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와 우리 시대
정치와 탈근대 7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
번역: 연구공간 L 기획, 주현‧이승준 옮김
4장 스피노자
정동의 사회학
1. 스피노자 대 사회학?
이 글을 어떻게 틀 잡을지에 대해 고민하던 중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몇 가지 어려움이 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 어려움은 스피노자를 사회학과 연결시키는 기획만큼이나 사회학 분야가 흔히 정의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사회학은 대체로 막스 베버에서 피에르 부르디외에 이르는 전통에서는 특정한 대상(“사회적인 것”)에 관해 가치평가를 하지 않는 학문을 의미하는 ‘가치중립적Wertfrei 학문’의 자세를 취한다. 그게 아니라면 뒤르켐에서 고프만에 이르는 전통에서 사회학은 스스로를 제도적 대상을 다루는 실증적 분과로 제시한다. 따라서 근대적인 학부 구분이나 학부 간 갈등이 나타날 때, 사회학은 사회적인 것에 대한 모든 자연주의적 이론들(그리고 더 강하게는 자연법 전통)과 완전히 단절하는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우리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사회적인 것의 규범적이거나 수행적인 코나투스 이론과도 완전히 단절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내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단절은 스피노자에게는 생각할 수 없으며, 그것이 내가 옹호할 가설이기에 이 글의 제목과는 맞지 않을 수 있다. 혹은 달리 말해 스피노자에게서 우리가 “사회학”이라 부를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주의적이면서 자연법 전통의 특성을 띠는 어떤 것(존재론적으로 근거지어졌다는 의미에서)이자 수행적이면서 규범적인 어떤 것(윤리학적으로 근거지어졌다는 의미에서)일 수 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사회학’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조차 우리는 실증적(또는 실증주의적)이고 자율적이며 분리된 것이라는 사회학 분과의 지배적인 자기 정의와의 단절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우리가 숙고해야만 하는 것은 사회학에 완전히 새로운 인식론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다.
당연하게도 내가 채택하는 스피노자의 입장은 그 자체 사회학의 분과학문적 위상의 재정립을 근거짓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주의는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철학적 도구일 수 있다. 우리가 스피노자에게서 볼 수 있다고 내가 의미하는 것은, 즉 우리가 권력의 근대적 형상에 맞서 스피노자가 정식화했던 이론적 대안과 저항에서 보게 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관점과 지금 현재 진화하고 있는 사회구조 및 권력구조를 인식하고자 하는 욕망의 개시이다. 요컨대 탈근대 시대에 우리가 스피노자적인 별종 속에서(그리고 이런 것도 추가할 수 있다. 즉 스피노자의 정치관과 민주주의관의 반근대성 속에서) 어찌 미래에 대한 기대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겠는가?
스피노자로 돌아와 보자. 첫 번째 물음: 순전히 코나투스라는 스피노자의 물리학에 맞춰진 사회적인 것의 분석은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가? 그것은 사회학적 연합주의에 의해 생산된 모든 선형적·실증적인 논리와 직접적으로 모순되는 결과를 낳는다. 설사 사회학적 연합주의가 스스로를 개인 간 관계에 대한 분석론의 형태로 제시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코나투스는 사물들의 범위를 함의한다. 첫째, 한 존재(즉 실존하는 존재)의 지속하려는 노력은 그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면서 확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 이러한 노력은 가치의 기초이자 원천인 본질적인 텔로스의 기능으로 인해 소모된다. 이와 관련해 『에티카』 3부 정리 57(“주어진 각 개인의 모든 감정은 정확히 한 개인의 본질이 다른 개인의 본질과 다른 만큼 다른 개인의 감정과 다르다”)의 증명과 주석에 있는 상당히 중요한 두 구절을 인용해보자.
모든 감정은, 우리가 앞서 제시한 정의들이 보여주었듯, 욕망, 기쁨 혹은 슬픔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욕망은 각 인간의 본성 혹은 본질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의 욕망은 한 개인의 본성 혹은 본질이 다른 모든 개인의 본성이나 본질과 다른 정도만큼 다른 모든 개인의 욕망과 다르다. 그들의 일부분으로서 기쁨과 슬픔은 정념[수동]이며, 그것에 의해 각각의 인간의 힘(포텐티아) 혹은 그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코나투스)은 증가하거나 감소하고, 도움이 되거나 방해된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을, 그것이 정신과 신체 모두에 관여되는 한에서, 우리는 욕구나 욕망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기쁨과 슬픔은 그것이 외부 원인에 의해 증가되거나 감소되며, 도움이 되거나 방해되는 한에서 단지 욕망이나 욕구 자체에 불과하다. 즉 욕망이나 욕구는 모든 인간의 본성 자체이다. 반면에 한 인간의 기쁨과 슬픔은 한 인간의 본성이나 본질이 다른 인간의 본질과 다른 정도에서 다른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는 다르며, 그 결과 모든 개인의 모든 감정은 … 다른 모든 인간의 감정과 다르다. 등등[1]
그러므로 비합리적이라 불리는 동물의 감정(정신의 기원을 알게 된 이후에 우리는 짐승이 느낀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은 그들의 본성이 정확히 인간의 본성과 다른 만큼, 인간의 감정과 다르다. 말과 인간은 똑같이 출산의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전자의 욕망이 말의 것이라면, 후자의 욕망은 인간의 것이다. 그래서 곤충, 물고기, 새의 충동과 욕망 또한 각각 달라야 한다. 그러므로 각 개인이 자신에게 부여된 본성에 만족하고 그것을 즐기며 산다할지라도, 각각이 만족하고 기뻐하는 삶은 방금 말한 개인의 관념 혹은 영혼에 불과하다. 따라서 누군가의 기쁨은 누군가의 본질이 다른 이의 본질과 다른 정도에서 그 본성에 의해 다른 이의 기쁨과는 다르다. 내가 앞서 언급했던 정리 57의 귀결로서, 주정뱅이를 이끌었던 기쁨과 철학자가 즐기는 기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2]
우리는 여기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개인주의의 틀 안에서 선형적인 코나투스의 사회학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그 결과는 주정뱅이의 사회학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관계라는 조직에 질을 부여하는 것은 상호관계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관계의 본질적 본성, 그 관계에 생기를 불어넣는 존재론적 충동, 그리고 또한(게다가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본질적 본성이 가장 높은 수준의 지식―이 수준은 또한 사회적 재구성 및 구성의 수준이다―인 철학자의 지식에 대립하거나 그것을 지향하는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 사회학과 스피노자보다 더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나의 의도는 스피노자의 사회학을 정의하려 했던 지금까지의 모든 시도(많지는 않았지만 꽤 여럿 있었다)와 다투는 데 있지 않다. 나는 단지 정적인 코나투스 개념에 기초해 스피노자의 사회학을 구성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코나투스에 대한 정적인 정의는 코나투스에 대한 홉스의 정의에 더 가까울 터인데, 그것은 근대의 모든 개인주의가 우리를 이끌려고 하는 방향을 향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 위나 그 너머 어딘가에 있는 또 다른 규범적 수준으로의 변증법적 이동, 즉 권력과 국가로의 변증법적 이동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배제하는 것은 바로 이 변증법적 이동이다. 실제로 그는 그것을 배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혐오하는데, 그것이 미신에 이르는 과정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홉스의 코나투스론에 저항하고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를 관대하고 증여적인 개방성(“아낌없이 주는” 즉 증여munus나 “선물”의 긍정)으로 간주하더라도, 이러한 접근 방식이 스피노자의 글을 읽는 데에서 생길 수 있는 다른 어려움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코나투스가 드러내고 쿠피디타스가 지향하는 저 자연적이고 윤리적인 긴장을 해소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에서도 곧바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초월성을 도입하는 또 다른 인위적 조작, 즉 변증법적 조작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그리고 여기에 그 역설이 있다―는 관대한 선물의 형상으로는 결코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물의 논리에서 선물로 주게 된 것은 반드시 다른 곳에서 획득되었던 것인 반면, 코나투스의 논리에서, 선물은 절대 저하되지 않는 역능이다.

2. 쿠피디타스와 삶정치
두 번째 질문: 모든 선형적이거나 실증적인 개인 간 상호관계의 논리를 붕괴시키는 스피노자의 사회학을 구축하는 것은 가능한가?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러한 가능성은 코나투스의 과정에, 즉 아펙투스(affectus)/쿠피디타스의 연속성에 기초를 두지만, 또한 스피노자가 주장했듯이 사랑의 연속성에도 기초를 둔다. 다음을 주목하라. 스피노자에게 있어 연속성은 결코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쿠피디타스의 내재적이고 구성적인 발전인 하나의 이행이자 상상이다. 『에티카』 3부에서 우리는 이것을 “정동의 정의”에서 읽는다.
Ⅰ. 욕망은 그것이 그 자신의 어떤 주어진 변용에 의해 특수한 활동으로 규정된다고 생각되는 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해명: … 그러므로 나는 욕망이라는 말을 모든 인간의 노력, 충동, 욕구, 의지 등으로 이해하며, 이것들은 각각의 인간의 성향에 따르며, 따라서 인간이 다른 방향으로 이끌리고 어디로 방향을 틀지 몰라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대립된다.
Ⅱ. 기쁨은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이행이다.
Ⅲ. 슬픔은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이행이다. 해명: 나는 이행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쁨은 완전성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가 이행하여 얻는 완전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는 기쁨의 감정 없이도 같은 것을 소유할 것이다. 이는 반대되는 감정인 슬픔을 숙고하면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어느 누구도 슬픔이 더 작은 완전성 자체가 아니라 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느 정도의 완전성에 참여하는 한에서는 슬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슬픔이 더 큰 완전성의 부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부재는 무이기 때문이다. 반면 슬픔의 감정은 하나의 활동이며, 이는 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의 활동일 뿐이다. 달리 말해 슬픔은 그것에 의해 인간의 활동능력이 줄어들거나 제한되는 활동이다. 나는 유쾌, 흥분, 우울, 비탄 등은 생략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주로 몸과 관련이 있고, 기쁨이나 슬픔의 일종이기 때문이다.[3]
여기서 쿠피디타스는 총체성으로 정의된다. 즉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그것은 양심과 욕구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의 노력, 충동, 욕구, 의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쿠피디타스는 즉각 이행의 과정, 즉 더 크거나 더 작은 완전성을 향한 운동의 과정을 겪으며, 이 운동의 과정은 쿠피디타스를 주어진 구성수준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구성수준으로 옮기는 미래의 특이한 상상의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턱에서 다른 문턱으로 나아가면서 쿠피디타스 발전의 내재적이고 구성적인 성격을 통해 모든 상호관계적인 사회적인 것의 물리학은 분산된다. 이 이행, 이 운동은 상호관계적인 것이 아니라 구성적이다.
물론 이 주제는 『에티카』 5부 서론에서 더 발전되고 성숙해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나아간다. 어떠한 개인주의적 사회학도 우리로 하여금 사회적인 것을 파악하도록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상호개인적 사회학도 그것이 삶의 변증법이나 질투의 변증법, 혹은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변증법에 의해 정의되는 한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 과정의 유일한 열쇠는 사랑에 의해 길러진다.
이와 관련해 신을 향한 사랑(Amor erga Deum)에 바쳐진 『에티카』 5부 정리 20의 주석을 다시 읽어보자.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어떠한 감정도 이러한 사랑과 정반대가 아니며 그런 경우 그 사랑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신에 대한 사랑은 모든 감정들 중에서도 가장 변함이 없으며, 그것이 몸과 관련되는 한 그리고 몸이 파괴되지 않는 한 파괴될 수 없다. 정신과 관련된 한에서의 사랑의 본성에 관해서는 곧 탐구할 것이다.
나는 지금 감정에 대한 모든 처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혹은 그 자체만으로 생각된 정신이 감정에 맞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았다. 감정에 대한 정신의 힘은 다음과 같은 것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Ⅰ. 감정들에 대한 현실적 인식에서.
Ⅱ. 정신이 감정들을 우리가 혼란스럽다고 생각하는 외적 원인의 사유와 분리시킨다는 사실에서.
Ⅲ.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는 사물과 관련된 감정들이 우리가 혼란스럽고 단편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물과 관련된 감정을 시간적으로 능가한다는 사실에서.
Ⅳ. 사물들의 공통 특성이나 신과 관련해서 변용들이 촉진되는 다양한 원인들에서.
Ⅴ. 마지막으로, 정신이 자기 자신의 감정들을 배열하고 서로 연관시킬 수 있는 질서에서.
그러나 감정에 대한 정신의 이러한 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다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한 사람의 감정을 다른 사람의 감정과 비교하고 한 사람이 동일한 감정에 의해 다른 사람보다 더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을 보았을 때, 또는 우리가 동일한 한 사람의 다양한 감정을 다른 감정과 비교하고 그가 다른 감정보다 한 감정에 의해 더 영향을 받거나 동요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 감정들을 강하다고 부른다는 점을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감정의 힘은 우리 자신의 능력과 외부 원인의 능력을 비교함으로써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의 능력은 인식에 의해서만 정의되고, 정신의 무능력이나 수동은 인식의 결여―즉 정신의 무능력이 이런 식으로 평가되면 그 관념은 부적실하다고 기술된다―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이로부터 다음의 결론이 나온다. 즉 정신이 가장 큰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정신의 가장 큰 부분[id maxime pati]이 부적실한 관념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것의 작용에 의해서 보다는 그것이 작용받는 것에 의해서 더 쉽게 특징지어질 수 있다. 반면에 정신이 가장 능동적이라는 것은 그것의 가장 큰 부분이 적실한 관념으로 구성되어 있어, 비록 그것이 전자의 정신처럼 많은 부적실한 관념을 포함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허약함을 말해주는 관념에 의해서보다는 인간의 덕에 기인하는 관념으로 더 쉽게 특징지어질 수 있다.
영혼의 병과 불행이, 일반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고 우리가 결코 그 주인이 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사랑으로 추적될 수 있다는 것에 다시금 주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가 사랑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어느 누구도 실제로 지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랑에서가 아니라면 잘못, 의심, 적대감 등이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명석판명한 인식이, 특히 신에 대한 현실적 인식에 기초한 제3종의 인식이 감정들을 지배하는 힘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즉 그 인식이 감정들을 절대적으로 파괴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정념들인 한에서, 어쨌든 그것은 감정들이 정신의 가장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일을 야기한다. 더욱이 그 인식은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불변하고 영원한 것을 향한 사랑을 야기하며, 그로 인해 평범한 사랑에 내재해 있는 그러한 결점으로 더럽혀질 수는 없고 다만 점점 더 강해질 것이고, 그래서 정신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또 그 안에 더 깊이 스며들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현재적 삶에 관련된 모든 것을 끝마쳤다. 이 주석을 시작하면서 말했듯이 나는 감정들에 대한 모든 처방책을 간략히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인데, 그가 누구든 이 글에서 발전시킨 것과 또한 정신의 정의와 감정의 정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3부 정리 1과 정리 3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신체와 관계가 없는 정신의 지속에 관한 문제들로 넘어가야 할 때이다.[4]
자연과 덕 사이의 이러한 연속성을 파악하기 위해, 즉 진보적이며 어떠한 필연의 조건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자유에만 기초하는 내재적 텔로스의 기능으로 조직된 것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질 들뢰즈가 제안한 스피노자에 대한 독해로 돌아갈 것이다. 내재성과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근본적인 해석의 영역을 구성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나아가기 위해―이러한 들뢰즈의 해석보다 더 나아갈 뿐만 아니라 더 일반적으로는 마트롱, 마슈레이, 발리바르 및 (후발주자인) 네그리 등의 세대가 제안한 해석보다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가령 피에르-프랑수와 모로가 제시한 해석 혹은 완전히 새로운 연구자 세대의 해석을 따라야 하는데, 그들의 해석 장치가 “스피노자의 경험 안에 있는 것”으로, 즉 처음부터 존재론적 맥락 안에 있으면서 또한 구성적 관점의 경험적이고 희망적인 연속성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탈근대성의 정신에 상응하는 스피노자를 재구성하거나 더 정확하게는 재발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제공한 근대에 대한 대안을 이해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나아가 현재의 목적에 따라 이 대안을 근대적 의미의 사회학에 적용하기 위해서), 내가 “삶정치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자유를 채택할 지형 위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론적 조건을 삶정치적 경험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삶정치” 개념을 정의하고 그것이 스피노자에 대한 해석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약간의, 하지만 필수적인 우회로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삶정치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삶에 투자하는 주권 권력인 삶권력의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와 마주하면서) 쿠피디타테스의 필수적 접합과, 삶의 양식을 횡단하고 결과적으로 폴리스와 삶의 능동적 교차를 규정하는 그것의 능력(쿠피디타테스 간의 구성적 상호관계 안에 있는)을 이해한다. 이러한 교차는 스스로를 권력의 가면에 맞서는 하나의 저항이자 일관성으로서 제시한다. 그것은 미신과 비자유 및 권력 등의 장애물에 맞서 충돌하는 집단적인 구성적 역능이다.
나는 후기 근대의 사회학 및 경제사상의 특정한 주제들이, 그들이 실제로 스피노자를 언급하든 그렇지 않든, 이러한 지평 ― 짐멜에서 베커까지, 부르디외에서 생산적 외부성의 이론가들에 이르기까지 ― 내에서 발생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나는 마찬가지로 몬돌포Mondolfo에서 시몽동, 알튀세르에서 마슈레이―가장 분명한 이름들만을 언급하자면―에 이르는 테크놀로지의 문제(그리고 그것의 변형의 힘, 즉 집단적 실천의 힘)에 관심을 가진 일련의 철학자들이 축적과 발전이라는 자본주의의 물신주의를 해소하는 쪽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이 스피노자 사상의 역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또한 확신한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은 스피노자와 사회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최근의 논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우리는 이 모든 분석 도구를 삶정치적 맥락으로 다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즉, 주체적 기질을 지닌 비판적 차원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쿠피디타스의 친구로 나타낼 수 있다.
3. 쿠피디타스에서 아모르로
이 삽입구를 닫고, 우리의 논의의 실로 돌아와 보자. 스피노자 철학에 함축된 사회학적 분석의 독특한 형상이 마침내 드러날지도 모른다. 이 형상은 단지 가장 단순한 코나투스의 물리학―개체적 상호관계에 대한 모든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을 의미하는―의 입자grain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겨냥한 운동으로 나타난다. ‘공통적인 것의 구축’으로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법 교리가 개체주의적 차원에서 코나투스의 과정을 통해 제거된다는 것, 자연법 교리가 점점 더 구성적이 되는 감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변신을 겪는다는 것, 자연법 교리가 사회적인 것과 집단적 행동의 공통 조직 즉 사랑에 의해 지속되는 공통 조직에 대한 정의를 통해 무화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연법 교리에 의해 기술된 바와 같은 사회의 개체주의적 발생은 여기에서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수행적·규범적 이론으로, 공통적인 것의 실효적 구성으로 변형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개체주의적 조직이 벗겨질 때―스피노자의 물리학 전체가 이런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분석이 사회적인 것을 일군의 특이성들로 정의할 때, 코나투스, 아페티투스, 쿠피디타스는 (점진적으로 사회적 구성의 원호를 그리며) 결정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항상 다시 새로워지는 기초로, 훨씬 더 실효적으로 구축되는 텔로스로 떠맡는다는 점이다. [코나투스의] 물리학과 감정의 윤리학 사이에서 공통적인 것이 존재론적 과정의 구성적 동력을 규정한다.
여기서 굳이 『에티카』의 특정 구절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한 문제들은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5] 우리는 사회적인 것의 접합―또한 이 접합은 사회적인 것의 구성적 계기이다―에 기초해 있는 세계의 존재론적 연속성 앞에 있다.
그러나 개체주의의 지평 안에서 사물들을 바라보는 근대의 사회학자들은 그들이 특이성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이 불연속적인 연속성을 피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 그들은 아주 올바르게도 미국 학계의 조잡한 실증주의를 거부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방금 설명했던 정확한 차원에 도달하기 위해, 즉 저항과 구성의 과정이 상호 관계주의를 통해 으스러지거나 희석되는 일을 막기 위해 그들이 내딛어야만 하는 한 걸음이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쿠피디타스 과정의 연속성은 실재를 구성하는 과정의 불연속성을 강화한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적 일관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사회적인 것 안에 있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제로 거기에 있기를 제안할 뿐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적 사회학의 유일하게 가능한 관점은 사회적인 것 안에, 존재의 내재성 안에, 공통적인 것의 필연적 구축 안에서 행동하는 쿠피디타스의 관점이다. 그것은 사회학에 대한 스피노자의 접근법을 계보학적으로 정의하는 것, 그리고 스피노자적인 사회학자의 형상을 사회적 존재의 계보학을 분석하는 자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요약하자면, 스피노자적인 사회학자의 형상을 생산적이고 결단력이 있으며 동시에 파열될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의 구축의 행위자로서 정의하는 것은 물질적 관계 및 인식의 개입을 사회적인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잠재하는가? 부적절한 관계의 영역으로 질문을 밀어붙이면서 나는 이렇게 질문할 준비가 거의 되었다. 스피노자의 사회학적 사유에 대한 푸코적 정의는 가능한가?
내 대답은 역설적이게도 그렇다이다. 물론 나는 이 두 사상가의 관계가 지닌 부적절한 성격을 주장한다. 푸코가 자신이 친숙하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인용하지 않은 저자들 중에 스피노자가 속해있는 한 푸코는 스피노자를 잘 알지 못했다.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푸코의 저작 전체에서 스피노자의 이름이 여섯 번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덧붙이자. 푸코는 일반적으로 다른 철학자들의 글에서 자신이 읽었던 내용을 요약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에 푸코는 가정상 스피노자 사회학의 구축에 기여하는 뭔가를 갖고 있는데, 이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와 푸코의 후기 작업 사이에는 인상적인 수의 유비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철학자 로랑 보브가 저항의 충동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구축하는 “코나투스의 전략”에 대해 말할 때, 그리고 몇몇 사회학 비평가들(나는 특히 파스칼 니콜라-르 스트라Pascal Nicolas-Le Strat의 작업을 생각하고 있다)이 푸코로부터 특이한 저항의 방법론을 사회적 인식의 토대로서 채택할 때, 그들 모두는 사회학적 이해Verstehen의 길고 지리한 과정 안에서 정념의 계보학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나는 사회학적 개체주의라는 분과가 20세기에 근대의 화신인 게오르그 짐멜과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탈근대를 예감했던 주목할 만한 역사학자 미셸 드 세르토의 손 안에서 경험되었던 한 줌의 급진적 단절이 떠올랐다. 짐멜과 세르토, 보브와 니콜라-르 스트라는 스피노자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강조했다. 아니 더 올바르게는 그들은 “스피노자적 계기”를 실재를 구성하는 인식론의 재구축으로 해석했다.
물론 그들은 사회학 분과로부터 특별히 따뜻한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가령 최근에 푸코에 대한 대담에서 사회학자 장-루이 파비아니Jean-Louis Fabiani에 의한 개입이 그러한데, 거기서 그는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이 역사-사회학 내에서(따라서 사회학 일반 내에서) 복원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문제를 검토한다. 그는 이 가설을 전반적으로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고전사회학(뒤르켐과 베버)에 대한 푸코의 입장을 분석해보면, 그의 고유한 프로그램이 사회과학의 프로그램과는 다른 수준에 놓여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견고한 스피노자적 지형 위에 서 있는 우리가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푸코는 스피노자만큼이나 개체주의 사회학과 가치중립적 방법론과 멀리 떨어져 있다. 사회적인 것의 구축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구축에 참여하는 것은 고전적이고 전문가중심적인 사회학에게는 낯선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사회학의 개체주의와 방법론적 집단주의를 파괴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스피노자와 푸코의 유비 혹은 그들의 연결이라는 잠정적 가설을 인식하는 행위는 [아직] 정당화되지 않는 것인가? 나는 당연히 이 질문을 열어 두었다.
마무리하자. 연합적인 코나투스에서 구성적인 아모르로 나아가는 길은 멀긴 하지만, 존재론의 관점 못지않게 인식론의 관점에서도 이 여정은 ― 스피노자가 말했듯이dixit ― 여전히 필요하다. 규범적이고 자연법과 연결되어 있으며, 존재론적이고 수행적인 스피노자의 사회학이 구축될 수 있는 것은 아모르의 전략이라는 기초 위에서이다.
아모르. 나는 가끔 사회학 담론의 맥락에서 “사랑”에 관해 글을 쓰거나 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것이 나에게 주는 보상은 대개는 아이러니와 풍자이다. 낭만주의의 심리학적 허영심이나 신비주의의 포악한 유토피아에서 사랑을 빼내는 일이 얼마나 어렵던가! 그것이 실제로 사랑이 근대에 의해 해석된(또는 회피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와는 달리 나에게는 스피노자가 정의한 사랑은 구성적인 존재론적 역능과 특이성들의 집단적 행동 간의 합리적이고 구성적인 관계를 우리에게 도입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사회학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근대에 맞서, 근대를 넘어서는, 즉 소유적 개인주의에 맞서고 그것을 넘어서 작업하는 일종의 실험실을 구성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을 전복적 힘으로 껴안고, 사회를 공통적인 것의 구성으로, 합리성과 특이성의 욕망이 교차하는 것으로, 공통적 자유의 궤적으로 보여준다.
스피노자에게는 결론적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개괄하고자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앞서 있고, 더 강력한 뭔가가 있다. 이 뭔가란 그의 절대적으로 유물론적인 의식, 즉 삶정치적 의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급진적인 방식으로 내재성을 표현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하나의 동의어를 갖는다. 사회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사실, 상호개인적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유물론적이고 삶정치적 의식은 특이성들의 놀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것 안에서 후렴구로 울려 퍼진다. 자신의 역동적 기원을 쿠피디타스의 역능 안에서, 욕망의 역능 안에서 발견하는 제도의 생산은 특이성을 경유해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제도적 관계의 훨씬-더-유효한 구축은 더-완전한 자아의 생산의 결과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우리는 왜 어느 누구도, 심지어 가장 고백적인 철학자들조차, 오늘날 더 이상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지가 궁금하다―은 사랑의 공통적 실행을 통해 진리의 생산 안에서 인간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사랑의 행위이다.
스피노자의 사회학이 이 운동에 대한 분석이라면, 사회학적 연구로부터 나온 정치는 오로지 공통적인 것의 집단적 관리일뿐이다.

[1] Spinoza, Ethics, part III, prop. LVII, proof. [한글본] 바루흐 스피노자, 『에티카』, 황태연 옮김, 도서출판 피앤비, 2011, 212-213쪽.
[2] Spinoza, Ethics, part III, prop. LVII, note. [한글본] 스피노자, 같은 책, 213쪽.
[3] Spinoza, Ethics, part III, “Definitions of the Emotions” and “Explanations.” [한글본] 스피노자, 같은 책, 216-217쪽.
[4]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 note. [한글본] 스피노자, 같은 책, 320-322쪽. 이 주제에 대해서는 또한 Spinoza, Ethics, part V, axiom II(“결과의 본질이 그것의 원인의 본질에 의하여 설명되고 한정되는 한에 있어서, 결과의 힘은 그것의 원인의 힘에 의하여 한정된다.”) [한글본] 스피노자, 같은 책, 307쪽과 part V, prop. IV, note [한글본] 스피노자, 같은 책, 309-310쪽, 그리고 part V, props. XIV–XX [한글본] 스피노자, 같은 책, 317-322쪽을 보라.
[5] 나는 정념들이 모순적인 방식으로 생겨나고 고정되는 이 공통 지평에 독자들을 위치지을 수 있게 하는 여러 독해 중 한 가지 가능한 귀결을 지시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Spinoza, Ethics, part II, props. XXXVII–XXXIX [한글본] 스피노자, 같은 책, 135-137쪽과 Spinoza, Ethics, part III, props. XXXV–XL [한글본] 스피노자, 같은 책, 191-197쪽, 그리고 Spinoza, Ethics, part V, note to proposition X [한글본] 스피노자, 같은 책, 314-316쪽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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