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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 자발적 감금의 반反정치

전주희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1. 과로의 시작 :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취업준비 기간’의 의미 - (1)

2. 취업준비자의 구조와 실태

    1) 취업의 경로들 

    2) 취준, 노력의 공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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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취준, 자발적 감금의 정치학 :  어빙 고프만의 <수용소> 를 통해본 '자발적 감금'의 메커니즘 - (2)

    1) 역할박탈

    2) 탈문화와 시간의 안락사

    3) 모욕감의 원천들

(4) 공정 이데올로기와 과로의 변증법





1. 과로의 시작 :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취업준비 기간’의 의미


불안정 노동으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은 노동과 실업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바꿔놓았다. 뿐만 아니라 ‘취업준비’라는 독특한 시간을 형성한다. 취업준비에 할애되는 시간은 노동에 덧붙여진 시간으로, 노동 이전의 시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노동에서 주기적으로 축출당하는 시간의 공백이자, 과거의 노동과 미래의 노동 사이의 불안정한 시간이다. 동시에 불안정한 노동이 일반화된 시대, 안정적인 노동을 희망하는 각자도생의 노력이기도 하다. 

이글을 통해 나는 오늘날 ‘취준’이라는 짧은 용어로 통용되는 ‘취업준비 기간’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그 기간에 수행되는 모든 노력들이 전통적인 ‘과로’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취업준비 기간의 노력들을 일종의 ‘사회적 노동’으로 간주해 노동의 연장으로, 그래서 모두 과로로 규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신조어가 아닌 듯한 신조어인 ‘취준’을 취업 후의 노동과 단순 유비관계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해야할 질문은 ‘취준’을 노동 혹은 과로로 정의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취준’이라는 오래되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현상을 다룰 때 과로라는 개념에 어떤 일이 생기는가이다. 


‘취준’의 ‘노오력’과 취업후의 ‘과로’는 똑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범주는 서로의 배경으로 작동하며, 종종 서로를 통해 가장 강력한 자기 표현을 발견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거칠게 결론짓자면, 현재의 ‘노오력’은 미래의 ‘과로’를 현실화하는 힘이자, 현재의 ‘과로’는 과거의 ‘노오력’에 따른 보상이다. 물론 취준의 노오력이 과로하는 미래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취준’은 안정된 직장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로하지 않는 직장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과로여부가 아니라 안정된 직장이 관건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과로는 변수가 되지 못한다. 더욱이 안정된 직장의 ‘과로’란 과로의 지속이라기 보다는 노력의 성취가 된다. 

따라서 ‘취준’의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과로의 질이다. 주야맞교대의 12시간 육체노동은 부끄러운 것이지만, 의사의 심야노동은 능력과 헌신의 다름이 아니다. 콜센터의 전화상담은 하찮은 것이지만 변호사의 법률서비스는 외운 것을 매뉴얼대로 반복하는 것 이상이 된다. 어느 시대이건 노동은 사회적, 역사적, 도덕적 질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이 때의 과로의 질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착취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한다. 착취는 회계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질적인 조건들을 회계적으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착취는 노동의 분할과 가치절하되고 위계화된 노동을 전제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과도한 노동이지만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과도한 노동을 둘러싼 계급투쟁이 있어왔다. <자본>에서 서술된 노동일을 둘러싼 투쟁부터 공장 안에서 노동강도와 생산량을 둘러싼 노동자 통제권의 문제, 노동안전과 관련된 다양한 투쟁들을 포함해 자본의 경영전략을 둘러싼 광범위한 싸움들까지 노동과 자본의 투쟁들이 그 예다. 따라서 과로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정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문제다. 



1) <자본>에서의 과로 : 과잉인구와 과잉노동의 순환


정의상 과로는 누적된 피로이자 과도한 노동(overwork)이 정신과 신체에 새겨진 흔적이다. 그렇다면 과로는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가 종료된 이후 자본에 의해 노동력의 사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본의 증식이 곧 노동착취의 다른 이름이라면, 과로는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사용에 따른 효과다. 물론 이 효과는 즉각적이거나 집적적이지 않다. 마치 그라데이션처럼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교차의 매우 다양한 길들을 내며 착취가 일어나는 노동과정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가시적인 효과로 등장한다. 그래서 과로는 마치 자본의 지휘하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노동자 본래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결과로서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신체가 과로상태라고 하는 것은 그 신체가 하나의 노동력임을 전제한다. 이미 노동력이 이전만큼 재생산 되지 못하고 소진되어가고 있는 중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노동력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소진의 가능성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에 의해 노동력이 구매되기 이전, 노동력을 갖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거나 노동력을 갖추기 위한 신체를 형성하려는 노력의 시간에 과로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맑스는 <자본> 1권에서 과잉노동이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법칙의 결과라고 말한다. “자본은 노동력의 수명을 문제삼지 않는다. 자본이 관심을 쏟는 것은 오로지 1노동일 가운데 사용 가능한 노동력의 최대한 뿐이다.”[각주:1] 이러한 과잉노동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그 자체의 시스템에서는 노동력의 때 이른 파괴를 막을 수 없다. 결국 잉여가치의 생산이자 동시에 잉여노동의 흡수인 자본주의적 생산은 “노동력 그 자체의 너무 이른 소진과 사멸을 낳는다.”[각주:2]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만성적인 과잉인구를 전제한다. 과잉인구 즉 “더 이상 자본의 자기증식에 직접 필요하지 않은 인구로 전화한 부분”[각주:3]인 산업예비군은 자본주의의 재생산의 조건이며, 착취가 이미 항상 과잉착취가 되는 원천이 된다. 노동시장을 범람시키며 노동력의 가격을 그 가치 이하로 떨어뜨리게 되는 과잉인구는 자본주의의 자유경쟁을 노동자들간의 격렬한 생존경쟁으로 전환시킨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개별 자본가의 필요와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매우 자명한 이 사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인격이 산업예비군으로서 자신을 자유의지로 규정하며 자발적인 노력의 시간을 보낸다. 이는 ‘취업’이라는 개별 자본가와의 계약 이전에 스스로가 수행하는 자본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는 노동력이 직접적으로 노동과정에 투입되기 이전,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이 개별 자본가들의 필요에 적합할 수 있도록 교육훈련을 하는 것, 최소한의 노동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유지하는 시간은 개별 자본의 비용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노력, 경쟁이 격화될수록 과도해지는 무비용의 착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맑스는 <자본>에서 임금에 대한 정의를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으로 정의했고, 이러한 임금을 구성하는 것에는 노동자의 자녀를 생산하고 교육하는 비용뿐만 아니라 특정한 숙련과 기능의 습득이 필요한 교육훈련의 비용이 포함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과도노동과 과잉인구의 현실적 조건 속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늘 그 가치 이하로 내려간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두 방향으로 가치절하 되는데, 한편으로는 과잉인구의 측면에서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내려간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윤의 창출을 위해 늘 자신의 수명보다 더 빨리 폐기되는 기계와 과학기술의 변화에 조응하며 교육훈련 비용의 전반적 상승으로 인해 노동자의 임금은 상대적으로 가치절하된다. 



2) 신자유주의 : 투자로서 ‘취업기간’의 탄생


더욱이 오늘날 노동력을 ‘인적자본’으로 간주하는 신자유주의하에서 노동력이란 늘 하나의 자본으로 투자되어야할 것인 바, 취업준비 기간이란 무작정 취업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업그레이드할 비용과 시간과 노력, 그것도 남들보다는 좀 더 강한 노력이 필요한 기간이다. 

주지하듯이 ‘인적자본이론’은 미국 신자유주의자들의 발명품이다. 푸코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신자유주의의 미국적 모델인 인적자본론을 분석한 것에 따르면 고전경제학이나 심지어 맑스까지도 노동을 불충분하게 다뤘거나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은 것으로 비판한다. 이들에게 노동은 ‘추상적 노동’이나 ‘시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더불어 노동은 생산관계 속에서 하나의 생산요소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노동은 경제 그 자체다. 즉 경제학은 자본을 투자해 생산을 하는 ‘절차’가 아니라 ‘인간행동의 과학’이 된다. 이제 경제의 임무는 인간행동의 형태, 인간행동의 내적 합리성을 분석하는 것이 된다. 이런 분석은 “희소 자원들이 주어졌을 때 개인들이 무엇보다도 어떤 하나의 특정한 목적에 그 자원들을 할당하도록 결정하게 만드는 계산이 무엇인지 도출”[각주:4]하는 것이다. 


인적자본이론은 자본의 입장에서 노동을 생산관계의 흐름 속에 위치짓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관점에서 ‘노동능력’이라는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영하는가를 사유하는 것이다. 노동은 “노동자에 의해 실천되고 활용되고 합리화되고 계측된 경제적인 품행”이며, 이를 통해 노동자를 ‘능동적인 경제주체’로 만드는 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임무다. 역설적이게도 노동자를 능동적인 경제주체로 만들자 마자 노동자는 인적‘자본’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취업준비 기간은 미래의 소득(임금이 아니다)을 위한 투자이며, 이는 소득을 위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경제행위가 된다. 이는 더 이상 미국의 신자유주의 이론 중의 하나가 아니다. 이것은 IMF를 전후해 태어난 ‘IMF 키드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이데올로기이자 IMF 이후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세기 맑스가 바라본 풍경에는 산업예비군이 감내해야 하는 시간이란 궁핍과 기다림의 시간이 노동과정 이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그 시간은 ‘취업준비’를 위한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시간이 되었다. 물론 모두가 그 ‘취업준비 기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그 시간과 비용을 부모님의 도움으로 채우지 못한다면 매우 불안정하고 빈약한 소득으로 불안정한 삶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끝은 여전히 실업과 노동을 반복하다 종료되는 불안정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는 ‘취업준비 기간’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이것은 또한 자신의 전 생애시간의 재편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의 생애주기에서 학업기간과 노동기간 사이에 취업준비 기간을 둔다는 것은 그 사이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애를 취업과 취업이전으로 나누고 취업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자신의 생애주기를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오늘날 ‘취업기간’의 달라진 풍경에 주목해보자. 취업준비라는 기간에 이미 상이한 격차와 경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취업준비자의 구조와 실태


1) 취업의 경로들 


대학생활은 이미 ‘학점’과 ‘스펙’으로 대체된지 오래다. 그럼 대학부터 우리는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고 봐야할까?

몇년 전 빈부 격차가 심한 대구의 두 초등학교 학생들의 희망직업을 비교하는 설문조사가 한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각주:5] 비교군인 A초등학교는 부자동네, 수성구에 있다. B학교는 대구의 변두리에 있다. 수성구는 대구 고위직 공무원 50%이상, 대학원 졸업자의 50%이상이 몰려사는 지역이다. B학교는 주변에 임대아파트가 있는 가난한 동네에 있다. 복지 대상자 아이들이 많아서 복지 우선 투자 대상학교이다. 사교육을 평균 3-4개 하고 방학이면 영어공부를 위해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아이들과, 사교육을 1개하고 해외여행은커녕 초등학교 이전 영어공부를 해본 학생이 전교생의 8%정도 밖에 안되는 아이들의 장래 희망 직업은 다를 수밖에 없다. 능력있고 부자아빠를 둔 초등학생은 3-4개씩 다니는 학원의 목적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힘들지만, 그렇게 해야 성적 잘 받고, 앞으로 좋은 대학도 가잖아요.” 이 아이들의 희망 직업 1위는 의사이다. 전문직 및 고위공무원을 희망하는 아이들이 47%에 이른다. 반면 가난한 B초등학교 학생들의 희망 직업 1위는 교사다. 전문직이나 고위공무원을 희망하는 아이들도 15%밖에 안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A초등학교 아이들이 UN사무총장과 로봇공학자, 외교관, 변호사, 경영컨설턴트, 자동차디자이너, 대기업 CEO를 희망할 동안 B초등학교의 아이들은 단 한명도 이러한 직업군을 적어내지 않았다. 대신 이 아이들은 제빵사, 요리사, 네일아티스트, 킥복싱선수, 동물조련사, 사육사, 태권도 사범을 희망했다. 하지만 이러한 직업들은 A 초등학교 학생들 중 아무도 적어내지 않은 것들이다. 

‘장래희망’에 대통령이나 과학자를 적어냈던 이전 시대와는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단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꿈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현실의 선택 가능한 직업군이 가장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UN 사무총장을 꿈꾸며 3-4개의 학원을 뺑뺑이 도는 아이들의 현실과 네일아티스트를 꿈꾸는 아이들의 또 다른 현실은 마치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처럼 가상과 현실을 포개놓는다. 하나가 현실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가상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공존하되 차별적으로만 공존할 수 있는 두 현실에서 ‘취업’의 의미가 단지 일자리를 얻는다는 의미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취업의 의미가 두 초등학생 집단들에게 각자 달리 의미화되고 있다는 것도 덧붙여져야 한다. 


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 전체 고등학생 수는 대략 170만명(1,699,699명)에 이른다. 이중 대학진학을 목표로하는 일반고 학생은 119만명, 특수목적고 학생은 6만7천명여명, 자율고 학생은 13만여명이다. 고등학교 졸업후 취업을 목표로한 특성화고 학생은 27만명이다. 이 숫자대로라면 27만명은 취업을 하고 나머지는 진학을 위한 대입시험을 치른다. 하지만 이들이 그대로 대학과 취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고 학생들 중 취업을 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특성화고 학생 중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도 있다. 이들을 취업률과 진학률로 따져 본다면 대학진학율을 68.9%이고, 취업률은 34.7%이다.[각주:6]  하지만 대학진학을 하지 못한 30%가 모두 취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통계적 기만이다. 진학과 취업의 사이, 보이지 않는 ‘백수’의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취준생 혹은 재수생으로 분류되거나 아니면 아예 통계에서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다른 한편 대략 대학 진학한 115만여 명과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취업한 58만여 명이 생각하는 ‘취업’의 의미와 경로는 다를 수밖에 없다. 2014년 기준 대학생의 취업률은 57.5%였다[각주:7]. 이중에는 대학원 진학과 결혼을 포함한 수치다. 오늘날 대학원 진학이 사실상 유예된 취업준비 기간임을 감안한다면 절반가량이 취업에 성공하고 또 절반가량이 취업준비 기간을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의 취업문제를 ‘청년문제’로 다루는 순간 대졸자들은 한국사회의 청년을 대표(represantation)한다.[각주:8] 한국사회에서 모든 취업, 실업 정책은 대졸자에 맞춰져 있다. 이들 대졸자들의 또 다른 이면에 학교바깥의 청소년들이 있다. 2016년 현재 학교 밖 청소년은 39만명으로 추산된다. 퇴학, 자퇴 등으로 학교를 떠난 초중고생이 40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빈곤층 청소년이다. 이들 중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시급 알바로 십대와 20대를 시작해 생애주기별로 가난의 궤적을 형성하며 영구빈곤의 궤도(orbit)를 도는 삶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처한 문제는 실업문제나 취업문제에도, 청년문제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취준’은 이러한 학교밖 청소년들의 노동, 특성화고 학생들의 현장실습을 포함한 취업, 대학진학을 하지 못한 학생들의 진로에 대한 고민 등은 배제된다. 동시에 ‘취준’은 이러한 다층적이고 다양한 취업을 둘러싼 경로들이 있다는 전제위에서 구성된다. 즉 이러한 계층적인 취업의 경로들은 왜 ‘취준’이라는 기간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보여준다. 취준은 그 다양한 취업의 경로들을 통해 거대하게 고여드는 불안정한 일자리, 저임금의 일자리, 장시간노동이나 높은 노동강도에 비해 그에 걸맞는 인격적 대우와 보상이 뒤따르지 않는 일자리들의 ‘바깥’에 자리한다. 그러니까 취준은 좀 더 낳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불안정한 일자리가 아닌 것, 안정적인 직장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불안정함으로부터, 그리고 경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상의 경쟁은 하고 싶지 않아요.”(면접자 A)


서울시 9급 사회복지 공무원이 목표인 A가 공시생이 된 이유다. A는 지금 하는 공부와 시험, 그리고 경쟁이 생애 마지막 시험과 경쟁이 되길 원한다. A뿐만 아니라 그의 학교 친구들 역시 그렇게 생각한단다. 좀 더 나은 직장을 원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A는 사회에 나오기도 전에 이미 경쟁에 지쳤다. 


학교 친구들도 치열하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 같아요. 서울의 4년제 대학에 다닌다는 거요. 그건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항상 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해요. 대학교 가서도 마찬가지죠. 학점관리를 해야하니까. 그들은 이상 그렇게 살고 싶어하지 않아요. 밤늦게 학원다니면서 직장에 들어간 것까지는 어쩔 없다쳐도 (회사) 들어가서 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하지 않는거 같아요. 비정규직으로 살고 싶어하지 않는거죠. 비정규직은 재개약을 위한 몸부림,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는 몸부림의 연속이죠. 회사에 들어가서도 계속해서 치열하게 살아야 해요.”(면접자 A)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취준’은 공채제도를 통한 취업을 목표로 소모되는 비용, 기간, ‘노오력’ 일체와 ‘취준’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 전반을 포함한다. 그 중에서도 공무원 시험을 목표로 하는 취준을 대상으로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취준’을 표상하는 전형성 때문이다. 전형적인 모델로서 공시생들은 전체 취업준비자들의 증가세를 주도하고 있으며, 취준이라는 기간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된 사회적 원인과 집단적인 욕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2) 취준, 노력의 공정함


통계청은 비경제활동인구 중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자격증 학원에 다니거나 고시 공부를 하는 경우,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답한 경우를 취업준비생으로 분류한다. 이 분류에 따르면 취업준비생은 71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정부가 취업준비생으로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 2003년이다. 다시말해 2003년은 ‘취업준비생’이라는 인구집단이 통계적으로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 2003년 ‘취업준비생’으로 네이버에 등록된 뉴스검색 수는 256건이다. 그러던 것이 2017년에는 23,235건으로 급증했고, 2018년 1월부터 6월까지의 뉴스검색 수는 1만 3천건을 넘어서고 있다. 

2017년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졸업후 첫 취업까지 11.6개월이 걸렸다. 작년보다 0.4개월 늘어난 기간으로 보통 1년여간은 백수 혹은 취업준비자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의 이 조사는 15세부터 34세 사이를 청년층으로 정하고 있다. 이들의 취업경로를 살펴보면 신문, 잡지, 인터넷 등 응모를 통해 직장을 얻는 경우 37.8%로 가장 많았으며, 주로 고졸 이하가 선택하게되는 취업의 경로다. 대졸이상의 경우 공개채용시험(26.5%)가 가장 높다. 이중 청년층 비경제활동인구 중 취업시험 준비자 비율은 14.5%로 71만명을 넘어섰다. 취업시험 준비분야는 일반직 공무원이 36.9%로 일반기업체 지원(20.6%)보다 많다. 청년 취업준비생의 36.9%가 공무원 공채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 국가직 9급 공채 시험에는 20만 3천명이 몰렸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4,953명을 뽑는 국가직 9급 시험에 202,978명이 지원해 평균 40.9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각주:9] 지방직 9급 공채의 경우 860명을 뽑는데 4만 4천여명이 몰려 평균 경쟁률 51.8%이었다. 

2008년발 금융위기 이후 취업준비자들이 급증했고, 이러한 증가를 견인한 것이 공시생들이다. 공무원 준비에 청년 취업준비생들이 몰리는 이유는 안정적인 직업에 입사하는데 공정한 시스템을 통과한다는 것 때문이다. 


저는 (기업입사를 위한 취업준비가) 짧은 기간이었지만 취업준비하는게 질렸던거 같아요. ㅇㅇ회사에 1 서류와 2 면접을 거쳐 최종면접까지 갔다. 이정도면 합격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공지 떳을 절대 안될 같은 사람이  되더라. 스펙, 서류, 인상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안되겠더라. 그리고 공정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기소개서에 가정환경은 대체 무슨 상관이지. 면접에서 2-3 질문을 받았는데 기준으로 뽑았는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역으로 (취준생들의) 정보의 격차가 굉장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모든 출발점이 공정한 선에서 나는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공무원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공무원은 객관적인 시험 점수를 기준으로 뽑고, 면접으로 사람을 크게 가르지 않는 같다.”(면접자 B)


공무원 생활의 안정성과 공채시험의 공정성은 면접자 모두가 지적하는 바이다. 공채 시험의 공정성은 면접자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된 합격여부가 아니라 철저하게 숫자화된 시험점수가 공정성의 준거가 된다. 물론 공채시험이 과연 합리적인지, 시험과목과 업무관련성이 직접적으로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장강명은 <당선, 합격, 계급>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당 없는 한국의 공채제도가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는 이유를 다름과 같이 제시한다. 


"지금 상당수의 사람들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공정성을 확실히 담보하지 못하는 제도보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더라도 획일적으로 시험을 치러 점수를 기준으로 뽑는 차라리 낫다고 여긴다. 이런 분위기가 공채제도를 유지하는 힘이기도 하다."[각주:10]


장강명에 따르면 공채제도는 고도성장기 한국 기업에 적합한 인재 선발 방식이었다. “공채에도 장점이 많다. 우선 많은 인원을 짧은 시간에 선발할 수 있다. 스페셜리스트를 찾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괜찮은 제너럴리스트를 추리는 데에는 무척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공정하고,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 삼성물산공사가 대졸 공채라는 신제도를 도입한 목적도 ‘학연, 지연, 혈연을 배제하고 공정하게 사람을 뽑기 위해’서였다.”[각주:11] 그러니까 공채제도를 둘러싼 공정성의 신화를 보기 위해서는 학연, 지연, 혈연을 통한 각종 특혜와 채용비리가 이미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채제도는 인맥이 없어도 개인의 노력만 있으면 올라탈 수 있는 마지막 사다리인 셈이다. 


시험과목과 업무관련성은 거의 없죠. 다만 시험은 얼만큼 노력했는가. 성실성을 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노력에 대한 지표죠.”(면접자 C)


공채시험이 공정한 이유는 ‘개인의 온전한 노력’이 시험점수로 나타나고, 1등부터 꼴등까지 서열화된다는 것에 있다. 이는 공채시험을 둘러싼 어떤 변화를 보여준다. 공채제도는 1957년 삼성물산공사가 처음 도입했다. 기업의 일자리가 점점 더 늘어나던 고도성장기에 정부와 기업은 효율적인 채용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업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에서 공채제도는 여전히 대체불가능한 강력한 채용제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업의 필요보다는 취업이 필요한 사람들의 선호 때문이다. 공채제도가 기업에서 정부의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을 선발하는 제도로 중심이 이동하게 되면서 공채제도를 둘러싼 공정성의 프레임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정함’의 절대적인 기준이 개인의 노력이 되는 것이다. 이는 격화된 경쟁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개인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치환되는 강력한 기제가 된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이러한 개인의 노력을 부정당하는 편법이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윗세대들 역시 자신과 같은 노력을 통해 입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함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공정함은 오로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자신들이 누려야 하는 자부심인 것이다. 


선배들과의 관계는 위화감이 있어요. 우리는 워낙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왔는데, 우리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죠. 선배들하고 우리하고는 상황이 달라요.”(면접자 C)


선배들은 지나가다가 그냥 지원해서 들어온 케이스가 많아요.”(면접자 B)


자부심이 있죠. 노력했다는 것만으로 있어요. 그것에 대해서는 대우 받는게 맞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상대적으로 자부심을 없애고 있죠.”(면접자 D)


시험 준비기간 동안 이리저리 아는 지인들을 통해 취업 제의도 들어왔었다. 거절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면접자 E)


공공부문의 채용이 면접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실제로 공정할까? 2017년 11월 범정부 공공기관 채용비리 특별대책본부와 채용비리 신고센터를 설치해 채용비리를 조사한 결과 1190개 공공기관, 기타공직유관단체 중 946곳에서 4788건의 지적사항을 적발했다. 이 중 중앙정부 산하 공공기관 275곳 가운데 257곳이 채용비리에 연구됐다. 비리에 엮이지 않은 공공기관을 찾기 힘들 정도다.[각주:12] 

면접자들은 이러한 공공부문 채용의 비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제기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한 비리가 만연한다고 해서 공채제도의 공정성이 훼손되지는 않는 듯이 보였다. 오히려 시험제도의 ‘공정함이라는 상상’은 사회적으로 채용비리가 만연할수록 더욱 강력하게 재생산된다. 



(계속)






  1. 칼 마르크스, <자본> 1-1권, 강신준 옮김, 2008, 도서출판 길, 376쪽 [본문으로]
  2. 위의 책, 376쪽 [본문으로]
  3. 위의 책, 579쪽 [본문으로]
  4. 미셀 푸코, 『생명관리장치의 탄생』, 오트르망 옮김, 2012, 난장, 316쪽. [본문으로]
  5. 오마이뉴스, “장래희망은?”...대구 초등학교 설문조사 ‘경악’, 2018.08.28. 검색.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01302 [본문으로]
  6. 진학률 및 취업률 산출방식(한국교육개발원, <교육통계연보> 인용.   ° 취업률(%) = 취업자/(졸업자-진학자-입대자)*100   ° 진학률(%) = 진학자/졸업자*100 [본문으로]
  7. 한국교육개발원(2015). 교육통계분석자료집, 고등교육·취업통계편. [본문으로]
  8. 학교밖 아이들 39만명...“공부 못하면 사람 취급 안했어요.”(국민일보, 2016년 5월 3일자.) [본문으로]
  9. 법률저널, ‘올 국가직 9급 공무원시험 20만 3천여명 지원...평균 경쟁률 41대1’ 2018.0301.검색.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927 [본문으로]
  10.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 민음사, 2018, 235쪽. [본문으로]
  11. 위의 책, 29쪽. [본문으로]
  12. 경향신문, 2018. 1월 29일자 사설, ‘공공기관 채용비리, 두 번 다시 없어야 한다.’ 2018.8.4.검색.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12920400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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