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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더의 테크놀로지(1/3)

Technologies of Gender


테레사 드 로레티스 Teresa de Lauretis


번역: 에일

페미니즘 번역 모임



*represent는 본 글의 맥락상 표상재현으로 모두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고경우에 따라 표상또는 재현으로 번역하는 편이 이해에 쉬운 부분도 있었으나여기서는 두 가지로 나눠 번역하면 더 큰 혼란이 있을 것으로 보여 represent는 모두 재현으로 통일했습니다완성본이 아니라 draft입니다읽을 수는 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페미니즘적 글쓰기와 문화 실천에서 성적 차이로서의 젠더 개념은 재현을 비평하고, 문화적 이미지와 서사를 다시 읽고, 주체성 이론과 텍스트성 이론, 읽기, 쓰기 관객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개념이었다. 성적 차이로서의 젠더 개념 덕분에, 형식적, 추상적 지식의 영역에 기반한 페미니즘적 개입, 그리고 사회과학과 물리학, 인문학의 인식론과 인지 영역에 기반한 페미니즘적 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개입과 동시에 또 상호의존적으로 구체적 실천과 담론을 정교화하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여성용 화장실과 같은 식으로 젠더화된 공간, 의식 고취 모임, 학제 내 여성 분과, 여성학, 페미니즘 저널, 페미니스트 미디어 그룹 등의) 사회적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이 속에서 성적 차이가 확인되고, 소구되고, 분석되고, 구체화되고, 인증되었다. 그러나 이제 성적 차이로서의 젠더 개념과 여기서 파생된 개념들(여성 문화, 양육, 여성주의적 글쓰기, 여성성 등)은 페미니즘적 사유에 있어 한계이자 일종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성적 차이’(이때 방점은 에 있다)는 그 최초 심급과 최종 심급 모두에서 남성들과는 다른 여성들의 차이를 의미한다. 이보다 더 추상적인 개념인 성적 차이들’(이때 방점은 이 아니라 차연으로서의 차이에 있다)은 생물학과 사회화가 아니라 의미화와 담론효과에 기반한 개념으로 그 최종 심급에서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차이이거나, 또는 남성 의 차이라는 심급 그 자체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작업의 개요가 완전히 잡힌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적 차이 또는 성적 차이들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젠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서구 가부장제와 그 지배적 문화 담론, 그리고 그 기저에 흐르는 생물학적, 의학적, 법적, 철학적, 문학적 거대서사(프레드릭 제임슨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무의식에 이미 항상기입되 있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념적 대조 속에 페미니즘적 사고를 가두는 것이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심지어 문화 서사를 페미니즘적으로 다시 쓰는 작업에서조차 이 개념적 대조는 재생산되고, 재텍스트화된다.

 

 ‘성적 차이()’ 개념의 첫 번째 한계는 이 개념이 페미니즘의 비평적 사유를 보편적인 남성여성의 차이라는 개념틀에 가둔다는 것이다(남성과의 차이로서의 여성, 또는 그저 간단히 차이로서의 여성). 이는 대문자 여성(Woman)과 소문자 여성들(women)의 차이, 또는 여성들 간의 차이, 여성들 안에서의 차이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이를테면, 베일을 쓰는 여성, (미국 흑인 여성 작가들이 종종 인용하곤 하는 폴 로런스 던바가 말하는) ‘가면을 쓰는 여성’, (조운 리비에르가 말하는) ‘가면 놀이를 하는 여성사이의 차이는 성적 차이로 이해되지 못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여성들은 어떤 차이도 지니지 않은 채, 그저 여성의 어떤 원형적 본질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체현하고 있거나, 형이상학적이고 담론적인 여성성을 정교하게 모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성적 차이()’ 개념의 두 번째 한계는 이 개념이 페미니즘적 사유가 지니는 급진적 인식론의 잠재력을 주인의 장벽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것이다(주인의 장벽은 니체의 언어의 감옥이 아니라, 오드리 로드의 은유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1980년대의 페미니즘적 글쓰기 속에서 이미 출현하고 있는 급진적 인식론의 잠재력은 사회적 주체, 그리고 주체성과 사회성의 관계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론 속에서의 주체는 젠더를 통해 구성되지만 성적 차이만으로가 아니라 여러 언어와 문화적 재현에 걸쳐 구성되는 주체이고, 성적 관계의 경험뿐만이 아니라 계급과 인종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젠더화되는 주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단일하지 않고 복수적인 주체, 분열되었다기보다는 상충하는 주체다.

 

 이처럼 다른 종류의 주체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또 그러한 주체와 이질적인 사회장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성적 차이에 묶여 있지 않은 젠더 개념, 즉 사실상 성적 차이와 인접하지 않는 젠더 개념이 필요하다. 성적 차이와 인접하는 젠더 개념에서는 젠더가 성적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가정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으며, 젠더가 언어의 효과로서 또는 실재와는 무관한 순전히 상상적인 것으로서 성적 차이에 포함될 수 있었다. 우리는 성적 차이와 젠더의 이같은 결속을 풀고, 성적 차이와 젠더의 상호포함 관계를 해체해야만 한다. 이 작업의 시작점은 푸코의 성의 테크놀로지이론을 통해, 재현이자 자기재현으로서의 젠더가 또한 사회적 테크놀로지(이를 테면 영화)인 동시에 담론, 인식론, 비평 실천, 일상의 생산물임을 주장하는 일일 것이다.

 

 섹슈얼리티와 마찬가지로, 젠더는 육체의 속성이나 인간에게 내재된 요소가 아니라, ‘육체, 행동,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복잡한 정치적 테크놀로지의 배치에 의해 생산된 효과들의 집합’(푸코, <성의 역사 - 1>)이다. 그러나 먼저 밝혀야만 할 것은 젠더를 기술사회적, 생의학적 장치와 같은 여러 사회적 테크놀로지의 생산물로 사유하는 작업은 푸코의 이론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푸코는 성의 테크놀로지가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고, 성의 담론과 실천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투여가 상충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푸코의 이론은 젠더를 고려할 가능성을 완전히 막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배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나는 네 개의 명제를 가장 자명한 것부터 그렇지 않은 순으로 진술한 후, 각 명제에 대해 하나씩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젠더는 재현이다. 이는 젠더가 개인의 물질적 삶에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함의를 지니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젠더의 재현은 곧 젠더의 구성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서구 예술과 서구 고급문화는 젠더가 구성되어 온 역사를 새긴 산물이다.

젠더는 빅토리아 시대와 같은 이전 시대만큼이나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구성된다. 젠더는 젠더가 구성될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곳,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부른 미디어, 학교, 법정, 가족 안에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젠더는 그럴 법하지 않은 곳, 학계, 지식 공동체, 아방가르드 예술, 급진 이론, 심지어 페미니즘 안에서도 구성된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젠더의 구성은 또한 젠더의 해체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는 페미니스트 담론이건 그렇지 않은 담론이건 재현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잘못된 재현으로 버릴 수 있다는 의미다. 젠더는 실재와 마찬가지로 재현의 효과인 동시에 재현의 초과, 즉 담론 외부에서 남아 어떤 재현이라도 파열시키거나 불안정하게 할 수 있는 잠재적 트라우마다.

 


(1)

 

아메리칸 헤리티지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젠더가 먼저 분류 범주로 풀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법에서 젠더는 단어와 문법적 형식을 분류하는 범주를 일컬으며, 언어에 따라 실제 성에 따라 분류되기도 하고(단어의 성이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의 성과 일치하는 경우를 '자연성 natural gender'이라 하며, 이는 영어의 특징을 이룬다), 단어의 변화 형태 등에 따라 성과 관계없이 분류되기도 한다(이를 '문법성 grammatical gender'라고 하며, 이는 로망스어 특징을 이룬다). (<천체의 성 The Sex of the Heavenly bodies>이라는 책에서 로만 야콥슨은 여러 언어에서 ''''에 해당하는 단어가 어떤 성을 갖는지 분석한다. 그리고는 해와 달의 성을 결정하는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하늘에 감사할 일!)

 

 사전상 젠더의 두 번째 의미는 성의 구별. 성별.’이다. 이처럼 영어에서는 젠더와 성이 밀접하게 얽혀 있지만, 흥미롭게도 로망스어에서는 그렇지 않다(통상 로망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앵글로색슨 사람들보다 낭만적으로 여겨지는데도 말이다). '젠더'에 해당하는 스페인어 단어 'género', 이탈리어어 단어 'genere', 프랑스어 단어 'genre'에는 모두 사람의 성과 관련된 의미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대신 이 언어들에서 성과 관련된 의미는 'sex'에 해당하는 단어들이 전달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프랑스어에서 온 장르는 예술작품과 문학 양식을 분류하는 말로 사용될 뿐 성과 관련된 의미를 전혀 담고 있지 않으며, ‘gender’의 어원인 라틴어 단어 'genus'도 생물학의 ’, 논리학의 처럼 분류 범주로만 사용될 뿐이다. 언어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의 성을 따르는 영어의 언어학적 특성 때문에 내가 지금 말하는 젠더 개념, 그리고 인간의 젠더와 재현의 관계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들을 로망스어로 번역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젠더를 이론화하는 기획의 보편주의적까지는 아니더라도 국제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사실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지도 모르겠다.

 

 다시 사전으로 돌아가면, '젠더'라는 용어가 일종의 '재현'임을 알 수 있는데, 모든 단어와 기호가 그 지시대상을 가르키기 때문에 지금 젠더를 재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젠더라는 용어는 실은 관계의 재현이며, 계급, 집단, 범주라는 소속관계의 재현이다. 두 번째 명제 (2)를 잠시 먼저 말하자면, 젠더는 하나의 개체와 그 이전에 이미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른 개체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젠더는 한 개체, 한 명의 개인에게 특정한 계급 내부에서의 위치, 그리고 이미 구성되어 있는 계급과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의 위치를 지정한다. (나는 지금 '계급'이라는 말을 사회 계급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마르크스가 계급을 이해한 방식을 유지하기 원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계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계급을 사회적 결정요인과 이해관계가 비슷한 개인들로 형성된 집단으로 보았으며, 이 사회적 결정요인과 이해관계에는 마르크스가 예리하게 간파했듯이 이데올로기가 포함된다. 이는 자유롭게 선택된 것도 아니고, 임의로 선택된 집합도 아니다.) 그러므로 젠더는 개인이 아니라 어떤 관계, 어떤 사회적 관계를 재현한다. 바꿔 말하자면 젠더는 어떤 계급과의 관계 속에서 개인을 재현한다.

 

 영어는 자연성을 따르는 언어인데 (짧게 첨언하자면 자연은 우리 문화에 언제나 존재해왔는데, 언어야말로 그 문화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어에서 중성은 성이 없는 개체나 대상, 그리고 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개인에게 부여된다. 그러나 여기에 존재하는 예외를 살펴보면 젠더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파악할 수 있다. 영어에서는 'child'를 중성으로 받으므로, 'child'의 정확한 소유격은 'its'. 물론 대다수 사람은 'child'의 소유격으로 'his'를 사용하고, 또 비교적 최근에는 일부 사람들이 가끔이나마 'his or her'를 쓰기도 하지만 말이다. 유아에게도 자연히 성이 있지만, 소년, 소녀가 되어야만 비로소 (또는 그렇게 기호화될 수 있을 때부터) 개인에게 젠더가 생긴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통념에는 젠더가 섹스, 즉 어떤 자연적 상태가 아니라, (남녀라는 두 생물학적 성의 '개념적'이고도 엄격한 구조적 대조에 기반한) 특별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개인의 재현이라는 생각이 이미 반영되어 있다. 이 개념적 구조를 페미니스트 사회과학자들은 '섹스-젠더 체계'라고 부른다.

 

 상보적이면서 배제적인 범주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문화적 개념은 각 문화 안에서 젠더 체계를 구성한다. 이 젠더 체계는 상징적 체계 또는 의미들의 체계로 사회적 가치와 위계에 따라 섹스를 문화적 내용물과 연결시킨다. 각 문화에 따라 의미들은 달라질 수 있지만, 섹스-젠더 체계는 각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요소와 긴밀하게 엮여 있다. 이런 점에서, 섹스가 젠더로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과정 그리고 젠더 체계의 비대칭성은 사회적 불평등의 형성과 체계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섹스-젠더 체계는 사회문화적 구성물인 동시에 기호 장치로, 정체성, 가치, 특권, 친족 내 위치, 사회 위계에서의 지위와 같은 의미들을 사회 내 개인에게 지정하는 재현 체계이다. 젠더 재현이 다양한 의미들을 전달하는 사회적 위치라면, 누군가가 남성이나 여성으로 재현되거나 누군가가 자신을 남성이나 여성으로 재현하는 일은 곧 그 재현의 의미 효과 전체를 취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젠더 재현이 곧 젠더 구성이라는 주장은 젠더 재현과 젠더 구성이 서로의 생산물이자 과정이라는 점에서 다음과 같이 쓸 때 더 정확해진다. 젠더 구성은 젠더 재현의 산물인 동시에 그 과정이다.

 


(2)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존재를 지배하는 실재 관계에 대한 체계가 아니라, 그들의 실재 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재현한다고 보는데, 나는 이 진술이 정확히 젠더의 기능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젠더와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환원적인 처사일 것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젠더와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하지 않는데, 이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 젠더를 주변적인 문제로 여겨 소위 여성 문제’(Marx, <The Woman Question>)에 국한하여 사고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젠더는 섹슈얼리티나 주체성처럼 재생산, 생식,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 위치할 뿐, 경제적 요인에 따라 결정되면서 이데올로기가 위치하는 상부구조의 공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 위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를 더 읽다 보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개별적 개인을 주체로 구성하는 기능을 갖는다라는 문장과 부딪힌다. '이데올로기''젠더'로 바꾸면 나머지 부분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한다. '젠더는 구체적 개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하는 기능을 갖는다.' 이 바뀐 부분이야말로 젠더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지점이다. ‘주체에서 남성과 여성으로의 변화는 철학정치 이론 담론과 실재담론 사이의 거리를 보여준다. 젠더는 실재담론에서는 받아들여지거나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철학 담론과 정치 이론에서는 배제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주체는 마크르스주의 휴머니즘의 단일한 주체보다는 (오인에 근거한 의미화의 효과로서의) 라캉의 주체에 더 가깝지만, 젠더화되어 있지 않은 주체라는 점에서 여성 주체의 가능성을 구성하기는커녕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두 이론과 다를 바 없다. 그럼 우리는 알튀세르의 정의에 따라 묻지 않을 수 없다. 젠더가 실재, ‘개인의 존재를 지배하는 실재 관계안에 존재한다면, 그러나 철학이나 정치 이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철학과 정치 이론은 실재 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가 아니라면 무엇을 재현해야 할까? 다시 말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은 젠더 이데올로기와의 공모에 연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사실 자체에 눈 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더 중요한 요지는, 이론이 제도화된 담론의 승인을 얻고 사회적 의미장에서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론 자체가 젠더 테크놀로지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 이론의 참신함은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차원에서 반자율적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주체성의 관여를 통해 작동한다고 본 통찰력에 있었다(“주체의 범주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가 젠더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고찰하지 못했다는 점은 또는 젠더를 이데올로기의 심급으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은 역설적인 한편 명백하다. 그러나 곧 페미니스트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 그리고 더 바람직하게는 마르크스주의자인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젠더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탐구하고 나섰다. 이들 중 한 명인 미셸 바렛(Michele Barrett)은 이데올로기가 젠더 구성의 주요한 장이었고, 또한 젠더 이데올로기가 노동의 자본주의적 분화를 역사적으로 구성하고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와 생산 관계는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나온 배경을 살펴보면(바렛의 주장은 원래 <오늘날의 여성억압>(1980)에 처음 실렸던 내용이다), 영국에서 담론 이론(discourse theory)과 후기 알튀세르적인 이데올로기 이론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면서, 특히 페미니스트 영화 저널 </에프 m/f>가 라캉과 데리다의 차이와 재현 개념에 기반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토론의 장으로 떠올랐는데, 이 논쟁에서 바렛이 </에프>에 실린 파빈 애덤스(Parveen Adams)의 글 <성적 분화와 성적 차이의 구분에 대한 소고>에 답한 것이다. 아담스는 성적 분화를 남녀라는 상호배제적인 범주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적 차이'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재현 체계를 통해 차이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재현은 차이를 생산하는데, 그 차이는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는 차이다.’

 

 애덤스는 사회적 실재인 가부장제 개념(즉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이라는 사실)에 근거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이론은 생물학적으로든, 사회학적으로든 본질주의에 기반한 이론이라고 비판하며, 이와 같은 이론은 심지어 줄리엣 미첼처럼 젠더가 재현의 효과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작업에서조차 불쑥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애덤스는 페미니즘 분석에서, 여성적 주체라는 개념은 재현적 실천에 앞서 주어지는 상태, 실재 속에서의 여성에 대한 동질한 억압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애덤스는 젠더 구성은 미리 알 수 없는성적 차이를 생산하는 다양한 재현과 담론 실천의 효과에 불과하다(내 표현으로 바꾸자면, ‘젠더는 성적-담론적 위치의 가변적 배열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며, 자신은 두 성을 언제나 이미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단순화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단순화야말로 페미니즘 분석과 페미니즘 정치 실천의 장애물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바렛은 다음과 같이 반응하는데, 나는 페미니즘 정치에 있어서의 함의와 관련하여 바렛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우리는 성적 분화를 애초부터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말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범주가 역사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탐구한다고 해서, 이 범주가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어쨌든 지금도 체계적으로 그것도 예측가능한 조건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해야 할 강박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바렛의 개념틀로는 페미니즘의 이론적 조건 안에서 젠더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바렛은 1985<오늘날의 여성억압>의 두 번째 판을 찍으면서 이데올로기는 젠더가 구성되는 매우 중요한 장이긴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자율적 실천이나 담론으로 보다는 사회적 총체성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라는 문장을 추가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 사회적 총체성이라는 개념, 그리고 이데올로기 일반 및 젠더 이데올로기가 생산수단과 생산력에 대해 갖는 상대적자율성, 그리고 생산의 사회 관계라는 골치 아픈 문제들은 바렛의 주장에서 모호하고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또 다른 유용한 틀은 조운 켈리(Joan Kelly)<페미니즘 이론이 지니는 두 겹의 시각(The Double Vision of Feminist Theory)>(1979)에서 발견할 수 있다. 켈리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개념을 받아들인 이상, 가족, 섹슈얼리티, 친밀성 등으로 이루어지는 사적 영역과 일, 생산 등으로 이루어지는 공적 영역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대신 우리는 서로 연결된 사회적 관계(, 계급, 인종, 섹스/젠더의 관계)의 집합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집합이다. 지금부터 나는 이것을 일과 섹스(또는 계급과 인종, 그리고 섹스/젠더)의 관계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이 관계 안에서는 남성과 여성은 다르게 위치지워지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중요한 지점인데, 여성들은 여러 집합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

 

 켈리는 동시대 페미니즘 분석이 갖는 두 겹의 관점을 통해 성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이 함께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가부장제 사회가 취한 모든 역사적 형태 속에서 섹스-젠더 체계와 생산 관계 체계는 언제나 동시에 작동하며, 그 특정 질서의 사회경제적 구조와 남성중심적 구조를 재생산해왔다.” 우리는 두 겹의 관점을 통해 젠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명확히 볼 수 있다. 섹스-젠더 체계가 여성에게 할당한 장소인 여성의 장소는 켈리가 강조하듯 존재의 별도 영역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회적 존재 내에 있는 하나의 위치에 불과하다. 이 역시 중요한 지점이다.

 

 섹스-젠더 체계(나는 섹스-젠더 체계를 간단히 젠더라고 부름으로써 이 용어가 갖는 모호함을 유지하고 싶다. 이 모호함이 유지될 때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장악과 그 해체에 크게 민감해질 수 있다.)가 사회적 존재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의 집합이라면, 젠더는 사실상 이데올로기의 주요한 심급이 되며, 이는 분명히 여성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또한, 이는 어떤 개인이 (백인 문화적 페미니스트들처럼) 자신이 주로 젠더에 의해 정의되고 억압받는다고 생각하는지, 또는 (유색 인종 여성들처럼) 자신이 주로 인종과 계급 관계에 의해 정의되고 억압받는다고 생각하는지 여부와도 무관하다. 이제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대한 알튀세르의 정식화(간단히 복습하면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필요로 한다)가 지니는 중요성이 더욱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론은 젠더를 부정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개인적-정치적 힘으로 이론화하려는 페미니즘 기획에 중심적이다.

 

 젠더의 사회적 재현이 주체의 구성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로 젠더의 자기 재현이 젠더의 사회적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행위성(agency)과 자기결정이 미시정치와 일상의 주체적이고 심지어 개인적인 차원에서 실천 가능할 수 있다는 여지를 열어 놓는데, 이는 알튀세르 이론이 부정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는 계속 그 가능성을 주장할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명제 (3)(4)를 이야기할 때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일단 명제 (2)젠더 구성은 젠더 재현의 산물인 동시에 그 과정이다.’로 수정되었는데, 나는 이를 다시 이렇게 고쳐 쓸 것이다. 젠더의 구성은 재현과 자기재현 모두의 산물이자 과정이다.

 

 그러나 이제 젠더 이론과 관련하여 알튀세르 이론의 더 심각한 문제를 논할 차례인데, 그것은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에는 외부가 없다'는 점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자취를 완전히 지워버리기 때문에 실패할 수 없는 체계로, ‘이데올로기 내부의 덫에 갖혀 있는 이들은 자신이 이데올로기 외부에 자유롭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실체(신비화, 상상적 관계, 속임수)를 볼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외부가 존재하는데, 알튀세르는 이를 과학, 과학적 인식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는 페미니즘,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히 말하자면 페미니즘의 주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주체(자연, 어머니, 신비, , 남성적 욕망과 앎의 대상, 올바른 여자다움, 여성성 등으로 보여져 온) 모든 여성에 내재하는 본질의 재현으로서의 대문자 여성(Women)과도 다르고, 젠더 테크놀로지에 의해 정의되고, 사회적 관계에 의해 젠더화되는, 실재하는 역사적 존재이자 사회적 주체로서의 소문자 여성(women)과도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주체는 그렇게 정의되는 주체가 아니라, 이 텍스트 또는 다른 페미니즘 비평 텍스트에서 그 정의나 개념이 진행 중에 있는 주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페미니즘의 주체는 알튀세르의 주체와 마찬가지로 이론적 구성물로, 여성들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개념화하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주체가 완전히 이데올로기 안에 존재하면서도 자신은 그 외부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달리, 현재 페미니즘 내부의 글쓰기와 토론에서 등장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주체들은 젠더 이데올로기의 안팎에 동시에 존재하고,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그 나뉘어짐, 두 겹의 시선을 알고 있는 주체다.

 

 내가 <앨리스는 하지 않는다(Alice Doesn't)>에서 하고자 한 주장은 바로 그같은 효과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재현, 그리고 재현의 대상이자 그 조건으로서의 대문자 여성(Woman)과 역사적 존재이자 실재 관계의 주체로서의 여성들(women) 사이의 불일치, 긴장, 끊임없는 미끄러짐은 바로 우리 문화의 모순적인 논리에 의해 생겨난다. 그 모순적 논리란, 여성들이 바로 젠더 이데올로기의 안과 바깥에 모두 위치해 있는 우리의 문화적 상황이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들(women)은 계속해서 재현으로서의 여성(Women)이 되고, 알튀세르의 주체가 이데올로기에 갇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젠더에 갇히며, 우리가 그렇지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상적 관계를 고집한다. 동시에 우리는 젠더를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실재 사회 관계의 지배를 받는 역사적인 주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 위에 페미니즘이 세워져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그 가능성의 조건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페미니즘은 자신을 과학이나 이데올로기 외부로 선언할 수 없고, 이데올로기의 심급으로서의 젠더 외부에 있는 담론이나 실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1980년대에 일어나고 있는 페미니즘 의식의 변화가 시작된 시점을 굳이 찾자면 1981년이 될 것이다. 1981년 체리 모라가와 글로리아 안잘두아가 급진적 유색 인종 여성의 글을 모아 <내 등이라는 다리(This Bridge Called My Back)>를 출간했다. 1982년에는 글로리아 헐, 패트리샤 벨 스코트, 바바라 스미스가 편집한 <여성은 모두 백인이고, 흑인은 모두 남성이지만, 우리 중 일부는 용감하다(All the Women Are White, All the Blacks Are Men, But Some of Us Are Brave)>가 페미니스트 프레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들을 통해서 처음으로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유색 인종 페미니즘의 감정, 분석, 정치적 위치를 접할 수 있었고, 백인 페미니즘이나 주류 페미니즘에 대한 유색 인종 페미니즘의 비판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같은 작품들에 의해 페미니즘 의식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이 그동안 이데올로기와 공모하였음을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시도된다. 이 이데올로기란 (계급주의, 부르주아 자유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조건을 달아 덧붙이자면 휴머니즘 등) 이데올로기 전반, 그리고 특히 젠더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 이성애주의를 의미한다.

 

 여기서 내가 페미니즘이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고수했다고 쓰지 않고, 이데올로기와 공모했다고 표현한 것은,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젠더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고수하는 것과 페미니즘은 서로 배제적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젠더 이데올로기와의 공모 그리고 그 공모로 인해 발생한 분할과 모순에 대한 인지와 의식은 미국의 모든 페미니즘의 특징이 되어야 하며, 더 이상 백인 중산층 여성 페미니즘에만 해당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처음에는 백인 중산층 여성 페미니즘이 먼저 제도, 정치적 실천, 문화 장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이성애주의, 계급주의와 여성들의 관계를 고찰했지만, 이제는 흑인 여성, 라틴계 여성,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레즈비언 여성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하위문화가 젠더 이데올로기와 공모했음을 인지하는 글을 발표하고 있다. 공모에 대한 이 새로운 의식이 어느 정도로 억압에 대한 의식과 함께 작용할지 또는 거슬러 작용할지가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 식민의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핵심적 질문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페미니즘 내부에서 정치적이거나 개인적인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고, 페미니즘 논쟁을 둘러싸고 인종적, 민족적, 성적 입장에 따라 괴로운 상황이 생기기도 하지만, 우리는 페미니즘이 사회문화적 변화에 필요한 급진적인 이론과 실천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젠더의 모호함이 유지되어 한다면, 이는 역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젠더의 내부와 바깥에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을, 그저 젠더를 (간단히 은유, 차연, 순수한 담론 효과의 문제로 만듦으로써) 탈성애화하거나, (주어진 계급, 인종, 문화에서 두 젠더의 물질적 경험이 동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젠더를 양성화함으로써는 해결하거나 떨쳐 없애버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벌써 내가 다음에서 무엇을 논의할지 예상할 수 있다. 나는 아직 세 번째 명제를 다루지도 않았는데, 또 조금 앞질러가는 셈이다. 세 번째 명제는 재현을 통한 젠더의 구성이 오늘날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진술이다. 나는 먼저 단순하고 일상적인 예를 든 다음, 좀 더 추상적인 증거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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