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과 성의 교차점 탈주변화하기_마지막
반차별 독트린, 페미니즘 이론, 반인종주의 정치에 대한 흑인 페미니즘의 비판
킴벌리 크렌쇼
번역: 쏠&느루/페미니즘 번역모임
검토: 단감/페미니즘 번역모임
인종적 타자성이라는 뚜렷한 경험이 저항적 페미니스트 의식 발전에 영향을 미친 것은 확실하지만, 인종 집단은 흑인 여성을 소외시키는 방어적 우선 순위를 주장하곤 한다. 그래서 공공 정책의 차원에서 흑인 집단의 필요를 규정하기 위해 논의할 때, 흑인 여성에만 해당하는 관심사는 주변부로 밀려난다. 영화 <컬러 퍼플>에 관한 논란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광범위하게 벌어진 반대시위의 이면에는 영화가 흑인 가족 안의 가정폭력을 묘사하면서 흑인 남성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공고히 했다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런 모습을 스크린에 묘사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쟁하느라 정작 흑인 공동체 내의 성차별과 가부장제 문제는 묻혀버렸다. 흑인 집단이 가정폭력과 젠더 억압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매체에 긍정적인 흑인 남성의 이미지가 없는 상황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단지 인종적 고정관념을 강화할 뿐이라고 느꼈다.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투쟁은 보다 큰 흑인 집단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흑인 여성이 겪는 일의 특정 부분을 강제로 억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논쟁의 본질은 다니엘 모이니한이 진단한 미국 흑인의 병폐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익숙하게 들릴 것이다. 모이니한은 자신의 보고서에서 악화되어 가는 흑인 가족의 상황을 묘사하며 흑인 남성 가장의 파괴를 예언하는 동시에 흑인 여자 가장의 탄생을 안타까워했다. 그의 결론은 자유주의 사회학자들과 민권운동 지도자들의 거대한 비판을 일으켰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보고서가 맹목적으로 백인의 문화 규범을 적용하여 흑인 가정을 평가한 것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비판한 사람은 많았지만, 흑인 여성의 모성이 백인 여성의 기준에 부응하지 ‘못 하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분류한 것이 명백한 성차별이라고 지적한 사람은 아주 적었다.
모이니한류 분석의 가장 최근 버전으로는 모이어스의 텔레비전 특집, <사라져가는 흑인 가족 The Vanishing Black Family>과 그보단 덜하지만,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의 『진정한 약자 The Truly Disadvantaged』가 있다. <사라져가는 흑인 가족 The Vanishing Black Family>에서 모이어스는 여성 가장의 문제는 결국 무책임한 성생활의 문제이며, 어느 정도는 가족 해체를 조장하는 정부 정책에 의해 유도됐다고 설명했다. 그 보도의 주제는 ‘복지 국가로 인해 흑인 남성의 역할이 사라지면서 흑인 가족을 더더욱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흑인 남성들이 누군가가 자신의 가족을 보살펴 줄 것을 알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식을 만들고 가족을 떠났다고 주장했다. 모이어스의 관점에 따르면 복지가 없었다면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던 가난한 여성이 그들을 떠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복지 또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셈이다.
방송을 비판했던 대부분의 논자들은 모이어스 방송 전반에 깔려 있는 가부장적 전제를 밝혀낼 지적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명백히 인종차별이라 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에만 집중했다. 백인 페미니스트에게도 마찬가지로 과실이 있다. 백인 페미니스트 집단은 모이어스의 보도에 대한 비판을 발표한 바가 거의 없었다. 아마 페미니스트들은 그 방송이 흑인 공동체를 조명하고 있으니 젠더가 아닌 인종 문제가 핵심일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유가 어쨌든, 그로 인해 복지 및 가족 정책의 향후 방향에 대한 논의는 페미니스트의 별다른 개입 없이 진행되었다. 모이니한/모이어스 모델에 대해 페미니스트의 강력한 비판이 없다는 점은 흑인 여성의 이익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겨우 먹고 살기에도 벅찬 백인 여성 가장들의 이익도 위협한다.
『진정한 약자』에서 윌리엄 줄리어스 윌슨은 결혼 가능한 흑인 남성이 부족하다는 관점으로 문제를 재구성하면서, 이 논쟁의 도덕적 성격을 상당 부분 수정했다. 윌슨에 따르면 흑인 간 결혼이 감소하는 현상은 그들이 결혼 동기가 약하거나 노동 습관이 불성실하거나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경제구조의 차원에서 미숙련 흑인 노동자들이 노동력의 범주 바깥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윌슨의 접근방식은 흑인 공동체의 도덕성을 중심에 둔 모이니한/모이어스의 분석 방식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그렇지만 윌슨 역시 가장이 여성인 가정의 급격한 증가를 그 자체로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런 가정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윌슨은 여성 -- 특히 아이를 기르는 흑인 여성 – 의 이해관계를 종속시키는 경제구조와 노동시장을 분석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흑인 남성을 다시 가족으로 돌려놓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흑인들의 일자리를 흑인 남성들에게 더 많이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현재 경제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성차별을 전혀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윌슨은 흑인 비혼모를 직접적으로 자력화하고 지원하기 위한 경제·사회체제의 재구성 또한 고려하지 못했다.
흑인 남성들에게 직업을 제공하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일자리는 흑인 남성들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불행– 불행은 엄청난 실업률과 함께 찾아온다 –에 노출된 채 억압받고 있는 흑인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윌슨의 주장대로 사회구조를 재편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흑인 여성들의 선택권을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흑인 하위계층의 이론적·정치적 의제를 온전히 구축하기 위해서는 흑인 여성만이 가진 구체적인 문제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이 여성들의 가족이 경제계층에서 가장 아랫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흑인 여성 및 그 가족의 필요를 직접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흑인 여성을 논의에 중심에 두어야 한다.
IV. 상호교차성의 수용을 통한 페미니즘 및 반인종주의 이론의 확장
흑인을 인종적으로 억압하는 여러 제약과 조건에서 해방되기 위해 실제적으로 노력하려면, 흑인 공동체의 필요를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전략에도 반드시 성차별주의 및 가부장제 분석이 포함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도 비백인 여성의 열망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종에 대한 분석을 포함해야 한다. 흑인 해방 정치든 페미니즘 정치든 운동의 중요한 구성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교차적인 경험을 무시해선 안 된다. 흑인 여성을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두 운동 모두,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경험만 인정하는 이전의 접근 방식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흑인 억압은 인종에 기반을 둔 상황일 때만 중요하고, 여성 억압은 젠더에 기반을 둔 상황일 때만 중요하다는 식의 접근 말이다.) 두 운동의 방식 모두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람들의 생활 실태 및 삶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전에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상황의 복잡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저 정치적 의지의 문제만이 아니라, 차별에 대해 사고할 때 다양한 문제를 단일 이슈들의 항목에 따라 분류할 수 있도록 정치를 구조화하는 방식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런 구조적 분류는 현 상황을 고착시키는 사회의 서술적·규범적 관점을 차용한 것이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의 문제를 줄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차별에는 하향식 접근을 적용한다는 점은 다소 역설적이기도 하다. 만약 이들이 사회에서 가장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한 곳에서 세계를 재구성하고 다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더라면, 단일 이슈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 또한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현재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논의의 중심에 두면, 경험을 구획하여 단절시키며 집단행동의 잠재적 가능성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저지하는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다.
내일 당장 차별 담론이 사회에서 가장 불이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교차성을 논의의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정치적 합의를 이룬다고 믿어야 할 필요는 없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우리가 기존의 차별 개념 아래 감춰진 부분을 바라보고 현 체계에 안주해도 되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지배적인 관점에 비평적이고, 또한 통합적 활동에 일부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언어를 개발할 것이다. 이 활동의 목적은 다음의 어구가 주변부에 있는 집단을 위한 말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수용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들어갈 때, 우리 모두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