된다.
그런데 이번엔 눈이 나빴던 백설공주가 안경을 쓰는 경우를 살펴보자. 백설공주는 안경 없이는 눈 앞의 사과를 볼 수도 없을 만큼 시력이 약하다. 그런데 안경을 씀으로써, 즉 스피노자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백설공주의 신체와 안경이라는 신체가 ‘공통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백설공주의 신체의 역량(그리고 안경이라는 신체의 역량)이 확장된다. 볼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는 안경을 내재화한 백설공주(동시에 백설공주를 내재화한 안경)라는 개체가 (재)생산된 것이다. 그리하여 위 인용문 중 ‘능동’의 정의(『에티카』, 3부 정의 2)에서처럼, 백설공주의 역량이 “백설공주+안경”의 신체적 역량으로 정의되는 한에서, “사과를 볼 수 있게 됨”이라는 신체적 역량의 증가는 백설공주(“백설공주+안경”)의 본성만으로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된다. 이러한 신체적 확장과 내재화에 한에서 고려된 백설공주의 관념은 백설공주와 안경의 공통적 관계에 대한 인식인 ‘공통개념’(common notion)이 된다.[16] 스피노자의 인식론에서 공통개념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 “이성”은 어떤 외적 대상에 대한 추론이나 지각(이것들은 모두 1종의 인식, 상상이다)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내재화를 통한 현행적인 신체 및 신체 역량의 확장, 즉 “할 수 있게 됨”의 관념에 다름 아니다.[17] 그리고 이 현행적인 “할 수 있게 됨”은 외적, 대상적 원인 없이 오직 기쁨이라는 능동적 정서만을 동반한다.
개체화의 이러한 두 양상은 우리가 흔히 자명하게 “우리 신체”라고 부르는 그 신체의 개체화 과정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를테면 지금 내 손가락은 이 원고를 타이핑치고 있는데, 손가락이 신체의 다른 부분들과 공통된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맺고 타이핑치는 역량으로 표현되는 한에서 손가락은 백설공주의 안경처럼 내 신체의 일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타자를 치고 있는 내 손가락에 대한 시각/촉각 등의 감각적 이미지도 가질 수 있다. 그러는 한에서의 손가락은 나의 신체에서, 나의 신체는 손가락에서 외재화된 주체-객체 관계를 맺게 된다. 전자의 경우 (손가락의 신체와 합치된) 내 신체의 관념은 타이핑 치는 행위를 생산하는 적합한 관념이며, 후자의 경우 (손가락과 분리된) 내 신체의 관념은 손가락에 의해 변용되어 손가락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 부적합한 관념이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내 신체’라고 통상적으로 부르는 어떤 연장된 사물은 어떤 닫힌 외연을 가질 수 없고, 언제나 ‘다양체’일 수밖에 없다.[18]
이러한 두 예를 신체들이 맺는 정치적/사회적 차원에서, 기술과학적, 생태적 차원에서, 그리고 우주 전체의 차원에서 신체들을 생산하는 외재화(개체들의 분리와 수동)와 내재화(개체들의 합력과 능동)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확장하여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19] 우리는 여기서 “사변적 유물론”(카트야 디펜바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독특한 신체이론, 개체이론을 만나게 된다. 스피노자의 개체이론은 자기와 타자 간의 어떠한 견고한 존재론적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에게 자명한 이 개체(실체)와 저 개체(실체) 사이의 실재적/실체적 차이나, 이후의 라이프니츠에게서 발견되는 “구별 불가능자 동일성의 원칙”(principle of the identity of indiscernibles)은 스피노자의 체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개체를 이관념이나 저 관념을 소유한 기체(subject)나, 이 행동, 저 행동을 술어로 갖는 주어(subject)로 바라보는 것은 어떤 사태를 언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할 수는 있다. 하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극미에서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무한하게 얽혀 있는관계 속에서 모든 국면마다 외재화와 내재화라는 두 양상으로 펼쳐지는 개체화의 사태들이 이 개체, 저 개체가 가설적으로나마 어떤 지속을 가진 기체/주체처럼 나타나도록 생산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편의상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1인칭 주어(나/우리)는 스피노자의 체계 안에서 상당히 문제적인 것이다. 스피노자의 엄밀한 형이상학적 체계에서 “나”가 존재한다고할 수 있을까? 또 반대로 어떤 국면에선 “나”는 영원한 우주 전체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 국면에선 통상 우리가 “내 신체”라고 부르는 그 몸이 필연적 인과관계 속에서 파괴된다 할지라도 “인간 정신은 신체와 더불어 절대적으로 파괴될 수 없으며, 그것 가운데 영원한 어떤 것은 남는다.”[20]
바로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가 전혀 사용하지 않는 개념인) ‘의식’과 상관없이, 자연 안의 모든 사물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21] 국가 또한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이끌리는 다중의 역량에 의해” 그 권리가 결정되는 하나의 윤리적, 인식적 주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연이라는 관계망 속에서 외재화라는 개체화를 겪을 때 모든 사물은 외부 사물에 의해 결정되어 수동적 정서에 종속되고 부적합한 인식을 지닌 개체적 정신으로 (재)생산되며, 내재화 즉외부 사물과의 공통-되기라는 개체화를 겪을 때 그것들은 능동적 기쁨과 인과관계(행위/사태)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가진정신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가 바로 ‘자유’와 연결된다. 즉 유한한 양태인 개인이나 공동체라 할지라도 국지적 맥락에서는 마치 실체의 역량처럼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결정되는 사물”로서 ‘자유’를 누리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즉 여기서 ‘자기’는 외부사물로부터 독립을 통해 규정된 ‘자기’가 아니라 외부사물과 연합함으로써 재생산된 ‘자기’이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자유는 독립적인 것(independent)과는 거리가 멀다. 자유는 상호의존적(interdependent)인, 혹은 – 현대 신유물론 철학자 카렌 버라드의 신조어인 내부-행위(intra-action)를차용하자면 – 내부 의존적(intra-dependent)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자기 본성”, “자기 권리 아래”를 강조하는 스피노자가 동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하고 있는 것이다.
2부의 공준 4로부터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보존하는 데 있어 어떤 외부의 것도 필요로 하지 않게, 그리고 우리의 외부에 있는 사물들과의 어떤 소통도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게다가 우리의 정신을 살펴보면, 정신이 홀로이고 자기 자신 외에는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신은 확실히 보다 불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22]
인간의 자연적 권리는 그것이 한 개인의 힘으로 정의되는 한, 그리고 그 개인의 것인 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결론이 도출된다.[23]
홉스 vs 스피노자
이제 정치이론, 특히 ‘평등’의 개념을 형성함에 있어 이 반개인주의적, 관계론적 사유가 어떤 식으로 스피노자의 별종성(anomaly)을 보여주는지 살펴보자. 흔히 근대 초기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한 묶음으로 묶이는 홉스와 스피노자에게서 우리는 17세기에 인간 평등을 둘러싼 근본적으로 다른 두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전술하였듯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 모든 인간 개인이 자율적인 주체로서, 희망과 공포 등의 정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계산하며, 이성과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타인을 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개인은 평등하다. 그런데 인간의 이 평등이 문제다. 누구도 자연 상태 속에서 자신의 완벽한 안전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등의 귀결은 곧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상태(Bellum omnium contra omnes)로 이어진다. 홉스에 따르면이 전쟁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계약을 통해 주권자에게 양도할 때만, 즉 모든 정치적 권리를 지닌 주권자와, 평등하게 어떤 정치적 권리도 갖지 못한 신민간의 절대적 불평등을 통해서만 종결된다.[24] 홉스의 이론 속에서는 또다른 불평등의 계기를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인간 본성을 공유하지 않거나 공유할 수 없는 특정 인간들은 계약의 주체조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다른 이들을 죽일 역량이 아예 없거나, 언어와 이성 능력이 부족한 이들이다.
스피노자에게 인간 평등은 모든 개별 인간 각각 사이의 이런 식의 형식적이거나 사법적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스피노자의 이론 속에서는 인간이 동일한 본성을 갖는 존재로 나타나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 각각이 자신의 판단, 능력, 힘의 소유자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인간(들)은 언제나 개체화(외재화/내재화)의 과정 속에서 정의되고 생산될 수 있다. 인간이란 언제나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 사이의 본유적인 상호의존성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자연상태’와 ‘국가상태’란 둘 다 특정한 사회적인 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게 ‘자연상태’란 곧 개인들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행위자로 간주되는 사회적 상황이다. 그리고 – 홉스와는 반대로 – 자연상태 속에서 인간은 각각의 역량과 권력의 차이 때문에 ‘불평등’하다. 이를테면 물 속에서 큰 물고기가 “최고의 자연권”을 가지고 작은 물고기를 잡아 먹는 것과 같다.[25] 스피노자가 볼 때는 바로 이 불평등이 인간들의 합리적이고 갈등 없는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연상태의 불평등과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홉스의 이론처럼 국가 혹은 주권을 신민의 위에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을 가로지르며 스피노자가 강조하는 것은 주권자의 권력(potestas)과 권리(jus)는 결코 국가를 구성하는다중(multitudo)의 힘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는 그것이 군주정이나 귀족정의 정부형태를 취한다 해도 예외없이 민주주의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26]
스피노자에게 국가의 권력은 근본적으로 다중의 역량에 기초하며, 다중이란 동질적인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와 다양성의 조합이다. ‘인간의 본성’은 다중이라는 집단적 실천 속에서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어떤 것이다. 앞 절에서 서술한 ‘내재화’적 개체화, 즉 이성과 능동의 윤리의 관점에서 나는 스피노자의 ‘정치’ 개념을 본질적으로 ‘포함적’(inclusive)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이해하며, 이것이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평등 개념을 설명해 준다고 믿는다. 인간이개별자들로 쪼개져서 무력이나 금권과 같은 특정한 힘에 의해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는 한, 인간들이 가진 다양한 능력과 특성은 다중이 어떤 사회성을 빚느냐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의 역량을 표현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유물론적 윤리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동시에 더 많은 방식으로 행위를 하거나 겪을 수 있게” 되는 것이며,[27] “아주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지”는 것이다.[28] 그렇게 “신체의 변용들을 올바르게 질서짓고 연쇄시킬 수 있는 이 능력을 통해 우리는 해로운 변용들에 의해 쉽게 변용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기질과 역량을 가진 인간들이 정치 공동체(body politic)의 평등한 참여적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정치 공동체 혹은 다중이라는 한 개체가 – 전술하였듯, 모든개체는 곧 다양체다. – “동시에 더 많은 방식으로”, “아주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신체가 되도록 하는 포괄적 정치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자연 상태에서 (이전 장의 11절에 따라) 이성에 의해 지도되는 사람이 가장 강력하고 가장 자신의 권리 하에 가장서 있듯이, 이성에 기반을 두고 이성을 통해 스스로를 통치하는 공동체가 가장 강력하며 가장 자신의 권리 하에 서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권리는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이끌리는 듯한 다중의 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일체성은 만약 공동체가 건강한 이성이 모든 인간에게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바에 대해 최대한 집중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29]
물론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포함적 정치와 관계론적 평등추구의 이론으로 읽는 것에는 반론이 뒤따를 수 있다. 주지하듯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여성이 본성상 남성보다 열등하므로 남자들의 권력 아래 있다는 차별적 진술로 미완의 마지막 장을 마치고 있지 않은가.[30] 이와 연결되어 스피노자가 여성, 장애인, 비인간 동물, 아이들을 사회적 공동체에서 배제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즉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비장애인 남성의 신체만이 사회적 삶의 주체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31]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독해는 스피노자의 서술의 표면적 의미만을 택하고 있다. 이런 식의 독법은 스피노자철학에서 일반적인 것(universals, 즉 이름[name]이나 종[species] 등)을 공통적인 것(commons)과 혼동하고, 스피노자의 개체를 홉스의 개체와 같이 독립성을 가진 어떤 것으로 보는 개인주의적 해석의 오류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앞서 살펴봤듯 스피노자에게서 ‘인간’의 정의란 결코 어떤 일반성 혹은 종에 근거하여 내려질 수 있는 단순한 게 아니다. 개체 역시 닫힌 어떤것이 아니라 열린 관계성 혹은 다양체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체계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개념 역시 본질주의적 방식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할 근거는 없다. 모든 개체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남성, 어떤 여성, 혹은 남성 집단, 여성 집단은 특정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여성으로, 남성으로 생산, 혹은 재생산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존재론과 모든 존재의 필연적 상호의존성을 그의 정치 철학의 기초로 사유한다면, 거기서 우리는 이러한 반평등주의적 스피노자 해석, 그리고 스피노자 본인의 여성차별적 시선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박을 발견하게 된다. 스피노자주의는 서로 다른 능력과 권력을 가진 개인들 사이의 불변하는 위계가 아니라, 이러한 위계에 대한 해독제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인간 평등을 넘어
자유주의의 평등이론은 앞서 말한 두 전제 – 공통된 인간 본성(객체전제), 소유자 개인주의(주체전제) – 위에서 평등개념을 존재론적, 서술적, 규범적 차원에서 논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평등은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둘 혹은 다수의 대상들 사이에서 논해진다 (이를 테면,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동등하다” 등등). 그리고 무엇이 서로 구별되는 사물 혹은 인간들 사이의 동등성을 만드는지에 대한 서술이 뒤따르며(“인간들은 언어적 능력과 정서를 통해 상호 관계한다는 점에서 동등하다” 등등), 그리고 그에 따라 규범적 의미에서 평등 주장이 대두된다(“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한다” 등등).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바 스피노자의 평등주의 철학은 다른 방식으로 이 세 가지 차원 – 존재론적, 서술적, 규범적– 차원을 갖는다. 우선 평등 이론의 존재론적 차원이 있다. 소유자 개인주의의에서의 자기보존이나 권력/역량 개념과 달리 스피노자는 일원론적이고 내재론적 존재론 하에서 자기 보존과 역량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모든 존재의 역량은 예외없이 자연이라는 실체의 역량, 즉 실존역량과 사유역량에서 따라 나오며, 그 역량을 함께 구성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 이는 평등 이론의 서술적 차원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논의되는 것은 서로 실체적으로 구별되는 개체들(개인들)이 가진 동일성이나 유사성이 아니라, 자연 안의 모든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상호의존적 혹은 내부의존적(intra-dependent)이며 관개체적으로 생산되고, 또 생산하는 관계망, 즉 ‘질서와 연관’이다. 세번째로, 이러한 관계론적 사유로부터 평등의 규범적 차원이 도출된다. 즉 “더 많은 것을, 더 많은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신체를 구성하기 위한 포함적 정치와 행위역량의 증대가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서 볼 때,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철학은 인간중심주의를 자연스럽게 넘어서 있다. 모든 사물은 동일한 하나의 평면에 펼쳐져 있으면서 관계하지 인간-주체와 사물-객체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백설공주와 안경의 예가 암시해 주었던 것과 같이 ‘인간 정신’이나 ‘인간 신체’라는 개념을 말할 때도, 그 ‘인간’은 언제나 일종의 인간-비인간 집합체이며, 사이보그(도나 해러웨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스피노자 자신이 이러한 적용 가능성을 구상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치철학의 맥락에서 스피노자가 17세기의 어떤 정치이론가와도 구분되는 방식으로 ‘다중’ 개념을 정치적 주체의 자리에 놓았다 할지라도, 그 다중이 비인간 존재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에티카』 속 그의 관계론적 철학은 오늘날 우리가 반인간중심주의와 포스트휴머니즘의 이론을 전개하는데 있어 탁월한 자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사실 이미 역사 속의 많은 열정적인, 혹은 암묵적인 스피노자주의자들이 – 독일 낭만주의의 일부 대표자들부터, 과타리와 들뢰즈의 욕망기계 개념과 범기계주의적 철학(machinism),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머니즘이나 사이보그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 스피노자의 철학을 자신들의 각각의 유기체적, 생태학적, 분열분석적, 사이버네틱적 이론의 맥락에 수용해왔으며, 인간의 존재론적 우선성과 인간-자연 이원론을 반박하는 근거로 사용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기후변화를 비롯한 행성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21세기적 상황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의 쓸모를 다시금 사유하게 된다. 관계론적 철학과 포함의 정치는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평등 문제를 재해석하는 오래되고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그 평등은 최근의 객체지향존재론(OOO)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물들이 (인간) 주체나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 객체로서 각각의 실체적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는 어떠한 실체적 본질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 근거를 둔다. 서로가 없으면 우리는 존재하고, 실존하고 행위할 수 없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어떤 선제하는 본질에 의해 전제되거나 목적으로 주어지는 평등을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스피노자주의를 다시 사유하며 상호돌봄의 필연성에 입각한 자리이타의 윤리와 포함의 정치를 통해 인간-비인간 다중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신체로 나아가는 실질적인 평등과 정의의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오늘에 와서 다시 읽어야 할 이유이리라.
이 글은 문화과학 117호(2024년 3월)에 실린 글입니다. 인용시 해당 권호를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Balibar, Etienne. Spinoza, the Transindividual. Edinburg: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20.
Dworkin, Ronald. “Why Liberals Should Believe in Equality.” The New York Review,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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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gri, Antonio. Die Wilde Anomalie. Baruch Spinozas Entwurf einer freien Gesellschaft. Translated by Werner Raith. Berlin: Verlag Klaus Wagenbach, 1982.
Phillips, Anne. Unconditional Equal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1.
Spinoza, Baruch de. Briefwechsel.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86.
_____. Politischer Traktat.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95.
_____. Ethik in geometrischer Ordnung dargestellt. Meiner Verlag, 1999.
_____. Theologisch-politischer Traktat. Felix Meiner Verlag, 2012.
Tan, Kok Chor. “Liberal Equality: What, Where, and Why.” In The Oxford Handbook of American Philosophy, 2008.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2005.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 진석용 옮김. 파주: 나남, 2008.
[1] Ronald Dworkin, “Why Liberals Should Believe in Equality,” The New York Review, 1983; Kok Chor Tan, “Liberal Equality: What, Where, and Why,” in The Oxford Handbook of American Philosophy, 2008.
[2] C B Macpherson,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 (Oxford, New York, 1962).
[3] Anne Phillips, Unconditional Equal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1).
[4] Antonio Negri, Die Wilde Anomalie. Baruch Spinozas Entwurf einer freien Gesellschaft, trans. Werner Raith (Berlin: Verlag Klaus Wagenbach, 1982).
[5] 동시에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전통의 ‘실체’ 개념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6] 『에티카』, 1부 정의 3, 이하에서 스피노자 저작의 인용은 Gebhardt가 편집한 라틴어 전집(Spinoza Opera)와 Meiner 출판사의 독일어 전집(Spinoza: Sämtliche Werke Bd.1-Bd.7)를 참고하여 한국어로 번역하되 출처의 표기는 『책 제목』, 장(부) 번호 절(정의, 정리, 공리 등) 번호로 표기한다. 『스피노자 서간집』의 경우 편지 번호를 표기한다.
[7] 같은 책, 1부 정의 5.
[8] 『스피노자 서간집』, 편지 4, 편지 12 참조.
[9] Etienne Balibar, Spinoza, the Transindividual (Edinburg: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20).
[10] 『에티카』, 4부 정리 39 주석 참조.
[11] 같은 책, 2부 정리 7.
[12] 같은 책, 3부 정의 2, 강조는 필자.
[13] 같은 책, 2부 정리 13 주석, 강조는 필자.
[14] 『정치론』, 2장 9절, 강조는 필자.
[15] 『에티카』, 1부 정의 7.
[16] 같은 책, 2부 정리 38, 정리 39.
[17] 같은 책, 2부 정리 40 주석 1: “마지막으로, 우리가 공통 관념들과 사물들의 성질들에 대한 적합한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2부 정리 38의 따름정리와 정리 39, 그리고 그것의 따름정리, 그리고 정리 40을 보라). 그리고 이 방식을 나는 이성과 제2종의 인식으로 부를 것이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게 됨” 앞에 현행적(actual)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있음에 유념하라. 왜냐하면 이것은 “할 수 있지만 안 할 수도 있음”(가능태)이 아니라 현행적인 “하고 있음”으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18] 같은 책, 2부 정리 24. 및 증명: “인간 정신은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증명: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인간 신체와 관계를 갖지 않는 개체들로 고려될 수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관계 하에서 자신들의 운동을 서로 주고받는 한에서만 그신체의 본질에 속한다 […]”.
[19] 스피노자 본인 역시 같은 책 2부 정리 13 주석 보조정리 7의 주석에서 특히 내재화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무한히 계속할 경우, 우리는 손쉽게 자연 전체를 하나의 개체로 고려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이 개체의 부분들, 다시 말해 모든 물체는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변하겠지만 개체 전체는 어떤 변이도 겪지 않을 것이다.”
[20] 『에티카』, 5부 정리 23. 이 구절과 관련되어 있는 3종 인식으로서의 직관지, 신의 지성적 사랑, 지복(beatitudo)과 관련된 논의는 지면관계상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21] 같은 책, 2부 정리 13 주석.
[22] 같은 책, 4부 정리 18 주석, 강조는 필자
[23] 『정치론』, 2장 15절.
[24]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 trans. 진석용 (파주: 나남, 2008)., 17장 참조.
[25] 『신학정치론』, 16장 2절.
[26]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2005), 3장 참조.
[27] 『에티카』, 2부 정리 13 주석
[28] 같은 책, 5부 정리 39 주석
[29] 『정치론』, 3장 7절.
[30] 같은 책, 11장 4절.
[31] Robin Mackenzie, “Queering Spinoza’s Somatechnics: Stem Cells, Strategic Sacralisations and Fantasies of Care and Kind,” in Somatechnics : Queering the Technologisation of Bodies, ed. Nikki Sullivan and Samantha Murray (Farnham, England; Burlington, VT: Ashgate, 2009), 87-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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