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텍스트 서지사항 - Donna J. Haraway,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6, pp. 117-125. -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대지세 시대의 친족 만들(가제) 》
6장 세계에 씨뿌리기:
지구의 타자들과 함께 땅을 일구기 위한 씨앗 주머니
식물언어학자는 미학적 비평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들이 가지eggplant를 읽을 수조차 없다는 것을 너는 알겠니?” 그리고 그들이 배낭을 메고 산에 올라, 산 북쪽정상에 낀 이끼의 노랫소리를 새롭게 해독해서 읽는다면, 그들은 우리의 무지에 미소지을 것이다.
- 어슐러 르 귄, 「아카시아나무 씨앗의 저자」
1980년대 레이건의 스타워즈 시대에 내가 걸쳐 입은 정치적 슬로건은 “지구의 생존을 위한 사이보그들!”이다. 조지 부시와 아들 부시의 끔찍한 시대는 나의 슬로건을 터프한 슈츠훈트 개 조련사에게서 훔쳐온 슬로건인 “빨리 달려, 세게 물어!”, “짖지 마, 훈련해!”로 바꾸게 했다. 오늘날 나의 슬로건은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매듭들 안에서 그리고 특히 지금 안에서, 언제 어디에 있는 장소시간placetime이 강력하고 널찍한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단단하면서도 흙이 묻어 더럽혀진 류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무수한 땅의 왕국들의 그 모든 장소시간들에서 동반종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고향 세계에 다시 씨를 뿌릴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는 소멸되지 않은 취약한 행성 위에 (또 다시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 말이다.[각주:1] 우리는 다시 씨 뿌리는 일뿐만이 아니라, 또한 씨앗을 싹틔우는 데 필요하며 발효시키고 열을 덥히고 영양분을 함유한 균 부산물 일체를 다시 접종할 필요가 있다. 회복은 여전히 가능하지만, 그것은 자연․문화․기술 및 유기체․언어․기계의 죽음의 분리를 넘어서 다종 연합을 이룰 때에만 가능하다. [각주:2]페미니스트 사이보그가 내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개‧닭‧거북이‧늑대의 인간동물humanimal의 세계가 내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푸가 연주 안에서, 곰팡이, 미생물, 공생유전공학 대위법(symbiogenetic counterpoint), 아프리카․아메리카․호주․태평양 섬 등지에서 자라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식물 분류법을 넘어서 있는 그것들의 균 부산물과 더불어, 내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세계에 씨뿌리기는, 동반종의 이야기를 그들의 가차없는 다양성과 절박한 트러블 쪽으로 더욱 더 개방시키는 일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상황적이면서 필멸하는 새싹의 지혜류를 연구하기 위해 나는 어슐러 르 귄과 옥타비아 버틀러에게 돌아간다.[각주:3] 우리가 그와 함께 다른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말하는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그와 함께 다른 개념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떤 개념을 생각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오우로보로스가 어디서 어떻게 자기 설화를 다시 삼키는가가 중요하다. [각주:4]바로 이것이 세계짓기가 용의 시대에 스스로를 계속 이어나간 방식이다. 이것들은 그런 식의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선문답이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알을 낳는지를 살펴보라. 용의 신중한 학생인 르 귄은 내게 공상소설과 자연문화적인 역사에 대한 캐리어가방 이론을 가르쳐주었다.[각주:5] 그녀의 이론, 그녀의 이야기는 삶의 재료를 모으고, 옮기고, 말하기 위한 널찍한 가방이다. “잎사귀, 박, 껍데기, 망, 가방, 포대기, 자루, 병, 냄비, 솥, 상자, 그릇. 받침대. 용기(容器).”[각주:6]
엄청나게 긴 지구 역사는 최초의 아름다운 말과 무기의 공상, 최초의 아름다운 말로서의 무기이자 무기로서의 말의 공상에 사로잡혀 얘기되었다. 도구, 무기, 말. 그것은 천상의 신의 이미지 안에서 살이 된 말이다. 이것은 단 한 명의 진짜 배우, 한 명의 진짜 세계-제작자, 영웅을 다룬 비극적인 이야기 안에서 죽이는 법과 잔인한 현상금을 되돌려주는 법을 연구한 인간을 만들어낸 사냥꾼의 설화이다. 사냥꾼의 설화는, 끈질기게 땅을 썩히는 일을 견디는 것을 넘어 받아들이는 그 고통을 지연시키고 오려내는 설화이며, 또한 날카롭고 전투적인 행위의 설화이다. ‘칼로 찌르는’[음경]prick 설화에 등장하는 모든 다른 것들은 받침대, 땅바닥, 땅뙈기 공간 혹은 먹이이다.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할 일이란 그 길에 있는 것, 극복되는 것, 길가와 수로에 있는 것이지 여행자나 창시자가 아니다. 영웅이 알고 싶은 마지막 일은 그의 아름다운 말과 무기가 가방‧그릇‧그물이 없으면 무가치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모험가도 자루 없이 집을 떠나서는 안 된다. 어떻게 포대기‧솥‧ 병이 갑자기 이 이야기에 들어갔을까? 어떻게 그렇게 낮게 이 이야기가 계속됐을까? 아니 어쩌면 영웅에게는 훨씬 더 나쁘게도, 어떻게 저 오목하게 속이 빈 것, 저 존재 속 구멍들은 처음부터 더 풍부하고, 더 괴상하고, 더 가득 차 있고, 딱 들어맞지 않은 계속 진행 중인 이야기를, 사냥꾼을 위한 방으로 채워졌지만 그에 관한 것도 아니고/아니었던 이야기를, 자기를 만드는 인간과 인간을 만드는 역사의 기계를 다룬 이야기를 탄생시켰는가? 주고받은 아주 약간의 물, 아주 약간의 씨앗을 담은 얇은 껍질의 곡선은 함께-되기의 이야기, 서로를 도우며 이끄는 이야기, 동반종(즉 자신의 살고 죽는 일이 이야기와 세계짓기를 끝내지 않는)의 이야기를 제안한다. 껍질과 그물을 지닌 인간-되기, 부식토-되기, 땅-되기는 다른 모양, 즉 뱀처럼 구불구불 움직이는 함께-되기의 모양을 가진다.
르 귄은 얼버무리는 감상적인 전체론과 유기체론을 경계하는 우리 모두를 안심시키려 재빠르게 이렇게 말한다. “아닙니다. 나는 공격적이지도 전투적이지도 않은 인간이라고 얘기해 둡시다. 나는 내 손가방으로 나를 마구 공격하는 노령의 화난 여자입니다. 깡패와 싸우고 있는 것이죠. … 그것은 계속해서 야생 귀리를 모으며/분란을 일으키며(gather wild oats)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당신이 해야만 하는 그런 저주받은 일들 중 하
Le Guin,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p. 169.
옥타비아 버틀러는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저 날카로운 이야기(Sharp Story)의 파국 이후에 번영할 장소를 파헤치기 위해 다시 꿰맨 씨주머니와 씨를 뿌리고 다니는 여행자를 필요로 한다. 《씨뿌리는 자의 우화》에서 과다-감정증을 앓는 미국의 10대 소녀 라우렌 오야 오라미나(Lauren Oya Olamina)는 LA의 외부인 출입제한지역에서 자란다. 신세계 ‘산테리아’[각주:8]에서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가톨릭적인 숭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고 9의 어머니(mother of nine) 요루바 오야(Yoruba Oya)에게 중요한 것은 9개의 지류와 산 자와 죽은 자를 움켜쥔 9개의 촉수를 가진 서아프리카 나이저 강의 오리샤Orisha 신이다. 그녀는 천개의 이름을 가진 땅의 존재들(chthonic entities) 사이에서 대지세로 불리는 시대를 지속시키는 애 낳는 자이다. 바람, 창조, 죽음은 오야의 속성이며, 세계짓기를 위한 힘이다. 오라미나가 받은 선물이자 저주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고통을 느끼는 그녀의 피할 수 없는 능력이었는데, 이는 임신 동안 약물에 중독된 그녀의 어머니가 먹은 약물의 결과였다. 가족이 살해당하고 난 뒤, 이 젊은 여성은 여러 부류가 마구 섞인 생존자들과 함께 어스시드[지구씨]라 불리는 종교에 뿌리를 둔 새로운 공동체에 씨를 뿌리기 위해 파괴되고 죽어가는 사회를 여행했다. 3부작(그 중 《사기꾼의 우화》는 그녀가 죽기 전에 완성되지 못했다)으로 원을 이루는 이야기 속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SF 세계짓기는 별들 사이에서 새로운 고향 세계를 언젠가는 번영시킬 어스시드를 상상했다. 하지만 오라미나는 최초의 어스시드 공동체를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시작했으며, 그것은 거기에 있으며 대지 위의 다른 장소에 있다. 나 자신의 다시 씨뿌리기를 위한 탐구가 있었던 그 곳은 우리의 고향 세계가 머물러야만 하는 곳이다. 이 고향이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의 교훈이 특별한 포악함을 적용할 장소이다.
이 우화 소설에서 “신은 변화이다”와 어스시드는 ‘지구 위에 생명의 씨앗이 이식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씨앗은 [어떻게 자랄지] 예측이 되지 않으며 항상 위험한 온갖 종류의 장소 및 시간들에 적응하고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럴 것이다”나 “그래야만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라는 점에 주목하자. 한 명의 SF 작가로서 버틀러의 전체 작업은 파괴의 문제와 상처받은 번영—망명‧실향‧납치‧유배를 겪으며 그저 살아남기만 하는 것이 아닌—의 문제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이 번영은 노예‧도주자‧이민자‧여행자에 대한 그리고 또한 원주민에 대한 지상의 선물-짐이다. 정착하여 멈추는 것은 짐이 아니다. SF 양식에서[각주:9], 나 자신의 글쓰기는 지구 위에서만 이뤄지고 연주된다. 사이보그‧개‧아카시아나무‧개미‧미생물‧균 그리고 그들 모두의 친족과 새끼가 어우러진 진흙탕 안에서 말이다. 어원학이 불러온 뱃속 꼬임과 더불어 나는 또한 친족kin이, 인도-유럽어족의 g-k의 교환과 더불어, 탄생gen을 거쳐 새끼get로 간다는 점을 기억한다. 땅은 모든 것을 낳는다. 우리는 같은 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일가친척—바람을 타고 날아간 새끼—이다. 전염되고 씨 뿌려진 세대 이후의 세대 속에서, 바람을 타고 날려간 부류(blowsy kind) 이후의 바람을 타고 날려간 부류 속에서 말이다.
씨앗을 심는 일은 매개체, 흙, 물질(matter), 웅얼거림(mutter), 어머니(mother)를 필요로 한다. 이 말들은 내게는 SF 테라포밍[땅 일구기] 주목 양식을 위해서 그리고 그 양식 안에서 커다란 흥미를 준다. 페미니즘 SF 양식에서 물질은 결코 “형성 중에 있는/정보를 주는(informing)” 씨앗의 “단순한” 매개체가 아니다. 오히려 땅의 캐리어가방과 뒤섞여, 친족과 새끼는 세계짓기를 위한 훨씬 더 풍부한 회합을 가진다. 물질은 강력하면서도 마음에 새겨진 몸의 말이고, 사물의 모체이자 모태이며, 강에서 생겨난 오야(Oya)의 친족이다. 물질은 원천‧토대‧흐름‧근거로서의 물질 그리고 그 결과인 재료로서의 물질—사물의 질료, 즉 흐르면서도 동시에 단단한, 수학적이면서도 동시에 육체적인 모태—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어원학적 경로에 의해 대들보 즉 단단한 중심 목재(포르투갈어로는 마데이라madeira)로서의 물질의 어조(tone)를 얻기 위해서 땅을 많이 파거나 많이 헤엄칠 필요는 없다. 대들보로서의 물질은 내게 르 귄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연상시키는데, 이 책은 제국주의적 착취에 맞선 투쟁에 휩쓸려 흩어진 원주민이면서 피식민지인들을 위한 그녀의 ‘헤인 우주 시리즈’hainish fabulation의 일환이자 다종 번영을 위한 기회의 일환으로 1976년에 출판되었다. 이 이야기는 다른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2009년 작 블록버스터 영화 <아바타>에서 강화조약과 자원추출의 명목으로 판도라라는 행성에서 자행된 식민지 억압의 이야기와 아주 흡사하다. 한 가지 특수한 디테일만이 매우 다르다. 즉 르 귄의 숲은 회개하고 구원받은 “백인” 식민지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는 영웅들에 의해 업신여겨진 캐리어가방의 형태를 띤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식민사령관을 살려주는(전투에서 승리한 뒤에 그를 죽이기보다는) 선고를 내린다할지라도, 르 귄의 “원주민들”에게 있어 해방투쟁의 결과는 침략군이 아닌 서로를 살해하는 법에 관한 끝없는 지식을 불러오며, 또한 마찬가지로 ‘다시 사람을 모으는 법’, 어쩌면 이러한 역사와 대면하면서 ‘번영하기 위해 다시 배우는 법’에 관한 끝없는 지식을 불러온다. 그녀의 글에는 판도라에서 일어난 것과 같이 ‘과거와 같은 상태’란 없으며, 노예 설화도 없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의 어스시 행성에서 벌어진 투쟁에게 교육을 받은 나는, 테라 위에 머물면서 르 귄의 ‘헤인 우주 시리즈’에 등장하는 종족들 중 누구도 인류의 계보나 거미줄web에 있었던 적이 없다(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흩어졌는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고 상상할 것이다. 물질, 어머니, 웅얼거림이 나로 하여금 그리고 대지세라는 이야기 가방 안에 함께 모인 우리로 하여금 지구 위에서 트러블을 겪는 자연문화적 다종들과 함께 머물게 한다. 이때 지구는 르 귄의 어스시 행성 위에 건설된 식민지 이후의 세계를 위한 해방투쟁에 의해 강화된다. 차이나는 지상의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테라포밍의 씨앗을 발견하는 문제로 되돌아갈 때이다. 살해하는 법에 관한 지식은 언제 어디에서도 부족하지 않다.
6.1 아카시아 종의 씨앗을 운송하는 동안 엘라이오좀(elaiosome)을 형성한 보석침개미 (Rhytidoponera metallica). 호주 서쪽 지역에 서식한다. ⓒ Benoit Guenard, 2007.
테라포밍에 관한 나의 캐리어가방은 아카시아나무 씨앗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그러한 수집은 또한 그 안에 나눠가져야 할 트러블로 채워져 있다. 나는 과학자-탐험가들에 의해 발견된 목이 잘린 개미 시체로 시작한다. 이 개미는 르 귄의 이야기 “「아카시아 씨앗의 저자」 그리고 《이론 언어학 학회지(Journal of the Association of Therolinguistics)》에 실린 다른 글들”에서 개미 군집 터널의 끝에서 아직 발아가 안 된 아카시아나무 씨앗의 행렬 중 31번째 씨앗 옆에 있었다. 이론 언어학자들은 개미가 줄지어진 씨앗들 위에 생화학적 잉크로 쓴 것처럼 보이는 분비액 문자를 읽고 무척 당황했다. 과학자들은 이 문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해 그리고 개미—식민지 병사들에 의해 살해당한 침입자—의 존재에 관해 모두 미심쩍어했다. 한 거주자가 여왕개미와 그 알에 대해 폭동 메시지를 쓰면서 저항한 것일까? 미르멕스의 비극 시?[각주:10] 이론언어학자들은 개미들의 작업에 인간 언어에서 온 규칙을 적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동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그들의 파악은 심대한 자연문화적 차이를 넘겨짚어 이해한 추측들로 채워진 여전히 조잡한 단편이(었)다. 난해한 발견의 탐험으로 기록된 다른 동물 언어에 대한 과학적이고 해석학적인 연구의 관점에서, 이론언어학자들은 “언어는 소통/커뮤니케이션”이라는 주장을, ‘많은 동물들은 화학감각적(chemosensory)이고 시각적․촉각적 언어뿐만 아니라 능동적․집단적인 운동기호학을 사용한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그들은 이러한 예측하기 어려운 개미의 분비물 문자를 독해하는 일에 트러블을 겪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이론언어학적 행동에 연루되어 있고, 언젠가는 그것들을 읽는 법을 배울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들이 추측했듯이, 식물들은 “소통하지 않으며” 어떤 언어도 갖지 않았다. 다른 것이 식물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어쩌면 기예라고 불려야 할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각주:11]과학자들과 탐험가들의 이러한 입장을 따랐던 식물언어학자들은 지금부터 시작해 확실히 완전히 새로운 주목의 양식을, 현장 방법론을, 개념적 발명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론언어학회의 회장은 점점 더 서정적이 되어 이렇게 말한다. “만일 비소통적인 식물의 기예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우리 과학의 바로 그 원리를 다시 생각해야만 하며,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기법을 익혀야 한다. 왜냐하면 삼나무나 호박의 기예와 관련해서는 족제비의 살해 미스터리물이나 양서류의 성애물 혹은 지렁이의 터널 모험물의 연구에나 적합한 비판적․기술적 기술을 가져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각주:12]
내가 보기에 이론언어학회의 회장은 비인간중심적 차이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의 앎과 앎의 방식 일체를 의문에 붙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이 잘린 개미와 발아가 안 된 아카시아나무 씨앗을 면밀히 살펴 여전히 저 동물중심적인 과학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했어야 했다. 식물에 대한 과학자들의 숭고한 심미화는 그들로 하여금 땅을 일구는 동반종들에 관해 잘못 이해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식물들은 엄청난 땅의 양상들 안에서는 완성된 소통체들로, 그들은 살아있는 존재 군집을 가로질러 놀라운 균류 부산물의 성좌 사이에서 의미를 만들고 교환한다. 식물들은 또한 박테리아나 균류들과 함께 태양에서 기체나 바위에 이르는 무생물 세계와 소통하는 동물의 생명선(線)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를 추적하기 위해 나는 지금부터는 르 귄의 이야기를 벗어나 공생학과 공-발생학, 생태적인 진화발달 생물학 연구자들이 말했던 이야기들에 의지하고자 한다.[각주:13]
아카시아나무와 개미는 나를 위해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1,500여 종을 가진 아카시아나무 속(屬)(호주의 토착종은 1,000여 종이 있다)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무 및 관목과(科)중에서 가장 큰 속 중 하나이다. 여러 아카시아나무들이 대양과 대륙을 가로질러 온대와 열대, 사막기후 등에서 번창한다. 아카시아나무는 수많은 투숙객이 머물 집과 다양한 손님들이 먹을 양분을 제공함으로써 복잡한 생태계의 건강한 생물 종 다양성을 유지하게 하는 결정적인 종이다. 처음 출원했던 곳이 어디든, 옮겨온 아카시아나무들은 인간 식민지 삼림감독관의 연인이었으며, 또 여전히 조경사들과 식물육종자들의 주요 업무대상이다. 이러한 역사들에서 일부 아카시아나무는 너무 무성하게 자라, 생명을 복원하려는 이들과 장소들을 회복하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응답능력을 가진 토착종의 생태계를 파괴시킨다. [각주:14]아카시아나무는 부분이든 전체든 가장 예상 밖의 장소들에서 눈에 띈다. 아카시아나무는 하와이 고유종인 아카시아 코아(Hawaiian koa)—아카시아 코아는 모든 것을 멸종시키는 탐욕적인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과도함으로 인해 잘려나가고 있다—처럼 화려한 견목의 너그러움을 제공한다. 또한 아카시아나무는 아카시아 고무에서 추출한 아라비아껌을 포함해, 값싼 다당류 껌을 만드는데, 아카시아 고무는 아이스크림‧핸드로션‧맥주‧잉크‧젤리‧구식 우표와 같은 인간의 산업 생산물에 들어있다. 그와 동일한 고무 분비물들은 아카시아나무 자체의 면역체계인데, 이들은 상처를 봉해 기회주의적인 균과 박테리아를 막아준다. 꿀벌들은 아카시아나무의 꽃에서 귀중한 꿀을 만들어내며, 그 중 몇몇 꿀은 굳지 않을 것이다. 나방, 인간, 그리고 유일하게 채식을 하는 거미로 알려진 ‘베지테리언 거미’ 등을 포함하는 여러 동물들은 아카시아를 식량으로 이용한다. 사람들은 씨드 페이스트[씨앗이 들어간 반죽], 깍지‧카레‧새순‧구운씨앗으로 만든 튀김요리, 루트 비어[식물뿌리로 만든 탄산음료] 등을 위해 아카시아나무에 의존한다.
아카시아나무는 콩과(科) 식물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이다. 이것은, 여러 아카시아나무들이 자신들이 가진 여러 재능을 통해 곰팡이균 공생자(이들은 자신의 세균성 체내 공생체를 관리한다)와 연합하여 토양 비옥도, 식물성장, 동물생존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질소를 잡아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주:15]아카시아나무는 가축을 방목하는 이들과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여러 합성물을 내뿜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염기성 화학공장인데, 이 합성물은 나와 같은 동물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나의 인간 두뇌로는 이 합성물이 주는 느낌이 곤충 같은 생물체에게도 같다고 상상만 할 수 있다. 기린의 관점에서 보면, 아카시아나무는 그들의 꼭대기 위로 사랑스러운 나뭇잎 샐러드를 걸쳐 입었다. 그리고 아카시아나무는 성실한 기린의 가지치기에 응답하여, 인간 사진작가들과 관광회사들에게 추앙받는 그림같은 아프리카 사바나 플랫톱 나무 풍경을 생산하며, 또한 당연하게도 여러 생물체들의 삶을 보존하는 응달과 쉼터를 생산한다.
이 커다란 서사 내에서 그물망 가방을 지원받은 나는, 목이 잘린 개미와 아카시아나무 씨앗에 관한 현재 진행형인 르 귄의 캐리어가방 이야기 명판 위에 내 자신의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이론 언어학자들은 자신들이 이 글에서 읽어내려 했던 메시지에 대해 우려했지만, 나는 우선 개미와 아카시아나무 씨앗을 한데 모았다는 점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서로를 아는가? 그들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왜 개미는 자신의 메시지를 저 빛나는 표면 위에 그리는가? 발아되지 않은 씨앗이 이 의문을 풀어줄 단서이다. ‘아카시아 버티실라타’Acacia verticulata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생태주의자들이 크게 우려하는 ‘해안 와틀’과 관련된 호주산 관목으로, 개미에 의해 퍼트려지는 씨앗을 만든다. 교활한 아카시아나무는 모든 씨앗을 휘감는 현란한 부속줄기로 개미의 관심을 끈다. 개미들은 이 장식된 씨앗을 자신들의 둥지로 가져가며, 개미들은 여유가 생기면 지방질이 풍부한 이 부속줄기(이른바 ‘엘라이오좀’)를 먹는다. 이윽고 씨앗은 개미 터널이 제공하는 멋진 자궁에서 나와 발아하며, 개미는 자신들의 근면한 습관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의 원료가 되는 영양분이 풍부한 고칼로리의 식량을 가지게 된다. 진화생태학의 관점에서, 개미와 아카시아나무는 서로의 재생산 사업에 필수적이다.
몇몇 개미-아카시아나무 연합체는, 각 참여자의 내부조직보다 훨씬 더 정교하며, 또한 두 동반종의 구조 및 기능의 게놈과 발달적 패턴화를 형성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다. 중앙아메리카의 여러 아카시아나무들은 ‘탁엽’stipule이라 불리는 크고 속이 빈 가시같은 구조를 형성하는데, 이는 여러 ‘수도머멕스속[유사개미형] 개미종’[각주:16]의 은신처를 제공한다. “개미는 나뭇잎줄기의 수액 분비액과 ‘벨트체’로 불리는 작은 잎 끝에 있는 지방질과 단백질이 풍부한 소량의 영양분을 먹고 산다. 역으로 개미는 초식동물들에 맞서 식물을 보호하는 일에 힘을 보탠다.” [각주:17]매일 먹을거리를 찾는 일을 불편하게 만든다며 분노에 사로잡혀 개미들을 물어 죽이는 무리 같은 것은 없으며, 덜 오염된 식료품 저장고로 이동하여 나뭇잎을 싹 쓸어먹는 어떠한 종도 없다. 2005년 BBC가 주관하고 데이비드 애튼버러[각주:18]가 해설한 <친밀한 관계>라는 이름의 과학-자연 5부작 다큐에서는 이 사안이 절묘하고 감각적으로 다뤄진 바 있는데, 우리는 또한 이 다큐에서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개미들은 자신들의 은신처를 제공하는 나무들을 ‘길러’내며, [다른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악마의 정원’으로 알려진 영역을 만들어낸다. 경쟁식물을 없애 이러한 성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들은 주변 초목에서 다른 식물의 묘목을 제거한다.” [각주:19]개미들은 나뭇가지와 싹을 차근차근 갉아먹은 다음 경쟁식물의 통도조직[양분이동통로]에 포름산을 주입함으로써[각주:20] 자신의 과업을 수행한다. 이와 유사한 개미-아카시아나무의 상호부조는 아프리카에도 있다. 예를 들어 케냐에 서식하는 ‘휘파람 가시 아카시아나무’는 속이 빈 가시로 개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꽃 밖 꿀샘으로 ‘크레마토게스터 개미’Crematogaster mimosae와 같은 자신들의 공생자 개미에게 꿀을 제공한다. 역으로 개미들은 아카시아나무에 해를 입히는 커다란 포유류 초식동물과 줄기에 구멍을 뚫는 딱정벌레를 공격함으로써 나무를 보호한다. 이런 것을 관찰하면 할수록, 땅 위에서 살고 죽기의 게임은 공생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뒤얽힌 다종 관계multispecies affair’나 한 상에서 밥을 먹는 ‘동반종의 함께 일하기[함께 멍에지기york together]’로 명명할 만하다.
개미와 아카시아나무는 둘 다 매우 다양하고 개체수가 많은 생물군이다. 그것들은 때로는 세계 일주를 하는 여행자이며, 때로는 출신 지역이나 이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번성할 수 없는 집돌이homebody들이다. 집돌이든 여행자든 그들의 살고 죽는 방식은 과거와 현재의 테라포밍의 결과이다. 개미와 아카시아나무는 온갖 종류의 크기와 규모를 가진 생물체들과의 연합을 갈망하며, 그것들은 진화적‧유기체적인 시공간 혹은 전체 군집의 시공간 안에서 자신들을 살리고 죽이는 접촉을 하는 데 있어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갖는다. 이 종들은 그들이 지닌 그 모든 복잡성과 지속성 안에서 상당한 해악을 끼치면서도 또한 전체 세계를 지속하게 한다. 때로는 인간 사람과 연합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말이다. ‘악마가 진정 디테일에 있다’면, 그 디테일은 책임질 수 있는 동반종과 함께 사는 응답-할-수-있는 자연문화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이자 우리들은 단지 함께 생각하고 함께 글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함께 살고 죽지만, 또한 여기에서 함께 세상에 씨를 뿌리며, 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아카시아나무 씨앗 위에 새긴 개미 분비물 안에서 글을 쓴다. 오로지 르 귄—그녀는 못된 악당에게 자신의 지갑을 열 준비가 된 신경질적인 중년 여성이며, 엉망진창의 진흙탕을 갈망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나 인간 아닌 자신의 건방진 생물체들의 질서를 갈망하는 작가이다—의 캐리어가방 이야기만이 청렴과 최종평화에 관한 설화인 이 세상의 현명한 공생자들에 대한 나의 이야기와 같다. 르 귄과 함께 나는 끝마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지나치게 까다롭고 파괴적인 좋은 이야기들의 디테일에 헌신했다. 좋은 이야기들이란 ‘나중에 올 이들’을 위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려고 두꺼운 현재를 지속시켜 풍부한 과거에 도달하는 것이다. [각주:21]아나키스트의 사랑과 분노에 대한 엠마 골드만의 이해는 개미와 아카시아나무의 세상에서 이해된다. 이 동반종들은 털이 수북한 개의 이야기—으르렁거리고, 짖고, 새끼를 낳고, 뛰놀고, 킁킁 냄새맡고 등등의 이야기—를 촉발시킨다. 공생발생은 선(善)과 동의어가 아니라, 응답-능력 안에서의 서로 ‘함께-되기’와 동의어인 것이다.
마감시간에 쫒기며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공-산은 자기-제작과 그 밖의 모든 자기-형성 체계 및 자기-지속 체계의 공상을 확장하고 대체한다. [각주:22]공-산은 현재진행 중인 호주가방이자 함께-되기를 위한 멍에,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를 위한 멍에이다. 트러블과 함께 머물기는 여전히 가능한 회복의 설화를 말하는 가운데 식민지적이고 탈식민지적인 자연문화적 역사가 남겨준 손상과 성취를 물려받는다. 르 귄의 이론언어학자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동물가죽에 묶인 채, 이 무섭고 영감을 불어넣는 가능성들의 비전vision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 이후에는 아주 대담한 모험가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연약하고, 순간적인 이끼의 서정시를 무시하는 이 최초의 지리언어학자는 그 아래에서 여전히 덜 소통적이고, 여전히 더 수동적이며, 완전히 비시간적이고, 차갑고, 용암이 분출하는 바위의 시를 읽어낼 것이다. 각자 한 마디씩 말했다. 아주 오래 전에, 지구 자신에 의해, 엄청난 고독 속에서, 더 거대한 공동체 속에서, 공간에 대해.”[각주:23] 소통하거나 침묵하는 이 늙은 여자와 그녀의 지갑은 테라 위에 그리고 모든 시공간 위에 세워진 어스시드[지구씨] 공동체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웅얼거림, 물질, 어머니.
동반종에 관한 글을 쓴 모든 곳에서, 나는 애나 칭의 「드센/다루기 힘든unruly 가장자리: 동반종으로서의 버섯」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칭은 인간 예외주의가 가져다주는 기만적인 위안 없이도, 균류 부산물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말하는 일과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다시 작성하는 일 모두에 성공한다. 애나 칭의 글은 페미니즘 이론에 결정적인 사변적 우화와 SF 장르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길을 안내하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두 ‘함께-되기’에 토대를 이루는 근본적․진화적․생태적․발전적인 세계짓기 과정 안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Gilbert, Scott F., and David Epel. Ecological Developmental Biology: The Environmental Regulation of Development, Health, and Evolution. 2nd ed. Sunderland, MA: Sinauer Associates, 2015를 보라.
Rose, Deborah Bird, Reports from a Wild Country: Ethics for Decolonisation, Sydney: University of New South Wales Press, 2004. 데보라 로즈는 내게 화해나 복원이 아니라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 어쩌면 그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나는 부활(resurgence)이나 복구(resilience)와 같이 re로 시작하는 여러 단어들이 유용하며, 포스트로 시작하는 단어는 좀 더 문제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어슐러 르 귄에 대해서는 특히 Le Guin, Ursula K. The Word for World Is Forest. New York: Berkeley Medallion, 1976 [한글본] 어슐러 K. 르 귄,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최준영 옮김, 황금가지, 2012과 “‘The Author of Acacia Seeds’ and Other Extracts from the Journal of the Association of Therolinguistics.” In Buffalo Gals and Other Animal Presences, pp. 167–178.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1988을 보라. 「아카시아나무 씨앗의 저자」는 1974년에 출판된 《별들의 친구(Fellowship of the Stars)》라는 책에 처음 수록되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글은 Butler, Octavia E. Parable of the Sower, New York: Four Walls Eight Windows Press, 1993과 Parable of the Talents, New York: Seven Stories Press, 1998을 보라. 옥타비아 버틀러는 “사회 정의 운동의 이야기들”을 하는 새로운 세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에 대해서는 Brown, Adrienne Maree, and Walidah Imarisha, eds. Octavia’s Brood: Science Fiction Stories from Social Justice Movements. Oakland, CA: ak Press, 2015을 보라. 르 귄의 작업 역시 환경 정의와 환경 부활을 다룬 여러 저작에 스며들었다.
[옮긴이주] “꼬리를 삼키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오우로보로스(Ouroboros, 그리스어: ουροβóρος)는 고대의 상징으로 커다란 뱀 또는 용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켜 원형을 이루는 모습으로 주로 나타난다. 수세기에 걸쳐서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이 상징은 꼬리를 계속 먹어 들어가다 결국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통해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를 지녀 윤회사상 또는 영원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해러웨이는 꼬리(tail)를 삼키는 오우로보로스가 설화(tale)를 삼킨다는 것, 즉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말놀이를 하고 있다.
Le Guin,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In Dancing at the Edge of the World: Thoughts on Words, Women, Places, pp. 165–170, New York: Grove, 1989. 르 귄은 내가 《유인원의 관점》을 쓰는 데 있어 진화론에서의 서사 및 수렵인 여성의 형상에 관한 생각을 형성하게 해주었다. 르 귄은 거대하고, 용감하며, 사변적이고, 세속적인 저 이야기들의 시대인 1970-80년대의 페미니즘 이론에서 불타올랐던 글인 Fisher, Elizabeth, Women’s Creation. New York: McGraw-Hill, 1975로부터 캐리어가방 진화론에 관한 배움을 얻었다. 사변적 우화처럼, 사변적 페미니즘은 SF 실천이(었)다.
[/footnote]르 귄의 이야기에는 갈등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녀의 캐리어가방 서사는 깊은 지구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현재 안에서 잘 지낼 가능성을 다시 말하거나 다시 씨뿌리기 위해 이용한 놀랍고 엉망진창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때때로 그러한 [영웅의] 이야기는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 이상 어떠한 이야기도 말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합시다. 야생 귀리들이 있는 여기 바깥의, 낯선 곡식의 한 가운데에 있는 우리 중 일부는 우리가 다른 것을 말하는 게 더 좋았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늙은 누군가가 생을 끝마쳤을 때에도 계속해서 나아가겠죠. … 그러므로 나는 어떤 절박함의 느낌을 지닌 채, 자연과 신민(subject), 다른 이야기의 말, 말하지 않는 자, 삶의 이야기 등을 찾습니다.”[footnote]
Le Guin, “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p. 169.
[옮긴이주] 산테리아(Santería)는 아프리카 토속 신앙의 영향을 받은 카리브 제도 기원의 종교로, 스페인 제국 시기 서아프리카 출신자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산테리아는 스페인어로 ‘성인 숭상’라는 뜻을 가졌으며, 전례 언어는 요루바어의 한 갈래인 루쿠미어이다. 노예로 카리브 제도에 끌려온 요루바족의 종교가 가톨릭교회와 토착 원주민 신앙의 영향을 받아 혼합되면서, 산테리아가 만들어졌다. 요루바 기원의 루쿠미 족은, 천주교 사회에서 전통 신앙의 대상이었던 오리샤를 유지하기 위해, 오리샤를 천주교 성인과 일치시켰다.
SF와 함께 그리고 SF를 통한 나의 길안내, 나의 “미스트라(mystra)”는 LaBare, Joshua (Sha). “Farfetchings: On and in the sf Mode.” PhD diss., History of Consciousness Department, University of California at Santa Cruz, 2010(조슈아 라베르의 용어 ‘미스트라’는 이 글 17쪽에서 의미들을 쌓아두기 시작한다)에 있다. 라베르의 주장에 따르면, SF는 근본적으로 어떤 장르가 아니며, 영화‧희극‧인쇄물‧잡지를 제외한 그 밖의 여러 장르를 포함하는 확장된 의미에서조차 그렇다. SF 양식은 오히려 주목의 양식이자, 역사 이론이며, 세계짓기의 실천이다. 라베르가 말하길, “내가 ‘SF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주목에 집중하는 하나의 방식을, 세계의 대안을 상상하고 기획하는 하나의 방식(아! 바로 그거!)을 제공한다.”(p. 1). 라베르는 SF 양식이 “상상가능하고, 할 수 있고, 멈출 수 없으며, 그럴 듯 하고그리고 논리적인 것”(강조는 본문 그대로, p. 27)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그의 주요한 미스트라 중 하나는 르 귄이며, 그 중에서 특히 그녀가 종말 이후 캘리포니아 북부에 사는 사람을 다룬 SF 소설 《늘 집으로 돌아오기》에서 “뒤를 얘기하기”에 대한 이해가 가져오는 유혹에서이다. 《씨 뿌리는 자의 우화》를 《늘 집으로 돌아오기》와 함께 읽는 것은 그저 앞만 보기보다 종말이 오기 전에 회복적인 땅 일구기를 위해 캐리어가방을 채우려는 해안 여행자들에게는 좋은 책 읽기 방식이다. 이러한 SF 양식에 영감을 받은 인간 사람(human people), 치유 및 땅의 타자들은 아마도 멈출 수 없는 재앙에서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며, 너무 늦기 전에 다종, 다-장소시간, 회복을 위한 가능성의 상상가능한 배아를 심을 수 있을 것이다.
미르멕스(myrmex/Μύρμηξ)는 개미의 그리스어로, 이는 미르멕스라는 이름을 가진 아테네의 한 처녀가 자기가 쓸 쟁기를 만들어 달라고 아테네 여신에게 떼를 쓰면서 짜증을 내다 여신의 분노를 사 개미로 변한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다. 개미들이 세계 곳곳에 터널을 뚫는 것으로 판단해보건대, 그리고 개미를 높은 하늘의 시선과 머리의 자격증을 가진 아테네와 비교해보건대, 내 생각에 미르멕스가 쟁기 창시자로서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두뇌를 벗어나는 일은 그것이 여신․여성인지 개미인지와는 상관없이 지상에 터널과 수로를 놓는 일과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현실의 개미와 관련해서 우리는 데보라 고든의 Ants at Work: How an Insect Society Is Organized, New York: W. W. Norton, 2000 보다 더 나아갈 수는 없다. 그와 대비되는 접근법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는 Holldobler, Bert, and E. O. Wilson, The Superorganism: The Beauty, Elegance, and Strangeness of Insect Societies. New York: W. W. Norton, 2009과 Holldobler, Bert, and E. O. Wilson, The Ant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를 보라. 애리조나 사막의 일개미 군집에서의 행동 발달에 관한 자신의 연구와 개미 개체들이 생애동안 자기의 역할을 서로 바꾼다는 증거에 기초해서 고든은 개미 행동을 융통성 없이 고착시킨 E. O. 윌슨의 강조를 비판했다. 내가 보기에 고든이 씨주머니와 채굴도구를 지닌 아테네 처녀 발명자 미르멕스 같다면, 윌슨은 영웅적인 아테네 여신과 같다. 아카시아를 알고 싶다면, 처음에는 먼저 위키피디아의 “Acacia” 항목, http://en.wikipedia.org/wiki/Acacia(Accessed August 21, 2015)을 보고, 그 다음 “Biology of cacia”,Advances in Legume Systematics Series Part 11, special issue of Australian Systematic Botany 16, no. 1 (2003). http://www.publish.csiro.au/issue/650.htm.(Accessed August 21, 2015)를 보라. 모든 세계-건설 행위가 개미 이야기라고 오해하지 않고 싶다면, Mann, Adam, “Termites Help Build Savannah Societies.” Science Now, May 25, 2010. http://news.sciencemag.org/sciencenow/2010/05/termites-help-build-savanna-soci.html(Accessed August 21, 2015)를 확인하라.
이에 대해서는, 예컨대 Gilbert, Scott F., and David Epel, Ecological Developmental Biology: The Environmental Regulation of Development, Health, and Evolution, 2nd ed. Sunderland, MA: Sinauer Associates, 2015과 Gilbert, Scott F., Emily McDonald, Nicole Boyle, Nicholas Buttino, Lin Gyi, Mark Mai, Neelakantan Prakash, and James Robinson, “Symbiosis as a Source of Selectable Epigenetic Variation: Taking the Heat for the Big Guy”,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B 365, 2010, pp. 671–678; McFall-Ngai, Margaret, “The Development of Cooperative Associations between Animals and Bacteria: Establishing Detente among Domains”, American Zoologist 38, no. 4, 1998, pp. 593–608; McFall-Ngai, Margaret, “Unseen Forces: The Influence of Bacteria on Animal Development”, Developmental Biology 242, 2002, pp. 1–14; Hird, Myra, The Origins of Sociable Life: Evolution after Science Studies,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09 등을 보라. 진화적 변화를 추동하는 것으로서의 공생발생에 대해서는, Margulis, Lynn, and Dorian Sagan. Acquiring Genomes: A Theory of the Origin of Species, New York: Basic Books, 2002를 보라.
남아메리카와 북아프리카에서 골칫거리인 호주 아카시아나무에 관한 정보로 GISD(전지구적 유입종 데이터베이스)를 보라. 또한 ‘검은 와틀black wattle’로 알려진 ‘아카시아 메아른시이Acacia mearnisii’에 관한 정보로는 “위기에 처한 태평양 섬 생태계(Pacific Islands Ecosystems at Risk)”,http://www.hear.org/pier/species/acacia_mearnsii.htm.(Accessed August 21, 2015)를 보라. 여러 아카시아나무 종, 특히 ‘해안 와틀coastal wattle 아카시아 외눈박이’ 종은 캘리포니아에서 환경보호주의자들의 우려를 자아낸다. 논란거리인 이 모든 여행자들은 우리에게 ‘다종 트러블과 함께 머무는 법’을 가르치는데, 이것들은 요 근래 나의 대부분의 작업 및 활동의 동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Bonfante, Paola, and Iulia-Andra Anca, “Plants, Mycorrhizal Fungi, and Bacteria: A Network of Interactions”, Annual Review of Microbiology 63, 2009, pp. 363–383을 보라. 이 논문은 우리의 관심을 다종 컨소시엄의 일원들 간의 다면적 소통 실천으로 끌어들인다. 논문의 초록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휘발성 물질을 포함한 활성분자를 풀어주자. 박테리아/곰팡이균/식물 간 네크워크의 설립에 있어 파트너들 간의 물리적 접촉은 중요해 보인다. 이 글에서는 비록 종이나 문phylum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정확한 본성이 불명확하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생물 간의 감지 및 ‘타입3 분비체계’[그램음성균에서 발견된 단백질 부속물]의 잠재적 개입이 논의된다.”
[옮긴이주] 수도머멕스속 개미(Pseudomyrmex)는 개미과에 속하는 곤충 중 하나로, 외형은 말벌과 비슷하며, 침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쇠뿔아카시아와 공생관계를 이루는데, 쇠뿔아카시아에게서 집을 제공받으며, 이파리에서 벨트체beltian body를, 꽃 밖 꿀샘에서는 꿀을 얻는 대신 쇠뿔아카시아를 보호하여 다른 생명체가 나무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나무를 돌본다. 이들의 성질이 사나워서 큰 동물조차 쇠뿔아카시아에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Acacia.”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Acacia(Accessed August 21, 2015). Heil, Martin, Sabine Greiner, Harald Meimberg, Ralf Kruger, Jean-Louis Noyer, Gunther Heubl, K. Eduard Linsenmair, and Wilhelm Boland, “Evolutionary Change from Induced to Constitutive Expression of an Indirect Plant Resistance”, Nature 430 (July 8, 2004), pp. 205–208.
나는 여기서 그리고 이 글 전체에서 분명 데보라 버드 로즈에게 큰 빚을 졌다. 그녀가 발전시킨 ‘이중 죽음’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특히 Rose, Deborah Bird, “What If the Angel of History Were a Dog?”, Cultural Studies Review 12, no. 1, 2006, pp. 67–78를 참고하라. ‘이중 죽음’은 진행 중인 죽음과 세대의 폭발을 의미한다. 로즈는 자신의 글을 통해 내게 책임을 부여하고 시간을 살아가는 호주인의 방식에 관해 그리고 회복에의 필요성에 관해 가르침을 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Deborah Bird Rose, Reports from a Wild Country: Ethics for Decolonisation, Sydney: University of New South Wales Press, 2004를 보라. 또한 듀크대학교 출판부가 발행하는 중요한 오픈액세스 저널 《환경인문학(Environmental Humanities)》도 참고하라.
[옮긴이주] 본문의 공-산과 자기-제작은 각각 sympoesis, autopoesis를 번역한 것으로, 각각 sympoiesis, autopoiesis에서 ‘i’가 빠진 것인데, 앞서 ‘마감’을 앞두었다는 말에 비춰볼 때 해러웨이가 ‘마감을 지키려는 급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