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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3년 학단협, 민주법연 등이 공동주관한 학술대회 

<감금의 역사, 수용의 시간과 형제복지원>에서 발표하기 위해 작성했던 글이다.

당일 나는 몸이 너무 안좋아서 참여를 하지 못했다.

이 발표 이후에도 여전히 형제복지원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여전히 감금 및 수용시설은 건재한 상태이다.

이 문명화의 결과로서 창출된 야만은 언제까지 지속될런지...


형제복지원, 혹은 문명화 과정의 효과로서 야만(1)



1.섬이란 어디에도 없다


영화 <마파도>(2005)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 이하 <김복남>)은 모두 그 공간적 배경이 섬이다. 육지로부터 한 참 떨어진 어느 외딴 섬. 그래서 육지의 외부인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고 심지어 제대로 된 관공소조차 없는 어떤 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두 영화는 담고 있다. 이때 섬은 고립의 공간이자 외부세계와의 단절된 공간을 의미한다. 외부의 시선이 가닿지 않는 곳, 아니 외부인들이 그 섬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공간. 그래서 그 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밖의 세계로는 알려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외딴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두 영화에서 전혀 다르다. 코미디 영화인 <마파도>는 이런 상황을 비틀어 웃음을 유발하고 결말부분에서는 휴머니즘적 감동을 선사하지만,  스릴러 영화인 <김복남>은 그 외딴 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삶을 잔혹하게 보여준다.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차라리 상반되는 장르에 속한 영화이다. 하지만 <마파도>의 웃음도, <김복남>의 참혹함도 모두 그 영화의 공간적 특수성으로부터 비롯된다. 도저히 육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시선에 항상 노출되어 있고 그런 사람들의 관계를 규제하는 법률과 제도, 그리고 도덕과 규범, 문화와 질서가 존재하는(혹은 존재한다고 가정된) 공간, 즉 ‘문명세계’에서는 일어날 법 하지 않는, 혹은 일어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외부세계로부터의 고립과 단절된 공간에서는 어찌되었던 육지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섬이 육지의 외부인 만큼 그곳은 문명의 외부가 된다.




1998년 MBC 피디수첩은 양지마을이라는 이름의 복지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제목은 <노예의 섬, 양지마을>이었다. 양지마을이 진짜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은 아니었다. 양지마을은 충남 연기군 전동면 송성리에 자리 잡은 사회복지시설로서 ‘청성원’이라는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던 시설 가운데 한 곳이었다. 수용된 사람들을 쇠창살이 달린 방에 감금하고, 강제노동을 시키고, 폭행과 고문 등 끔찍한 인권유린을 일삼았던 이곳의 상황을 언론은 ‘섬’이라는 은유를 통해 폭로한 것이다. 아마도 언론이 섬이라는 은유를 사용한 것은 정확히 문명세계로서의 육지와 그 문명으로부터 단절된 세계로서 섬의 대립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김복남>의 무대가 되는 ‘무도’라는 섬이 문명 외부의 공간, 문명의 힘이 닿지 않는 공간이고 그래서 그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듯이, 양지마을 역시 문화와 사회질서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참혹한 인권유린이 자행될 수 있었던 섬과 같은 공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양지마을은 섬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양지마을 문명세계, 문화와 사회 질서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 그 힘이 가닿지 않는 문명의 외부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벌어진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인간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만든 폭력은 결코 우리 사회의 문화와 질서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특정한 작동방식이었다. 이는 결국 <김복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육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섬이 아니라 육지의 문화와 질서와 결탁되어 있던 곳이었고, 육지의 문화와 질서에 의해서 고립된 곳으로 규정된 공간이었다.


양지마을이 섬이 아니었듯이 부랑인이나 장애인들을 감금하여 그들로부터 인간적 삶의 형상을 철저히 박탈한 각종 수용시설들 역시 결코 섬이 아니었다. 소위 사회복지시설로 불리는 모든 수용소는 문화와 질서 밖에 위치한 공간이 아니라 문화와 질서가 폭력의 형태로 표현된 공간이었다. 그런 섬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2.위기 사회의 조성과 타자를 생산하는 주체만들기


이미 많은 논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형제복지원과 같은 사회복지시설에 ‘부랑인’들이 집단적으로 수용되게 된 것은 1975년 제정된 내무부 훈령 제410호가 발표되면서 부터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는 그 훈령이 발효되기 이전에는 부랑인들에 대한 대규모의 조직적 감금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부랑인에 대한 수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부랑인에 대한 어떤 법제적 정비 없이 보안 처분으로 부랑인을 강제 수용하고 강제 노역에 동원”1)했었던 전사가 이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훈령’에 불과하지만, 없던 법제를 정비하여 부랑인들에 대한 대대적 단속을 실시하게 된 것일까? 무엇 때문에 필요에 따라 임의적으로 시행되던 부랑인 단속과 구금이 국가조직에 의해 체계적으로 집행되기 시작된 것일까?


     



이 훈령이 제정된 1975년은 익히 알고 있듯이 유신시대, 그 중에서도 ‘긴급조치’의 시대이다.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가 발효된 이후, 1975년 4월에는 긴급조치 7호가, 5월에는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긴급조치란 “ 국가의 안전 보장이나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재정적·경제적 위기에 처했을 때 대통령이 국정 전반에 걸쳐서 내리던 특별한 조치”로서 대통령은 이를 통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었다. 이미 유신체제라는 전체주의적 ‘헌정체제’를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대폭 제한한 박정희는 국가안보를 구실로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유신헌법이 그나마 규정하고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시켰던 것이다. 이 당시 유신체제에 대해 비판적은 모든 세력은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되었다. 유신체제는 안보가 국가의 절대적 과제로 제시된 체제였다.


긴급조치의 시대였던 1975년에 부랑인에 대한 일제 단속과 구금을 위한 법제적 근거가 마련된 것 역시 이런 안보지상주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임덕영은 “부랑인은 사회적 불순분자 혹은 범법자이거나, 사회적 불순분자가 위장하기 쉬운 계층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안보적 측면이 강조되었다”2)고 지적한다. 내무부 훈령 제 410호 제1장 1절은 이 훈령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동 훈령 제1장 3절에서는 “범법자, 불순분자 등의 활동을 봉쇄하는 것”이 적시된 점과,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철저한 신원 조사를 통해 범법자 및 불순분자에 대한 확인과정을 거치고 부랑인 신상기록카드를 작성할 것”을 명시한 점 등이 이러한 이 훈령의 안보적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3)'




물론 이러한 측면은 매우 중요하다. 유신체제가 안보지상주의를 표방했던 만큼 당시의 부랑인 단속에서 안보적 차원은 중요한 계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부랑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구금 조치가 반드시 군사적 의미의 안보만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불순분자(혹은 범법자)를 색출하기 위해서만 부랑인 수용을 목표로한 행정력 발동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훈령은 불순분자나 범법자를 겨냥하기 이전에 직접적으로 부랑인 자체를 겨냥한 것이었다.


410호 훈령은 단속 대상으로서의 부랑인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역, 버스 정류소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부랑인을 말한다.”(제1장 제2절). 또한 다음과 같은 자들도 단속의 대상이 된다. “걸인, 껌팔이 등 부랑인 외에 노변 행상, 빈 지게꾼, 성인 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제1장  제3절 제6호)


즉 부랑인이나 그에 준하는 자들이 단속, 감금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들이 결국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저해’하고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건전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이 훈령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사회는 ‘북괴’의 침략위협과 그 ‘북괴’에 동조하는 내부 불순세력의 준동에 의해서도 안보를 위협을 받고 있는 위기에 처한 사회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회질서를 저해하고 사회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자들에 의해 질서가 위협당하는 위기에 처한 사회였다. 국가안보와 사회질서의 동시적 위기. 그렇기 때문에 국가권력은 더욱 강화되어야 했고 ‘국민’들은 국가권력에 더욱 복종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유신체제는 대한민국을 극도의 위기에 처한 사회, 일종의 영구위기사회로 규정했다.


이러한 위기사회를 조성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바로 부랑인에 대한 단속과 구금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건전한 사회질서’에 포함될 자격이 없는 자들을 식별하고 규정하는 문제였다. 다시 말해 사회로부터 배제되어야 할 타자를 지목하여 그들에게 사회가 위기에 처한 원인을 돌리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부랑인은 불순분자와 손쉽게 동일화될 수 있는 존재로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중들/시민들이 동원되었다. 간첩신고, 혹은 불순분자 신고만이 대중에게 요구되었던 것이 아니라 부랑인에 대한 신고 역시 동시적으로 요구되었다. 부랑인에 대한 신고는 지역 책임자 신고와 일반 신고로 나뉘어져 있다.


"일반 신고란 일반 시민에 의한 신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훈령 제2장 제 1절에서는 부랑인 신고 센터를 시군구 민원실에 설치하고, 민원 신고 전화를 활용하도록 하고 있었다. 덧붙여 관내 주민, 공무원, 학생, 상인 등 모든 시민이 부랑인을 발견 시 즉시 신고토록 계도하며, 이를 위해 신고절차와 신고 전화번호가 담긴 유인물을 배부하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제2장 제2절에서는 부랑인의 배회가 예상되는 역, 터미널, 지하도, 육교 등과 우범지역에는 지역 관리 책임자 또는 인접한 상점주인 등을 부랑인 신고 책임자로 지정하고 부랑인 발견 즉시 즉각 신고가 이뤄질 수 있도록 긴밀한 연락체제를 유지하도록 규정되었다. 또한 통반장 주민 조직도 즉시 신고토록 의무화하였다."4)


부랑인 단속과정에는 대해 단지 정부의 담당부처나 경찰과 같은 치안기구 뿐만이 아니라 일반시민과 주민조직까지 동원되어야 했던 것이다. 간첩이나 소위 좌경용공분자와 같이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을 끼치는 존재가 아닌 부랑인들을 신고하는데 이러한 동원이 필요했던 것일까? 대대적인 대중동원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시민들에게 부랑인을 신고하도록 적극적으로 계도한 것은 시민들이 ‘건전한 사회질서를 저해하고 사회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자들’을 직접 지목하게 함으로써 자신은 그러한 존재가 아님을 확인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러한 동원은 시민들이 자신을 부랑인과 같은 자들과 적극적으로 ‘구별짓기’(distinction)하도록 만들고 ‘건전한 사회질서’ 안에 포함될 수 없는 자들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주체로 만드는 장치였던 것이다. 이 장치는 시민들로 하여금 사회질서에 포함될 자격이 없는 자들, 즉 배제되어야 하는 타자를 지목하고 규정하는 주체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동시에 신고자인 시민 자신은 그 사회질서 안에 포함될 자격이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인지하고 그 사회질서를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로 재인식하게 되는 효과를 창출하였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수많은 시설에서 벌어진 참담한 인권유린에도 불구하고 시설장을 비롯한 가해자들이 비리혐의 정도의 처벌만을 받고 다시 시설을 운영하게 되는 상황에도 시민들, 혹은 대중은 거세게 항의하지 않거나 문제시하지 않는다. 시설에서 인간적 삶을 박탈당한 수용인들은 이 사회의 질서에 포함될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시민들에 의해 잊혀져 버린 것이다. 박래군이 지적하듯이 수용시설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 “광대한 무관심의 바다, 침묵의 바다가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고, 그 바다 위에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이른바 부랑인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쉽게 잊힐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5) 과연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이 시민 스스로가 부랑인을 신고하도록 만듦으로써 그 시민이 타자를 지목하는 주체로 구성하였던 장치와 무관한 것일까? 타자를 직접 규정하는 주체가 됨으로써 사회질서 안에 포함될 자격을 가진 자로 자신을 재인지하게 만들었던 장치와 무관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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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명연, “전두환은 왜 531명 죽어 나간 그곳을 칭찬했나”, <프레시안>, 2013년 5월 9일.

2) 임덕영, “박정희와 전두환은 왜 ‘부랑인’을 겨냥했나”, <프레시안>, 2013년 6월 12일.

3) 같은 글.

4) 같은 글. 강조는 인용자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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