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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의 테크놀로지(3/3)


Technologies of Gender




테레사 드 로레티스 Teresa de Lauretis

번역: 에일


페미니즘 번역 모임




(4)

 

젠더 평등이라는 이상적 상태는 바로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해체하기 쉬운 대상이다. 그렇다(그렇다고 젠더 평등이라는 이상적인 상태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무언가는 아닌데, 그것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실재하는 재현이기 때문이다. 당장 다음 데이트 때 영화관에 가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젠더의 이데올로기적 재현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영화에서는 테크놀로지의 의도가 사실상 스크린의 전경을 차지한다), 그리고 정신분석학 이론보다 더한 젠더의 테크놀로지인 정신분석의 의료 행위 이외에도 젠더의 트라우마를 억누르려는 교모한 시도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때 젠더의 트라우마는 페미니스트 비평이 젠더를 계속해서 이데올로기적-테크놀로지적 생산으로 비평할 경우 이 사회의 구조와 백인의 남성적 특권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최근 일군의 남성 비평가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비평적 글을 발표하고 있는 현상을 사례로 들어보자.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 철학자들이 글을 쓰고, 남성 비평가들이 독해를 하고,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현상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작업이 일종의 '옴므마주 hommage'(말장난을 안 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인 것은 분명하지만, 대체 그 목적은 무엇인가? 이따금씩 논문으로 발표되기도 하지만 주로 간략한 언급의 형태를 띄는 이러한 글들은 대부분 학계 내의 페미니즘 기획을 지지하지도 않고, 그러한 기획에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이 글들이 가치를 부여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학계 페미니즘 내부의 어떤 입장, 다시 말해 비평가의 개인적인 관심사나 남성 중심적인 이론적 주제를 받아들이려는 페미니즘 내부의 어떤 입장이다.

 

 최근 출간된 <젠더와 독해> 서문에서 지적하듯, 남성은 분명히 여성들의 허구에 저항하는 독자. ‘남성은 여성의 텍스트를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읽지 않으려 한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활 것이다. 이론에 한해서라면 그 증거를 찾기는 매우 쉽다. 딱히 페미니즘을 언명하는 책이 아니라면 아무 책이나 꺼내 인명 색인을 흩어보라. 어떤 책에서도 페미니스트의 이름과 여성 비평가의 이름을 찾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일레인 쇼월터처럼 ‘(저명한) 남성 비평가들이 페미니즘 비평으로 움직이는 경향을 환영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또는 <젠더와 독해>의 편집인들처럼 젠더 차이 논쟁이 개인차 또는 모든 인류의 공통점을 폐제하지 않기를 원하는 이라면 이러한 경향을 환영하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젠더를 젠더 차이로 보는 관점의 한계와 문제는, <젠더와 독해>에 실린 <레즈비언 독자를 위한 이론>이라는 글에서 레즈비언 비평가 장 케나드가 (일레인 쇼왈터를 인용하는) 조너선 컬러에 동의하며 쇼왈터를 경유한 컬러의 말을 다시 자신의 말로 바꿀 때 명백해진다. ‘레즈비언으로서의 독해가 반드시 실제 레즈비언 독자가 읽을 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변화시키는 것은 레즈비언 독자에 대한 가정이다.’ 이 마지막 진술은 케나드 자신이 바로 몇 페이지 앞에서 밝힌 자신의 이론적 기획과 상충한다. ‘여기서 나는 동일시 개념을 과도하게 단순화하지 않으면서, 레즈비언 차이를 보편적 여성 아래에 포함하지 않는 독해 이론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는 레즈비언 독자가 텍스트를 다시 읽고 쓸 수 있는 방식을 제안하려는 시도다.’

 

 반어적이게도 앞에서 컬러가 데리다적 해체의 맥락에서 한 말은 젠더를 언어의 효과로서의 담론적 차이와 동일한 것으로 만들고 대신 독자의 젠더와는 무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케나드가 이성애자 남성 비평가인 컬러가 여성으로서뿐만 아니라 레즈비언으로서도 독해할 수 있고, ‘레즈비언 차이보편적 여성의 아래에 포함할 수도 있지만, ‘보편적 남성의 아래에 포함할 수도 있다고 제안하는 셈이다(컬러는 '차이'의 이름으로 이를 대표할 것을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말이다). 레즈비언 독자는 이성애 남성뿐 아니라 이성애 여성과도 다른 방식으로 독해한다는 레나드의 최초의 가정은 상당히 옳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를 남성 비평가의 이론과 게슈탈트 심리학에 기대어 풀어갔다는 것이다(케나드는 컬러를 경유한 라캉과 데리다 이외에도 게슈탈트 이론가인 조지프 징커의 이론을 활용한다). 케나드의 문제는 비판하기 위해 타니아 모들스키가 쇼왈터와 컬러가 여성 독자를 가정하는 부분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펴보자.

 

컬러는 페미니즘 비평의 매 단계가 지나갈 때마다 여성의 경험이라는 문제적인 개념이 쏟아진다고 여기는 것 같다. 컬러는 이 개념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남성이 문학 텍스트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그리고 여성 비평가 페기 카무프를 인용하고, 일레인 쇼왈터를 인용하여 여성으로서 독해하는 경험은 궁극적으로 독자의 성과는 무관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비평가들이 실제 독자의 젠더가 아니라 여성 독자를 가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모들스키, <페미니즘과 해석의 힘>)

 

모들스키는 이어 컬러가 프로이트의 <모세와 일신교>를 어떻게 읽는지 살펴본다. 컬러는 텍스트의 올바른의미를 확인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문학 비평은 가부장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따. 그런데 모들스키는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컬러가 가장 페미니스트처럼 보이는 이 지점에서, 실은 가장 가부장적이라고 지적한다. 컬러는 여기서 다시 자신을 여성 독자로 가정하여 자신과 다른 남자 비평가들에게 자신이 여성 독자로 독해할 수 있음을 사칭하기 때문이다. 모들스키는 여성 독자에 대한 가정을 세울 것이 아니라, ‘실제 여성 독자를 장려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2장에서 강간에 대한 푸코의 입장을 다룰 때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이 젠더의 트라우마를 억압하려는 보다 정교한 시도들은 역설적이게도 대문자 서구 문화 텍스트의 현체제를 해체하고자 하는 이론적 담론들에 기입되어 있다. 영미 학계의 문학 비평 및 텍스트 연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반휴머니즘 철학과 데리다적인 해체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의 여성성 개념을 분석하면서, 합리성 비판, 단일 주체(앎의 주체로서의 개인) 해체, 지식과 앎의 공무 관계가 이 여성성 개념의 중심이 되는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주체성에 대한 급진적 비판은 여성성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질문들을 철학 담론의 틀에서 제기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34 철학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상황은 여성운동의 재탄생과 유럽 철학자 대부분이 합리성 담론의 토대를 재탐문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상황이 맞물리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브라이도티는 들뢰즈, 푸코, 리오타르, 데리다의 작업에서 여성성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 살펴보며, 이 철학자들이 모두 여성성과 실재 여성을 동일시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이들은 오히려 여성이 젠더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탈중앙화되고 탈성화된 급진적으로 다른주체를 품을 수 있는 사회적 집단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 철학자들은 젠더 문제를 비역사적이고, 순수하게 텍스트적인 여성성의 형상으로 전치하거나(데리다), 또는 젠더의 성적 기반을 성적 차이 너머에 있는 분산된 쾌락의 육체로 이동시키거나(푸코), 리비도적으로 투여된 표면으로 이동시키거나(리오타르), 자기재현과 정체성의 억압이 없는 미분화되지 않은 정동의 육체장으로 이동시키거나(들뢰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젠더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젠더의 역사성을 분산되어 있고, 탈중심화되어 있고, 해체된, 그러나 확실히 여성은 아닌 주체로 전치함으로써 또 다시 역설적이게도 여성들에게 이와 같은 전치의 과정을 여성 되기의 과정을 부를 것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성적 차이와 젠더가 실재 여성의 주체성의 요소임을 부정함으로써, 여성 억압과 저항의 역사를 부정함으로써, 그리고 페미니즘이 주체성과 사회성의 재정의에 기여하였음을 부정함으로써, 이 철학자들은 여성들속에서 인류의 미래의 특권화된 보고를 본다. 브라이도티는 이것이 남성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동일시하고, 여성을 은유로 번역하는 철학자들의 오래된 나쁜 버릇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버릇이 매우 오래되었고, 데카르트적 주체보다 더 깨부수기 어렵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남성 지식인들이 종종 여성 투쟁의 방향으로 기우는 몸짓을 보이고, 여성운동의 정치성을 승인하면도, 결국은 왜 이론화 작업을 하는 페미니스트를 무시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또는 다시 쓰는 작업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며, 또 멈추지도 못할 것이다.

 

 반대로, 젠더의 지배 담론이 성적 차이를 전부 삭제하고자 할 때에조차도, 지배 담론에 대한 페미니즘 이론의 급진적 비판은 긴급히 요구된다. 이와 같은 주체의 해체는 여성성(Women)에 여성들을 다시 포함하고, 여성 주체성을 남성 주체에 재위치시키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담론이 소구하고자하는 새로운 사회적 주체, 담론적 차이와 물질적 이질성의 복수성 속에서 구성되는 새로운 사회적 주체와 담론 사이의 문을 닫는다. 그럼 나는 마지막 명제를 이렇게 다시 쓰고자 한다.

 

젠더의 해체가 불가피하게 젠더의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면, 누구의 조건과 누구의 관심사 속에서 탈--구성(de-re-construction)은 양향을 받게 될까?

 

 장 케나드의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문제로 돌아가 보면, 문제의 주체성이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헤게모니적인 담론 조건 속에서 전혀 재현가능하지 않은 섹슈얼리티와의 관계 속에서 젠더화될 때 텍스트성의 주체성의 구성을 이론화하면서 느끼는 우리의 곤란함은 더욱 커지고, 그 임무는 비례하여 긴급해진다. 모든 페미니스트 학자와 선생들의 문제이기도 한 문제는 읽기, 쓰기, 섹슈얼리티, 이데올로기, 문화 생산을 다루는 이론들이 거의 대부분 (오이디푸스 서사일수도 있고, 반오디푸스 서사일 수도 있지만) 젠더의 남성 서사에 기반하며 이성애 계약으로 묶여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그 취지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저항하지 않는 한 이러한 이론들은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젠더와 관계된 모든 담론에 대한 비평이 페미니즘의 일부로서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로, 우리는 담론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문화적 서사를 다시 쓰며, 다른 관점, ‘다른 곳(elsewhere)’으로부터의 조건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그러한 관점이 아무 곳에서도, 단 하나의 텍스트에서조차도 보이지 않고, 재현으로도 인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그러한 관점을 생산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생산한 것들이 재현으로서 인지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은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신화적 과거도 아니고, 유토피아적인 어떤 미래의 역사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담론과 다른 곳, 그 담론의 사각지대, 또는 그 담론이 재현하는 것으 스페이스 오프(space-off). 나는 스페이스 오프를 헤게모닉한 담론의 주변부에 위치한 공간, 제도들의 작은 틈, 권력-앎 장치의 균열에 기입된 사회적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이스 오프는 젠더의 다른 구성의 조건, 주체성과 자기재현의 차원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제기될 수 있는 곳이다. 행위성과 권력의 원천 또는 권한을 부여하는 투여를 가능하게 하는 일상적 삶과 일상적 저항의 미시정치 안에서 말이다.

 

 나는 성적 차이의 경계를 앞뒤로 넘나드는 이동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싶다. 내가 말하는 이동은 한 공간에서 그 공간 너머로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재현의 공간에서 재현 바깥의 공간으로의 이동,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공간에서 과학적 지식과 실재 지식의 공간으로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는 섹스-젠더 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상징적 공간에서 그 외부에 있는 외부적 실재로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어떤 사회적 실재도 그 섹스-젠더 체계(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 배제적인 범주)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의미하는 바는 재현, 담론, 섹스-젠더 체계에 의해 그 재현, 담론, 섹스-젠더 체계 안에 재현된 공간으로부터 암시는 되지만 보이지는 않는 공간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조금 전 나는 영화 이론에석 가져온 스페이스 오프라는 표현을 썼다. 스페이스 오프는 프레임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프레임을 근거로 추론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고전영화와 상업영화에서 스페이스 오프는 지워지거나 쇼트/리버스쇼트와 같은 서사화 기법에 의해 이미지 안으로 포함되거나 봉합된다. 그러나 전위영화는 스페이스 오프가 프레임과 동시에 존재함을 보여주고, 프레임 안에서 스페이스 오프의 부재를 언급하거나, 스페이스 오프에 위치한 카메라(이미지가 구축되는 지점)나 관객(이미지가 주체성 안에서 수용, 재구축, 재생산되는 지점)을 언급함으로써 스페이스 오프를 지시한다.

 

 이제 내가 페미니즘의 주체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재현으로서의 젠더 안팍의 움직임은 젠더 재현의 경계 안팎을 넘나드는 움직임이며 그 재현을 누락하거나 재현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헤게모니적인 담론의 만드는 위치들의 (재현된) 담론적 공간과 담론의 스페이스 오프, 다른 곳 사이의 이동이다. 페미니즘적인 실천이 ()구축한 헤게모니적인 담론의 주변부, 제도의 틈, 공동체의 대항실천과 새로운 형태에 존재하는 담론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공간들. 이 두 공간은 서로 반대되는 것도 아니고, 일련의 의미화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며, 이 두 공간은 동시에 존재하며 상충하며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공간 사이의 이동은 변증법적이지도, 통합적이지도, 결합적이지도, ‘차연의 것도 아니며, 모순의 긴장, 복수성, 타율적이다.

 

 영화적이든 아니든 거대서사에서 이 두 공간이 화해되고 통합된다면, 남성은 여성을 자신의 인류와 hom(m)osexuality에 다시 포함하지만, 그럼에도 페미니즘과 문화 생산과 미시정치적 실천은 이 두 공간이 별개의 이질적인 공간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두 공간 모두에 거주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페미니즘의 조건이라는 모순에 거주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의 비평적 부정성과 페미니즘 정치학의 긍정적 긍정성이라는 반대 방향의 두 겹의 긴장감은 페미니즘이 존재하는 역사적 조건인 동시에 그 가능성의 이론적 조건이다. 페미니즘의 주체는 거기서 젠더화된다. 다른곳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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