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 이후 근대 철학에서 자연법은 “인간의 고유한 본성 내지는 법칙”을 함의한다(남기호, 2020, 31쪽). 따라서 자연법은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속하는 것을 보장하는 법이자 이러한 보장을 받는 자의 권리다(남기호, 2020, 33쪽). 자연법이 자연 내지는 인간의 법칙을 탐구하는 철학적 개념에서 벗어나 법의 근거로서 사용되는 것은 푸펜도르프의 통찰에서부터다. 푸펜도르프는 자연법을 ‘모든 인간들에게 타당하기에’ ‘비로소 국가에 법률을 공포할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아울러 ‘자연법에 반하는 모든 법률들과 명령들’은 ‘구속력이 박탈’되는 것으로 설명한다(남기호, 2020 37쪽). 즉 자연법은 시민의 저항을 정당화하는 근거이자 실정법의 비판적 근거가 된다. 자연법을 현 사회의 정당화가 아니라 비판적인 근거로 작용하는 맥락에서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역시 이러한 비판적 자연법 이론의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루소에게 특이한 점은 그가 자연법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루소는 홉스와 로크와 같은 사회계약론 사상가들처럼 현재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자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푸펜도르프처럼 자연법을 인간의 불변하는 본성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에 근거가 되었던 디종 아카데미의 질문인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에 답하면서 기존의 사회계약론 사상가들이 전제했던 자연법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법을 고찰하는 개념적인 핵심이었던 자연에 대해서 더 깊이 파고들어 질문한다. 루소에게는 자연에 대한 엄밀한 고찰 없이 자연법에 근거하여 사회계약론을 도출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이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당파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이론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따라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고찰할 때 핵심적인 요인은 그가 자연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있는지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2. ‘기원으로서의 자연’이라는 문제의식
루소의 자연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루소가 자연을 기원(origine)에 위치시키는 지점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흔히 루소를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레테르를 주장한 자연 예찬론자 아니면 자연예찬론과 사회계약론이 뒤섞인 모순적인 사상가로 소개되곤 하는데, 이는 교과서적 해석만이 아니라 최근의 연구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구다(조긍호·강정인, 2012, 348쪽). 하지만 루소의 자연론을 파악하기 위해선 그가 자연에 대해 내렸던 가치평가가 아니라 자연을 파악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루소는 자연을 예찬하고 이에 대한 노스텔지어와 아쉬움을 담은 대목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루소, 1755/2015, 88쪽). 하지만 루소를 자연예찬론자로 만든다면 그가 사회계약론을 통해서 논의하고자 했던 내용들은 물거품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사회계약의 목적을 위해서만 자연법이 사고된다면 그는 푸펜도르프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푸펜도르프 식의 자연법 이론과 루소가 보이는 자연예찬론은 공존할 수 없는 모순적인 측면이다.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 루소의 자연 개념에서 이해할 첫 번째 과제라 할 수 있다.
루소의 저작에서 모순적으로 보이는 외관 속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는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이는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철학자들인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주목하고 있듯이 기원에 대한 탐색에 있다는 점에 있다. 이는 단지 이들 철학의 독특한 문제의식에서만 비롯되었다기보다는 1957년에 루소의 저작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장 스타로뱅스키(Jean Starobinski)의 박사논문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Jean-Jacques Rousseau: La transparence et l’obstacle)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타로벵스키에 따르면 루소는 기원이라는 단어가 책 제목에서부터 등장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에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주요 저작들, 심지어 유년기 시절을 다룬 말년의 자서전격 에세이까지도 기원의 문제는 핵심을 이룬다.
“루소는 사회의 기원을 재구성하고, 언어의 기원은 어떤 것인지 묻고, 개인적 유년 시절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모든 점을 계보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스타로벵스키, 1971/2012, 533쪽).”
기원을 탐사하는 계보학자 루소. 스타로뱅스키가 정식화한 이러한 해석은 루소를 자연예찬론자가 아닌 자연의 기원을 탐사하는 계보학자로 위치시킨다. 물론 루소뿐만 아니라 자연법과 사회계약론을 다룬 18세기의 사상가들, 즉 홉스, 로크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로 기원을 다루긴 한다. 하지만 루소가 유별난 것은 사회의 기원만을 질문한 것이 아니라, 언어, 예술, 학문, 음악 등등 온갖 것에 대한 기원을 질문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기원까지 탐사했다는데서 차이가 있다. 루소의 사상에서 기원은 테마의 일부가 아니라 핵심 테마였던 것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루소는 자연법 사상가들 중에서도 기원의 개념 그 자체를 사유한 유일한 사상가다. 왜냐하면 기존의 자연법 사상가들은 루소가 비판하는 것처럼 “역사 이전에 존재했다고 추정되는 자연 상태”를 현존하는 사회의 형태 속에서 추론하여 이를 기원에 투사하고 이식했기 때문이다(알튀세르, 1972/2020, 65쪽). 즉 자연법 사상가들은 당대 사회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기원을 도입한 것인데, 이때의 사회의 기원으로 도입되는 자연은 사실상 사회의 투명물이었던 것이다. 즉, 홉스 식의 능력이 평등한 인간들이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벌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는 루소가 보기에 자연상태가 아니라 사회였다.
당대의 자연법 사상가들이 전제한 “가짜 기원”을 비판하고 “진짜 기원”을 사유하기 위해 루소는 기원을 현재로부터 단절시킨다. 현재와 연속선에 있는 기원이 아니라, 현재와 분리된 순수한 기원 그 자체, 즉 사회적인 자연이 아니라 순수 자연을 사유하고자 것이다(알튀세르, 1972/2020, 82쪽). 여기서 스타로뱅스키가 보기에 독특한 점은 루소가 순수 자연을 사유하기 위해 이성적 추론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cœur)을 들여다본다는데 있다. 루소가 보기에 기원은 주관성에서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다(스타로벵스키, 1971/2012, 562쪽) 알튀세르는 이러한 마음을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개념으로 보는데, 왜냐하면 마음은 이성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자연을 발견해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알튀세르, 1972/2020, 82쪽).
순수 자연, 즉 기원은 이미 상실된 것으로서 현재의 이성적 추론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하지만 상실되었다는 점에서 자연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존해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실존은 오로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자연적 본성’(nature)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성이 아닌 마음이야 말로 기원을 사유할 수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자연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전의 자연법 사상가들이 사회적 상태를 자연으로 투사하는 원환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루소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기원을 찾아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스타로뱅스키나 알튀세르가 보기에 기원으로서의 자연은 인간 역사의 시간적 시초로서 묘사되는 자연 상태, 다시 말해 숲이나 원시인 등등은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사회 및 제도적 요소들이 모두 부정되고 환원된 형태의 개념적 자연이라 할 수 있다(알튀세르, 1972/2020, 120쪽). 즉, 루소의 자연 개념에서 첫 번째 특이점은 기존의 자연법 사상가들이 자연에 사회를 역으로 투사하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기원을 사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기원으로서의 자연의 특징은 역사적 실존이 아니라 개념적 고안물이라는 것이다. 즉, 기원에 대한 철저한 사고를 통해 루소는 기원으로서의 자연을 사회와 분리시키면서 기존의 자연법 사상가들보다 ‘엄밀하게’ 자연을 개념화시켰다.
참고문헌
루이 알튀세르/황재민 옮김, 『루소 강의』, 그린비, 1972/2020
장 스타로뱅스키/이충훈 옮김, 『투명성과 장애물』, 아카넷, 1971/2012
장 자크 루소/김중현 옮김, 『인간불평등 기원론』, 팽귄클래식코리아, 1755/2015
장 자크 루소/주경복·고봉만 옮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책세상, 연대미상/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