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fting the Subject : 1993년 4월 12일 캘리포니아주 샌타크루즈, 쿰쿰 바브나니와 도나 해러웨이의 대화
(기록자: 저스틴 마이어스)
번역백소하
장주연
감수이은솔
도나 해러웨이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크루즈 캠퍼스에서 페미니즘 이론, 기술 과학의 문화 및 역사적 연구, 여성학을 가르친다.
Crystals, Fabrics and Fields: Metaphors of Organcism in Twentieth Century Developmental Biology(Yale University Press, 1976),Primate Visions: Gender, Race, and Nature in the World of Modern Science(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1989; London: Verso, 1992), andSimians, Cyborgs, and Women: The Reinvention of Nature(New York: Routledge and London: Free Association Books, 1991)을 썼다. 현재Worldly Diffractions: Feminism and Technoscience라는 책을 쓰고 있다.
쿰쿰 바브나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바바라 캠퍼스에서 사회학과 조교수이다. 문화 연구, 페미니즘 이론, 인식론, 사회 심리학을 가르치며, 이상의 영역 전부에 관해 글을 쓴다. 바브나니의 책 『정치 이야기(Talking Politics)』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에서 1991년에 출판되었다.
해러웨이: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인 것 같아요. 당신 자신의 이야기는 이 컨텍스트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말씀해주세요.
쿰-쿰: 전 항상 제가 영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가족은 1958년, 제가 7살 때 영국으로 이주했어요. 사실 전 인도에서 살았던 기억이 거의 없어요. 짧게 부분적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죠. 엄마, 아빠, 두 언니, 그리고 전 런던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7살 때 전 런던 남서쪽에 위치한 햄스테드라는 도시에 있는 여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어요. 전 학교에서 서너명의 흑인 여자아이들 중 한 명이었죠. 대략 1962년에서 1968년쯤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1968년에 전 아메리칸 필드 서비스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미국(뉴욕주의 버팔로라는 도시예요)에 왔죠. 미국에 간 것은 이주가 아닌 또 다른 국제적 이동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메리칸 필드 서비스 프로그램을 통해 전세계에 있는 16살 청소년들이 미국에 와서 미국인 가족들과 함께 머물며 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전 영국에서 준사립 여학교를 다녔어요. 학생들의 3분의 1이 장학금을 받고 다녔죠. 제가 미국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일반 종합 중등학교를 경험하고 싶어서였어요. 예를 들어 제 언니 둘은 지역의 일반 공립 중등학교에 다녔거든요. 전 항상 일반 공립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을 부러워했죠. 근데 아메리칸 필드 서비스 프로그램에서 절 또 사립 여학교에 배정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영국으로 이주하고 성장한 배경 때문에 1960년대 후반 버팔로에서 정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968년 제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마이애미와 시카고 공성전 (Miami and the siege of Chicago)이 일어났었죠. 1968년 11월에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요. 당시 제가 다녔던 학교에는 유색인종 여학생 두 명이 더 있었어요 (세어보지는 않았지만요 ‘다른 인종’이라고 말 할 수 있어요). 둘 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었고 미국계 흑인 학생들이었어요. 전 이 두 여학생들과 친하게 지냈죠. 1968년엔 버팔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제가 인도인이라는 점에 흥미를 가져서 저 스스로 굉장히 놀랐던 시기였어요. 많은 미국인들이 인도를 이국적 대상으로 여겼고, 동양을 에로틱하게 상상하며 아시아를 떠올리며 저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고 지금은 설명할 수 있겠네요. 그때 전 그런 어휘들 또는 그런 인종화되고 대상화된 범주들을 몰랐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절 영국 억양을 가진 인도(동양)에서 온 젊은 여성으로 여겼다는 것만 떠올라요. 물론 모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만요!
전 영국에서 인종화되는 방식으로 미국에서 인종화되지 않았어요. 미국에서 전 흑인이 아니었어요. 영국에서 흑인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과 달랐죠. 하지만 전 같은 반 흑인 여성 두 명이 겪는 경험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가 똑같이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친구들이 겪고 있었던 인종차별을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요.
7살에 영국으로 이주하고 16살에 미국에 있었다는 것은 제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예요. 전 ‘A’레벨을 공부한 후 브리스톨 대학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아주 빨리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죠. 브리스톨에서 살기 시작한 첫 세 달 동안 폐기물 수집 노동자들과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을 시작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폐기물 수집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폐기물 수집 노동자들은 우리 대학에서 이들을 지지하는 수위들과 같은 노동조합에 속해있기 때문에 저 역시 이 파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어요. 수위들이 폐기물 수집 노동자를 지지하는 뜻으로 학교 건물을 여는 것을 거부했죠. 학생회는 이런 수위들을 지지할 지 의견이 분분했어요. 장시간 회의를 하면서 어떤 학생들은 수위들의 파업은 우리들과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다른 학생들은 대학도 브리스톨 지역 사회의 일부이고 지역 사회 구성원 일부가 파업을 하기 때문에 우리들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죠. 이땐 1970년대 브리스톨이었어요. 제2물결 영국 페미니즘이 시작되고 있었던 시기였죠. 하지만 제가 페미니스트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때는 1973년 노팅엄 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브리스톨 대학에서 3년제 우등코스로 심리학을 전공했고, 부전공으로 철학, 정치학, 사회학을 공부했어요. 2학년 때 젠슨의 하버드 교육 리뷰 논문을 접하게 되었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분명히 이해한 점은 젠슨이 흑인은 백인보다 지능이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인종주의적 관점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좀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A’레벨 생물학을 공부한 저는 젠슨의 논점이 잘못된 것이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전 그 이상은 몰랐어요. 그런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어요. 전 교수님에게 수업시간에 젠슨 논문을 살펴볼 수 있는지 여쭤봤어요. 흠, 그건 방정식이 가득한 200페이지 논문이었어요, -기본적으로 복잡하고 따분한 논문이죠- 그리고 교수님은 제게 ‘나보고 이 논문을 읽고 수업시간에 다루라고?’라고 물으셨어요. 저는 ‘예,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라고 부탁을 했어요. 교수님은 제가 그런 부탁을 한 것에 놀라셨던 것 같아요. 전 좌파적 성향을 갖고 있었는데 인종주의 심리학자인 젠슨이 쓴 글을 읽고 싶어 했기 때문이죠. 제 부탁을 들어주신 피터 파우스랜드 교수님께 매우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그분 덕분에 젠슨이 심리학 안과 밖에서 무엇을 주장하는지 잘 알게 되었고 그의 잘못된 논점을 반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가령, 지능(Intelligence)이 지능지수(IQ)와 동일시되는 경우를 너무 자주 봤어요. 몇몇 심리학자들이 이것의 잘못된 점을 경고하며 연구를 했는데도요. 지능지수에 대한 추측 중 하나는 가우스분포를 기준으로 사람들의 지능지수를 계산하는 것이예요. (가우스 분포는 ‘정상’이라고 불렸어요--이 부분에 관한 논문들이 많이 씌여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일부 또는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중간 정도의 특성을 지니고 있죠. 하지만 이 추측, 즉 일상생활에서 지능을 이해하는 데(지능지수가 아니고요) 앞서 설명한 추측(가우스분포 기준)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그저 추측일 뿐이에요. 이런 추측이 일반화된 이유는 지능지수/지능이 유전적으로 통제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죠. 제가 알고 있는 한 가우스분포 기준을 나누는 과정은 지능지수/지능이 유전적으로 통제된다는 가정을 내포하고 있어요. 지능지수를 측정하는 수단들은 그런 추측을 반영하고 있죠. 사람들의 지능지수점수가 측정될 때 한 개인이 가우스 분포를 얻게 됩니다. 이 분포는 지능지수/지능이 유전적으로 통제된다는 것을 설명할 때 사용됩니다. 이것은 역사적 시야를 읽는 것이죠. 즉, 지능지수를 재는 수단은 (한 인구/인종 집단의)유전적 통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념들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어요. 그래서 지능지수/지능에 대한 추측이 지능에 관한 사실로 알려졌어요. 교묘한 속임수죠. 지금도 전 지능이 왜 측정되어야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지능을 측정하는 것은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에 관한 의문은 심리학계 내에서도 지능에 관한 논의를 하는 학자들이 피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당시 전 ‘유전과 환경’ 또는 ‘본능과 양육’(이 용어들은 당시 통용되고 있는 것이에요)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을 하게 되었어요. 지능에 관해 생각하며 앞서 언급한 각 용어의 의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이건 아마도 제 관념을 해체했던 첫 번째 과정인 것 같아요. 당시 전 그런 해체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들을 몰랐지만요.
제 이야기를 듣고 계셔서 아시겠지만, 젠슨의 논문을 읽고 잘못된 점을 알게 된 것은 제가 지적으로 발전하는데 아주 중요한 계기였어요.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주장의 논점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죠. 또한 제가 동의하는 논점들을 어떻게 토론해야하는지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영국으로 이주한 것,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과 젠슨의 논점에 드러나 논점들을 반박하고 뒤집는 것은 1970년대 초반을 살아가던 제게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었죠.
학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후 노팅엄 대학에서 석사로 아동청소년 교육 심리학을 공부했어요. 당시(1973-74) 전 페미니스트 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죠- 특히 여성과 생산 수단에 관련해서 고민했고 여기서 가사노동과 여성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어요. 당시 여성과 노동에 관련된 문제의식을 다룬 글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전 열심히 읽었어요. 예를 들어 가사노동에 관한 논쟁(코울슨 등등, 1975)이 이 당시에 활발하게 논의되었죠. 그리고 전 영국에 있는 리즈 폴리텍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전 23살에 고등교육기관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전 아주 다양한 일을 했어요. 리즈 폴리텍에서 일을 그만두고 셰필드에서 교육 심리학자로 일을 했어요. 셰필드에서 일을 그만 두고 방송대학에서 12개월간 인종 교육 관계 교육 프로젝트 담당자로 일을 했죠. 그땐 1979년 9월이었어요. 전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하기 시작했어요. 노동조합과 지역단체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반인종차별주의에 관한 자료들을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일을 시작하기 6개월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제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목표를 실행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어요. 1979년 5월에 마가렛 대처가 수상으로 당선되었죠. 그리고 보수당은 집권 초기에 교육분야에 할당된 공공지원금을 삭감하기 시작했어요. 또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담당자들 사이에서 사소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죠--예를 들면 이 프로젝트에서 제가 학교 직원들에게 주어진 동일한 고용기간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해서요. 이 문제는 대학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모든 연구자들의 고용조건을 악화시키는 것이었죠. 이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 정확히 12개월 후, 제가 29살이 되던 때였죠. 전 프레스톤 폴리텍의 발달심리학과에서 전임강사로 발탁되었어요. 전 이 일을 하기로 결심했죠. 전 인종 관계 교육 프로젝트가 자리 잡힐 수 있게 만들었고 이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는 기금도 마련했어요. 당시엔 다른 일을 새로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어요.
전 프레스톤 폴리텍에서 아주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곳에서 일하면서 전 매그 코올슨과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죠. 제가 속한 학과에는 12명의 강사들이 있었는데 제가 유일한 여성이었어요. 그리고 대학에서 일하는 유일한 유색인종이었죠. 대학에서 일하는 직원들(기술자들을 포함해서요)은 모두 백인여성이었어요. 한 명만 제외하고요. 그리고 이 대학에서 최소한 학생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백인이었어요. 당신도 알고 있듯 전 아주 많은 일을 하고 있었죠. 1982년 어느 시점에서 전 <전생애발달심리학 (Life Span Development Psychology)>에 관한 강의 계획서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제 강의 계획서를 본 몇몇 강사들이 심리학과 교육과정에서 ‘인종’, 젠더, 계급을 가르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어요. 그때 전 아주 큰 충격을 받았죠--전 그 누구도 인간의 경제, 사회, 정치적 불평등을 이해하지 않은 채 인간의 심리발달을 논의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1983년 파시스트 단체의 정식회원으로 가입된 학생 한 명이 제 수업을 듣고 있었어요. 학생들과 전 아주 복잡한 권력관계에 놓여 있었죠. 학교라는 공간이 준 권위를 가진 흑인여성 교수였지만 제가 가진 권위는 수업시간에 학생이 파시스트 논리를 펼치면 잠재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었죠. 당시 흑인여성교수로서 제 상황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야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죠. 제가 그 남학생의 인종차별주의적 태도에 대해 지적했을 때 그는 제게 자신의 발언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다고 비난했어요. 여성-남성, 흑인-백인, 선생님-학생의 관계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불평등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죠. 그때는 이런 상황들을 대처하는 방법들이 폭넓게 이야기되지 않았어요--그땐 영국 고등교육기관에서 일하는 흑인여성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적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는 1983년에 프레스톤을 떠나 박사학위를 시작하기 위해 캠브리지로 갔어요. 전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를 했죠--캠브리지 대학은 엘리트 기관이죠. 전 흑인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엘리트 대학의 학생이 되었어요.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아주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어요. 제 지적 능력을 시험하는 아주 많은 어려움을 겪었죠. 매번 제 자신을 설명하도록 강요받기도 했고, 단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저의 지성적 위치를 설명하도록 강요받기도 했어요. 전 평생 전임강사직을 그만두고 학생이 되었거든요.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후 브래드포드 대학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했어요. 그리고 보벨린 대학에서 1년간 (1989-90) 강의를 한 후 1991년에 산타 바바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왔어요.
저는 1970년 이후 활발하게 정치적 활동을 했어요--노동조합, 반인종차별주의와 흑인 단체, 그리고 여성 단체에서 말이죠. 이런 단체들은 거의 함께 협력하지 않았어요. 저희들 중 몇몇은 여러 단체들이 함께 일하는 것을 시도했지만요. 저희들은 흑인여성으로서 이 일을 시작하고 있었어요. 예를 들어, 1978년에 전 페미니스 학회에서 발표했던 여성운동에서 인종차별을 프라티바하 파르마와 함께 논문을 썼죠.
정리해서 말하자면, 학계에서 인종, 젠더, 계급의 교차점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7살에 영국으로 건너간 이민자, 1968년에 미국에 간 것, 브리스톨에서 참여한 파업, 젠슨학파의 이론을 반박한 것, 30대 중반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시작한 것, 그리고 제 개인적 정치적 관심은 오늘날 저의 지적 관심과 희망을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이정표(markers)가 되었어요.
지능
쿰-쿰: 심리학 내부에서도 수많은 전환들이 있었죠. 그 중 일부는 좀 있다 우리가 다룰 텐데, 제가 보기에 지능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전환도 없었어요. 젠슨과 아이젠크(Jensen and Eyesenck, 1971)가 내린 인종차별적인 결론에 대항하는 운동이 20년 전에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지능이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식들을 약화시킬 필요에 관해서는 진보적 인사들 사이에서조차 마치 사회적인 기억 상실증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어요. 이런 정당화는 사람들에게 깃든 매우 가치 높은 특성인 지능이라는 개념이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불평등의 탄생 그리고/혹은 영속화를 설명할 때, 종속적으로 배치된 사람들의 합리성과 능력을 부정하면서 이루어지죠. 그러니까, 많은 주장들이 사람을 설명할 때 지능의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는 거죠. ‘똑똑’한지 아닌지, ‘영리’한지 아닌지,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지능적’인지 아닌지로요. 그렇게 되면, 불평등에 대한 분명한 설명으로 지능을 사용하는 건 인종화된 불평등에 관한 논의를 회피하는 걸 허용하게 되죠. 제 말은, 민족화되고 인종화된 특정 집단들에 관한 정형화된 정의에 지능이 기입되어 있어서, 이 집단들은 지능을 가졌냐 안 가졌냐로 정의된다는 거죠.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대학원에 들어오거나 대학에서 일자리를 주기에는 ‘머리가 충분히 좋지’ 않다고 주장하면, 이 ‘머리가 충분히 좋지 않다’는 설명은 이 사람이 이 기관에 들어가는 게 왜 허용되지 않는지를 설명하라는 요구가 없도록 보장한다는 거죠. 제가 지금 짜맞추는 주장이 꽤 단순한 건 알지만, 전 지능이야말로 합리성과 능력에 관련된 담론들을 사용해서 인종화되고 젠더화되고 계급에 기초한 불평등을 공고화할 터를 닦은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담론적 구성체가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를 지능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건 중요한 문제죠. 이런 설명으로 더 넓은 민주주의와 평등을 위해 분투하는 기획을 방해할 수 있기도 하고요.
해러웨이: 이 ‘지능’이라는 담론 대상은 피할 수가 없죠.
쿰-쿰: 전 도저히 못 피하겠더라고요!
해러웨이: 잉글랜드/영국의 환경에서 아프리카계 카리브해인들이 인종과 IQ 범주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해당되는 것과 똑같은 가장자리를 차지하는데, 또 그 점에서는, 예를 들어, 남아시아계 아이들이 겪는 것과는 다르다는 게 사실인가요?
쿰-쿰: 네, 맞아요. 이들의 경험은 북아메리카에서의 경험과 비슷했죠. 버나드 코어드가 쓴 『서아시아의 아이들은 영국 학제에서 어떻게 교육상 보통 이하로 만들어지는가』(Coard, 1971)는 지능의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영국 교육 정책에 그게 각인된 방식에 도전하는 데 매우 중요한 책이죠. 교육과 지능의 문제는 남아시아 태생의 아이들에게는 다르게 나타났어요. 이들/우리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면, 이들/우리는 언어가 아예 없다고 상정되었어요.
해러웨이: 언어와 문화가 아프리카계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말 그대로의 동물화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거네요. 전 아까 말한 IQ 운운이 이 동물화의 꽤 직설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쿰-쿰: 그러면서도 언어와 문화 모두 복수의 인종차별주의 가운데 두 가지 형태라는 거죠. 스튜어트 홀이 전에 지적했듯이 말이에요(Hall, 1976).
해러웨이: 물론 그렇죠. 언어와 문화는 식민주의의 역사를 서양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인종차별주의의 주된 두 형태였죠. 한편에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작동방식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자연화(自然化)나 원시화(元始化)라는 작동방식이 있는 거죠. 한편에는 허구적이고 강력한 장소로서의 서양이 지닌 불안, 실재적 허구라고나 할까요? 동양이 서양의 발생지이자 우월한 문명의 장소라는 데서 오는 서양의 불안, 동양보다는 서양이야말로 언어와 문화에 있어 파생적 문명이라는 특정한 불안,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와는 매우 다른 지적 식민주의의 형태들에 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장이 생각나네요(Said, 1978). 반면 아프리카에 관해서는 지적 식민주의의 형태와 불안의 형태가 모두 원시적인 것에 대한 담론의 측면에서 나타나고요. 원시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 두 문제는 식민지 실천에 깊게 관여하면서, 인종화의 주요한 담론으로서 집중되었죠. 영국에서 두 문제가 집중된 방식이 당시 미국에서 똑같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요. 두 문제 모두 역사가 있어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단일하게 전개되지는 않기는 해요. 하지만 원시화를 통해 작동하는 부류의 식민화 담론과, 말하자면 문화화로 작동하는 부류, 오리엔탈리즘화 대 자연화로 구분하는 건 유용하죠.
둘 모두 인종화의 양식들이에요. 그리고 미국에서, 현재 캘리포니아 정치에서 작용하고 있는 복잡한 인종적 구성은 1970년대 영국의 지형과 다른 지형을 생산하죠. 흑백 이분법을 사용할 수 없는, 미국적인 흑백 감각의 지형이죠.
또, 이런 발상은 당신의 책 『정치 이야기』(Bhavnani, 1991)를 읽을 하나의 방법을 제공해줘요. 지능을 해소해야 할 구성물로 다루는 당신의 열정은 당신의 책에 나오는 어떤 것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줘요. 당신이 청년들에 공감하는 방식, 청년들에 관해 글을 쓰는 방식, 청년들을 정치적 담론의 생산자, 합리적 사상가, 정치 이론가로서 받아들이고 이들의 담론에 참여하는 방식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은 청년들을 시혜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일종의 과학적인 방식으로 발달 연구를 하는 것도, 표현한답시고 본질화하는 것도, ‘단계 이론화’한답시고 청년들의 정치적 논증의 발달을 연구하면서 과학화하는 것도 아니었죠. 제가 보기에, 당신은 연구자로서의 관계 양식과 작가로서의 기술적(記述的) 언어를 개발해서 청년들의 담론을 정치적 담론으로 생산하려고 했던 거예요. 항상 청년들에게 동의한 것도, 청년들을 낭만화한 것도 아니죠. 그저 청년들이 정치 이야기를 할 때 당신도 정치 이야기를 한 거죠. 이런 점에서 보면, 그럼 이 책은 사회 심리학에 관한 책이나 사회 심리학의 책만큼이나, 모든 면에서 정치 이론서죠. 정치 이론의 책인 거죠. 그렇다면 제게 이 책은 지능의 개념을 해체하고 합리적 담론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한 가지 저작으로 이해되네요. 우리 둘 모두 젠슨의 논문이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고, 인종 및 IQ 논쟁이 생물학 및 심리학 전문가로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했다는 게 참 흥미롭네요.
쿰-쿰: 그 주제로 좀 더 이야기해보는 건 어때요?
해러웨이: 좋아요. 젠슨의 논문과 인종 및 IQ 논쟁의 문제는 벨 훅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성숙을 이루는 데 일종의 전환점으로 작용했잖아요. 특히 IQ에 있어서, 제게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소위 병리적이고 모계 중심 가정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모이니한의 보고서(Moynihan, 1965)과 젠슨의 논문이 중요한 두 사건이었어요. 그 두 연구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이 제게 담론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가르쳐준 거죠. 그때는 제게 이런 언어가 없었지만, 전 IQ를 물질화된 허구로 봤어요. IQ는 세계를 물질화하는 장치의 예시였고, 이러한 형태 자체가 지배의 양식이었죠. 이러한 장치들은 다양한 형용사를 붙여서 주체들을 생산하고, 이에 따라 주체들을 평가하죠. 예를 들어 특정한 점수를 받은 학생이나 특정한 신상의 임신한 십대가 추가적인 감시의 위협에 놓이게 되는 것 처럼요. 이러한 규칙들은 살 수 없는 서사들 안에서 세계를 물질화하고, 이러한 서사들이 우리 투쟁의 대상이 되는 거죠.
‘지능’은 믿을 수 없이 중요하다는 인식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 같네요. 우리는 선생으로서, 특정한 맥락에서 자신들을 ‘멍청’하게 생산하도록 배우는 학생들과 계속해서 일하고 있죠. 특정한 맥락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자격 없다’거나, ‘합리적이지 않다’거나, ‘지적이지 않다’고 생산하도록 배우게 되죠. 그러면 이러한 표현의 맥락적 특수성은 약화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격 없’고, ‘합리적이지 않’고, ‘지적이지 않’은 자기 이미지만 남게 되는 거고요. 우리가 제도적으로 놓치게 되는 건 사람들을 이렇게 생산하고 분류하는 장치, 그리고 이 장치가 측정될 수 있는 자연적 대상과 별개라는 사실이죠. 이거야말로 급진적 과학 운동이 분석적으로 일궈낸 수겠죠. 자연적 대상과 담론적으로 생산된 실제적 대상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게 만들었잖아요. 따라서 여기엔 사실과 허구, 담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에 어떤 이견도 없게 된 거죠. 몇 분 전에 제가 말한 물질적인 것, 향성적(向性的, tropic)인 것, 문자적인 것의 내파의 사례가 바로 이거예요.
쿰-쿰: 지능이 물질화된 허구이며, 인종화된 담론, 성별화된 담론 등으로 구축된 더 넓은 허구의 일부라는 데에는 저도 동의해요.
해러웨이: 그렇죠. 세상은 말 그대로 성별화되고 인종화되면서 자연화된 거죠. 몸은 그렇게 탄생하는 거고요. 말씀이 사람이 되신 거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