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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으로서의 ‘공정’ - 누가 고통을 말하는가. 






전주희




‘다시’ 공정의 한 복판


2019년 문재인 정부의 최대 위기였던 조국사태에 대한 논란은 ‘공정’의 문제[각주:1]를 중심으로 증폭되었다. 그리고 이는 86세대와 2030 세대간의 갈등으로 표현되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박근혜 퇴진과 문재인 정부의 등장으로 이어진 ‘촟불정국’에서 정유라 이대 입시 및 수업 특혜문제는 전체 정국에서 곁가지에 불과했지만 분명한 변곡점을 이룬다. 

문재인 정부는 그 어느 정부보다 공정을 화두로 삼았다. 2017년 5월 10일 제19대 대통령 취임선서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조국사태를 거쳐 최근 불거진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둘러싼 갈등에서 문대통령에 대한 20대의 지지율은 인천공항 보안검색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발표 1주 만에 12% 하락해 41%를 기록했다[각주:2]. 

청년들은 인천공항 보안검색원들의 정규직 전환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공사 채용을 준비하던 취준생들의 미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지난 2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그만해달라’는 청원은 하루 만에 20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가히 “공정의 역습”인 셈이다[각주:3]. 보수 언론들은 이들의 불만을 과잉보도하고 있고, 정치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공정은 기득권이 된 86세대들에게는 ‘계륵’이 된 사회적 감정이다. 뱉어내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오물거리는 동안, 공정은 사회적 논의의 장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흑화되고 있는 중이다. 진보 집권세력들은 특정 청년들이 주장하는 ‘공정’의 요구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토론하거나 혹은 그들의 공정이 어떠한 문제와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공정’을 중심으로 한 특정 청년집단의 집단적인 울분을 시대적 불운으로 여긴다. ‘우리 때는 그나마 괜찮은 일자리와 안정된 삶이 꽤 가능했지만, 지금은 너무 절망적이다.’며 마치 때를 잘 만난 사람들이 때를 잘못만난 사람에게 건네는 미안함을 은연중에 보낼 때 그들은 슬며시 정치집단에서 기성세대의 포지션을 취한다. 그러면서 IMF 이후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시대적 불운으로 손쉽게 치환한다. 


문재인 정부만이 ‘공정’ 문제를 국정철학에 전면으로 내세운 것은 아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역시 ‘공정’을 제기했다. 이명박 정부는 당시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딸 특채논란으로 논란이 되고 낙마하면서 ‘공정사회’라는 화두를 정권 후반부의 주요 프레임으로 제시했다. 2010년 8.15 기념 경축사에서 당시 이 대통령은 “사회 모든 영역에서 ‘공정한 사회’라는 원칙이 확고히 준수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공정사회가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조국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제시했으나 공정사회는 진보진영에도 좋은 화두”라며 “진보진영은 대중들에게 ‘과연 공정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정부가 내건 ‘공정사회’는 하반기 정권의 레임덕을 돌파하기 위한 정치권의 사정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 당시에도 공정을 핵심가치로 내세우면서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제시했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경제 질서의 불공정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것이었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결을 포함한 방향을 제시했지만, 정작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노동개혁을 위한 공정인사. 취업규칙 지침’을 통해 ‘쉬운해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공정인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우리사회가 불공정하다는 대중적인 불만과 인식은 청년세대에 더 강한 정서이긴 하지만, 분명 일반화된 정서이다. 이명박 정부시절 공정이 한창 뜨거운 이슈이던 2011년 전국 16개 시와 도에 거주하는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당시 특임장관실이 공정사회관련 대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국민 72.6%가 우리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공정하지 않다는 응답이 젊은 층일수록 높게 나왔지만(20∼30대는 75% 이상, 40∼50대는 72∼73%), 60대 이상에서도 65% 이상의 높은 응답율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불공정하다’는 일반적인 정서에도 불구하고 ‘공정’은 시대적 변화를 추동하는 사회적 정의의 지위를 획득하는 대신 특정집단의 분노가 표출되는 매개로서 점점 더 강하게 작동되고 있다. 

그렇다면 불공정하다는 일반적 인식이 왜 특정 집단의 강렬한 감정으로 전환되었을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들과 과정들이 있고 또 그 가운데 특정 집단의 감정이 더욱 강렬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집단이 공정의 문제를 선취했던 과정 중에는 IMF 이후 추진된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일반화된 불만들을 ‘세대’의 문제로 환원했던 맥락들이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이는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지속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던 지배세력과 자신의 특권의식을 ‘특별한 희생양’으로 정체화한 2030 남성들의 이해가 맞물린 결과이다. 이로부터 불공정하다는 불만은 계급적대로 심화되지도, 젠더불평등의 문제로 확장되지도 않은 채 점차 청년남성 집단의 불만을 과잉대표하는 대표적인 감정으로 자리 잡게 된다. 

‘공정’이 ‘4년제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청년남성’이라는 특정집단의 감정으로 표출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과잉대표성은 ‘공정’을 마치 우리시대 한국사회가 실현해야할 ‘정의’의 이념으로 가치화된다. 남성집단의 감정이나 요구가 정치의 장에서 대표되면서 ‘국민의 요구’라는 식으로 합리성을 확보해왔던 오랜 역사적 맥락 비추어본다면, 오늘날 86세대를 계승하고 있는 집단은 바로 공정을 외치는 2030 대졸출신 청년남성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상징적 지위를 확보한 셈이고, 그런 한에서 공정은 그러한 ‘유사기득권’을 구성하게 한 정동적 순환의 매개라고 볼 수 있다. 


‘공정지위’ : 학력자본 인플레이션의 역설과 지위의 재구조화


나는 대졸출신의 2030 청년남성 집단을 ‘공정지위’로 명명하며, 이를 계급이나 전통적 신분과 다른 ‘사회적 지위’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들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불공정하다는 인식이나 감정이 강렬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붙이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청년층 공정성인식에 대한 연구결과[각주:4]에 따르면 오히려 여성이 남성보다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더 높다.(여85.5%, 남74.4%). 이들을 ‘공정세대’가 아니라, ‘공정지위’로 이름붙이는 이유는 이들이 공정이라는 합리성의 기준을 내세워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새롭게 정체화하기 때문이다. 

박원익(박가분)은 <공정하지 않다>에서 ‘공정세대’를 공정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청년세대를 지칭하는데, ‘세대’라는 자연적인 구별은 앞서 말했듯이 정치적 문제를 시대적 불운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또 ‘386세대’라는 명명상의 문제처럼 모든 세대를 포괄하지도 않는다. 또한 이들이 공정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 관건은 이들의 공정이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공정지위’에서 구성된 ‘공정’이라는 감정은 공정이 자유주의적 이념인가 평등주의적 이념인가의 여부로 평가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려는 정동적 충동의 차원에서 순환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인 공정의 개념과 같은 형식과 절차의 공정성이라는 외양을 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주장하는 공정은 ‘정의’를 구성하는 이념으로서의 일반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싼 분노는 ‘시험’을 치르지 않은 자격없는 자들의 특혜라는 비난을 하지만, 정작 고위층의 만연한 채용비리에 대해서 격렬하게 분노하지 않는다. 국민은행, KEB하나은행, 신한은행, 킨텍스, 한국가스안전공사, 대한석탄공사, 그리고 '서울메트로'. 그 동안 채용성차별이 드러난 기업들의 이름 옆에 ‘공정’의 분노는 집단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청년남성의 분노가 채용성차별에까지 미치지 않더라도 이들의 불만을 비난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입사시험’ 특히 공채시험을 둘러싼 공정논란은 ‘질좋은 일자리’의 절대적인 부족과 관련된다. 여기에 덧붙여 ‘학력자본의 인플레이션’이 낳은 역설적인 상황이 존재한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서 문화적 취향을 통한 ‘구별짓기’를 통해 사회적 문화적 지위가 생산되며, 이러한 지위를 통해 계급개념을 재구성한다. 계급은 경제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문화자본, 학력자본 등을 통해 구성되며, 이때 특정 계급 혹은 지위가 구성될 때 그것은 다른 집단과의 구별짓기를 통해 형성된다. 

청년남성 집단의 불만은 자신들이 당연히 소유해야할 학력자본의 붕괴라는 조건위에 놓인다. 문화자본과 상속자본이 취약한 상태에서 학력자본은 절대적인 신분상승의 도구였는데, 지난 수십 년간 교육수요의 지속적인 증대는 학력자격의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학력자격의 인플레이션은 학력자본으로 인한 계급상승의 어려움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문화자본의 총량을 증대시켜왔다. “취학률의 전반적인 증가는 어느 순간이건 육화된 상태로 존재하는 문화자본의 총량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부르디외, 248) 이는 곧 고급대중의 시대를 열었고, 이들이 문화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띄게 된다. 

부르디외는 학력자본의 가치하락의 의미를 단지 양적인 증대가 야기한 것뿐만  아니라, 특정 지위에서의 변별적 가치의 상실을 짚는다. 즉 “해당직위의 숫자가 초기에 학력자격과 같은 비율로 증가하더라도 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지위들이 변별적 가치를 상실할 수도 있는 사실”에 따른 가치하락. 가령 “모든 수준에서 희소가치를 상실한 교수의 지위”(250)처럼 절대적 가치하락과 변별적 가치의 상실이라는 두 차원의 가치하락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하락의 희생자는 학력자본을 취득한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자격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학력자격의 가치하락의 주요희생자는 학력자격 없이 노동시장에 들어왔던 사람들이다. 실제로 학위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면 이제껏 무학력자들에게도 개방되어 왔던 직위들을 점진적으로 학력자격 소지자들이 독점하게 되는데, 이 현상은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학력자격의 가치하락을 제한하는 효과를 갖고 있지만 무학력자들에게 제공되는 취직기회를 제한하고 그리고 장래에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학력적으로 미리 규정하는 것을 강화하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부르디외, 251)


스펙쌓기와 자격증, 나아가 채용시험은 과거보다 더 많은 학력과 능력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노오력’을 요구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사다리의 높은 부분을 차지하는 ‘지위’의 하락보다 더 낳은 지위에게 돌아가야할 일자리를 박탈하는 것으로 결과한다. 

실제 2018년 기준 공무원의 최종학력은 대졸이상은 76%이고, 이는 5년전 70.3%와 비교해 5.7%P 증가했다. 이에 반해 고졸 이하 학력은 2013년 15.9%에서 2018년 10.8%로 5.1%P 감소했다. 즉 고졸 이하에게 돌아갔었던 공무원직이 대졸이상의 몫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무직 공무원 일자리 뿐만 아니다. 이전 시대에는 고졸에게 돌아갔을 일자리들의 일부는 대졸자의 몫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더 나쁜 일자리가 되어 고졸이하의 몫으로 양분되었다. 

대졸자 청년 취준생은 공시가 ‘학력무관’이라는 조건에서 치러지는 시험이라는 면에서 자신들의 노력은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졸자 청년남성 집단이 생각하는 ‘시험을 통한 경쟁’은 같은 출발선에 고졸이하와 여성집단을 포함할까?

청년남성이 보기에 고졸이하 집단과 여성들은 ‘시험’을 통해 여전히 지위상승의 효과를 실현한다. 반면 자신들의 경우는 학력에 따른 가치하락을 만회하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으로 간주한다. 그들의 준거는 학력자본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기 시작한 80-90년대 학번들이기 때문이다. 즉 이전세대 대졸 남성집단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종의 '학력자본의 재인증'을 위한 절차로서 공채시험의 단계가 주어진 것, 그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기에 그들의 노력은 이미 '과도한 노오력'인 셈이다. 

압도적으로 늘어나는 여성 공무원의 수는 남성 취준생들에게 충분한 위협과 불안의 대상이 되며, ‘공정지위’로서 자신들의 동질성 바깥으로 여성취업자 집단을 내몬다. 이들이 채용성차별에 분노하지 않는 이유이다. 



2018년 공무원총조사 보고서, 인사혁신처.


고졸이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들은 육체노동을 수행해야하는 지위에 속한 집단이기 때문에 이들과의 구별짓기는 더욱 극렬하다. 

부르디외는 취향을 통한 구별짓기가 협오의 감정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취향은 무엇보다도 먼저 혐오감,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한 공포함 또는 본능적인 짜증(‘구역질난다’)에 의해 촉발되는 불쾌감이다.”(115) 이러한 취향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때 취향은 아비투스가 된다. 

고졸 이하로 상징되는 지위는 (육체)노동의 아비투스를 대표하고, 대졸 이상의 지위는 능력의 아비투스를 대표한다. 대졸학위를 갖고도 단순기능공이나 우체부가 되어버린 ‘계급탈락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노동에 대한 혐오가 더 강화되는 이유는 단지 저하된 노동조건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지위’의 하락과 관련된다. 때문에 청년남성이 구별 지으려는 집단은 상위 계층이나 사회의 밑바닥 집단이 아니라 계급탈락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의 지위, 그 자체의 보존을 둘러싸고 형성된다. 여기에서 노동, 그것도 육체노동에 대한 혐오가 구별짓기의 과정에서 강화되는데, 이는 청년일자리의 ‘불안정노동’ 혹은 ‘질낮은 일자리’가 일반화될수록 심화된다. 다시 말해 학력자본의 가치하락 과정에서 발생한 고졸이하의 전통적 일자리(사무직과 일부 정규직 육체노동)를 빼앗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기혐오와 노동에 대한 멸시가 중첩되면서 새로운 지위, 즉 “90년대생 대졸 청년남성 공채합격자”라는 지위를 위한 구별짓기의 실천과정에서 공정을 매개로 노동혐오의 정동이 순환된다. 



공정, 잔혹하게 낙관적인 혹은 잔혹하게 폭력적인. 


그렇다면 왜 하필 공정인가? 절차와 과정으로서의 공정이라는 이념은 절차와 과정을 특권화한다. 즉 자신들이 선택한 새로운 과정, ‘취준’이라는 학위자본의 유지를 위해 개별적 파업을 감수한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시험은 단지 ‘합격’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특권화한다. 그러니까 공정은 어떤 미래의 대상이나 지향이 아니라, 현재의 지위를 구축하기 위한 기원을 새롭게 설정한다. 

로렌 벌랜트는 “잔혹한 낙관주의”를 “실현이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이 있는 타협된/공동약속된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관계”[각주:5]로 정의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언가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불가능으로 만드는 어떤 대상‘을 상정한다. 그리고 이를 이해사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불능으로 만드는 어떤 대상에 대한 투사의 이상한 시간성”(165)을 말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시간성은 ‘나중’의 ‘무엇’이나 낙관적 미래라는 대상X의 투사로 ‘지금’의 잔혹함에 대한 물음을 유보하는 지연의 시간이다. 이러한 벌랜트의 논의에 덧붙인다면, ‘취준’의 시간은 ‘자발적 감금’을 자처한 시간이다. 

취업준비기간은 얼마나 걸리며, 이 기간의 경험은 어떤 정동적 경제와 함께 공정성이라는 상상을 생산할까?

7,9급 공무원 합격생의 평균 준비기간은 2년 2개월이다. 5급(행정고시)의 경우 평균 6년정도가 소요된다. 시험을 목표로 하는 취업준비자들의 경우 이 기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 ‘자발적 감금’ 상태로 자신을 사회와 격리시킨다. 고시촌으로 들어가 학원과 고시원을 오가는 극도의 단조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도 취업준비자들은 어느 정도 시험준비 이전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는 모든 고유성들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한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 뿐만 아니라 개인을 개인이게 만드는 모든 독특성들을 소거하는 것이다. 

어빙 고프만은 <수용소>에서 ‘사회와 단절된 채 거주하고 일을 하는 장소’로서 ‘총체적 기관’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가령 정신병원, 교도소, 군대와 같은 강제적인 감금시설 뿐만 아니라 수도원이나 ‘준직업적 과업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기숙학교나 노동수용소의 경우도 총체적 기관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총체적 기관에서는 첫째. 자발적 입소를 포함해 재소자들에게는 일종의 역할박탈이 발생하고 둘째. 고유한 문화를 구축하지 않은 채 ’탈문화‘라는 사태를 유지하며 셋째. 자아를 손상시키고 오염시키는 간접적인 모욕의 원천들이 미시적으로 작동한다는 특징을 꼽는다. 

이중 자발적 입소를 하난 사관학교 후보생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단시간내에 과거와 확실히 단절해야 한다...이러한 고립을 통해 사회적 지위가 다른 사람들의 이질적 집합이 아닌 통일된 훈련생 집단이 만들어진다.”

사관학교 후보생의 경우처럼 취준생들은 각자 어느 지위에 속했는지와 무관하게 동질적인 주체화의 과정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화의 과정은 사회적, 시민권적 역할박탈과 자아에 대한 모욕의 미시적 경험을 통해 구성된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어울리지 못할 정도의 자아와 역할상실에 대한 일상적인 경험, 무수한 실패의 누적(수많은 공시생들은 한번에 시험에 붙는 것이 아니라 실패의 경험이 어느 정도 쌍여야한다고 말한다. 실질모의고사에서, 실질적 시험에서, 그리고 면접에서 실패의 경험을 축적한다.)이 관통하는 시간은 다른 한편에서는 상실의 시간(“나의 20대는 엠티한번 가보지 못한 시간이었어요.”)이자, 다른 선택을 지연하는 시간(“다른 선택을 하는게 두려워져요. 일종의 방어기제죠. 취업준비만 계속해왔고, 이것밖에 몰라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부심의 시간이다. 물론 마지막 시간은 최종적인 성공에 의해 회고적으로 재구성되는 시간이다. “자부심이 있죠. 노력했다는 것만으로도 있어요.”

그러니까 마치 토굴 속에 틀어박힌 수도승처럼, 두평 남짓 집필실에 틀어박혀 대하소설을 완성하는 소설가처럼, 취준의 영광된 시간은 회고적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상실과 함께 구성되는 완성이며, 인생의 최종점이다. “경쟁이 없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지금 죽어라고 경쟁하는 거에요. 내 인생의 마지막 사다리죠.”

이들은 나중의 ‘안정’을 위해 지금의 고통, 잔혹한 고통을 견디지만, 그러한 안정은 오지 않는다. 외적 힘에 의해 끊임없는 경쟁에 내몰릴 뿐만 아니라, 내적 상실에 의해 스스로를 경쟁에 내몬다. 

청년남성들은 취업에 성공하고서도 ‘고졸출신 선배’와 ‘여성 동료’들과 끊임없는 공정성 시비와 갈등을 야기하며, 비정규직들의 정규직화에 격렬하게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잔혹하고 지연된 고통의 시간을 건너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동으로서의 공정은 어떤 지향이나 미래에 열린 약속이 아니다. 사라 아메드와 로렌 벌렌트는 긍정적 정동의 가치를 약속과 연관시킨다. 그러한 약속은 지향을 갖고, 낙관적이게 만든다. 하지만 공정은 오히려 과거의 특정 시간을 회고적으로 경험하며, 자신의 정당성의 기원을 설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정이라는 정동이 ‘무언가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불가능으로 만드는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이 있다면 그것은 과거라는 시간성이다. 

공정이라는 정의가 자유주의적인 이념이든 평등주의적인 이념이든, '정의'의 이념이라면 이것은 더 나은 미래의 집단적 약속을 실현하는 것을 지향해야한다. 반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회자되는 ‘공정’은 정의의 이념을 안쪽에서 허물어버리는(undoing) 탈정치적인 감정이다. 이미 자신의 '경험'을 특권화시킨 것 안에서 공정의 이념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정은 '공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치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회고적 시간성 속에 미리 당도해 있는 진리가 된다. 따라서 공정을 둘러싼 그들의 투쟁은 항상 과거를 향한다. 마치 피부색이나 성별과 같은 생래적인 귀속성으로 인해 인종주의가 발현한 것처럼 인과관계를 전도한다. 비정규직이 정규직화되는 것이 불공정한 것은 그들이 시험을 치르지 않았거나 해당 직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비정규직들은 ‘자발적 감금’이라는 특정한 시간적 상실을 경험하지 않은 채 20대를 지나왔기 때문에 자신들과 동일한 지위에 소속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에는 어떠한 이념이, 진보의 가능성이 조금이라고 남아있다고 해야할까?

조국사태를 경유하며, 86세대를 정면으로 비판한 진중권은 새로운 진보의 서사는 공정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낙관한다. 하지만 공정에 진보의 희망을 거는 어느 누구도 현재 공정을 둘러싼 낙관의 이면에 자리한 폭력을 직시하지 못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삶을 축소한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며 나아가 다른 주체들의 저항가능성을 소멸하는 데까지 이른다. 

왜 이 소란한 와중에 공정의 범주에 비껴나 있는 주체들, 고졸 선배들, 여성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까? 공정을 말하는 주변에 침묵하는 고통들은 어떤 지위를, 어떤 자격의 박탈을 경험하고 있는가?  이들의 침묵은 소란스런 공정논란에서 강요된 것인가? 아예 배제된 것인가? 

‘자발적 감금’의 경험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들이 기업이라는 또 다른 수용소에서 감금된 상태로 노동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을 공정을 훼손하는 원인으로 규정함으로써 공정은 대졸 청년남성이라는 공정지위를 재생산하는 한에서 정의롭다. 평등이 곧 불공정이라고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청년남성은 국가에게 자신들의 공정을 수호하라고, 문지기가 되라고 청원한다. 

무엇이 정의인지, 무엇이 공정인지를 둘러싼 논란에 이 사회가 집중하면 할수록 자신의 고통에 대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권리침해를 주장하는 목소리만이 들리게 된다. 하지만 현실의 잔혹함은 무기력한 사물의 상태로 피해자를 침묵속에 가둔다. 그래서 정작 누가 피해자인지, 저항은 어디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 그러한 상황이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양상이며, ‘부정의’의 잔혹함일 것이다. 




  1. 사실, ‘공정’으로 표출되기는 하였지만, 조국사태를 둘러싼 쟁점이 공정이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아는 공정보다는 진보집권세력이 이미 ‘중산층’의 욕망과 생활태도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라이프를 구축해왔다는 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며, 이것이 80년대 이후 선점해 온 ‘진보’의 언어와 모순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위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2.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26/2020062601894.html [본문으로]
  3. 천관율 시사인 기자.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335 [본문으로]
  4. “포용, 공정과 젠더를 말하다 –청년세대의 인식과 경험 속에서”, 제119차 양성평등정책포럼, 2019.12.10. [본문으로]
  5. 로렌 벌랜트, '잔혹한 낙관주의', <정동이론>, 2015, 갈무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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