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의 정치》
: 들뢰즈의 루소 강의
질 들뢰즈 지음
황재민 옮김
< 옮긴이의 말 >
이 번역 연재물의 원전은 들뢰즈가 1959-1960년 소르본대학에서 행한 루소 강의를 요약해서 기록한 문서이다 (생클루고등사범학교 도서관 소장 (문서번호 CI 12167)). 27쪽짜리 타자본 문서인데 , 기록 자체는 들뢰즈가 한 것 같지 않다 .원본 파일은 http://www.webdeleuze.com/php/texte.php?cle=232&groupe=Rousseau&langue=1 에서 구할 수 있다 .
옮긴이는 아르옌 클레인헤렌브링크 (Arjen Kleinherenbrink) 가 영역한 문서도 참조할 수 있었다 . 영역본은 불어 원본과 쪽수는 물론 글씨체까지 비슷하게 편집한 축자적 판본과 , 영역자가 논문 형태로 좀더 체계적으로 절을 구분하고 , 단락 및 문장의 완성도를 높이고 , 주석 처리를 하는 등으로 다소 양이 늘어난 ( 리좀론적 ) 확장판 두 가지로 이뤄져 있다 . 옮긴이는 불어 원본에 최대한 충실하게 번역하되 내용 및 표현을 최대한 분명하게 한다는 태도로 확장판 영역본도 자유롭게 활용했다 . 절 구분도 영역본을 따랐으며 , ‘ 실재의 정치 ’ 라는 제목도 실은 영역자의 것이다 (A Politics of Things).
원어 병기는 괄호 ( ) 안에 넣었다 . 원문 고유의 괄호와 헷갈릴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 옮긴이의 개입은 어디서든 중괄호 { } 안으로 묶는다 . 대개는 주석에서 국역본 출전을 가리킬 뿐이다 .
< 차 례 >
영역자 서문
1. 세 가지 자연 상태 개념
2. 《신 엘로이즈》 : 미덕 , 객관성 , 위계적 단계들
2.1. 단계 1 : 영혼 (â̂ me; soul)의 기원적 선의
2.2. 단계 2 : 자연적 선의 또는 미덕에 대한 사랑
2.3. 단계 3 : 미덕 그 자체
2.4. 단계 4 : 지혜
3. 《사 회계약론》과 《 에밀》은 평행하다
4. 자연 상태
5. 루소에게서 ‘ 자연 ’ 의 의미
6. 자연 상태는 현실인가 , 허구인가 ?
7. 루소 저작의 통일성 (I)
8. 어떻게 자연 상태를 벗어나는가 ?
8.1. 자연 상태에서 야생의 상태로
8.2. 도덕성과 자유의 도래
8.3. 기만 , 악의 , 양도 /소외
8.4. 이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는가 ?
9. 루소 저작의 통일성 (II)
10. 사회 계약
10.1. 주권자는 환원 불가능하다
10.2. 주권자는 어떻게 분할 불가능하게 되는가 ?
10.3. 계약의 실정적 특성은 무엇인가 ?
10.4. 의무 , 총체성 , 즉각성
10.5. 왜 주권자가 일반 의지를 구성하는가 ?
10.6. 일반 의지는 무엇을 바라는가 ?
10.7. 루소의 시민법 이념
영역자 서문
들뢰즈는 1959 년과 1960 년에 걸치는 1 년치 학기를 장 자크 루소에 할애했다 . 루소라면 들뢰즈의 그 유명한 ‘ 소수적 ’ 철학 영웅들 가운데 거론됐던 이름은 아닌 것 같다 . 아닌 게 아니라 들뢰즈와의 깊은 연관을 드러내기에는 루소가 가진 대체적인 인상이 너무 낭만주의적이고 , 너무 귀족풍이며 , 지나치게 국가 사상가다운 데가 있는 듯하다 .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온라인 공간을 통해 에서 . 구해 볼 수 있는 이 27 쪽짜리 타자 기록 강의 요약본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 이 문서는 들뢰즈와 루소 사이의 놀라운 마주침의 기록이다 . 여기서 들뢰즈는 정확히 발생ㆍ잠재성ㆍ현행성의 사상가로 루소를 변형시킨다 . 알다시피 이 세 가지 개념은 들뢰즈 자신의 사유에서도 핵심을 이루는 것들이다 . 이러한 연관 내지 변형이 1962 년 출판된 들뢰즈의 유일한 루소론">[/footnote] 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 . 이처럼 들뢰즈가 루소 안에서 간파해낸 내적 구조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기에 이 강의 요약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 우리는 들뢰즈와 루소의 이 마주침이 루소를 읽는 이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들뢰즈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얼마만큼 유의미할 수 있는지에 관해 간단히 짚어 보고자 한다 . 하지만 그보다 먼저 들뢰즈의 손에 맡겨진 루소가 무엇이 되는가 하는 물음부터 던져 보자 .
들뢰즈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루소의 작업은 단 한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 그 문제는 자유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사회의 이익을 미덕과 조화시키는 문제이다 (p.3). 그것은 개체적 인간과 인간 종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해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p.18). 상이한 수준들에서 존재하는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쏟은 단일한 노고로서 루소의 전 저작을 읽어야 한다 . 《 신엘로이즈》와 관련해서 보면 그 문제는 네 가지 상이한 단계들과 얽혀 있다 . 첫 번째는 영혼 (soul; a ̂̂ me) 의 기원적 선의라는 단계이다 . 그것은 각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전체이자 실존감을 가진 하나인 존재자가 실재들 (things) 에 대해 의존 관계를 갖는 상태이다 . 이는 어떠한 악의도 가능하지 않은 상태이다 . 그렇지만 우리가 좀 이따가 알게 될 것인바 , 이러한 상태는 현행 상태들의 발생을 낳는 잠재적 출발점으로서 사유되어야만 한다 . 두 번째 단계는 영혼의 자연적 선의이다 .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이 맺는 관계들 속에 악의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 기원적 선의가 존속하는 가운데 미덕에 대한 사랑 , 곧 여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유지하려는 욕망이 출현한다 . 이 결과 , 세 번째 단계로서 , 미덕을 악해진 존재자의 이익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야기된다 . 이때 들뢰즈가 언급하게 되는 것이 바로 “ 현자의 유물론 ” 이다 . 현자의 유물론은 인간 존재자들이 변화할 수 있도록 실재들 및 상황들을 사용함에 있다 . 마지막 네 번째는 지혜의 단계 , 곧 실존의 수월함을 발견하는 회복의 단계이다 . 이는 실재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해방되어 어떤 공백으로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 이러한 ‘ 몽상 ’ 이 무겁게 내포하는 바는 이 단계가 비록 최종 단계라고는 해도 불충분하게 남는다는 사실이다 . 즉 보다 나중에 올 계기에서 확정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footnote]
질 들뢰즈
들뢰즈가 다음으로 주장하는 바는 위와 같은 네 단계가 《 에밀》과 《 사회계약론》에서 공히 발견된다는 점이다 . 들뢰즈는 두 작품을 2 연 제단화 ( 二連祭壇畫 ) 처럼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 “《 사회계약론》과 《 에밀》 사이에는 본질적 연속의 관계가 있다 . 계약이란 교육을 받은 양성된 사적 인간을 전제한다 .” 우리는 분산 및 사회의 완전한 부재로 특징지어지는 사회 이전의 자연 상태에서 시작한다 . 그렇다면 개인들은 종 전체와 동일한 것이 된다 . 그 누구도 다른 이들에 대하여 한 명의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구별해내려고 하지 않는 까닭이다 . 악의란 오직 사회적 수준에서만 생겨나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 상태는 선악을 넘어서라기보다 선악 이전에 존재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게다가 들뢰즈 - 루소는 이러한 상태가 결코 현행화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전한다 . “ 자연 상태는 역량과 잠재성으로 가득찬 발생론적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 자연 상태는 관찰의 사실이라기보다는 현행하는 사회의 초월론적 조건에 더 가까운 것이다 .
두 번째 단계는 “ 자연인 ” 또는 “ 사적 인간 ” 의 단계다 . 이러한 인간의 발전은 “ 자연법 ”( 이는 분명 잠재성들이 현행화되는 과정을 가리킨다는 게 들뢰즈의 설명이다 ) 에 지배된다 . 이 두 번째 단계는 《 에밀》에 나오는 자연과 실재에 관한 가정 교육 , 곧 의식 , 이성 , 사회 , 사회성을 싹트게 하는 그것과 관련 있다 . 《 신엘로이즈》에서는 악덕의 발생도 함께 나타나는데 , 이는 세 번째 단계로 이끈다 . 사회 상태의 퇴락이자 도덕적 인간의 퇴락이 동시에 도래하는 셈이다 . 소유와 불평등은 부자에게 빈자가 예속되도록 만드는 기만적 합의를 양산한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도덕성 및 정의감 역시 출현하는데 , 이는 다시 더 앞선 단계에서 잠재적인 측면으로 있었던 것의 결과이다 . 즉 “ 자연법은 퇴락한 사회에서 형성될 수 있다 ”(p.12).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사회 계약의 단계이다 . 이 계약은 《 에밀》에 나오는 양성된 사적 인간을 전제한다 . 왜냐하면 우리가 세 번째 단계에서 네 번째 단계로 향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단계로의 복귀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 사적인 측면에서는 도덕적 의지의 행위가 개체적 종과 도덕적 종 사이의 주관적 통일을 복원해야 한다 . 그 다음에는 정치적 행위가 객관적 통일을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 계약은 자유를 현행화한다 . 이 자유는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진 못하지만 이미 자연 상태에서 현존한다 . 전체로서의 인민이 주권자로의 전면적 양도를 발생시켜 신민 / 주체 (subject) 가 될 때 , 모든 것은 단 순간에 인민들에게 회복된다 . 즉 인민들은 개인 주체임과 동시에 주권자의 일원이다 . 그들 모두는 일반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다스린다 .
들뢰즈의 이러한 루소 논의에는 놀라운 결말이 있다 . 들뢰즈는 우리에게 주권자란 순수 형식적 의미에서 법 그 자체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 달리 말해서 네 번째 단계가 완료된 후에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입법을 행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지 , 무엇을 입법의 대상으로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 분명 한 가지 점을 덧붙여야 하는데 , 그것은 실재들과의 관계 또는 인민이 처한 구체적 상황들과의 관계이다 . “ 하나의 법을 규정하는 데서 일반 의지로는 충분치 않다 . 의지의 형식적 규정에는 주어진 사회의 객관적 정황들이라는 내용이 덧붙여져야 한다 .”(p.26). 들뢰즈가 보는 입법자의 모습은 그러한 물질적 정황들의 ‘ 주입 ’ 에 의거한다 . “ 입법자가 없다면 일반 의지는 의지가 바라는 것을 형식적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 일반 의지는 물질적으로 규정되기 위해 입법자를 필요로 한다 . 좋은 법은 특수한 인격들―형식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기와 더불어 , 구체적 상황들―물질적 측면―에 적응하기에 있을 것이다 .”(p.27).
이 타자 원고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측면은 무엇일까 ? 당연하게도 첫째는 루소가 무대에 오르는 방식일 것이다 . 루소 사상이 지닌 본성에 관한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 즉 , 루소의 사상 체계는 단일한 체계인가 ? 그 체계는 역설들로 똘똘 뭉쳐 있지 않은가 ? 아니면 그저 그 자체 안에 놓인 여러 긴장들만을 인정할 뿐인가 ? ">/footnote] 그것은 적극적인 강령인가 , 아니면 어떤 이상과 그 실패에 관한 명상인가 ? 등등 . 들뢰즈는 시종일관 단호하다 . 루소는 발생의 사상가 , 잠재적 역량의 현행화의 사상가이며 , 또 그렇기 때문에 루소의 모든 작업은 단 하나의 발생론적 노선을 따라 깔끔하게 정돈될 수 있다는 것이다 . ( 시민 ) 종교에 관한 루소의 고찰은 무심하게 지나쳐 버린 격이었고 , 잘 알려진 입법자 및 교육자와 관련한 문제들 ( 그는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 그는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는가 ? 어떻게 그는 우리가 겪는 고난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는가 ?) 은 실종돼 버린 셈이었다 . 루소가 쓴 모든 글이 네 가지 단계들 및 그것들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라는 단일하고 엄격한 구조 위에 토대를 두었다는 것은 여전히 크게 의문을 가질 만한 사항일지도 모른다 . 그럼에도 들뢰즈가 그와 같은 발상을 크게 지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펼쳐 나갈 수 있을지 확인해 보는 일은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
들뢰즈 자신과 관련해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 비록 루소는 이 이후 들뢰즈 저작들에서 거의 등장하진 않더라도 ,">/footnote] 이 원고는 들뢰즈 자체가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읽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들뢰즈의 정치 철학은 저항ㆍ탈주ㆍ국지성ㆍ소수파적 몸짓들 등에 거의 배타적으로 집중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 그것은 항상 국가에 맞선 전쟁 기계 , 국왕들에 맞선 유목민들 , 몰적인 것들에 맞선 분자적인 것들이다 . ‘ 들뢰즈적 정치 이론 ’ 이 있다면 , 가능한 한에서 ‘ 체계 ’ 로부터 탈주하는 법을 일러주는 설명서일 것이라 주로 여겼다 . 하지만 이 루소 강의안은 하나의 뚜렷한 대안을 보여주고 있다 . 여기서 발생ㆍ잠재성ㆍ현행성은 정의롭고 좋은 사회의 구축을 위해 자리한다 . 우리는 현행하는 불평등의 상황에서 이 상황을 발생시킨 잠재적 조건들로 복귀한다 . ‘ 선악 이전에 ’ 존재하는 것으로서 ‘ 자연적 선의 ’ 가 항상 존속해 왔다는 하나의 발견이 이뤄진다 . 이러한 발견은 새로운 현행화 ( 대항 현행화ㆍ재영토화 ) 의 기회를 제공한다 . 이때까지는 결과가 형식적이다 . 어떤 위계 속에서의 권력과 위세의 현행적 분배가 아닌 , 실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공백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 달리 말해 그때부터 인민은 진정으로 그들을 통일하는 그것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는데 , 그것이란 바로 ( 미리 규정된 추상적 관념들이 아닌 ) 그들 자신이 직면한 상황들일 수밖에 없다 . 한 사회가 이와 같다면 ,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를 미래로 열어놓을 것이다 . 정의가 법체계와 동의어가 될 것이다 . 목적론 ( 과거를 미래로 투사하는 것 ) 은 전부 포기하고 실용주의와 구성주의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 상황 속에 그 자체로 현존하는 실재들 ( 기계들 , 집합체들 ) 에 맞는 그 내재적 기준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모든 초월적 과잉코드화 (overcoding) 를 가능한 한 많이 내던져 버릴 것이다 . 이러한 점들은 들뢰즈 사상의 자구와 정신에 크게 조화를 이룬다 . 게다가 《 안티 오이디푸스》에 관한 입문서를 쓴 유진 홀랜드는 《안티 오이디푸스》 라는 책 전체가 ( 야생적 사회ㆍ전제군주적 사회ㆍ자본주의적 사회 이후에 ) 창출할 수 있는 네 번째 가능한 사회를 암시하고 있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 (Eugene Holland, 1999). 또한 조 휴즈가 최근 설득력 있게 논증한 바에 따르면 , 들뢰즈의 흄으로의 복귀는 제도들을 구축하는 종별적 방식에 초점을 둔 실정적인 정치 강령을 드러낸다 (Joe Hughes, 2012). ‘ 도래할 인민 ’ 이라는 통념에 관한 로널드 보그 (Ronald Bogue) 의 저술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것은 , 그 개념이 비록 예술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수준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현실적 가능성을 표시한다는 점이다 . 이제 이 강의록이 지닌 가장 커다란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 그것은 바로 단지 국지적인 수준에서 사회를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닌 , 가장 큰 규모에서 사회의 구축을 사고하기 위해서 잘 알려진 들뢰즈의 개념들을 전부 동원할 가능성인 것이다 .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 즉 , 들뢰즈가 “ 엄밀하게는 제안할 만한 정치적 강령이 있지는 않다 ” 고 말한다 해도 , 그것은 단지 사전에 내용과 위계를 규정하는 것에 대한 거부에 해당할 뿐이다 . 하지만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러한 형식적 방법과 관련해 들뢰즈적 원리들에 토대를 두었을 때 과연 사회는 무엇으로 나타나는가이다 . 이런 점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일은 들뢰즈의 루소 재해석에 나타난 그 “ 상쇄 ” 운동이라는 들뢰즈적 변주의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 이 운동은 퇴락적 집단 ( 몰적인 것 , 국왕적인 것 , 국가 ) 으로부터 사적ㆍ개인적 수준 ( 탈영토화 , 도주선 ) 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 이것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집단이 더 나은 세계를 구축 ( 재영토화 , 대항 현행화 , 도래할 인민 ) 할 수 있도록 하는 그 자신의 본성 / 자연에 관한 어떤 것을 배운 이후에 다시 사회적 수준으로 복귀해야 한다 . 최소한 분명한 것은 그 사회가 가능한 한 모든 관념론들 , 모든 선험적인 것들 ,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짐들을 내던져 버리려고 분투하는 사회라는 점이다 . 그럼으로써 그만큼 더욱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ㆍ물질적 정황들에 참여하게 된다 . 이제는 추상적 관념의 정치가 아니라 진정한 실재의 정치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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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ton, P. (2000). Deleuze & the Political . Routledge. {백민정 옮김 , 《들뢰즈와 정치》 , 태학사 ,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