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전(前)사회적ㆍ전(前)정치적ㆍ전(前)시민적 상태이다. 이 자체는 새로운 관념은 아니다(홉스 참조). 어째서 전(前)사회적인 것으로 나타나는가? 평등과 독립의 상태이기 때문이다(《인간 불평등 기원론》참조). 그러나 루소는 자신의 독창성을 여기서 구하지 않는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분산으로 정의한다. (루소는《인간불평등기원론》주석 12{김중현 옮김, 펭귄클레식 코리아, 2010, 165-171쪽}에서 자연 상태의 부부 관계 문제에 관한 로크의 입장을 비판한다. 로크에게는 아이가 혼자만의 상태를 벗어날 때까지는 자연적 인연이다. 루소가 보기에 로크는 문제인 것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연 상태에서 남녀의 동거를 전제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연 상태는 우연한 마주침들의 상태이다. 루소에게는 이러한 고립이야말로 자연 상태를 평등과 독립의 상태로 설명할 수 있게 한다. 평등과 독립은 분석의 귀결점인 것이다.)
어떤 점에서 홉스와 멀어지는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이고 토미즘적인 관점에서 자연적 질서는 완전성의 질서 같은 것이다. 사회성은 자연적 질서의 일부를 이룬다. 홉스에 와서는 더 이상 완전성의 질서가 문제되지 않고 필요와 욕망이라는 힘들로 이뤄진 기계 장치가 문제된다. 따라서 자연권이란 곧 자신의 세력이 미칠 수 있는 한에서 욕망을 실현하기이다. 권리는 의무와 달리 원초적이고 자연적이다.
이러한 관점은 어떠한 의존 관계도 배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전통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곧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다. 평등은 힘이 불평등한 가운데 존재하는 상호 간의 평형 속에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가장 강한 자도 언제라도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날 수 있고, 가장 약한 자도 가장 강한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는 강할 수 있다.
자연 상태는 사회적 삶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으로 충분한가? 홉스에게 사회적 삶은 권위, 곧 권력에 대한 의존을 함축한다.
자연 상태는 시민적 상태로서의 사회를 배제한다. 그러나 또한 독립적 개인들이 이루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자연적 사회를 허용하는 사회성(그로티우스)도 배제한다. 사회성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들 간의 자연적 동일성에서 유래할 것이다. 푸펜도르프가 말하길 “자연 상태와 사회적 삶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완전하게 형성된 이성이 즉각 주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홉스에게는 이성의 발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루소는 홉스에 반대해 홉스의 자연 상태가 기대고 있는 그러한 복합적 정념들에 대한 발생도 요구한다. 홉스의 인간은 루소에 따르자면 역사적으로나 생겨나야 할 몇 가지 능력들을 “남용”하고 있다.
루소는 문제가 제기되는 평면을 변화시킴으로써 홉스가 맞이한 난점들을 모면하는 것이다. 분산 테제를 받아들인다면 그런 부류의 문제는 더 이상 맞이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사회 형태가 필연적으로 배제된다.
홉스에게 필요는 서로를 가깝게 하는 것이지만, 루소에게 필요는 서로를 떼어놓는 것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과 동시적으로 쓰였을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는 필요의 자연적 효과가 인간들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전쟁 상태가 도처에 넘쳐났지만, 지상 전체로 보면 평화 속에 있었다.” 우연한 마주침들 속에서도 전쟁이 가능했지만 그것은 장소를 갖지 않았다. “이는 황금시대였는데, 인간들이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소가 가진 스토아주의적 토대 : 필요란 분리시키는 것이다. 필요는 자기 만족(auto-suffisance)으로 정의된다. 자연적 필요는 신체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제한되며, 그 필요를 느끼는 자가 가진 힘을 넘어설 수 없다. 우리의 필요는 우리의 힘에 비례하며, 우리의 힘도 우리의 필요에 비례한다. 상호적인 조절이 있다는 말이다(《에밀》 제2부 참조).
따라서 자연 상태는 힘과 욕망의 균형(équilibre)이다. 홉스에게는 만물에 대한 권리(jus in omnia)이 있다. 이에 대해 루소는 ‘아마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경우 각자는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것만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곧 그를 끌어당기고 그가 다다를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무제한적 권리이다. 그러니까 이 권리는 자연 상태에서 사실적으로 제한되는 것이다. 루소는 이러한 자연 상태를 아타락시아에 비유한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전체이다.”
자연권의 기초는 연민에 의해 절제된 자기애(amour de soi)이며, 이것이 균형을 낳는다.
5. 루소에게서 ‘자연’의 의미
루소에게 자연적이라 함은 무엇보다 ‘시초의’ 또는 ‘근원적’의 의미이다.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이나 “시초의 인간” 등에서 그렇다. 여기서는 사회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의미는 「사부아 보좌 신부의 신앙 고백」에 나온다. “인간은 본성상/자연적으로(par nature) 사회성이 있다.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만들어졌다.”
자연 상태에서의 사랑은 사소한 일이므로 쥘리와 생프뢰 간의 사랑과 비교된다. “우리의 영혼은 서로를 위하도록 만들어졌다. 자연이 바라는 바다.” (《신엘로이즈》 제3부 편지 11)
“만약 사랑이 퍼진다면, 자연이 이미 그리 선택했기 때문이다. (…) 이것이 자연에 속한 신성한 법이다.” 이를 어겼다가는 벌을 받을 것이다.
가족 같은 느낌은 습성, 즉 마치 두 번째 자연/본성처럼 형성되는 하나의 발전을 필요로 한다.
자연적인 것은 더 이상 시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원에서부터, 또한 기원 속에 잠재적으로 포함돼 있는 방향들을 따라 형성되는 발전이다.
이와 연관된 것이 루소에게서 “자연법”의 문제이다. 많은 경우 문제되는 것은 자연 상태에 군림하는 법이 아니라 “자연인”, 곧 근원적 상태 속에 기입된 잠재성의 발전 법칙을 따른다고 가정되는 한에서의 인간의 발전을 지배하는 법이다.
《에밀》에 나오는 “가정” 교육 또는 “자연” 교육은 자연에 관한 교육(우리가 가진 능력들 및 기관들의 내적 발전)과 실재에 관한 교육(우리를 변용시키는 객체들에 대한 경험으로 형성되는 습득)을 포함한다.
따라서 자연인은 양성되고 교육 받는 한에서의 인간이다. 《에밀》은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l’homme à l’état de nature)을 자연인(l’homme naturel)에 이르게 한다고 여겨진다.
루소에게서 의식, 이성은 사회와 사회성과 마찬가지로 많은 경우 “자연적”이라고 말해진다.
악덕의 계보학과 이성의 발생에 관해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를 참조할 것. 이성은 그것이 아무리 자연적이라 할지라도 자연 상태에서 출발하는 발전을 요구한다. 《주네브 수고(사회계약론 초고)》에는 자연 상태에 관한 장이 있었는데 《사회계약론》에서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 장이 상이한 문제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회계약론》은 자연인을 전제한다. 《사회계약론》의 문제는 인간에서 시민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이지, 사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연인이 아닌 것이다.
완전화 가능성(perfectibilité)이라는 통념 : 자연 상태는 잠재 역량들(potentialités), 잠재성들(virtualités)로 가득찬 발생론적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발생론적인 계통은 악덕의 발생에 의해 변질된다. 이는 우발 사건인가, 필연성인가?
루소는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이 지닌 특성들을 찾아내기 위해 분석적이고 역진적인 방법을 채택한다. 원리를 찾아내야 할 필요성에서다. 우리는 무엇을 정의하고자 하는가? 자연 상태를 여러 능력들이 현행하는 상태로서 정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잠재적ㆍ발생론적 상태로 정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애와 연민은 그 잠재성들이 발전되지 않은 정념의 상태이다. 《에밀》 제4부를 참조한다면, 우리는 연민이 잠재적 사회성을, 자기애가 타자들에 대한 사랑을 가득 품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분석적 방법은 역학적 원리, 곧 현행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으로의 역진 없이 자연 상태에 대한 정의에 이를 수 없다. 루소의 선학들이 가진 분석적 방법으로는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신엘로이즈》에서 말하는 바대로 “자연이란 곧 그 속에서 읽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한 권의 책이다.” 우리가 만약 해독할 줄 모르는 상태라면 분석하기로는 충분치 않다. 현행적이고 형성된 모든 것은 자연 상태 바깥에 있다. 루소 이전에는 야생인과 시민적 인간에 대해서만 말해온 것이다. 발생이란 정확히 자연 상태에 속한 잠재성들의 현행으로의 이행이다. 자생적 이행은 없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나오는 바대로,
- 능력은 그것이 필요나 이익에 부응하지 않을 경우 발전되지 않는다.
- 필요는 상황에 의해 규정되지 않을 경우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상태는 다음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 객관적 정황들
- 이 객관적 정황들이 규정하는 필요들
- 이 필요들의 충족에 필요한 주체적 능력들
예컨대, 파롤은 사회 상태를 전제한다.
루소가 보기에 자신의 선학들은 그러한 능력들이 이미 형성되어 주어진 것으로 보고, 그 다음 그로부터 상황들을 도출하면서 원인들의 순서를 오해한 것이다. (가령, 인간이 말을 한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 속에 산다.)
그와 달리 루소에게는 그 능력들이 발생을 갖는다. 만약 인간이 이미 완전하게 형성돼 있는 능력들을 가진다고 하면, 그러한 능력들을 이용할 필요를 갖지 않을 것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전쟁 상태로 만든 홉스를 비판한다.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전쟁 상태 속에 존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진행은 이렇다. 즉 공격성이라는 능력이 주어져 있다고 치자. 그것은 어떤 이익을 전제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이익은 어떠한 상황을 전제하는가?
- 법적ㆍ객관적 문제 : 폭력이라고 다 전쟁은 아니다. 전쟁은 상태들 사이의 관계와 일정한 지속, 그리고 힘을 수단으로 해서 가정된 손실의 보상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그 목표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은 소유를 전제한다. “전쟁을 구성하는 것은 인간들이 아닌 실재들 간의 관계이다.” 따라서 전쟁 상태는 사회를 전제한다.
이익이라는 주체적 문제 : 인간적 이익/이해관계(intérê̂t)인 자존심(amour-propre)은 마찬가지로 사회 상태를 전제한다.
여기서는 《반뒤링론》을 참조할 만하다. 엥겔스는 여기서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 채택된 변증법적 방법을 칭송한다. 사실상 엥겔스는 홉스를 마주한 루소의 상황 속에서 뒤링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금요일을 노예를 만들기(asservir) 위해 로빈슨은 무엇을 이용하는가(se sert)?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구성된 사회 상태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노예들을 면 생산에 매이게 한다(asservissent).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5권, 박종철출판사, 1994, 182-183쪽 : “그렇지만 뒤링 씨의 이 전능한 “폭력”을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도록 하자. 로빈슨은 “손에 검을 쥐고” 프라이데이를 예속시킨다. 그는 이 검을 어디서 구하는가? 로빈슨 이야기에 나오는 환상의 섬들에서도 아직 검이 나무에서 열리지는 않으며, 뒤링 씨는 이 물음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다. 로빈슨이 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라이데이도 어느날 아침에 장전된 권총을 손에 쥐고 나타나리라고 가정할 수 있으며, 그 경우에는 “폭력”-관계 전체가 뒤집힌다.”}
6. 자연 상태는 현실인가, 허구인가?
ㆍ이 문제가 중요성을 가지는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몇몇 이들은 이 문제에 중요성을 부여하는데, 거기엔 기초와 기원을 구분하는 칸트의 역할이 있었다.
ㆍ루소의 선학들에게서 자연 상태는 기초임과 동시에 기원이다. 홉스에 입각해 보자면 자연 상태는 전(前)사회적 삶으로 간주된다. 자연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허구적인데, 왜냐하면 인류가 거기서 스스로를 발견했던 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상황들에서는 현실적이다. 홉스에게 시민적 전쟁은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 하나이다.
ㆍ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는 이와 관련한 서너 군데의 대목이 있다. “사실들 일체는 제쳐놓고 시작해야 한다.” “반성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관찰이 확증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라는 가정.” “아마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십중팔구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상태.”
- 자연 상태는 관찰의 사실이 아니다. 자연 상태는 요람기도 아니고 야생의 상태도 아니다.
- 인용문들의 맥락 : 여기서 “사실들”은 경전이 증언하는 사실들이다. ‘일정한 능력들을 갖추고 창조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 자연 상태는 결코 문제 설정의 방식으로 정립되지 않는다. 가설적인 것으로 정립되는 것은 바로 자연 상태와 현행 상태 사이에 일어나는 것, 즉 모든 중간 매개들이다. 두 끝은 현실적인 것으로 주어진다.
자연 상태는 인간을 형성하는 운동의 출발점으로서 현실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출발하는 발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생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인간불평등기원론》은 한 가지 방식을 제안한 것이다.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이나 《풍속의 역사(Histoire des mœurs)》(에두아르트 푹스)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관점은 동일하다. 《에밀》은 아이의 관점에서 발생을 만들어낸다.
7. 루소 저작의 통일성 (I)
에른스트 카시러의 「루소 저작 내의 통일성」이라는 논문.
Ernst Cassirer, «L’unité dans l’œuvre de Rousseau»,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XXXII, février 1932.
이 논문에 담긴 것은 자유 개념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제시하는 칸트적 테제이다.
칸트의 「인류 역사의 시작에 관한 추측들」을 참조할 것.
{이한구 옮김, 「추측해 본 인류 역사의 기원(Mutmasslicher Anfang der Menschengeschichte)」, 《칸트의 역사 철학》, 서광사, 2009.}
그렇다면 《사회계약론》은 가능한 사회 개조이고자 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는 그 원리에서 기만적이라 할 하나의 협약(convention)이 등장하는데, 이 협약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바로 퇴락적 사회 상태이다. 이러한 기만은 사회의 정비라는 미명 하에 행해진다. 따라서 사회가 그 원리에서 결함이 있는 것이기에 재정비 정도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백과전서파와 대척점을 이루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사회 개조는 가능한가? 루소에 따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몇 가지 조건들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협약(convention)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협약을 백지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일은 바깥에서 오는 입법자를 전제한다. 크레타, 스파르타, 로마 등의 예들이 그렇다. 이러한 상태들에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시민이었다. 이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계약(contrat)이 존재하는 이유는 더 이상 그러한 협약을 변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약을 그에 앞서는 자연 상태와 관련짓는 것은 오류이다. 오히려 자연에 속한 인간, 즉 자연법에 따라 양성된 인간과 관련지어야 한다. 교육이 행해지고 난 이후 소유자이자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는 에밀이 그런 사례이다. 즉 사적이고 정의롭고 미덕을 지닌 인간. 교육은 공적인 것이기를 멈췄고 우리는 협약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장 로베르 트롱솅과의 서신 왕래{옮긴이―트롱솅의 <시골에서 쓴 편지>(Lettres écrites de la campagne)라는 소책자에 부치는 식으로 쓰인 아홉 편의 논쟁적 편지글 모음집을 말한다. 루소는 패러디를 담아 「산에서 쓴 편지」(Lettres écrites de la montagne)라는 제목을 붙인다. 루소가 《에밀》과 《사회계약론》이 일으킨 파문으로 고난을 받던 시기인 1763-4년에 쓰였다. 김중현 옮김, 「산에서 쓴 편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사, 2007.}에서 루소는 사적인 인간과 시민 사이의 차이를 알아야 함을 역설한다. 에밀이 스스로 정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적인 면에서 성숙/양성(formé)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인간들이 새로운 사회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 아닌가? 어떠한 발생도 사회 계약 이전 단계로 넘어가게 할 수는 없다. 사적인 인간들이 사회 질서, 다른 사회 질서를 정초하는 것은 일련의 변환(transmutation)을 통해서이다.
자연에 속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발생론적 계통과의 관련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정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퇴락한 상황들 속에 놓이는 일을 막는 것이다.
역사에 대응하는 발생론적 계통은 자연 상태에서 퇴락하는 사회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 계통은 바로 교육학의 계통이다. 자연법은 퇴락한 사회에서 자연에 속한 사적인 인간을 양성할 수 있다.
세 번째 계통은 비발생론적이다. 자연에 속한 인간은 의지를 통해 자신에게 부합하는 사회 질서를 창조한다.
8. 어떻게 자연 상태를 벗어나는가?
8.1. 자연 상태에서 야생의 상태로
가령 홉스의 자연 상태의 경우,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그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드는 ― 살 수 없게 하는 ― 어떤 불균형이 그 바탕에 놓여 있다. 이러한 벗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자연법이다. 이 자연법이라는 수단은 최소한의 이성의 발전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자신을 불리한 조건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각자가 스스로 끊어버리면 더 좋은 것이다.
루소에게 자연 상태는 모순 없는 충만한 자기만족이다. 인간 종은 동물적인 종으로 간주된다. 개체는 자신의 종과 더불어 있는 일자를 이룰 뿐이다. 즉 개체와 유적 존재의 동일성인데, 왜냐하면 개체는 대자적 전체이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생소한”, “우연한”, “경미한” 원인들의 다양체이다. 따라서 이는 기계론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속에 숨은 평면”이 있는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최종적인 목표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류 발전의 매 단계마다의 객관적 상황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화할 때 인간 안에 새로운 이익과 필요가 나타난다.
자연 상태를 벗어나자마자 야생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상황은 새로운 두 가지 사실로 특징지어진다. 첫째는 형태론적(morphologiques) 원인들, 둘째는 인구학적 원인들과의 관련 속에서만 작동하는 기후적 원인들.
인간들이 늘어나 서로를 더욱더 마주치게 되고, 인간들은 사는 데 좀더 유리한 지방을 물색한다.
새로운 이익과 필요가 나타나지만 여전히 동물적ㆍ신체적 종으로 간주된 인간의 관점에 머문다.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실재들과의 관련 및 실재들에 대한 의존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특별히 수동적이었던 데 반해 이제 인간의 신체적 존재는 활동적인 것이 된다. 말하자면 개체의 유적 활동이되 오로지 신체적이기만 한 것이다. “그 발명자와 함께 죽는 수많은 발명품들.”
두 가지 새로운 이익 : 어떤 상황에서는 협력이, 또 다른 어떤 상황에서는 경쟁이 이익이 된다. 지나는 토끼(혼자서 하는 사냥)를 지켜보는 사슴(협력) 사냥꾼의 사례.
최초의 임시 공동체는 사냥꾼들이다. 왜냐하면 최초의 활동이 사냥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능력들의 등장 : 몇 가지 관계들에 대한 지각. (이성은 이를 전제한다. 에밀 참조.) “일종의 반성 내지 반사적 신중함.” 「사부아 보좌 신부의 신앙 고백」은 신에 대한 복종만이 아니라 “여러 감각들을 비교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는 아직 자유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고 신체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추론에 의한 판단이 아닌 둘러봄(inspection)에 의한 판단이다. 신체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감각적이고 유치한 수준의 이성”이다.
이러한 수준에서는 종으로서의 인간은 다른 종들과 동렬에 놓인다. 인간은 자신의 동류들과 유적 본성에 있어 일치점을 갖는다.
의성어, 몸짓 언어, 자연 언어의 등장.
새로운 필요와 이익이 상황 속에 통합함으로써 그 상황이 변화한다. 또한 천재지변이 개입한다. 새로운 이익의 문제는 자연적 개체에서 도덕적 인간으로의 이행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고유한 의미에서 정신적인 새로운 활동의 발견이다.
8.2. 도덕성과 자유의 도래
모든 일은 마치 그러한 이행이 활동의 감퇴를 초래하는 것처럼 흘러간다. 《에밀》 3부와 4부를 참조 : 아이는 여전히 희미한 욕망들만을 가지지만 아이의 힘은 커졌다. 아이에게는 감춰진 역량들이 있다. 아이는 학습을 통해 자신의 지적ㆍ도덕적 존재를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도 “목자들이 덜 활동적이고 더 조용한 것”은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이는 여가 및 쓸데없는 열정의 탄생이다. 이때부터 “개별적인 수준에서 기호와 비교”가 있게 된다. 개체는 종과 구별되는 것이다.
어떤 조건들에서? 종이 더 이상 신체적 종으로 정의되지 않고 도덕적 종으로 정의되는 데 따라.
새로운 이익들과 필요들 : 정착 거주가 나타난다(소유의 맹아). 결사들이 형성되는데, 이는 단지 사냥꾼들의 이익과 같은 그러한 이익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능력들의 상태 : 신체 활동이 적어지고 그에 따라 발견되는 것은 배려와 복수의 도덕이다.
개인은 종과 더불어 있기를 멈춘다. 그는 타자들에 의해 마주침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이는 불평등과 자존심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도덕성은 우선 권리, 곧 응당 나에게 갚아져야 하는 것에 대한 의식에 의해 표면화된다. 이는 모욕을 당하고 복수를 행하는 개인과 관련된다. “각자는 자신이 당한 모욕에 대한 심판자이자 복수자이다.”
아직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도덕적 종으로서의 인류와 개인 간의 분리가 완전하지 않았음을 함축한다. 루소는 이때가 최상의 시대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고유한 도덕적 존재, 곧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영혼과 신체의 이원론을 긍정하는 「사부아 보좌 신부의 신앙 고백」을 참조할 것. 영혼은 활동적인 것으로서, 모든 신체적 결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의지를 생산한다. 자유는 이미 자연 상태에 있었지만, 그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는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삶과 더불어 있는 일자로 계속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가 도덕적 존재를 구성함을 발견하는 한에서 자유에 대한 의식을 갖추게 된다. 자유가 자연 상태에 존재했었다고 우리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완전화 가능성을 통해서 우리가 도덕적 상태로 넘어가고 나서다.
두 가지 이원성이 형성된다. 첫째는 신체적 종으로서의 인간과 도덕적 종으로서의 인간(영혼과 신체), 둘째는 개인과 종. 첫째가 발견될 때 둘째는 더 깊어진다. 도덕적 종 속에서 미덕에 대한 사랑이 발전함과 동시에 개인 속에서 악의적 존재가 갖는 이익이 발전한다.
두 이원성이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은 통치화한 상태(état policé)에서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야금술과 농업이 쌍을 이루며 성립하고 여기에 새로운 이익들이 결합된다. 야금술의 성립이 먼저인데, 야금 작업을 할 이들을 키워내기 위한 필요성에서 농업이 탄생한다. 노동 분업은 철과 농업 생산물 간의 교환에 기초한다. 이어 최초의 소유, 곧 토지의 분배가 나타난다. 소유와 노동 간의 협약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노동자가 땅을 점유한다. 그는 그 땅이 노동의 결실들을 생산할 때까지 노동이 행해질 그 땅에 대한 모종의 권리를 갖는다.
수확기에서 수확기까지 계속되는 이러한 점유는 자연적 기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정의의 도덕으로 향하는 도덕적 존재의 진화이다. 단, 이 진화는 소유 관념 이후에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유 관념은 도덕적 존재의 발전이 놓이는 토대인 셈이다.
그러한 정의는 각자에게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을 부여함으로 이뤄진다.
8.3. 기만, 악의, 양도
야금업자들과 경작자들의 관계에서 어떤 “비율 배합 상의 불평등”이 존재하게 된다. {옮긴이―가령, 철 소비와 식량 소비 사이의 불균형, 야금업과 경작 각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재능의 차이로 인한 불균형 등등. 주경복ㆍ고봉만 옮김, 《인간불평등기원론》, 책세상, 2003, 110쪽.} 소유는 정의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러한 목소리는 여전히 약하다. 그런 정의감에도 불구하고 개체적 인간은 노동 분업에 기인하는 소유물의 불평등에서 소유자가 갖는 이익을 발견하고 다소간 탐욕적인 소유자를 자임하려고 한다.
따라서 새로운 불평등, 곧 탈취(usurpation)의 불평등이 존재한다. 힘의 관계가 소유자들 간의 관계에 확립된다.
부자들은 루소가 신중을 기한 기획이라고 부른 것을 구상한다. 그것은 “허울좋은 근거들”에 의한 기만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 115쪽.} 부자들은 무소유자들에게 전쟁 상태의 종결과 함께, 모든 의지를 단 하나로 재결집시키는 것, 곧 최고 권력의 구성을 제안한다. “매우 일반적인 협약”인데, 기만적인 것이다.
여기서 루소는 아주 고전적이라 할 그러한 이론들을 답습하는 듯 보이지만,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위와 같은 계약이 하나의 기만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추구하는 것은 기만 없는 계약이 일어날 수 있는 추상적 조건들이다.
루소의 선학들은 계약에서 자유와 안전의 교환을 본다. 이러한 교환을 계약의 효과로 보는 데에 루소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러한 계약이 하나의 기만이며, 합의(consentement)를 통해 얻어질 수는 없는 것이라는 한에서만 그렇다.
ㆍ 논리적 논거 :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의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협약을 받아들인다.
ㆍ 심리적 논거 : 자연적인 예속 성향이란 것은 없다.
ㆍ 사회학적 논거 : 사회 상황과 가족 상황을 동일화하는 부권(autorité paternelle) 테제에 대한 반박.
ㆍ 도덕적 논거 : 나의 신체적 존재와 더불어 있는 생명과 마찬가지로, 자유는 나의 도덕적 존재와 더불어 있는 일자일 뿐이다. 생명과 자유 모두 양도 불가능한 것들이다.
루소는 우리가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심지어 계약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그 계약에 대해 속았던 것이다. 기만으로부터 전적으로 벗어나서 정의될 수 있는 계약은 있는 것인가? 《사회계약론》이 검토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우선, 역사적인 검토를 한다. 계약이라는 발상에는 두 가지 테마가 존재한다. 곧, 복종과 결사.
복종에 관해서는 주로 16-17세기에 다뤄졌다. 여기서는 계약의 두 당사자가 있다고 가정한다. 하나는 신민이고, 다른 하나는 주권자이다.
홉스의 이견 : 주권이 이중화된다. 제3의 역량이 쟁론들을 평결하기 위해 필요하게 된다.
결사란 모두의 의지를 하나로 재결집시키는 것이다. 결국 신민이 되는 자들 사이에서 무수한 계약 행위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루소의 비판 : 홉스는 결사가 원초적인 것임을 잘 파악했지만, 복종이 결사가 되게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약에 가담하지 않은 주권자에 대하여 신민으로 구성된다.
루소에 따르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제안한 재결집의 산물로서의 결사다. 우리는 하나의 공중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계약이 기만이라는 것은 원래부터 결함이 있는 계약이라는 말이다. 가난한 자들은 그 의지가 공통적이지 않음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통치 계약이 필수적이다. 통치 계약은 제2의 기만이다. 왜냐하면 집정관들이 아무리 정직하다 한들 그 근원적 결함 때문에 집정관들은 부자들이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의감은 여전히 약하다. 겨우 그러한 사기의 실현을 허락하기에 충분할 뿐이었다.
이제 악의적 존재가 갖는 이익이 등장한다.
인간은 악의적 존재가 갖는 이익을 발견한다. 소유는 우리에게 정의감을 줌과 동시에 하나의 특수한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소유는 불평등이라는 내적 운동에 의해 발전한다는 것은 루소 이전에 여러 경제학자들이 말한 바 있다.
루소는 좀더 복합적인 발상을 갖는다. 문제는 내적 운동이 아니라 이중의 작용, 즉 새로운 필요와 타인의 노동에 대한 착취이다. 이는 탈취의 단계다. 도덕적 종으로서의 인간과 특수 이익을 가진 개인이라는 이원성이 발전한다.
악의적 존재가 갖는 특수 이익은 집요하다. 정의의 목소리는 약하므로 그러한 이익에 복무할 것이다. 이로부터 가난한 자가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하는 부자의 속임수 제안, 곧 강제로 내세워진 정의가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사회계약론》에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것인가? 계약은 속임수이다. 아무리 평등한 자들로 상정된 당사자들의 관계를 조정하는 정의를 방패로 삼는다 할지라도, 계약은 평등하지 않은 두 당사자 간에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정의는 구별되는 당사자들 간의 관계와는 전혀 다른 것에 의해 이뤄진다. 사회 계약에 의해 산출된 것은 양도 불가능한 것이다.
《사회계약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본성상 우회 불가능하고, 어떠한 양도도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우리의 잘못된 이익에 의해 이용되지 않을 그러한 정의의 형태가 존재하는가? 사실 루소는 그러한 정의가 양도된다고 여러 차례 말하고 있다. 신민과 주권자 간의 관계는 악의에 대한 섬김으로 옮겨갈 수 있다. 국가 안에 부분적 결사들이 형성되는 것으로 족하다 등등.
따라서 그 자체로는 양도 불가능한 정의의 양도가 있을 수 있다. 일반의 행세를 하는 부분적 결사가 정의를 탈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두 당사자가 평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그 관계가 평등하다고 말해지는 정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전개된 두 개의 발상이 사회계약론에서 재발견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회는 상호 간의 복종 관계 위에 정초될 수 없다. 모든 복종은 결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결사가 별개의 두 당사자들 간의 관계로 나타나는 한, 계약은 기만일 것이다.
이는 사회 계약을 예고하는 논리적 입론인 셈이다. 이제 사회 계약은 결사의 계약으로 정의된다. 별개로 간주되는 두 당사자들 사이에 수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선학들에 대한 도발적인 풍자를 행한다. 루소가 그들에게 동의하는 것은 그들이 구상한 바와 같은 계약이 실제 사회의 토대라는 것이다(결사에 앞선 복종 등등). 그러나 루소가 말하듯이 엄연히 그것은 실제 사회가 본질적으로 기만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 사회는 더 이상 자유가 존재하지 않기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는 그 원리에서 기만으로 인해 결함을 지닌다. 그래서 루소 자신은 그것을 원죄라며 비난한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존재가 잘못된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8.4. 이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는가?
1) 너무 늦은 것이 아니라면 정치적 행동, 곧 혁명을 통해서.
《인간불평등기원론》제2부.
《에밀》 제5부 : 각종 빚들을 없애버리는 데 만족하면서 어떤 대폭적인 변화도 꾀하지 않은 솔론에 비해, 소유를 집산화하고, 또 그를 통해 결함 자체를 소멸시켜 버린 리쿠르고스의 경우.
{국역본에서 해당 부분이 나오는 단락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에게서 자연적 자유와 시민의 자유를 비교한 후, 우리는 재산에서 소유권과 주권을 비교하고, 사유지와 공유지를 비교할 것이다. 만약 주권이 소유권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 소유권은 주권이 가장 존중해야 할 권리다. 소유권은 개별적이고 사적인 권리로 남아 있는 한은 주권에게는 신성 불가침의 권리다. 그러나 소유권이 모든 시민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간주되면 곧바로 그것은 일반 의지에 복종하게 되며, 이 일반 의지는 소유권을 무효화할 수 있다. 그리하여 주권자는 한 개인의 재산도 여러 개인의 재산도 건드릴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주권자는 리쿠르고스 시대의 스파르타에서 그러했듯이, 합법적으로 모든 사람의 재산을 독점할 수 있다. 그 반면에 솔론에 의한 부채 탕감은 불법 행위였다.” 이용철ㆍ문경자 옮김, 《에밀 또는 교육론》, 2권, 한길사, 2007, 482쪽.}
《사회계약론》 제8장.
2) 혁명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너무 늦어버렸다. 가정 교육의 길이 남는다.
교육은 퇴락과 잘못된 이익을 소멸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2가지 방법, 즉 쥘리의 방법인 미덕과 볼마르의 방법인 지혜가 있다.
이는 가정의 수준에서 개인과 도덕적 종 사이의 화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은 주관적이고 부정적인 것이다.
이 자체로는 충분치 않은 화해인데, 왜냐하면 사회적 삶은 내가 그것을 피한다 할지라도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인과 도덕적 종 사이의 실정적이고 객관적인 화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사적인 교육 다음에야 가능하다. 사적인 인간이 시민을 재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 계약은 자연에 속한 인간, 즉 《에밀》에 따른 양성된 인간을 전제한다.
그런데 《사회계약론》에도 자연 상태에 대한 암시들이 있다. 제1부 6장과 8장.
《에밀》의 말미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에밀은 시민이 될 수 있는가? 즉 “동료 시민들과의 시민적 관계”를 이룰 수 있는가? 바로 이때 루소는 에밀에게 자연 상태에 관해 성찰해 볼 것을 권한다. 따라서 그러한 성찰이 사적인 인간에서 사회 계약의 시민으로의 이행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유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자연 상태의 인간 – 시민적 인간
자연 상태 – 사회 계약
이러한 성찰의 본질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정의가 양도 가능하지 않은 계약의 가능성이 나오는 것이다.
9. 루소 저작의 통일성 (II)
확실히 자유는 루소 저작 속의 영속적인 항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항구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자유가 통일의 요인일 수 없는 것이다.
통일성을 만드는 것은 개인과 인간 종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다. (칸트의 해석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