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맑스주의의 하나의 이단점.
1960년대 초 알튀세르와 트론티의 상반된 『자본』 독해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 장진범 | 사회학도
이 번역본은 애초 프랑스의 맑스주의 잡지 Période 인터넷 홈페이지 자료실에 2016년 7월 등록된 'Un point d’hérésie du marxisme occidental : Althusser et Tronti lecteurs du Capital'을 대본으로 삼았다. 하지만 번역을 거의 마친 상태에서 이 글이 The Concept in Crisis: Reading Capital Today (2017)의 한 꼭지('A Point of Heresy in Western Marxism: Althusser’s and Tronti’s Antithetic Readings of Capital in the Early 1960s')로 정식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글을 대조한 결과 서두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내용이 증보·변경된바, 정식출판본을 새로 번역하였다. 단 일부 내용에서는 불어본이 더 의미가 명확하다고 판단하여, 불어본의 문장을 참작해 번역하였다.
『『자본』을 읽자』를 오늘날 다시 읽으면, 우리는 흘러간 옛날, 실은 내 지적 삶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아마 별개가 아닐) 두 가지 이유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시절에 관해 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첫 번째 이유로는, 알튀세르의 작업과 사고에 대한 관심이 오늘날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관심은 알튀세르의 유고가 여럿 출간된 데 일부 힘입은 것으로, 유고가 출간됨에 따라 알튀세르 사후 사상사가(思想史家)들이 기재해 넣은 공식적 심상과는 퍽 다른 심상이 등장했다. 두 번째 이유로는, 맑스주의라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담론이, 그러나 특히 맑스―『자본』의 저자이자 정치경제학의 ‘비판자’―가 새로운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같은 인기의 배경에는 지난 10년, 모든 곳에서 동일한 형태와 강도로는 아니겠지만,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자본주의의 가장 난폭한 위기 중 하나가 있다. 이들 현상이 교차하는 곳에서, 알튀세르와 그를 위시한 일군의 젊은 학자들이 시도했던 맑스주의의 ‘수정’ 또는 ‘재구축’ 같은 것―이 작업으로써 당시 그들은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상당한 희망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에 못지않은 매서운 반대와 거부를 초래했다―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비판적 시각을 갖고 이 모두로 돌아가는 것은 아마도, 다른 정세에서 맑스주의의 위력과 한계를 다시금 가늠하고, 맑스주의를 활용하는 방법과 활용하지 않는 방법을 익히며, 다시 개방할 가치가 있는 입구는 어디이고 폐쇄해야 하는 해석은 무엇인지 판단하는 유익한 방식이 될 것이다. 이런 정신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이 작업은 호고적(好古的) 역사 한 편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반세기 전에 공간된 이들 문헌의 현재적 적절성을 가늠함에 있어 내가 ‘공저자의’ 특권을 주장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자본』을 읽자』의 모태가 된 세미나의 틀을 잡고 실현하는 데 내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기는 하고, 오늘날까지 내가 지속적으로 숙고한 질문과 정식 다수가 이 세미나와 책에서 제안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 사정은 이랬고 지금 내 입장은 이렇다는 식으로 이 자리에서 단순하게 말하기가 간단치 않은(또는 도전적인) 까닭이다. 첫 번째 어려움은, 내가 실제로는 알튀세르 자신이 『『자본』을 읽자』에서 표현한 여러 정식과 착상의 동시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알튀세르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착상을 나누는 비범한 능력이 있어 연령과 학식의 위계를 말하자면 중화시켰고, 공유된 책무와 이해관심을 배경으로 개인적 기획을 집단적 시도로 전환하려는 실질적 욕구가 있었지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처럼 나도, 알튀세르의 의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그 의도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해서 문제화의 지점까지 이르렀는지를 극히 부분적으로밖에 지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많은 추정을 당연시하였고, 내가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보여주는 일에 뛰어들었다. 물론 알튀세르는 나를 말리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론’ 따라서 또한 ‘정치’를 갱생시킬 능력을 가졌다고 그가 생각했던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생체(in vivo) 실험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나는 이들 추정을 제대로 고려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정세가 바뀐 상태였고, 이 정세에서는 상당 수 공리들이 대체되거나 심지어 역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다들 알다시피 알튀세르 자신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자본』을 읽자』 대부분을 기각하거나 발본적으로 재정식화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 중에는 일부 일리가 있는 것도 있었다(이는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전진한 후에야 보게 된다는 사실, 즉 당신이 생각한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조절하거나 정정하기 위해서는, 생각한 것을 말하고 쓸 필요가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반면 극히 부조리한 이유들도 있었는데, 이는 알튀세르가 관계를 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과 제도들에서 비롯한 폭력적 압력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일종의 협박에 이른 이 압력은 때로 알튀세르를 분명히 굴복시켰고, 어쨌든 그의 초기 직관 일부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층위의 자기비판이 나타났다. 이 자기비판은 알튀세르가 처음에 제기한 주장들이 갖는 이론적 독창성과 관련하여 파괴적 차원을 갖지만, 흥미롭게도 이들 주장을 다소 다른 시각에서 완강하게 되풀이하기도 한다.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사실은 유고에서 모든 층위의 억압된 사고들이 출현한다는 점이다. 이들 사고가 『『자본』을 읽자』 시점에 완전히 구성된 것은 아마 아니겠지만 이 저작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들과 이질적이지는 않으며, 공간된 문헌에 대해 잠재적 대척점을 이루는바 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공간된 문헌의 의도에 대한 오해는 사실 불가피할 것이다. 이를 가리켜 에밀리오 데 이폴라 같은 예리한 독자들은 스트라우스적인 방식으로 밀교적(密敎的) 알튀세르와 현교적(顯敎的) 알튀세르의 대립이라고 부른다. 워런 몬탁은 최근 출간된 알튀세르 관련 책 중 가장 뛰어나다 할 저작에서 이를 알튀세르의 내적 전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가 『『자본』을 읽자』에 표현된 관념들, 그 영향력을 관념들의 역사 안에 여전히 크게 드리우고 있는 이 관념들의 의미와 흥미를 심리하고 감정하기를 원한다면, 자기비판이나 유작이 누설한 것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고, 사후의 전개들(또는 사후에 드러난 전개들)이 진리―이에 따라 『『자본』을 읽자』를 평가해야만 하는―를 표상한다는 식의 추정을 묵시적으로 깔고 있는 목적론적 독해에 착수할 수도 없다. 우리는 좀 더 다채로운 소리를 내는(polyphonic) 독해법을 찾아야만 한다.
부분적으로는 이상의 난점을 처리하기 위해, 또한 『『자본』을 읽자』에 실린 알튀세르의 문헌과 당시 정세의 절합을 좀 더 객관적인 형식으로 다루기 위해 나는 알튀세르의 ‘개입’을 역사화하는 특정적 형식을 선택하였는데, 그 골자는 알튀세르의 담론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 유파를 이끈 인물인) 마리오 트론티의 담론을 나란히 읽는 것이다. 나는 날카로운 대조, 또한 일정한 대칭성과 친화성이 1960년부터 1965~66년 사이에 ‘비판적’ 맑스주의의 철학적 기획이 직면했던 선택지들, 따라서 이 선택지들이 공유했을 법한 전제들 역시 드러낼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내가 푸코 식으로 ‘이단점’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언제나처럼 나는 이 개념을 지적 작업 일체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알튀세르의 저작 두 권은 1965년 가을에 공간되었는데, 『맑스를 위하여』는 1961년에서 1965년 사이에 발표한 시론을 묶은 것이었고, 『『자본』을 읽자』는 알튀세르와 그의 일부 제자들이 공저한 것이었다. 트론티의 주저인 『노동자와 자본』(Operai e capitale, 이 저작은 아직도 영어로 완역되지 않았다)은 1966년에 공간되었는데, 이 책에는 1962년부터 1964년 사이에 발표한 시론들이 수록되었으며, 그 중심을 점한 것은 1965년에 작성한 미발표 원고 한 편였다(1971년의 재판에는 일련의 새로운 문헌들이 증보되었다). 따라서 이 두 저작은 (알튀세르와 트론티가 각자의 나라에서 당원으로 활동했던) 공산당에서 ‘탈스탈린화’가 진행된 결과 나타난 ‘해빙기’에 속하고, (트론티의 경우, 적어도 주요 문헌들의 경우에는) 68년의 대격변보다는 앞선다. 이런 방식을 통해 나는 알튀세르의 담론을 위치짓는 동시에 탈중심화하는 것을 제안할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나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여기 우리 앞에 놓인 것은 맑스 자신을 ‘레닌주의적’으로 독해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반정립적인 방식으로, 이는 맑스를 전환, 또는 차라리 대항전환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맑스의 이론이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에서 당의 이데올로기로서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겪은 바 있는 전환을 원상복구하는 것을 이 독해가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 한 방식이, 우리가 알다시피, 이론에 부여된 ‘혁명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 데 반해, 다른 방식은 정치(또는 노동자계급 정치)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이것[정치의 자율성]을 동일한 트론티가 몇 년 후 이 이름하에 제안할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런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실 이 두 ‘선택’에는 부분적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는 역사주의라 통칭할 수 있는 것을 적수로 식별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맑스의 비판적 발전을 『자본』의 거의 같은 곳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이들을 (물론 부분적인 방식으로) 비교하기에 앞서 역사적 고려사항 몇 가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는데, 현재 우리의 사고와 논의가 이루어지는 세계는 [당시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망각과 부인의 장막이 ‘단기 20세기’ 끝자락에 드리워져, 전체적인 역사뿐만 아니라 언어를 우리 눈이 닿지 않는 곳에 감춘다는 느낌을 받는다. 트론티와 알튀세르가 맑스주의를 재창립한 시대는 에릭 홉스봄의 말을 빌리자면 ‘극단의 시대’였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해 당시는 ‘공산주의’의 시대였는데, 여기서 공산주의란 1917년 10월 혁명 와중과 그 직후 레닌과 볼셰비키가 창출한 형태하에서의 ‘직업적’ 혁명가 정당의 구축과 흥망성쇠를 중심에 둔 정치 활동 형태로서, 이 정치 활동 형태는 1920년대 초반 전 세계, 특히 유럽으로 확대된 다음, 사회주의-자본주의 대결과 냉전의 분할선을 따라 ‘동구권’에서는 권력 행사, ‘서구권’에서는 자본주의에 맞선 내부로부터의 도전이라는 발본적으로 다른 기능으로 분열되었으나, (수많은 ‘이단’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같은) 특정 교리와 (수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민주집중제’ 같은) 특정한 조직 원리들로써 늘 통일되어 있었다. 이 시대는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90년대 초에야 끝에 다다랐지만 말이다. 알튀세르와 트론티 모두 공산당에 가입한 후 당원 신분을 유지하였는데, 당의 공식 노선에 대해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확실한 독립성을 보였다. 게다가 그들이 속한 두 나라는 서유럽에서 예외적으로, 공산주의가 대중의 이데올로기로 조직되어 부르주아 권력에 대한 명시적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들이 다소간 또렷하게 꿈꾼 것은 내외적 요소들의 도움을 받아 기존 조직들을 쇄신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알튀세르는 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트론티는 급진 맑스주의 지식인과 연계된 신세대 노동자계급 활동가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시키고자 했다. 공산당을 역사의 혁명적 세력으로 보는 관념 주위로 결집한 관념계(界)로 양자의 사상이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한데, (20세기의 여타 많은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유산을 사뭇 다른 원천들에서 유래한 철학적, 미학적, 정치적 문화와 결합시켰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이유는 다르지만, 알튀세르나 트론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할 것 같은 이들을 거론하자면) 루카치, 마오나 그람시 역시 속하는 그 전통[맑스주의와 레닌주의] 바깥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실은 뜻이 통하지도 않을 것 같다. 내 주장의 취지는, 1960년대 초반 알튀세르와 트론티가 내놓은 이론적 산물들이 마지막 계기, 즉 공산주의 담론이, ‘이론’과 ‘정치’를 결합하는 가운데, (당적을 유지하면서도, 공식적 체계에 대해 거리를 확보하거나 강제한다는 조건하에서) 당의 지식인에 의해 엄밀한 의미에서 창의적인 방식으로 생산된 마지막 계기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렇게 한 유일한 지식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출신국으로 범위를 좁히더라도 마찬가지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두 나라의 차이는 현격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앞서 제시한 시기구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재빨리 보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공산주의 역사가 두 가지 거대한 분계선을 따라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정학적으로는 (집권한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시하는) 일국 또는 다국의 사회주의와 (우리의 오늘날 시점에서 볼 때는 못지않게 발본적인) 나름의 내적 분할이 가로지르는 자본주의라는 두 ‘진영’ 사이의 분계선이 있다. 연대기적으로는 전전기(戰前期)와 전후기(戰後期) 사이의 분계선이 있는데, 전자의 특징은 (특히 유럽에서) 공산주의와 파시즘, 자유주의의 ‘3자’ 대결이고, 후자의 특징은 냉전과 그 여파, (공산주의적 국제주의의 패배로 이어진) 자본주의 세계화의 진전, 그리고 탈식민화의 성취다(일련의 폭력적 대결 끝에 이들이 어느 쪽 진영을 지향했는지가 아마 결정적인 역사적 요소였던 것 같다). 첫 번째 국면(전전기)에 20세기 공산주의 혁명의 전형적인 ‘전술’ 두 가지를 코민테른이 성공적으로 시도하였고 이론적으로 정교화하였는데, 이른바 ‘계급 대 계급’ 전술과 ‘인민전선’ 전술이 그것이다. 반면 두 번째 시기, 특히 스탈린 사후, 더 정확히 말해 1956년 이후, 그러니까 흐루시초프의 보고를 통해 국가사회주의의 정치적 도착성이 드러나고 또한 헝가리 봉기 및 그에 대한 폭력적 탄압과 함께 노동자계급과 반(反)제국주의 투쟁의 새 물결이 시작된 이 시기에, 공산주의 활동가와 지식인의 절실한 화두는 (레지스 드브레의 절묘한 정식을 차용하고 확장하자면) ‘혁명 안의 혁명’이 되었다. 이는 1945년 이후 냉전이 부과한 정치적 교착과 ‘공포의 균형’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의 변혁이라는 혁명적 의제를 복원하는 능력인 동시에, 탈스탈린화 전후 공산당들을 지배했던 정치적 기회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한 내부적 비판을 제시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맑스주의자들은 (공식적인 공산주의 조직 내부와 외부에서 공히) ‘혁명 안의 혁명’을 서로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했는데, 여기에는 맑스주의 및 특히 레닌주의 유산의 다소간 발본적인 수정, 당 형태 자체 및 국가와 맺는 모방적 관계에 대한 비판, 개량/개혁과 혁명을 대립시키는 것에 대한 정정 등이 포함되었다. 물론 알튀세르와 트론티는 이 계기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나는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주장할 생각이 없다. 그보다는 그들이 상대적으로 특별한 경우라고 제안하고 싶은데, 양자 모두 레닌주의자였고(비록 레닌의 교리의 같은 측면에 준거하지 않았고, 이로써 레닌의 교리에 내재한 복잡성을 회고적으로 부각시키긴 했지만), 앞선 시기 코민테른이 정의한 ‘전술들’―비록 같은 전술은 아니지만―의 잠재력을 활용(함으로써 이 두 가지 전술이 다른 정세들에서 부활할 수 있는 초역사적 능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본질은 이렇다. 트론티의 오페라이스모는 거듭난 ‘계급 대 계급’ 전술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 전술은 유럽(과 비유럽)의 파시즘과 대결하다 극적으로 붕괴했지만, 파시즘이 선진적 형태의 ‘계획’ 자본주의에 의해 (특히 이탈리아에서) 대체되고 패퇴함에 따라 이제 다시 시의성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이와 대칭적으로, 알튀세르의 구조적 맑스주의는(알튀세르는 이 명칭과 신속히 절연했지만, 그가 허용한 (‘편향적’이든 아니든) 이론주의라는 명칭은 [구조적 맑스주의의] 암호로 간주할 수 있다) ‘인민전선’ 전술의 전통,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내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 이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이 전통과 특히 밀접한 질문은 계급 구조 및 갈등의 ‘복잡성’이다). 맑스주의 내부의 지적 계보들을 되짚어 평가하고 싶다면 이 점이 중요하다고 나는 믿는데, 이 계보는 알튀세르와 트론티의 개념적 장치의 구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레닌 및 심지어 스탈린을 제외하면(스탈린이 알튀세르에게 매우 강력하지만 애매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알튀세르가 스탈린을 참고문헌으로 명시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이원성이 두 ‘분과’ 또는 ‘과학’으로서 맑스주의를 구성한다고 그가 지속적으로 강조했다는 점에서 특히 잘 드러날 수 있는데, 알튀세르가 ‘우발적 유물론’을 선포한 시점에서야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침내 폭파되거니와, 물론 이렇게 되면 역사적 유물론 역시 변하지 않고 배길 수 없다), 중요한 두 이름은 물론 루카치와 그람시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경력 내내 일관된 반(反)루카치주의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의 주체-객체’라는 초(超)헤겔적 통념에 비판을 집중한 데 반해, 트론티는 (이런 용어가 말이 된다고 치면) ‘정통’ 루카치주의자는 확실히 아니었을지 몰라도,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확실히 유래한 발상 및 질문 들에 계속 천착했는데, 가령 총체로서의 ‘자본’이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의 전도 또는 소외된 표현이라는 발상도 그렇고 혁명당이 계급 자체의 부정성과 동일하다는 발상도 그렇다. 그리고 그람시의 경우, 트론티의 공세가 주로 향한 것이 톨리아티가 보정·제도화한 그람시 사상의 공식 판본이라는 단서를 달더라도, 오페라이스모 활동가들이 이해한 그람시는 분명 맑스주의 내 역사주의적이고 ‘민중주의적’인 편향의 주요 원천이자 따라서 관념론의 한 형태이기도 한바, 여기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기능은 ‘민중’이나 민중계급의 ‘역사적 블록’으로 이양되고, 자본에 맞선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의 반복과 연장, 또는 발본화로 이해된다 ― 이는 (근대 국가와 국민적 통일의 후진적 불균등 발전을 특징으로 하는) 특정 조건에서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가 무능으로 인해 달성하지 못하는 것을 실현하는 과업에 착수한다는 것을 포함할 수도 있다. 알튀세르의 경우 상황이 더 복잡하고 양면적인데, 이유인즉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시론들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관한 유명한 시론을 거쳐 유고 『마키아벨리와 우리』에 이르는 사상의 궤적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알튀세르는 인생에 걸쳐 구조와 상부구조,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각각의 ‘헤게모니’, 또는 ‘이데올로기의 정치’의 필요성에 관한 그람시적 절합을 재사고하고 개선하며 전위하는 일에 참으로 깊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본』을 읽자』의 중심적 장은(이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 (트론티의 주요 표적이기도 한) 그람시의 ‘역사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람시의 역사주의는 ‘실체의 주체 되기’로 역사를 보는 헤겔 철학을 맑스주의 용어로 단순치환한 것이거나, 의식의 변증법을 사회적 실천(praxis)의 실현으로 읽은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사이의 논쟁―여기에서 그람시 작업의 ‘수용’과 활용은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과 연결된 전술적 고려를 논의로 친다면) 아마 가장 나은 해석은, 그람시에 대한 알튀세르의 날카로운 비판이 절대적 양립불가능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그람시가 역사적 모순과 갈등 들의 ‘과잉결정’이라는 문제를 공유한 ― 비록 알튀세르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철학적(또한 아마도 정치적) 해법을 제시하고 싶어하긴 했지만 ― (마오 정도를 제외하면) 유일한 맑스주의자라는 사실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리라. 내가 보기에 이 모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어도 작업가설로 받아들여야 이해가 될 것 같다. (알다시피, 루카치 자신이 압력을 받아 즉각 부인한) 루카치의 초기 작업은, ‘계급 대 계급’이라는 역사관에 가장 엄밀하고 야심찬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 것인 데 반해(훗날 코민테른은 이를 ‘친구/적’ 이분법이라는 파국적 형태로 구사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조직들은 노동운동에서 파시즘 그 자체 못지않게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람시의 『옥중수고』는 코민테른을 (이후 결국 제한된 형태 아래 채택된) 반파쇼 통일 전략으로 복귀시키려는 필사적 희망을 품고 집필한 저작으로, ‘인민전선’이라는 착상에 맑스주의적인 기초를 놓음으로써 [인민전선을] 파시즘에 맞서는 저항이라는 정세가 요청하는 단순한 전술적 조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 내부로부터 공산주의를 향한 ‘이행’을 규정하는 진정한 정치적·철학적 형태로 만드는 것 역시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내 제안이 맞다면, 트론티가 계급의 부정성이라는 관념을 케인스주의적인 신자본주의의 조건 안으로 옮겨놓은 포스트루카치적인 방식과, 알튀세르가 구조와 상부구조의 상호작용 속에서 구축되는 ‘역사적 블록’이라는 그람시적 통념에 비판적으로 관여한 방식은, 20세기 전반기 공산주의 역사로 (그 역사적·이론적 한계 너머로 ‘도약’하려는 희망을 품고서) 대칭적 귀환을 감행한 실례라 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알튀세르와 트론티가 거의 동시에 진행한 『자본』 독해의 특정 요소 몇 가지를 선별하여 ‘이단점’이라는 나의 착상을 예증하고자 한다. 흥미롭게도 양자는 서로를 사실상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양자는 맑스의 문헌에서 정확히 동일한 전개지점을 식별하여 이를 정치경제학 비판이 ‘부르주아’ 담론 내(또는 자본주의의 ‘자의식’ 내) 가능조건에서 독립하는 장소로 해석하였다. 『자본』의 ‘임금’ 관련 절(『자본』 1권 6부)이 그것으로, 이 대목을 논하는 주석들이 거의 없는데, 왜냐하면 단순한 경험적 기술로 보이거나, ‘논리적으로’ 이론의 나중 부분에 속할 소득 분배와 계급 구성에 관한 좀 더 완성된 논의 전개를 선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자본가와 임노동자 사이의 계약적 관계(이는 ‘정당’하거나 ‘정상적’인 가격으로 노동을 ‘팔고’ ‘사는’ 형태를 취한다)라는 관념에서, 이 형태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자본의 생산과정으로 합체(incorporate)하는 과정의 법적 가면이라는 관념으로 용어법이 이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맑스가 논하는 『자본』의 다른 구절들에서처럼, 여기서 논점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외양 또는 ‘현상’(독일어로는 Erscheinung)과 이 외양의 담지자가 겪는 착각 또는 기만(독일어로는 Schein. 이 용어들이 변증법적 범주에 대한 칸트적 비판을 명시적으로 연상시킨다는 점에 유의하자) 사이의 관계다. 알튀세르와 트론티 모두 이것이 『자본』의 분석에서 전환점이라는 데 동의한다. 임금이 노동의 가격이라는 경제(학)적 문제설정이 노동력의 전유라는 문제설정으로 탈바꿈함에 따라 잉여가치 착출의 ‘비밀’―따라서 자본주의에 특정적인 착취와 축적 형태의 ‘비밀’―이 드러날 수 있다는 데 양자가 생각을 같이 한다는 점은 틀림없다. [다만] 알튀세르에게 이는 그가 맑스에게 귀속시키는 ‘징후적/증상적 독해’의 실천/관행, 곧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을 뒤집고 기성의 과학적 ‘대상’의 해체로부터 새로운 대상을 생산하는 비판적 방법이 가장 잘 예증되는 순간이다 ― 아마도 이는 맑스의 인식론적 절단이 미완적으로 나타나거나 영속적으로 재주장될 필요성이 제기되는 순간이기도 할 텐데, 왜냐하면 맑스 자신은 두 담론이 양립불가능하다는 점을 일관성 있게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트론티에게 이는 교환 및 가치 형태의 맑스적 연역에서 뿌리가 되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이라는 관념의 의미가 기실 뒤집히는 장소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상품의 반정립적 측면을, 이를 각각 ‘생산’하는 (구체적 노동과 사회적·추상적 노동이라는) 노동의 가설적 속성에 추상적으로 귀착시키는 대신, 교환가능하고 동질적인 노동자계급 또는 노동력이라는 형태로 추상노동이 자본에 구체적으로 합체된다는 점, 따라서 (비록 이 사회적 과정이 개별 노동자를 개별 자본가에게 묶어 놓는 계약적 관계라는 외양 아래 은폐되어 있다 하더라도) 가치 생산을 지휘하는 것은 잉여가치이지 그 역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외양을 바로잡는 것은 두 유형의 갈등 간 차이를 부각시키는 의미도 갖는다. 한 유형의 갈등은 그저 상대적 갈등으로, 사회적 소득 분배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임금 협상 및 변동의 문제라면, 다른 유형의 갈등은 절대적 갈등이라 부를 수 있는데, 노동을 자본 축적의 ‘생산요소’로 변환하는 것에 영원히 내재하는 폭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데, 이 방향의 차이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적용하는 지점 면에서는 동일한 ‘전략적’ 선택에서 파생된 귀결들을 갈라놓는 간극의 확대를 예증한다. 허락해 준다면 이 중 두 가지에 관해 간략히 논평하고 싶은데, 하나는 방법론적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방법론적 귀결은 이데올로기 범주의 용법과 관계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범주에 관한 알튀세르의 논의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했기 때문에, 나는 『『자본』을 읽자』에 제시된 교리에 국한하고자 한다. 우리는 형식적 정의뿐만 아니라 원용된 사례와 이 범주의 적용에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저자에게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범주다(비록 우리가 알다시피 알튀세르에게는 이데올로기적 인정과 오인의 일차적 과정 역시 발견되며, 인간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과정이 역사에는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한 기성 노동운동에 대해 심히 비판적이다. 사실 두 저자에게 이데올로기의 지배적 형태―임노동 형태에 대한 맑스적 비판은 그에 맞서 재천명되어야만 한다―는 경제적 계산(또는 트론티의 경우에는, 계획)이라는 통념과 ‘인간주의적’ 정의 담론의 결합물로, 이 결합물은 생산관계의 계급구조와 다르거나 [생산관계의 계급구조를] 흐릿하게 만든다. 이는 노동운동 내부에서 되풀이되었던 지배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다(여기에는 스탈린이 선취한 오늘날의 ‘인적 자본’ 담론이 포함된다. ‘인간, 가장 값진 자본’). 알튀세르 입장에서 이 같은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가장 거슬리는 측면은, 가면 갈수록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가 경쟁과 효율성이라는 동일한 담론을 구사한다는 사실로 귀착되는 것 같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 담론은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체제들이 경제적·기술적 필연성에 근거하여 ‘수렴’한다는 관념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같은 수렴론이 동구와 서구의 ‘평화공존’ 시대에 아주 유행이었다. 반면 트론티에게서 전략적 측면은, 노동운동이 경향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주요 ‘조직자’ 또는 ‘자본의 계획’―즉 재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첨예함의 정도와 무관하게) 본질적으로 노동생산성 증가와 경제 성장이라는 ‘공동’ 기획을 실행하는 도구가 되는 식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의식적 ‘담지자’가 되었으며, 국가가 ‘사회적’ 국가로 새롭게 발전하는 데에서 주춧돌이 되었다(‘사회적’ 국가는 기본적으로 미국에서 뉴딜이 실시되고 유럽에서 민주주의 세력이 파시즘에 승리를 거둔 후 정교화된 케인스주의 경제학과 포드주의적 ‘타협’의 함수다).
이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 비판’의 거대한 분기를 도출할 수 있는데, 이 분기는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의 『자본』 이론과 맑스주의 조직 내부에서의 개량주의의 발전이라는 정세 간의 대결에서 유발된 것이다. 하나의 비판은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타자라는 점에서 찾거나, 최종심에서 ‘과학’에 이데올로기적 기만의 뿌리를 폭로하는 기능을 부여한다. 다른 비판은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정치적 현실주의의 타자라는 점에서 찾는데, 여기서 정치적 현실주의란 (계급투쟁이 자체로 생산하게 되어 있는) ‘공익’이라는 착각의 파괴에 준거함으로써 생산관계 안에서 환원불가능한 적대의 중핵을 ― 계급타협의 정황에서 적대가 아무리 매개된 외양을 취하더라도 ― 식별해낼 수 있는 정치적이고 지적인 태도를 말한다. 이로써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바, 상품 물신숭배와 자본주의적 유통의 ‘외양들’이 본질적으로 은폐하는 것이 구조―이들 외양은 구조의 불가피한 효과다(외양들 없이 구조는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알튀세르가 믿는 곳에서, 트론티는 동일한 외양들이 본질적으로 은폐하는 것이 적대라고 믿는다. 이들 외양은 적대를 다르게 만들고 연기하는 데 복무하지만, 적대는 반드시 주기적으로 돌아와 공공연하게 폭발하는데, 왜냐하면 적대는 생산 자체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구조는 알튀세르적 이론의 본질적 대상, 또는 더 낫게 말하자면, 본질적 문제로, 이론의 장에서 무한한 분석을 요청한다. 반면 적대는 정치적 실천을 혁명적으로 만들 수 있는 본질적 상황인바, 그런 이유로 트론티에게 있어 혁명적 실천의 가능성 자체를 지휘하는 질문은 사회적 갈등이 적대적으로 되는 자리나 ‘장소’를 식별하는 것이다. 물론 양자 모두 맑스주의자이기 때문에, 알튀세르의 구조가 적대 또는 계급갈등의 구조인 것처럼, 트론티의 적대는 ‘구조적’이거나 자본주의 지배 자체와 함께 끊임없이 재생산되는데, 하지만 내가 제안했던 것처럼 범주들을 다르게 정렬하면 간극이 열려 점점 커지게 된다.
이상이 방법론적 분기에 조응하는 ‘내용적’ 요소다. 사실 알튀세르와 트론티 모두 『자본』의 또 다른 결정적 구절(1권 ‘단순재생산’ 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끌리는데, 여기에서 맑스는 잉여가치를 착출하는 서로 다른 방법들과 관련된 계급투쟁의 양상들에 관한 현상학을 끝마치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상품이나 잉여가치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산관계 자체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고 단언함으로써 자본주의 축적의 ‘법칙’(이나 경향)에 관한 논의를 개시한다. 어떤 의미에서 ‘구조’와 ‘적대’는 ‘생산관계’라는 통념 자체의 양면인바, 이 통념은 맑스의 『자본』에서 중심을 이룬다(알튀세르의 용어로는 그 ‘대상’을 정의한다). 하지만 이들 통념을 역순으로 읽는다는 사실이, 자본주의적 사회형태의 외양적 안정성(또는 ‘영원성’)이 도전받거나 불안정해질 수 있는 지점을 식별하는 것과 관련하여 완전한 분기로 이어진다. 알튀세르의 경우 이 지점이 본질적으로 생산관계의 ‘재생산’의 상부구조적 조건에 있는 데 반해, 트론티의 경우 이 지점은 본질적으로 생산과정 자체 내, 더 정확히 말해서 [생산과정의] 물질적 장소를 이루는 공장 내 적대가 (맑스 자신이 ‘기계’에 관한 장에서 다른 목적으로 쓴 것처럼) ‘사느냐 죽느냐’의 극단적 대결로 상승하는 가능성에 있다.
이상의 근거 위에서 나는 두 번째 이단점을 표시하고 싶은데, 여기서 다시 이론적 차원은 정치적 함의에 침투한다. 총체성이라는 질문이 그것으로, 총체성은 철학적 범주이면서 역사와 정치적 행위 또는 작인(agency)을 절합하는 도식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정식화하자면 우리 모두 알다시피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반정립이 발생한다. 트론티에게는 총체성이 있는데(또는 차라리, 그 주체가 노동자계급인 정치투쟁의 총체화가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중심 즉 사회에서 ‘중심적 장소’로 객관적으로 규정된 곳이 존재하고, 여기에서 변혁의 경향들이 결정되며 결정적 내전에서 당파적 관점이 헤게모니를 부과할 때 주관적으로 강화되기 때문이다. 반면 알튀세르의 경우, ‘최종심급의 고독한 시간의 종은 결코 울리지 않는다’는 (『맑스를 위하여』의) 유명한 정식을 전개하자면, 일체의 총체성은 구조적으로 ‘탈중심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 아닌 ‘중심’(특히 국가나 국가권력의 중심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대 비판이론의 가장 흥미로운 딜레마 중 하나였(고 여전히 그렇)다고, 이 딜레마에 맑스주의는 우연적인 적용의 장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세공 장소를 제공했다고 나는 믿는다.
허락해 준다면 약간 거친 방식으로 제시해 보겠다. 내 생각에 『『자본』을 읽자』가 거둔 아마 가장 오래갈 철학적 성취는 ‘역사적 시간’에 관한 장이다. 흥미롭게도 알튀세르는 이 장을 ‘맑스의 대상’을 식별하기 위한 탐구의 와중에서 나타난 ‘여담’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여담이 실은 애초의 주제보다 더 중요한 경우도 허다하다. 이 주목할 만한 한 편의 사변철학, 헤겔의 역사적 ‘현재’ 개념이 과거에 전개된 연속적 계기들을 발생반복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이 비판(헤겔의 변증법이 ‘통속적 시간관’의 이상화된 판본이라는 하이데거적 비판을 이 비판이 은밀하게 참조하고 있다는 흔적이 엿보인다)은 불행하게도 이어지는 장(「맑스주의는 역사주의가 아니다」)과 짝을 이루는데, 이 장은 철학을 역사로, 역사를 이데올로기 또는 문화의 전개로 환원한다는 통칭 그람시주의에 맞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극히 교조적으로 되풀이한다. 나는 이것이 지적 모순이라고 생각하며, 그 자체 ‘징후적 독해’를 요청한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더 흥미롭게 보는 것은 알튀세르의 중대한 철학적 진술, 곧 시간의 ‘비동시대성’ 또는 역사적 현재의 내적 이질성(이는 정치적 행위의 장소다)이 실은 두 가지 상반된 방식으로 독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헤겔에 대한 단순 반정립에서 도출되는 가장 명증한 독해의 설명에 따르면, 헤겔적 총체성은, 다중적 계기들이나 ‘질량들’(masses)로 구성된 것이긴 하지만, 단일한 정신적 원리의 표현으로 늘 환원될 수 있기 때문에, 총체성에 고유한 시간성(또는 시간화)는 ‘본질적 현재’의 우위하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화해시키지 않으면 안 되고, 이때 현재란 그 고유한 역사적 조건의 자기반영(self-reflection)과 다르지 않다. 그에 반해 (『요강』의 일부인) 『정치경제학 비판』 1857년 서문에 대한 독해에 기초하여 알튀세르가 맑스에게 귀속시킨 다른 총체성 통념―이 총체성에는 전체의 다중성을 발생시키는 어떤 내적 원리도 존재하지 않고, 다만 사회적 관행/실천들이나 심급들을 절합하고 이를 지배관계에 종속시키는 불균등한 과정의 다중성 자체가 있을 뿐이다―은 ‘실존’(Dasein)의 영역에서 비동시대적인 시간, 또는 끊임없이 자신과 달라지고/지연되고, [달라진/지연된 다수의 시간들이] 각각 전개되면서 서로 어긋나며, 이를테면 불가능한 동기화를 절망적으로 뒤쫓는 시간을 생산하게 된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이것이 해당 문헌에 대한 현교적 독해다. 이 같은 독해는 분명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식의, 더욱 발본적인 독해 역시 가능한데, 이 같은 독해는 사회적 전체의 ‘수준’이나 ‘부분’이라는 용어보다, 특히 ‘심급’(instances)(또는 ‘작인’(agencies))이라는 프로이트의 용어를 사용하는 대목에서 반복적으로 표면화된다. 이 두 번째 독해에서 역사적 시간의 이질성은 복잡하거나 구조화된 총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학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 시간의 이질성은 사실 ‘총체성’ 자체의 유일한 현실성, 또는 알튀세르가 책 전체에 붙인 서문 격의 시론(「『자본』에서 맑스의 철학으로」)에서 사후적으로 제안한 정식을 빌리자면, 사회 효과 그 자체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런 [밀교적] 독해의 귀결은, 사회적·역사적 총체를 주어진 구조나 후속하는 변이들의 불변수(an invariant of subsequent variations)로 이해함으로써, 역사적 변천들이 발생할 수도,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정치적 정세들의 복잡성을 차별화하고 순서를 부여하는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이 독해가 제안하는바, 이론의 유일한 ‘대상’은 정세들 자체이고, ‘구조’라는 범주의 유일한 용법은 내적으로 복잡한 정세, 역사적인 ‘현 상황/계기’―여기에서 어떤 경향들은 다른 경향들보다 우세하고, 어떤 세력들은 역전될 수도 있는 세력관계 안에서 지배적이다―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이다. 고로 ‘과잉결정’(이제는 대칭적인 용어인 ‘과소결정’과 명시적으로 짝을 이루는)이라는 유사초월론적 범주는 ‘구조’에서 ‘정세’로, 또는 총체성(Ganzheit)에서 실존(Dasein)으로 ‘하강’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모든 구조의 정세적 성격과 이변성(易變性, mutability)을 표현한다. ‘역사적 발전의 법칙(경향)’에 대한 맑스 자신의 이해를 ‘몰아세운’(또는 아마 정정한) 대가를 치른 이 논지는, 러시아 혁명의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눈부신 해석에 기초하여 『맑스를 위하여』에서 이미 중심을 점했지만, 여기에서 재차 단언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간바, 세력의 형세나 세력 간 갈등이 한 사회 영역에서 다른 영역(경제, 정치 제도, 이데올로기 전장)으로 자리바꿈하는 것을 기술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위기 상황에서 다중적인 적대의 이 같은 자리바꿈과 일시적 ‘응축’을 역사성의 본질 자체로 해석한다. 역사성 안에는 시간만이 존재하지만, 시간은 내적으로 ‘물질적’인데, 왜냐하면 시간은 내적으로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자본주의에서 계급투쟁의 현상학에 관한 트론티의 기술로 돌아가 보자. 이 기술의 근간은 한편으로 (가령 노동일 규제를 둘러싸고 영국에서 벌어진 ‘내전’에 대한, 또는 산업혁명이 야기한 ‘자동적’이고 ‘전제적인’ 공장 체계의 폭력에 대한) 맑스의 분석에서 나타나는 갈등의 유형들, 다른 한편으로 선진자본주의의 분업에 담긴 현대적 적대 형태들―여기에서 노동자계급은 단순히 계약조건에 따라 고용된 개별 노동자의 병치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노조, 그러나 또한 당 같은) 내생적 제도들을 보유한 조직된 노동자계급으로, 집합적인 노동력과 (이해관계와 전략이 개별자본가들의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총자본(Gesamtkapital)이라는) 집합적인 자본가계급 수준의 사회적 적대를 수립한다―의 기술에서 나타나는 갈등의 유형들 사이를 놀라운 방식으로 오가는 것이다. 트론티의 관심사는 노동자계급의 부정성이 자본주의의 기술적·산업적 발전을 유발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에 축적의 중단이나 사실상 잠재적 파괴의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이다. 고로 계급투쟁을 특징짓는 것은 노동자들이 착취의 폭력적 남용에 맞서 저항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 같은 저항을 소외된 노동의 형태 자체에 대한 거부로 전환한다는 것이기도 한바, 이는 적대가 ‘극단으로 상승’하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 사회적 생산관계의 부정성 또는 파괴성을 노동자들 스스로 의식적으로 발동할 때 진실의 순간이 발발하는데, 이는 일정 기간 지속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하지만 후과는 반드시 남기는데, 왜냐하면 이 진실의 순간이 자본을 강제하여 ‘사회적으로’ 또는 ‘전반적으로’ 착취 전략을 재조직하고, 신기술을 발명하며, 새로운 형태의 ‘분업’과 ‘과학적 관리’ 등을 적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실의 순간은 알튀세르가 헤겔의 역사 개념(과 그 맑스주의적 반복들)에 귀속시킨 용어들, 즉 시간의 연속성에 내재한 ‘본질적 단면’이라는 관념으로써 잘 기술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알튀세르는 ‘헤겔적 정치’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단언을 형이상학적 현재에 내재한 ‘본질적 단면’이라는 이 표상에 결부시켰다.
하지만 여기에서 상황은 ‘알튀세리앵’이 생각할 법한 것보다 더 복잡한데, 왜냐하면 계급의 실존조건 또는 자본에 실질적으로 포섭된 ‘노동력’으로 재생산되는 것에 대한 계급의 부정성이 완전히 표출되는 순간에 적대가 결정(結晶)을 이룬다는 트론티의 ‘결단주의적’ 표상에는 순전히 헤겔적이지 않은, 심지어 단순히 루카치적이지도 않은 어떤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공장의 중심성이라는 결정적 논지를 해석하는 문제와 관계가 있는데, 여기에서 중심성은 사실 이중적 중심성이다. 첫 번째 발상은, 현대자본주의(‘포드주의’ 시대의 자본주의)에서 사회 전체가 공장 안에서 확립된 자본-노동 관계의 연장이 된다는 것인데, 특히 전문가적 위계제와 임금협상을 사회적 갈등 일반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 그렇다. 이는 이하와 같은 두 번째 발상과 결합되는데, 이에 따르면 공장은 정치적 무대로, 여기에서 ‘사회적 추상노동’은 반역하는 노동자계급이라는 형태로 실현되고, 자본가들은 자기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의 대표자로 기능하라는 의무를 부여받아, 자신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총자본의 일반적 착취 전략에 종속시키도록 강제받는다. 트론티와 다른 오페라이스모 활동가들에게 공장이 ― 맑스 식으로 말하자면 ― 생산력의 발전과 착취가 일어나는 물질적 장소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위자들과 전략들이 서로 대결하는 궁극적 장소인 까닭, 기실 ‘폭력의 독점’으로서의 국가가 구성되고, 리바이어던이 창출되는 장소인 까닭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훨씬 더 흥미로운 제안에 이르게 되는데, 이에 따르면 정치적 대결은 밀접히 연관된 두 수준에서 발생한다. 한편으로 정치적 투쟁은 진영이나 군대 같은 세력을 대립시킨다. 그리고 트론티가 (『공산당 선언』과 『자본』에 제시된) 계급투쟁과 ‘지구적(持久的, protracted) 내전’ 사이의 맑스적 유비를 매우 좋아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왜냐하면 내전이야말로 ‘경제적’ 계급투쟁의 궁극적인 정치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지배계급이나 엘리트가 여타 사회적 갈등을 다룰 수 있게 만드는 방식으로 계급투쟁을 ‘통치’하거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내전’은 이미 구성된 적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느냐 죽느냐’의 대결만은 아니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내전이 목표로 삼는 것은 각 계급이 상대편 계급의 해체를 통해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인데, 이 같은 관념이 칼 슈미트가 소렐의 용어로 이차적 갈등이라고 기술했던 방식과 친화적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바, 이 이차적 갈등은 ‘적들’ 사이에서 벌어질 뿐만 아니라, 전략들 사이에서 또는 대중들을 동원하는 당대 정치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들 ― 계급 이데올로기로서 공산주의가 추구한 사회주의적 방식과 파시즘이 추구한 민족주의적 방식 ― 사이에서 벌어진다. 자본에게 생산을 ‘조직한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계급 조직을 끊임없이 와해시키는 것이고,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의 혁명 조직을 건설한다는 것은 ‘자본의 계획’을 작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역시 과잉결정의 형태 중 하나로, 물론 알튀세르가 이론화한 것과는 같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이 같은 형태의 과잉결정을 산출하는 것은 계급투쟁 안에서 결합된 모든 요소들의 환원불가능한 외재성이나 독특한 ‘역사들’(알튀세르에 따르면 여기에는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의 서로 다르고 이질적인 역사가 포함된다)이 아니라, 생산이나 노동 소외의 동일한 관계 내부로부터 출현하는 ‘적들’의 이화작용(異化, dissimilation)이기 때문이다. 같은 과잉결정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 동일한 질문을 다루는 것인데, 그 질문이란 지배의 재생산이 중단되는 ‘예외’의 순간으로서 혁명적 순간을 산출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참 후 트론티가 알튀세르를 언급한, 내가 아는 한에서 유일한 곳이 그의 정치적 자서전인 『우리 오페라이스모』의 한 구절이었다는 점은 징후적/증상적일 것 같은데, 여기에서 트론티는 모든 정치적 사고는 정세에 대한(about) 사고일 뿐만 아니라, 정세 속에서의(under) 사고라는 것, 즉 분석의 ‘객관성’과 ‘당파성’을, 이 사고 자체가 일부를 이루는 심급 및 세력 관계 자체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알튀세르의 유작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 표현된) 관념을 찬성의 뜻을 담아 언급한다. 그리고 알튀세르가 트론티를 언급한 유일한 장소는, 트론티가 1959년에 쓴 시론을 인용한 『『자본』을 읽자』의 각주였는데, 이 글에서 트론티는 1917년에 그람시가 ‘『자본』에 반한 혁명’을 환영하며 쓴 유명한 사설에 관해 논평한다. 이들은 현재 또는 지금시간(Jetztzeit)으로서의 혁명,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 거기에 있지 않은 혁명의 아포리아가 끈질기게 반복된다는 징후/증상이다.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까? 양자의 친화성은 분명한데, 반역사주의, 반인간주의, 반경제주의가 그렇다. 양립불가능성 역시 못지않게 분명하다. 한 사람은 아마도 과도한 인식론적·사변적 우회를 대가로, 과학 개념을 예측불가능한 정세들을 분석할 수 있는 장치로 변환하는 방식의 하나로 ‘이론’의 우위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아마도 실천을 결단으로 환원하고 정치의 장소를 산업의 역사가 촉진한 단일한 장소와 동일시하는 것을 대가로, 자본이 확립한 적대적인 권력 관계 안에서 [정치적인 것을]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전하는 ‘정치적인 것’의 우위를 주장한다. 우리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자면, 그들이 예증하는 것은 20세기 맑스주의 전통(또는 아마도 유럽의 맑스주의 전통)에서 조직의 기획에, 즉 ‘당 형태’에 고유한 이율배반이다. 혁명에 관한 그들의 이념을 오늘날 동일한 형태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거대’ 사상의 수준에서 정치와 이론을 연결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그들의 이념은 이상하리만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시간이 ‘통속적’ 선형성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