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의 테크놀로지(2/3)
Technologies of Gender
테레사 드 로레티스 Teresa de Lauretis
번역: 에일
페미니즘 번역 모임
(3)
우리(우리는 여성들을 의미한다. 남성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는 서식을 작성할 때 대부분 성별란의 '여'에 표시할 것이다. 우리가 '남'에 표시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남'에 표시한다면, 우리는 마치 무언가를 속였다고 느낄 수도 있고, 더 심하게는 우리가 세상에서 지워졌다고 느낄 수도 있다(남성이 '여'에 표시를 한다면 이는 완전히 다른 함의를 띠게 될 것이다). 우리는 최초로 성별란의 '여' 칸에 표시를 하는 순간, 섹스-젠더 체계, 젠더의 사회적 관계에 진입하게 되며, 여성으로 젠더화된다. 이는 타인이 우리를 여성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여' 칸에 표시를 한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 스스로 우리를 여성으로 재현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혹시 성별란의 '여' 표시가 젖은 실크 옷처럼 우리에게 찰싹 들러붙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서식에 표시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 몸에 ‘여’라는 글자를 새기는 것은 아닐까?
이는 물론 알퉤세르가 '호명'이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개인은 사회적 재현을 자신에 대한 재현으로 받아들이며, 그 사회적 재현은 상상적인 것임에도 그 개인에게는 진짜 재현이 된다. 그러나 이 예는 너무 단순하다. 여기서는 재현이 어떻게 구성되고, 그 재현이 어떻게 개인에게 받아들여지고 흡수되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 목적을 위해 푸코로 선회해 보자.
<성의 역사> 1권에서 푸코는 섹슈얼리티가 자연적이고, 사적이며, 친밀한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목적에 따라 문화 속에서 구성된 것이라고 언급한다. 푸코의 분석은 역설에서 출발한다. 성적 행위에 대한 종교적, 법률적, 과학적 제도들의 금지와 규제는 섹슈얼리티를 억압하기는커녕 오히려 섹슈얼리티를 계속해서 생산한다. 마치 산업 기계가 재화와 상품을 생산하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관계를 생산하듯이 말이다.
푸코가 제안하는 ‘성의 테크놀로지’라는 개념은 ‘삶을 극대화하는 기술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성의 테크놀로지는 18세기 후반부터 부르주아 계급이 계급의 생존과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발전하고 실행해왔다. 이 기술은 네 가지 앎의 대상, 즉 (1) 어린아이들의 섹슈얼리티, (2) 여성의 육체, (3) 부부의 생식, (4) 일반적이지 않은 성적 행위의 정신질환화에 대한 담론(분류, 측정, 평가 등)을 정교화하기 위해 실행되었다. 교육학, 의학, 인구학, 경제학과 같은 기술에 의해 실행된 담론들은 국가 제도에 의해 고정되고 지지되었으며, 특히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 갔다. 이 담론들은 앎의 대상들을 개인과 가족과 제도에 퍼뜨리고 ‘이식’시킨다. 성의 테크놀로지로 인해 ‘성은 세속적인 문제인 동시에 국가의 문제가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섹스는 사회적 몸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사실상 모든 개인이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여성육체의 성애화야말로 의학, 종교, 예술, 문학, 대중 문화 담론 등이 가장 선호해 온 앎의 대상이다. 푸코 이후, 거의 명시적으로 푸코의 역사적 방법론 틀을 따라 이 문제를 다룬 연구들이 여럿 등장했다. 그러나 푸코와는 독립적으로 페미니즘과 여성 운동 역시 서구 문화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는 여성과 섹슈얼리티의 관계, 성적인 것과 여성 육체의 동일시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왔다. 특히, 페미니즘 영화 비평은 푸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푸코과 유사한 개념틀 안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왔다.
1976년 <성의 역사> 1권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가들은 서사 영화에서 여성 주인공이 어떻게 성애화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여성을 이미지나 관객의 관음적 시선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조명, 프레임, 편집 등의) 영화 기법과 ('보기의 체계'와 같은) 영화적 약호를 분석했다. 또한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가들은 섹슈얼리티와 시각적 쾌락의 주요한 장으로서의 여성 육체 재현의 기저를 이루는 심리사회적, 미학적, 철학적 담론을 설명하고 비평하고자 했다. 이들은 푸코와 비슷한 시기에 영화가 사회적 기술이자 ‘영화 장치’임을 밝히는 영화 이론을 발전시켰지만, 푸코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장치'라는 말이 암시하듯, 이는 오히려 알튀세르와 라캉의 직접적인 자장 안에서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어쨌든 영화 또는 영화 장치가 젠더 테크놀로지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내가 <앨리스는 하지 않는다>에서 다룬 내용이다.
내가 제기한 다음 두 질문의 답을 찾는 데 관심을 둔 것은 푸코가 아니라 영화 장치 이론가들이었다. (1) 젠더 재현은 테크놀로지에 의해 어떻게 구성되는가? (2) 젠더 재현은 테크놀로지가 소구하는 개인에 의해 어떻게 흡수되고 수용되는가? 두 번째 질문과 관련된 핵심 개념은 관객성으로, 페미니즘 영화 이론은 이 관객성을 젠더화된 개념으로 파악한다. 즉, 개별 관객이 영화에 소구되는 방식, 그리고 한 편의 개별 영화에서 개별 관객의 동일시가 요청되고 구조화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명백하게는 아니더라도 관객의 젠더와 긴밀하고도 의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성 영화에 대한 비평과 여성 영화 실천 모두에서 여성 관객성에 대한 탐구가 진행되면서 여성관객의 관람 양상과 점차 정교해지는 소구 양식에 대한 보다 정교한 분석이 가능해졌다(이 책의 7장과 8장 참조).
이와 같은 비평적 작업은 영화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푸코의 이론이 생산하지 못하는 성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지식을 생산한다. 푸코의 이론에서 섹슈얼리티는 젠더화된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남성 형태와 여성 형태를 가졌지만 모두 동일한 것으로 여겨져 결과적으로는 남성으로 취급된다(이에 대해서는 2장에서 자세히 논의하고자 한다). 나는 지금 리비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나는 리비도가 오직 하나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동의한다). 나는 구성물이자 자기재현으로서의 섹슈얼리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섹슈얼리티는 남성 형태와 여성 형태를 모두 가지고 있지만,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섹슈얼리티의 여성 형태는 남성 형태가 투사된 것, 남성 형태를 보완하는 대립항, 남성 형태의 외삽, 쉽게 말해 '아담의 갈비뼈'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섹슈얼리티가 여성의 몸 '안'에 위치할 때 조차, 그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속성이나 특질로 여겨진다.
루시 블랜드(Lucy Bland)는 푸코의 틀 안에서 섹슈얼리티의 역사적 구성을 다룬 논문을 분석하며, 그 논문이 ‘섹슈얼리티의 역사적 구성과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가 젠더화되며 구성된다는 것을 누락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는 서구 역사에서 섹슈얼리티의 여러 개념들이 서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남성' 섹슈얼리티와 '여성' 섹슈얼리티의 대비에 기반한다고 말한다(블랜드, <성적인 것의 영역>). 다시 말해, 여성 섹슈얼리티는 언제나 남성 섹슈얼리티와의 대조와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활동한 1세대 페미니스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여성을 비하하는 모든 성적 활동에 반대하며 ‘사회적 순수’를 요구하기도 했고, 여성들이 성의 ‘자연적’ 기능과 ‘정신적’ 측면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말하는 섹스는 모두 이성애 성교 특히 삽입 성교를 의미했다. 여성의 다른 자율적인 섹슈얼리티라는 개념 또는 남성과 엮이지 않은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동시대 페미니즘이 등장하고서야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섹슈얼리티 개념이 등장했음에도, 블랜드가 보기에 ‘삽입이라는 성적 행위를 성이라는 무대의 중앙에서 쫓아내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극은 거의 모든 섹슈얼리티 재현에서 중심적 주제로 나타난다. 소위 통념에서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구분된다. 남성 섹슈얼리티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이고, 생식기와 관계가 있으며, '대상'과 환상에 의해 쉽게 자극을 받는다. 반면, 여성 섹슈얼리티는 남성 섹슈얼리티와의 관계 속에서만 사유되며, 기본적으로 남성에 대한 표현이자 반응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급진적이지만 남성 중심적인 다른 동시대 이론들과) 푸코의 이론에 흠집을 내는 역설이 등장한다. 섹슈얼리티와 성적 억압을 생산하는 사회적 기술과 싸우기 위해 이 이론들은 젠더를 부인한다. 그러나 젠더를 부인하는 것은 (1) 여성의 성적 억압을 구성하고 승인하는 젠더의 사회적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며, (2) 명백히 남성 젠더화된 주체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기의 ‘내부’에 남는 것이다.
<주체를 변화시키기(Changing the Subject>(1984)에서 책의 저자들은 담론 이론의 중요성과 한계를 논한 후, 포스트구조주의와 해체의 기본 전제를 수용하면서도 이를 비판하며 자신들의 이론적 제안을 발전시킨다. 이를테면, 이 책의 저자들은 포스트구조주의가 ‘단일 주체를 전치하였을 뿐 아니라, 주체가 구성된 주체이지 구성하는 주체가 아님을 폭로’했다고 인정하면서도, 단일 주체 또는 부르주아적 개인(‘행위자로서의 주체’)을 해체하는 것만으로는 주체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못 된다고 밝힌다. 특히 <젠더 차이와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장에서 웬디 홀웨이(Wendy Hollway)는 젠더 차이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담론 내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방식으로 가용해지는 젠더차별화된 의미들과 위치들이라고 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섹슈얼리티에 대한 모든 담론은 젠더에 따라 차별화되므로 항상 복수로 존재하는데(각각의 특정한 사례 또는 역사적 국면마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담론이 존재한다), 동일한 이성애 섹슈얼리티의 실천도 여성과 남성에게 다르게 의미화되는 것은 그 실천이 담론에 따라 다르게 독해되기 때문이다
홀웨이의 작업은 ‘젠더 차이가 재생산되는 주요한 장’으로서의 이성애 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여러 개인이 자신의 이성애 관계를 설명한 경험적 자료를 토대로 한다. 홀웨이의 이론적 기획은 ‘우리는 어떻게 젠더 차이를 이해해야 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우리가 지금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젠더 차이의 패러다임이 생물학에서 담론 이론으로 바뀐다고 해서 진보하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담론 이론이 이데올로기 개념의 대체에 불과하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남을 뿐이다. 담론이 기계적으로 계속 반복되거나, 아니면 물질적 조건이 변화하면 이데올로기가 따라 변화하거나. 담론 이론이 이런 식으로 사용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사상 체계의 희생자가 된다. 담론 결정주의는 모든 사회적 결정주의의 전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오래된 행위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홀웨이는 푸코 이론의 ‘구멍’이 담론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푸코의 설명에 있다고 본다. ‘푸코는 권력과 앎이 서로 구성하는 관계에 있다고 강조한다. 권력과 앎이 서로를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따라 특정한 시대의 권력이 생산된다.’ 푸코는 권력을 억압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의미, 가치, 지식, 실천을 생산하며, 그 자체로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홀웨이는 푸코가 사람들이 왜 다른 진실이 아니라 특정한 진실의 결과로서 구성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는 권력은 담론적 위치에 대한 개인의 ‘투여’를 추동하는 것이라고 제안하며 푸코의 권력 개념을 재정식한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단일 이데올로기 대신) 서로 경합하거나 상충하는 섹슈얼리티 담론들이 존재할 때, 개인이 다른 담론에 대해 어떤 특정한 담론의 위치를 선택하는 것은 그 담론에 ‘투여(investment)’하기 때문이다. '투여'는 프로이트가 독일어 'Besetzung'으로 표현했던 것의 의미로, 영어로는 '리비도 집중(cathexis)’으로 번역된다. 투여는 감정적인 헌신과 기득권 사이의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은 어떤 담론의 위치가 약속하는 (그렇지만 반드시 제공하지는 않는) 상대적 권력(만족, 보상, 이익) 때문에 특정한 담론의 위치에 투여한다
홀웨이의 작업은 권력을 재개념화하려는 흥미로운 작업으로, 이 작업에서 행위자는 주체, 특히 그동안 사회 억압의 ‘희생자’로 간주되거나, 권력-앎의 담론적 독점에 의해 권력을 박탈당한 것으로 여겨진 주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는 이를테면 왜 (한 쪽 젠더를 가진) 여성들이 젠더, 성적 실천, 성적 정체성(금욕, 독점연애, 비독점연애, 성적 냉담, 성적 역할놀이, 레즈비어니즘, 이성애, 페미니즘, 반페미니즘, 포스트페미니증 등)에 있어 역사적으로 다른 투여를 해왔고, 다른 위치를 취해 왔는지뿐만 아니라, 계급, 인종, 연령과 같은 사회의 주요 차원들이 젠더와 교차할 때 왜 특정 위치를 선호하거나 선호하지 않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관계와 모든 실천이 잠재적인 변화의 장일뿐 아니라 재생산의 장이다’라는 홀웨이의 결론은 이는 젠더 관계에 있어서의 변화 가능성이 (이 변화가 의식과 사회적 현실 모두에 있어서의 변화라면) 담론의 헤게모니에 있어 어떤 관계를 의미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의식의 변화는 어떻게 지배적인 담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다르게 표현하면, 누구의 투여가 더 큰 상대적 권력을 생산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어떤 담론과 실천이 (이를테면 여성영화, 여성보건 네트워크, 여성학 및 미국 흑인 연구 내부에서 문학 정전과 대학 학과 과정을 재검토하는 작업, 식민 담론 비평처럼) 제도 안에서 비록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만, 파열적이고, 대항적이며, 새로운 지식의 대상과 양식을 개인 주체에 ‘이식’할 수 있다면, 이러한 대항담론이나 대항실천(페미니스트 영화 이론가 클레어 존스턴은 1970년대 초반 여성 영화를 '대항영화'라고 부른 바 있다)은 지배적이거나 헤게모니적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아니면 사회적 관계가 변화하는데 담론과 실천이 지배적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일까? 그런 것도 아니라면 젠더의 사회적 관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나는 이 모든 질문들을 다음과 같이 하나의 질문으로 바꾸도록 하겠다. 홀웨이의 말처럼 이성애 커플이 일상적 관계 안에서 단일하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주체성의 관계적 특성을 부인하는 과정에서 젠더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내가 여성들에게 젠더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다른 위치에 투여하라고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특히 여성이라는 특정 위치가 그들에게 어떤 상대적 권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들이 여성이라는 현재 위치를 취했을 때 말이다.
나는 홀웨이가 하는 주장에 대부분 동의하고, 또한 홀웨이가 권력을 우리 대부분에게 재분배하려는 시도에는 공감하지만, 현재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억압받는 이들의 ‘상대적’ 권력을 긍정적인 것으로 이론화하려면 홀웨이가 취하는 것보다는 더 급진적이고 과감한 입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러나 홀웨이의 ‘투여’가 이성애 계약으로 확보되고 결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하고 복잡해진다. 투여는 젠더의 사회적 관계와 젠더 이데올로기가 일상적으로 재생산되는 바로 그 장이다. 그 장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변화가 일어나는 양상과 상관없이 ‘젠더 차이’의 변화일 뿐, 젠더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가 아니다. 간단히 말해, 이 변화는 대략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평등’(‘equality’ of women to men)이 이루어지는 쪽으로의 변화인 것이다.
성적 차이(들)이라는 개념에 수반하는 분명한 문제는 성적 차이의 재현을 재사유하려는 시도를 제한하고 좌절시키려는 보수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를 다르게 상상하고, 젠더를 가부장제 계약에 지배되지 않는 다른 조건으로 (재)구성하려면, 우리는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남성 섹슈얼리티 담론에 의해 (재)생산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남성중심적 참조틀 바깥으로 걸어나가야 한다(이리가레이는 이 남성중심적 참조틀을 지칭하려고 ‘hom(m)osexuality'라는 말을 만들었다.) 나는 이 참조틀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첫 걸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와는 또 다른 참조틀을 취하는 모니크 위티그는 억압받는 이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담론의 힘을 강조한다. 이 담론은 물질적이고 물리적이지만, 관념적이고 과학적인 담론, 대중매체의 담론에 의해 생산되는 담론이다.
‘현대이론체계와 사회과학의 담론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현대이론체계와 사회과학의 담론이 우리를 긴밀하게 접촉하는 개념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개념들은 여러 학문, 이론, 사상이 한데 뭉쳐진 속에서 마치 원시적 개념처럼 작용하는데, 나는 이를 'The Straight Mind'라고 부르고자 한다(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The Savage Mind)>를 참고하라). 이들은 ‘여성’, ‘남성’, ‘섹스’, ‘차이’를 다루고, 이러한 것들의 흔적을 간직한 일련의 개념들, 이를테면 ‘역사’, ‘문화’, ‘실재’와 같은 것들을 다룬다. 최근 들어, 자연이라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문화적이라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문화에는 어떤 탐문도 거부할 뿐 아니라 분석시 대상에서 빠지는 자연의 핵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이는 자연과 자연 모두에서 피할 수 없는 이성애 관계다. 나는 이를 ‘남성’과 ‘여성’의 강제적 사회 관계라고 부르고자 한다.(<The Straight Mind>)24
위티그는 ‘이성애 담론은 우리가 그들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 이상 우리를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제도적으로 통제되는 지식과 겹쳐져 있는 권력이 억압적이라는 감각을 회복한다. 이는 그동안 푸코적 관점에서는 권력을 생산점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한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기도 하다. 권력이 지식, 의미,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을 논박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이 생산의 긍정적 효과와 억업적 효과를 구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그저 정치적 실천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티그가 강력히 상기시키듯 이론에 대해 물어야만 하는 질문이다.
나는 이제 세 번째 명제를 다음과 같이 고쳐 쓰고자 한다. 젠더의 구성은 오늘날 다양한 젠더의 테크놀로지(예를 들면 영화)와 제도적 담론(예를 들면 이론)을 통해 계속해서 이루어지며, 사회적 의미의 장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젠더의 재현을 생산하고, 증진하고, ‘이식’한다. 그러나 젠더 구성의 다른 조건도 헤게모니를 획득한 담론의 주변부에 존재한다. 이성애적 사회 계약의 외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미시정치적 실천들 내부에 기입되어 있는 이 조건들 또한 ‘국지적’ 차원에서 혹은 주체성과 자기재현의 차원에서 젠더를 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명제 (4)를 이야기할 때 다시 이야기하겠다.
<앨리스는 하지 않는다>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모든 사회적 존재의 주체성이 구성되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경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경험을 (퍼스적인 의미에서) 자기와 외부 세계 사이의 기호학적 상호작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미효과, 습관, 기질, 연상, 지각의 복합체로 정교하게 정의하고자 했다. 내가 경험이라고 부르는 의미효과의 성좌 또는 배열은 각 주체가 젠더의 사회적 관계에 꾸준히 참여함에 따라 계속해서 이동하며 개선된다. 내가 <앨리스는 하지 않는다>에서 버지니아 울프와 캐서린 맥키넌의 비판적 통찰에 영감을 받아 주장했듯이, 여성 주체성과 경험은 필연적으로 섹슈얼리티와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표현된다. 이런 나의 관찰이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개인을 여성으로 젠더화하는 습관, 연상, 지각, 기질의 복합체라는 개념을 통해, 여성과 남성을 생산하려는 사회문화적 실천, 담론, 제도에 의해 주체 안에서 생산되는 젠더의 경험, 의미효과, 자기재현을 정의하고자 했다. 내가 영화, 서사, 이론을 분석해 온 것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 영화, 서사, 이론은 당연히 모두 젠더 테크놀로지다.
지금 내가 이론(어느 특정한 앎의 대상을 설명하며, 그 대상을 ‘규율’이라는 앎의 올바른 영역으로서의 의미장 안에 구성하려는 모든 이론적 담론을 지칭하는 일반적 용어)은 젠더의 기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사회성에서 주체성으로, 상징 체계에서 개인적 지각으로, 문화 재현에서 자기 재현으로 이동할 수 있게 불연속적인 공간들 사이를 이어주는 길을 찾는 데 이론이 도움이 되기는 커녕, 젠더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여성 주체를 상상하지 못한다고 내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안타까워 했기 때문이다.25 알튀세르, 푸코, 초기 크리스테바, 에코의 이론 모두 젠더에 무관심했고, 그렇지 않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처럼 젠더에 관심을 가지는 이론(사실상 정신분석학은 페미니즘 이론을 제외하면 젠더에 가장 큰 관심을 둔 이론이었다)이 성적 차이에서의 젠더 구성 모델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 이론이 제공하는 지도를 따라가다보면 여성주체는 결국 가부장제의 늪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거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지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한데, 이 두 종류의 이론들 젠더 재현을 영화 못지 않게 포함하고 장려한다.
좋은 예로 정신분석학의 주체성과 언어를 다룬 카자 실버만의 작업을 들 수 있다. 실버만은 주체성이 언어를 통해 생산되고, 인간 주체는 기호학적인 동시에 또한 젠더화된 주체라고 주장하면서 ‘책의 페이지 안에 여성 주체의 공간을 만들 것이며, 설령 그 공간이 부정적인 공간이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용감하게 밝힌다.26 사실 실버만이 가지고 있는 라캉적 틀에는 젠더 문제가 잘 들어맞지 않는다. 여성 주체는 ‘잠재적으로 전복적’이 되거나, ‘남근과의 관계 속’에서 부정적으로 구조화되는 등 가부장 문화에 대한 ‘저항 지점’으로 모호하게 정의될 뿐이다. 부정성으로서의 여성, 또는 법과 의미화 과정을 결여하거나 초월하는 여성이라는 개념은 포스트구조주의 정신분석학에서는 특권화된 조건, 또는 자연, 육체, 모성, 무의식과의 친연성의 쳥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성성이 순전히 욕망과 의미화의 남근적 모델 안에서의 재현이자 위치성임에 주의해야 한다. 이는 욕망 또는 의미화의 주체로서의 여성은 재현불가능하다거나, 가부장 문화의 남근적 질서과 그 이론 속에서 여성은 재현되는 것 외에는 재현불가능하다과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이 문학 비평과 영화 이론에서 두드러지는 라캉 이론에서 갈라져 나오고, (라캉 이론이나 프로이트 이론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여러 페미니스트들에게 호소력을 지니는 대상관계 이론처럼) 개인이 어떻게 여성이 되는지에 대해 질문들 던질 때에도, 정신분석학은 여성을 남성의 정신사회적 발달을 설명하기 위해 정교화된 준거와 분석 범주를 가지고 남성과의 관계 안에서 여성을 정의한다. 이런 이유로 정신분석학은 소문자 여성들과 대문자 여성들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관계를 다루지 않고, 또한 다룰 수도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대문자 여성들과 소문자 여성이 가지고 있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관계에 말하지도 않았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대신에 정신분석학은 이 관계를 소문자 여성들(mother) = 대문자 여성(Woman) = 어머니(Mother)라는 단순한 등식으로 정의해버린다. 이는 젠더 이데올로기의 가장 뿌리 깊은 효과 중 하나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고 있는 현재의 다른 담론에 포함된 젠더 재현을 다루기에 앞서, 나는 젠더를 이론을 비평적으로 독해하는 방법으로 이해하거나, 페미니스트이자 이론가로서의 내 경험의 배열을 이동시킴으로써 젠더를 이해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내 입장을 간단히 이야기해보겠다. 비록 이전 작업에서 정식화를 하진 못했지만 내가 영화와 서사 이론이 젠더 테크놀로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젠더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푸코와 알튀세르만 읽고 그친 것이 아니라, 젠더에 대해 언급하는 울프와 매키넌을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나의 경험을 (사회적 실재에 대한 나 자신의 참여의 역사를 통해 그리고 페미니스트 공동체라는 젠더화된 역사 속에서) 자기재현의 실천을 페미니즘 분석과 비평의 방법론으로 흡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적, 정치적 조건에 놓여 있는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개인적 조건을 이해하고, 그 조건을 다른 여성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성적 입장을 이해하는 방식 속에서 끊임없이 수정하고, 재평가하고, 재개념화할 때, 젠더에 대한 의식에서 나오는 모든 사회적 실재를 이해할 수 있는 양식이 생성된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때, 젠더가 편재함을 개인적이고 친밀하며 분석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으로 알 수 있을 때, 순진무구한 ‘생물학’으로 되돌아갈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일부 여성들이 모계가 중심이 되는 과거, 대지모신이 이끄는 ‘가모장적’ 영역의 현대적 버전, 또는 여성적 전통의 영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을 공유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주변적이고 숨겨져 있긴 하지만, 언제나 긍정적이고, 평화 친화적이고, 생태학적으로 옳고, 모계 중심적이며, 인도유럽어족이 아닌 세계, 또는 이데올로기 투쟁, 계급 투쟁, 인종 투쟁, 또는 대중매체의 영향 바깥에 있는 세계, 내가 매일 경험하는 젠더의 모순적 요구와 억압적 보상 때문에 곤란함을 겪지 않아도 되는 세계에 대한 믿음 말이다. 다른 한편, 이와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젠더를 본질주의나 신화적인 개념으로 폐기하거나 또는 대중매체가 전파하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적인 개념이라고 폐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언젠가 곧 어떻게든지 여성 역시 제대로 된 경력을 갖고,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재산, 아이, 남편을 갖게 될 것이며 지향에 따라 여성 연인을 갖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우리 사회가 안전하게 고정되어 있는 기존 사회 관계와 이성애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 말이다. 젠더의 어떤 페미니즘 담론의 배경에 충분히 자주 등장하는 이런 각본조차도, 젠더 평등의 이런 이상적 상태조차도 내가 젠더는 페미니즘 이론의 급진적 쟁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이제 마지막 명제를 다룰 차례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