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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면서도 내딛은 한 걸음 : 

한국 인권단체 연대기구의 역사와 인권운동사적 함의(1)



*이 글은 2018년 3월 21일 수요일 인권연구소 창이 주최한 <한국인권운동사 제1차 워크숍>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완성된 논문이 아니니 인용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정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1.인권운동 연대기구의 역사를 통해 보고자 하는 것


한국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인권단체들의 연대기구는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사안별 연대체이고 다른 하나는 상설 연대체이다. 주지하듯 사안별 연대체란 인권운동의 특정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구성된 연대체이고 상설 연대체란 인권운동 전반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연대체이다. 이 글은 주로 상설 연대체 내지는 상설적 성격의 연대체를 중심으로 한국 인권운동에서 연대기구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다룰 상설적 연대기구는 ‘한국인권단체협의회’, ‘인권법제정 및 국가인권기구설치 민간단체 공동추진위원회’(공추위), 공추위가 확대개편되어 출범한 ‘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실현을 위한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국가인권위 바로세우자! 인권단체 연대회의’(연대회의)‘국가인권위원회 쇄신을 위한 인권단체 열린회의’(열린회의), ‘인권단체연석회의’이다. 이 중 공추위, 공대위, 연대회의, 열린회의는 모두 국가인권기구/국가인권위원회 대응을 핵심적 수임으로 하는 사안별 연대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공대우의 경우는 인권단체로 한정되지 않는 진보적 사회운동 전반이 결합한 연대기구이다. 하지만 이 단체들은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인권의제로 규모와 파급력 부분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 공추위에서 열린회의까지 이어지는 연대체들이 국가인권기구/국가인권위라는 단일 의제를 중심으로 연속성을 가지는 점, 그리고 공대위 이후 연대회의와 열린회의가 단지 국가인권위뿐만 아니라 긴급 인권현안들에 대한 공동대응의 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설적 연대기구로 파악하고 인권운동의 연대기구 역사기술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1992년 이후 한국의 인권단체들은 인권협, 공추위, 공대위, 연대회의, 열린회의, 인권회의로 이어지는 연대기구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인권운동의 연대기구별 특성을 일별하고, 각 연대기구가 보여주는 당대 인권운동의 공통과제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특히 인권운동의 연대가 한국사회에 제기한 문제들은 한국사회의 변화 국면에서 어떤 인권의제가 중요했는지를 보여줄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이 글은 일련의 연대기구들이 인권운동 내부적으로 어떤 과업을 수행하고자 했는지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이는 인권운동의 공통 토대에 대해 인권운동의 연대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보여줄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지난 연대기구의 역사가 지금 인권운동의 연대에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2.인권을 향한 연대의 흐름


92년 인권단체 간담회와 한국인권단체협의회

인권단체들이 연대기구를 결성한 가장 큰 이유는 역량과 자원의 한계로 인해 개별단체들의 차원에서는 어려운 인권운동의 과업를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각 인권단체들의 역량을 모아서 인권운동의 과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 인권단체들의 연대기구가 만들어지게 된 가장 핵심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1990년대라는 시대적 맥락에서 새로운 인권운동을 제안했던 서준식의 문제의식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1992년 새로운 인권운동을 모색하는 활동가들이 소집한 간담회에서 서준식은 ‘고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진행되는 인권운동’1)을 제안한다. 이 글에서 서준식은 기존 민주화운동의 일부문이 아니라 독자적 장르의 사회운동으로서 인권운동이 요구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서는 개별 단체가 아니라 그 개별단체를 넘어선 새로운 위상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밝힌다.




그는 1992년 간담회에서 발표된 글에서 ‘(1)연구자가 지도하고 실무자가 관리하는 독립된 자료실 (2)연구자와 법률가와 활동가가 함께 참여하는 복수의 연구 분과 (3) 개별 인권단체들과 연대를 위한 대회협력부서와 조직부서 등을 포함하는 사무국 (4) 조직부서에 결합하여 활동하는 자원활동팀으로 구성된 기구’를 새로운 인권운동을 위해 필요한 구상으로 제출한다. 이러한 기구가 필요한 이유를 서준식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여러 인권단체를 수평적으로 관통하면서 구멍가게인 여러 인권단체에 자료와 전문성, 그리고 활동 인자를 지원해 줄 수 있는 헌신적인 단위, 기존 단체의 ‘규정성’에서 자유로운 단위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2)  


이 구상에 따르면 기존 인권운동이 자기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 단체수준의 활동을 넘어서는 차원에서 자료와 전문성을 갖춘 단위가 필요하다. 서준식은 기존의 개별 단체들의 수임이나 활동방식의 규정성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그 단체들의 활동을 포괄할 할 수 있는 단위, 즉 “여러 인권운동단체들과 경쟁적 관계에 놓이는 또 하나의 규정성에 얽매인 ‘구멍가게’의 개설”로 끝나지 않고, “여러 인권단체들의 환영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단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 그런 차원의 기구가 필요한 이유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못난 우리의 인권운동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 길 박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라는 것이다.4)


그러나 서준식의 기획은 그의 구상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2년 후인 1994년 인권협이 만들어지면서 서준식의 구상에 근접한 기능을 수행하고자하는 연대기구가 탄생하였다. 한국인권단체협의회가 출범한 것이다. 1993년 한국인권단체들의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참여는 새로운 인권운동에 대한 고민이 강도높고 촉발되는 계기가 된다.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의 참여를 준비하면서 인권단체들은 ‘유엔세계인권대회를 위한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KONUCH)를 결성하여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비엔나 세계인권대회가 끝난 이후 KONUCH를 함께 한 인권단체들은 이 성과를 이어받아 인권단체들의 상설 연대기구를 꾸리기로 의견을 모으고 1994년 ‘한국인권단체협의회’(이하 인권협)를 창립한다. 물론 인권협의 조직 목적 역시 개별 인권단체들의 역량을 아울러 인권운동 전반에 필요한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는 다양화, 전문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민주화운동도 그 영역을 보다 넓고 깊이 하고자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인권운동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전문성을 갖추고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여야만 합니다.5) 


인권협의 경우 비엔나 세계인권대회를 통해서 국제인권기준과 다른 나라의 인권운동을 접하게 되면서 인권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넘어서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연대기구이다. 인권협은 인권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 바탕한 인권운동을 함께 전개하려는 문제의식이 다양화, 전문화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인권운동, 즉 인권운동의 전환을 인권단체들이 함께 모색하기 위해 결성한 기구인 것이다.


인권협은 1994년 출범 이후 1996년까지 아르헨티나 오월광장어머니회 초청행사, 국가보안법폐지운동, 동티므로독립운동 연대, 일본 우토로마을 지원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인권 정보의 수집 및 자료화나 인권교육과 같은 다른 과제들에서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고, 국제인권활동도 해외 인권단체들과의 지속적 협의체 활동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국가인권기구 설립을 위한 연대체 : 공추위와 공대위

1997년 이래로 인권협의 활동이 급속히 소강상태로 접어든 이후 인권협을 대신하게 되는 연대기구는 1998년 결성된 ‘인권법제정 및 국가인권기구설치 민간단체 공동추진위원회’(이하 공추위)와 공추위가 확대개편되어 1999년 출범한 ‘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실현을 위한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이다.


공추위와 공대위의 경우는 그 명칭에서도 드러나듯, 국가인권기구를 인권의 원칙에 부합하게 설립하기 위해 결성된 기구이다. 제대로 된 국가인권기구를 설립한다는 과제는 인권환경의 변화와 관련된 것으로 단지 인권운동진영만의 과제는 아니었다. 여타 사회운동의 권리투쟁에서도 인권기준에 입각하여 제 권리를 옹호하고 권리침해에 대항하며 시정하는 국가기구가 있다는 것은 각 사회운동에 친화적인 활동 환경을 만들어내는 문제이기도한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인권기구 설립운동에는 좁은 의미의 인권단체만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공추위에서 공대위로 조직이 개편되면서 국내의 주요 사회운동단체들이 거의 모두 망라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특히 공추위가 공대위로 확대개편되면서 조직구성이 매우 체계화된 연대기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고문단, 대표단, 집행위원장단 등 상급 지도부 체계는 기존 사회운동에서 매우 전형적인 틀이었다. 하지만 연구·교육위원회, 대외협력위원회, 언론·홍보위원회,투쟁·조직위원회, 국제연대위원회 등과 같은 전문적 위원회 구조와 사무국으로 공대위를 구성하는 것은 인권운동의 연대역사에서는 이례적인 체계적 조직의 구성이었다. 연대기구 내에 편성된 각 기능은 활동 초기에는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진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이는 한시적으로 활동하는 사안별 연대기구라는 점과 단지 인권운동만이 아니라 여타 사회운동진영의 역량이 모아졌기에 가능한 조직체계였겠지만, 인권의제로 이와 같이 체계화된 연대체를 구성한 것은 인권운동진영으로서는 최초의 경험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공대위는 국가인권위의 설립이 구체화되는 시기를 전후해서 내부에서 의견차이가 발생하고, 활동의 동력이 약화되면서 급격히 조직이 약화된다.


한동안 사회운동권의 드림팀으로 내외의 부러움을 샀던 국가인권기구 공대위는 막판에 민주당 법안에 대한 평가와 대응을 둘러싸고 내부이견을 해소하지 못했다. 그 결과 원래 인권위가 업무를 개시할 때까지 존속할 것으로 예정되었던 공대위는 법공포일에 맞춰 조기해체를 단행한다. 그 후 공대위 소속단체들 중 몇몇은 향후의 인권위 설립과정을 감시하고 견인할 목적으로 한시적인 연대기구 설립을 제안하지만, 민변, 민가협, 천주교인권위, 여성단체연합 등 이른바 major 단체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다.6)


비록 공대위는 출범 당시의 목적이나 암묵적으로 예정되어 있던 활동기간을 다 채우고 자연스럽게 해산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인권의제를 중심으로 국내 사회운동단체들이 함께 활동을 전개한 조직적 틀을 만들어 냈고, 그 조직의 구성이 체계적으로 짜여진 연대기구였다는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연대회의와 열린회의

2000년 공대위가 국가인권위 출범과 더불어 해산된 이후 인권단체들의 연대기구는 2001년 조직된 ‘국가인권위 바로세우자! 인권단체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로 이어진다. 연대회의는 국가인권위 관련 활동 이외에도 긴급한 국내 인권현안에 대응하는 등 인권단체 연대기구로 활동을 전개해왔지만 2001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그 활동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인권단체들은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 쇄신을 위한 인권단체 열린회의’를 결성하지만 열린회의는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한 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연대회의는 국가인권위원회에 대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공대위와 달리 주로 인권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는 점을 종별적 특징으로 하고 있다. 비록 한시적 연대기구로 위상이 정해졌으나 연대회의는 국가인권위 대응만이 아니라 인권단체들이 공동으로 대응할 사안에 대해서도 개입하는 기구였다. 이는 연대회의의 회칙 3조 활동의 4항은 연대회의의 활용내용이 ‘긴급한 인권 현안’에 대한 공동대응으로 규정되어 있다.


가령 연대회의는 창립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3대 긴급 인권현안을 제시하였다. ①표현의 자유에 대한 전면적 탄압 – 국가보안법구속, 국가기구에 의한 인터넷 상의 검열과 감시체제 구축 기도(정보통신이용촉진및개인정보에관한법[약칭 망법]시행령, 영장 없이 IP추적을 가능하게 한 망법 개정안 국회상정, 망법과 통신기반보호법을 통한 온라인시위처벌강화시도), 청소년보호를 명목으로 한 표현의 자유 억압시도, 집회와 시위 탄압 ②생존권 탄압 가속화 – 사용자의 불법은 묵인하며 노동자의 불법은 무조건 구속, 민주노총탄압 ③과거청산, 낡은 사법제도에 갇혀 신음 – 박영두 사건 진상규명은 이루어졌으나 처벌 불가능한 현실의 법제도 문제, 의문사진상규명위법 개정 요구 등이다.


즉 연대회의는 국가인권위 대응이라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 한시적 연대기구였지만, 긴급인권현안 공동대응에서 알 수 있듯이 인권단체들이 힘을 모아서 수행해야할 인권 과제를 위해서도 작동한 상설적 성격의 연대기구로서 성격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연대회의는 인권협 이후 출범한 두 번째 인권단체 연대기구였다고 하겠다.


인권단체연석회의

연대회의의 해산 이후 열린회의가 잠시 활동을 했지만 이후 인권단체 연대기구로서 명실상부한 활동을 조직은 인권단체연석회의(이하 인권회의)이다. 2004년 그 이전 해에 진행되었던 인권단체 공동행동을 평가하면서 인권단체들은 “인권운동단체간의, 인권활동가 내의 연대성이 강화”되는 긍정적 성과를 내었다는 평가와 함께, “평소의 전략 마련을 위한 논의”, “새로운 상상력”, “인권단체들이 동원하고 조직할 수 있는 대중적 역량” 등이 부족한 한계를 지적했다.7) 이러한 고민 속에서 몇 차례의 간담회를 거쳐 새로운 인권단체의 연대기구를 결성하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인권회의는 2004년 공식출범 이후 2017년 인권운동더하기로 전환할 때까지 13년간의 활동한 최장수 인권단체 연대기구였으며, 개별 인권단체들로 수행할 수 없는 인권운동의 과업을 다양하게 전개한 연대기구였다. 인권관련법제 대응이나 국가인권위 대응부터, 노동자 및 철거민 인권, 파병반대투쟁, 반차별운동, 공권력감시 운동, 재개발 및 군사기지 지역 주민생존권 및 주거권 활동 등 한국사회의 주요한 인권의제에 공동의 역량을 통해 개입하는 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1992년 이후 모색되어왔던 인권단체 연대기구의 상에 가장 부합한 면모를 보여 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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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류은숙, 「인권운동사랑방의 활동을 중심으로 본 한국 인권운동의 전개」, 김진균 편, 『저항, 연대, 기억의 정치』1권, 문화과학사, 2003, 367쪽.

2) 서준식, 「우리의 인권운동, 어디로 가야하나」, 『민주법학』 6호, 민주주의법학연구회, 1993. 230쪽. 이 글이 지면에 발표된 것은 1993년이지만 최초로 공개된 것은 1992년의 새로운 인권운동을 위한 간담회의 자리에서 였다.

3) 같은 글, 231쪽.

4) 같은 글, 231쪽.

5) 『한국인권단체협의회 창립대회 자료집』, 1994, 2,3쪽

6) 곽노현, 「국가인권위원회의 법과 현실―운영 첫해의 경험을 중심으로」,『헌법학연구』제8권 제4호, 한국헌법학회, 2002년

7) 미류, 랑희, 안병주, 이은정,  『인권단체연석회의를 기억하다』, 평등과 연대로!인권운동더하기, 2018. 8쪽.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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