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 스피노자(Spinoza)의 『정치론』(Tractatus Politicus)에서 민주적 집합체의 작동 변증법
김강기명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이 글은 Kim, Ki-Myoung. “‘There Are Different Types of Democracy . . .’: Dialectic of Operation of Democratic Collectivity in Spinoza’s Tractatus Politicus.” Kritika Kultura, no. 45 (2024).을 기계 번역하고 필자가 직접 수정한 것이다. 인용 시, 해당 호에 실린 원문을 참고하길 바란다.

네그리의 급진 민주주의 비전에 반하여
1960년대 프랑스 학계의 소위 “스피노자 르네상스” 이후, 스피노자 정치 이론의 급진 민주주의적 측면은 유럽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이론장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이 독해의 가장 급진적 버전은 안토니오 네그리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다중(multitudo)의 구성적(제헌적, constituent) 역량이라는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해석을 제시했다. 네그리의 이론 틀에서 주권, 즉 구성된 권능(potestas)은 다중에 내재하는 구성적 역량(potentia)을 억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다중의 생동하는 구체적인 역량(potentia)과 주권자의 인가된 권능(potestas)을 날카롭게 대비시킨다. 이 개념적 대립쌍은 그의 스피노자 연구, 이를테면 『야만적 별종』(The Savage Anomaly, 1982)과 『전복적 스피노자』(Subversive Spinoza, 2004)를 떠받치며,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와 공저한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3부작 『제국』(Empire, 2001), 『다중』(Multitude, 2004), 『공통체』(Commonwealth, 2009)로 확장된다. 이 저작들에서 홉스(Hobbes)가 저항할 수 없는 권위(potestas)의 옹호자로 묘사되는 반면, 스피노자는 억제되지 않는 다중과 그 고유한 역량(potentia)의 옹호자로 제시되며, 이 역량은 무엇보다도 주권의 확립된 질서에 도전하는 자발적 대중운동에서 발현된다. 다중의 봉기와 저항은 그러한 운동들의 타고난 역량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역량은 실재적이고 생산적인 힘으로서, 본질적으로 평등과 자유를 지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적 정부조차도 구성적 역량의 도전으로부터 면역되지 않는다—왜냐하면 그것들 역시 구성된 권능(constituted power)을 구현하는 것이지, 모든 국가의 근본적 토대에 놓여 있으며 일차적으로 사회운동에서 표현되는 구성적 역량(constituent power)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작동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은 다중의 구성적 역량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이에 반해, 국가의 구성된 권능은, 그것이 필수불가결하다 해도, 다중의 역동적 참여의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구현에 불과하다. 『전복적 스피노자』에서 네그리는 이러한 급진 민주주의 관념을 간결하게 표현한다:
권능(potestas)과 역량(potentia)의 관계는 완전히 전도된다: 역량(potentia)만이 스스로를 구성함으로써, 다중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만이 스스로를 집단적 구성으로 만듦으로써 하나의 권능(potestas)을 정초할 수 있다. 이 틀에서 권능(potestas)은 실체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집단적 구성을 향한 과정의 산물로 간주되며, 이 과정은 다중의 역량에 의해 항상 다시 열린다. 존재는 여기서 무궁무진한 토대이자 전적인 열림으로 제시된다. (152)
그러나 『정치론』을 근본적으로 급진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을 지지하는 책으로 해석하게 되면, 민주 국가를 다루는 마지막 장인 11장을 검토할 때 회의가 생긴다. 여기서 우리는 네그리가 제안하는 것과는 현저히 다른 논조를 발견한다. 이 장은 주로 “자신의 권리 아래에(sui juris)” 있지 않은 특정 집단들의 제도화된 배제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구체적으로 여성, 하인, 아동, 미성년자, 그리고 다른 나라의 법률에 종속된 외국인들이 이에 해당한다(『정치론』 11장 3절). 스피노자 자신이 이 배제를 주장하며, 이를 민주적 헌정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상정한다.
11장 2절에서 말한 바로부터, 우리가 여러 종류의 민주 국가를 구상할 수 있음은 명백하다. 나는 모든 종류를 다 논할 생각은 없으며, 오직 자기 나라의 법률에만 구속되며,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고 명예롭게 사는 사람 모두가 최고 의회에서 투표하고 공직에 출마할 권리를 가지는 국가 하나만을 다루겠다. 내가 명시적으로 자기 나라의 법률에만 구속된다고 말한 것은 외국인을 배제하기 위함인데, 외국인은 타인의 지배 아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들이 국가의 법에 구속되는 것 외에 다른 점에서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고 덧붙인 것은, 남편과 주인의 권능 아래에 있는 여성과 하인을 배제하기 위함이며, 또한 부모와 후견인의 권능 아래에 있는 아동과 학생도 마찬가지이다. 끝으로 명예롭게 산다고 말한 것은, 특히 범죄나 어떤 수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인해 불명예를 입은 자들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정치론』 11장 3절)
이 문제는 사실 민주적 주권(“구성된 권능”)의 법적 정의를 위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피노자가 사망하기 전에 썼다고 여겨지는 마지막 문장들(『정치론』 11장 4절)은 왜 여성이 “본성적으로” 통치에 부적합하며 따라서 정치적 참여에서 배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논거를 제시한다. 만약 다중의 절반 또는 그 이상이 체계적으로 참정권을 박탈당하고, 그 성별에 고유한 무력함에 의해 구성적 역량에서, 그리고 정치적 권리의 거부에 의해 구성된 권능에서 배제된다면, 우리는 민주적 정치체의 진정한 작동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러한 집합체가 어떻게 민주적으로 기능한다 할 수 있는가?
또한 스피노자의 저작을 저항에 대한 급진적 옹호로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언어로복종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하는 논지와 충돌한다: “복종이란 법에 의해 좋은 것이며 공동의 결의가 행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행하려는 한결같은 의지이다”(『정치론』 2장 19절). 다중에 의한 반란은 그들의 타고난 역량의 발현으로 볼 수 있겠지만, 스피노자는 그 어디에서도 반란이나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국가 법률에 대한 복종을 다중의 합리적 구성적 역량의 참된 구현으로 인식한다. 네그리의 관점과 대조적으로, 산드라 필드(Sandra Field)는 스피노자가 명확한 급진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성적 절대주의의 요소를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다중의 통합이 그들의 정념을 억제하고 방향 짓는 제도에 의존하며, 그들의 본원적 평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옳게 논변한다(「민주주의와 다중」(“Democracy and the Multitude”) 22). 그녀의 저서 『역량』(Potentia)에서, 필드는 대중의 역량에 대한 네그리의 찬양에 반대하면서, 대중 혹은 다중의 역량은 오직 자기 권리 아래(sui juris)에 있는 국가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정치적 혼란과 소요가 국가가 자기 권리 아래에 머무는 것을 방해한다고 논변한다(235–64). 『대중들, 계급들, 관념들』(Masses, Classes, Ideas)에서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대중에 대한 공포”라는 표현을 통해 다중에 대한 스피노자의 양가적 태도를 포착한다. 한편으로 대중들은 그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경솔한 폭군에게 공포를 심어준다.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 자체도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들이 두려워할 때 가장 무서울 수 있다(『윤리학』(Ethica) 4부 정리 54, 주석). 발리바르는 “국가 안에서 그리고 국가에 의한 한 인민의 구성이라는 civitas(정치체)의 자연적 조건들은 (국가 바깥에는 ‘인민’이 없으므로) 내전의 경향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14).
이는 우리로 하여금, 네그리의 해석과 대조를 이루는 스피노자 정치철학의 급진 민주주의적 측면을 숙고하게 한다. 내 견해로는, 스피노자의 이론 틀 안에서 구성적 역량과 구성된 권능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적대적이지 않다. 구성적 역량 자체도, 스피노자의 저작들, 특히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부패와 허약함에서 면역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구성된 권능도 반드시 홉스적 주권 개념에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스피노자의 사상에서 이 두 형태의 권력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되어 있다. 오직 특정한 상황에서만 그것들은 분명하고 적대적으로 발현된다—한편으로는 국가의 폭정적 권위로, 다른 한편으로는 반란하는 다중의 역량으로. 첼리카테스(Robin Celikates)가 지적하듯이, 국가 구조의 붕괴와 민중이 폭도로 전환되는 것은 동일한 곤경의 두 측면에 불과하다(51). 이러한 통찰들을 고려할 때,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민주적 집합체의 작동을 어떻게 개념화해야 하는가?
민주주의의 변증법
스피노자의 민주주의 정치 이론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변증법이며, 이는 민주주의의 정의 그 자체에 이미 미묘하게 내장되어 있다. 『신학정치론』에서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역량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집단적으로 최고 권리를 보유하는 인민의 분할되지 않는 총회”로 특징지어진다(16장 8절). 이는 “가장 자연적인” 정부 형태이며 자유에 가장 가까이 있다(16장 11절). 여기서 민주주의는 개인들이 자신의 역량을 “각자가 구성적 일부인 사회 전체”에 양도하는 것을 수반한다. “이로써 모두는 자연 상태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남는다”(16장 11절). 더 나아가 『정치론』에서 민주주의는 “완전히 절대적인” 국가로 기술된다(11장 1절). 이 맥락에서 “절대적”의 의미는 귀족정을 다루는 8장에서 명확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분히 큰 의회에 양도된 통치가 절대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절대적 통치가 있다면, 그것은 전체 다중이 통치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통치이기 때문이다”(8장 3절).
전체 다중을 포괄하는 “거대한 의회”를 형성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스피노자 자신이 그러한 절대적 통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만약 어떤 절대적 통치가 있다면”). 도전은 단순히 규모의 문제(수천만 명으로 구성된 총회의 기능성 같은)에 있지 않고, “전체 다중”의 본질을 하나의 실체로 정의하는 데에도 있다. 그의 주저인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집합적 실체를 다양한 부분들 사이의 공통적인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통해 개념화하는데, 각 부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개체이며, 무수한 마주침과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다. 이 집합성은 비유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동등하거나 유사하다고 간주되는 인간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 인간 “종(種)”의 개념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엄밀한 존재론적 의미에서 다중은 개별 인간 존재자들의 합 이상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정치론』과 『정치론』의 정치적 담론 안에서, 이 존재론적 복잡성은 단지 “인간 개인들”로 축소된다. 이것은 내가 다중의 모순(contradiction of the multitude)이라고 부르는 근본적 불일치를 제시한다: 엄격한 존재론적 용어로 정의된 다중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영역에서 스스로를 현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별적 인격들의 집합으로 대표되며,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나오는 독립적 행위자들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이들 전체 개인들로 구성된 “거대한 의회”는 이상적으로 민주 국가의 최고 권력을 대표해야 한다. 그러나 다중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본성을 감안할 때, 이 총회의 구성원을 정의하는 것은 복잡하다. 이 복잡성은 민주주의의 모순(contradiction of democracy)이라 칭할 수 있는 것으로 이어진다: 전체 다중은 직접적으로 통치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 권력의 직접적 행사를 방해하는 것은 단지 개인들의 압도적 수(양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다. (질적 측면에서) 그들의 자율성 수준에 놓인 인지된 격차 역시 장애물을 이룬다. 사회적·정치적 상상 속에서, 특정 집단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구상되는 반면, 노예, 여성, 아동 같은 다른 집단은 세계 곳곳에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의존적이고 덜 성숙한 것으로 여겨진다. 더불어 사회는 상이한 인종적·종교적 정체성에 다양한 수준의 가치와 인정을 부여하며, 이는 이러한 불공평한 사회적 상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통합된 공화국을 상정하지 않는 한, 한 국가 안에서 시민과 외국인 사이의 격차도 이 불평등의 일부로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다중이 국가 통치 안에서 혹은 국가에 대항하여 직접적으로 현시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며, 이는 네그리적인 급진민주주의나, 일부 아나키즘 조류와 다르다. 『정치론』(11장 1절)에서 기술된 그의 절대적 통치 개념—모든 사람의 통치—은 오직 시민권의 범위를 정의하고 한정하는 제도와 법률을 통해서만 실제로 작동할 수 있다. 국가 제도 없이는 민주주의는 구상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민주주의에 관한 미완성의 논쟁적 장은 변증법적 추론을 통해, 다중의 절대적 통치가 오직 그것을 제약하면서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결코 절대적 형태로 작동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변증법적 추론은 또한 이 장에 대한 정밀한 재해석을 허용한다. 11장 3절의 진술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11장 2절에서 말한 바로부터, 우리가 여러 종류의 민주 국가를 구상할 수 있음은 명백하다”(강조는 필자).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시민에게 투표하고 선출될 권리가 있지만(11장 1절), 스피노자는 자격을 제한하는 조건들을 설정한다(11장 1절). 민주적 법률(lex)은 투표와 국정 관리 같은 권리가 “일정한 나이에 이른 노인에게만, 혹은 장자에게만(나이가 허락하는 대로), 혹은 공화국에 일정한 금액을 기부하는 자에게만”과 같은 특정 인구 집단에 확장되는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11장 2절). 비록 “그러한 법의 결과로 최고 의회가 귀족 국가의 의회보다 적은 수의 시민으로 구성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국가는 여전히 민주주의에 해당한다(11장 2절).
적격한 시민의 다양한 정의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정부 형태의 가변성은 군주정과 귀족정의 분석에서는 논의되지 않는 주제다. 왜냐하면 군주정은 정의상 한 사람의 통치이고, 귀족정은 통치 및 새 구성원을 임명하는 귀족 회의의 배타적인 권리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민주주의에서는 법이 최고 의회의 구성원 자격을 결정하며, 이 의회는 민주적 원칙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모든 사람”을 포괄해야 한다. 이는 민주주의에서 시민권의 정의와 범위에 대한 제한이, 군주정과 귀족정에서처럼 헌정적 형태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안에서의 정치적 협상이나 갈등의 결과임을 의미한다. 이 분쟁들 안에서, 민중의 다양한 구성원들—혹은 다중—은 법과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와 인정을 위해 경합한다. 따라서 “시민”의 정의는 항상 협상과 변환의 대상이 되며, 이것이 민주주의의 여러 유형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한다.
개인적 자율성에 관해서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의 존재론적 논변이 어떤 개체도 자연 속에서 자기 고유의 역량을 본유적으로 소유하지 않음을 주장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4부 공리 1: “자연 속에는 그보다 더 강력하고 더 강한 다른 것이 없는 개별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주어지든, 그 첫 번째 것을 파괴할 수 있는 더 강력한 것이 있다”). 완전한 자율성(“sui juris”)의 개념은 ‘성인 남성 시민’을 포함한 자연 속의 어떤 개체에게도 달성 불가능한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유와 자율성은 개인적 특성이 아니라 국가 안에서 사람들의 공통-되기(commoning)의 과정을 통해 실현되는 집합적 속성이다.
『정치론』 2장에서 스피노자는 “자기 권리 아래에 있음”(sui juris esse)과 “타인의 권리 아래에 있음”(alterius juris esse)의 개념을 상술한다. 폭력을 방어하고, 자기 자신의 판단에 기초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자신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대로 살 수 있는 자는 “자기 권리 아래에”(sui juris) 있다고 간주된다(2장 9절). 반대로 타인의 의지에 의해, 강압이나 조작을 통해 억압되거나 강제되는 자들은 “타인의 권리 아래에”(alterius juris) 있다(2장 10절). 더 나아가 사람의 판단이 타인에 의해 조작되면, 그것은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된다(2장 11절). 타율로부터의 유일한 탈출은 이성의 올바른 행사를 통해서이다: “이로부터 정신이 완전히 자기 자신의 주인인 것은 정확히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한에서라는 것이 따라 나온다”(2장 11절). 그러나 스피노자는 “항상 이성을 사용하고 인간 자유의 최고 정점에 있는 것이 누구의 역량에도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2장 8절). 따라서 자유와 자율성의 정도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함께 수립하는 집합체의 종류에 달려 있다.
네그리의 다중 “이상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워런 몬태그(Warren Montag)는 그의 논문 「누가 다중을 두려워하는가?」(“Who’s Afraid of the Multitude?”)에서 비판자들이 종종 스피노자의 복잡하고 열린 철학적 경로를 따르는 것에 대한 “더 근본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한다(657). 그는 인간 개체에게 imperium in imperio(국가 안의 국가)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스피노자의 거부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더 중요하게, 스피노자는 인간 세계와 자연 사이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권리 개념을 ‘소유하는 것’에서 “행위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변환한다. 이 관점에서, 다중의 일부가 되어 국가에서 사는 것, 즉 사회 계약을 실천하는 것은 항상 하나의 ‘과정’이다. 몬태그는 “사회적 실존은 권력 관계만을 변화시킬 뿐이며, 인간 개인들로 하여금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특정한 일들을 성취할 수 있게 하고, 반대로 혼자서 혹은 소수로는 수행할 수 있었을 다른 행위들을 수행하는 능력을 제한한다”고 말한다(658). 사회적 국가는 집합적 실존의 이점이 그것이 개인들에게 부과하는 제한을 상회하는 한 유용하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시민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시민이 되는 것이다”라고 언급한다(5장 2절). 노예, 여성, 아동의 타인의 권리 아래로의 종속과 그들에 대한 후견은 타고난 운명이 아니라, 그들을 이성적 공동 참여자로 형성하고 인정하는 데 필요한 제도, 법률, 문화, 이데올로기를 결여한 기존 사회 구조의 결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도 시민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시민적으로 되는 것이다.1 또한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새로운 기술이 역사적으로 역량의 행사에서 배제되어 온 집단들의 적극적 참여를 어떻게 촉진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시민권의 범위와 정의가 끊임없이 다투어지는 진행형의 과정이다. 이러한 도전들과 후속적인 제도 변화를 통해, 다중은 모든 시민의 절대적 통치로의 확장을 추구할 수 있으며, “공포보다 희망에 의해 더 이끌리며,”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5장 6절).
여성 배제의 문제
상기한 변증법적 추론에 따라 『정치론』 11장에서 제시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정치로부터의 배제 문제를 살펴보자. 여기서 스피노자는 여성의 “본성”에 기초하여 차별과 배제를 명확히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인다(『정치론』 11장 4절). 이 점에서 홉스는 여성 인권 개념과 관련하여 스피노자보다 훨씬 진보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홉스에 따르면, 여성이 대부분의 사회에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국가 법률이 일반적으로 남성에 의해 기초되었기 때문이다(193–94). 반면 스피노자는 여성을 본질적으로 열등하고 남성에 종속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이 확신이 『윤리학』에서의 그의 철학 체계와 양립 가능한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다.2
내 의견으로는, 11장 4절에서의 여성의 열등한 “본성”이라는 관념은, 특정한 사회적-정서적-상상적 맥락을 고려해야만 그의 『윤리학』의 철학과 조화될 수 있다. 즉, 인간이 두 개의 구분되는 성별 범주로 분할된다고 상상할 때에만 여성의 “본성”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엄격히 반본질주의적 존재론에서는 본질적인 유(類)나 종(種)이 없다. 스피노자가 코나투스—사물이 자기 내부에서 그리고 다른 실체들과의 상호작용으로 특성화되는 지속하는 힘—와 동일시하는 본질은 오직 그 단독성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인간,” “말,” 혹은 “개”는 “보편자”(『윤리학』 2부 정리 40, 주석 1과 2)이거나 “모형”(『윤리학』 4부 서문)이지, 이 이미지들이 재현하는 어떤 실재들의 참된 정의가 아니다.
사람들이 보편자라 부르는 저 관념들, 예컨대 인간, 말, 개 등은 유사한 원인들로부터 발생하였다. 즉, 인간의 신체에 너무도 많은 이미지들이(예를 들어 사람들의 이미지가) 동시에 형성되어 상상하는 역량을 넘어서기 때문이다—물론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신이 개별적인 [사람들의] 미세한 차이들(예컨대 각각의 색과 크기 등)이나 그들의 확정된 수를 상상할 수 없는 지점까지는. 그리고 정신은 그들이 모두 동의하는 바만을, 그들이 신체를 촉발하는 한에서 판명하게 상상한다. 왜냐하면 신체가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가장 많이 촉발되었기 때문이며, 각 개별자가 [이 성질에 의해] 신체를 촉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은 이것을 ‘인간’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무한히 많은 개별자들에게 술어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했듯이, 정신은 확정된 수의 개별자들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위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우리가 많은 것들을 지각하고 보편적 관념들을 형성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 II. 기호들로부터, 예를 들어 특정한 단어들을 듣거나 읽은 후에 사물들을 회상하고 사물들의 특정한 관념들을 형성하며 그것들을 통해 사물들을 상상하는 것과 같은 것들로부터 […]. (2부 정리 40, 주석 1과 2)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념적 쌍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수전 제임스(Susan James)와의 인터뷰에서 로이드(Genevieve Lloyd)와 게이튼스(Moira Gatens)는,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신체, 이성과 정념, 자연과 문화 사이의 이원론은 정당하지 않다고 강조한다(415). 로이드는 그녀의 저서 『자연의 일부』(Part of Nature)에서, 스피노자에게는 자연적 신체와 사회화된 신체 사이의 연속성이 있으며, “‘여성의’ 혹은 ‘남성의’ 정신이라는 것에 특정 가능한 내용이 있을 필요가 없다. 여성 신체의 모든 관념은 표면적으로는 여성적이다. 그러나 이는 그것들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는 여성성의 근저에 놓인 어떤 본질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162). 현대적 용어로 이것은, 『정치론』에서 묘사되는 “남성”과 “여성”이 “사회적 구성물”임을 시사한다. 실제로 스피노자가 여성의 “본성적” 열등함을 논증하고자 하는 바로 그 단락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젠더”라고 부르는 사회적 구성물에 대한 흥미로운 일견을 제공하며, 두 개의 가상적 사회를 묘사한다:
만약 여성이 본성적으로 남성과 동등하다면—성격의 강인함(fortitudo)에서든 타고난 지적 능력(ingenium)에서든, 여기에 인간의 가장 큰 역량이, 따라서 권리가 있는 것인데—확실히 그토록 많고 다양한 나라들 가운데서 양성이 동등하게 통치하는 곳이나, 남성이 여성에 의해 통치되어 자신들의 타고난 지적 능력으로 더 적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교육받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주저 없이 여성이 본성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남성에게 복종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론』 11장 4절, 강조는 필자)
스피노자에게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이른바 “본성적” 열등함은, 그의 현실에서—두 가상적 사회와 대조하여—여성이 모든 곳에서 “남성에 의해 통치되며, 그리하여 자신들의 타고난 지적 능력으로 더 적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교육받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진술은 어쩌면 스피노자 자신이 보여주는 여성혐오적 편견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며3, 사회적 구성물이 어떻게 상이한 집단들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영속시키는지를 부각한다. 즉 평등을 향한 지속적인 정치적 대화와 사회 변혁을 위한 노력 없이는, 현존하는 젠더 관계를 형성하는 이러한 정서적-상상적 유대는 단지 “자연적”인 것으로 지각될 뿐이다.
이성애적 상상이 구조화하고 전통적 젠더 역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본성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주장된다. 동시에 남성은, 현대적 담론의 렌즈를 통해, 독성적(toxic)이 되기 쉽다. 주목할 만하게도,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하는 바로 그 구절에서 스피노자는 추가로 남성에 대한 불만도 표명한다.
나아가, 인간의 정서(affectus)들을 고려한다면, 즉 대부분의 경우 남성은 오직 정욕의 정서로부터 여성을 사랑하며, 그들의 타고난 지적 능력과 지혜를 그들이 아름다울수록 더 높이 평가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들을 편애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남성과 여성이 평화에 큰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동등하게 통치할 수 없음을 보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11장 4절)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도 동일한 좌절의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이 후자의 이유[질투와 연관된 증오의 감정에 대한]는 대부분의 경우 여성에 대한 사랑에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맡긴다고 상상하는 자는 자신의 욕구가 억제되기 때문에 슬퍼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의 이미지를 다른 사람의 수치스러운 부분과 배설물에 결합하도록 강제되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에 마지막으로 덧붙여지는 것은 그녀가 더 이상 질투하는 남자에게 이전에 제공하곤 하던 것과 같은 표정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원인으로부터도 연인은 슬퍼하게 되는데, 이를 나는 보여줄 것이다. (『윤리학』 3부 정리 35, 주석)
이 맥락에서, 특히 홉스를 연상시키는 자연 상태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판단 능력에 관한 동등성의 관념은 핵심 쟁점을 해결하지 못한다: 자연 속에서 누구도 그러한 “자연적” 판단 역량을 제약 없이 행사할 수 있는 진정으로 자율적인 개인이 아니다. 핵심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형성된 “자연적” 격차에 있으며, 그 해결은 바로 이 관계들 바깥에서는 달성할 수 없다. 스피노자의 다른 저작들, 특히 『윤리학』 4부의 몇몇 구절들은—『정치론』 11장 4절에서 추론될 수 있는 것과 반대로—남녀 관계의 재정의나 이 젠더 이원론의 초월을 완전히 불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들었으니 […], 그 남자[아담]가 자기 본성과 완전히 일치하는 아내를 발견했을 때, 그녀보다 더 유용한 것이 자연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하등 동물들이 자신과 같다고 믿은 후에, 그는 즉시 그들의 정서를 모방하기 시작했고 […] 자유를 잃었다; 그리고 그 후에 이 자유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의해, 즉 신의 관념에 의해 인도된 족장들에 의해 회복되었는데,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에만 달려 있으며,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는 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윤리학』 4부 정리 68, 주석, 강조는 필자)
이 언급이 직접적으로 현대적 해방 정치를 지시하지는 않지만, 젠더 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암시한다. 첫째, 그것은 젠더 격차에도 불구하고 “본성에서의 일치”의 수립에 관한 것이다. 샤프(Hasana Sharp)가 주장하듯이, 스피노자는 전통적 해석과 결별하여 남녀 본성의 완전한 일치를 인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이브가 아니라 아담을 비난한다(567). 이는 『정치론』에서의 그의 명시적 진술과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평등주의적 입장을 시사한다. 이 용어에 의해 스피노자가 의미하는 것은 성격이나 성질에서의 본유적 유사성이 아니라, 집단적 실천을 통해 형성되는 통합 혹은 공통성이며, 여기서 ‘자유로운’ 남성은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과 같은 선을 여성을 위해 추구한다(『윤리학』 4부 정리 68, 주석; 또한 4부 정리 37 참조). 「지배와 차이」(“Dominance and Difference”)에서 로이드는 스피노자가 차이를 초월하는 공유된 인간 본성을 계속 긍정하지만, 이를 영혼의 기존적 동일성이 아니라 사회적 전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 달성해야 할 공통성의 이상으로서 긍정한다고 주장한다(38).
스피노자에게, 항상 이상적으로 실현되지는 않더라도,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실천의 장소는 국가 안 이외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국가 안에서 개인들은 다양한 조직 방법(ars)에 의해 공동선 아래에서의 평등주의적 삶을 추구하도록 강제되거나 고무될 수 있다(『정치론』 6장 3절). 국가 공동체는 흔히 차별과 젠더 격차의 원천으로 간주되지만, 스피노자는 동시에 국가만이 그 해결의 유일한 장소임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인용한 주석에서 언급되듯이, 스피노자가 평등주의적 사회의 가능성을 밝히기 위해 종교적 서사를 사용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자유가 전통적 유대-그리스도교적 상상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정말로 믿었는지는 논쟁적이다. 하지만 그의 종교 문제에 대한 정밀한 접근, 특히 『신학정치론』에서 더 명시적으로 다루어지는 이 접근은 다중의 풍습, 행동, 생활세계를 재생산하는 종교적 상상을 변환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변환은 오늘날의 담론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이라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신학정치론』의 논변들 안에서, 그러한 비판이 젠더 관계의 재평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포괄적 답변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 미묘한 힌트가 놓여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평등주의적 공존의 진전은 새로운 서사와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며, 이는 그러나 다중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진화해야 한다. 스피노자의 시대에 그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들과 교섭하며, 그것들의 변환 가능성과 그것들이 보다 평등주의적인 사회로 이끌 수 있는 경로를 탐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결론
스피노자의 이론 틀 안에서의 여성 인권에 대한 고려는 다른 소수자 집단들에 관한 보다 넓은 대화를 연다. 그의 『신학정치론』 16장에서, 그는 자연권의 개념을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하고 자연의 위계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고기들은 헤엄치도록,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먹도록 자연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물고기들이 물의 주인이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는 것은 자연의 최고 권리에 의한 것이다”(『신학정치론』 16장 2절). 『윤리학』에서의 다음의 결정적 진술은 이 물고기의 비유만큼이나 차별적으로 보일 수 있다.
내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은, 한 신체가 다른 것들보다 동시에 많은 일을 하거나 동시에 많은 방식으로 영향받는 것에 더 유능한 만큼, 그 정신은 다른 것들보다 동시에 많은 것들을 지각하는 데 더 유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신체의 행위가 그 자체에만 더 의존하고 다른 신체들이 그것의 행위에 덜 협력하는 만큼, 그 정신은 판명하게 이해하는 데 더 유능하다. (『윤리학』 2부 정리 13, 주석)
만약 우리가 신체들을 존재론적으로 구별되고 독립적인 것으로 본다면, 이 구절은 여성, 장애인, 비인간 동물, 아동을 사회적 참여에서 주변화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듯 보일 것이다. 이런 식의 독해는 비장애인 성인 남성만이 정치적 삶의 유일한 주체이며, 더 적은 능력을 가진 이들의 배제를 함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스피노자 서사의 피상적 의미만을 포착하여 스피노자의 개체들을 홉스적 개체들과 유사한 것으로 묘사하는 셈이다. 스피노자의 신체들은 폐쇄적이고, 원자적이고,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관계들 혹은 다수성이다. 발리바르는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에게서 빌려온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의 개념을 사용하여 스피노자의 개체성 이론을 해명한다. 자연 속의 모든 실체는 실체로서가 아니라 관-개체화 과정으로 파악된다. 스피노자는 개체를 타인과 분리된 내적 의식을 가진 자기 완결적 단위로 보지 않는다. 그는 개체성을 매 순간 그리고 모든 국면에서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재정의되는 지속적 분화의 과정으로 간주한다. 다중이 하나의 개체를 형성하는 만큼이나, 각 개체들 역시 집합적 생성 과정들, 즉 다중이다. 양자는 모두 개체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물들이다.
앞서 인용한 단락에서, 스피노자가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차이와 능력에서의 불평등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 역량의 향상에 대한 추구다. 개체들 사이의 격차는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를 특성짓는 불변의 자연법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과 틀 안에서의 역동적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이 관계들은 다른 요인들이 작동한다면 변화될 수 있으며, 이는 단순히 가해자-피해자 시나리오로 환원될 수 없다. 동일한 개념이 인간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강압적이거나 폭력적인 관계 안에서의 고통은 개인들 사이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불평등은 자연의 절대적 법칙에 따른 것이 아니다. ‘자연’은 또한 개별 인간의 독자성보다 공통성과 연대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대안적 관계 모형을 촉진하는 것을 포함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철학적 탐구는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 사이의 위계적 권력 역학에 대한 단순한 설명을 초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미지는 사회적 구성물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현행적으로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강력한 비유로 여전히 기능한다. 이 구성물 안에서 개인과 집단은 종종 고정된 역할에 배속된다. 마치 영구적으로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가 있는 것처럼, 사회적 역할의 경직된 정의에 갇혀, 그들의 실존을 진정으로 형성하는 인과 관계의 정교한 그물망으로부터 분리된다. 이 환원주의적 분류는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젠더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직물 안의 다양한 정체성에 걸쳐 확장된다. 이주자,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장애인 등이 빈번히 본질주의적 정체성의 부과에 직면한다. 그러한 꼬리표는 내재적 특성이 아니라, 사회적-상상적 그리고 법적-제도적 틀의 산물이다. 이 틀은 정체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개인을 사회적 위계 안에서 겉보기에 자연적이지만 실은 전혀 자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위치시킨다. 이러한 부과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은 『윤리학』에서의 부적합한 인식에 대한 그의 견해와 일치한다. 그는 정체성의 이른바 자연화가 피상적 성질 너머의 개체들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부적합하거나 혼동된 인식의 전형적 사례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의 정치 사상에서의 민주주의의 변증법을 상기시킨다. 즉, 다중—민주주의의 주체이자 집단적 행위자—은 민주주의가 ‘하나의 전체로서의 다중의 통치’로 정의됨에도 불구하고 결코 완전한 전체로서 현시될 수 없다. 대신 다중은 포함과 배제, 갈등과 연대의 과정 그 자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중이 “마치 하나의 정신에 의해 인도되듯이” 그리고 “건전한 이성”에 의해 방향 지어질 수 있도록 민주주의가 얼마나 포용적이고 연대적일 수 있는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결정적이다(『정치론』 3장 7절). 스피노자가 “우리는 민주주의의 여러 종류를 생각할 수 있다”(11장 3절)라고 언급하면서, 군주정과 귀족정에 대해서는 결코 그러한 다양성을 시사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소수자나 다중 가운데 차별받는 부문들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방식의 변환은 집합적 이해와 실천을 지배하는 근본적 원칙들의 근본적 재평가를 요구한다. 이 재평가는 사회적 규범에 깊이 뿌리박혀 있고 제도적 실천을 통해 강화되는 정체성의 만연한 자연화에 도전한다. 이러한 규범적 분류의 토대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스피노자는 묵시적으로 선입견적 위계로부터 해방된 정체성의 상상과 “다른”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초대한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그 민주주의는 새로운 사회적 상상을 수반할 것이며, 어쩌면 우리 시대에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일 지도 모른다. 스피노자에게 여성 참정권, 모두를 위한 혼인평등권, 여성 총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념들이 스피노자의 철학과 모순되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인류가 미래에 이성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공존으로부터 오히려 더 멀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역사 철학은 역사를 관통하는 진보의 관념을 의심하는 듯 보인다(8장 1절; 『신학정치론』 17장 18절). 그러나 이것이 보다 평등주의적인 사회를 향한 전환이 불가능하거나 거의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언제나 다르게-되기의 철학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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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모로(Pierre-François Moreau)는 한 나라 인민의 구성된 집합성을 스피노자의 용어 ingenium(기질, 성격)으로 예시한다(497–465). ingenium은 후천적이거나 역사적으로 구성된 관습과 신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각 인민 혹은 나라에 고유한 본성을 구성한다. 이것은 국가의 구성(constitution, 헌정)이 가능한 자연적 경계를 정의한다. 달리 말하면, 인민이나 나라의 집단적 정체성을 발생시키는 다양한 소속됨의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2: 정치이론 지향의 스피노자 학자들 가운데 샤프(Sharp), 몬태그(Montag), 내들러(Steven Nadler)는 『정치론』 11장 4절에서의 스피노자의 발언이 『윤리학』에서 제시된 그의 철학과 양립 불가능하다고 본다.
3: 우리는 또한 그의 연령차별적, 능력주의적, 그리고 계급에 기반한 편견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6장 11절과 8장 14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 절들은 군주정과 귀족정에서 특정 직업 및 연령 집단, 그리고 장애인의 공직으로부터의 배제를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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