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사회상태와 분리된 기원으로서의 자연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태인가? 우선 홉스가 말한 전쟁 상태와 달리 루소에게 자연상태는 전지구적으로 평화로운 상태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로운 상태를 기술하는 대목을 통해서 루소가 자연에 대한 낭만화된 관념을 가졌다는 평가가 나온 것인데, 사실 자연상태의 평화는 단순히 홉스와 반대되는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인간들이 모여 있는 상태가 전쟁상태일 것이라 예상하는 홉스처럼 인간의 본성을 이기심에 기초하여 사고하는 것과 달리 인간을 이타심에서 사고한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가 개념적으로 전쟁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다. 이는 들뢰즈가 자신의 루소 강의에서 명시화한 것처럼 루소에게 자연은 집합이 아니라 분산(dispersion)의 상태다(들뢰즈, 17쪽). 알튀세르의 해석처럼 사회와 분리된 기원으로 개념화된 자연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숲을 배회하는 원시인과 같은 구체적인 묘사가 책 곳곳에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루소에게 자연은 분산이라는 개념적 정의를 갖는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상 선하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분산 상태였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하지만 이렇게 자연을 분산으로 정의한다면 자연상태에서 분산된 인간이 어떻게 모일 수 있느냐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난점에 빠진다. 예컨대 홉스의 경우 자연상태에서의 전쟁이 자기보존이라는 자연법에 근거하여 사회를 설립하게 만든다. 하지만 분산 상태의 인간은 어떻게 모여서 사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탈자연화가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루소는 인간의 제1법칙, 즉 자연법에서의 첫 번째를 “자기 자신의 보존”으로 명시한다(루소, 1762/2018, 12쪽). 따라서 홉스가 제시하는 자연법인 자기보존을 루소 또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자기보존이라는 자연법에서 투쟁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존을 하는 인간들의 상태를 홉스처럼 집합으로 보면 투쟁이 되는 것이고, 루소처럼 분산으로 보면 평화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홉스가 자기보존이라는 자연법을 인간의 이성과 동일시해서 사고한 것과 달리 루소는 일종의 독특한 정념으로 사고한다는 점에서 갈린다. 그래서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자기보존이라는 단어가 아닌 자기애(amour de soi)라는 단어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처럼 정념에 사고할 경우 홉스가 사고하지 못했던 또 다른 자연상태의 특징인 연민(pitié)을 사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덕목을 극단적으로 매도하는 자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밖에 없는 자연적인 덕목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전혀 모순을 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처럼 약하고 불행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부합하는 자질인 연민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 덕목은 모든 반성의 습관에 앞서는 만큼 인간에게 더욱 보편적이고 유익하며 너무도 자연적이어서 동물조차도 때로 그에 대한 뚜렷한 표시를 보인다(루소, 1755/2015, 66쪽).”
즉, 루소의 자연법은 홉스 식의 자기보존과 유사해 보이는 자기애만이 아니라 연민을 쌍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자기애와 연민이 자연법의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들뢰즈, 18쪽)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단지 분산이라는 조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정념에 의해서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의 여러 대목에서 연민을 “모든 반성 이전 자연의 순수한 충동”이며, “가장 타락한 풍속조차도 여전히 사라지게 하기 어려운 선천적인 힘”으로 기술한다. 자기보존으로서의 자기애보다도 더욱 강조해서 본성으로서의 연민을 기술하고 있는 것은 홉스와 대비시키려는 목적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연민은 단지 홉스의 자연법과 다른 무언가의 도입에서 그치지 않는다. 들뢰즈는 루소의 자연법의 기초를 이루는 연민이 자연상태에 현실화되어 있는 본성이 아니라 잠재성의 층위에서 파악해야한다는 놀라운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루소의 또 다른 저작인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연민은 인간의 천성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상상력이 없다면 전혀 발휘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연민을 느낄 정도로 감동받는가? 연민을 우리가 우리 자신 밖으로 나가, 고통을 겪고 있는 존재와 일체가 됨으로써 생길 수 있다. 우리는 그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도 내에서만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그 사람 안에서다. 타인을 향한 그런 이동이 얼마나 많은 지식의 획득을 전제로 하는지 생각해보라!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고통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루소, 연대미상/2002, 67~68쪽)”
이처럼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연민은 상상력(imagination)이 없다면 발휘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인간의 본성이다. 즉 연민이라는 인간의 본성은 각성될 무엇으로 제시된다. 연민이 인간의 본성인 것은 맞지만 단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발해야할 덕목처럼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외관상 모순적인 기술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던 스타로뱅스키의 경우 이러한 루소 사상에서의 모순을 명확히 지적한다. 그리고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이성은 연민을 변질시킬 위험이 있다고 언급한 대목을 근거로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연민을 각성되어야할 것으로 제시하는 부분을 문제 삼는다. 연민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각성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주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본성이 다른 무언가의 개입에 의해 활성화된다면 그것은 본성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데리다는 연민에 개입하는 그 무엇이 스타로뱅스키가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판단과 같은 이성의 작용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앞서 인용한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의 구절에 따르면 연민은 상상력에 의해서 일깨워진다. 루소에게 연민은 “고통을 겪고 있거나 겪었던 자아와 지금 고통을 겪는 타인의 자아의 상상적 동일시(알튀세르, 1972/2020, 185쪽)”라는 점에서 타인의 고통을 그대로 감각하는 것이 아니다. 상상이라는 매개가 필요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루소의 사상에서 이성과 상상력은 구분될 뿐만 아니라 주요한 차이를 보인다. 다만 루소가 연민을 설명할 때 상상력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루소에게 또 다른 인간의 자연법인 완벽가능성(perfectibilité)이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자질) 그 자질이란 곧 스스로를 개선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환경의 도움을 빌려 다른 모든 능력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는 능력으로 종 안에도 개인 안에도 존재한다. 반면 한 동물은 몇 달이 지나면 죽을 때까지의 상태가 결정되어 그의 종은 천 년이 지나도 최초에 결정된 상태 그대로다. 왜 인간만이 자칫 어리석어지는가?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원시 상태로 다시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아무것도 습득한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어 항상 본능만 가지고 있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노쇠나 여러 사고들로 인해 그의 완벽가능성이 그에게 습득하게 만든 모든 것을 잃어버려, 심지어는 동물보다도 더 저급한 상태로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루소, 1755/2015, 50쪽)
루소에 따르면 완벽가능성은 “스스로를 개선하는 능력”이자 “환경의 도움을 얻어 다른 모든 능력을 끊임없이 발전시키는 능력”이다. 자기애와 연민이 동물과 일정정도 공유하고 있는 본성이라면 완벽가능성은 동물과 구분 짓는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인간의 능력과 욕망이 일치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 능력을 늘 초과하는 상태에서 미래를 향해 욕망하는 상상력을 통해 가능하다. 즉, 완벽가능성은 감각과 이성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현재에 주어진 조건 이상을 욕망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상상력을 통하지 않고서 불가능하다. 완벽가능성이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라면, 이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이야말로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 고유의 본성이자 역량이다. 그리고 상상력을 통한 완벽가능성의 활성화야말로, 현재의 조건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자유의 개념과 통한다. 인간은 상상을 통한 완벽가능성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루소에게 자연(혹은 본성)이 주어진 것으로 정의되는 기존의 용법과 달라지게 되는 맥락을 확인하게 된다. 무언가의 개입으로 활성화되는 연민은 완벽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에 위치한다. 다만 이때의 자연 혹은 본성은 상상력을 통해서 인간의 고유한 본성으로 활성화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잠재적인 자연’인 것이다(알튀세르, 1972/2020, 188~189쪽).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잠재적인 자연은 자연을 실존이자 주어진 것으로서 사유하지 않고 일종의 저장고로서 사유한다는 점에서 루소 자신에게도 당혹스러운 개념이다. 왜냐하면 잠재적인 자연은 상상력을 통해 일깨워지면서, 자신에게 저장되어 있는 힘 이상의 것이 깨어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자연이 잠재적인 저장고라면 상상력에 의해 활성화되면서 스스로를 위반하고 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상상력은 잠재력을 일깨우지만 곧바로 그것을 위반한다. 상상력은 저장되어 있던 힘이 빛을 보게 하지만, 그 힘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보여주면서, 즉 그것을 ‘능가하면서’ 그 힘에게서 그것의 무력함을 표시한다. 상상력은 즐기는 능력을 활성화시키지만, 욕망과 힘 사이의 차이를 각인시킨다. 우리가 우리의 만족 능력 그 이상을 원한다면, 이러한 잉여 및 차이의 기원은 상상력이라 명명된다(데리다, 1967/2002, 325쪽).”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루소가 사용하는 자연이라는 개념의 기능을 저장고와 욕망 사이의 균형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욕망이 잠재된 자연, 저장고를 초과하지 않고 균형을 이룰 때가 바로 자연인 것이다(들뢰즈, 18쪽). 인간의 욕망이 자신의 신체적 능력과 환경을 초과하지 않고 균형을 이룰 때가 바로 자연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가 보기에 이 균형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유함인 완벽가능성은 바로 그러한 능력과 욕망의 균형을 깨는 상상력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자연은 상상력에 의해 활성화된 잠재적인 자연에서부터, 즉 저장고로부터 깨어 나와야지 만이 사후적으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연은 상상력에 의해서만 사후적으로 식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한계를 표시하는 개념이다. 상상력의 활성화를 통해서 인간성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활성화되기 이전의 저장고로서의 자연을 볼 수 없다.
그런데 상상력 역시 잠재적 능력이다. 상상력은 자신만의 고유한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잠재적인 자연을 활성화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활동적인 잠재 능력이지만 잠재적인 자연이 깨어나야지만 식별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자연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을 위반하는 힘(상상력) 자체가 자연(잠재적인 자연)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홉스의 자기보존과 루소의 자기애의 차이를 비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루소 역시 홉스처럼 자기보존을 자연법으로 언급한 구절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는 홉스와 가까워 보이는 대목도 등장한다.
“그들[자연 상태의 인간]은 박애와 같은 공통 관념을 통해서도 맺어지지 않았다. 힘 외에 다른 중재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적으로 생각했다. (……) 인간에게 쉽게 침해당해 지상에 홀로 남겨진 인간은 사나운 동물이어야 했다. 그는 타인들이 자신에게 가할까봐 두려워하는 고통을 타인에게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루소, 언어미상/2002, 67쪽).”
루소 연구자들에게서 논쟁적으로 다루어지는 이 구절은 루소의 미간행 원고인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을 미성숙한 작품으로 해석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특히 스타로뱅스키에 이러한 쪽의 입장인데, 왜냐하면 자기애로 충만한 평화로운 자연을 그리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루소와 달리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의 루소는 마치 홉스처럼 자연 상태를 만인에 대한 투쟁과 같은 전쟁 상태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리다의 지적처럼 루소는 홉스처럼 자연상태를 자기보존의 욕구를 지닌 인간들의 전쟁상태로 규정하지 않는다(데리다, 1967/2002, 329쪽). 스타로뱅스키가 근거하고 있는 “(자연상태에서) 그들은 서로를 적으로 생각했다”와 같은 루소의 문장은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적이었다”와 같은 확정적인 문장이 아니다. 데리다는 “적으로 생각했다”는 문장의 뉘앙스를 통해 루소에게 인간의 원초적 적의는 자연적 본성이 아니라 원초적 환상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해석한다. 즉 잔인성은 적극적인 사악함이 아니라, 타자가 나에게 해악을 끼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해악에 대한 환상적 표상 속에서만 비롯된다. 다시 말해 연민이 상상에 의해 일깨워지듯 적대 또한 상상에 의해 일깨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에게 기원으로서의 자연상태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그 자체로 선악이라는 가치로 규정할 수 없는 성격을 띤다. 루소는 홉스의 생각을 완전히 거부한 것이 아니다. 루소는 자연 상태의 인간들에게 전쟁이 없다고 본 것이 아니라, 홉스처럼 전쟁이 지배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홉스를 비판한 것이다.
“이 야만의 시대는 황금시대였다. 이유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흩어져 살았기 때문이다. (……) 인간들은 마주칠 때 걸핏하면 서로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전쟁 상태가 이어졌지만, 전지구는 평화로웠다(루소, 1755/2012, 69쪽).”
홉스의 생각처럼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서로 마주치는 곳에서는 국지적으로 늘 전쟁이 있었다. 다만 전지구적으로 보았을 때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들은 모여 살지 않다는 점에서 평화의 상태가 지배적이었다. 루소가 보기에 홉스는 연민의 경제(상상력에 의해 활성화되는 연민)를 사고하지 못했다. 홉스는 자연적으로 연민이 일깨워지지 않는다는 점으로부터 자연상태의 인간을 본성적으로 사악하고 호전적으로 전제하는 오류를 범했다.
데리다가 보기에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뿐만 아니라 루소의 주요 저작들에는 연민의 경제라는 주제가 관통한다. 연민은 생득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덕목으로 타자의 고통을 직접 느끼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타자의 고통이 현전화되는 방식이 아닌 타자의 고통이 이미지로 활성화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타자의 고통은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적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데리다는 루소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동일화가 자기 자신을 파괴할 위험을 지닌다는 것을 잘 간파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루소는 타자의 고통으로부터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상상력을 통해서만이 타자의 고통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어떤 식으로든 타자와 내가 구별되어야지만 나의 고통이 아닌 타자의 고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타자에 대한 비동일시 속에서 동일시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연민과 도덕성의 경제는 언제나 자기애의 한계 속에서 억제되도록 해야 한다. 이 자기애가 타자의 선에 대해 우리를 깨우쳐 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너 자신이 남에게 해라’라는 자연적인 선함에 대한 잠언은 ‘훨씬 덜 완벽하지만 아마도 더 유용할’ 다음과 같은 잠언에 의해 완화되지 않을 수 없다. ‘가능한 타자의 아픔을 최소화함으로써 너의 선을 행하라’전자 대신에후자가 제시되고 있다(333).”(데리다, 1967/2002, 333쪽)
타자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동일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이렇게 동일시 된 고통은 타자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의 고통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타자의 고통은 현전이 아니라 비현전 속에서 체험될 수밖에 없다. 루소는 타자의 아픔을 인식하기 위해서 타자의 아픔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우리가 진짜로 아프다면 우리는 자기의 고통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마구간의 채찍질 당하는 말에 연민하지 못하는 것은 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말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해서이다.
이처럼 루소에게 기원으로서의 자연상태가 사회싱태와 분리된 것처럼 인간의 본성도 마찬가지로 사회적 특성과 분리된다. 즉 루소에게 자연법에 해당하는 연민과 완벽가능성은 자연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법은 자연상태에 잠재되어 있지만 상상력에 의해 현행화되는 발생론적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들뢰즈, 38쪽). 다만 상상력 또한 그 자체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무언가에 기대어 활성화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계기가 필요하다. 즉, 인간의 자연의 본성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외부적 계기가 루소의 자연의 마지막 퍼즐이라 할 수 있다.
4. 사회계약: 대항적인 법의 설립이라는 해법
앞서 언급한 것처럼 루소에게 자연상태는 분산으로 정의된다. 이는 루소의 저작에서 숲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알튀세르에 따르면 숲은 실존적 대상이 아니라 순수 자연상태의 개념이다. 인간들이 분산되어 있고, 어떤 계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동일성의 세계, 다시 말해 “비사회의 실현 조건”인 것이다(알튀세르, 1972/2020, 120쪽).
따라서 이러한 순수 자연상태는 그 자체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우연들이 필요하다(알튀세르, 1972/2020, 112쪽).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탈자연화의 조건으로 야금술과 농업을 언급하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논리적인 순서상으로 농업을 위한 도구의 필요성이 요청되기 때문에 야금술이 농업보다 앞선 것으로 설명된다. 다만 여기서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야금술을 발명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이 필요한지를 질문한다.
“자연계의 그 기본 원소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사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우연이 필요했겠는가?(루소, 1755/2015, 53쪽)”
그리고 이는 야금술만이 아니라 농업도 마찬가지다. 일종의 번외 편으로 기술하고 있는 자연상태에서 언어의 발생도 무수한 우연이 필요하다. 즉 루소는 자연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인간의 기술·제도들의 발명을 우연으로 설명함으로서 기존의 자연법 사상가들이 보여주는 목적론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는 루소의 자연 개념에 기인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루소에게 자연은 진정한 ‘기원으로서’ 사회적인 특징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지적처럼 루소에게서 자연에서 사회로의 이행은 불연속의 발생이라 할 수 있다. 즉 순수 자연상태가 원인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 발생인 것이다(알튀세르, 1972/2020, 113쪽). 그리고 이는 단 한 번의 불연속과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완벽한 탈자연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야금술이라는 우연 뿐만이 아니라 농업이라는 우연도 겹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인간의 제도와 기술들을 계열화하면 이는 무수한 우연들이 우연적으로 겹쳐야만 한다.
놀라운 점은 루소가 이러한 상태를 진정한 사회가 아닌 탈자연화의 과정으로, 즉 아직은 자연상태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불평등 기원론』에 따르면 사회의 설립은 탈자연화의 끝, 다시 말해 신체와 능력의 차이와 같은 자연적인 불평등이 사회적인 불평등으로 전환되는 순간인데, 이는 법과 소유권의 확립에서부터이다(루소, 1755/2015, 110쪽). 즉, 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아직 완벽하게 사회로의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루소에게 법은 자연상태의 말기, 다시 말해 야금술과 농업으로 인해 소유권의 투쟁이 발생하는 시기에 부자들에 의해 설립된다. 즉, 불평등한 소유권 분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 의해 강탈당하는 폭력적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만인에 의한 재산의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목적을 평화상태로 치환하여 제시하는 것이 바로 법의 설립이고, 루소가 바라보는 홉스식의 사회계약인 것이다.
따라서 루소에게 자연상태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레테르처럼 단순한 하나의 상태가 아니다. 자연상태는 그 안에서도 우연에 의한 단절면을 관찰할 수 있는 상태다. 다소 혼란스럽게 기술하긴 해도, 사회적 불평등의 시작을 법의 설립으로 기술하는 루소의 언급을 고려한다면, 분명 법이 설립되기 직전의 자연상태는 순수 자연이 아니라 타락한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연들의 일치로 인한 탈자연화에서 소유권을 정당화하려는 부자들의 사회화 과정,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탈자연화의 탈자연화 맥락에서 개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계약은 그런 의미에서 부자들의 법 설립에 대항적인 법 설립이다. 루소는 계약이 합의를 근거에 둔다고 했기 때문에 부자들의 소유권의 확립을 위한 법 설립은 계약이 아니다. 또한 계약은 결사에 의한 합의를 전제하기 때문에 복종행위이거나, 제3자의 신민이 되는 행위가 아니다. 계약은 전체가 주권자로 구성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홉스 식의 사회계약처럼 계약에 참여하지 않는 제3자에게 양도하는 행위는 루소에게는 정당한 계약이라고 할 수 없다.
루소에게 탈자연화의 탈자연화로서의 법의 설립이라는 역사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고, 이는 다름 아닌 자연에서 사회로의 이행과정이다. 그런데 이미 진행된 사회화 속에서 다시 자연으로 복귀할 수는 없다. 다만 탈자연화의 탈자연화가 진행되는 것처럼, 상이한 탈자연화를 실행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탈자연화의 개입 방식이 사회계약인 것이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심지어 사회계약을 통해 자연적 자유를 잃더라도 시민의 자유와 소유권의 확립을 얻게 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는 특히 소유권을 부정적으로 기술하던 『인간불평등 기원론』과 비교하면 모순적이기까지 한데, 여기서 핵심은 합의를 통한 소유권의 상호인정이다. 현재 소유권의 정당화가 아니라 결사체의 합의를 통한 인정이 루소가 바라보는 진정한 사회계약인 것이다. 루소는 이러한 사회계약을 통해 자연적인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기본계약은 자연적 평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적 자연이 설정한 사람들 사이의 신체적 불평등을 도덕적이고 정당한 평등으로 대체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힘이나 재능에서는 불평등할 수 있어도, 합의를 통한 권리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루소, 1762/2015, 31쪽).”
이처럼 사회의 설립이 합의로 이루어진다면, 부자라는 특정한 개별이익의 정당화가 아닌, 개별이익들의 일치를 조건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루소는 개별이익들에 몰두하는 개별의지와 구분되는 개별의지의 일치로서의 또 다른 의지를 일반의지(violenté génébale)를 개념화하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주권자의 행위이자 개별의지의 일치라는 합의를 뜻한다. 루소가 일반의지를 지휘하는 권력을 주권이라 명명한 것을 고려하면 계약을 통해 형성되는 주권과 일반의지는 땔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런데 루소가 주의를 준 것처럼 일반의지는 개별의지의 합이 아니다. 개별의지의 합(루소가 모두의 의지라고 부르는)은 사적인 이익의 총합일 뿐이다. 개별 이익들이 모여서 일반의지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의지들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일반의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의지는 다름 아니라 법을 구성한다. 루소에게는 인간들의 결사로 인민이 구성되어 합의를 통해 스스로 입법하고 스스로에게 주권자로서 명령을 내리는 이러한 행위가 다름 아닌 사회계약을 통한 정당한 법의 설립인 것이다. 따라서 루소는 법을 “일반의지의 행위”로 명명한다.
물론 루소는 법을 작성하는 자는 인민들 자신이 아니라 독특한 능력을 소유한 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다고 언급하면서, 마치 인민에게서 입법권을 박탈시키는 듯한 내용을 기술하기도 하지만, 루소에게 법의 작성과 입법은 엄연히 구분된다. 법의 작성자는 입법자가 아니다. 루소에게 “법은 우리 의지의 기록”(루소, 1755/2015, 50쪽)이기 때문에 일반의지에 선행에서 설립될 수 없다. 따라서 인민의 합의 없이 입법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회계약과 자연법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루소에게 잠재적인 본성(혹은 자연)인 연민, 자기애, 완벽가능성 등은 어떻게 합의와 연결되는 것일까? 우선 사회계약을 탈자연화에 개입하기 위한 시도로 본다면, 이는 개별의지에 기초한 법의 설립과 구분되는 일반의지의 형성에 의한 법의 설립의 근거로 볼 수 있다. 즉, 탈자연화로 인한 인간들의 모임이 개별이익의 합이 아닌 일치로 귀결시키기 위해서 요청되는 덕목이 바로 (들뢰즈의 표현대로) ‘연민에 의해 절제된 자기애’와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완벽가능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연상태에 주어져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상상력에 의한 현행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조건에서부터 단절되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게 한다는 점에서 자동적인 산출이 아닌 실천을 필요로 한다. 부자들의 법 설립은 개별이익을 정당화기 위한 개별의지의 극단화라는 점에서 어떤 자연법도 개입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의지는 개별의지의 일치를 꾀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근거가 필요하게 되는데, 바로 이 근거가 자연 속에 잠재화된 자연법인 것이다. 루소에게 자연법은 기원에 기입되어 있으며, 일반의지를 통한 법의 설립 속에서 현행화되는 것이다. 자연법은 현재의 사회 상태를 정당화되는 지점이 아닌 오로지 일반의지의 일치라는 사회계약의 근거가 될 뿐이다.
다만 자연법은 일반의지를 가능하게 하는 합의의 조건으로 작용할 다름이다. 일반의지는 개별의지의 ‘일치’와 공통의 이익을 ‘합의’한다는 원칙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일반의지만으로는 법을 어떻게 구성할지의 방향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덧붙여야할 것은 사물들 및 대상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사회의 객관적인 정황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루소가 법의 성공 여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습관, 관습, 풍속, 여론이라고 언급한 대목과 상통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루소, 1762/2018, 70쪽). 결국 일반의지가 법의 형식을 결정한다면, 그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인민들의 생활과 사회의 객관적인 정황을 포함하는 ‘실재의 정치’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루이 알튀세르/황재민 옮김, 『루소 강의』, 그린비, 1972/2020
장 스타로뱅스키/이충훈 옮김, 『투명성과 장애물』, 아카넷, 1971/2012
장 자크 루소/김중현 옮김, 『인간불평등 기원론』, 팽귄클래식코리아, 1755/2015
장 자크 루소/주경복·고봉만 옮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책세상, 연대미상/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