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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 자발적 감금의 반反정치-(2)

전주희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계속)



1. 과로의 시작 :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취업준비 기간’의 의미 - (1)

2. 취업준비자의 구조와 실태

    1) 취업의 경로들 

    2) 취준, 노력의 공정함


3. 취준, 자발적 감금의 정치학 :  어빙 고프만의 <수용소> 를 통해본 '자발적 감금'의 메커니즘 - (2)

    1) 역할박탈

    2) 탈문화와 시간의 안락사

    3) 모욕감의 원천들

(4) 공정 이데올로기와 과로의 변증법





3. 취준, 자발적 감금의 정치학 : 어빙 고프만의 <수용소> 를 통해본 '자발적 감금'의 메커니즘 


취업준비기간은 보통 어느정도 걸릴까? 그리고 이 시간에 취업준비자들은 어떤 장소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생활하게 되는가? 다시말해 이 기간의 경험이 취업준비자들이 믿는 공정성의 상상을 어떻게 강렬하게 생산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7, 9급 공무원 합격생의 평균 준비기간은 2년 2개월이다. 5급(행정고시)의 경우 평등 6년 정도가 소요된다. 이들은 보통 인터넷 강의를 활용하거나 노량진이나 신림동에 밀집되어 있는 취업학원과 고시촌에서 공부하고 생활한다. 대학교에서 마련된 고시반과 특강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시험을 목표로하는 취업준비자들의 경우 이 기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 ‘자발적 감금’ 상태로 자신을 사회와 격리시킨다. 고시촌으로 들어가 학원과 고시원을 오가는 극도의 단조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도 취업준비자들은 어느정도 시험준비 이전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는 모든 고유성들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한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 뿐만 아니라 개인을 개인이게 만드는 모든 독특성들을 소거하는 것이다. 


미시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수용소>에서 ‘총체적 기관 total institution’ 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총체적 기관이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수의 개인이 상당기간 동안 바깥 사회와 단절된 채 거주하고 일을 하는 장소라고 정의될 수 있다.” 총체적 기관 속의 개인들은 외부와 단절된 공통의 일과를 보낸다. 가령 교도소가 총체적 기관의 확실한 예다. 고프만은 사회적으로 현존하는 총체적 기관을 다섯 개의 집합으로 나눈다. 첫째, 무능하고 무해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설립된 기관들. 고아원이나 극빈자들을 위한 수용시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 무능하지만 공동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시설들. 나병 요양소나 정신병원 등. 셋째. 의도적으로 공동체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격리하는 시설들. 교도소가 대표적이다. 넷째. 수도원 같은 세상과 동떨어진 은둔 장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직업적 과업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오로지 도구적 관점에서 그 기능을 정당화하는 기관들이 있다. 군대 막사, 선박, 기숙학교, 노동수용소 등이 있다. 이중 네 번째와 다섯 번째가 자발적 입소가 가능한 시설들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의 모델을 염두에 두면서 고프만이 제시한 총체적 기관이 주체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프만의 분석에서 인상적인 것은 첫째. 자발적 입소를 포함해 재소자들에게서 일종의 역할박탈이 발생한다 둘째. 총체적 기관은 고유한 문화를 구축하지 않고 “탈문화disculturation”라는 사태를 유지한다. 셋째. 총체적 기관에는 자아를 손상시키고 오염시키는 간접적이고 모욕의 원천들이 미시적으로 작동한다.

이 세 가지 지점을 바탕으로 취업준비 기간을 ‘자발적 감금’의 상태로 규정하고, 이를 통해 이 기간에 취업준비자들의 자아에 어떠한 변화가 있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의 원제인 어사일럼asylum은 “사회에서 문제적 존재로 추방된 혹은 적합한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 비시민들의 수용 공간”(심보선, 옮긴이의 말)이다. 이러한 정의에 비춰본다면 취업준비자들의 자발적으로 선택한 시간성과 장소성은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추방시켜 비시민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칫 극단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규정으로 취준의 고립과 절망을 극대화시키려는 것은 이글의 목표가 아니다. 고프만은 정신병원을 중심으로 해서 총체적 기관 전반의 이론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비단 수용시설에 대한 분석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내가 이야기하는 어떤 요소들이 총체적 기관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11) 다만 총체적 기관들이 그러한 속성들을 강렬한 양상으로 드러낼 뿐이다. 그렇다면 총체적 기관들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은 시설들의 장벽을 넘어 사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바깥 세계의 경우도 이는 마찬가지 아닐까?”(365)라는 고프만의 질문은 사실상 고프만이 이 어사일럼들을 분석하고 이론화하고자 하는 최종적 목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역할박탈


우선 ‘역할박탈’의 차원이 취업준비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취업준비자들의 경우 완벽하게 감금된 상태는 아니다. 스파르타식 학원에 입소(?) 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완전하게 사회와 격리되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준비자들은 스스로 사회와 단절한다. 마치 수용소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감금상태로 놓는 것이다. 


“(취준기간동안 생긴 새로운 습관은혼자 얘기해요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얘기하고 있어요밥은  됐나하면서. ‘나혼자산다처럼요.(웃음)”(면접자 B, 취준 2년차)


고시촌에서 학원 다닐 때도 있었고집에서 다니며 공부할 때도 있었다집에서 공부할 때가 고시촌에 있을 때보다  힘들었다.”(면접자 E, 취준 5년차)


고시촌은 혼자서만 생활해야 한다독서실을 가도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고스터디를 대호 친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인간관계가 외롭다하루종일 말을 한마디도 안하고 지낸다음료수   말고는 사람과 대화라고 하는 것을 안하는 날이 많았다.”(면접자 F, 취준 6년차)


고립에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 극단적으로 사용하는 몇 개의 언어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역설적인데, 공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연인과 헤어지기도 하고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친구들의 모임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고 나는 그 세계와는 다른 편에 와있다. 이들은 시험에 필요한 언어로 공적언어만을 남겨두고 개별적인 관계를 구성했던 언어들은 다 상실한 것처럼 행동했다. 이러한 고립은 “역할박탈”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총체적 기관이 재소자와 바깥 세계 사이에 세우는 장벽은 자아의 축소를 제일먼저 드러내는 장소이다시민적 생활에서 개인적 역할들은 순차적으로 짜인다이로 인해 생애 주기와 반복적 일상 모두에서  역할은 다른 역할 속의 자아 수행과 유대관계를 방해하지 않는다반면 총체적 기관에 소속되면 역할의 순차적 짜임은 자동적으로 중단된다재소자와 바깥 세계의 분리는 스물네 시간 내내 지속되며심지어는 수년간 이어진다따라서 역할 박탈이 발생한다. ...이는 재소자를 과거의 역할과 깊이 단절시키고 현재의 역할 박탈을 수용하게 만든다."[각주:1]


역할 박탈의 과정에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고립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2년 2개월 혹은 평균 6년간 이루어지는 지속성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 관계에서의 어떤 위치 혹은 부여된 역할을 중단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관건이다. 자발적 입소의 경우 중에 사관학교 후보생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단시간 내에 과거와 확실히 단절해야 한다....

이러한 고립을 통해 사회적 지위가 다른 사람들의 이질적 집합이 아닌 통일된 훈련생 집단이 만들어 진다."[각주:2]


그러니까 역할 박탈은 사회 속에서 구성된 고유한 개인성의 박탈이다. 이를 통해 가장 추상적인 사회적 범주인 인간으로 자신을 환원하는 과정이다. 취업준비자들이 느끼는 공정함은 그들이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가졌건, 어떤 대학을 나오고, 어떤 가정환경을 가졌던 간에 그러한 토대들이 무시되는 과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외롭고 힘든 과정이지만 동시에 자신과 유사한, 추상적인 집단 속에 놓여진다는 경험은 어떤 균질적인 시작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균질성은 두 가지 조건으로 유지되는데, 하나는 강사와 수강생이라는 비대칭적인 정보의 흐름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암묵적으로 취업준비자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경계를 넘어서는 대화나 정보가 암묵적으로 금지된다는 점이다. 관계를 맺지만 비대칭적이거나 완전한 거리감을 유지한 관계는 취업준비기간 동안 특정한 문화가 형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즉 “공식적 접촉은 있지만 상호 침투가 거의 없는”(22) 관계의 비관계성은 시험과 관련된 유용한 정보의 흐름을 따라서만 형성되며, 딱 그 지점에서 멈춘다. 

중요한 것은 취업준비자들간의 강렬한 경쟁심 때문에 거리감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심은 무엇보다 적대적인 상호 침투의 과정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취준의 경우는 경쟁심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추상적인 ‘인간’ 집단으로 환원하면서 발생하는 무관계성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역할박탈은 몇 년간 지속되는 것이기는 해도 생애주기에서 일시적인 것이며, 다시 사회 세계 혹은 취업준비자들이 자신의 생활세계로 돌아오면 어떤 역할들은 복원될 수 있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라던가 소원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떤 역할은 복원이 불가능하고 영원히 상실될 수도 있다. 


"다른 종류의 상실들은 돌이킬  없으며  상실은 고통스럽게 경험될지도 모른다교육적이거나 직업적 자기계발에결혼 생활에또는 육아에 사용되어야 했을 현재의 잃어버린 시간을 생애주기 후반부에 보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영구적인 역할 박탈은 법적으로 보면 “시민권 상실civil death”이라는 개념에 상응한다.[각주:3]"


20대의 몇 년을 취업준비기간으로 다 써버린 다는 것은 전체 생애의 고작 몇 년이 될 수없다. 우리는 종종 “몇 년만 더 고생하자.”면서 생애의 어느 국면에서 향유해야할 권리나 경험을 유보하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굉장히 치명적인 상흔을 남기는 경우가 있다. 


"(20 추억이없다공부했던 것밖에 없다

20 초반의 나는 전혀 기억이 없다너무 아깝다결과적으로 합격을 했으니까 덜하긴 한데그래도 아깝다남들 다하는 교환학생이나 여행도 안가봤다국내여행도 안가봤고내일로 같은 거도 못타봤다사람들이 얘기하는거 보면 부럽다.(면접자 E)"


위의 면접자는 2012년부터 5년간 5급시험을 준비했고, 최종 합격했다. 28살, 군대도 미룬 채 공부한 결과다. 하지만 면접자의 대학 친구들은 없다. 그나마 학교 고시반에서 만난 동료들이 전부다. 과 친구나 동아리 친구도 없다. 1학년 때 사귄 여자친구도 시험준비를 하면서 헤어졌다. 아니 헤어지게 되었다. 면접자 E는 시험에 합격하고서도 매일 학교 고시반에 간다. 아직 발령을 받지 않았기도 하고. 또 딱히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20대는 그렇게 텅 비어 있다. 

더 심각한 사례는 시험의 실패가 갖는 트라우마다. 실패했다는 경험은 젊었을 때 하는 낭만적인 경험이 아니다. 스스로를 모든 역할로부터 박탈시킨채 선택한 고립은 시험의 실패와 더불어 심리적 상흔이 되기도 한다. 면접자 A는 취준기간 동안 시험에서 떨어지고 자살충동을 느꼈다. 1차, 2차 시험까지 붙고 면접에서 탈락했다. 7명중 5명이 최종합격하고 2명이 떨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면접자였다. 2주 동안 만취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문득 육교 아래 8차선 도로를 내려다 보다가 ‘저기 뛰어내리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공기업에 취직했고 취직해서 4년이 흘렀지만 실패의 상처는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아직 회복중이다상실이 컸다취업을 하고 나서도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취업한다고 해결된 것이 아니다원래 하려고 했던 것은 좌절된  남아있다죽을 때까지 있을  같다루저가  느낌지금 직장으로만 보면 원래 선택했던  보다는 훨씬 좋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탈락했다는 그게 크다그냥 불쑥불쑥 나온다자다가혹은 어떤 상황에서 그런 상실감이 나온다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울때가 있다만약 다시  시험을 쳐서 이번에는 붙는다고 하더라도  상실감상처는 없어지지 않을  같다.”(면접자 F)


취업준비 기간의 자실충동이나 우울증 등 실패에 대한 압박의 문제가 아니다. 성공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어떤 시간을 특정 공간에 격리시켜놓은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는다. 시민권 상실의 경험은 취업준비자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흔은 취준인[각주:4]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취준이라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기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공정함이라는 상상은 이러한 경험 가운데서 강화되며, 또 전도된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공정하지 않다는 불만과 불안은 공채제도의 공정함을 본래 그것이 함의하는 것 이상으로 과잉 상상한다. 자발적 감금을 수년간 견디어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비자발성을 포함한다. 때때로 문학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이 작품을 위해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다. 


2) 탈문화와 시간의 안락사


취준인들이 취업준비를 하기전까지 당연시해온 생활양식과 규칙적인 활동들이 있다. 이들의 사소한 생활습관이나 생활의 패턴들은 공적이건 사적이건 그들이 속해왔던 더 넓은 시민적 환경의 일부였을 것이다. 

고프만이 말하는 총체적 기관에는 기존의 문화를 대체하는 자체의 고유한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이한 정의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상태에서 문화가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가령 노량진은 대형 입시, 취업준비 학원들이 밀집한 장소를 넘어 ‘고시촌’으로 불리듯이 매우 독특한 거리의 풍경과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노량진 고시촌의 하루 일과와 그들이 즐겨먹는 음식들,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 언론은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2016년은 노량진 고시촌을 다룬 드라마 ‘혼술남녀’가 방영되었으며, 2014년에는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이 노량진 고시촌에 방문해 ‘컵밥 포장마차’에서 컵밥을 먹었다는 민생행보도 보도되었다.[각주:5] 대림동 조선족 거리의 양꼬치나 이태원의 루프탑처럼 노량진의 취준인들은 한국사회 속 이질적인 문화를 상징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고시촌에서의 잠정적이지만 독특한 문화란 해외 유학생활에서의 문화적 적응보다는 재소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정한 행동기회를 박탈하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시간이 지속되면 일종의 “탈문화disculturation”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는 취준 기간 이전에 향유했던 문화와 취준 시간 사이의 특정한 종류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이 시기의 성패여부를 결정짓는 관건이 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고프만은 “재소자가 “안”이나 “바깥”에 있다는 것의 완전한 의미는 “나간다” 혹은 “출소한다”라는 사실이 그에게 부여하는 특별한 의미와 무관할 수 없다.”[각주:6]고 말하는데, 이에 비추어 본다면 취준기간 안에 있다는 것은 늘 취준 바깥을 전제하는 시간이자, 취준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도, 시작될 수도 없는 시간이다. 

물론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는 사람들 중에는 ‘입소’가 입소 후의 사회적 지위의 사전취득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엘리트 기숙학교나 장교 훈련 학교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들은 자신의 ‘입소’ 기간의 관계와 문화를 입소 이후 사회에 나와서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 한국사회의 경우 군대 중 특히 해병대 전우회 같은 모임도 유사하다. 이들의 경우는 ‘입소’의 경험이 자부심을 형성하는 중요한 시간을 형성한다. 하지만 취준의 경우 ‘고시 낭인’ 혹은 ‘노량진 낭인’(이전에는 ‘신림동 낭인’)으로 불리듯이 취준은 하나의 낙인이 되기도 한다. 반드시 필요한 기간이지만 남들보다 길어질수록, 그리고 고유한 문화를 향유할수록 바깥 사회의 변화들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하는 ‘탈숙련’의 문제가 제기되며, 이는 ‘탈문화’의 고유한 특징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공채 합격자의 기수 모임을 꾸려나가는 문화는 있어도, 함께 취준의 시간을 지냈다는 이유로 기수모임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입사동기’ 모임 혹은 기수 모임은 한국사회에 대규모 공채제도가 낳은 문화적 산물이자, 학연·지연과 함께 고학력 엘리트들의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주요한 형식이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취준 기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규정하기 위해서는 취준의 바깥, ‘합격’ 혹은 ‘취업’의 여부에 따라 사후적으로 의미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취준의 시간은 어떤 의미화도 불가능한 시간, “시간의 안락사”[각주:7]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각주:8] 


3) 모욕감의 원천들


모욕은 타인이 나에게, 혹은 내가 타인에게 경멸하고, 비하하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행위이다.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은 단지 신체적 고통을 주기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개인들의 자율성을 박탈하고 지배하려는 권력의 작동을 개시한다. 그런데 지배적인 권력은 일상의 영역에서는 직접적인 폭력의 맨얼굴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알튀세르는 억압적 국가장치와는 별도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개념화 함으로써 복종적인 주체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했으며, 푸코 역시 <감시와 처벌>에서 판옵티콘의 비대칭적 시선을 통한 권력의 작동방식을 분석하며 ‘순종적이고 유용한 신체들’로 주체화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푸코에게서 주체화는 신체를 통해 내면화되고 습득되기 때문에 감정에 대한 분석이 비어있다. 반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그들의 실재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의 표상”[각주:9]으로 정의한다. 이데올로기 안에서 개인들은 그들의 실재조건 그 자체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그러한 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를 표상한다. 이 관계는 항상 상상적인 관계라고 알튀세르는 말한다. 이는 결국 개인들이 자신의 실재 조건을 어떻게 체험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때 이 체험은 정서 혹은 감정의 수준에서 작동한다.[각주:10] 하지만 알튀세르 역시 이데올로기와 정서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고프만이 설명하는 ‘모욕감’에 대해 살펴보자. 수용소를 분석하기 때문에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포함해 다양한 통제기제와 규율화 장치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분석되지만, 내가 관심있는 것은 직접적인 모욕을 가하지 않더라도 느끼게 되는 ‘모욕감’에 대한 메커니즘이다. 이 때 모욕감은 주체의 능동적인 반응이라기 보다는 ‘역할박탈’ 혹은 ‘권한박탈’ 상태에서 느끼는 무력화(disempowerment)에 가깝다. 

행위의 자율성 자체가 침해당한다는 것은 시민사회에서 행위자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자기결정권, 자율권, 그리고 자유의 목록들이 중단되거나 훼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능력 혹은 능력의 상징들을 보유할 수 없을 때, 개인들은 “연령-등급 체계에서 자신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강등되었다”[각주:11]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단적으로 ‘취준생’이라는 호명은 연령과 등급의 체계가 성인의 지위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무력화에 따른 모욕감은 심리적 안도와 불안이라는 이중적인 상태에서 개인을 진동하게 한다. 


자아 모욕이나 제한은 개인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가져올  있다그러나 자신의 세계를 혐오하거나  세계에서 죄의식에 젖은 사람에게 모욕은 오히려 심리적 안도를 가져올  있다더욱이 심리적 스트레스는 자아 공격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자아의 영역과 관련되지 않은 문제-불면불충분한 음식의사 결정의 지연- 인한 것일 수도 있다또한 극심한 불안혹은 영화나 책과 같은 허구물의 결핍 또한 자아 경계의 침범과 같은 심리적 효과를 증대시킬  있다또한 극심한 불안혹은 영화나 책과 같은 허구물의 결핍 또한 자아 경계의 침범과 같은 심리적 효과를 증대시킬  있다.”[각주:12]


심리적 안도와 불안의 이중적인 진동은 자발적 감금으로서 취준의 상태의 반半고립성에 따른 효과다. 취준인들은 바깥 세계와 스스로를 분리시킴으로써 취준 기간의 문화적 현실성[각주:13]을 부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깥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는 고립화까지 가지는 않는다.[각주:14] 

심리적 안도는 무력화 상태를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 되며, 미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는 지속시간의 체험은 현재의 불안을 삶에 대한 공포로 전환시키는 것을 제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험 떨어졌을  기분은무기력하다처음 1 시험 떨어졌을  2문제 차이로 떨어졌다그러면 이제 2문제 차이니까 다음에는 붙겠지 했는데그러다가 계속 떨어지게 되면시험 떨어지는게 당연하게 생각된다. ‘ 떨어졌네하는 생각떨어지는게 당연하다 보니까 화도 안나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안들고일종의 루틴이 되는  같다이게 계속되면 고시낭인이 되는거다 시험제도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면접자 E)


5급 공채시험을 5년간 준비했던 면접자는 무기력함이 어떻게 취준을 지속하는 메커니즘이 되는지 잘 보여준다. 면접자는 이러한 무기력함이 패배감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취준생활의 폐쇄성에 따른 것이자, 취준이 작동하게 되는 고유한 원리이다. 


다른 선택을 하는게 두려워져요일종의 방어기재죠. (취준

이것만 계속해왔고이것 밖에 몰라서 새로운 것을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고시생활은 폐쇄적이에요진짜 자기 주변밖에 몰라요....

학원 강사 선생님이 학교에 와서 특강할 때마다 매번 이야기해요그만 두는 것도 용기라고저도 5년동안 버티고 계속한 것은 그만두는게 무서워서 였어요그만두면 패배자가 되는 느낌그게 무서워서 계속했죠. (면접자 E)


모욕감의 핵심은 타자가 나에게 경멸이나 비하하는 행위가 아니라, 한 개인이 자기비하와 무력화에 따른 역할박탈 혹은 자아축소의 상태다. 직접적인 폭력의 행위가 아니라 한 개인의 상태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살펴보는게 중요하며, 그럴 때에만이 우리는 구조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하는 모욕감의 원천들에 접근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폭력은 가시적이거나 물리적인 만큼 비가시적이며 규범의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욕감을 구성하는 심리적 안도와 불안은 영원토록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험’은 불안정하지만 유지되는 준안정적인 상태를 극도로 불안정하게 만든다. 시험 결과가 이미 무력화된 상태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자살을 야기하기도 한다. 


(4) 공정 이데올로기와 과로의 변증법


고유한 개인성의 박탈로서 역할박탈, 시간의 안락사가 이루어지는 탈문화의 공백, 모욕감으로 인한 잠정적 무력화의 상태. 이 모든 것들은 일종의 노예상태를 떠올리게 한다.[각주:15] 하지만 취준기간에서의 역할박탈, 탈문화, 무력화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잠정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바깥 세계와 스스로를 분리시킴으로써 ‘취준’이라는 내부 세계를 형성하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둬놓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깥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는 식민화 혹은 노예화까지 가지는 않는다. 거꾸로 말해 취준이라는 자발적 감금의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바깥 세계로 ‘나간다’ 혹은 ‘출소한다’는 전제가 늘 깔려있어야 하며, 이런 한에서 취준의 단절적 시공간에 대해 자발성이 갖는 최대한의 능동성을 부여해 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로서 ‘공정’은 앞서서 서술했다시피 고유한 개인성을 박탈하는 역할 박탈의 과정을 상실이 아니라 모두가 균질적인 시작을 상상하게 해준다. 

‘공정’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려면 전혀 공정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인식과 취준과 공채제도 만큼은 공정하다는 인식이 동시에 성립되어야 한다. 즉 공정하지 않은 사회의 울퉁불퉁한 단면에서 공채제도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있는 ‘취준’의 기간은 텅빈 공백이 아니라 오히려 울퉁불퉁한 단면을 매끄럽게 메워주는 평면인 것이다.     

실상 9급 공무원 시험과 5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는 출발점에서 부모의 재정적 뒷받침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조건이 되며, 넓게는 ‘취준’이라는 기간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 역시 한국사회의 다양한 취업의 경로들에서 모두에게 주어지는 선택이 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취준기간을 강력하게 지탱해주는 공정 이데올로기는 취준을 둘러싼 울퉁불퉁한 불평등의 장소들을 삭제하고, 취준을 선택한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공정함을 선택한다. 그런 점에서 이는 ‘각자도생’의 고독한 투쟁법이자, 취준의 바깥과 자신을 가르는 매우 배타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이 때의 공정은 노력의 다름 아닌데, 이 노력이란 불안정노동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노력 일반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공채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스스로를 자발적 감금상태로, 역할박탈의 상태로 퇴행시킬 모험이자 전략을 전제한다. 이들에게 불안정한 시대를 가르는 분할이란 안정과 불안정이며, 불안정한 상태에서 안정적인 상태로의 도약에는 일정한 단절이 불가피하다는 인식, 그럼에도 그것을 선택했다는 것이 ‘노력’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노력’의 바깥에는 이러한 모험을 선택하지 않은 다수가 존재한다. 시대를 잘 만나 손쉽게 취업한 선배세대와 비정규직은 모두 ‘노력하지 않은 자들’인 셈이다. 취준의 과정을 통과하고 공채에 합격해 입사한 이들에게 선배세대나 비정규직은 모두 노력하지 않은 자들이며, 이들이 내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에 공정하지 않다고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배들과의 관계는 위화감이 있죠그리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이슈가 있는데

물론 그분들에게 적절한 대우가 있어야 하지만, (우리가워낙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왔는데

우리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다선배들하고는 상황이 다르다나는 정규직이라고 해서 자부심이 없다다만 노력했다는 점은 있다그것에 대해서는 대우받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의정규직화가 상대적인 자부심을 없애고 있다. (면접자 E)

 

취업준비자들이 이야기하는 공정 혹은 노력의 핵심에는 공채시험이라는 선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공정하지 않다’는 말의 이면에는 ‘나처럼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가 핵심인데, 이때 타인들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나와 같이 공채시험을 목표로 한 취준기간을 선택했느냐 여부만이 나와 타인들의 노력들을 가를 수 있는 변별점으로 남는다. 이런 점에서 취업준비자들의 ‘선택’은 여러개의 선택지 중에 하나는 고르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식의 자신의 운명을 건 ‘결단’과 유사하다. 즉 “자신의 선택을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수행하는 것, 즉 고유한 자기로부터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 가능성을 향해 결단하는 것”[각주:16]을 의미한다. 결단은 결단을 감행하는 주체를 전제한다. 즉 세상 사람들 속에 하나로, 익명의 대중들 속에 하나가 아닌,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수행할 주체. 하지만 이러한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부르거나 주체로서 개인에게 질문한다....그로 인해 결국 개인은 언제나-이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체로서 질문 받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각주:17] 다시말해 결단에 가까운 자발적 선택이라는 것이 실상 ‘강제된 선택’[각주:18]에 불과하다. “취준생이 될 것인가, 비정규직이 될 것인가.” 하지만 ‘선택’이라는 형식성은 이미 사전에 결정된 강제된 결정을 ‘개인’이 내린 자율적 결정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오직 사후적으로만 자율적인 주체로 구성할 수 있게 되는데, 선택 이후에 선택에 따른 효과로 주체화가 이루어지지만 주체는 이미 자율적 주체로서 선택에 앞서 존재하는 것인 양 회고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자율적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취업준비자들에게는 이러한 (강제적이지만 자발적으로 사후에 구성된) ‘선택’의 주체화가 강력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취업준비 이후 공채시험에 ‘합격’해 입사한 경우는 더더욱 자신의 선택이 곧 노력과 공정함의 지표로 투사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선택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공채시험을 거쳐 입사한 자들에게 공공부문의 만연한 채용비리나 사회 구조적인 불평등 따위가 문제시 되지 않는 것은 이들의 주체화가 이러한 선택의 효과로서 구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이러한 선택이 실패하는 지점은 무엇일까?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취준생의 자살이다. 이들의 자살은 곧 시험의 실패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2017년 언론에서 보도된 취업준비자의 자살 사례 중> 

- 2017년 6월 1일 유명 사립대 출신 30대 취준생(A씨)이 자취방에서 숨진 뒤 닷새만에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 A씨의 부모는 “아들이 노력해도 번번이 실패하자 광장한 심적 부담을 느꼈으며, 이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우리도 아들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 2017년 3월 경찰 순경채용 필기시험 결과발표를 앞두고 30대 공시생이 가방 속에 스스로 채점한 필기시험지와 유서를 남긴 채 야산에서 자살. 유서에는 “부모님께 죄송하고 더는 버틸 힘이 없다. 시험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시험을 쳤다”는 취지의 자필유서 5장 발견.

- 2017년 3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20대가 어머니와 함께 귀향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자살. 2017년은 국가공무원 9급 공개 시험에 17만 2천명이 응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35:1의 경쟁률.


자신의 ‘선택’에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내면화한 주체에게 입사 이후의 노동과정이란 무엇일까? 이미 스스로의 자발적 선택의 승자로서 자신을 규정한 존재에게 과로는 과잉착취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입증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의 입증이 일에 대한 성취감으로, 그래서 푸코식의 ‘자기계발의 주체’로서 개인을 능동적인 주체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취업준비자들에게 채용‘시험’이란, 마치 최종적 해결책인 듯 보인다. 더 이상의 경쟁을 하지않기 위한 경쟁, 불안정하지 않기 위한 극단적 불안정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이게 내 인생에서 마지막 시험이자, 경쟁이며, 감금이야’라는 듯이 모든 것에 대한 노력과 성취의 에너지를 취준의 빈 공백속에 집어넣는 것 같다. 따라서 이들의 노력은 늘 미래를 삭제한 현재를 가리킨다. 취업성공자들은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생존자로 살아남은 자들이다. 이들에게 스스로를 가두었던 ‘취준’은 ‘노동’을 수용소의 바깥이 아니라 또 다른 수용소 생활로 반복하게 만드는 원 경험이 되는 것 같다. 고프만에 따르면 수용소 안의 삶이란 시간이 멈춘 곳, 능력과 권리가 박탈당한 곳이다. 그래서 정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가장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과로의 질을 분할한다. 나와 너의 노력은 다르고, 나와 너의 노동은 다르므로, 나와 너의 과로는 다르다고. 뱡향은 두 가지다. 취준의 경험이 현 시대가 부과하는 과로를 더욱더 내면화하고 순응하게 할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의 과로를 특권화시켜-자신의 노력을 특권화했듯이-특정한 과로만을 해결하려고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둘 다의 경우 모두 노동의 정치가 침묵하는 지점에서 열린 길일 뿐이다. 


(끝)


* 본 원고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2017년 노동보건 연구 공모’ 사업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고프만, 앞의 책, 29쪽. [본문으로]
  2. 고프만, 앞의 책, 29쪽. [본문으로]
  3. 고프만, 앞의 책, 30쪽. [본문으로]
  4. 이 글에서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취준생’이라는 표현대신 ‘취준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취준생은 ‘취준’의 시기를 미숙한, 아직 성인이 아닌 나이에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로 간주한다는 의미를 전제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는 취준이라는 시기를 생애주기상 노동시간에 앞선 준비기간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의미는 이미 신자유주의에서 ‘취준’이라는 개념이 탄생하는 것과 동시에 파탄났다. [본문으로]
  5. 연합뉴스, ‘노량진 고시촌 찾은 김무성 의원’, 2018, 8. 1.검색. http://news.zum.com/articles/14538668 [본문으로]
  6. 고프만, 앞의 책, 27쪽. [본문으로]
  7. 고프만, 앞의 책, 92쪽. [본문으로]
  8. 고프만 위의 책, “정신병원이 원칙적으로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이라는 사실이 환자들에게 제공하는 덕목 하나가 있다. 병원은 재소자들은 일종의 추방상태에서 삶의 3-4년을 포기 했지만, 사실 자신들은 회복을 위해 바삐 지냈으며, 더욱이 치료가 되면, 회복을 위해 보낸 시간이 합리적으로 수지맞는 투자였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총체적 기관에서 시간은 죽어서 무겁게 매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91-92쪽) [본문으로]
  9. 루이 알튀세르, 이종영 옮김, 『맑스를 위하여』, 백의, 1997, 107쪽. [본문으로]
  10.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정동이론 사이의 쟁점에 대해서는 정정훈, ‘이데올로기와 어펙트, 혹은 ‘인간학적 조건’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문화과학 90호 참조. [본문으로]
  11. 고프만, 위의 책, 64쪽. [본문으로]
  12. 고프만, 앞의 책, 69쪽. [본문으로]
  13. 문화적 현실성이 있다고 해서 취준 이전의 고유한 개인성을 구성하던 문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가 창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이들의 문화적 현실성은 ‘탈문화’의 특성을 갖는다. [본문으로]
  14. 고프만이 분석하는 수용소의 이러한 정의는 아감벤의 수용시설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아감벤의 수용시설에 관한 논의로는 <호모 사케르> 참고. [본문으로]
  15. 고프만, 앞의 책, 24쪽. “어떤 총체적 기관들에서는 일종의 노예제가 작동한다.” [본문으로]
  16.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읽기』, 2013, 세창미디어. 참조. [본문으로]
  17.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레닌과 철학』, 백의, 180쪽. [본문으로]
  18. ‘강제된 선택’은 라깡의 개념이다. 이것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주체와의 관계는 최원, 『라깡 또는 알튀세르』, 247-248쪽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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