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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마 제임스, 「인종계급」(1974)_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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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하든 못하든, 우리 중 일부는 백인 남성 좌파의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공장에서 벌어지지 않는 것은 계급투쟁이 아니다. 이런 좌파들은 맑시즘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우리를 안심시키며 진정한 결속을 강조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들에게서 분리해나가면 맑스와 과학 사회주의를 버리는 셈이라고 우리를 위협했다. 우리가 과감하게 그들과 결별하고,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흑인 운동의 힘 덕분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계급을 재정의하는 것이 좌파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맑스를 재발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분과 계급이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데에는 더 심층적인 이유도 있다. 흑인의 이익은 백인의 이익에 반하는 것처럼, 남자의 이익은 여자의 이익에 반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하나가 아닌 둘, , 넷 이상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계급 이해의 양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혁명적 과제 중에서도 이론과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에 속할 것이다.

혼란의 또 다른 원인은 모든 여성, 아동 또는 흑인이 노동계급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층위를 나누는 데 그치는 운동은 자본주의 계급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투쟁을 만들 뿐이다. 그래서 각 운동 내에는 그 운동이 지지하는 계급적 이해에 대한 투쟁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백인 남성 노동자 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공장에서 조직된 노조라 할지라도 계급적으로 순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장이나 사회에서 자신들이 만든 조직 노동조합, 노동자 정당 등 -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이다.[각주:1]

신분과 계급의 관계를 다른 식으로 한 번 살펴보자. ‘문화라는 단어는 계급 개념이 편협하고, 범속하며,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종종 사용되곤 한다. 수십 년 혹은 수세기에 걸쳐 형성되어 온 국가적 문화는 국제 자본주의와 사회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여기서 깊이 분석하기에는 너무 넓은 주제이지만, 기본적인 것 한 가지 정도만 간단히 밝혀보겠다.

자본주의에 순응하든 저항하든 일단 거기에 휩쓸리게 되면,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자신만의 생활방식을 자본주의 생활의 총체성을 빼놓고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문화의 경계를 제한하는 것은 그것을 그저 일상의 장식품으로 축소하는 것이다.[각주:2] 문화는 착취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극이자 시이다. 미니스커트를 버리고 대신 바지를 입는 것이나 흑인 침례교의 정신과 백인 개신교의 죄책감 사이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문화는 오전 6시에 울리는 알람시계의 날카로운 소리이다. 그러면 런던에 사는 어떤 흑인 여성은 아이들을 깨워 베이비시터를 맞이할 준비를 시킨다. 문화는 그녀가 버스 정류장에서는 얼마나 춥고 만원버스 안에서는 얼마나 더운지에 대한 것이다. 문화는 월요일 아침 8시에 오늘이 금요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리고 싶다고 되뇌며 출근할 때의 기분이다. 문화란 공장 생산 라인의 속도이거나 더러운 병원 침대 시트의 무게와 냄새이며, 그 와중에 오늘 밤에는 어떤 차를 마실까 궁리하는 것이다. 당신의 남편이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동안 문화는 차를 끓일 것이다.

그리고 문화는 부엌에 있다 거실로 걸어나와서는 아무 이유 없이텔레비전을 조용히 꺼버리는 무분별한 여성이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남성들과 전혀 다르게, 당신이 흑인 여성이라면 백인 여성들과 완전히 다르게 경험하게 되는 이 문화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것은 (백인 좌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계급투쟁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인가, 아니면 (흑인 민족주의자 및 급진주의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당신의 성별, 인종, 나이, 민족에 따라 달라질 뿐 아니라 당신이 각각의 지위를 가지는 순간마다 고유하게 나타나는 것으로서 계급투쟁보다 더 근본적인가?

우리의 정체성, 사회적 역할,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자본주의적 기능과 단절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또는 그를 통해) 해방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임금 노예 제도에서 해방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정체성-신분이야말로 바로 계급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상한 부분에서 가장 간결하게 신분과 계급 간 관계의 핵심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서는 국제 노동 분업이 노동계급 내의 권력 관계로 제기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맑스 『자본론』의 제1권이다.


매뉴팩처는 (중략) 임금 규모에 따른 노동력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한편으로는 개별 노동자들이 그저 제한된 기능으로 평생 동안 전유되고 병합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타고난 능력 및 획득된 능력에 따라 계층 구조의 다양한 작동이 노동자들에게 분배된다. (『자본론』 1, 1958, 소련판, p. 349)


단 두 문장으로 인종 차별, 성차별, 민족적 우월주의, 아이들을 억압하는 일을 하며 임금을 받는 세대의 우월주의, 스스로 임금을 벌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여 살아간다고 하는 노령 연금 생활자 등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깊은 물적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다.

노동력의 계층 구조와 그에 따른 임금 규모에 주목해야 한다. 인종 차별과 성차별을 통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킨 채 특정 역량을 습득하고 개발하도록 훈련된다. 이렇게 획득된 역량은 우리의 본성이 되어, 우리의 역할을 영원히 고정시키며 또 우리가 맺는 상호적 관계의 질을 고정시킨다. 그래서 사탕수수나 차를 심는 것은 백인들이 할 일이 아니며, 기저귀를 가는 것은 남성이 할 일이 아니고, 아이들을 때리는 것은 폭력이 아니게 된다. 인종, 성별, 나이, 국가는 국제 노동 분업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우리의 페미니즘은 노동력의 계층 구조 속에서 임금이 전혀 책정되지 않았던, 그래서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층위 - 가정주부 - 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어비스가 노동계급을 비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임금을 받는 노예제와 받지 않는 노예제의 위계 구조를 기반으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경제적 결정요소에 전적으로 (중략)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하는 일과 받는 임금은 그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결정요소, 즉 사회적 힘의 결정요소이기도 하다. 이들은 노동계급이라기 보다는, 노동계급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계급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조직이다. 이 조직은 바로 그 계급의 손으로 사회적 힘을 얻기 위한 지속적인 투쟁을 경제적 결정요소’ -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기 위한 거대한 자본주의적 통제 로 축소시킬 것이다. 노동조합이 협상하는 임금 인상은 물가 상승이나 착취 강화(대개 생산성 향상이라는 형태로)를 통해 결국 자본가가 인상분 보다 더 많은 가치를 회수하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 현상유지이거나 심지어 삭감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맑스의 말에 따라 가령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돈, 보편적인 사회적 힘을 요구하는 의도도 이러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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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동자와 노동조합 간의 대립적 관계에 대한 분석은 셀마 제임스, 『여성, 노조, 노동, 혹은 이뤄지지 않은 일Women, The Unions and Work, or what is not to be done』(초판은 1972, 후기를 새로 더한 개정판은 Falling Wall 출판사, 1976)보라. [본문으로]
  2. 내가 아는 한 문화에 대한 신비화를 가장 적절히 해체한 글은 서인도제도의 크리켓 경기가 기저에 품고 있는 인종적, 계급적 갈등을 보여주는 C.L.R. 제임스의 『경계를 넘어Beyond a Boundary』, 허친슨 출판사, 1963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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