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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8년 전국인권활동가대회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정정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1.인권운동이라는 물음


하나의 근본적 질문으로부터 시작해보자. 당신은 인권운동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운동?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운동?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운동? 물론 이런 이념적 지향을 갖는 사회운동이 인권운동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념적 지향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 이 자리에 모인 인권활동가들은 모두 동의하는 것일까? 인권운동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혹은 그것을 변혁하고자하는 운동이어야 하는가? 인권운동은 분단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까? 인권운동은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운동을 통해서 인권의제를 구현해가는 운동이 되어야할까? 아니면 높은 인권의식과 예민한 인권감수성을 가진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서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는 운동이어야 하는가? 인권운동의 구체적 이념은 세계인권선언이나 국제인권규약에 의거하는 것이어야 할까?


인권운동에 대한 이런 질문의 목록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답변 역시 각 활동가들, 개별 단체별로 찬차만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인권운동은 단지 단어만 있고 그 개념적 내용은 각 활동가와 각 단체에 따라 발산하는 것인가? 다양한 인권활동가와 인권단체들을 수렴하게 하는 것은 ‘인권운동’이라는 ‘내용 없는 이름’일 뿐인가?


이는 오늘날 한국의 인권운동이 견지하고 있는 세계이해와 자기이해에 대한 질문이다. 과연 현재 인권활동가들, 인권단체들, 인권단체의 연대체, 인권운동진영에서 합의된 인권운동의 세계이해와 자기이해가 있을까? 혹자는 이 질문 자체가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의 다양한 인권운동들에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근대적’ ‘거대담론’의 폭력적 동일화라는 혐의를 던질 수도 있겠다. 물론 그 혐의가 부당한 것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지 다양한 차이들의 발산만이 있다면 우리에게 ‘인권운동’이라는 기표나 인권운동 더하기 같은 연대체는 왜 필요한 것일까?


이는 인권운동이 다른 운동과 구별되는 종별성에 대한 물음이자, 지금의 상황에서 이 종별적 운동은 어떤 성격의 운동이며, 이 운동에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물음이다. 인권운동의 종별성에 대한 물음은 단지 다른 운동과 인권운동을 구별하고, 과거의 인권운동과 지금의 인권운동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오늘날 한국 인권운동의 세계이해와 자기이해에 대한 질문이 필요한 것은 인권운동이 하고자하는 바를 잘 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권운동’이란 기표를 가지고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세계와 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운동에 부족한 것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질문하고 함께 답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글은 이 질문을 한국인권운동이 1990년대 이후 걸어온 역사적 궤적을 검토하는 작업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던져보고자 한다. 물론 답은 주어져 있지 않다. 다만, 지금 우리의 인권운동에 필요한 세계이해와 자기이해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기 위한 공통의 출발점을 어쩌면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기대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 이 기대를 가지고 한국인권운동의 어떤 역사를 추적해보고자 한자.


2.첫 번째 전환 : 2세대 인권운동의 형성


(1) 역사적 맥락 : 7,80년대 인권운동과 90년대의 사회변동


한국사회에서 인권이 사회운동의 의제로 제시되고 인권을 모토로 사회운동조직이 결성된 것은 1972년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창설이라 할 수 있지만, 한국의 사회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인권단체를 결성한 것은 1974년 KNCC인권위원회가 시초였다. 인권을 명시적으로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해 출범한 정의구현사제단 역시 인권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 활동한 조직이다. 이후 반독재민주화운동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민가협, 유가협,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인권위(천주교인권위의 전신) 등이 만들어지고 민변이 출범하면서 1세대 인권운동이 틀이 구축된다.




이미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1세대 인권운동의 성격은 70년대의 민주화운동, 80년대의 변혁운동의 하위, 부문운동으로 기능하였고 주된 의제는 양심수, 고문, 의문사, 실종 등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 민중운동 활동가들의 인권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곧 인권운동이 고유한 이념적 지향과 운동전략 및 의제와 활동방식을 가진 독자적 사회운동으로 자리 잡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세대 인권운동이 이런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당시 사회구조의 성격과 정세의 효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과 그 효과 속에서 등장한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동과 정세의 변화는 사회운동 내부에서도 전화의 압력으로 작용하였고, 이는 인권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980년대말 1990년대초는 세계사적 변동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역사적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본격화된다. 국내적으로는 1991년 봉기의 패배,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인한 개혁드라이브, 그리고 한국자본주의가 주변부 포드주의를 서서히 벗어나서 내수시장이 자본축적의 한 축으로 자리 잡게 되는 등 국제적, 국내적 사회변동의 시기였다.


(2) 변혁운동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새로운 인권단체의 출현


이 시기 인권운동사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민가협, 유가협, 민변, 천정연 등 기존의 인권단체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새로운 인권단체들 및 인권운동의 흐름이 출현한다는 점이다. 1993년부터는 새로운 인권단체들이 속속 등장한다. 1993년에는 인권운동 사랑방의 출범, 다산인권센터의 전신인 다산인권상담소의 개소, 천정연으로부터 천주교인권위의 분리 결정이 있었고, 1994년 천주교인권위의 공식적 독립, 정의평화정보센터(전북 평화와인권연대의 전신) 결성되었다. 또한 이 해에 성소수자 단체인 친구사이와 끼리끼리의 출범, 네팔 등 이주노동자 최초의 직접행동인 경실련 강당 농성 등 소수자 인권운동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한국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첫 번째 전환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앞에서 언급한 한국사회의 구조적, 정세적 변동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정세적 조건의 변화는 한국 사회운동 내부에서도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계급모순이나 민족모순을 여전히 한국사회의 근본문제로 인식하고 이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이 지속되었으나 이러한 운동들 내부에서도 변화의 모색이 있었고 분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시민운동이나 생태주의운동과 같은 새로운 경향의 사회운동들도 출현하게 된다.


변혁운동적 계기


이렇게 운동의 재구성 내지 전화를 모색하는 흐름은 기존의 인권운동 내부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1992년 서준식 등이 중심이 되어 ‘인권운동연구모임’을 꾸려서 ‘새로운 인권운동’에 대한 고민을 본격화하게 된 것이다. 인권운동연구모임은 1992년 기존 인권단체들에게 민주화운동 및 변혁운동의 하위 부문으로서 인권운동이 아니라 독자적 장르로서 독립적 인권운동을 제안하였고 이를 위해 개별 단체들을 넘어서 ①활동가, 연구자, 변호사 등이 유기적으로 협업하는 연구역량의 구축, ②인권운동을 위한 체계화된 자료실의 구축, ③인권단체들 간의 연대를 위한 사무국, ④자원활동팀의 조직 등 네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를 제시하였다. 1992년 당시로서는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인권운동연구팀은 인권운동 사랑방이라는 조직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이 구상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인권운동이 민중, 민족운동이 중심이 된 전체운동의 하위부문이 아니라 독자적 사회운동으로서 정립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체계화된 연대가 인권운동에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던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후 한국인권운동사에서 첫 번째 전환, 혹은 2세대 인권운동이 출현하게 되는 주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된다.[각주:1]


1993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새로운 인권단체들이 조직되고 이전과는 일정하게 결을 달리하는 인권운동의 흐름이 형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흐름이 이전 사회운동이 가지고 있었던 변혁운동의 성격과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모순과 분단체제의 민족모순을 극복하여 대안적 체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체제변혁적 사회운동의 문제의식을 새로운 인권운동 역시 계승하고 있었다. 사랑방의 서준식은 자신과 동료들이 하고자하는 인권운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바 있다.


‘계급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사회구조의 문제에 육박하지 않고, 인권이 구현되는 세상으로의 ‘초월’이나 변혁을 꿈꾸지 않고 그리고 조국 통일에의 소망을 품지 않고서 어떻게 ‘보편적으로’ 인권을 구현시키기 위한 고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사회의 변혁을 꿈꾸면서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각주:2]


천주교인권위의 김형태 또한 인권운동이 계속해서 담지해 가야할 방향성을 변혁성에서 찾고 있다.


우리가 공기처럼 의식도 못한 채 몸담고 살아가는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그 한계를 지적해내고 근본적 변혁을 주장하는 변혁운동론은 목표와 문제의식에 있어서 여전히 유효하다. ‘작은 권리 찾기’식의 신변잡기적 운동이 인권운동의 대중적 확산에 필요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변혁운동의 관점은 현 시민운동적 인권운동에서도 중심 화두가 되어야 한다.[각주:3]


즉 ‘진보적 인권운동’이라고도 명명될 수 있는 새로운 인권운동의 지향에는 7,80년대 사회운동이 가졌던 체제변혁적 문제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자본주의체제와 분단체제를 변혁하여 대안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거대담론적 문제의식이 90년대 형성된 새로운 인권운동에도 관철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변혁운동 밖의 계기


그러나 새로운 인권운동이 80년대의 변혁운동적 문제설정을 계승한다는 것이 그 운동의 모든 것을 단순 반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계급환원론이나 민족환원론과 같은 환원주의적, 결정론적 발상이나 중심운동과 부문운동의 위계화, 그리고 운동영역 및 의제의 협소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경향이 새로운 인권운동에는 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을 구체적 운동의 현장에서 구현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나 논리적 틀은 충분히 마련되지 못한 상태, 즉 새로운 인권운동을 위한 언어, 개념, 논리, 즉 이론의 공백이 존재하였다.


이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 것이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의 참여였다. 그 대회에서 참여하였던 박래군은 그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제 경우에는 이 인권대회가 ‘내가 인권운동을 하고 있구나, 인권운동을 해야겠구나’라고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내가 인권운동을 하면서도 인권운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민족민중운동과 혼재되어 있던 상태였죠. 그러다가 이 대회에 참여하면서 ‘인권운동을 해야겠다, 인권운동을 하 수 있겠다’라는 인식이 생겨났던 겁니다. 사실 당시를 생각해보면 문화적 충격이 엄청 컸어요. 저만 그랬던 게 아니고 같이 갔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죠. 개인적으로 가장 큰 충격이었던 일은 처음으로 성소수자 그룹을 만난 것이었어요. 이 사람들이 ‘옷 입고 다니는 것도 야리꾸리하고, 엉덩이에 구멍을 내놓고 다니고, 다 핑크빛으로 해놓고, 이상한 짓’을 하더라구요. 서준식 선배와 저는 비엔나 거리에서 대낮에 남녀가 끌어안고 있는 것만 봐도 충격적이었는데......"(박래군 ; 2017)


류은숙의 경우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참여경험이 한국 인권운동에 미친 핵심적 영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93년의 충격은 인권의제의 충격적인 확산, 인권을 이야기하는 데 근거가 되는 국제인권법의 발견, 국가인권기구 등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인권기구의 상, 국제인권연대에 ‘우리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 등이에요. "(류은숙 ; 2017)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서의 이와 같은 인식론적 충격은 이후 한국 인권운동의 자기 이해와 지향점 그리고 운동방식 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93년 이후 인권운동은 기존의 인권운동 방식, 즉 국가폭력과 반인권적 법률로 인해 발생하는 국가기구에 의한 인권침해에 대한 대응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을 탈피하여 인권의제를 더욱 다양화하며 인권운동의 개입범위를 확장해 가게 된 것이다.




기존의 인권운동만이 아니라 성소수자 인권, 장애인 인권, 이주노동자 인권 등과 같은 소수자 인권이 인권운동의 주요한 의제가 되고 정보인권, 사회권, 연대권 등과 같은 새로운 인권 의제가 제기되며, 인권을 정부 차원에서 전문적으로 옹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국가기구 설립을 위한 투쟁을 인권단체들이 주도하게 된다. 또한 인권운동이 주장하는 바의 근거도 추상적 수준의 인권의 당위성이나 민주주의의 정당성으로부터 세계인권선언이나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 혹은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 등과 같은 각종 국제인권법으로 옮겨가게 된다.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이후 한국의 인권운동은 과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맥락 및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부문운동이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인권운동의 의제와 방식, 그리고 논리와 문화 등으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의제, 방식, 논리, 문화 등을 형성해 가게 된 것이다. 또한 비엔나 세계대회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된 KONUCH는 대회 이후 인권협이라는 국내 인권운동진영의 독자적인 상설적 연대체를 결성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다시 말해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의 경험이 국내에서 새로운 인권운동의 전개를 위한 조직적 연대의 틀의 형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비엔나 세계인권대회는 한국인권운동이 변혁운동의 부문운동으로서 존재하던 상태를 탈피하여 독자적 인권운동, 새로운 인권운동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1. 실제로 이 구상은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경험 이후 1994년 국내 인권단체들이 조직한 최초의 인권단체들의 연대기구인 한국인권단체협의회의 지향 속에서 일정 부분 실현된다. [본문으로]
  2. 서준식, ‘희망의 인권운동-인권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1995. 이 글은 작성당시에는 미발표되었으나 2003년 야간비행 출판사에서 간행된 『서준식의 생각』에 게제되었다. [본문으로]
  3. 김형태, ‘인권운동, 그 위기와 기회’, 『창작과 비평』28호. 200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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