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 대지세 시대의 친족 만들기》서문 &  5,6,7장 (1/5)

 

 

번역          연구공간 L. 

 

 

 

 

 

 

 

 

 

 

 

 

 

※ 미국 듀크대학교 출판사에서 발간된 도나 해러웨이의 책(Donna J. Haraway,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6, pp. ⅺ~8.)은 1~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국내에 번역된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1장 반려종과 실뜨기하기, 2장 촉수 사유: 인류세, 자본세, 쑬루세, 3장 공-산: 공생발생과 트러블과 함께하기라는 활기찬 예술, 4장 친척만들기: 인류세, 자본세, 플랜테이션세, 쑬루세, 5장 카밀 이야기: 퇴비의 아이들”의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해러웨이가 제안하는 생태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연구자와 번역자의 작업에 도움이 되고자 듀크대학교 출판사 발행본을 참고하여 
         5장 오줌으로 넘쳐나는: 다종 응답-능력에서 데스와 프레마린, 
         6장 세계에 씨뿌리기: 땅의 타자들과 함께 땅을 변형하기 위한 씨주머니, 
         7장 호기심어린 실천
을 번역했습니다. 
5,6,7장에 대한 설명을 포함한 서론 & 책소개/뒷표지 & 5~7장의 번역을 소개합니다. 

  ※ 본 원고는 원고료나 상업적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되는 부분이 있다면 글을 내릴 수 있습니다. 
댓글이나 이메일(blackhaha001@gmail.com)을 통해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책소개/뒷표지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는 사랑과 분노로 쓰여졌으며, 일부 사람들이 감히 인류세라 부르는 이 끔찍한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책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말과 이미지, 이야기의 힘을 동원해, 신이 하사한 기술적 해법에 대한 신앙과 ‘게임이 끝났다’는 식의 씁쓸한 사이비 지혜의 이중 유혹을 뿌리친다. 그녀의 책은 우리에게 현재 진행 중인 세계에 참여하는 데 동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 이자벨 스텐저스, 《파국의 시대에서: 도래할 야만에 저항하기》의 저자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이 얼마나 큰 생태적 트러블에 처해 있는지 망각하지 않는 그런 세상 안에서 지구의 다른 유기체들과 함께-생각하는 법, 함께-사는 법, 함께-존재하는 법을 묻는다. 이는 세상의 파괴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들이 늘 있어왔다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위함이다.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는 그녀가 쓴 일련의 주요 저작들을 잇는 흥미진진한 후속편이자, 저 유명한 《사이보그 선언》을 한쪽으로 치워두게 만들 정도로 지적인 에너지로 충만한 선언문이며, 동시에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데 여전히 전념하고 있는 한 생명에게는 그저 잠깐 머무르는 안식처이다.”

 

― 마를린 스트래선, 케임브리지 대학

 

 

생태파괴가 급증하는 가운데, 다종 페미니즘 이론가인 도나 해러웨이는 우리가 지구와 그 거주자 모두와 맺는 관계를 재배열할 새롭지만 상당히 도발적인 길을 제공한다. 해러웨이는 우리의 현시대를 인류세로 부르기를 삼가하고 자신이 개념화한 쑬루[대지]세로 부르기를 선호하는데, 그것이 우리 시대를 인간과 비인간이 촉수적 실천들로 긴밀하게 연결된 시대로 더 적절하고 더 완전하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해러웨이의 설명에 따르면, 대지세는 오토-포이에시스[자기-생성]나 자기-만들기보다 공-산이나 함께 만들기를 필요로 한다. 손상된 땅에서 함께 살고 죽을 때 생기는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를 배우는 일은 살기에 더 알맞은 미래들을 건설할 수단을 제공할 사유방식에 더 좋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SF—실뜨기(string figures), 과학적 사실(science fact),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등등(so far)—라는 기표에 의해 이론적․방법론적으로 추동된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는 우리 시대의 가장 과감하고 독창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인 해러웨이의 명성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

 

차례

 

서론

1. 반려종과 실뜨기 놀이하기

2. 촉수적 사유: 인류세, 자본세, 대지세

3. 공-산: 공생발생과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의 생생한 예술 

4. 친족 만들기: 인류세, 자본세, 행성세, 대지세

5. 오줌으로 넘쳐나는: 다종 응답-능력에서 데스와 프레마린

6. 세계에 씨뿌리기: 땅의 타자들과 함께 땅을 변형하기 위한 씨주머니

7. 호기심어린 실천

8. 카미유 이야기: 퇴비의 아이들

 

-------------------------------------------------------------------

 

모든 기형족oddkin 중에서 친족을 만드는 이들에게 바칩니다.

 

 

 

 

감사의 말

 

수 년 간의 조리과정을 거쳐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만들어 준 동료, 학생, 친구의 퇴비 더미는 치열할 뿐만 아니라 잡다하게 뒤섞여 있고, 여러 지층을 가집니다. 이 책을 이루는 모든 생물군을 가득 채워준, 함께 생각하고 함께 느껴준 인간 및 비인간 생물체들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러스틴 호그니스, 수잔 하딩, 애나 칭, 스콧 길버트, 뱅시앙 데스프레, 이자벨 스텐저스, 브루노 라투르, 마릴린 스트래선, 존 로, 짐 클리포드, 케이티 킹, 크리스 코너리, 리사 로펠, 다이 징후아, 칼라 프레체로, 마리솔 델 라 카데나, Jenny Reardon, Beth Stephens, Annie Sprinkle, Helene Moglen, Sheila Namir, Gildas Hamel, Martha Kenney, Karen DeVries, Natasha Myers, Maria Puig de la Bellacasa, Megan Moodie, Margaret Wertheim, Christine Wertheim, 발 하토니, Michael Hadfield, Margaret McFall-Ngai, Deborah Gordon, Carolyn Hadfield, Thelma Rowell, Sarah Franklin, Marc Bekoff, 로지 브라이도티, Allison Jolly, Adele Clarke, Colin Dayan, Cary Wolfe, Joanne Barker, Kim TallBear, 톰 반 두렌, Hugh Raffles, Michael Fischer, Emily Martin, Rayna Rapp, Shelly Errington, Jennifer Gonzalez, Warren Sack, Jason Moore, Faye Ginsberg, Holly Hughes, Thyrza Goodeve, Eduardo Kohn, Beatriz da Costa, Eva Hayward, Harlan Weaver, Sandra Azeredo, Eric Stanley, Eben Kirksey, Lindsay Kelley, Scout Calvert, Kris Weller, Ron Eglash, Deborah Rose, 카렌 바라드, Marcia Ochoa, Lisbeth Haas, Eileen Crist, Stefan Helmreich, Carolyn Christov-Bakargiev, Sharon Ghamari, Allison Athens, Bettina Stoetzer, Juno Parrenas, Danny Solomon, Raissa DeSmet, Mark Diekhans, Andrew Matthews, Jake Metcalf, Lisette Olivares, Kami Chisholm, Lucien Gomoll. 이 동료들 모두는 이 책이 나오는 데에 있어 특별한 뭔가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내가 이름을 언급해야 할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나의 모교 산타크루즈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은 내 골수세포인 <생명 연구 센터vital research groups and centers>를 배양해 주었습니다. 우리 연구센터의 방문자들과, 우리 대학의 <문화연구센터>, <과학과 정의 연구 네트워크>, <신생 세계를 위한 센터>, <자본주의 문화의 위기에 대한 연구 크러스터>, <예술과 과학 연구소>, 그리고 의식사(史)학부 등이 이 책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를 심도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책의 대부분은 강연들과 워크숍에서 시작되었으며, 여기에 참여해준 이들은 분명하면서도 절묘한 방식으로 제 생각에 스며들었습니다. 그 중 특히 카비타 필립, 가브리엘 슈왑,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의 <비판이론연구소>, 그리고 2011년 ‘월렉’(Wellek) 강연의 기회를 준 콜롬비아 대학 출판부의 제니퍼 크루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지난 4년 간 저는 <세계짓기에 관한 글쓰기 워크숍>에 참여했으며, 이 워크숍에서는 글쓰기와 더불어 저의 난잡한 글에 대한 관대한 비평도 있었습니다. 수잔 하딩, 애나 칭, 케이티 스튜어트, 레슬리 스턴, 앨런 쉘튼, 스티븐 무에케, 로렌 벌랜트 등의 비평은 이 책에 실린 도형, 목소리, 이야기, 문헌들이 형태를 갖출 수 있게 도왔습니다.

 

뱅시앙 데스프레는 2010년에 ‘어떻게 우리가 다른 동물들과 함께 아는가’를 다룬 일주일 기간의 콜로키움에 저를 참석시키고자 노르망디에 있는 ‘쓰히시 코뮌’으로 초대해 주었습니다. 식사시간이 되자 스태프는 행사장에 무리지어 있던 우리들을, 여름을 같이 보낸 더 고지식한 인간주의 학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레자니모”(les animaux)[동물들]라 불렀었죠. 우린 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자벨 스탠저스는 2013년 여름 자신이 주최한 쓰히시에서의 일주일간의 콜로키움 “제스트 스펙큐라티프[사색적 몸짓]”(Gestes spéculatifs)에 다시 나를 초대했습니다. 이 사색적 구술 워크숍의 점심동안 나를 위한 별도의 행사가 있었습니다. 쓰히시에서 나와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이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의 모든 장에 함께 머물러 준 것이죠. 함께 한 이의 이름을 모두 언급할 순 없겠지만, 그 중 특히 조슬린 포르셰, 베네딕케 지토우니, 파브리지오 테라로바, 라파엘 라레르, 디디에 드바이스, 루시엔느 스트히베, 에밀리 아체, 마르셀 스트루방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일정 부분 쓰히시의 토론에서부터 성장해 간 저의 생각을, 2014년 리우 데 자네이로에서 개최된 행사인 <가이아/가이아의 천개의 이름들Gaia/Os Mil Nomes de Gaia>에 참석한 수천 개의 이름들이 다시금 지리학과 시간성 그리고 우리 시대의 인간 및 비인간들에 집중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가스뜨루, 데보라 다노브스키 그리고 줄리아나 파우스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마리솔 델 라 카데나는 자신이 개최한 2012년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대학의 무척 흥미로웠던 <원주민 코스모폴리탄 긴수염하늘소(Indigenous Cosmopolitics Sawyer)> 세미나에 두 차례 저를 참석시켰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동료 및 학생들, 그리고 마릴린 스트레선, 이자벨 스탠저스와 함께 할 기회를 얻어 너무 기뻤죠. 이 이벤트와 관련해 저는 조 듀밋, 킴 스탠리 로빈슨, 제임스 그리스머, 크리스티나 라이온스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산타크루즈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과 덴마크에서 진행된 저의 작업은 <덴마크 오르후스 대학 인류세 연구소>의 발효과정을 거치면서 제대로 모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소는 애나 칭이 생물학과 인류학의 핵심 연구원들과 함께 조직한 것입니다. 닐스 부밴트와 피터 풍크와 더불어 일레인 간, 히더 스완슨, 레이첼 사이퍼, 케이티 오버스트릿 등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대학 과학부 대학원생들과 교수님들은 2013년에 제 책에 특별히 시간을 할애해 주었으며, 특히 모니카 호프먼과 발 하토니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다종 생물 연구는 여러 형태로 전 세계를 에둘러갔으며, 특히 영국,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미국의 동물 연구가들, 환경학 연구자들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대체로 백인 영어권 사람들인 우리 모두가 서로 긴밀히 연결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불러온 트러블의 유산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처한 지구 생물들과 그 주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다시 느끼게끔 훨씬 더 잘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코스모폴리탄 동물들을 위한 모임’을 포함하는 영국의 동물 연구 네트워크 모임에 두 차례 초대받았으며, 이에 대해 에리카 퍼지, 도나 랜드리, 게리 마빈, 카오리 나가이, 존 로크, 린다 비르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애니 포츠, 톰 반 두렌, 데보라 버드 로즈, 레슬리 그린, 앤소니 콜린스와 그 외 사람들은 저로 하여금 “지구 남반구”에서 발생한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는 일이 “지구 북반구”의 오만함을 허무는 일을 도울 수 있음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한 북극 지역에 원래 살던 인간들과 비인간들의 탈식민주의 투쟁들에게는 이러한 “북”의 문제가 곧 “남”의 문제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저는 이 관점을 수잔 하딩에게 빚졌습니다.

 

SF인들은 작가들로서나 동료들로서나 이 책에서 결정적이 역할을 했는데, 그들 중에는 특히 어슐러 르 귄, 킴 스탠리 로빈슨, 옥타비아 버틀러, 본다 매킨타이어, 그웬스 존스, 줄리 크제르네다, 쉐릴 빈트, 마린 바, 샤 라 바, 이스트반 시저리-로너이, 헬렌 메릭, 마가렛 그레보비츠, 그리고 나와 늘 함께 해준 사무엘 딜레이니가 있습니다.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의 동료들은 저의 강연과 세미나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도 관대한 응답을 보내주었고, 이 책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로지 브라이도티, 피트 반 드 카, 아이리스 반 데어 튄, 토라 홀름버그, 세실리아 앵스버그, 울리케 달, 마리안느 리엔, 브리타 브레나, 크리스틴 아스달, 잉군 모저 등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에드먼턴 앨버타 대학에서 2014년에 개최한 리서치-크리에이션에 관한 방법론과 생태학의 싱크탱크는 저로 하여금 결정적인 시기에 책의 한 장을 다시 생각하게 도왔습니다. 저는 나탈리 러브레스와 그녀의 비정기적 동료․학생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또한 2013년 애리조나 주립대의 <인문학 연구소>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으며, <아메리카 종교 아카데미>의 2011년 모임에서 만난 로라 헙구드-오스터와 그녀의 동료들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에 관해 혁신적 사고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책의 퇴비가 된(Compost) 아이들은 2015년 6월 <문학과 환경을 위한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회합에 큰 빚을 졌으며, 언더그라운드에서 나온 주제 노트들, 즉 ‘환경예술, 환경문화, 환경정의의 깊이’와 더불어서 말이죠. 특히 애나 칭과, 나와 함께 터널을 통과해준 나의 파트너, 그리고 케이트 샌딜랜즈, 조반나 디 치로, T.V. 리드, 노엘 스터전, 산드라 코엘레 등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영리하고 기교가 있으며 또한 너그러운 사람들인 듀크 대학 출판부 켄 위소커와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올트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표합니다. 그들의 따뜻함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적 능력이 내가 이 책을 만들면서 버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블라인드 논평에서 날카롭게 지적을 해주었던 분들은 몇 가지 진짜 실수들을 할 뻔했던 상황에서 저를 구출해주었고, 또한 제 눈에 씌워진 눈가리개를 벗겨주었습니다. 그러한 논평자들의 광범위하면서도 대체로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작업이 없었다면 이 책의 학문적 모양새는 실패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Artwork Title: Donna Harraway (Joe Meiser의 작품)

 

 

 

 

서문

 

트러블은 흥미로운 말이다. 이 말은 “(문제를) 일으키는”, “혼탁한 날씨를 만드는”, “불안하게 만드는”의 의미를 가진 13세기 프랑스어에서 파생되었다. 우리—땅(Terra) 위에 사는 우리 모두—는 불안의 시대, 뒤죽박죽의 시대, 트러블이 일어나는 시대, 혼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온갖 종류의 무례함 속에서 서로에게 응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뒤죽박죽의 시대는 고통과 즐거움으로 흘러넘친다. 즉 엄청나게 불공정한 패턴을 띠는 고통과 즐거움으로, 그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는 불필요한 살인과 또한 꼭 필요한 회복/부활로 흘러넘친다. 우리의 과제는 서로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연결할 것인가와 나란히, 두꺼운 현재thick present 안에서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서로로부터 배우는 하나의 실천으로서 친족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트러블을 만드는 것, 파괴적인 사건들에 대한 강력한 반응을 서로 휘젓는 것뿐만 아니라 트러블을 일으키는 물에 거주하는 것, 고요한 장소를 다시 건설하는 것 등이다. 절박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대부분은 상상된 미래의 안락함을 만들려고, 다가올 미래에 닥칠 해프닝을 중단시키려고, 다음 세대를 위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말끔히 치워버리려고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는 미래라고 불리는 시대와 그런 식의 관계 맺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는 진정으로 현재에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을 요구한다. 끔찍한 과거냐 에덴동산의 과거냐, 종말의 미래냐 구원의 미래냐와 같은 사라질 문제로서가 아니라, 장소들, 시간들, 물질들, 의미들로 이루어진 무수한 미완의 배치와 얽혀 있는 필멸의 생물체로서 현재에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각주:1]

 

 

대지세(大地世)는 단순한 단어이다.[각주:2] 이것은 두 개의 그리스어(‘땅’을 의미하는 크톤khthôn과 ‘질적인 새로움’을 의미하는 카이노스kainos)에 뿌리를 둔 합성어이며, 손상된 땅에 대한 응답-능력[책임] 안에서 삶과 죽음의 트러블과 머무는 법을 익히기 위한, 일종의 시간장소timeplace를 지칭하는 말이다. 카이노스는 지금, 즉 시작의 시간, 현재 진행 중인 시간, 새로움을 위한 시간을 의미한다. 카이노스는 관습적인 의미로 쓰이는 과거, 현재, 미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전에 왔던 것이나 나중에 올 것을 청산하자고 주장하는 시작의 시간 안에는 어떤 것도 없다. 카이노스는 유산들, 회상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으며, 도래할 것, ‘여전히 무엇일 바의 것’을 길러내는 것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 나는 카이노스라는 말을 들으면, 진행 중에 있는 두꺼운 현재라는 의미에서 온갖 종류의 시간성들과 물질성들이 스며들어 있는 균류로 받아들인다. 

 

 

‘땅 속에 사는 것들’이란 오래되었으면서도 또한 최근에 생성된 대지의 존재들이다. 나는 ‘땅 속에 사는’ 것들을, 촉수, 더듬이, 손가락, 인대, 채찍꼬리, 거미다리, 그리고 제멋대로 난 털로 가득 찬 것을 상상한다. 땅 속에 사는 것들은 다쇄성 부식토(multicritter humus)에서 뛰놀지만, 하늘을 응시하는 인간과는 상대하지 않는다. 땅 속에 사는 것들의 최고의 의미는 괴물들이다. 땅 속에 사는 것들은 땅의 운동과정과 땅 속 생물체들의 ‘물질적인 풍부한 의미성’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수행한다. 땅 속에 사는 것들은 안전하지 않다. 그것들은 이데올로그들과는 상종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 것도 없는 것에 속한다. 그것들은 모든 대기에서, 물에서, 대지의 장소들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이름으로 온 몸을 비틀면서 세포를 증식한다. 그것들은 만들면서 동시에 만들지 않는다. 그것들은 만들어지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누군가’이다. 세계의 거대한 유일신 사상들이 종교적 가면과 세속적 가면을 쓰고서 거듭해서 땅 속에 있는 것들을 몰살하고자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류세와 자본세로 불리는 시대의 스캔들들은 이러한 몰살하는 힘들의 가장 최신의 힘이자 가장 위험한 힘이다. ‘대지세’에서 서로를 강력하게 살리고 죽이는 것은 인류와 자본 모두가 행한 지상명령에 맹렬하게 말대답(reply) 할 수 있다.

친족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야생의 범주이다. 친족을 왕족, 족보있는 가족, 유전자 가족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친족을 기형족으로 만드는 것이 중대한 트러블을 일으킨다. 누가 살고 누가 죽는가? 하나의 개체로서 보다는 이러한 친족 안에서 어떻게 살고 죽는가? 이러한 친족은 어떤 모양을 가지는가? 그것의 계열은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와 자신을 연결시키거나 연결시키지 않는가? 그래서 친족은 무엇인가? 다양한 생물종들이 땅 위를 떠다닌다면 무엇을 잘라야하고 무엇을 묶어야 하는가? 친족 안에 있는 인간과 인간 존재와는 다른 것을 포함해 무엇이 죽거나 살 기회를 가지는가?

 

이 책 어디에서 있는 형상은 SF이다.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 사색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실뜨기(string figures), 사색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과학적 사실(science fact) 등(so far). 이 반복된 목록은 이어지는 다음 페이지들에서 빙글빙글 돌며 고리를 만들어낸다. 즉 나와 나의 독자들을 위태로운 존재들과 패턴들로 엮는 말들과 시각적 상 안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과학적 사실과 사색적 우화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또한 둘 다 사색적 페미니즘을 필요로 한다. 나는 SF와 실뜨기들을 다음의 삼중의 형상으로 생각한다. 첫째, 조밀하게 엉겨있는 사건들과 실천들 안에서 섬유질을 난잡하게 뽑아내면서, 나는 그것들이 이끄는 실뜨기를 따르고자 한다. 그 실뜨기들을 추적하고, 그래서 실재적이고 특수한 장소 및 시간들 안에서 트러블과 함께 머무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그 실뜨기들의 얽히고 설긴 패턴을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점에서 SF는 흔적을 뒤따르는 방법이며, 어둠 속에서 그리고 위험하면서도 진실한 모험의 이야기 속에서 실을 따라가는 방법이다. 그러한 어둠 속에는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가 있으며, 또 다양한 생물종들의 정의를 배양하면서 더욱 분명해지는 방식이 있다. 둘째, 실뜨기는 추적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일인 응답을 간청하는 패턴과 집합(assembly)이며, 그 일은 혼자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가야만 하는 것이다. 셋째, 실뜨기는 지나치면서도 또한 받아들이기, 만들면서 만들지 않기, 실을 줍기이면서 실을 떨구기이다. SF는 실천이자 과정이다. SF는 놀라운 릴레이를 이루면서 서로와 함께 되기이며 대지세 안에서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일의 형상이다.

 

이 책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와 그런 방식의 생각은 특히 성급하게 두 가지 응답을 한다. 인류세와 자본세가 내는 공포의 울음소리가 너무 자주 들리기에 이런 응답을 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첫 번째 응답은 기술적 해결책에 대한 희극적 신앙(이것은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이다)을 묘사하면서도 그것을 기각시킨다. 테크놀로지는 자신의 버릇없음을 구원하는 데에 이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영리한 어린이들이 해낼 몫이다. 혹은 같은 말이겠지만 신은 테크놀로지의 불복종을 구원하겠지만 늘 희망은 어린아이들에게 있다. 기술적 해결책(혹은 테크노-재앙)과 관련된 그러한 감동적인 어리석음과 대면하면서 때때로 상황적인(situated) 기술 프로젝트 및 그 사람들을 끌어안는 일이 중요하게 남아 있다는 점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테크놀로지는 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트러블과 함께 머무는 데 있어, 그리고 기형족을 발생시키게 하는 데 있어 여러 중요한 일들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각하기가 더 어려운 두 번째 응답은 아마도 훨씬 더 파괴적인 것일 수 있다. 즉 ‘게임이 끝났다’, ‘너무 늦었다’와 같은 입장에 대한 응답이 바로 그것인데, 이런 입장에는 더 나은 어떤 것을 만들려고 애쓰는 어떠한 감각도 없다. 아니 적어도 그것은 세계 재생을 위해 작업하고 연주하는 데 있어 서로에 대한 어떠한 능동적 신뢰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알기에 일부 과학자들이 이런 식의 냉소주의를 표한다. 실제로는 그들이 사람들과 다른 생물체들을 위해 긍정적 차이를 만드는 데 아주 열심히 일한다고는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을 비판적 문화이론가나 정치적 진보론자로 묘사하는 몇몇 사람들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표현한다. 나는 집요한 열정적 힘과 스킬을 가지고 다양한 생물종을 배양하는 일을 실제로 행하고 작업하는 기묘한 짝짓기에 대해 생각한다. 그에 반해 솔직하게 ‘게임이 끝났다’는 태도를 표현하는 일은 다양한 미래주의를 촉진할만한 이들, 즉 학생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을 좌절시킬 수 있고 또 좌절시킨다. 그것은 ‘만일 그들이 문제삼는 일이 벌어지기만 한다면, 혹은 더 나쁘게는 나와 나의 동료 전문가들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문제되는 어떤 일을 딱 맞게 해낸다면’ 식의 일종의 상상처럼 보인다. 더 너그럽게 표현한다면, 생각하고 읽고 연구하고 주장하고 돌보는 일을 하는 과학자들 및 여타의 사람들은 너무 많이 알아서인지 그래서 [몸이] 너무 무겁다. 혹은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인류를 포함한 대지의 생명이, 관용적인 방식으로 말해도, 실제로 끝장났다고, 실제로 파국에 거의 도달했다고 결론짓기에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지구의 6번째 대멸종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치열한 전쟁 및 멸종의 한복판에서, “이윤”이나 “권력”이라고 불리거나 “신”이라 불리는 어떤 것으로 인해 수십억명의 사람들 및 여타 생물체들이 비참을 겪는 한복판에서 엄청난 느낌을 갖게 만든다. ‘게임이 끝났다’는 태도는,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구수가 2100년경에는 110억 명을 넘어설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식의 ‘느낌의 강력한 바람’gale-force winds of feeling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킨다. 이러한 형상은 1950년에서 2100년의 150년 동안 90억 명이 증가할 것으로 나타난다. 빈자와 부자에게 엄청나게 불평등한 결과를 야기하면서—빈자와 비교되는 부자에 의해 지구에게 엄청나게 불평등한 부담이 지워진다는 것은 고사하고서도— 말이다. 그리고 비인간들에게는 훨씬 더 최악의 결과가 있으리라는 것이 거의 모든 곳에서 보인다. 심각한 현실을 알려주는 여러 다른 사례들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시기의 엄청난 가속도는 지구의 바위, 물, 상공, 생명체들에게 그 표식을 남긴다. 트러블들의 심각성과 그 정도를 인식하는 일과, 추상적인 미래에 굴복하고 숭고한 절망의 정동 및 숭고한 무차별의 정치에 굴복하는 일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

 

이 책은 그런 미래주의를 피하면서 트러블과 함께 머무는 것이 더 진지하고 더 생생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또 그것을 수행하고자 한다.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는 기형족을 만드는 일을 요청한다. 즉 우리는 예측되지 않는 협력 및 조화 속에서, 뜨거운 퇴비 더미 안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서로 함께 되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런 식의 유물론적 기호학은 항상 어떤 장소someplace에 있으면서 무-장소noplace에는 있지 않으며, 얽기 설기 있으면서 세상 속 어딘가 위치해 있다. 우리의 분리된 종류의 전문지식과 경험 안에 홀로 떨어져 있는 우리는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또 너무 적게 알고 있다 보니 절망이나 희망에 쉽게 굴복한다. 절망이나 희망 중 어떤 것도 감성적인 태도는 아니다. 절망이나 희망은 모두 두꺼운 공-현재copresent에서 감각들, 마음을 쓰는 물질, 물질적 기호들, 필멸의 지구인들로 바뀌지 않는다. 절망이나 희망은 모두 우리에게 「반려종과의 실뜨기 놀이」(이 책 1장 제목이다)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는 3개의 긴 장으로 시작한다. 각 장은 대지세에서 친족을 만들기 위한 이야기들과 형상들을 추적하는데, 이는 인류세와 자본세와의 유대를 끊기 위한 것이다. 비둘기들이 1장의 안내자들이다. 비둘기들은 세상 속에서 다양한 모습을 지니는데, 여기에는 제국의 피조물에서, 일하는 남성들의 경주 새, 전쟁 스파이, 과학적 탐구의 파트너, 3개 대륙에 걸친 예술 액티비즘의 협력자, 도시의 동반자이자 도시의 유해동물 등의 모습이 있다.

 

비둘기들은 그들의 고향의 역사들을 통해 「촉수적 사유」(2장의 제목이다)의 실천으로 이끈다. 여기서 나는 개인주의가 그것이 지닌 다양한 맛으로, 즉 과학, 정치학, 철학으로 경계 지어진다는 주장을 확장해 그것이 ‘함께 사유하는’ 데에는 어떤 쓸모도 없게 되었다고, 말하자면 더 이상 진정으로 사유할만하다거나 기술적으로나 그 밖의 다른 어떤 방식으로 쓸데가 전혀 없게 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공-산(sympoiesis), 즉 함께-만들기가 이 장 전체의 키워드인데, 그래서 나는 이 선물을 이론가들과 스토리텔러들이 제공한 필수적 사유로 탐구한다. 과학분야, 인류학, 스토리텔링에서의 나의 파트너들—이자벨 스텐저스, 브루노 라투르, 톰 반 두렌, 애나 칭, 마를린 스트래선, 한나 아렌트, 어슐러 르 귄 등—은 이 ‘촉수적 사유’를 하는 내내 나와 동행했다. 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이 책의 3개의 시간풍경인 인류세, 자본세, 대지세를 도입한다. 이 2장은 ‘태평양에 사는 문어’Pacific day octopus와, 동물들의 여주인으로 형상화되며 유일하게 필멸하는 고르곤인 [각주:3]메두사와 동맹을 맺어 궁지를 벗어나는 것으로 끝맺는다.

 

 

3장 「공생발생Symbiogenesis과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의 생생한 예술」은 생태계의 진화․발전론적 생물학 안에서, 그리고 트러블이 일어나는 4개의 아이콘적 장소들에 헌신했던 예술/과학 액티비즘들 안에서 공-산의 실뜨기를 뽑아낸다. 그 장소는 (1) 산호초 생물군, (2) 원주민들에게 특히 엄청난 영향을 주는 나바호족[각주:4]의 ‘블랙 메사 석탄지’, 호피족[각주:5] 거주지 및 그 밖의 화석 연료 추출지들, (3) 마다가스카라의 여우원숭이의 집단서식지, (4) 빠르게 녹고 있는 얼음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신식민지들과 구식민지들에 종속된 북아메리카의 북극지역과 북해 등이다. 이 장은 다종성을 부활시키려는 생물학, 예술, 액티비즘의 정력적 활동에 화답하는 실들로 실뜨기를 한다. 나바호족의 추로 양, 난초, 멸종한 벌들, 여우원숭이, 해파리, 산호충, 바다표범 그리고 미생물들은 이 3장 곳곳에서 그들의 예술가들, 생물학자들, 활동가들과 함께 주인공 역을 맡는다. 이 장에서, 그리고 이 책의 모든 곳에서 돌보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창조력이 그 행동에 생명력을 준다. 여러 부류의 파트너들과 갈등하면서도 협력하는 오늘날의 원주민들이 감지할 수 있는/감성적인sensible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린 마굴리스로부터 시작하는 생물학자들의 이야기가 이 3장의 사유와 놀이에 스며있다.

 

 

4장 「친족 만들기」는 인류세, 자본세, 대지세의 시간풍경의 반복이자, “아기들을 만들 것이 아니라 친족을 만들자”는 호소이다.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반인종주의자, 반식민주의자, 반자본주의자, 퀴어 친화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오랫동안 성해방과 재생산권 운동의 지도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빈자들과 주변화된 사람들에 대해 재생산 및 성적 명령이 가하는 폭력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페미니스트들은 성과 재생산의 해방이 아이들(그들 자신의 아이든, 다른 이들의 아이든)을 온전한 공동체들에서 건강하고 안전하게 건전한 성인으로 길러낼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하는 지도자들이었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여성, 청년 혹은 노인의 권한과 권리를 강조하면서 아이를 갖지 않는 선택을 한 역사적으로 유일한 이들이었다. 그러한 입장이 제국주의의 오만을 얼마나 쉽게 반복하는지를 인식하면서도, 나와 같은 신념을 가진 페미니스트들은 모성이 여성들의 목적이 아니며, 여성의 재생산 자유가 가부장제나 그 밖에 다른 체계의 요구를 능가한다고 주장한다. 식량, 직업, 주거, 교육, 여행의 가능성, 공동체, 평화, 자기 몸의 통제, 누군가와의 친목/성행위intimacy, 건강 돌봄, 이용이 가능한 여성친화적 피임(이것은 아이를 낳을지와 낳지 않을지를 모두 포함한다), 기쁨 등, 이것들,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이 성적 권리이고 재생산권이다. 이것들의 부재가 전 세계에 만연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내가 아는 페미니스트들은 탁월한 이유를 들어 인구통제의 언어와 정책들에 저항해왔다. 왜냐하면 인구통제의 언어와 정책들은 명백히 그 관점상 여성들의 복지 그리고 그들이 돌보는 사람들인 노인과 청년의 복지보다는 생명정치적 국가biopolitical states에 대한 이해관계를 갖는다. 인구통제 관행에서 스캔들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내 경험상, 페미니즘 과학연구, 페미니즘 인류학자들을 포함한 페미니스트들은 인구수의 엄청난 가속화에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인종주의, 계급주의, 민족주의, 근대주의, 제국주의의 똥더미에 빠져들까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1950년 이래로 인구수의 이해할 수 없는 증가라는 급박함을 회피하는 것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기후변화의 급박함을 회피하는 방식과 유사한 어떤 것으로 빠져드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신념과 짝을 이루는 것을 너무 가까이에서 건드리기 때문이다. 급박함에 어떻게 문제를 제기할 것인가는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를 위해 불태워져야만 하는 질문이다. 위험하게 트러블을 일으키는 다종성의 세계에서 탈식민주의적인 페미니즘의 재생산 해방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인간주의적인 사안일 수 없으며, 그런 일은 반제국주의, 반인종주의, 반계급주의, 그리고 퀴어 친화적인 여성인지 어떤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것은 또한 주로 추상적 수들이나 빅데이터를 다루는 “미래주의적” 사안일 수도 없다. 그것은 현실적인 사람들의 차별화되고 층이 나눠진 삶과 죽음은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50년 동안 90억 명의 인구가 늘어났다는 것, 2100년경에는 110억 명의 수준에 도달하리라는 것(그것도 우리가 운이 상당히 좋다는 전제 하에서 성립되는 말이다)은 단지 숫자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자본주의Capitalism나 그 밖에 대문자로 시작하는 다른 말을 비난함으로써 멀찍이 떨어져서는 설명될 수 없다. 역사적 지위와 일종의 지식 및 전문성의 차이들을 가로질러 새롭게 함께 생각하는 일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5장 「오줌으로 넘쳐나는」은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에서 시작한다. 이 관계는 노령의 여성과 그녀의 늙은 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와 나의 반려종이자 연구동료인 [셰퍼드 종인] 카옌을 연결하는 에스트로겐에 뒤따라 나온 결과들로 풍성하다. 실뜨기의 실이 멀리 추적되기 전에, 한배에서 나온 그들의 사이보그 쌍둥이를 회상하면서, 여성과 개는 그들 자신을 수의학 연구, 거대한 제약회사, 에스트로겐을 위해 길러진 말, 동물원, DES 페미니즘 활동가들의 역사 안에서 발견한다. 이 역사는 동물권 운동과 여성 건강권 운동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것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세계의 급박함들에 응답할 능력을 배양할 수단인 특수한 몸들과 장소들에 치열하게 거주한다는 것이 이 장의 핵심 주제이다.

 

어슐러 르 귄, 옥타비아 버틀러, 그리고 개미들과 아카시아나무 씨가 6장 「세계에 씨뿌리기」에 거주한다. 6장의 과제는 주인공들인 아카시아들과 그들의 동료들로 이뤄진 SF 모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르 귄의 캐리어가방 구술론(carrier bag theory of narrative)이, 개미의 상호작용 및 군집행동을 다룬 생물학자 데보라 고든의 이론과 나란히, 최고의 이야기들에 틀을 부여하기 위한 생태적인 진화․발전론적 생물학과 비위계적 체계론의 가능성들을 구원하기에 이른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가능성들을 세련되게 가다듬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상과학과 과학적 사실은 이 이야기 안에서 행복하게 함께 거주한다. 르 귄을 자신들의 필경사로 쓰면서, 아카시아 씨의 산문과 이끼들의 노랫말은 마지막 구절들에서는 바위들의 무언의 시들에게 자신이 있던 자리를 내준다.

 

7장 「호기심어린 실천」은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이며, 또한 동물-인간 학생이면서 문화이론가인 뱅시앙 데스프레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녀가 다른 존재들(그것이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상관없이)과 함께 생각하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만남들에서 서로 예측되지 않는 솜씨를 보일 수 있게 해주는 조율에 대한, 그리고 생물체에 대한 데스프레의 작업은 트러블과 함께 머무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다. 그녀는 ‘본성상 혹은 교육을 받아서, 뭔가를 해낼 수 있다고 상상되는 생물체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본성이나 문화 안에서 정말 전에는 거기에 없었던 서로로부터 떠올리게 되는 존재 그리고 서로를 떠올리는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그녀의 사유방식은 모든 참여자들의 능력을 확장시킨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세계짓기 실천이다. 인류세, 자본세, 대지세의 급박함들은, ‘넘어서기의 사유’ 방식이 편안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범주/유형들과 능력들을 물려받았기를 요구한다. 마치 아라비아의 수다쟁이들과 그 과학자들이 네게브 사막에 도달했을 때 봤던 온갖 종류의 사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데스프레는 죽은 자를 활동적인 현재로 옮겨다놓음으로써 그들을 애도하는 방법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나는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의 결론부 이야기를 작성하기 전에 그녀의 어루만짐을 필요로 했다. 그녀의 호기심어린 실천은 나로 하여금 퇴비 공동체들과 죽은 자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지닌 과업에 관하여 쓰게 만들어주었다. 그 과업이란 지구의 다종성을 회복하고 부활시키는 작업이다.

 

이 책은 마지막 장 「카밀라 이야기: 퇴비의 아이들」로 끝맺는다. 이와 같은 집단적인 사변적 우화로의 초대는, 멕시코, 미국, 캐나다의 곤충 이주의 여러 선들과 마디를 따르면서, 다섯 세대에 걸친 인간 아동과 왕나비의 공-생물발생적 결합을 추적한다. 이러한 곤충 이주의 선들은 사라짐의 가장자리에 있는 생물체들의 삶과 죽음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회체들과 물질성들을 추적해 그들이 가고 있는 길을 추적한다. 응답하는 능력을 키우고, 또한 서로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길을 닦는 데 헌신했던 퇴비 공동체들은, 첫 2500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폐허가 되어버린 육지와 하수 위에 나타났다. 이 공동체들은 근본적으로 수백 년간 인간의 수를 줄이는 데 조력했으며 그러는 동안 무수한 부류의 생물 종 다양성의 환경정의를 실현하는 실천들이 발전했다. 새롭게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적어도 세 부류의 인간 부모들을 가졌다. 아이들을 위해 동물 공생자의 선택에서, 즉 모든 종들의 전체 세대를 가로질러 갈라져나온/분기된 선택에서 재생산 해방을 실행했던 임신한 부모. 공-생물발생적인 사람과 그와 결합되지 않은 인간들의 관계는 많은 놀라움을 자아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죽었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깊은 놀라움은, 대지의 생물군들을 가로질러 공-영혼발생적(symanimagenic) 복합체 안에서 맺어진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로부터 나온 것일지 모른다. 

 

수많은 트러블, 수많은 친족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1. ‘생물체’로 번역한 크리터스Critters는 말썽을 일으키는 온갖 종류의 야생동물을 지시하는 미국인의 일상적 관용구이다. 과학자들은 항상 그들의 “크리터스”들에 대해 말하며, 미국 전역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도, 그 중에서도 특히 남부 지역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피조물”과 “창조”라는 말이 가진 오점은 “생물체/크리터스”에 들러붙어 있지 않다. 만일 당신이 기호학적 따개비를 발견한다면, 그것을 벗겨내시라. 이 책에서 “생물체/크리터스”는 다음을 난잡하게 지시한다. 미생물, 식물, 동물, 인간, 비인간, 그리고 때로는 기계도.  [본문으로]
  2. 대지세[쑬루세](Chthulucene)의 철자를 어떻게 써야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그로 인해 그것은 쑬루Chthulhu가 맞냐 크틀후Cthulhu가 맞냐와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다양하고 거만한 땅속 가분체dividual나 역량을 지시하는 것으로 혹은 여러 다른 독신 괴물이나 신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스 철자를 까다롭게 쓰는 사람은 철자의 마지막 “l”과 “u” 사이에 “h”를 발음해야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영어 발음도 그렇고, 또 러브크래프트의 ‘크툴후Cthulhu’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듯 철자 “h”를 누락시켜서 읽는다. 이런 것이 바로 어형변이metaplasm이다. [옮긴이] 러브크래프트(1890-1937)는 크틀후의 부름(The Call of Cthulhu)이라는 SF 공포판타지 시리즈물을 쓴 바 있다.  [본문으로]
  3. [옮긴이] 고르곤(Gorgon)(그리스어에서는 “끔찍한 것들” 또는 “크게 소리치는”의 의미를 가진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포르퀴스와 케토가 낳은 세 명의 자매 괴물의 이름이다. 세 자매의 이름은 각각 ‘스텐노’(힘센 여자), ‘에우뤼알레’(멀리 떠돌아다니는 여자) 그리고 ‘메두사’(여왕)이다. 고르고 세 자매 중 스텐노와 에우뤼알레는 불사(不死)의 몸이다. 그들은 서쪽의 땅, 오케아노스의 저편에 헤스페리데스들이 있는 곳 땅 끝에 살았으며, 머리털은 살아있는 뱀이며, 몸은 용의 비늘로 덮여 있었다. 황금 날개를 달고 있었다고도 한다. 이들의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이나 동물은 모두 돌로 변해 버린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4. [옮긴이] 나바호족(Navajo)은 미국의 남서부 지역에 거주해온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 부족으로, 미국 내 원주민 부족 중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한다. 이 지역은 애리조나주의 북동부, 뉴멕시코의 서북부와 유타의 남동부가 포함되며, 높은 고원지대에 형성된 평평한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으로]
  5. [옮긴이] 호피족(Hopi)은 미국 내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미국 애리조나주 북동부의 푸에블로 인디언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댓글 로드 중…

최근에 게시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