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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Translation/네그리 읽기

네그리, 『스피노자와 우리 시대』 3장 다중과 특이성: 스피노자 정치사상의 발전에서

by 인-무브 2025. 5. 3.

스피노자와 우리 시대

정치와 탈근대 6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
번역: 연구공간 L 기획, 주현‧이승준 옮김

  

3장 다중과 특이성

스피노자 정치사상의 발전에서

 

나의 과제가 스피노자 사상에서 다중과 특이성 개념의 발전을 개괄하는 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와 같은 짧은 여담으로 시작하는 것에 대해 먼저 독자에게 양해를 구한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나는 최근 몇 년간 국제적인 철학 학회지 및 학술적 출판에서 자신들을 위한 틈새시장을 찾았던 특정한 저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담론은 특이성과 다중이 관계를 맺는다거나 일치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 있다는 것으로 압축될 수 있다. [하지만] 특이성과 다중의 관계는 열려있으면서도 완전히 본질적이며, 또한 그것은 1968년경의 민주적 스피노자주의의 핵심을 이룬다. 나의 스피노자 독해가 시작하는 곳은 바로 이 관계로부터이며, 바로 이것이 특이성과 다중의 관계를 거부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겨냥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를 빌려 이 새로운 해석 경향에 대해 응답—간단한 언급이지만 아주 분명한 방식으로—하고 내가 계속해서 고수하는 민주주의적 입장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이는 이 글의 제목으로 삼은 주제를 준수하는 일에 약간의 불신을 수반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다른 (이론적? 정치적?) 의무—나는 이것이 의무라고 느낀다—를 수행하기 위해 이 글의 여기저기서 잠시 멈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의 주제와 다소 거리가 멀지만 니체가 스피노자를 평가한 구절을 출발점으로 삼되, 그 초점은 여러 긍정적 판단(결국 청년 니체의 일부분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형성된 것이다)을 배제하고 부정적으로 보이는 판단만을 살펴보는 것으로 좁혀보자. 그것은 예컨대 즐거운 학문349-372절에서 가장 분명하게 발견된다.

 

자기보존의 바램은 고통 상태, 즉 진정으로 근본적인 생명 본능이 제한되고 있음의 징후이다. 생명 본능은 힘의 확장을 목표로 하면서 또한 그것을 바라면서 종종 위기에 빠지고 심지어 자기-보존을 희생시킨다. 가령 폐결핵을 앓던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들이 자기보존본능을 결정적이라고 여길 때, 그것은 징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1]

 

그대들은 스피노자 같은 인물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심오하게 수수께끼 같고 기묘한 것을 느끼지 않는가? 그대들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그들이 왜 점점 더 창백해지는지, 왜 탈감각화가 더욱더 관념적으로 해석되는지를 눈치채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감각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해서 결국엔 뼈와 달그락 소리만 남기고 떠나간 흡혈귀를, 배후에서 오랫동안 모습을 감췄던 흡혈귀를 느끼지 못하겠는가? 내가 지칭하고자 하는 것은 범주들, 공식들, 단어들이다(이렇게 말하는 나를 용서해주길. 스피노자가 남긴 것, 즉 ‘신에 대한 지적 사랑’amor intelligenceis dei은 단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불과하고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방울의 피도 남아 있지 않다면 사랑이 무엇이고 신이 무엇이란 말인가?)[2]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악의 저편 198절이 있다. “영리함, 영리함, 영리함이 어리석음, 어리석음, 어리석음과 뒤섞인 … 스피노자의 더-이상-웃지-않음과 더-이상-울지-않음, 그는 그것들에 대한 분석과 해부를 통해 정동의 파괴를 너무나 순진하게 옹호했다.”[3]

 

그렇게 우리는 니체가 스피노자를 공격한 이 한 덩어리의 구절을 가진다. 우리는 이 구절들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구절들은 스피노자를 일종의 신학자로 취급한다. 즉 [그러한 관점에서는] 자연은 어쨌든 윤리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니체에게 있어 자연은 낭비이고 스스로 파괴를 가동하기 때문에, 그는 자연 안에서의 보존 및 자연의 덕으로의 변형, 그리고 그 모두가 지적 사랑으로 귀결된다는 바로 그 관념을 거부한다. 니체가 보았듯이, 자연과 역사의 연속성은 힘에의 의지에 의해 중단된다.

 

나는 이러한 니체의 입장을 염두에 두면서, 마지막에는 이 입장이 오늘날 특정한 몇몇 주석가들의 독해 혹은 1968년경에 획득한 스피노자 독해를 180° 뒤집는 것으로 보이는 특정한 해석 경향과 얼마나 강하게 일치하는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시 이 입장으로 돌아오겠다. 

 

 

우리의 주제인 특이성과 다중에 대해 말해보자. 스피노자에게 있어 특이성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스피노자의 사유세계로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며, 설혹 그렇지 않을 때조차 우리는 마음을 스치는 일종의 두려운 욕망에 이끌린다고 느낀다. 에티카를 읽는 이들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과 접하는 것과 유사한 어떤 경험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연의 끝에 접근해 특이성을 규정하려고 해보자. 에티카5부 정리 24에 그 흔적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개별 사물을 이해하면 할수록, 신을 더 많이 이해한다.”[4] 이는 ‘1부 정리 25 보충’의 메아리이다. “개별 사물들은 신의 속성의 변용들 혹은 신의 속성이 고정되고 확실한 방식으로 표현된 양태들일 뿐이다.”[5]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다시 5부 정리 29의 증명과 주석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신체의 특이성과 정신 활동의 관계가 영원의 관점에서 인식된다. “우리가 사물을 현실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즉 우리가 그것들을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 관련지어 현존한다고 파악하는 한에 있어서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그것들을 신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서 발생한다고 파악하는 한에 있어서이다. 이 두 번째 방식으로 참된 것 또는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되는 사물들을 우리는 영원의 상 아래에서 파악한다.”[6]

 

그리고 다시 에티카 2부 정리 45와 그 주석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에서는 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이 모든 존재하는 사물, 활동하는 특이한 사물의 실체로 인식된다. 그리고 다시 — 이러한 “기하학적” 교차-참조의 게임에서는 앞선 진술에 단서를 다는 것이 아주 어렵지만, 어쩌면 그것이 참된 존재론적 계획(design)일지 모른다 — 에티카 1부 정리 24 보충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신은 사물이 존재하는 원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물이 존재를 계속하는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이 뒤따라 나온다.”[7]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특이성은 사물의 존재론적 정의를 통해 혹은 그것만으로 귀결하는 것이 아니다. 특이성은 또한 직관지인 3종 인식의 정의 안에서 혹은 그것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특이한 사물에 대한 직관지는 보편적인 2종 인식보다 더 강력하다.[8]

 

따라서 우리가 존재론적 맥락에서 말하든 논리적인 맥락에서 말하든 특이성은 항상 영원과 동일한 관점에서 존재한다. 이렇게 특이성이 영원 안에 새겨져 있다는 관점은 다음과 같은 인식에 근거한 직관적 확신이다. “우리는 인간 이외에는, 자연 안에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특이한 사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며, 우정이나 어떤 종류의 친교를 통해 우리 자신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9]

 

특이성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비개체성, 왜냐하면 (2) 특이성은 공통적인 영원한 실체에 삽입되기 때문이다. (3) 하지만 이러한 실체 안에서, 이러한 존재론적 주장에 기초해 환원 불가능한 이것임haecceity 즉 특이성으로, 그리고 영원성의 표지로 특징지어지는 뭔가가 출현한다. (4) 특이성은 그 자체 윤리적 운동 안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개체 간의 관계 안에 살아있고 그 안에서 변형한다. 따라서 상황이 그렇다면, 즉 특이성이 공통적인 것 안에 있다면, 존재론적 맥락에서만이 아니라 현상학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도 다양한 다른 특이성들 사이에서 우리가 그에 대해 어떤 종류의 표상[재현]을 가질 수 있는가?

 

특이성은 다중 안에서 두 가지 존재 방식을 가진다. 첫째는 다중으로서의 특이성의 실존으로, 그것은 유용성의 원리를 따르는 다중 안에서 특이성들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에티카 4부 부록 26을 보자. “우리는 인간 이외에는, 자연 안에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특이한 사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며, 우정이나 어떤 종류의 친교를 통해 우리 자신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중-임이 나오는 것은 특이성들의 관계 안에서이다. 거기에 우리의 실존이 주어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실존적(말하자면 현상학적) 긴장으로만이 아니라 또한 돌연변이로서 특이성과 다중의 관계를 경험한다. 특이성은 인간들이 시민생활을 할 수 있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한에서 변신을 겪는다.[10] 이러한 변신은 구성적이다. 바로 이것이 특이성과 다중의 관계의 핵심이다. 엄밀히 말해 자신의 실존적 지속성을 부여받은 다중이 어떤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 한계는 내부에서 능가되어야만 한다. 더욱 투명하게 말해보면, 한 사람은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고독의 공포가 모든 이에게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생필품을 조달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시민상태를 열망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또한 사람들이 시민상태를 완전히 와해시키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11]

 

자연상태는 공포와 고독의 감정에 지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독의 공포는 단순한 공포 그 이상이다. 그것은 다중에의 욕망, 다중 안에서의 안전에의 욕망, 다중 안에서의 절대자에의 욕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이 표현되기 전에 특이성들은 어떤 낯섦 안에,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모호한 상황인 현상학적으로 규정된 상황 안에 있다. 분명 특이성은 고독의 공포와 그것이 공통적인 것의 품 안에서 찾은 평안 사이에서 동요한다. 즉 그러한 동요는 더 우월한 힘에 열려있다. 왜 안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실제로 사람들은 공통적인 것 안에서 “국가 없는 사회”를 아주 잘 구축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맺는 불안정과 갈등의 자연적이고 상호적인 관계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것을 협정pact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우리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어떻게 계약을 틀 지웠는가를 알고 있다. 즉 그것은 현상학적 차원에서 다중으로서의 특이성의 구성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국가 없는 사회”와 동질적인 (계약) 조건이며, 그것은 여전히 다중-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방금 전에 다중-임의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언급했다. 앞서 살펴봤듯이 하나는 다중의 실존 자체, 즉 유용성의 원리에 따라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의 관계이다. 이 과정에는 긴장과 변이가 있다. 이러한 다중-임의 정치적 얼굴은 우리가 환상적인 “국가 없는 사회”의 조건과 동일시하고자 했던 것의 차원에 있다. 여기서 “국가 없음”이라는 말은 그 모든 모호함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혹은 어쨌든 구체제 국가에서는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단 “어떠한 집단적이고 공통적인 기획의 구축도, 실존 기획의 구축도 없다”는 의미에서의 “국가 없음”이긴 하지만. 이제는 공통적인 욕망[쿠피디타스]의 발전이 없이는, 욕망[쿠피디타스]으로의 개방이 없이는, 욕망[쿠피디타스]의 공통적인 사랑[아모르]의 기획으로의 통합이 없이는 어떠한 공통적인 실존도 있을 수 없다.

 

둘째, 다중-임과는 대조되는 방식으로, 이는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는 과정 즉 특이성과 다중의 관계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다중-임의 두 번째 방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다중-만들기이다. 그것은 공통 열정에 의해 방향이 잡힌 물질적이고 집단적인 과정이다. 여기서 다중[물티투도]은 점점 더 다중의 자기-구성[콘스티투티오 물티투디니스constitutio multitudinis]의 측면을 띤다. 국가 없는 사회의 가능성은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이러한 공법이 관례적으로 국가로 불린다—을 구축하는 다중의 역능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공화국이 탄생했다.[12] 민법과 공화국은 다중의 역능이다. 그리고 그 법을 구축한 사람들이 있기에 그 법은 민주적이다.

 

바로 이 순간에 민주적 표현과 능동적 합의는 계약을 대체하며, 특이성 간의 공통 관계에 기초를 둔 방법이 고립된 개인들 간의 여타 다른 가능한 관계를 대체한다. 즉 공화국을 생산하는 역능인 다중-만들기가 계약을 대체하는 것이다.

또한 자연법 계약주의에서 윤리적 유물론으로의 이러한 이행을 통해 특이성과 다중의 관계도 해결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한편으로 다중-임과 그것이 계약의 차원에 갇혀 있다는 사실과, 다른 한편으로 다중-만들기와 그것이 정치적 현실을 구성한다는 사실 사이에는 대칭이 존재한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후자의 경우, 힘은 행위의 토대, 공통 실천의 토대가 된다. 그로부터 항상 이중적인 힘 개념이 나오며, 이는 항상 중단되고, 항상 열려 있는 힘 개념, 이러한 이원론이 그 자체로 해소되는 지점까지 계속된다. 공화국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인간 존재이기를 중단할 정도로 자신의 모든 권리를, 따라서 자신의 힘을 다른 이에게 완전히 넘겨줄 수 없으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주권 권력도 결코 있을 수 없다.”[13] 그렇기에 자유의 방어는 민주주의적일 수밖에 없으며, 민주주의는 관용에 근거를 두며, 동시에 자유의 실현에 그 기초를 둔다.[14] 그것은 단순한 자연권의 문제가 아니라, 힘에 대한 특정한 관념의 문제이다.

 

“사회계약”을 제쳐두면, 주체[신민]와 다중의 관계는 에티카 신학정치론에서의 구성과정에서 중심적인 것이 된다. 공화국의 정치적 주체는 다중적 시민이다. 이제부터는 주체와 시민이 더 이상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주권과 권력은 다중에게 되돌려지고, 또한 조직된 다중의 역능이 있는 곳에 거한다.[15] 여기서 ‘힘이 있는 한에서 법률이 있다’(tantum iuris quantum potentiae)는 격언이 다중-만들기의 핵심으로 부여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그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법이 있는 한에서 힘이 있다.’(tantum potentiae, quantum iuris)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해보자. 특이성들과 다중의 관계가 법을 제정하는 기구 내에서 더 긴밀해질 때, 앞서의 단언, 즉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주권 권력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참이다. 법을 구축하기 위한 획일적인 다중의 구성에서조차, 말하자면 특이성들의 다중을 권력으로, 즉 법적 권위를 구성하고 그 발전에서의 해석적 원천으로 기능하는 권력으로 변형시키는 운동에서조차, 다중 개념을 특이성들의 운동으로 (그리고 역으로 특이성들의 운동을 다중 개념으로) 개방하는 일은 늘 근본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다중[물티투도] 개념이 결코 다른 개념인 국민/인민people으로 환원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특히 결정적이라고 주장한다. 다중은 특이성들의 차이와 분리되지 않으며 또한 “인간이 된다”라는 표현의 급진성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공화국 만들기와의 관계와도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론적 강도 및 절대적 강도를 그리고 이러한 구성과정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물론 다중에게 악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필멸하는 존재에게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악덕을 일반 사람들에게만 한정시키는 사람들은 우리가 쓴 것을 아마도 비웃을지 모른다. 그들은 ‘폭도는 자제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폭도는 스스로 겁먹지 않는 한 타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일반 사람들은 비천한 노예이거나 오만한 주인이다’, ‘그들은 진실이나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등을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본성]은 모두에게 하나이면서도 공통적이다. … 오만함은 지배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고유한 특성이다.[16]

 

독자들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것이 특별히 현실주의적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다중의 힘이 지닌 악덕들—그들의 구성능력이나 영구적인 구성적 통제력을 제하면—은 실제로 모든 종류의 권력을 특징짓는 것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다중-만들기를 구조적 과정—여기서는 특이성들이 영원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신의 인과성을 함축하는 어떤 관계 속에서 서로 관계맺는다—으로 간주한다면, 이러한 문제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관계를 토대로 관계에 진입한다는 것은 특이성, 차이, 저항을 발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아모르]을 위해 노력하는 것, 욕망[쿠피디타스]의 형태로 자기보존의 노력[코나투스]을 실현하는 것이자, 아마도 그 이상의 어떤 것이리라.

 

따라서 특이성과 다중의 관계는 목적론적이지만 이러한 목적론은 신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기서 합목적성finality은 아래로부터 나온다. 즉 그것은 실천과 갈등에 내생적이며, 다중-만들기의 윤리적 운동을 의미한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스피노자 에티카의 결론은 유기체the organic의 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구축에 있다. “덕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욕망하는 선을 타인들을 위해서도 욕망할 것이며, 신에 대한 그의 인식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많이 욕망할 것이다.”[17] 에티카4부 정의 8에서는 이것이 훨씬 더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덕과 능력을 나는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 즉 인간과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덕은, 인간이 자기의 본성의 법칙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을 해내는 능력을 가진 한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 또는 본성nature 자체이다.”[18] 3종 인식이 개입하면, 즉 직관지가 스스로를 강제하면 특이성과 다중의 종합은 완전해지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중단되지 않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제1부에서 모든 것이 (따라서 인간의 정신도 역시) 본질과 존재에 관해서 신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증명했지만, 그 증명은, 설사 정당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을지라도, 신에게 의존한다고 우리가 말한 어떤 특이한 사물의 현실적 본질에서 이러한 것이 결론 내려질 때처럼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19]

 

직관지는 실천에 내재하며 공통적인 것을 구성한다.[20] 특이성들의 과정 및 운동은 실존적 조건을 횡단한 이후에 그들 자신을 공통적인 것으로 생산한다. 즉 존재 자체는 그 자신을 공통적인 것으로 생산하며, 공통적인 것을 다중으로서 생산한다. 공통적인 것의 구성이 연속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과정이 아니라면 특이성들을 다중으로 모아내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발전을 방해하는 어려움은 모든 부정적인 규정들, 존재의 부재, 구성과정 즉 자유를 욕망하는 과정의 소멸 혹은 불충분성에 있다. 목적론적 장치는 자신의 조건을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발견한다. 그것은 가난과 사랑 간의 긴장으로 귀결한다. 즉 비참하게 태어난 빈곤한 인간은 사회성의 주체가 되는 순간에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쪽으로 기울지 않는다면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론적이자 집단적인 힘으로서의 사랑만이 우리를 이 빈곤에서 빼낼 수 있는데, 이때 사랑은 “소유적 개인주의”가 사랑을 축소시킨 일종의 ‘에로틱한 이기주의’나 사랑을 탈-특이화de-singularization로 몰아가는 일종의 종교적 신비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행위(목적론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의 실천적 탁월함은 논리적·귀납적·현실주의적이고 실험적인 과정, 즉 “공통 관념”의 생산에 상응하는 도식을 기반으로 접합된다. 이것은 특이성들의 존재론에서 다양체의 존재론으로의 필연적 이행이다. 이 이행은 실천에 의해 구축되며, 심지어 인식의 영역에서도 구축된다. 둘째, 이러한 토대 위에서는 이성의 실천적 진보에 대해 제기되었던 일정한 수의 회의적 의구심이 어떻게 유효할 수 있는지가 이해하기가 어렵다. 비록 공통 존재의 구성이 사랑이 삶의 생성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삶의 정치적 조직화를 통해서 규정하는 공통적인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없다할지라도 말이다. 만일 악이나 파시즘(그것이 동물성의 파시즘이든 인간성의 파시즘이든, 아니면 그저 형식적인 복종의 자동화이든 간에)이 다중-임에서 다중-만들기로 나아가는 사이 공간에서 자신의 기회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삶이 계속해서 일정한 퇴행에 직면해야만 하고, 모든 비민주적 정치 형태가 퇴행—스피노자는 정부 형태인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을 고전적 질서나 전통적인 연속적 순환으로 배치하지 않는다는 점만 언급하기로 하자—이라면,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다중의 운동이나 자유를 향한 다중의 노력에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욕망한다고 생각하고 저항은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자살 행위라고 사고하지 않는 한 말이다.

 

우리는 이제 니체가 정확히 이 과정과 관련해 정식화한 비판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는 자연은 낭비라고 말한다. [그의 관점에서] 목적론은 비록 그것이 인간에 의해 인간 자신의 특이성으로부터만 구성되고 또한 다중을 구성한다 할지라도 불가능하다. 니체가 스피노자에 대해 제시한 독해는 스피노자의 유물론을 강조할 때에는 매우 공감하는 듯 하지만 역으로 스피노자의 유물론에 생기를 불어넣는 구성요소를 제거하려고 할 때는 지극히 가혹하고 전투적이다.

 

구성요소는 창조적 역능인가? 나는 이 점에 착안해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존재의 구성적 성격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특이성의 창조적 역능에 대한 주장으로 나아가는 활주나 미끄러짐을 스피노자에게서 감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구성과 창조는, 구성과정의 차원을 의미하는 행위나 실천의 초과로 나타날 수 있는 본질적 요소를 공유한다. 나는 스피노자의 내재주의가 고전적 유물론이나 근대적 유물론에 비해 엄청난 이점을 누리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특이한 초과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초과의 생산을 포함한다. 이러한 초과는 전적으로 자기보존의 노력[코나투스]을 욕망[쿠피디타스]과 결합시키는 관계 안에 있으며, 또한 이 관계를 사랑[아모르]으로 밀어붙이는 관계 안에 있다. 이러한 유물론은 존재론적 혁신이 초월적 동인, 즉 자신의 양태와 구별되는 실체를 가질 가능성뿐만 아니라 존재의 초과에 대한 인식의 초월적 형식, 즉 순전히 영지주의적이고 어쨌든 비존재론적인 도식주의로 귀결할 가능성을 배제한다. 따라서 이러한 유물론은 존재의 혁신을 생산하는 계보학적이고 구성적인 리듬을 지닌다.

 

우리의 논증의 실/줄기로 돌아와, 존재의 이러한 진행, 이러한 유물론적 목적론에서는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대체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이러한 과정 및 그것이 생산하는 특이한 초과들을 생각한다면, 다중의 역동성이 왜 고정성으로, 즉 사법적·입헌적·부르주아적 “국민” 개념의 형식주의로 고정될 수 없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내가 오늘날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에 대한 시시한 유물론적 해석(또는 내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 자연주의의 암묵적 청산)이 특정 분야에서 복귀하는 것을 인식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점에 대해 이토록 길게 논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68년경에 시작된 스피노자 해석에서의 혁명은 오늘날 스피노자주의라는 부류 하에서만 스피노자를 숙고하는 듯한 일종의 철학적·정치적 수정주의와 만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나는 2005년 5월 런던 리뷰 오브 북스(London Review of Books)에 실린 톰 네언—그는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에 정기적인 기고자이다—의 글을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21] 이 글 전체는 에티엔 발리바르와 나 사이의 논쟁으로 구성되었고, 발리바르와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스피노자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구원 사업”, 즉 정신적이거나 유심론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구제(救濟) 운동에 종사한다는 생각(이 생각은 우리가 니체가 물질을 낭비와 내파로 보았다고 가정한다면 너무나 니체적이다)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보기에 유물론자들(애석하게도 이 저자들이 입는 망토가 그렇다)이 그러한 입장을 취했을 때, 그들은 유물론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이 삶에 대한 암울한 전망일 뿐이며 자신들의 정치관은 대체로 매우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듯하다. 나는 이 사람들이 패배자이며, 그들이 자기 상처를 핥기만 하지 다중-만들기의 흘러넘치는 기쁨은, 공통적인 것의 건설의 기쁨은 망각했다는 인상을 주로 받았다.

 

끝으로, 특히 이 경우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유형의 비판에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존재론적 공간이 조직화와 표현으로 제시되어야 할 ‘꽉 찬 공간’plenum이기보다 앞으로 채워져야 할 공백void으로 바뀐다는 점이며, 따라서 다중이 공통적인 것과 혁명과정을 향한 욕망에 의해서만 실재적인 것이 되는 역동적이고 갈등적이며 살아있는 특이성들의 상호얽힘으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형이상학적 잔여나 논리적 용어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공통체(Res communis)는 실재를 관통하는 궤적들의 복수성, 욕망을 표현하는 역능, 그렇게 발명된 가치 등으로 구축된다.

 

나는 항상 산 노동과 사회적 활동에 대한 유물론적 철학의 흐름으로 발전하는 것으로서 스피노자주의를 생각해왔다. 다중[개념]은, 내가 이것을 스피노자에게서 재발견했던 방식에서는, 특이성들이 구성하는 이러한 현실과 역사로 꽉 찬 공간을 읽는 데 조력한다. 1968년이 스피노자에 대해 제시했던 해석은 그의 사상을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절대적 민주주의의 발명으로 만들어주었다.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실천 밖에 없기 때문이다.

 


 

[1] Friedrich Nietzsche, The Gay Science, trans. Walter Kaufmann (New York: Vintage Books, 1974), aphorism 349 (excerpt). [한글본]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메시나에서의 전원시/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안성찬·홍사현 옮김, 책세상, 2005, 333쪽.

[2] Nietzsche, The Gay Science, aphorism 372 (excerpt). [한글본] 니체, 즐거운 학문, 위의 책, 378쪽.

[3] Friedrich Nietzsche, Beyond Good and Evil, in Basic Writings of Nietzsche, trans. Walter Kaufmann (New York: Modern Library, 1968), aphorism 198 (excerpt). [한글본]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 153-154쪽.

[4]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IV. [한글본] B. 스피노자, 에티카, 황태연 옮김, 도서출판 피앤비, 324쪽.

[5] Spinoza, Ethics, part I, prop. XXV, corollary.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82쪽.

[6]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IX, note.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326쪽.

[7] Spinoza, Ethics, part I, prop. XXIV, corollary.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81쪽.

[8]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XVI, note.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330-331쪽. Spinoza, Ethics, part V, prop. XL, note.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5부 정리 40 주석, 334쪽.

[9] Spinoza, Ethics, part IV, appendix, chap. XXVI.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301쪽.

[10] “인간들은 시민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다.” Spinoza, Tractatus politicus, chap. 5, para. 2. [한글본]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정치론, 김호경 옮김, 갈무리, 2009, 93쪽.

[11] Spinoza, Tractatus politicus, chap. 6, para. 1. [한글본] 스피노자, 정치론, 101쪽.

[12] “다중의 역능[potentia]에 의해 결정되는 이 권리[ius]는 일반적으로 주권[imperium]이라 불린다. 그리고 공통 합의에 의해 국가의 업무들[curam Reipublicae]—법률[iura]을 제정·해석·폐지하는 일, 도시를 무장하는 일,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는 일 등—를 위임받은 이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손에 쥔다.” Spinoza, Tractatus politicus, chap. 2, para. 17. [한글본] 스피노자, 정치론, 53-54쪽.

[13] Baruch Spinoza,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trans. Samuel Shirley (Leiden: Brill, 1991), chap. 17, p. 250. [한글본] B.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2013, 272쪽.

[14] Spinoza,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chap. 17. [한글본]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272-299쪽.

[15] Spinoza, Tractatus politicus, chap. 3, section 9. [한글본] 스피노자, 정치론, 71-72쪽.

[16] Spinoza, Tractatus politicus, chap. 7, para. 27. [한글본] 스피노자, 정치론, 156-157쪽.

[17] Spinoza, Ethics, part IV, prop. XXXVII.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263쪽.

[18] Spinoza, Ethics, part IV, def. VIII.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237쪽.

[19] Spinoza, Ethics, part V, prop. XXXVI, note.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331쪽.

[20] Spinoza, Ethics, part II, prop. XL, note II. [한글본] 스피노자, 에티카, 139-141쪽.

[21] Tom Nairn, “Make for the Boondocks,” London Review of Books, 5 May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