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와 마오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장진범 | 사회학도
[옮긴이] 이 글은 중국어판 알튀세르 저작집 출간을 앞두고 저작집 주 편자 중 한 명인 천웨(陳越)의 요청으로 발리바르가 쓴 선집 서문(http://revueperiode.net/althusser-et-mao/)을 번역한 것이다. 저작집 첫 권이 阿尔都塞, 『政治与歷史: 從馬基雅維利到馬克思(1955-1972年 高等師範學校講義)』(吳子楓 譯, 西北大學出版社, 2018)로 출간되었고, 발리바르의 아래 서문이 수록되었다. 중국어와 관련한 도움을 주신 서울대 사회학과 윤종석 동학께 감사드린다(하지만 모든 실수는 역자의 책임이다). 이 글의 전반부는 알튀세르의 ‘지적 전기傳記’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동안 한국에 소개된 내용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번역에서 제외했다. 관련해서는 루이 알튀세르. 2017. 『마르크스를 위하여』. 후마니타스 에 수록된 「알튀세르 약전」이나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 6』(2015)에 실린 「알튀세르와 윌므가街」를 참고하라.
오늘날 알튀세르 저작 선집이 그간 소수에 국한되었던 독자층을 뛰어넘어 중국에 대중적으로 소개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다. 물론 이 같은 소개는 좀 더 일반적인 과정의 일부로, 이제 지난 수십 년간 금지되었던 ‘자본주의’ 서양의 지적 산물 일체가 이 나라 지식인과 대학인, 학생, 그리고 특히 일반 대중들에게 개방되고, 이로써 (다른 영역에서 이미 그런 것처럼) 중국인들은 ‘세계화된’ 세계의 지적 교류에서 중대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프랑스 대중들도 중국에서 전개된 과거와 현재의 철학적 논쟁들에 더욱 밝아진다면 당연히 바람직할 것이다. 당분간은 몇몇 전문가들만이 그럴 수 있을 것인데, 충분한 번역의 부재가 거의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된다. 궁극적으로 이는 번역이라는 질문, 그리고 이 질문이 역사들의 나눔partage과 사고 범주들의 보편성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한 공동의 반성으로도 이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독자들이 알튀세르의 지적·정치적 궤적에 관심을 가질 만한 특별한 이유 역시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중국과 ― 더 정확히 말하면, ‘마오쩌둥 사상’을 중심으로 구축된 중국 공산주의와 ―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교차하였고, 아주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우리로서는 이 마주침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데, 이 마주침이 서양에 널리 퍼진 몇몇 신화에 크게 의존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으로, 우리는 이 신화의 왜곡과 과도함을 정정해야 한다. 우리가 중국 독자들에게 되돌려 보내는 그들의 역사에 대한 심상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신화를 정정하는 우리의 작업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마오 사상에 대한 알튀세르의 첫 번째 ‘마주침’은 논문 「모순론」을 둘러싸고 두 시기에 걸쳐 일어나는데, 오늘날 「모순론」은 통상 1937년 연안에서 이루어진 변증법적 유물론 강연에 기초하여 마오쩌둥毛澤東/Mao Zedong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철학 논문 4편』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 문헌은 프랑스공산당의 기관지 『공산주의 연구Cahiers du Communisme』에 1952년 번역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이 문헌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일종의 계시와 같은 효과를 경험하였다. 한편으로 마오는, 당시로부터 약 3년 전[1949년 10월 1일] 중국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지도자로서, 알튀세르에게 ‘새로운 레닌’으로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1917년 이래 처음으로, 으뜸가는 맑스주의 철학자(따라서 간단히 말해, 철학자)인 동시에 천재적 정치 전략가인 공산당의 지도자가 혁명 세력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승리의 근거에 대한 개념적 반성 능력을 보여줬던 것이다. 따라서 마오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체현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마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근본 법칙’으로 간주되는 ‘사물에 내재한 대립물의 통일 법칙’에 자신의 논술을 전적으로 할애하면서도, (‘자연변증법에 관한’ 엥겔스의 노트에 영향을 받은, 1938년 작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제시된 스탈린의 논술과 반대로) 다른 ‘법칙들’에 대한 어떤 암시도 담고 있지 않았으며, 특히 공식 맑스주의 내 헤겔적 ‘논리’의 가장 분명한 유산인 ‘부정의 부정’ 법칙을 완전히 제외했다. 마지막으로, ‘주요 모순과 부차 모순’, ‘모순의 주요 측면과 부차 측면’,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 등의 통념, 그리고 (그 정치적 활용을 지휘하는) 서로 다른 항들 사이의 치환가능성을 제시할 때, 마오는 형식적 지시에 만족하지 않고 중국 혁명의 특수성(특히 중국 혁명이 민족주의와 맺는 관계의 변동)을 준거점으로 풍부하게 제시했다. 뤼시앵 세브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철학사에서 결정적인 혁신을 마주했다고 여겼으며, 이 혁신이 맑스주의 철학의 이해와 (특히 ‘당 연수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완전히 일신하고 알튀세르가 볼 때 이들의 특징을 이루는 교조주의 및 형식주의를 종식시키는 데 제격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당장에는 마오의 사상을 전혀 공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 사용이 이루어진 것은 10년이 지난 다음으로, (1965년 『맑스를 위하여』에 재수록된) 「모순과 과잉결정」을 1962년 겨울에 발표하면서 유발된 여러 비판에 대답하라는 독촉을 받은 알튀세르는 유물론적 변증법의 문제 전체를 개조하자는 제안을 감행하는데, 이를 담은 논문의 제목이 바로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기원들의 불균등성에 관하여)」였다(이 글은 1963년 8월 『라 팡세』에 발표된 후, 마찬가지로 『맑스를 위하여』에 재수록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이 시론을 요약하지는 않을 것인데, 중국어판 해당 권에 실려 있을 이 글은 알튀세르의 가장 유명한 작업 중 하나이자, 앞서 내가 알튀세르의 첫 번째 철학이라고 부른 것의 ‘주춧돌’이다. 다만 내가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사실은, 알튀세르가 이 글에서 마오를, 그가 보기에 맑스주의 내 헤겔적 유산과의 ‘절단’을 표지하는 두 관념의 (발명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담지자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관념은 총체성(이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역사적 총체성인데, 그 예로 1917년 러시아, 1930년대 중국, 1960년대 프랑스를 들 수 있다)을 이루는 요소들의 복잡성으로, 이는 단순하고 유일한 하나의 원리로, 또는 심지어 단일한 본질의 표현으로 환원할 수 없다. 두 번째 관념은 일체의 전개나 과정을 구성하는 불균등성인데, 이는 모순의 강화가 (부정의 부정이라는 헤겔적 도식에서처럼) ‘지양’이 아니라, ‘전위’와 ‘압축’과 ‘단절’에 이르게 만든다. 여기에서 논점은 알튀세르가 전개한 논변의 ‘순수한’ 철학적 측면인데, ‘정세적’인 정치적 차원에 관해서도 자문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제의 발단은, 1963년에 마오쩌둥은 프랑스공산당 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였고, 어쨌든 충분히 정통파가 아니라고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이유는 정반대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람시와 같은 이유였다). 이 불리한 수용은 프랑스공산당과 소련공산당 간 정치적 불화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과잉결정되었는데, 이 불화는 20세기 후반 국가공산주의를 가르는 거대한 분열의 발단이자 몇 가지 전조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분쟁에서 프랑스공산당은 결국 소련의 편, 따라서 마오에 맞선 흐루시초프의 편에 섰지만, 이 찬동은 즉각적인 것이 전혀 아니었다.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가 열리던 1956년 당시, 담화문에서 (1953년 사망한) 스탈린을 인용하는 공산주의 지도자는 토레즈와 마오 뿐이었고, 양자는 스탈린의 범죄를 고발하여 탈스탈린화를 개시한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을 출판하는 데 공동으로 반대했다. 알튀세르의 문헌들에서 결합되어 나타나는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 (‘맑스주의 안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표명한) ‘개인숭배’ 범주의 폐기, ‘스탈린주의’(알튀세르는 ‘스탈린적 편향’이라는 용어를 늘 선호했지만) 통념의 기각, 마지막으로 마오의 철학적 천재성에 대한 찬사를 동반한 준거 등이 당시 프랑스공산당의 간부와 지도자 들에게 어떤 효과를 산출했는지 어찌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탈린주의를 겨냥한 새로운 ‘좌익적 비판’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라기보다(이것이 알튀세르가 목표했던 바에 훨씬 부합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필시 탈스탈린화에 대한 해묵은 저항을 계속하는 시도로 보였을 것이다. 여기에 프랑스공산당(그리고 다른 공산당들)의 탈스탈린화는 실제적이라기보다 립서비스에 가까웠고, (‘민주집중제’라고 부르는) 당의 작동양식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알튀세르가 마오의 「모순론」을 논평했을 때 그의 의도가 당 장치 내부의 긴장을 활용하려는 시도나 전술적 계산으로 귀착된다고 시사할 여지는 전혀 없다. 오히려 알튀세르가 부과된 모든 규율과 통제에 맞서 보여주고 싶었던 점은, 참여를 피할 수 없는 공산주의 지식인은 자유롭게 이론적 ‘자산을 취’할 수 있고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마오가 그런 자산 중 하나였다고 나는 믿는다(게다가 알튀세르는 그람시 역시 인용했다. 비록 더 급진적인 탈스탈린화에 우호적인 ‘초-흐루시초프적’ 노선이라고 성격규정할 수 있는 톨리아티 지도하 이탈리아공산당 노선의 정당화를 위해 그람시가 당시 활용되었던 방식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면서, 더 비판적인 방식으로 그람시를 인용한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공산주의의 세계에서 이론적 권위들을 준거점으로 삼는 것이 늘 (스스로의 힘만으로 ‘편향’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산당 지도부에게] 주지 못하는) 지식인들을 분류·식별하는 도구로 기능한다는 점을 알지 못할 만큼 알튀세르가 안이했을 리도 없다. 어쨌든 이 같은 이론적 권위들에 대한 준거는 알튀세르와 ‘친중국적’ 입장들의 접근을 사후적으로 크게 촉진하고, 새로운 오해를 유발할 것이었다.
이 접근과 오해는 몇 년 뒤에 발생했는데, 이를 알튀세르와 마오주의의 두 번째 마주침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뭇 다른 조건과 목표 속에서 이루어진다. 1966년 12월 맑스-레닌주의공산주의청년연합(Union des Jeunesses Communistes Marxistes-Léninistes, 이하 UJCML)이 창설되는데, 공식적으로 ‘마오주의’를 표방한 이 집단은 중국의 권위에 고무 받아 공산주의학생연합(Union des Etudiants Communistes, 이하 UEC)에서 갈라져 나왔고, 그 지도자 다수는 알튀세르의 학생이거나 제자로서, 특히 로베르 린아르트는 알튀세르와의 우정을 지속하였고 훗날 다양한 주제를 함께 성찰하는데, 이 주제에는 소련이 전체주의 체제로 전도된 기원에서부터 ‘노동자 조사’라는 활동적 실천/관행까지가 망라되었다. 개인적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서양에서는 가장 ‘급진적인’(또는 서양 공산당들이 ― 별반 성과 없이 ― 추진한 ‘의회민주주의’ 전략에 가장 반대하는) 공산주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공식적으로는 1966년에 개시된)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관찰되는데, 그들이 해석한, 또는 오히려 상상한 문화혁명이란 급진 민주화 운동으로서, 중국 국가와 당의 관료주의가 표적이었고, 청년 노동자와 학생 들이 주동 세력이었으며, 마오쩌둥은 자신이 일으킨 당의 ‘부르주아화된’ 지도자들과 사회주의 내 ‘자본주의 경향’에 맞서 이를 후원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알튀세르는 (UEC의 분열에 반대했던 건 확실하지만) 마오주의 운동이 개시될 때 공감을 표했고, 그가 늘 영향을 미치고 싶어 했던 프랑스공산당의 규율과 청년 마오주의자들과의 협력 사이에서 한동안 ‘줄타기double jeu’에 몰두했다. 그리고 정확히 1967년 (UJCML의 이론적·정치적 기관지인 『맑스-레닌주의 연구Cahiers Marxistes-Léninistes』 14호에, 투고 시점이 1966년 11~12월로 되어 있는) 「문화혁명에 대하여」라는 익명의 논문이 실렸는데, 당시 즉각 알려진 것처럼 그 작성자는 사실 알튀세르였다. 이 논문에서 알튀세르는 문화혁명을 설명·정당화하는 중국공산당의 성명에 준거하면서도, 그 나름으로 재구축한 역사유물론에 근거한 해석을 내놓는데, 핵심이 되는 용어는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에서 개시된 사회구성체의 심급들 또는 수준들이었다. 권력장악la prise du pouvoir이 정치적 상부구조를 공략하고, 생산관계의 변혁이 경제적 하부구조를 공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이데올로기 혁명’인 문화혁명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에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이 혁명은, 장기적으로 다른 두 혁명의 성공 조건 자체, 따라서 계급투쟁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인데, 계급투쟁은 바로 이데올로기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이데올로기란, 관념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그 이상으로 태도나 습속의 사실인데, 이 착상은 훗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정의할 때 재발견된다).
이렇게 알튀세르가 실행한 줄타기는 정치적 견지뿐만 아니라 정서적 견지에서 그에게 극히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는데, 왜냐하면 두 진영의 대변자들이 이 줄타기를 이유로 곧바로 알튀세르를 아주 난폭하게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알튀세르가 이런 위험부담을 감수한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앞서 언급한 개인적 이유들 이외에도, 중국에서 전개된 사건들의 세부적 진실을 ― 실제로는 선전에 속하는 그릇된 정보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 그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스탈린주의에 대한 좌익적 비판’이 확실히 존재하지 않았거나 ‘주요 측면’이 아니었던 곳에서 그 요소를 보도록 이끈 것은, 알튀세르의 가장 깊은 ‘공산주의적’ 신념에 뿌리를 둔 더 일반적인 이유였다고 나는 믿는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은 비극적 현상으로, ‘사회주의 진영’뿐만 아니라 반反자본주의 및 반反제국주의 세력 전부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분열이, 제국주의와 공동으로 대결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일시적일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희망했다. 사회주의 나라들을 자신들의 전략에 종속시키고 ‘진영의 교체’를 준비하기 위해 사회주의 나라들의 이데올로기적·지정학적 적대들을 활용할 능력을 도리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갖게 될 것임을 그는 분명 상상하지 않았다. 또 그는 (재)통일이 이루어질 날, 혁명적으로 재개될 맑스주의 이론의 개조에 동참하여, 말하자면 ‘사라지는’ 매개자로 행동하기 위해(또는 그가 1968년 『레닌과 철학』에 썼던 것처럼, ‘개입 속에서 소멸’하기 위해) ‘맑스주의 철학자들’이 거기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게 나의 추정이다. 물론 내 가설일 뿐이지만, 이는 그가 각 진영과 우정을 유지하기를, 또는 개인들과 절연하지 않기를(이는 분명 실현불가능한 목표로, 결국 그를 배신하게 된다) 원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마오쩌둥 사상’ 및 서양의 마오주의 운동과 알튀세르가 맺은 관계의 변천이 그의 철학적·정치적 사상이 겪은 전위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다고 제안할 생각은 없다(이 변천이 알튀세르 사상의 내적 긴장을 설명하는 데 기여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하물며 이것이 오늘날 중국 독자들이 알튀세르의 사상과 역사에 관심을 가질 법한 주된 이유일 것이라고 제안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다. 그러나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이를 요약한 데는 일화 이상의 이유가 있다. 오늘의 세계에서 중국, 마오를 국가의 창건자로 내세울 뿐만 아니라(반면 러시아는 더 이상 레닌을 그렇게 내세우지 않는다) 정치의 인도자로 내세우는 중국은 완전히 역설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로 지칭되고 ‘공산당’의 통치를 받는 중국은, ‘자유주의’와 사뭇 다르고 ‘신자유주의’와는 더욱 다른 완전히 고유한 제도적 형태들 하에서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의 경향적으로 패권적인 강국이 되었다. 우리가 공통의 미래를 구상하기 위해서는, 그 실제 역사와 이방인들이(특히 ‘혁명’과 ‘계급투쟁’의 철학자와 이론가들이) 지각한 이미지 두 가지를 동시에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양자를 구별하고 새로운 개념을 세우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알튀세르의 저작이 중국 대중들에게 전파되고, 저작의 맥락에 관한 되도록 정확한 인식이 수반된다면, 이 같은 이해의 (비록 소박하지만) 일부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이 서문의 작성을 청한 분들께 거듭 감사드리며, 간행되기 시작한 저작집을 읽을 미래의 모든 독자들께서 가급적 비판적이고 상상력이 넘치는 훌륭한 독해를 해 주시길 희망한다.
2015년 3월 22일, 파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