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Materialism}
파트리스 마니글리에 지음
엄정후 옮김
배세진(정치철학자) 감수
[옮긴이의 말] 이 글은 '발리바르'가 특집 주제였던 Political Concepts: A Critical Lexicon 4호에 에티엔 발리바르의 제자인 파트리스 마니글리에가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은 https://www.politicalconcepts.org/materialism-patrice-maniglier/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다루려는 개념은 정치적 개념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개념 일반의 정치성에 대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유물론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은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개념이라고, 혹은 심지어 이것은 개념조차 아니며, 일종의 교리{doctrine}에 불과하다고, 이는 개념들의 체계이며, 그저 관념이나 사유의 경향이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나는 유물론이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의 어떤 점이 정치적인지에 대해 다룬다는 정확히 그 이유로 정치적 개념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의 형이상학은 개념적 일관성을 구축하고 탐구하는 활동으로 여기도록 하겠다.
최근에 "사변적 실재론"이라고 불리는 것의 부상과 함께 유물론이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이 재부상하였다. 주목해야 할 것은 퀑탱 메이야수가 자신의 철학적 입장에 대해 사변적 실재론이 아닌 "사변적 유물론"이라고 명명한다는 점이다. 또한, 프랑수아 라뤼엘의 작업에 대한 최근의 관심도 그가 유물론적 입장을 세공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1 이러한 관심은 주로 메이야수가 (개념의 사용에 불과한) 순수 사변을 통해, 칸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객관적 진리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 진리는 사유와는 근본적으로 독립적인 존재(즉 물질)를 구축하게 된다. 어떤 이는 새로운 철학적 유행의 비정치적인 차원에 대해 한탄한다.2 그들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유물론에 의해 제기된 더욱 심도 있는 문제에 대해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변적 유물론'이 되돌려낸 가장 중요한 지점은, 말하자면 형이상학이 일반적으로 정치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문제이다. 보다 상세히 말하자면, 우리는 형이상학을 없앨 수 없고, 형이상학 역시 정치를 없앨 수 없다. 이 점이 사변적 유물론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때 중점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지점이다.

내 관점에서, 에티엔 발리바르의 작업이 현대 철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두 요건3을 지속적으로 충족했다는 점이다. 후술할 글은 발리바르의 사유 전반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작업, 더 정확히 말해, 작업들의 문제 설정을 특징지으려는 시도이다.
나는 이 서론이, 또한 유물론이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대한 답변이 되었기를 바란다. 유물론은 과제{task}에 대한 개념이다. 내 생각에는, 이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밝히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개념은 실천을 위해 중요하다{matter}. 왜냐하면 이는 우리의 문제를 진단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1. 독단주의적 유물론{Dogmatic Materialism}
유물론이 정치와 관련이 있다는 관념은 우리 대부분에게 당연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 개념이 마르크스에 의해, 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많은 이들에 의해, 또 공산주의 체제에 의해 사용되어(특히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역사 유물론"과 같은 유명한 어구들)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연관을 이미 승인되었다고 받아들이는 것을 삼가야 한다. 이 연관은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유물론" 항목을 보면 '정치'라는 단어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유물론"을 다음과 같은 명제를 통해 물리주의와 동의어로 정의하는데, 내가 지금부터 유물론자의 신조{Materialist Credo}라고 부를 것이 그것이다. 유물론자의 신조란 "모든 사실(인간의 심리와 의지 그리고 인류 역사의 경로에 대한 사실을 포함하는)의 원인은 물리적 과정에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리적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음."4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물론은 관념론과 대비되는 것으로(정의되며: 옮긴이), 관념론은 어떤 식으로든, 비-개념적이거나 물리적 과정에 대한 개념의 자율성을 주장한다. 이 자율성은 원인이자 설명적이고, 따라서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이다. 즉 이것은 관념론은 첫째, 개념이 다른 개념을 촉발하거나 비-개념적 영역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개념이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둘째, 개념은 스스로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관념은 자기-기술적일 수 있으며, 관념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정의된 유물론은 즉각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의 정의는 우리가 유물론자의 신조에 대해 말할 때 표현한 바로 그 "관념"이 그 자체로 물리적 과정에 의존적이거나 심지어 그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물리적"이다. 혹은 적어도 그 개념이 세계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개념에서 유래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배후에서 혹은 아래에서 작동하는 물리적 과정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게 사실이라면, 이것은 유물론자의 신조가 단순히 특정한 물리적 상황을 나타냄을 의미한다. 이를 유물론자의 방식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를 고수해야 할지 말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나는 내가 유물론자의 신조를 지니도록 유발하는 물리적 과정의 상황 속에 놓여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유물론 철학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조를 옹호하기 위해 논증하며 개념을 생산하고, 이미 통용되는 개념을 그들이 납득시키고 싶어 하는 개념과 연관 지으려 한다. 또한 그들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른 방식을 택했다면 무한 퇴행 속으로 빠져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물리적 상태가 실재한다는 인식 자체가 하나의 판단이며 그리고 그것은 유물론자의 근거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는 등. 달리 말하자면, 유물론자는 수행적 모순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행한다.
내가 방금 제시한 논증 전략은 최소한 데카르트부터 시작된 전형적인, 모든 '관념론자'의 전통이다. 이는 칸트에 의해, 이후 후설을 거쳐 주류의 입장이 되었다. 현상학의 성공(최소한 프랑스에서는)에는, 제거하기 위함일 때조차도 상정되어야 하는 의식에 근거해 유물론을 상대하는 강한 논증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이 큰 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논증의 가장 명확한 형태는, 플라톤을 중요한{critical} 철학자로 만든 카시러의『상징형식의 철학』의 서론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5 카시러에 따르면, 관념론은 비판의 힘을 가지는 반면, 유물론은 필연적으로 독단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2. 비판적 유물론{Critical Materialism} (마르크스와 엥겔스)
나는 유물론자의 신조를 믿는 사람들은, 심지어 그게 명백하게 가장 통속적인 형태이더라도,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닌다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체로 비판적일 뿐만 아니라(우리가 앞서 살펴본 유물론자의 신조에 대한 비판에서 확인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작용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수행하는 행위 자체의 명백하지 않거나 억압된 가능성의 조건을 환기한다.), 우리가 방금 살핀 비판이라는 바로 그 개념---관념론자의 비판---에 실질적으로 비판적인 다른 형식의 유물론에 대해 상기하고자 한다. 이 형식의 유물론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다양한 곳에서 제시하고 예증한 그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유물론에 대한 변호의 논증은 바로 반대편의 관념론이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이는 관념론자가 비판적이라는 것을 사변적이거나 이론적 결정에 한정되는 것으로 전제하는 바로 그 때문이다.6(예를 들어, 유물론자들이 저질렀다고 여겨지는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그들 개념의 비일관성을 지적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비판이라고 여겨진다.) 우리가 알고 있듯,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어떤 관념은 그것이 지적 차원에서 비판되었다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한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특히, 예를 들어, 종교적 관념은 우리의 실존적 현실{reality of our existence}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실질적 비판은 현실 그 자체를 바꾸는 것, 즉 혁명 그 자체이다. 따라서 다음의 유명한 구절: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현실을 여러 방식으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이 도출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유물론에 대한 정의 중 여기서도 유지되는 것은 개념의 타율성{heteronomy of concepts}이라는 통념{notion}이다. 그러나 이 타율성은, 오직 개념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이미 식별된 개체(예를 들어, "물리적" 대상)의 차원으로 환원되는(따라서 우리가 방금 살핀 악순환을 생성하며)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제시된다. 더 나아가, 이 타율성은 온전히 사변적인 관찰에 의해 이해되는 게 아니라, 개념의 자율성과 타율성에 대한 사변적 고려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질문함을 통해 이해된다. 다시 말해, 유물론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비-개념적 전제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서 반갑지 않은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개입해 우리의 논의를 가로막고, 논의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게 바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사실이라고 하자. 내가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면, 내가 추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침실에서 잠을 자지 못했다면,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한 컴퓨터가 없었다면 등등, 나는 지금 이런 논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개념을 개념으로서 볼 수 있는 것은(We can care for ideas as ideas), 우리의 삶이 다른 이들에 의해서 돌보아지기 때문이다(because our lives are take care of by others). 유물론자의 직관은 다음과 같은 옛말과 관련이 있다.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생각하기 위해서는, 생존해 있어야 한다)." 철학자들은 개념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 다수의 개체들은 개념 없이도 살 수 있다. 이것은 인식론적이고 형이상학적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정의의 질서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알튀세르가 장 라크루아(이전에 그의 철학 교수였던)에게 보낸 편지에 썼듯이, 철학자는 다른 동료 인간으로부터 그들의 세계와 삶을 받고, 그 답례로 그들에게 개념을 돌려준다. 그렇기에, 알튀세르가 이어 말하길, 우리가 반드시, "그들과 언어와 진실을 함께 나누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그들이 우리와 빵을 함께 나누듯이."7 여기서 빵은 '물질들'{materialities} 중 하나다. 즉 개념적 활동의 비개념적 조건 말이다. 젠더, 인종, 계급, 식단, 건강 등 또한 이 조건 중 하나이다. 이것은 철학적 차원에서만 진실인 게 아니라, 일반적 차원에서의 진실이다. 사유는 지적 관심이 아닌 다른 요구로부터 계속해서 생겨나고 또다시 생겨난다. 철학은 한 사유가 그 자체로 사유 가능한지 시험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사유 가능성 자체는 결코 그 사유를 어떤 의미에서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너무 사소한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유 중 가장 깊이 있는 것 중 하나이며, 너무나도 깊기에 오히려 '깊이'라는 통념 자체를 문제시할 정도이다. 이 형식의 유물론의, 즉 비판적 유물론의 요점은 이것이다. 사유는 이차적이라는 점{thought comes second}. 이것은 사실 그 누구도 아닌 레닌이 엥겔스의 "유물론자에게는 자연이 일차적인 것이요 정신은 이차적인 것이라고 보는 데 반해, 관념론자는 그 반대로 본다"8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며 스스로 정의한 유물론의 정확한 요약이다. 그러나 무엇이 일차적인지 구체화하는 것은 비판적 유물론이 허용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일차적이든 간에, 사유와 이질적이며, 사유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비판적 유물론은 정신(마음, 사유, 개념 등)은 이차적이라고 말할 뿐이다. 혹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전도한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차적인 것이다, 혹은 나는 뒤따르는 존재이다{Ego secundus, or A me sequitur}. 이것이 내가 유물론의 공준{Materialist Postulate}이라 부르는 것이다(유물론자의 신조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9 우리가 이 이차성을 단언할 때 하고 있는 일의 이차성이 유물론의 핵심이다.
이 단순한 주장으로 인해 일어난 많은 전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언급하는 게 필수적이다.
첫째,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따라서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존재, 현실, 객관성, 물질, 당신이 뭐라 부르든)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그것(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 옮긴이)이 오직 감각에 의해서 접근될 수 있다거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원자, 공간, 힘과 같은 비경험적 실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철학사에서 나타난 유물론에 대한 두 가지 해석 방식을 언급하자면 말이다.).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사유 자체의 존재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질에 대한 어떤 주장이라도 그 속에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요소(사유: 옮긴이)에 대해 말하는 것, 즉 사유는 이차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우선적으로 오는 것은 사유의 원인이다. 문제는 원인이 마음(혹은 개념 일반) 이전에, 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마음(혹은 개념 일반)을 어떻게 유발하는가이다. 유물론은 동일한 질문에 대해 관념론과는 다르게 답변한다. 유물론은 사유의 대상("실제로는 어떤 상황인가?")에 관해 묻지 않는다. 사유가 대상을 재현한다고 추정하는 것은 관념론자의 가정이다. 그 대상이 "물질"이라 주장되더라도. 유물론자는, 오히려, 사유는 존재와 연속적이라고---그것이 다른 어떤 것의 작동이라는 의미(당신이 "물질"이라 부를 어떤 것, 당신이 "우선적으로 오며, 인과적 힘이 있는 것"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자제한다면)에서---주장한다. 사유는 무언가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선적으로 무언가 속에{within} 있는 것이다. 혹은, 좀 더 간결히 말하자면, 사유는 자신보다 큰 무언가에 포섭되어 있다. 그것은 사유가 척도가 될 수 없는 것이며, "객체적인 것"{"objectlike"}도 아니다. 관념론은 이와 반대의 주장을 한다. 즉 사유가 모든 것을 포섭하는데,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게 무엇이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효과인 사유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 대해 사유가 기여하는 것이며, 존재는 사유에 의해 재현될 필요가 없다.10 존재는 우리가 사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셋째로(그리고 결과적으로), 유물론은 중요한 요소를 즉각적으로 포함시킨다. 만약 비판이 주장된 결과에 맞서 어떤 활동의 억압되었거나 뚜렷하지 않은 조건을 상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실제로, 여기서의 유물론은 철학적 교리가 아니라, 그러한 철학적 교리를 옹호하는 것의 중요성 일반의 강한 상대화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로 원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결과만이 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유물론은, 그러므로 철학적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철학적 실천 그 자체의 수정이다. 또한 일반적인 학문 분야의 실천 그 자체의 수정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음속에 이 세 가지 주장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마주한다. '내가 지금 당장 하고 있는 것, 즉 유물론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나 유물론이라는 개념을 명료화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다 함께 철학을 내려놓고 유물론을 철학적 입장에서 접근하려는 시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하는 건 아닐까?'
이 질문은 이중적이다. 첫째로, 유물론의 공준에 따르면 철학을 실천할 가치가 있는가?, 둘째로, 유물론의 공준은 철학의 가치(즉, 사변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메커니즘)를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될, 원인의 영역에 대한 어떤 확실한 주장을 담고 있는가? 달리 말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옮긴이) 유물론의 개념이라는 특정한 개념을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그러한 시도의 가능성을 비판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비판과 구축은 손을 맞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유물론의 고유한 특성이다.
우리는 유물론 자체의 비판적 힘과 양립할 수 없는 어떠한 것도 전제해서는 안 되므로, 우리는 오직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할 수 있다. 유물론의 공준의 내용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에 그 자신을 비판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 이상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유물론의 개념에 대해 말할 때, 개념 일반을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를 동시적으로 비판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을 말해서는 안 된다. 유물론은 여기서 개념으로서의 유물론을 비판하는 힘에 지나지 않는다.
3. 사변적 유물론{Speculative Materialism} (레닌)
우선 질문을 하나 해보자. 왜 실천으로서, 삶의 방식으로서, '물질적' 현실로서의 유물론에 개념적 명료화나 사변적 구축이 필요한 것일까? 유물론의 개념이 유물론자의 실천에 무엇을 보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유물론자의 실천을 실제로 살피며 언제, 어디서, 왜 그리고 어떤 효과에 의해 그들이 개념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보거나, 보다 단순히, 개념적 명료화가 어떤 효과를 주는지 봐야 한다. 우리는 내가 옹호한 의미에서의 비판적 유물론의 이름으로 행해진 사변적 개입의 사례를 몇 가지 떠올릴 수 있다. 몇 가지만 언급해 보자면,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에서의 마르크스, 19세기 말에 "변증법적 유물론"을 만들어 냈을 때의 엥겔스, "비판적 유물론"의 몇 가지 몰이해를 바로잡기 위한 작업인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의 레닌, 그람시의 지적 여정에서도 자주 보이고, 알튀세르는 그의 모든 작업에서, 최근에는 발리바르에서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왜냐하면 이것이 내가 언급한 작업 중 가장 예상외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굉징히 사변적인 책이다. 여기서는 어떤 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주제, "물자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요점은 물질에 대한 정의가 과학의 발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물질이 선행하고 사유를 결정한다는 사실은 "무조건적인 것"으로 그리고 "절대적 진리"로 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11 "운동하는 물질의 구조와 형식에 관한 과학적 인식의 가변성이 결코 외적 세계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간의 표상들의 가변성도 또한 시간과 공간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하지 못한다."12 이 절대적 진리는 우리가 유물론의 핵심이라 파악한 것이며, 이는 비-사유의 사유에 대한 우선성이다. 이것이 사변적인 방식을 통해 사실이라 정립될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내용이지만, 이것은 반드시 정립되어야만 한다:
"물질과 의식 간의 대립은 극히 국한된 범위 내에서만---이 경우에 있어서는 무엇이 일차적이고 무엇이 이차적인 것인가 하는 인식론상의 근본문제의 범위 내에서만---절대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범위를 넘어서면 이 대립은 물론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는 것이다."13
유물론은 따라서 사변으로 뛰어드는 게 요구된다. 왜냐하면 오직 사유의 행위만이 인간 경험 너머의, 또 이전의 절대적이고 불확정적인 어떠한 존재를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레닌은, 수많은 정치적 활동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1908년에, (전-후설적 현상학의 형식의, 혹은 내가 형이상학의 세 번째 물결이라 부르고자 하는 것의 형식의) 마르크스주의를 정초할 만한 타당한 근거를 발견했다고 믿은 마흐와 아베나리우스에게 대응해야겠다는 필요를 느꼈을까? 초판 서문의 첫 문단은 그 이유를 매우 명확히 밝히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실은 "아무 두려움도 없이 노골적인 신앙주의{fideism}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주의는 그가 "교권주의"{clericalism}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검열로 인해 사용한 단어다. 교권주의는, 그럼에도, 여기에서 문제는 어떤 신앙이나 믿음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어떻게 권력 기구로서의 교회를, 불의가 사라지는 사후 세계가 있다는 발상을 통해 현실에 대한 순응과 체념을 견고히 하는 기관을 제거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그러므로 유물론은 계속 존속하고 싶다면 사변화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물질이 모든 것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어떤 권력관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덧붙이자면, 이렇게 이해된 교회는 사변적 문제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이 되는 장소로 정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논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레닌이 왜 관념을 두고 싸우는 게 권력을 두고 싸우는 것에 도움이 될지도 모를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닌은 이를 당연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맹점이 관념론이 자신을 손쉽게 재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우리가 관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단순히, 잘 알려져 있고,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경험할 수 있고, 우리가 사유하는 방식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유물론의 중요성을 관념론자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명료화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보편적인 개념적 명료화를 할 근거가 없으므로, 지식에 대한 의지도 더 이상 원칙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으므로 레닌의 사변적 유물론의 이 맹점이 중요한지의 여부도 열린 질문으로 남는다. 어떤 교리가 틀렸다고 여겨지기 위해 불완전성이나 비일관성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틀렸다는 사실이 그 교리의 주된 목적에 영향을 미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 레닌에게는 중요한 문제일 텐데---그리고 바로 그 동일한 이유로 경험비판론과 맞서는 게 중요할 것이다. 실제로, 잘못된 관념과 맞서는 게 그것을 이용하는 권력과 맞서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사변적 관념과 삶을 변화시키는 행동 사이의 관계를 그와 같은 잘못된 관념들에 근거하여 이해해서는 안 된다.14 우리가 그 권력에 맞선다는 관점에서 그 관념과 맞서는 우리의 바로 그 노력을 그 관념이 설명하는 방식을 포함해서, 우리는 그것의 기반을 모든 곳에서 약화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레닌이 교권주의에 맞서는 일은 관념주의적 통념을 우리의 가장 깊은 직관에서까지 추방하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하는 스스로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레닌에게 교권주의는, 단순히 관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교권주의라는 문제를 포함해 문제를 접근하는 일반적인 방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실은 그것은, 지적 개입의 한 양식{style}이다.
마흐와 아베나리우스에 의해 매혹된 (형이상학의: 옮긴이) 세 번째 물결의 유물론자들은, 유물론에 대해 그릇된 관념을 제시하기에 그릇될 뿐만 아니라, 문제를 순전히 지식인으로서, 교수로서, 문제가 그 자체로서 흥미로운 것으로 접근했기에 그릇되었다. 반대로, 진정한 유물론자는 이 문제를 혁명적인 것으로, '이것이 강력한 노동 계급 집단을 형성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라는 질문을 품고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차이는 이런 문제에 대해 교수들이 서술하는 바로 그 방식에서 드러난다. 그들의 방식은 레닌의 방식과는 대비된다. 그들이 문제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고 개념적 복잡함 그 자체에 의해 매료되고, 이를 마치 사색과 미적 만족의 대상으로(물론, 의심할 바 없이 그렇다) 다루는 동안, 혁명 세력은 명확한 행동 지침을 찾고, 필요한 경우에 논의를 단순화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차이를 그것이 낳는 결과의 관점에서 평가하려 시도하는 등을 한다. 교수들이 관념만을 평가하고 명제에 대해 논박한다고 주장하는 와중에, 레닌은 사람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ad hominem}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로, 여기서 제기된 질문은 단순히 말해진 것이 참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특정 표현에 의해 어떠한 종류의 삶이 촉진되었는가이다.
달리 말해 레닌에게 유물론은, 내용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양식의 문제, 문체와 삶의 양식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삶이란 말하는 자의 존재를 지속시키는 모든 관계망을 의미한다. 교수들이 사는 방식은 그들로 하여금 유물론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들이 유물론을 진심으로 믿을 수는 있지만, 삶의 양식으로서 유물론에 기여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생각하도록 돈을 받는다. 지적 노동자로서 그들의 정체성은 지적 노동이 지적이지 않은 삶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들은 마치 제대로 생각하기 위해 삶의 다른 측면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그들의 발언이 간접적으로 함축하는 바로 인해 교권주의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바로 그 방식으로 인해 교권주의에 기여한다. 그들은 성직자로서 살아가고, 교권주의는 교리나 제도적 구조가 아니라, 사유와 삶이 분리되어 전문 지식 노동자를 생산하는 노동 분할이 만들어지는 상태 자체를 일컫는 이름이다. 유물론은 따라서 올바른 사유를 점하거나 생산하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유물론은 지적 활동과 다른 활동을 잇는, 전자가 후자와 분리되지 않는, 연결 방식을 요구하므로, 이론을 실천하는 다른 방식을 요구할 것이다. 이는 이론이 삶의 연결망 속으로 삽입되는 방식이라는 의미이자 그것이 전달되는 양식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교수들의 기여를 모두 폐기해야 할까? 이는 나를 시작으로 여기 있는 모두의 자격을 즉시 박탈할 것이다. 게다가, 사유의 분리 혹은 자율성 전반을 기각하고, 관념의 가치를 그것의 정치적 투쟁에서의 기능으로 환원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지 않는가? 리센코의 "프롤레타리아 과학"이라는 형편없는 사례는 이러한 발상이 우리의 지적·정치적 삶에도 초래할지도 모르는 황폐함을 환기한다. 우리는 앞선 논의를 조금 더 이끌고 가서, 일반적인 인간 노동의 일부 영역, 그리고 특히 지식 노동의 일부 영역을 무상화{gratuitousness}시키는 게 정치적 쟁점이며, 또한 특히 무상 노동이나 해방과 같은 통념은 공산주의적 가치와 양립 불가능한 게 아니라고 강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의미한 소비(원한다면 바타유적 의미에서)는 공산주의적 가치로 여겨질지도 모르고, 투기는 무상에 가장 적합한 예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닌의 입장을 리센코의 입장과 유사한 것으로 귀속시키려는 것은 명백한 오독이다. 실제로, 모든 지적 활동이 특정 정당에 봉사하고 있다고 밝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철학만이 그렇다. 과학적 실천은 이러한 운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레닌은 짧지만 분명하게 이에 대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말한다.
"이 교수님들께서 화학, 물리, 역사 같은 전문분야에서 아무리 귀중한 업적을 낼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철학에 대해서 그들 중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정치경제학 교수들이 실제적이고 전문화된 연구를 통해서 아무리 귀중한 업적을 낼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정치경제학 일반이론에 관해서 그들 중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이다. 정치경제학의 일반이론은 현대사회에서는 인식론과 같이 당파적인 학문이다. 대체로 경제학 교수는 자본가계급의 유식한 점원에 불과하고, 철학 교수는 신학자의 유식한 점원에 불과하다."15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왜 과학은 상대적으로 정치적 투쟁에서 자유로울까? 왜 철학은 반대로, 필연적으로 "당파적인 학문"이 되는 걸까? 레닌은 여기서 많은 단서를 주지 않는다. 그는 "특수"한 학문과 "보편"적 학문의 차이가 이 문제의 핵심이라 시사한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가? 물질적 갈등으로부터 특수한 주장은 왜 보편적인 주장보다 독립적인가?
레닌은 몇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남긴다. 우리는 두 가지에 집중할 것이다.
(1) 우리에게 철학과 비교해 정치적 투쟁의 측면에서 과학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타당한 유물론적 개념을 지니고 있는가?
(2) 왜 이론에서 계급 투쟁의 무게를 견디는 게 철학인가? 그리고 우리는 개념적 사유가 어떻게 계급 투쟁에 기여하는지에 대해 타당한 유물론적 설명 방식을 지니고 있는가?
유물론의 역사에서 알튀세르의 개입이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이러한 문제를 직면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기여에 대해 논해 볼 것이다.
4. 구조적 유물론{Structural Materialism} (알튀세르)
유물론 내에서, 그리고 유물론을 위해서 철학이 어떤 역할과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알튀세르 전체의 작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알튀세르가 1947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것이 그의 가장 일관된 결단의 귀결이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보여줄 수 있다. 이 결단은 철학이 곧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사르트르가 말했듯, 마르크스와 함께 일어났다. 우리의 논의를 위해, 우리는 알튀세르의 기여를 두 가지 테제로 요약해 보겠다.
(1) 과학은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다(모든 구조가 그렇듯이).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산 양식에 자신의 구조적 유한성을 내면화하는 방식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2) 철학은 과학적 활동이 정치적 문제와 맞닥뜨리는 정확히 바로 그 지점이다. 이는 정치의 본성 자체, 즉 정치의 물질성과 관련된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구조라는 통념과 관련된다. 따라서 진정한 유물론의 존재는 결국 구조적 유물론인 것으로 드러난다.
(1) 우선 첫 번째 테제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과학은 인간 실천의 일반적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학은 이 법칙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이는 그것이 지닌 어떤 기적적인 성질 때문이 아니라, 실천 일반이 자율성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기 때문이다. 이 자율성의 일반적 이유는 실천이 구조화{structured}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구조라는 개념은 알튀세르가 "심급"{levels}이라고 부르는 것의 자율성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구조는 어떤 인간 실천의 특정 측면은 오직 동일한 실천의 다른 측면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언어는 이에 대한 좋은 예시이다. 어떤 음소의 존재 자체는 다른 음소의 존재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외국어의 이름(예를 들어, 일본어)을 처음에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뿐만 아니라, 지각하는 것에조차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이러한 지각 자체가 차이적이기 때문이다.16 언어의 소리는 단순히 독립된 물리적 신호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차이들의 작용을 배경으로 지각 속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여기서 언어적 개체의 존재 자체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하자. 구조는 이미 주어진 개체의 집합의 원리가 아니라, 상호 간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개체들의 구성 원리이다. 논의를 전개하기 전에 이것이 언어가 모든 비-언어적 영향이나 역사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상기하도록 하자. 이것은 언어에 가해진 힘이 무엇이든 체계의 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회적 구별의 요인은 특정 역사의 시점에 프랑스어 화자들이 어말의 "e"를 묵음 처리하기로 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선택"이 가져올 체계적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고, 결과를 피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 동사의 활용 체계 자체가 변화해야만 했던 것이다.17
이러한 자율성의 개념을 구성하기 위해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구조주의"를 특징짓는 몇 가지 테제를 제시한다.18
첫째, 구조들은 인간 실천{Praxis} 일반으로 환원되거나(알튀세르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가장 대표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하듯이), 어느 구체적인 구조로, 혹은 어느 특정 경제적 과정으로 환원(인간주의와 맞닿아 있는 경제주의가 하듯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조는 각자만의 논리를, 즉 고유의 체계적인 방식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함의한다. 그것은 다른 구조의 논리와 동형적으로 중첩될 수 없다. 따라서 괴리{décalage}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둘째(그리고 동일한 이유로), 이러한 구조의 존재와 본질은 초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의 다양한 변이 아래에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하나의 보편적 실체를 식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모든 사회가 우리 사회의 경우가 그렇듯 언어, 경제, 친족, 종교, 정치 등으로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이러한 서로 다른 층위{layers}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층위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종교, 정치, 관념 등은 구조적 관계의 맥락에서, 즉 비판적 방식으로 재정의될 필요가 있는 필연적으로 애매모호한 통념이다.
셋째, 이 자율성은 상대적일 뿐이다. 그것은 구조의 범위가 일정한 수의 행위에만 미치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어느 하나의 특정 "층위"에, 구조적 층위의 다양한 변이(층화{stratification})들이 규정되는 생산의 층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은 층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경우의 층위화의 원리{principle of layering}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조적 유물론과 독단주의적 유물론의 차이는 바로 전자가 환원주의를 회피한다는 점에 있다. 이는 전자가 주된 원인, 즉 물질을 어떤 특정한 실체적 준거면{substantial plane of reference}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적 유물론은 우리의 실천이 지닌 타율성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그리고 이 타율성이 어떤 수단을 통해 작동하는지 이미 안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구조적 유물론은 바로 그러한 점(알지 못하는 점: 옮긴이)을 우리가 언제나 새로이 탐구해야 하는 이유로 삼는다. 이것은 역사를 연구하는데 쓰인 추정상의 보편적 범주(역사라는 통념 그 자체를 포함해)를 상대화해야 한다는 의미이기에 비판적이다.
넷째, 상대적 자율성은 이러한 층위가 단순히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서로의 대비("괴리")를 이루는 체계 속에서 차이적으로 존재한다. 종교는 특정 사회 내에서 자신을 정치나 가족으로부터 구분해 주는 차이의 집합을 통해 존재하는 등, 구조적 원인은 현실의 특정한 실체적 층위가 아니라, 하나의 구조화된 층위를 다른 것과의 거리를 통해 구분되도록 하는 간극, 상이함, 차이의 체계이다. 달리 말해, 알튀세르는 소쉬르의 구조 개념을 이용해 각 층위의 체계적 구성을 사유할 뿐만 아니라, 구조들 사이의 관계를 사유하며, 이것이 그가 환원주의와 관념론 모두를 피할 수 있는 까닭이다. 구조라는 개념은 유물론적 전통이 필요로 했던 원인의 통념을 제공한다. 즉 원인은 어느 특정한 실체적 존재로부터 발견될 수 없다는 간단한 이유로 "부재"하는 것으로 불릴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히 원인이다.
앞선 이유를 통해 우리는 구조라는 통념이, 결정론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며, 실천의 여러 층위 자체의 근원적인 우발성의 개념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의: 옮긴이) 유한성19은 각각의 구조화된 체계 안에, 그것을 둘러싼 공백들, 곧 그 체계가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속에 새겨져 있다. 구조에 의해 열린 체계적 공간 안에 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건들도 실제로 발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은 인식되지 못할 것이다. 즉 그들은 포착될 수 없는, 사라지는 사건으로 행해질 것이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전 작업{corpus}에서 이러한 상황의 많은 예시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구조 일반의 특성이다. 이러한 포착되지 않는 지점들을 통해 상이한 구조들은 서로 소통한다.
이것은 감명 깊고 설득력 있지만, 이를 통해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서지는 못했다. '만약 모든 구조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면, 무엇이 과학적 실천에 특수한 것인가? 왜 그것 또한 구조화된 실천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이나 종교에 비해 계급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일까?' 여기서 그 (안) 유명한 "인식론적 절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알튀세르는 이 개념의 엄밀한 구성에 대해서는 여러 입장을 취했지만, 그는 이를 절대 폐기하지 않는다(그가 "자기비판"20에서 명확히 밝히듯 말이다.). 매우 복잡한 논리 전개가 필요한 것을 아주 단순화해서 요약하자면, 우리는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차이는 전자가 자신의 문제설정의 공간(그것이 구성하는 가능성의 공간이며, 우리가 살펴보았듯, 필연적으로 그 자신에 새겨진 유한성의 흔적을 포함하는)을 인위적으로 봉쇄하거나 폐제하려는{locking or foreclosing} 반면, 후자는 자신의 유한성(또한, 동시에 개방성이기도 한)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유한성을 통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은 자기자신의 구조적 유한성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려는{tries to let itself altered} 실천이다. 따라서 과학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정확히 재현한다는 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특징짓는 생산 양식을 통해, 스스로를 통해 자신의 작업 체계{working system}를 끊임없이 상대화하는 생산 양식을 통해 규정된다. 과학이 유물론적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지, 모든 것을 결국 하나의 실체적 준거면으로 환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2) 그렇다면 철학은 어떨까? 이에 대해 알튀세르의 입장은 크게 변해왔다. 처음에 그는 기본적으로 정치나 과학의 급진적 변화를 수반하는 방법{way to accompany}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철학이 어떠한 주도권도 잡을 수 없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그의 후기 저작에서 그는 자신의 교리를 수정하고 철학을 "이론에서의 계급 투쟁"으로 재정의한다.21
알튀세르의 작업의 상당수는 물론 (구조주의에 근거해) 모순이라는 유물론적 개념을 생산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 스스로가 갖고 있던 잘못된 철학적 관점을 바로잡는 데 헌신했다. 그는 이를 통해 일관된 사변적 유물론을 체계화하는 과제를 완수했다. 하지만 우리는 실은 헤겔적 의미의 모순과 유물론자의 전제는 양립 불가능하다는(모순은 논리적 개념이 되고, 어떤 것이 자기모순적이라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관계 속에서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따라서 이는 관념론의 입장에서 논의하는 것이 된다.) 점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는 심지어 알튀세르의 개념적 체계는 유물론이 필요로 했던 관념의 존재론이라는 점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어떻게 개념이 우리가 어떻게 행위를 하는지에 영향을 끼치는가(우리가 어떻게 역사과학을 생산하려고 하는가를 포함해)?' 여기에 대해서, 알튀세르는 주저한다. 우리는 심지어 이 질문이 모든 것을 멈춰 세우고 다시 시작하게 하는, 그의 작업의 핵심적인 원동력이자 주된 흐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철학자로서의 삶이 헛된 삶(기생물의 삶, 빚에 시달리는 삶, 심지어 우스꽝스럽기까지한 삶)이었다는 의심뿐만 아니라, 혁명을 위한 사변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점을 정당화하려는 결단이 헛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알튀세르의 철학적 그리고 개인적 삶 동안 지속된 고민이었다. 그 결과, 이 질문을 풀려는 노력의 행보를 알튀세르의 전 작업에서 추적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끊임없는 노력의 최종적 정식화가 최근에 발행된 유고집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22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알튀세르의 철학 체계를 '왜 사변은 중요한가?'에 대한 답변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이만큼 완전하고 상세한 답변을 어느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에서 알튀세르 입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i) 철학은 총체화하는 관점들의 브리콜라주이며, 이는 존재하는 대상 그리고 비존재의 대상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것에 대한 담론이다. 이것 자체 또한 총체화하는 수단, 즉 개념적 체계들---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튀세르의 말을 빌려, 구조들을 통해 성립된다. (ii)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실천들이---물론 다양하더라도---통일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각 실천에는 고유의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수반되기에,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적 기능을 확고히 하는 것, 즉 한 지배에 대한 다른 계급의 지배를 후자의 세계관을 전자의 세계관에 포함함으로써 공고히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중요한 범주는 총체성이라는 범주이다. 철학은 알튀세르에게 형이상학에 대한 어떤 관념으로, 혹은 적어도 사변적 사유에 대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변은 다른 활동에 부가적인 어느 전문적이고 선택적인 활동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이미 대중에게 분산되어 있고, 모든 실천의 존재 자체의 조건들 중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알튀세르는 따라서 모두가 생각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한다. 사변은 임의적인 게 아니라, 우리 삶의 필연성에 깊이 뿌리내린 활동이다. 그럼에도, 관념론적 전통 전체와는 다르게, 그는 사변을 어떤 형이상학적 필요를 통해 정초하는 게 아니라, 실천적 삶의 필연성에 그 자체로 뿌리내린 계급 투쟁의 논리를 통해 정초한다(첫째로, 생산이 착취를 필요로 하기에 갈등이 발생하고, 둘째로, 착취는 궁극적으로 그람시적 의미의 헤게모니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사변 일반이 아니다. 예를 들어, 종교는 다른 방식의 사변이다. 심지어 레비스트로스적 의미의 신화가 철학과 동일한 통일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다.
알튀세르가 주장하길 철학적 사변은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그것은 특정 범위에 특화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전문가 집단은 어떤 식으로든 실천의 통일에 기여하도록 개념적 명제를 구축하는 일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작업이 의식적이고 성찰적인 방식의 사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2) 그것은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과학적 실천의 출현에 반응한다. 알튀세르가 말하길, "사물들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 신성한 계시로부터가 아니라 인간들이 공유한 과학적 실천으로부터 인간들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증거를 그(과학적: 옮긴이) 앎이 인간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23 사변은 따라서 과학적 실천에 의해 찢어진 우리 이데올로기적 삶의 구조{fabric of our ideological life}를 수선하려 한다.24
유물론자의 사변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따라서 실천은 다양하(그리고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지만)지만, 실천들 상호 간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필요성(소통을 위한 사변의: 옮긴이)은 인간의 마음에 선천적인 통합의 욕구가 있어서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헤게모니적 본성의 결과로서 그렇다. 이는 지배 계급이 생산 과정에서의 우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지배해야 함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모든 철학은 비교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철학은 이데올로기가 기여하는 실천의 이질성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이질성 사이에서 협상을 시도하기 때문이다.25
그렇다면, 이것이 유물론이라면, 여기서 개념적 생각 일반(즉, 사변)의 원인에 대한 개념은 철학의 상대화와 정확히 같은 외연{coextensive}을 지닌다. 계급투쟁은 지배적 철학의 전통(관념론)에서 억압된 것이자 사변 일반을 초래하는 원인이다(이것이 사변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이유이다.). 유물론은 그럼에도, 사변의 어느 특정 이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유물론은 철학의 필요와 타율성을 자각함에 따라 스스로를 쇄신하도록 하는 철학의 실천이다. 철학 내에서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알튀세르에게 있어서(그리고 레닌에게도, 그 이후의 발리바르에게도), 유물론적 세계관을 명료화하는 것(철학의 역할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을 포함해서)(만)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첫째, 철학 자신의 당파적 논리를 포함해 자신의 갈등적인 본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철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철학적 관념은 어떤 개인의 인식을 통해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알려줄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집합적 권력체{collective body of power}에 기여하는 방식(그람시가 말하는 의미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에 의해 중요성을 획득한다는 의미이다.
둘째로, 유물론은 실천을 위한 궁극적인 정당화를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실천을, 그것을 방해하는 이데올로기적(즉 정치적) 장애물로부터 해방시키려 한다. 셋째로, 이에 상응하여, 유물론은 사변 일반을 정의하는 총체화의 실천과 관련되기는 하지만, 유물론은 이것을 한 시대의 지배적인 총체화하는 관점이 자신을 구성하기 위해 반드시 억압해야만 하는 것을 폭로하는 데 활용한다. 알튀세르는 그와 같이 억압될 수밖에 없는 것들의 예시로 "물질, 노동, 신체, 젠더, 나이, 죄수, 야만인, 광인 그리고 여성, 권력관계 등"을 든다.26이것이 물질들이다. 이것들은 우리에 의해 정확히 재현되기를 기다리는 한낱 객체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무언가를 재현하는 일반적인 방식과 그 활동이 우리의 실천들의 배치에서 차지하는 지위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체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비판적/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정확히 그만큼, 즉 그들이 우리의 사변적 체계 내에서 구조적 변이{structural variation}를 일으키는 만큼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오직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의 존재의 척도는 우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유한성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우리에게 끼칠: 옮긴이) 변화가 우리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의 존재의 척도이다. 그들은 우리의 외부에 있다. 물론 그들을 재현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것은 무의미하겠지만. 이러한 입장이 관념론과 독단주의 모두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입장이다.
결과적으로, 유물론자의 철학적 실천은 끊임없이 전문적이고 기술적인{technical} 철학의 측면(철학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철학적 체계를 연구하는 교수이다.)과 대중 속에 분산되어 있는 야생의 사변{savage speculation}("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철학자이다."27)을 접합한다. 이것은 (이미 레닌이 주장했듯) 특정 작업의 양식(그리고 알튀세르는 이 특정 양식을 그의 후기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을 시사한다. 달리 말해, 유물론자의 철학은 철학자의 내용 혹은 양식에 대한 수정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학계와 활동가, 혹은 더 상세히 말해, 학계와 생산 과정의 심장부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들("노동자")과의 새로운 연합을 요구한다.
유물론은 따라서 비판적이고, 사변적이고, 구조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물론, 내가 말한 개념의 유물론을 명료화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왜 유물론이라는 개념이 중요한가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위해서는 이 글의 논의가 충분했기를 바란다. 유물론은 왜 사변 일반이 중요한가에 대해 말해주기에 중요하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사변 일반의 필요성과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사변에 대한 비현실적인 설명(우리 시대의 "사변적 유물론"자들의 것을 포함해28)에 저항해야 할 필요성 둘 다를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철학에 있어서 브뤼노 라투르가 인류학 일반의 목표로 제시했던 바를 수행해야 한다. 즉 특정 실천(예를 들어,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실천에 대한 하나의 상{image}을 되돌려주되,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실천에 대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바로잡으면서도, 그 실천의 힘과 의의를 충분히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29우리 시대에는 한 사람이 철학적 교리로서의 유물론이 아니라 철학 실천 자체의 변형으로서의 유물론에 기여하기 위해 이러한 세속화{secular}를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그 사람은 에티엔 발리바르이다. 앞선 논의는 그의 작업을 소개하고 독자들이 내가 여기서 정의한 유물론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그의 작업을 읽기를 권하려는 의도 외에는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왜 그리고 어떤 점에서 발리바르의 작업이 중요한지 논증하기 위해 쓰였다.
1: 퀑탱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 (2024). 정지은 역. 도서출판b.를 참조하라. 프랑수아 라뤼엘의 기여에 대해서는, "The Generic as Predicate and Constant: Non-Philosophy and Materialism" (trans. Taylor Adkins), to The Speculative Turn: Continental Materialism and Realism, ed. Levi Bryant, Nick Srnicek, and Graham Harman (Melbourne: Re.Press, 2011), pp. 237--260과 Ray Brassier, Nihil Unbound: Enlightenment and Extinction (London: Palgrave Macmillan, 2007).을 참조.
2: 이에 대한 예시로는, Catherine Malabou, "Le vide politique du réalisme contemporain, ou pourquoi je suis matérialiste," lecture at Choses en soi, Paris, November 19, 2016, (https://www.youtube.com/watch?v=EZyUVgV_u5A).를 참조하라.
3: 정치와 형이상학을 말한다. (옮긴이)
4: Smart, Encyclopedia Britannica, s.v. "Materialism," https://www.britannica.com/topic/materialism-philosophy(Accessed Jan. 14, 2018).
5: 에른스트 카시러. 『상징형식의 철학 제1권: 언어』 (2011). 박찬국 역. 아카넷. 24.
6: 이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2018). 배세진 역. 오월의봄.과 Pierre Machery, Marx 1845: Les "Thèses" sur Feuerbach (Paris: Èditions Amsterdam, 2008).를 참조하라.
7: 루이 알튀세르의 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Paris: Le Livre de Poche], 1999, p. 313;를 내(파트리스 마니글리에: 옮긴이)가 영역한 것이다. 불어 원문에 따르면, "accepter de partager leur langage et leur vérité comme vous partagez leur pain."
8: V.I.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1989). 정광희 역. 아침. 33. 레닌이 인용한 원문은 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2008). 강유원 역. 이론과실천. 48.
9: 알튀세르는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이 유물론의 핵심적 직관이라 말한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스피노자에 의해 최초로 제시된 것이다(루이 알튀세르 외. 『자본을 읽자』 (2025). 진태원, 배세진, 김은주, 안준범 역. 그린비. 69.).
10: 어떤 이는 재현과 표현의 대립이, 들뢰즈가 자신의 전 저작을 걸쳐 사용한 정식들과 매우 가깝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인정한 첫 출판 논문인 (Gilles Deleuze, "Review of Jean Hyppolite's Logique et Existence," in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trans. Mike Taormina, ed. David Lapoujade [Los Angeles: Semiotext(e), 2004]). 알튀세르는 '표현'이라는 단어 대신 '생산'이라는 단어를 선호하겠지만, 전반적인 사유의 방향은 동일하다.
11: V.I. 레닌, 앞의 책, 2장 5절, 3장 1절을 참조하라.
12: 위의 책, 3장 5절. 186.
13: 위의 책, 3장 1절. 155.
14: 앞서 말한, 관념론자의 방식으로 유물론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옮긴이)
15: 위의 책, 6장 4절, 365.
16: 이에 대해서는 파트리스 마니글리에, 「구조주의의 유산」의 5절, '기호의 존재론: 장 프티토'를 참조하라. (옮긴이)
17: 이에 대해 내가 소쉬르에 대해 쓴 책, La Vie Énigmatique des Signes, Saussure et la Naissance du structuralisme(Paris: Léo Scheer, 2006)을 참조하라.; 영어 요약본으로는, 나의 에세이 "Signs and Customs: Lévi-Strauss, Practical Philosopher," Common Knowledge 22:3 (September, 2016), pp. 415--30.를 참조하라.
18: 여기서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2017). 서관모 역. 후마니타스.와 『자본을 읽자』를 자유롭게 인용하였다.
19: 이는 '개방성'으로 인한 구조의 유한성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파트리스 마니글리에, 「현대 프랑스철학에서의 구조」의 4절, '구조와 사건: 현대의 엘레아학파eleaticism인가, 열린open 플라톤주의platonism인가?'를 참조하라. (옮긴이)
20: 루이 알튀세르, Éléments d'Autocritique (Paris: Hachette, 1974), p. 17; Essays in Self-Criticism, trans. Grahame Locke (London: Humanities Press, 1978).
21: 철학에 대한 알튀세르의 최종적 정의에 대해서는, Réponse à John Lewis, (Paris: Maspéro, 1973); "Response to John Lewis," in Essays in Self-Criticism를 참조하라.
22: 루이 알튀세르.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2020). 안준범 역. 현실문화.
23: 위의 책, 322.
24: 원문은 "Speculation thus tries to repair the breaks made by scientific practices in the fabric of our ideological life." 여기서 fabric은 구조라는 의미도 있지만 직물 혹은 천이라는 의미도 있다. 알튀세르가 사용하는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개념을 살려, 'breaks'를 '찢어진'으로, 'repair'를 '수선'으로 옮겼다. (옮긴이)
25: 여기서 이런 철학적 구상이 놀라울 정도로 브뤼노 라투르의 마지막 걸작, 『존재양식의 탐구』 (2023). 황장진 역. 사월의책.에서 옹호된 외교로서의 철학과 유사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발본적 비교주의로서의 철학이라는 통념에 대해서는 Patrice Maniglier, "Manifeste pour un comparatisme supérieur," Temps Modernes, n°682 (Juillet 2015).
26: 루이 알튀세르, 앞의 책, 193-197.
27: 위의 책, 366.
28: 나는 내가 왜 메이야수의 "사변적"이라는 통념이 비현실적이라고 믿는지에 대한 근거를 드러낸 바 있다. Patrice Maniglier, "Post-Metaphysical Meditations: Reflections on 'Speculative Realism,'" in New Existentialism ed. Time Griffin (Dijon: Presses du Réel, 2017)."를 참조하라.
29: 브뤼노 라투르의『존재양식의 탐구』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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