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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네그리 읽기

공장과 사회, 마리오 뜨론띠

by 인-무브 2025. 6. 26.

공장과 사회

 

마리오 뜨론띠 | 권범철 옮김

 

 

*이 글은 Mario Tronti, 'Factory and Society', in Workers and Capital, trans. David Broder (verso, 2019)를 옮긴 것입니다.

 

『자본』 1권 3편의 끝 부분에서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다룬 후,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두 측면을 구별하는 것으로, 따라서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 형태를 고찰할 수 있는 두 관점을 구별하는 것으로 돌아간다. 노동 과정과 가치화 과정이 그것이다. 첫째,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취급하지 않고, 생산수단을 자신의 생산 활동을 위한 재료로서 소비한다. 둘째,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노동력을 소비하는 것은 자본이다. 이미 노동 과정에서 자본이 노동에 대한, 노동력에 대한, 그러므로 노동자에 대한 지배로 발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치화 과정에서만 강압적인 관계가 발전하며, 이는 노동계급에게 잉여노동을 강제하고 따라서 잉여가치의 생산을 강제한다. 자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치화 과정과 노동 과정의 통일을 포획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고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가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의 주인이 되어 사회적 관계의 전체 망에 침범할수록, 자본은 더욱더 그 통일을 포획할 수 있다. 자본은 노동을 가치의 창조자로 설정하지만 ―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 그 다음에는 가치를 자기 자신의 가치화로 이해한다 ―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자본은 노동 과정을 가치화 과정으로만 이해한다. 자본은 노동력을 자본으로만 이해한다. 자본은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의 관계를, 가치를 창조하는 힘과 가치 자체의 관계를 변혁한다. 자본은 전체 사회적 노동 과정을 자본의 가치화 과정 내에서 회수할 수 있을수록, 노동력을 자본 내에 통합시킬 수 있을수록 더욱더 그렇게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관계의 부르주아적 신비화에서 이 마지막 두 과정은 서로 손을 잡고 평행하게 진행되며, 둘 다 객관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그 두 과정은 통일 속에서도 구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서로를 배제하는 모순적인 과정들로서 서로 대립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는 자본의 소멸을 위한 물질적인 지렛대로서 그 뿌리는 자본 체계의 결정적 지점에 있다.

 

누구든 과거노동이 자본에 의해 매일 위장되는 절차를 볼 수 있다. 이것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그러한 노동의 공적을 열렬히 칭송하는 이유다. 사실 산 노동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협력하는 것은 노동 수단으로서의 이 노동이다. 이런 이유로 노동의 중요성은 노동이 취하는 자본의 형상에 귀속된다. 이 경우 노동의 자본주의적 형태는 노동이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 생산수단과 일치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실무자들과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인들은 ... 생산수단과 그것이 오늘날 쓰고 있는 적대적인 사회적 가면을 분리시켜 생각할 능력이 없다”[1]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따라서 과거노동은 어떤 자연력처럼 자본에게 무상 서비스를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과거노동이 산 노동에 의해 투자되고 작동될 때, 그것은 확대된 규모로 자기 자신을 자본으로 축적하고 재생산한다. 산 노동 자체가 이 과정 안에서 그것의 발전의 필수 부분으로 완전히 포획되고 삼켜지는 절차를 통찰하기란 좀 더 어렵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오래된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산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2] 이런 이유로 노동은 “끊임없이 증대되는 자본 가치를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유지하고 영속화한다.”[3] 그리고 생산수단의 효율성, 부피, 가치의 성장이 커질수록 더욱더 그러하며, 생산력의 발전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축적이 커질수록 더욱더 그러하다. “노동의 이러한 자연력은 자본의 자기보존을 위해 자본에 통합된 힘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마치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이 자본의 내재적 속성으로 나타나며, 또 자본가에 의한 잉여노동의 끊임없는 전유가 자본의 끊임없는 자기가치화로 나타나는 것과 똑같다.”[4]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잉여가치와 노동력의 가치를 “사회적 총자본의 부분”[5]으로 자기 자신에게 재현하며, 이것이 자본주의적 관계 특유의 성격, 즉 “가변자본은 산 노동력과 교환되며, 따라서 노동자는 생산물로부터 배제된다는 사실”[6]감춘다.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모든 발전된 형태들이 협력 형태들인 한,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발전은 “자본가와 노동자가 생산물의 형성에 각자 공헌한 몫에 따라 생산물을 나누는 하나의 연합관계인 듯한 그릇된 외관”[7]을 다시 제기하고 일반화한다. 이것이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 수준에서 노동자의 급여가 노동의 가격 노동의 가치를 화폐적 측면에서 표현하는 필연적이거나 자연적인 가격 ― 으로 나타나는 기초이다. 맑스가 노동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라는 실체적 관계의 상상적 표현, 비합리적 정의, 현상적 형태라고 말한 것은 옳다. 그러나 이 외관 이면에는 어떤 필연성이 있는가? 그 외관은 실재적 관계의 실체를 감추려는 주체적인 선택인가, 아니면 오히려 이 관계의 메커니즘을 기능하게 만드는 실재적인 방식은 아닌가? 이와 관련하여 좋은 예는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이 임금이라는 변형된 형태로 제시되는 방식이다. 임금의 실제 운동은 지불되고 있는 것이 노동력의 가치가 아니라 그 기능의 가치, 즉 노동 자체의 가치임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력이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으로 나타나고 노동의 가치가 임금 형태로 지불되는 것은 필수적이다. 등가 형태의 두 번째 특수성을 생각해보자. 구체 노동이 그 반대인 추상적 인간 노동의 현상 형태가 되는 경우 말이다. 가치 관계 안에서 추상적 인간 노동이라는 것의 일반적인 특질을 보유하는 것은 구체 노동이 아니다. 반대로 추상 속에서 인간 노동이라는 것이 그 자신의 바로 그 본성이다. 구체 노동이라는 것은 그 본성의 실현의 현상적 혹은 한정된 형태일 뿐이다. 이 완전한 전도는 불가피하다. 노동 생산물로 재현된 노동은 그것이 추상적 인간 노동, 즉 인간 노동력의 지출인 만큼만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가치가 “각각의 노동생산물을 하나의 사회적 상형문자로 전환한다”[8]는 것은 사실이지 않을까? 노동력의 가치임금으로, 노동 착취의 자본주의적 형태와 그것의 부르주아적 신비화를 동시에 표현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본성을 제공하지만 전도된 형태로 제공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노동 노동력이 임금으로 변형되는 데 필수적인 매개가 된다. 산 노동이 오로지 가변자본으로서만, 노동력이 오로지 자본의 일부로서만 나타나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노동일의 실제로 지불된 부분을 재현하는 가치는 노동일 전체의 가치 혹은 가격으로 나타나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임금에서는 노동일의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으로의 분할에 대한 어떤 흔적도 사라진다. 모든 노동이 지불된 노동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임금 노동을 다른 역사적 노동 형태들과 구별짓는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것의 생산력 체계)이 발전할수록, 노동의 지불된 부분과 지불되지 않은 부분은 불가분하게 혼동된다. 다양한 임금 지급 형태들은 이 과정의 항구적인 본성을 상이한 수준에서 표현하는 별개의 방식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이 임금 형태로 또는 노동 그 자체의 가치와 가격으로 전환되는 것의 결정적 의의를 알 수 있다. 현실적 관계를 은폐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관계를 보여주는 위에서 논의한 현상형태야말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일체의 정의관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체의 신비화, 자유에 대한 자본주의의 모든 환상, 속류경제학의 모든 변호론적 속임수의 토대가 되고 있다.”[9] 임금의 “가장 다양한 형태들”의 역사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 전체를 따라가는 경로를 그릴 수 있다. 그 안에서 확립되는 점점 더 복잡한 내적 통일, 노동 과정과 가치화 과정 간의, 노동과 노동력 간의, 자본의 가변 부분과 불변 부분 간의, 따라서 노동력과 자본 간의 내적 통일 말이다.

 

임금은 다른 관점에서 고찰된 임금 노동에 불과하다. 임금에서, 생산의 행위자로서 노동의 규정된 성격은 분배의 규정으로 나타난다. 임금은 임금 노동을 전제하며, 이는 이윤이 자본을 전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한정된 분배 형태는 생산조건들의 한정된 사회적 성격과 생산 행위자들의 한정된 사회적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10] 임금은 “생산과 분배의 조야한 분리”[11]를 이미 완전히 초월한다. 우리가 생산에 참여하는 한정된 방식은 분배의 특수한 형태를 규정한다. “따라서 분배 관계들과 분배 양식들은 생산 행위자들의 이면裏面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12]

 

“생산 자체를 규정하는 이 분배 형태가 생산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는 생산 〔영역〕 자체에 속하는 문제라는 것이 극명하다.”[13] 한편으로 생산과 분배 사이, 다른 한편으로 생산과 소비 사이를 매개하는 계기는 교환이다. 첫 번째 경우 교환은 생산에 직접 포함되는 행동이며, 두 번째 경우 교환은 생산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 소비를 위한 교환이 노동 분업을 전제하는 것, 사적 교환이 사적 생산을 전제하는 것, 교환의 규정된 강도와 확장이 생산의 규정된 확장과 조직을 전제하는 것이 실제로 참이라면 말이다. 이것이, 생산과 소비 사이의 직접적인 동일성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일반적으로 이루어져 온 토대이다. 즉 소비적 생산과 생산적 소비가 실제로 있는 정도로 말이다. 또는 우리는 그것들 사이의 상호 의존을 발견하게 되는데, 소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생산과 생산의 목적으로서의 소비가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는 다른 하나의 실현으로 제시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소비는 생산물을 소비하고, 생산은 소비를 생산한다. 그러나 맑스 자신은 이미 이러한 대립물들의 헤겔적 동일성을 사용하는 박식한 사회주의자와 단조로운 경제학자들을 조롱했다. 우리는 이 목록에 박식하며 단조로운 속류 사회학자들을 추가하기만 하면 된다. 비록 그들은 사회주의자도 경제학자도 아니지만 말이다. 맑스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과 소비는 ... 어떤 경우에나 생산이 실제적인 출발점이고, 따라서 지배적 계기 ... 전체 과정을 집약하는 행위가 되는 한 과정의 계기들로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모두 총체성의 분절들, 하나의 통일체 내에서의 차이들”[14]이라는 것이다. 이 통일체는 “유기적 전체”로 구성되며, 이 전체 내부의 다양한 계기들이 상호 작용을 개시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생산 역시 그 일면적 형태에서 다른 계기들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생산은 생산의 대립적인 규정에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계기들에 대해서도 지배적 계이다.” 과정이 지속적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것은 생산으로부터이다. “따라서 일정한 생산〔양식〕이 일정한 소비, 분배, 교환〔양식〕과 이 상이한 계기들 상호간의 일정한 관계들을 규정한다.” 맑스로부터 이 기본 개념들을 불러내야 할 필요 자체가 “역사를 분배의 영역으로 추방하는 한편, 생산을 영원한 진리로 설명하는 그 경제학자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는 너무나 많은 “맑스주의자들”의 객관적 존재에 대한 훌륭한 증거이다.[15]

 

우리가 생산 과정에서 자본을 직접 고찰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근본적 계기들을 지속적으로 구별해야 한다. 1)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여기서 생산 관계는 그것의 가장 단순한 형태로 나타나며 노동자나 자본가에 의해 즉각 포착될 수 있다. 2)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이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사회적 생산력들의 발전과 그것들의 노동으로부터 자본으로의 직접적인 이전을 동시에 갖는 자본주의적 생산이다. 오로지 이 지점에서만, 노동의 모든 사회적 생산력들이 자본의 자율적인 내적 힘들로 나타날 때만, 우리는 전체 유통 과정을 그 모든 풍부함 속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잉여가치의 실현은 그것을 생산하는 특정한 조건을 감출 뿐 아니라, 그것의 실질적인 창출로 나타난다. 이러한 외관 역시 체계에 기능적이다.

 

 

노동 시간 옆에 유통 시간이 나란히 있다. 잉여가치의 생산은 유통 과정에서 새로운 규정들을 받는다. “자본은 자기의 변형들의 순환을 통과한다. 마지막으로는 말하자면 자기의 내부적인 유기적 삶으로부터 외부적인 삶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은 자본과 노동이 아니라 자본과 자본, 그리고 또다시 단순한 구매자와 판매자로서 개인들이다.”[16] 이 지점에서 자본의 모든 부분들은 동일하게 초과 가치의 원천으로 나타나고, 이러한 이유로 이윤의 기원으로 나타난다. 잉여노동의 갈취는 그 성격을 상실한다. 잉여노동과 그것의 특정한 관계가 모호해진다. 이것이 바로 노동력의 가치가 임금 형태로 변형되는 것이 아주 유용한 이유다. 잉여가치의 이윤으로의 전환은 사실상 생산 과정뿐 아니라 유통 과정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그러나 이 전환 양식은 생산 과정 내에서 이미 일어난 바 있는 전도된 관계의 더 나아간 발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전도는] 노동의 모든 주체적 생산력들이 자본의 객관적 생산력들로 제시될 때 일어난다. “한편에서는 산 노동을 지배하는 가치 또는 과거노동이 자본가로 인격화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는 벌거벗은 물질적인 노동력, 하나의 상품으로서 나타난다.”[17] 더욱이 “직접적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통일로서의 실제적인 생산과정은 새로운 구성체들을 낳는데, 이 구성체들 속에서는 내부 연결의 잎맥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생산관계들은 서로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가치의 구성부분들이 서로 독립된 형태로 굳어진다.”[18]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가장 단순한 범주들, 즉 상품과 화폐를 분석할 때 이미, 우리는 사회적 관계를 사물들 자체의 속성으로 변형하고 생산 관계 자체를 하나의 사물로 변형하는 신비화 과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자본에서 그리고 그 연속적인 규정들의 발전과 함께 “이 전도되고 저주받은 세계”는 발전하며 점점 더 멀리 자신을 부과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초에서 상품으로서의 생산물의 존재와 자본의 생산물로서의 상품의 존재에는 “생산의 사회적 특성들의 사물화와 생산의 물질적 토대들의 인격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전체를 특징짓는다.”[19]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뿌리를 내리는 곳이 처음에는 상대적 잉여가치이고 그 다음은 잉여가치의 이윤으로의 변형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들의 특수한 발전 형태이다. 이 사회적 생산력들이 노동자와 대립하는 자본의 자율적인 힘들로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그것들이 실제로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지배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가치와 잉여가치를 위한 생산은 ...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즉 상품의 가치를 실제로 지배적인 사회적 평균 이하로 감소시키려는 끊임없이 작용하는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 비용가격을 최소한도로 감축시키려는 압력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상승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물론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상승은 여기에서는 다만 자본 생산성의 끊임없는 증대로서 나타날 뿐이지만.”[20] 우리는 생산수단의 절약, 불변자본 사용의 절약, 그와 함께 노동의 절약에 있어 자본가의 광신만을 생각하면 된다.

 

“자본은 산 노동의 직접적 사용을 필요한 최소한도로 축소하며,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이용하여 생산물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끊임없이 삭감하려는 경향, 즉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산 노동을 될 수 있는 대로 절약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자본은 또한 최소한으로 감축된 이 노동을 가장 경제적인 조건에서 사용하려는 경향, 즉 사용되는 불변자본의 가치를 최소한도로 감축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21] 이윤율의 증가는 불변자본의 생산에 사용된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에 대한 좀 더 현대적인 이용뿐 아니라 “불변자본 자체의 사용의 절약에서”도 나온다. 이 절약은 생산수단들의 최고도의 집적에 근거해서만 가능해진다. 그 결과 “그것들은 서로 관련이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 또는 기껏해야 작은 범위에서 직접적으로 협업하는 노동자들에 의하여 분산된 형태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공동으로 소비되며 집단적 노동자에 의하여 소비된다.”[22] 생산수단들은 이제 더 이상 상호 연결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에 의해 파편화된 형태가 아니라, 단일한 기준에 기초하여 집단적 노동자에 의해 생산 과정에서 소비된다. 따라서 “대규모 생산에서 발견되는 생산조건들의 절약은 본질적으로 이 조건들이 사회적 노동 또는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의 조건들로서, 따라서 노동의 사회적 조건들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생긴다. ... 이러한 절약이 노동의 사회적 본성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잉여가치가 개별적으로 고려된 개별 노동자의 잉여 노동으로부터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이다.”[23] 그럼에도 불변자본의 절약, 즉 이윤율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한 특정한 도구로서 생산조건들의 사용의 절약은 자본가에게는 노동자와 전혀 무관한 양상으로 나타나며, “다른 어떤 노동에 내재하는 힘보다 더 자본에 내재하는 힘으로 나타나고”,[24]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속성, 따라서 자본가의 기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그다지 이상하게 놀랍지 않은 것은, 그것이 사실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며, 또한 자본 관계가 노동자를 그 자신의 노동의 실현조건들에 대하여 완전한 무관심·고립·소외의 상태에 둠으로써 사실상 내적 연결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즉 산 노동의 담지자와 그의 노동의 물질적 조건들의 경제적 사용, 즉 합리적·절약적 사용 사이에 생기는 소외와 무관심”을 만들어 낼 정도로 말이다.[25]

 

따라서 노동의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본성을 통해 노동 조건에 대한 자본의 더욱 더 배타적인 지배는 확장되고 심화된다. 이 지배를 통해, 모든 생산 조건들의 더욱 더 합리적인 사용과 함께 노동력의 자본주의적 이용[착취]은 발전하고 더 특유하게 된다. 이 순간부터 생산수단들은 더 이상 자본가의 객관적 재산만이 아니라 자본의 주체적 기능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생산 과정에서 생산수단들과 대면하게 되는 노동자는 그것들을 단지 생산의 사용가치, 도구, 노동 재료로만 인식한다. 그들은 다시 전체 생산 과정을 단순한 노동 과정으로 보게 된다. 노동 과정과 가치화 과정의 통일은 오직 자본의 수중에만 남아 있다. 이 지점부터 노동자는 자본의 매개를 통해서만 전체 생산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노동력은 이제 자본가에 의해 이용[착취]될 뿐 아니라 자본 내부에 통합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또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발전을 수반한다. 이것은 결국 공장법부터 국가의 파열에 이르는 계급 투쟁의 발전을 수반한다. 노동일의 규제를 위한 투쟁은 서로 대면하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여전히 구매자와 판매자로 본다. 자본가는 잉여노동을 구매할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고, 노동자는 잉여노동을 더 적게 판매할 권리를 옹호한다. “권리 대 권리 ... 평등한 권리들 사이에서는 힘이 결정한다.” 한편에는 집합적 자본가의 힘이, 다른 한편에는 집합적 노동자의 힘이 있다. 입법의 매개를 통해, 법의 개입을 통해, 법적 권리의 사용을 통해 ― 즉 정치적 지형에서 ― 개별 자본가와 고립된 노동자 사이의 매매 계약이 처음으로 자본가 계급과 노동 계급 사이의 힘 관계로 변형된다. 그리고 이 변형으로 인해 우리는 계급들 간의 일반적 대결이 단독으로 펼쳐질 수 있는 이상적인 지형을 포착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 그 탄생에서 이것은 실제로 사태가 이루어진 방식이다. 이 순간에 대한 가능한 일반화를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것을 구별하는 특정한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이 특정한 유형의 자본주의 발전 내에서 기능했던 일정한 방식 말이다. 맑스가 절대적 잉여가치에서 상대적 잉여가치로, 즉 노동 과정을 발견한 그대로 지배하는 자본에서 이 노동 자체를 자신의 이미지로, 자신의 닮은꼴로 주조할 때까지 뒤집는 자본으로의 이행을 다루는 바로 그 때 노동일에 관한 장을 도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노동일 규제를 위한 투쟁은 이 과정의 한가운데에서 제기된다. 노동일의 연장을 향한 자본의 자연적인 충동을 감안할 때,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머리를 맞대고 살아있는 힘을 통해 국가로부터 법을, 즉 그들이 “자본과의 자발적 계약을 통해” 노예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막는 사회적 장벽을 확보한 것은 사실이다. 노동계급 투쟁은 자본가가 자신의 지배 형태를 바꾸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노동력의 압력은 자본이 자신의 내적 구성composition을 수정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수 요소로서 자본 내부에 개입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을 내부로부터 전진시켜서, 사회적 삶의 모든 외적 관계들에 침투하도록 그 생산을 추동하는 지점에 이른다. 가장 진보한 발전 단계에서 노동 조건으로부터 분리되어 자본에 통합된 노동자의 자발적 기능으로 나타나는 것이 좀 더 후진적인 단계에서는 노동력의 고갈을 방지하고 동시에 진정한 자본주의적 착취를 위한 토대를 놓을 사회적 장벽의 법적 필요로 나타난다. 정치적 매개는 이 각 순간에서 특정한 자리를 맡는다. 부르주아적 정치 지형이 자본주의 사회의 하늘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물질적 생산양식의 변화와 이에 상응하는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처음에는 노동일의 한계를 무제한으로 확대했고, 다음에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휴식시간을 포함하는 노동일을 법률에 의해 제한하고 규제하고 균일화하는 사회적 통제를 초래했다.”[26] “노동의 시간·한계·중단을 군사적 획일성으로 시계의 종소리에 맞추어 규제하는 이 모든 세밀한 규정들은 결코 의회 의원들의 공상의 산물이 아니었다. 세밀한 규정들은 근대적 생산양식의 자연법칙으로 당시의 상황에서 점차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27] 영국 의회는 경험을 통해 “노동일의 제한과 규제를 어렵게 하는 [생산]과정의 본성에 따른 소위 장애물들을 하나의 단순한 강제법으로 일소할 수 있다”[28]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산업 부문에 도입된 공장법은 공장주에게 절대적인 한계를 가했고, 이는 그로 하여금 그 어떤 기술적 장애물도 제거하도록 만들었다. 공장법은 “이와 같이 매뉴팩처 체계를 공장체계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요소들을 인위적으로 빨리 성숙시키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은 투자의 증대를 필요하게 함으로써 소규모 장인들의 몰락과 자본의 집적을 촉진한다.”[29] 이런 의미에서 “공장법, 즉 생산과정의 자연발생적 발전 형태에 대한 사회의 최초의 의식적이며 계획적인 반작용은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면사·자동기계·전신과 마찬가지로 대공업의 필연적인 산물이다.”[30] 여러 조사 위원회들의 결과와 국가의 폭력적인 개입을 통해 집합적 자본가는 먼저 개별 자본가를 설득하려 하고, 그 다음에는 개별 자본가가 자본주의 사회적 생산의 일반적 필요에 순응하도록 강제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노동력의 착취는 노동을 절약하면서도 일어날 수 있는데, 이는 자본의 불변 부분의 지속적인 증가가 불변 자본 자체의 사용에서 점증하는 절약과 함께 진행되기 때문이다. 오직 이러한 기반 위에서만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화와 그것의 더 높은 수준으로의 발전이 가능해진다. 정치적 지형에서의 계급들 간의 충돌, 계급 투쟁의 정치적 매개는 이 경우 특정 발전 단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 발전이 자신만의 자율적 메커니즘을 정복하게 되는 전제 조건이었다. 이 메커니즘은 매우 멀리까지 나아가서 정치적 매개, 즉 계급 투쟁 자체의 정치적 지형을 내부적으로 회수하는 지점까지 도달한다. “노동계급의 육체와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직종으로 공장법의 전반적 확대가 불가피하게 되었다면, 다른 한편 이 확대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소규모의 고립된 다수의 사업체들이 대규모의 소수의 결합된 사업체로 전환하는 것을 촉진하며, 따라서 자본의 집적과 공장 체계의 배타적 지배를 가속화한다. 공장법의 확대는 자본의 지배가 아직도 부분적으로 은폐되고 있는 낡은 형태들과 과도적 형태들을 분쇄하고, 이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지배로 대체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공장법의 확대는 자본의 지배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도 일반화한다.”[31]

 

이것은 무엇보다도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시작하여 필연적으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도달한 오랜 역사적 과정의 도래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노동일의 강제적 연장에서 노동의 생산력의 겉으로 보기에는 자발적인 증가로, 생산 과정 전반의 순수하고 단순한 확장에서 그 내적 변형으로 나아간 과정의 도래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내적 변형은 노동 과정의 지속적인 변혁으로 이어지는데, 노동 과정은 가치화 과정의 기능 속에 있게 되며 그것에 점점 더 유기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이전에는 생산 영역과 다른 사회적 영역 사이에 쉽게 확립되는 관계였던 것이 이제는 생산 영역 내부의 변형과 다른 영역들 내부의 변형 사이의 훨씬 더 복잡한 관계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부르주아 사회 사이의 훨씬 더 매개된, 더 유기적이고 더 신비화된 관계 ― 동시에 더 자명하면서 더 은폐된 ― 가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규정적 관계가 일반적인 사회적 관계를 더욱 더 관장할수록, 그것은 이 후자 내에서 주변적 특수성으로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사회적 관계들의 전체성에 더 깊이 침투하고 더 나아가 퍼져갈수록, 사회는 생산에 상대적인 전체성으로 나타나고 생산은 사회에 상대적인 특수성으로 나타난다. 특수한 것이 자신을 일반화하거나 보편화할 때, 그것은 일반적인 것, 보편적인 것에 의해 재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서 생산의 일반화는 사회의 실체화hypostatisation로 표현된다.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이 이미 전체 사회적 관계망을 직조했을 때, 그것 자체가 일반적인 사회적 관계로 출현한다. 마찬가지로 현상적 형태들이 직접적인 자발성과 함께 평범한 사유 형태들로서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실체적 관계는 과학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실재에 대한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이해에 갇히게 된다면, 우리는 이 실재를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그 외관에서 전도되어 있는 그대로 재생산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실재적 관계들의 내밀한 물질적 결합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선 그 대상 ― 부르주아 사회 ― 을 그 모든 신비화된, 이데올로기화된 현상 형태들로부터 벗겨내고 분리하여 그 은폐된 실체 ―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 를 공격하는, 과학적으로 꿰뚫어 보는 이론적 노력이 필요하다.

 

레닌은 자신의 인상적인 저작,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대규모 기계화 공업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구절에서 그는 먼저 공장factory에 대한 과학적 개념이 그 단어에 대한 평범하고 상식적인 이해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규명한다. “우리의 공식 통계와 일반적으로 우리 문헌에서 공장은 다소간의 규모로 다소간의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는 산업 시설로 이해된다. 반대로 맑스에게 대규모 기계 공업(공장)은 오로지 자본주의가 산업에서 도달하는 특정한 수준, 정확히는 가장 발전된 수준으로만 이해된다.” 그는 『자본』 1권 4부와 특히 매뉴팩처에서 대공업으로의 이행을 언급하는데, 거기서 공장에 대한 과학적 개념은 정확히 “어떤 주어진 국가에서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이 통과하는 형태와 단계”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자본의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만일 자본이 노동력의 가치를 낮추고자 한다면, 불가피하게 노동의 생산력을 증가시켜야 한다. 자본은 가능한 한 많은 필요 노동을 잉여 노동으로 전환하도록 강제된다. 즉 노동 과정의 모든 기술적·사회적 조건을 뒤엎고, 생산양식을 그 내부에서부터 변혁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의 생산력 발전을 통한 노동의 절약은 노동일 단축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의 유일한 목적은 노동력의 생산에 필요한, 따라서 일정량의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즉 노동의 생산력 증가는 무엇보다 그 생산물이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산업 부문을 장악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에 최종형태를 부여하는 노동의 양에 의해 결정될 뿐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수단들에 들어 있는 노동의 양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 따라서 생계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불변자본의 물질적 요소들, 즉 노동수단과 노동재료를 공급하는 산업부문들에서 노동생산성의 증가와 그에 상응하는 상품가격의 저하도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킨다.”[32] 만일 우리가 이 과정을 개별 자본가의 관점이 아니라 전체 자본주의 사회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노동력의 가치가 감소하는 대로, 잉여노동의 일반적 비율이 증가함을 알게 된다. “예외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노동은 강화된 노동으로 작용한다.”[33] 다시 말해 동일한 시간에 그것은 평균적인 사회적 노동이 창출하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한다. 그러므로 가장 완성된 생산양식을 적용하는 자본가는 같은 산업의 다른 자본가들이 전유하는 것보다 노동일의 더 큰 부분을 잉여노동으로 전유한다. “그는 전체로서의 자본이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할 때 수행하는 일을 개별적으로 행한다.”[34] 경쟁의 강제적 법칙은 새로운 생산양식을 도입하고 일반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경쟁 자체, 자본의 외적 운동은 “천체의 외관상의 운동이 감각적으로 직접 인식할 수 없는 천체의 진정한 운동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이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쟁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자본의 내적 본성을 파악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35]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잉여가치의 일반적인 비율이 이 시점에서 지속적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시키고, 노동 과정의 조건을 변혁하며, 자본주의적 사회적 생산양식을 일반화하고 가속화해야 한다. 이 기본적인 사실은 자본주의를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서 가공할 역사적 체계로 만들어 나갔다.

 

자본주의적 발전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상대적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 내부의 모든 변천과, 노동과정과 가치화 과정 사이의 구별되고 점점 더 복잡해지는 통일과, 노동 조건의 격변과 노동력 착취 사이의 통일과, 한편으로는 기술적·사회적 과정의 결합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폭정 사이의 통일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더 진전될수록, 즉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의 침투와 확장이 커질수록, 생산-분배-교환-소비는 더욱 필연적으로 완전한 순환을 형성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과 사회의, 공장과 사회의, 사회와 국가의 관계는 점점 유기적이 된다. 자본주의적 발전의 최고 수준에서 이 사회적 관계는 생산관계의 한 계기가 되고, 사회 전체가 생산의 한 마디가 되며, 사회 전체가 공장의 기능으로 살아가고 공장은 자신의 배타적인 지배를 사회 전체로 확장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정치적 국가 기계는 점점 더 집합적 자본가의 형상과 동일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점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소유물이 되고, 따라서 자본가의 기능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일원론적 구성composition의 과정은 그 생산의 특정한 발전에 의해 부과되며, 더 이상 형식적으로라도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치적 지형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국가의 정치적 기능이 사회 내로 회수되기 시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계급 사회라는 작은 차이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또한 현대 정치국가를 자본과 노동이 대치하는 중립적 지형으로 보는 이들에 대한 분파적 대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맑스는 맑스주의 정치 사상에서 결코 능가된 적이 없는 예언적인 말을 했다. “사회의 한쪽 끝에는 노동조건들이 자본의 형태로 집적되며, 다른 한쪽 끝에는 자기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팔 것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팔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만으로도 불충분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전은 교육·전통·관습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조건을 자명한 자연법칙으로 이해하는 노동계급을 발전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조직은, 일단 완전히 발전하면 일체의 저항을 타파한다 ... 경제적 관계의 무언의 강제는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지배를 확고히 한다. 직접적인 경제외적 폭력도 물론 여전히 사용되지만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다. 보통의 사정에서 노동자는 “생산의 자연법칙”에 내맡겨 질 수 있다. 즉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의존에 기대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생산 조건들 자체로부터 일어나며 그것들에 의해 영구히 보장된다.”[36]

 

그러나 이 과정 안에서 기능하는 도구들 중 하나는 바로 일정한 발전 수준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부르주아 사회 사이에, 생산관계와 사회적 관계 사이에 확립되는 신비화된 관계다. 이 신비화된 관계는 사회적 생산관계의 핵심에서 일어난 변형의 결과일 뿐 아니라, 이 관계가 다시 한 번 자연법칙으로 간주되기 위한 전제다. 공장이 사회 안에 있는 특수한 사실일 때― 본질적인 사실이긴 하지만 ― 그것이 전체 실재와 구별되는 자신의 특유한 특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역설적이다. 그렇지만 공장이 자신의 통제를 사회 전체로 확장하면 ― 모든 사회적 생산이 산업 생산으로 바뀌면 ― 공장의 특유한 특성은 사회의 일반적인 특성 속에서 상실된다. 사회 전체가 공장으로 환원되면, 보통 우리가 말하는 그런 공장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더 높은 실재적 수준에서 부르주아 변형태의 최대한의 이데올로기적 발전이 반복되고 완결되는 물질적 토대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가장 높은 발전 수준은 모든 부르주아 사회적 관계들의 가장 깊은 신비화를 시사한다. 프롤레타리아화의 실재적 증가 과정은 서비스화[3차 산업화]라는 형식적 과정으로 나타난다. 모든 노동 형태의 산업 노동으로의 환원, 모든 노동 유형의 노동력 상품으로의 환원은 노동력 자체의 상품으로서의 소멸로,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의 생산물로서의 가치절하로 나타난다. 임금으로 모든 노동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이윤의 절대적 부정으로, 즉 노동계급 잉여 노동의 절대적 소거로 나타난다. 자신의 가치화 과정의 점증하는 필요에 따라 노동 과정을 탈구성하고 재구성하는 자본은 이제 스스로 조직하고 따라서 발전하는 사회의 객관적인 잠재력으로 나타난다. 시민사회의 바로 그 구조 내부로의 국가의 정치적 기능들의 귀환은 국가와 사회의 모순으로 나타나며, 정치와 경제의 점점 더 협소해지는 기능성은 경제적 관계로부터 정치적 영역의 자율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한마디로 자본의 집적과 그와 동시에 공장 체제의 배타적 지배 ― 현대 자본주의의 이 두 가지 역사적 결과 ― 는 전도된다. 첫 번째는 일정한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의 소멸로, 두 번째는 특유의 생산관계로부터 공장의 배제로 전도된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은 사회 일반의 객관적인 부로 나타나고 공장은 ‘사회적’ 자본의 특수한 생산양식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속류 사회학자의 조악한 부르주아적 관점에 사태가 나타나는 방식이다. 학자조차 임금 노동자로 환원될 때, 임금 노동은 과학적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더 나아가 테크놀로지로 불리는 그릇된 부르주아 과학의 배타적 적용 지형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덧붙이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전개될 때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레닌의 말처럼 “발전 과정에 있는 어떤 살아 있는 현상을 재현하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불가피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딜레마에 직면한다. 사실을 앞서가거나 뒤처지거나.”

 

이것은 영구히 활용되어야 할 방법론적 원리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직업 혁명가들’의 온건한 영혼에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그 험악한 일방주의를 채택하도록 강제할 때조차도 말이다. 이 접근법이 물론 정신의 변덕이 아니라 ― 따라가야 할 것이 아니라 선취해야 하는 ― 객관적인 발전의 실제 과정으로 나타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아무도 우리가 생산 외부에 있는 세계의 존재를 잊어버리길 바라지 않는다. 한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다른 부분들과 비교하여 이 부분의 본질적인 성격을 인식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특정 요소가 본성상 스스로를 일반화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노동계급 관점의 과학적 일방주의는 신비한 일자로의 환원reductio ad unum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생산의 관점에서 분배, 교환, 소비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 내에서는, 가치화 과정의 관점에서 노동 과정을 보고 노동 과정의 관점에서 가치화 과정을 보는 것이다. 즉 생산 과정의 유기적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생산, 분배, 교환, 소비의 통일성을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이 과정의 역동적 전체성은 집합적 자본가의 부분성이나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자의 부분성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전자가 보수적인 외양의 모든 전제적 기능성과 함께 그것을 드러낸다면, 후자는 혁명적 발전의 모든 해방적 힘과 함께 그것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적 관계는 사회를 수단으로, 생산을 목적으로 이해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을 위한 생산이다. 생산의 바로 그 사회성은 사적 전유를 위한 매개체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 사회적 관계는 결코 생산관계와 분리되지 않는다. 생산관계는 공장의 사회적 관계와 점점 더 동일해진다. 마찬가지로 공장의 사회적 관계는 점점 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내용을 획득한다.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는 모든 정치적 관계를 사회적 관계에, 모든 사회적 관계를 생산관계에, 모든 생산관계를 공장의 관계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만이 공장 내부로부터의 역逆경로를 이어서 시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집합적 노동자라는 적대적 형상을 자신의 상image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려 하는 자본가의 투쟁을 말이다. 자본은 바로 노동 고유의 지형에서 노동을 공격한다. 자본은 오직 노동 내부로부터 집합적 노동자를 해체하고 그런 다음 고립된 노동자를 통합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그저 한편에는 생산수단을 다른 한편에는 노동자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편에는 모든 노동 조건을 다른 한편에는 일하는 노동자를 갖고 있다. 노동과 노동력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둘 다 자본 안에 통일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가장 현대적인 자본주의의 이상ideal은 개별 자본가와 고립된 노동자가 계약하는 단순한 매매의 원시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전자는 독점이라는 사회적 권력을 보유하지만, 후자는 자신의 노고로 받는 급여에 개별적으로 종속된다. 이 경제적 관계 자체에 의한 무언의 강제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지배를 보증한다. 현재의 공장법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합리화다. 공장 내 규칙은 전체 사회에 대한 “공장 체계의 배타적 지배”[37]를 승인할 것이다.

 

이것이 이 동일한 지배에 맞선 “직접적인 투쟁을 일반화한다”는 것은 사실이다.[38] 실제로 이 지점에서는 사회적 생산 관계 내에서 사회적 체계에 맞서는 일반적 투쟁을 뿌리 내리는 것이 더 이상 그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 내부에서부터 부르주아 사회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이다. 노동계급에게 충만한 계급 의식을 가지고 자본주의적 발전이 지시하는 길을 따라가는 것은 다시 한 번 필수적이다. 사회의 관점에서 국가를, 공장의 관점에서 사회를, 노동자의 관점에서 공장을 보면서 말이다. 우리의 과업은 집합적 노동자의 형상을 해체하려고 하는 자본에 맞서 집합적 노동자의 물질적 형상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 자신의 유기적 구성의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부분들 내부에서부터 자본의 내적 본성을 해체하기 시작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말이다. 집합적 노동자 내부에서 노동과 노동력을 대립시키려 하는 자본가에게 우리는 자본 자체 내부에서 노동력과 자본을 대립시키며 대응한다. 이 지점에서 자본은 집합적 노동자를 해체하려 하고 노동자는 자본을 해체하려 한다. 이것은 더 이상 힘에 의해 결정되는 권리 대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힘 대 힘의 문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최고 수준에서 벌어지는 계급 투쟁의 최고 단계이다.

 

옛 최대주의의 오류는 이러한 대립을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구상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노동계급을 완전히 자본 외부에 있는 것으로, 그렇게 자본의 일반적 적대자로 이해했다. 그에 따라 그것은 어떤 과학적 이해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모든 실천적 투쟁의 무익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노동자의 관점에서, 우리는 노동계급의 상태가 아니라 자본의 상황을 직접 보아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분석에서조차 자본을 특권적 자리에 두어야 한다. 자본이 체계 내에서 객관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바로 그 특권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자본 전체를 자신과 대립시키려 한다면 물질적으로 자신이 자본의 일부임을 발견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자신을 일반적인 적대자로 제시하려면 자신이 자본의 특수한 요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집합적 노동자는 불변자본으로서의 기계뿐 아니라 가변자본으로서의 노동력 자체와도 대립한다. 노동계급은 자본의 일부로서의 자신을 비롯하여 자본 전체를 적으로 삼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노동은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을 자신의 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노동의 모든 주체적 역량을 자본 안에 객체화할 자본주의의 필요가 노동자의 편에서는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강력한 이해로 전환될 수 있다. 노동계급을 체계 내부에 통합하려는 시도는 결정적인 대응 ― 계급 투쟁을 최고 수준으로 데려가면서 체계 안에서 파열을 일으키는 대응 ― 을 유발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이 필요의 상태에 있게 되는 발전 지점이 있다. 그 순간이 지나가면 자본은 오랜 기간 승리했다. 그렇지만 조직된 노동계급이 한 번이라도 이 지형에서 그것을 깨뜨리는데 성공한다면, 현대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 혁명 모델은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노동력 상품이 자본의 참된 능동적 측면, 즉 모든 자본주의적 역동성의 자연적 고향임을 보았다. 그것은 가치화 과정의 확대 재생산뿐 아니라 노동 과정 자체의 끊임없는 혁명적 격변의 주인공이다. 기술적 변형 자체가 노동력의 가치의 변화에 의해 지시되고 강제된다. 협업과 매뉴팩처와 대공업은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특수한 방법들에, 노동을 절약하는 상이한 형태들에 불과하며, 이것들은 차례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점점 변화시킨다. 자본은 점점 더 노동력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자본은 자신의 생산의 자연력을 보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을 점점 더 전면적으로 보유해야 한다. 자본은 노동계급 자체를 사회의 자연력으로 환원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진전될수록, 집합적 자본가는 모든 노동을 자본 내부에서 보아야할 필요가 커진다. 즉 더욱 더 노동력의 모든 내적·외적 운동을 통제해야 한다. 자본은 사회적 체계의 안정성의 지표로서 자본-노동 관계를 장기적으로 계획하도록 더욱 강제된다. 정확히 말하면, 자본이 자본주의적 생산 외부의 영토를 모두 정복하면, 자본은 내부 식민화의 과정을 시작한다. 혹은 부르주아 사회의 순환 ― 생산, 분배, 교환, 소비 ― 이 마침내 완성되면 우리는 진정하고 참된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노동의 주체적 힘들의 객관적 자본화 과정은 집합적 노동자의, 따라서 그러한 노동자 자체의 물질적 해체 과정을 수반하며 수반해야 한다. 노동자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소유물로 환원되고 따라서 자본가의 기능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노동계급을 체계 내부에 통합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것이 된다. 이 통합에 대한 노동계급의 거부는 체계의 기능을 저해한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의 대안만 남는다. 체계의 역동적인 안정화이거나 노동계급 혁명이거나.

 

 

맑스는 “모든 생산 도구들 중 가장 강력한 생산력은 혁명적 계급 그 자체”라고 말한다.[39]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은 이미 그 자체로 혁명적이다. 그 과정은 의식적이고 살아있는 생산력, 즉 노동계급을 포함하는 자신의 생산력을 끊임없이 운동하게 하고 그 안에서 끊임없는 변형을 작동시킨다.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가 가장 커다란 모순의 기초를 놓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생산력의 끊임없는 발전은 가장 거대한 생산력, 즉 혁명적 계급으로서 노동계급의 끊임없는 발전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집합적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객관적으로 혁명적인 내용을 의식적으로 평가하도록 추동하며, 뒤쳐지고 싶지 않다면 발전을 선취하도록 강제하는 지점에 이른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계급 혁명은 자본주의가 이미 전면적인 파국으로 붕괴한 이후에 올 필요가 없고, 자본주의가 특유의 발전 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올 수도 없다. 혁명은 그 발전과 동시대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혁명은 발전의 내적 요소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내적 모순으로 자신을 제시해야 한다. 노동력이 자본 내부로부터만 자본주의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발전만이 생산력과 사회적 생산관계의 근본적인 모순을 유효하면서 동시에 자명하게 만들 수 있다. 그 발전이 없다면 모순은 C-M-C 수준에서 위기의 가능성과 마찬가지로 실제 사실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으로, 순수하고 단순한 가능성으로 남는다. 생산력 수준은 기술적 진보의 수준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혁명 의식 정도로 측정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전자는 노동자를 자신의 기계의 인간 부속 기관으로만 여기는 자본가의 척도이며, 이것은 노동자를 자신의 기계의 인간 부속 기관으로만 여긴다. 후자는 조직된 노동자 운동의 척도다. 그리고 그 운동은 바로 이 기반 위에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경험에 제동을 걸고 그것을 새장에 가두는 사회적 관계에서 파열 과정을 조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산력 수준과 사회적 생산관계의 모순은 사회적 생산관계에 완전히 내재하는 또 다른 모순의 외적 표현에 불과하다. 또 다른 모순이란 생산 과정의 사회화와 생산물의 사적 전유 사이의, 그 사회성을 탈구성하려 하는 개별 자본가와 그것을 좀 더 진전된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집합적 노동자 사이의, 사장들의 경제적 통합 시도와 노동계급 적대의 정치적 대응 사이의 모순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이야기하는 데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데, 이 과정이 현재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고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대안은 오랫동안 이 지형에서 계속 결정될 것이다.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정치 정당은 이것을 이해한 것 같다. 노동자 운동의 정당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반드시 다른 모든 영속적인 모순들을 제거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이 다른 모순들은 어쩌면 모든 이들에게 훨씬 더 명백할지도 모르고 따라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좀 더 필수적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대신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원리를 포착하는 것이다. 그 원리란, 자본주의 발전의 일정한 수준에서 자본의 여러 부분들 사이의 모든 모순은 노동계급과 자본주의 전체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 지점에서만 사회주의 혁명 과정이 시작된다.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들을 노동계급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이미 이 모순들이 자본주의 자체 내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모순들은 그것들을 생성하는 체계 너머를 가리킨다. 자본주의 내부의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의 유일하게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동계급이 혁명 계급으로 자기조직화하는 순간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분명히 이것은 피억압 계급의 조직화나 임금 노동자의 이익 방어를 뜻하지 않는다. 즉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를 관리하는 통치 계급으로 자신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 계급으로 조직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 체계 내부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자치다. “이중 권력” 공식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의식이 외부로부터 노동자에게 주어져야 하는지,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당인지는 오늘날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해결책은 이미 존재하며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해, 즉 부르주아 사회의 한계에 도달한 자본주의 생산에 의해, 이제 사회 전체에 자신의 배타적 지배를 부과하는 공장에 의해 직접 지시된다. 정치적 의식은 실제로 당에 의해 야기되어야 하지만, 생산 과정 내부로부터 그래야 한다. 오늘날 아무도 우리가 노동계급의 정치적 조직화 없이, 노동계급 정당 없이 혁명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이렇게 생각한다. 당이 공장으로부터 단절된 채 남아있으면서도 혁명을 지도할 수 있다고, 정치적 행동은 생산관계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고, 체계에 맞선 일반적인 투쟁은 그 동안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적 필요의 특수한 표현이 된 부르주아 국가의 정점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이것은 국가 기계의 레닌주의적 파열을 단념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자. 그것은 민주주의의 길로 향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오히려 그것은 이 국가의 파열을 사회 내부에 기초하는 것, 사회의 소멸을 생산 과정 내부에 기초하는 것, 생산관계의 파괴를 공장의 사회적 관계 내부에 기초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부르주아 국가 기계는 자본주의 공장 내부에서 파괴되어야 한다.

 

우리의 분석이 『자본』에서 시작하든 자본주의 발전의 실제 수준에서 시작하든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여전히 지금 우리는 이 결론이 입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경로를 따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고, 점점 다른 모든 문제의 역사적 마디가 되는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어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해야 하는 이유는 노동 운동의 일부를 파국적 붕괴에 대한 기회주의적 기대 속에 잠들게 하고, 그에 따라 체계를 영원히 안정화시키는 자율적 메커니즘 속으로 노동자 운동의 또 다른 일부를 통합시키는 데 기여한 모든 이데올로기적 외피로부터 이 이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논증의 후속조치로서 이것을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론적 분석을 위해서든 실천적 투쟁을 위해서든 우리가 가장 올바른 길에 다시 들어서야 할 주된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충분하다. 공장-사회-국가. 이것은 과학적 이론과 전복적 실천, 자본주의 분석노동계급 혁명이 오늘날 만나는 지점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길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오늘날 공장에 대한 ‘과학적 개념’은 현재에 대한 가장 완전한 이해와 동시에 그것의 가장 완전한 파괴로 가는 길을 연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것은 새로운 건설의 출발점으로 제기된다. 이 건설이 사회주의 사회의 새로운 생산관계 내부에서 노동자 국가를 완전히 성장시키고자 한다면 공장에서 시작해야 한다.

 

1962

 


[1] Karl Marx, Capital, Volume 1, translated by Ben Fowkes, London: Penguin, 1990, 757[(한국어판)『자본론 제I권(하)』,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1, 830].

[2] Ibid., 755[827].

[3] Ibid[827].

[4] Ibid., 755-6[827-829].

[5] Ibid., 776[853].

[6] Ibid., 670[718].

[7] Ibid., 670-1[718].

[8] Ibid., 167[95].

[9] Ibid., 680[730].

[10] Marx and Engels, Collected Works (MECW), Vol. 37, 868[『자본론 제III권(하)』,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4, 1070]

[11] MECW, Vol. 28, 25[『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I』, 김호균 옮김, 그린비, 2007, 55].

[12] Ibid., 32[65].

[13] Ibid., 34[66-67].

[14] Ibid., 36[63, 69].

[15] Ibid., 34[69, 66].

[16] MECW, Vol. 37, 48[『자본론 제III권(상)』, 48].

[17] Ibid., 49[50].

[18] Ibid., 815[『자본론 제III권(하)』, 1008].

[19] Ibid., 867[1068].

[20] Ibid[1069].

[21] Ibid., 90[『자본론 제III권(상)』, 99].

[22] Ibid., 82[90].

[23] Ibid., 82-3[90-91].

[24] Ibid., 88[96].

[25] Ibid., 89[96-97, 98]

[26] Capital, Vol. 1, 412[401].

[27] Ibid., 394-5[379].

[28] Ibid., 607[639].

[29] Ibid[같은 쪽].

[30] Ibid., 610[643].

[31] Ibid., 635[675].

[32] Ibid., 432[427].

[33] Ibid., 435[431].

[34] Ibid., 436[431].

[35] Ibid., 433[428].

[36] Ibid., 899[1013].

[37] Ibid., 635[675].

[38] Ibid[같은 쪽].

[39] MECW, Vol. 6, 212. [(한국어판) 칼 맑스, 「철학의 빈곤」, 최병연 옮김,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1991, 295].

 


 

*Verso 출판사의 Workers and Capital 소개:

https://www.versobooks.com/en-gb/products/101-workers-and-capital

 

Workers and Capital

Workers and Capital is universally recognised as the most important work produced by operaismo, a current of political thought emerging in the 1960s that revolutionised the institutional and extra-parliamentary Left in Italy and beyond. In the decade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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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자본'(Workers and Capital)은 1960년대에 등장하여 이탈리아는 물론 전 세계의 제도권 및 의회 밖 좌파를 혁신시킨 정치 사조인 오페라이스모(operaismo)가 내놓은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1966년 첫 출간 이후 10년 동안 '노동자와 자본'을 둘러싼 논쟁은 수천 명의 활동가들에게 새로운 분석 방법과 어휘를 제공했으며, 이는 새로운 형태의 작업장, 활력, 공동체 투쟁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신자본주의'(neocapitalism), '계급 구성'(class composition), '대중 노동자'(mass-worker), '자본의 계획'(the plan of capital), '노동자 조사'(workers’ inquiry), '공동-연구'(co-research)와 같은 개념들은 이탈리아 좌파가 구사하는 정치적 어휘에 확고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했다. 첫 출간 이후 5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노동자와 자본'은 국제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텍스트이지만, 이제서야 처음으로 영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뜨론띠의 이 저작은 단순히 1960년대 격렬했던 정치적 갈등의 유물이 아니라, 최근 수십 년간 노동의 본질과 계급 구성에서 나타난 강력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탁월한 도구들을 제공한다.

 

** Verso 출판사 블로그, "Mario Tronti and the many faces of autonomy" (Seth Wheeler, 2019.08.29.)

https://www.versobooks.com/en-gb/blogs/news/4423-mario-tronti-and-the-many-faces-of-autonomy

 

Mario Tronti and the many faces of autonomy

The long-awaited recent translation of Mario Tronti’s Workers and Capital into English will no doubt help to reposition the concept of autonomy in the lexicon of the Anglophone left. This concept has taken on multiple and shifting meanings through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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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성(Autonomy)과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Autonomist Marxism)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Autonomist Marxism)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오페라이스모(Operaismo)와 아우토노미아(Autonomia)라는 두 역사적 사회 운동의 혼합과 관련된 지적 작업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다. '오페라이스모'(문자 그대로 '노동자주의')는 더 나은 임금, 노동 조건 및 시간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발전했으며, 이탈리아의 소위 '느린 5월'(Creeping May) 동안 영향력을 키웠다. 이 명칭은 1968년 파리 사건과의 기원상의 유사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확장성과 강도의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오페라이스모 경향은 이탈리아의 두 거대 좌파 정당인 이탈리아 공산당(PCI)과 이탈리아 사회당(PSI)의 정치 문화 내에서 처음 발전했다. 이론적으로 이는 '노동자 관점'(workers’ point of view)에서 수행된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의 발전과 관련이 있으며, 활동가들에게 당이나 노조의 규율에서 벗어나 새로운 노동자 투쟁들의 발생을 이해하고 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개념적 틀을 제공했다. 오페라이스모의 중심에는 '노동자 자율성'(workers’ autonomy)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었다. 이는 자본주의로부터 노동이 잠재적으로 분리될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 가능성은 노동자들이 투쟁 중에 보여준 행동에서 드러났다. 이러한 핵심 동력은 활동가들로 하여금 노동계급 대표의 전통적인 조직들, 즉 정당과 노동조합을 재평가하도록 이끌었다. 그것들은 많은 경우 노동자들이 자본 내부의 노동이라는 위치에 머물도록 하는 훈육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197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결집하기 시작한 오페라이스모와 새로운 청년 및 학생 운동 간의 만남에서 등장한 '아우토노미아는 여러 식별 가능한 영역, 즉 '노동자 자율성'(workers’ autonomy), '창조적 자율성'(creative autonomy), 그리고 확산적인 '자율 영역'(area of autonomy)을 포함하는, 서로 이질적인 의회 밖 사회 운동이었다. 공장, 교육 및 공동체 투쟁을 통해 변형되고 2세대 페미니즘의 관심을 통합하면서 오토노미아는 비판적 틀을 확장하였으며, 자본주의 아래에서 이뤄지는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건 그들이 보기에, '작업장에서 사회 공장'(factory floor to the factory of society)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 이후 50여 년 동안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사상 체계로서 국제 좌파와 학계 내에서 영향력을 키웠으며, 다양한 사회 운동과 지적 탐구 그리고 전 지구적 투쟁을 위한 핵심적인 이론적 연결고리를 제공했다.

 

이러한 풍부한 계보에도 불구하고, '자율성'의 출현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 운동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자율성은 여전히 공산주의를 둘러싼 비판과 논쟁의 핵심 개념이지만, 이러한 점 때문에  그 용어 자체는 여전히 모호한 것으로 남아 있다.

 

***참고: Between Panzieri and Negri: Mario Tronti and the workerism of the 1960s and 1970s ( Riccardo Bellofiore , 2011.09.09.)

https://libcom.org/article/between-panzieri-and-negri-mario-tronti-and-workerism-1960s-and-1970s

 

Between Panzieri and Negri: Mario Tronti and the workerism of the 1960s and 1970s

This is the text of Bellofiore’s lecture at the 2006 Historical Materialism conference. It gives an overview of the Italian marxist tradition known as operaismo and some of its core writers.

libcom.org

 

****참고2: Book Review, Tim Christiaens, 2019.11.16.

https://marxandphilosophy.org.uk/reviews/17493_workers-and-capital-by-mario-tronti-reviewed-by-tim-christiaens/

 

‘Workers and Capital’ by Mario Tronti reviewed by Tim Christiaens

From the heights of May ’68 to the tragedy of the Prague Spring, the 1960s were a tumultuous decade. During…

marxandphilosophy.org.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