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확장하기: 친족 정치에 대한 성찰
부에 뤼브너 한센(Bue Rübner Hansen) & 마누엘라 체히너(Manuela Zechner)
번역: 권범철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소개: 이 글은 Camille Barbagallo, Nicholas Beuret, David Harvie가 편집한 Commoning: With George Caffentzis and Silvia Federici의 한 장을 옮긴 것이다. 편집자들이 '감사의 글'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실비아 페데리치와 조지 카펜치스, "두 동지에게 진 지적인 빚에 대한 감사와 인정"을 표현하기 위해 기획된 선집으로, 해리 클리버, 피터 라인보우, 맛시모 데 안젤리스, 크리스 칼슨, 닉 다이어-위데포드, 워너 본펠드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기고자로 참여했다.
수세기 동안 재생산 노동은 집합적인 과정이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마을에서 사람들이 — 혼자 사는 사람도 — 기댈 수 있는 확장된 가족과 공동체의 노동이었다. 그래서 노년에, 우리의 아주 많은 노인들이 경험하는 쓸쓸한 외로움과 의존이 수반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출현하고 나서야 재생산은 완전히 개인화되었으며, 이 과정을 이제 우리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짊어진다. 우리의 삶의 지속적인 가치절하와 파편화를 끝내기 위해 바꿔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실비아 페데리치[1]
가족을 증오하거나 갈망하는 것은 지속적인 돌봄 관계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쉽다. 실비아 페데리치가 확장된 가족에 대해 쓸 때 그녀는 우리를 초대해서 전前자본주의적인 가족 형태를 낭만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고독과 소진의 순간에 하나의 기억을 붙잡으려 하는 것이다. 역사적 차이와의 이러한 마주침은 오늘날 우리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적 관계의 재생산을 넘어서 확장된 가족을 어떻게 다시 사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글에서 우리는 아이들의 돌봄 — 딸이 태어난 이후 우리를 점점 사로잡고 있는 문제 — 에서 시작하여 실비아의 질문을 따라가고 확장하려 한다.
돌봄과 재생산, 그리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이것들에 종종 동반되는 고독의 경험은 사실 ‘정상’norm이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여전히 그것에 의지하고 있다. 사람들과 공동체가 살아남고 더 나은 생활세계를 만들기 위해 개발하는 투쟁과 전략보다 더 일반적이고, 더 공유되며, 더 편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 투쟁과 경험 들은 생활양식과 생산성의 소음에 파묻혀 들리지 않고, 재현과 경쟁의 공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카롤리나 델 올모(Carolina del Olmo)는 개인주의 사회에서 모성과 육아에 관한 책, 『내 부족은 어디에 있는가?』(Where is my tribe?)에서 이 문제를 통렬하게 기술한다.
아이의 출현으로 우리는 인간 존재의 고유한 연약함과 인간 존재의 사회적·관계적 성격, 즉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불가능성 또한 알게 된다. 독립과 자율이라는 우리의 판타지는 무너진다. 만약 우리가 건강과 경제적인 면에서 운이 좋았다면, 젊고 아름다웠던 몇 년 동안 자율적이고 자족적이라는 허구를 즐겼을 것이다.[2]
물론 돌봐야할 아이를 갖는 것은 이 우발성을 깨닫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이 글에서는 그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이것은 우리를 가족의 문제로 데려간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장 중립적으로 말하면 가족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멜린다 쿠퍼가 보여주듯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개인보다는 개별 가족 단위 위에 구축되어 있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니즘도 핵가족을 ‘복원’하거나 ‘구원’하기 위한 반동적인 움직임이었다.[3] 그러나 친족(kinship)이 우리의 재생산에 필요하다는 사실은 또한 그것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하는 다른 방식들을 발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수파가 실제적이고 상상적인 대응 영역을 장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좀 더 지속가능한 종류의 관계를,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를 기르는 다른 종류의 가족을 만들어 갈 것인가? 그러한 관계 구축에서 의지의 역할은 무엇이며 신체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는 더 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실제로 더 지속해야 하는가? 육아와 더불어 이 모든 질문은 육체 안에, 무정한 내재성 안에 살아 있다. 시간을 들여 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사치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묻고 싶다. 핵가족이 우리에게 필요한 돌봄과 공생공락(conviviality)을 제공하기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능하며, 종종 억압적이고 제한적인 판타지와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난 이후, 어떻게 우리는 가족을 다른 버팀목을 향해 확장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족 일반의 ‘파괴’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물론 어떤 특정 배열에서는 벗어나야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우발성을 완전히 피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확장된 가족을 창조함으로써, 그리고 핵가족의 한계를 그것이 다른 무언가가 될 정도로 밀어붙여서 가족을 확장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 그러한 확장된 가족은 생물학적 유대뿐 아니라 사회적 유대 위에서 구축된다.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친구와 동지들의 네트워크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가장 친밀한 돌봄 관계를 짜서 결국 이러한 네트워크를 만들게 된다. 어떻게든 우리의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란다. 상이한 종류의 친족을 혼합한 이 유대들은 우리를 핵가족의 고독과 불안정한 이동성에서 구해줄 수 있다. 동지, 친구, 이웃 그리고 가족으로서 그리고 특히 변화하는 디아스포라적 배열을 가로지르며 살아갈 때, 이 친족은 우리를 세계에 안착시킬 수 있고 우리가 너무 불안해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어려움은 이 다른 유형의 친족을 작동시키는 데 있다. 이를 위한 보편적인 공식은 없지만, 상호 지원과 공유된 돌봄 문화는 이를 작동시키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이 풍요로운 관계와 상이한 종류의 친족의 뒤얽힘을 탐구하는 일은 정치적인 동시에 인류학적인 범주화에 의해 종종 가로막힌다. 당신의 가족은 혈연으로 결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자유로운 선택으로 결속되어 있는가? 많은 친족 개념이 이 대조에 묶여 있다. 한편에는 혈연 가족이라는 비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혹은 ‘전통적인’ 유대 관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선택적 친족이라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우며’ ‘현대적인’ 유대관계가 있다.
보수파는 — 결혼 계약으로 확언되는 — 개인의 선택이 혈연관계가 될 수 있는 길로서 이성애 결혼을 옹호한다. 이를 통해 가족은 어느 정도 확장되지만 유전자 코드에 의해 경계지어진 폐쇄적인 체계가 된다. 다른 한편에는 보수적인 가족을 의도적인 돌봄 공동체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것은 가족을, 혈연관계를 지키거나 보존하는 문제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변화하는 공동주거 공간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퀴어 가족은 필요에서 덕德을 만들어내며 함께 돌보고 양육하며 살아가는 급진적 모델을 발명한다. 한 양식에서 친족은 숙명의 문제로 여겨진다. 다른 양식에서는 선택의 문제로 여겨진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분법은 유지되지 않는다. 선택한 것이 자라서 운명이 되고, 운명으로 보였던 것이 사라지거나 선택에 의해 깨진다. 사랑은 우리의 약속이 얼마나 확고하든 혹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를 나누었든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다. 그리고 대안 가족을 건설하려는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구할 수 있거나 자발적인 선택적 친족을 찾기란 종종 불가능하다. 아니면 짧은 기간만 가능할 뿐이다. 친족을 지속시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든 아니든 숙명 대 선택, 의지 대 운명의 변증법 너머에 있다.
실비아와 조지 카펜치스는 아주 중요하게도 친족이 재생산 노동으로 결속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재생산 노동 개념 자체가 숙명/선택의 대구對句로 쉽게 포섭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특정한 재생산 노동 형태에 대한 정치적 평가에서 발견한다. 즉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말이다. 우리의 노동은 특정한 정상적 친족 형태와 인간 신체의 단순한 재생산, 즉 ’숙명’의 단순한 상연일 뿐인가, 아니면 숨 막힐 듯 억압적인 친족 형태와 결별하려는 의지를 중심으로 수립되는 급진적이고 전투적이며 퀴어한 것인가? 재생산 노동이 숙명/선택 이분법에 따라 쉽게 평가되는 이유는 노동 개념 바로 그 자체에, 그리고 노동은 — 집합적이든 아니든 — 주체의 목표 지향적 활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의에 있다. 이 모델에서 노동의 내재적 조직화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것이 목표를 실현하는 — 즉 필요나 선택에 의해 생산물을 생산하는 —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임금 노동은 언제나 대상이나 목표 — 생산물과 이윤 — 를 염두에 두고 고용되지만, 재생산 노동의 의미는 노동력을 재생한한다는 자본주의적 텔로스를 초과한다.
이 ‘초과분’을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적 노동 논리에서 실비아와 조지의 공통화commoning 개념으로 이동하는 것이 유용하다. 공통장commons은 공동생활communing을 통해 단순히 공통화의 생산물이나 목적만이 아니라 공통화 관계들의 조직화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공통할 의지와 필요 모두 공통화 실천을 창조하기에 매우 불충분하다. 공통화는 개별적인 의지와 필요들의 집합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공통물뿐 아니라 공통화의 실천과 관계들을 요구하는데, 이는 (계약이나 교환에서처럼) 개별 목적들의 일치에 대한 것도, 집합적 목적 아래로 개별 목적들의 포섭에 대한 것도 아닌, 주체와 목적과 생산물로 환원될 수 없는 수단들의 관개체적인transindividual 게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친족 관계를 부분 주체들partial subjects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게임으로 사고할 수 있는지, 이것이 어떻게 친족의 진행 중인 재생산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지 제안한다. 우리의 바람은 친족 관계 내에서 아이 양육이라는 이 좁은 초점에서 시작하여, 공통화와 가족의 확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할 몇 가지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이론적으로 정식화되는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적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는, 친족의 속하기belonging와 되기becoming에 관한 경험과 사례를 기억하고 재서술하고 성찰하는 데 관심이 있다. 아이디어는 부분 주체들을 일반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탄생, 주거 단지에서의 삶, 땅과 관계 맺기 그리고 실비아와 조지 그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 같은 구체적인 사례로부터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친족이라는 게임에서 하나의 일반적인 목소리로 화해될 수 없는 상이한 입장들과 움직임을 반영하기 위해 우리는 이 글을 대화로 쓰기로 정했다.

임신, 즉 공이 구르기 시작한다
마누엘라:
나는 이 문제를 색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해서 재생산과 속하기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제안하고 싶다 … 그 출발점은 신체와 임신이다. 나는 사회적 재생산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언급하는 집합적 과정과 어떤 신체 경험들을 함께 엮어보는 것이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딸을 임신했을 때 나는 어떤 방향성을 찾으면서 브라이언 마수미가 쓴 ‘속하기의 정치경제와 관계의 논리’[4]를 다시 읽었다. 그 글을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던 건, 누가 혹은 무엇이 주체이고 객체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속하게 되는지에 대해 마수미가 질문하는 방식 때문이다. 그 글은 사실 축구에 대한 글인데, 집합적 움직임과 되기에 대한 일종의 우화이다.
축구에서 움직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누가 무엇을 움직이고, 무엇이 누구를 움직이는가? 마수미에 따르면 한편에서 자석처럼 게임을 긴장 상태로 유지하는 극점, 즉 골문은 움직임의 ‘유발자’이다. 공은 촉매이며, 실제 게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핵심은 공이 객체가 아니라 게임의 주체 혹은 부분-주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수미는 주체를 움직임이 지향적으로 펼쳐지는 지점으로 정의한다. ‘공이 선수들을 움직인다. 선수는 공의 객체이다. … 공이 움직이면 전체 게임이 그것과 함께 움직인다. 공의 변위는 장소 이동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의 포괄적인 사건이다.’[5] 이 아이가 우리의 삶에 들어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니, 축구 경기의 공과 약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전체 장을 움직인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혹은 개입주의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 미묘하게 바꾸고 변형시킨다. 들뢰즈적 말장난을 하면 차이와 반복[재생산]이다. 임신한 배,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안의 되기 속 주체subject-in-becoming는 공이고, 공동체는 팀이며 사회는 운동장이다.
마수미는 축구 선수의 움직임이 필연적으로 반사적이지 성찰적이지 않으며, 언어에 기반하지 않는 정동과 지향에 의해 추동된다고 주장한다. 선수들이 자기를 의식하게 되면 게임의 흐름이나 요지를 놓치기 때문이다. 이 집합적인 움직임-행동은 잠재력, 즉 되기 혹은 (승리, 득점의) 실현의 잠재력과의 놀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데, 바로 그 놀이 안에서 속하기가 일어난다. 속하기는 정체성(유니폼)이 아니라 집합적 움직임에 뿌리를 둔다. 마수미는 이렇게 말한다. ‘되기 안에 속하기가 있다.’[6]
나는 살아있는 과정으로서의 재생산과 함께 일어나는 그런 속하기를 생각했다. 재생산이라는 문제는 대부분 우리의 의식적인 의지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자본주의, 가부장제 등과 관련하여) 직관적으로, 때로는 분석적으로 나쁜 행동을 피하려고 하면서 일상에서 하는 움직임들과 같다. 그 움직임들에는 기교가 있지만 그 움직임들은 줄거리plot보다는 흐름처럼 기능한다. 그 움직임들 안에서 되기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출현하고, 우리는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게임 계획에 없던 관계를 구축하며, 우리는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의존하고 공유하게 된다. 지금까지 육아는 이런 식이었다. 우리를 특정한 사회적 거품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종류의 고립으로, 우리가 결코 예측할 수 없었던 성좌와 동맹으로 연결한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관계로 떠밀린다.
마수미의 우화와 함께 나는 공을 나의 임신한 배와 비교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그란 것은 나와 (다소 확장되는 가족으로서의) 우리 주변에서 강력한 역학을, 새로운 되기들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이 모든 것은 이 새로운 생명의 되기와 재생산의 맥락에서, 그것의 세계 안에서 일어났다. 재생산과 되기는 결국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자궁 안에 있는, 또한 태어난 아이는 하나의 공, 즉 부분 주체다. 그 주체는 이름 없고 침묵하며, 그 되기에서는 감지하기 어렵지만, 발차기와 울음소리와 옹알이에서 점점 분명해진다. 이 되기 속 주체는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장 전체에 촉매 작용을 한다. 따라서 크고 긴 집합적 되기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이 부분 주체가 모든 종류의 장치, 제도, 집단 그리고 사람들과 절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되기-속하기와 함께 생겨나는 힘이 있다. 그것의 이름은 돌봄care이다. 그 촉매적 잠재력의 핵심적인 측면이 돌봄이다. 이것은 되기가 가능하도록, 그와 더불어 속하기가 가능하도록 보장한다. 그러한 ‘가족’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이름과 거래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차이와 거리를 가로지르며 우리를 세계에 뿌리내리게 하는 움직이는 장field이다. 우리를 재생산하는 것이며 우리가 재생산하고, 자라고 그리고 벗어나는 것, 오고가는 사람들과 함께 변하는 것, 상이한 부분 주체들 주변에서 변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주는 아이
부에:
나에게 축구를 하는 것은 당신이 그 게임의 일부가 되고 그 게임에서 거주하고 살고 호흡한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속하기다. 이것은 그 게임이 지속되는 동안 다른 어딘가에 대한 당신의 소속을 중지시킨다. 이것 — 당신이 동시에 속할 수 있는 장소와 과정과 사람들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 역시 속하기의 한 측면이 아닌가? 그리고 장field은 필연적으로 경계가 있다. 경계는 장이 소멸되지 않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장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어느 선수라도 그 과정에서 개별화되고 게임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속하기든 다른 속하기들의 시간적·공간적 중지인 것일까? 축구를 친족과 커먼즈를 사고하는 관계적 모델로 사용하는 것의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투쟁적agonistic이라는 점이다. 공통의 장과 공통 규칙 안에, 대립하는 지향과 목적을 가진 상이한 팀들이 있으며, 그 팀들은 상이한 기량과 역할을 가진 상이한 선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노동’의 차원이고, 개별적 주체와 집합적 주체의 문제이며, 그들의 목적을 협력의 생산물 — 이 사례에서는 득점과 수비. 최종 목적은 가장 많은 골을 넣어 승리하는 것 — 로 절합하는 일이다. 그러나 마수미가 제공하는 것은 동일한 부분 주체, 즉 공을 둘러싼 두 팀의 유동적인 조직화를 사고하는 방식이다. 공을 중심으로 공과 함께 하는 그 관계적 움직임들이 그 게임의 본질, 즉 그것의 되기와 속하기다. 이 움직임들이 작동하지 않으면 규칙은 억압적으로, 경기장은 제한적으로, 상대는 압도적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친족을 작동하며, 거주가능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재생산 노동이나 이 노동을 수용하는 공통공간 혹은 이 노동을 규제하는 윤리적·도덕적 규약이 아니라, — 이것들이 중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 우리가 돌보는 대상, 예를 들어 아이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관계적 움직임들에서 출현하는 돌봄, 공감, 즐거움이다.
나는 이 사례가 대단히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계약과 정체성을 넘어선, 의지나 숙명을 넘어선 되기가 축구 같은 코드화된 팀 스포츠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좀 더 비공식적이고 변화하는 관계 및 조직 형태에서 뿐 아니라, ‘가족’처럼 규칙이 있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관계에서도 그러한 되기의 중요성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 계약 및 혈통의 논리와 관계 없이 아기가 만들어 내는 돌봄의 역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아기가 어떻게 속하기와 되기의 촉매작용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를 그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진부하고 환원주의적일 것이다.
우리는 속하기의 측면에서 아이의 탄생을 생각하곤 한다. 아이는 태어나기 전에도 가족, 계통, 혈통, 국가에 기입된다. 첫날부터 이 속하기는 성姓과 시민성을 통해 확립된다. 현대 자본주의의 가족 주체와 계약 주체의 생산은 출생과 함께 시작된다. ‘이 아기는 어느 부모에게 속하는가?’라는 간단한 질문을 통해 재생산 영역에 대한 ‘사적인’ 속하기와 국가에 대한 ‘공적인’ 속하기를 말끔하게 엮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돌봄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재생산과 국가적 재생산에 포섭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 익숙하므로,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돌봄이 어떻게 소유로서의 속하기belonging-as-property라는 끈을 찢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1980년대 탄자니아 시골 마을에서 살았을 때 부모님이 내가 태어난 이후 어떻게 불렸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관습에 따라 부모님은 부에 아빠와 부에 엄마로 불렸다. 탄자니아의 친구, 가족 그리고 이웃 사이에서 이름 짓기는 부모에 대한 아이의 속하기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한 부모의 되기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성인은 부모나 조부모가 지어준 이름보다는 그냥 아무개 엄마나 아무개 아빠로 알려진다. 이러한 호칭 변화는 단순히 누군가의 아이로 있음에서 누군가의 부모 되기로의 이행을 나타내지만, 그것은 여기저기 흩어진 정착지 생활의 특징이기도 하다. 정착지에서는 아이들의 놀이 집단의 순환이 집들을 엮고, 이를 통해 부모들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한다. 부계 성씨나 법적 이름과는 달리 자녀에게서 파생된 이름filionym은 안정적이지 않고 맥락에 달려 있다. 이웃이 첫째 아이를 알지 못하면 부모는 둘째 아이의 엄마, 아빠로 불릴 것이다. 등등
이 맥락에서 육아는 국가와의 개별화된 관계보다는 확장된 가족 및 이웃과 실천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절합되어 있었다. 이파카라 마을의 길을 돌아다니면서 친구들의 집은 나의 집의 확장이 되었다. 보통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저녁이 준비되면 그냥 먹곤 했다. 세계의 이 지역에서 아이 돌봄은 생물학적 부모(아빠와 엄마)만의 책임이 아니라 다른 엄마와 아빠들, 샹가지shangazi와 와좀바wajomba(이모와 삼촌들) 그리고 와비비wabibi와 와바부wababu(할머니와 할아버지들) 모두의 책임이며, 이 역할은 가까운 혈통 외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이웃이 맡을 수 있다. 결혼 계약과 개별화된 재생산에 덜 의지하는 확장된 가족들은 음식과 아이들 같은 부분 객체들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확장된 가족과 공동체 구성원 중 흉작으로 고통받는 구성원이 있으면, 개별 가구의 부지에서 나온 잉여는 잉여로 간주되지 않는다. 음식과 화폐는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순환되고, 아이들은 종종 그들에게 가장 잘 제공해줄 수 있는 가족 구성원들과 지내기 위해 순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모를 그들의 아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법적 주체와 확장된 가족 구성원들 그리고 마을이나 이웃 구성원들 사이의 지속적인 괴리의 지표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공동시민으로서가 아니라 돌봄과 자기재생산 구역의 공동주민으로서 관계 맺는다. 공통의 생태계를, 이웃의 작물과 동물을, 그리고 담장 대신 길들이 교차하는, 이러한 흩어진 정착지의 공동 거주를 돌보면서 말이다. 오늘날 이것은 변하고 있다. 담장이 설치된다. 불균등하게 그리고 가역적으로.
돌봄, 재생산 그리고 속하기
마누엘라:
당신이 엄마와 아빠를 이야기해서 나는 우리의 딸 밀라를 생각하게 됐다. 밀라는 옹알이를 시작할 때 마마[엄마]와 바바[아빠]뿐 아니라 바마와 마바(그리고 맘바, 암마 등)라는 말도 했다. 처음에 이것들은 그냥 음절에 불과하다. 결국 그것들은 관계에 연결된다(부가 설명: 브리지트 바살로가 자신의 아이를 제외한 누구로부터도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하면서 모성은 사회적 역할이 아니라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녀 역시 중요한 지점을 짚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이 관계들이 타인에 의해서도 인정받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한 개인을 그 역할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말이다).[7] 아이에게는 자신이 자라면서 경험하는 어떤 관계와 역할도 정상적인 것이므로, 마바나 바마 등을 가질 수 있는 여지도 많다. 밀라가 조금 자라자 부모를 다 ‘마마’[엄마]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확장된 가족과 때로는 낯선 사람까지 그렇게 불렀다. ‘마마’는 ‘안녕’ 혹은 ‘나 뭔가 필요해’ 같은 의미였다. 밀라가 ‘마마’ 대 ‘파파’를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많은 부모들이 이름 짓기에서 아이의 안내(와 고집)를 따른다. 나는 몇몇 친구들의 첫째 아이가 자신의 둘째 엄마를 ‘포우마’Pouma(발음상 그녀의 이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고 불렀고, 그의 부모는 수년간 그렇게 따라했던 것을 떠올린다. 포우마는 이름인가 역할인가? 나는 여기에 대문자를 써야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Pouma/pouma, bama/Bama, mama/Mama. 이 특이한 이름과 역할 사이의 긴장은 매우 생산적이다. 아이들의 관계 맺기 방식이 지닌 수행적 잠재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돌봄에 주어진 어휘는 조금 빈곤하다. 우리는 ‘공동 엄마들’co-mothers이나 ‘대행 엄마들’allomothers에 더 의지할 수 있고, 이모,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심지어는 엄마와 아빠라는 용어를 그렇게 부를 만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나는 사실 이것이 노동계급 가족, 이민자 가족, 불안정 가족에서 좀 더 일반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가족들에서는 이러한 다른 관계들이 필요에 따라 더 큰 힘을 발휘하고, 관계들이 부르주아 핵가족에서처럼 억제될 수 없다. 돌봄 역할은 창조성에 대한 의지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일상생활의 실용주의에서 발명되며, 그래서 모든 종류의 가족들이 성장한다. 그것이 나에게 확장된 가족의 아름다운 점들 중 하나다. 확장된 가족을 생명 작용과 선택, 재생산과 돌봄, 필요와 욕망이 계속해서 흐려지고 다시 섞이는 발명의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 말이다.
나에게 재생산과 돌봄은 이러한 의미에서 함께 어우러진다. 어쩌면 이 두 가지는 우리가 가부장적·자본주의적·식민주의적 권력 구조를 전복하기 위해 갖춘 가장 강력한 도구인지도 모른다. 이 전복은 우리가 새로운 관계 맺기 방식들을 구축하고 상상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투쟁, 조직화와 집합적 실천에서 우리의 집합적 되기와 관련이 있다. 핵심은 그것들을 신체적 재생산과 세대 간 과정 같은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이해하기를 중지하고, 대신 —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 많은 상호의존성과 부분 주체들을 보는 일에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은 개인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되기는 순수한 의지도 숙명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하며 자연계의 원시적이고 나쁜 우발성에 대립하는 주권적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관념을 해체하는 것은 많은 힘든 페미니즘적·탈식민적·생태적 작업을 필요로 할 것이다. 사회 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되기-속하기의 책임을 맡은 여성뿐만 아니라 이민자들 그리고 식민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의해 돌봄 서비스의 책임을 떠맡은 모든 이들은 이 전복과 직조의 노동에 관해 공유하고 가르칠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정의와 폭력
부에:
탄자니아 농촌의 확장된 가족은 자급 생산과 가부장적 가족 구조로 인해 많은 도시 거주자들과 비non탄자니아인들에게 사회적으로 퇴행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전적인 맑스주의자, 개발론자 그리고 자유주의자가 모두 공유하는 근대주의적 관점과 근대화 관점에서 친족 기반 자급 농업이 저개발의 특징으로 여겨졌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부모가 속해 있던 진보적인 NGO 영역에서 그 서사는 오래되었다. 저개발은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에 의해서, 또한 확장된 가족에 의해서 재생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면한 개인들의 저축을 계속 고갈시키고 지역 자본의 형성을 막을 것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환금 작물부터 소액신용에 이르는 다양한 경제 개발 프로젝트들은 식민주의 아래에서 시작되었던 과정들을 지속해왔다. 토지 사유화, 무토지 인구 확대, 그리고 확장된 가족의 약화가 그것이다.
이 지점에서 실비아와 조지의 작업이 갖는 급진성은 확장된 가족 — 저개발의 표식으로 여겨지는 — 이 가부장적 관계와 자본주의적 관계에 맞서는 사회적 자기방어의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확장된 가족은 개발주의가 구상하는 국가 자율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여성의 자율을 옹호한다. 실비아가 설명하듯이 여성은 일반적으로 임금노동을 거부할 수 있었다. 이는 그들이 “가족이나 남편을 통해 … 언제나 자신의 밭과 작물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농사를 지은 생산물을 판매하여 얻은 소득을 통제했”기 때문이다.[8] 다른 글에서 그녀는 자급 농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여성들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침략”에 맞서 공동체 투쟁을 외부에서 그리고 가족 안에서 이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9] 여성들이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들이 자급 노동의 상당 부분을 담당할 뿐 아니라(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2002년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모든 식량의 80퍼센트까지 생산) 그들이 돌봄 및 재생산의 가족 및 친족 구조에 좀 더 의존하고 그 안에서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투쟁은 공유, 공동책임, 돌봄의 경제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며, 이는 노동 시장뿐 아니라 상품 시장으로부터의 부분적인, 종종 매우 높은 자율성을 가구에 제공한다. 실비아가 쓰듯이, 그러한 여성들의 투쟁은 평등의 문제만이 아니라 생존, 자율 그리고 투쟁 역량의 문제다.
이 투쟁들은 평등주의가 커먼즈에게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준다. 커먼즈 안에서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외부 개입과 수탈로 이어지는 길을 열기 때문이다. 특히 그 투쟁들은 젠더 기반 불균형이 농업 관계에 대한 시장의 지배를 강화하는 역학을 생성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국가, 기업, 국제 기구들이 커먼즈를 종속시키는 포위에 직면하여 그 불균형이 여성과 남성 간의 연대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이 메커니즘은 끊임없이 국가와 해외 자본과 남성 가장으로 이루어진 동맹의 위협을 받는다. 이 동맹의 핵심은 확장된 가족의 조직 원리를 상호부조에서 소유와 생산으로 바꾸는 것이다. 환유법으로 표현하면 그게 누구든 돌봄이 필요한 사람 — 가난한 사촌, 고아가 된 조카딸, 유아, 할머니 — 이라는 그 변화하는 부분 주체를 중심으로 가족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완전한 주체를 중심으로 가족을 조직하는 것이다. 혹은 확장된 가족을 안정시키는 부분 주체로서의 쌀을 단순 상품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이 변화를 달성하는 한 가지 중심적인 제도적 메커니즘은 땅에 대한 남편의 관습적인 권리를 그의 법적 이름에 귀속되는 법적 소유권으로 바꾸는 것이다. 실비아는 우간다의 <토지와 형평 운동>(Land and Equity Movement)에서 활동하는 주디 아도코(Judy Adoko)와 사이먼 레빈(Simon Levine)을 인용한다.
관습적으로 여성이 남편을 통해 땅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개인화된 소유권 개념과 (의도적으로) 혼동된다. 남성들은 이제 관습법 아래에서 결코 가지지 못했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아내의 땅에 대한 필요를 무시하고 가족과 상의 없이 땅을 팔기 위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11]
실비아와 조지의 작업이 강조했듯이 남성 가족 리더십의 ‘소유적 개인주의’로의 그러한 변형을 통한 근대 계약적 개인의 출현은 유럽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C.B. 맥퍼슨의 『소유적 개인주의』 같은 지성사들이 무시해온 것이다.[12] 친족 관계가 조직되는 운동장으로서의 토지가 개인 재산이 되면 친족도 세습 재산으로 변형된다. 확장된 친족 네트워크 대신 분리된 가족과 상속 계열이 형성된다. 상호의존 네트워크(가부장적이든 모계 중심이든 또는 다른 무엇이든) 대신 당신은 핵가족을 갖게 되고, 공간적·건축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내부/외부가 창출된다. 개별 주택들이 담장이나 울타리로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확장된 가족의 가부장이 가족 네트워크의 중심 마디에 불과하다면, 핵가족의 가부장은 외부세계에 대한 접근권을 독점하며 따라서 자율을 독점한다. 재생산 노동은 생산 노동에 보조적인 것, 즉 ’생계 부양자’의 생산성을 유지하는 노동이 된다. 문제는 여성과 청년들이 — 친족 게임과 돌봄 노동을 영원히 가치절하하면서 영원히 화폐로 조직되는 — 이 ‘자율적’ 개인의 모델과는 다른 자유의 모델을 찾을 수 있는가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친족을 가부장제와 동일시하는 한, 우리는 보편화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는 삶의 양식에 계속 매혹된 채로 있을 것이다.
주권적 개인을 넘어서
마누엘라:
위에서 언급한 바로 그 시초 축적 과정과 계몽에서 출발하면서 법과 철학에서 정치적 주체가 정의되는 방식의 가장 큰 결함 중 하나는 일반적인 주체가 자율적 개인으로 가정된다는 점이다. 법과 정치 사상의 기본 단위는 이렇게 자유롭게 유동하는 개인인데, 이는 말하자면 속박되지 않은 유복한 백인 남성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한 주체는 우리 세계의 표준이 아니라 예외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곳에서 정상[규범]으로 기입되어 있다. 페미니스트들 — 특히 돌봄이나 상호의존성 혹은 타율 개념이 우리가 경제와 사회와 법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을 어떻게 결정해야하는가에 대한 최근 논쟁에서 — 은 ‘정상적인’ 주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해왔다. 실천적으로 이 정상성에 맞선 투쟁은 물론 매우 어렵다. 우리 모두가 이 형판 — 정치적이 되는 것, 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을 틀 짓는 — 안에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습관에 의해 조형되기 때문이다.
이 습관들을 전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많은 경험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골칫거리이면서도 활력화하는(empowering) 것이다. 그것들 대부분은 덜 개인화되고 덜 주권적인 방식으로 행위주체성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것, 다른 논리들과 다른 유대관계를 통해 세계에 삽입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임신으로 돌아가면, 흥미로운 교훈이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 같지만, 체현된 방식으로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개인(individuals)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우리는 완전히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둘로, 혹은 그 이상으로 나뉜다. 우리는 ‘가분체들’(dividuals)[13]이다. 우리의 사회적 재생산과 주체성의 관점에서 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또한 신체적으로 그 이상이 되기(becoming-more), 실제로 다른 것이 되기(becoming-another)에 익숙하다. 본질주의를 넘어서, 이것은 또 다른 정치적·경제적·법적 주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체현된 과정에 뿌리를 둔, 상호의존성, 가분성, 되기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에 기반을 둔 주체가 가능한 것이다.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세대와 재생산 혹은 한계를 탐구하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결정론적이거나 본질주의적이지 않고서도 그것들을 가치화할 수 있다. 우리의 현재 생태적 곤경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요구한다.
자본에 맞선 사회들
부에:
주권적 개인의 신화는 다른 신화들 — 자본주의적 발전은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혜택을 준다는 식의 생각 — 과 절합된다. 궁극적으로 혜택을 받는 이 ‘모든 이들’이 바로 주권적 개인이다. 그 언어는 때때로 미묘한 형태로 나타난다. 탄자니아 농촌 사회가 지역 자본을 형성할 수 ‘없었다’는 의견에서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이들은 농촌 탄자니아의 개인들이지, 함께 다른 것을 시도했던 확장된 가족이 아니다.
이 차이를 결핍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하려면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저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용하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그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회 구조가 중앙집권 권력과 부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러한 사회는 본성상 평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설계에 따라 평등한 것이다. 그 사회는 불평등의 발전을 끝없이 차단하는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사회로부터 분리된 권력의 형성을 차단하는 한 가지 핵심 메커니즘은 관대함이 권위의 핵심 측면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족장은 ‘끊임없는 약탈’을 당하며 희소한 자원의 보유를 통해 타인에게 명령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한다.[14] 우리는 족장이 전체 공동체의 ‘부모’로 변하여 집행 권력(executive power)이 아니라 돌봄과 무조건적인 나눔의 재생산 능력(reproductive power)을 행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메커니즘의 효과는 정치적 리더십이 도덕적·정신적 리더십 이상이 되는 일을 차단하는 것이다. 족장의 핵심 역할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는 것, 중개자이자 조정자가 되는 것, 뿐만 아니라 공통선common good을 말하는 연설가가 되는 것이다. 클라스트르는 그러한 사회를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로 기술한다. 그가 설명하는 아메리카 선주민들과 달리 명령으로서의 리더십은 식민지 이전, 식민지 시대 그리고 탈식민지 시대 아프리카 사회에서 흔했다. 그러나 우리가 클라스트르를 적용하여 확장된 가족이 자본뿐 아니라 노동력 형성을 효과적으로 차단해온 방식을 기술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확장된 가족 구조를 중심으로 건설된 사회를 ‘자본에 대항하는 사회’로 기술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이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만 그 질문은, 실비아와 조지가 큰 역할을 했던, 친족과 커먼즈의 재개념화라는 혁명적 지평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에 꾸준히 희미해진 지평이다. 그런 지평이 다시 열리기 전에 친족 네트워크와 친족 게임은 새로운 사회적 보수주의의 친족 형태와 투쟁하며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육아 공동체의 창조뿐 아니라 관대한 ‘족장들’의 존재를 수반한다. 그 족장들은 공식적인 권위가 없는 영적 지도자이며, 그들의 숨겨진 지식은 나머지 우리에 의해 계속해서 약탈될 수 있다.
존재, 연장자 그리고 집합적 기억
마누엘라:
우리는 여성의 신체, 자본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시초축적에 대한 실비아의 저작뿐 아니라 사회 운동 모임 속 그녀의 존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실비아가 단호하지만 섬세하고 관대하며 주의 깊다고 느꼈다. 나는 그녀의 작업과 목소리를, 그녀의 페르소나에 모든 주의를 집중시키지 않고 집합적 과정에 촉매 역할을 하는 부분 주체로 경험했다. 나는 실비아를 아주 주의 깊게 듣고 말하고 조언하는 연장자로 여기는데, 이것은 살아있는 기억과 시공간을 가로질러 연결되기 위해 우리가 사회 운동에서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마주침에는 가족의, 속하기의 느낌이 있다. 이것은 정체성이나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없으며, 우리의 함께 되기의 방식과 대상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존재는 또한 가족, 연속성 그리고 돌봄과 안전의 느낌을 구성한다. 이 존재가 멀리서만 느껴지고 그러한 마주침은 가끔씩만 일어나더라도 말이다.
내가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의 한 사회센터의 마당에 앉아 있던 기억이 난다. 실비아는 변변찮은 연단이 된 스케이트보드 램프 바닥에서 이탈리아와 미국의 페미니스트 운동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많은 장소와 단체에서 왔지만 대부분 서로를 몰랐던 사람들을 가로지르는 되기-속하기의 감각이 있었다. 큰 행사는 아니었다.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고 공표되는 선언문도, 만들어지는 네트워크도 없었다. 그러나 그 마주침은 우리 모두에게 에너지와 영감을 불어 넣었다. 나는 그녀의 존재와 이야기가 여러 번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역동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듣고 말하고, 사물이 그녀를 통과하도록 함과 동시에 풍부한 지식을 나누면서 말이다. 슬프고 즐거운 투쟁에 대한 인터뷰에서 실비아는 자신의 관대하고 긍정적인 스타일과 참여 경향을 돌아본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당신은 젊었을 때 알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제가 배운 한 가지는 좀 더 겸손해야 한다는 것과 사람들의 말에서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그들을 알게 될 때까지 그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믿지 않거나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어리석은 이야기를 종종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한계보다는 잠재력을 강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15]
그런 연장자가 주변에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사람과 운동으로서 뿌리내리게 하고, 자기재생산 운동 — 어떤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시간을 가로지르며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는 운동 — 을 창조하는 데 결정적인 되기-속하기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논쟁보다 교육학을, 한계보다 가능성을 강조하며, 사람들의 취약성과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더 큰 그림을 염두에 두고 상황적인 방식으로 해답이나 영감을 제공하려 노력한다. 데이비드 베르코테른은 이것을 운동에서 ‘선례 문화’의 필요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데, 기억과 지식이 세대와 투쟁 주기들을 가로질러 전달되려면 그러한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16] 실비아는 자본주의에서의 체계적 회귀를 파악하고 지배 엘리트의 다음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의 투쟁을 통해, 그녀가 (집합적 힘에 대한) 자본주의적 반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을 이루는 저항의 많은 층위와 형태들을 통해 그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기억이 필요하다. (『캘리번과 마녀』에서처럼 중세 시대까지 거슬러가는) 장기 기억뿐 아니라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직전과 직후의 투쟁과 관련된 단기 기억도 필요하다.
가족을 확장하기
확장된 가족이 부분 주체들 — 아기, 자원, 공간 — 을 통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 말할 때 이 과정이 얼마나 물질적이고 골치 아플정도로 사회적인가를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공유된 이해관계와 공포를 둘러싼 계약으로 모이는 한 무리의 주권적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다(홉스부터 현대 코뮌에 이르기까지 아주 흔한 모델). 대개 확장된 가족의 구축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취하고 그것을 주의깊고 조심스럽게 지키는 일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세계를 바깥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말이다. 지속가능한 유대관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깥으로 확장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선사한 커다란 고독과 소외에 직면하여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이다. 우리의 출발점은 탄자니아 마을도 아마존 공유지도 아닌, 개인화되었지만 나누어질 수 있는(individualised yet dividual) 생명들을 가로지르는 일이다. 재생산은 부분 주체들과 함께 사는 것의 도전, 즉 그 부분 주체들로부터 — 우리의 환경과 집과 차이에 맞게 — 삶과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실비아와 조지가 제안하는 것은 타율 대 자율, 공적인 것 대 사적인 것의 협박을 넘어서는 길이다. 우리가 공통으로 지닌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말이다. 게임으로서의 친족 개념은 친족이 어떻게 혈연과 전통과 가족 의무의 유대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통찰은 학술적 혹은 역사적 교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통 세계를 위한, 현 세대와 미래 세대를 위한 집합적 교육학과 돌봄 행동이다. 그러므로 자기재생산 운동의 창조라는 문제는 가족이나 속하기의 문제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생물학적 친족 대 선택적 친족이라는 이분법은 지속가능한 유대관계와 돌봄 유대관계를 만들어야 할 필요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된다. 자기재생산 운동의 구축은 우리 일상 관계의 종종 미완성의 불분명하고 평범한 측면들과 함께 흘러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 덜이 아니라 — 더 많이 그리고 다르게 의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1] Silvia Federici, Revolution at Point Zero (Oakland: PM Press, 2012), p. 146.
[2] Carolina Del Olmo, Dónde está mi tribú? Maternidad y crianza en una sociedad individualista (Madrid: Clave Intectual, 2013). Translation ours.
[3] Melinda Cooper, Family Values: Between Neoliberalism and the New Social Conservatism (Cambrige, MA: MIT Press, 2017).
[4] In Brian Massumi, Parables for the Virtual: Movement, Affect, Sensation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02), pp. 68–88[(한국어판) 브라이언 마수미, 「소속의 정치경제 그리고 관계의 논리」, 『가상계 — 운동, 정동, 감각의 아쌍블라주』,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1].
[5] Ibid., p. 73[(한국어판) 134쪽].
[6] Ibid., p. 76[(한국어판) 138쪽].
[7] ‘The family is dead. Long live the family’. Conversation between Orna Donath, Brigitte Vasallo, Maria Llopis and Bel Olid at CCCB Barcelona, March 2017. At www.cccb.org/es/multimedia/videos/kosmopolis-17-la-familia-ha-muerto-viva-la-familia/227156.
[8] Silvia Federici, ‘Women, Land-Struggles, and the Reconstruction of the Commons’, WorkingUSA – The Journal of Labor and Society, 14(1) (March 2011), p. 45.
[9] Silvia Federici, ‘Women, Land-Struggles and Globalization: An International Perspective’, Journal of Asian and African Studies, 39(1–2) (April 2004), pp. 47–62. At https://doi.org/10.1177/0021909604048250.
[10] Federici, ‘Women, Land-Struggles, and the Reconstruction of the Commons’, p. 42.
[11] Judy Adoko and Simon Levine, Land rights: Where We Are and Where We Need to Go (Kampala: LEMU – Land and Equity Movement in Uganda, 2005), p. 11. At www.land-in-uganda.org/assets/Land-rights-in-Uganda-%20where-we-arenow-and-where-we-need-to-go-Sep-2005.pdf.
[12] C.B. Macpherson,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Hobbes to Locke (Oxford University Press, 1962). For a corrective see Carole Pateman, The Sexual Contract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8).
[13] As Gerald Raunig also asserts, albeit in a different sense. Gerald Raunig, Dividuum (Vienna: Transversal Texts, 2015).
[14] Pierre Clastres, Society Against the State: Essays in Political Anthropology (Cambridge, MA: Zone Books, 1989), p. 30.
[15] Silvia Federici, Carla Bergman and Nick Montgomery, ‘Feeling Powers Growing: An Interview with Silvia Federici’, in Bergman and Montgomery, Joyful Militancy: Building Thriving Resistance in Toxic Times (Chico, CA: AK Press, 2017). Available at https://joyfulmilitancy.com/2018/06/03/feeling-powers-growing-an-interview-with-silvia-federici/.
[16] David Vercauteren, Micropolitiques des Groupes. Pour une Écologie des Pratiques Collectives (Paris: HB Édition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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