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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를 통한 애도의 불가능성

 

배경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는 많은 부분에서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젊고 어린 피해자가 많다는 점, 즐거움과 설렘으로 가득했을 순간이 비극으로 변해버렸다는 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참사였다는 점,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국가는 없고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고 사회적 참사를 불의의 사고로 축소하려는 국가만 있다는 점이 그렇다. 여기에 더해 국가는 참사 발생 직후 발 빠르게 사건을 수습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책을 내세우며 시민들에게 슬퍼만 할 것을 요구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안전상의 이유로 수학여행이 금지되었고, 문화 예술 행사들은 줄줄이 취소되었다.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로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되며 원래 예정되어 있던 핼로윈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애도가 곧 슬픔인 사회에서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는 말이 더욱 빈번하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는 말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기적인 개인의 외침일 뿐일까? 모든 것을 금지하고 슬퍼하기만 하면 정말 애도할 수 있는 걸까? 여기서 말하는 ‘금지’는 애도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라, 오히려 애도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다들 알고 있듯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안전불감증과 재난 대응 시스템의 완전한 부재이지 수학여행이 아니다. 수학여행을 금지한 것은 아무 효과도 쓸모도 없는 보여주기식 대응이었을 뿐이다. 이런 대책의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오로지 공부와 시험뿐인 학교생활에서 얼마 안 되는 즐거운 경험을 못 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공개적으로 짜증 나 하거나 억울해하면 또래 친구들이 수학여행에 갔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놀 생각 하는 사려 깊지 못 한 아이로 찍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다. 문제의 원인은 핼로윈이 아니라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전혀 대비하지 않았던 것과 여러 차례 신고가 들어왔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대처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핼로윈을 맞이해 준비된 수많은 행사는 취소되었고, 여기저기 붙어 있던 핼로윈 장식은 철거되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대응으로 보이기도 한다. 당연히 핼로윈데이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핼로윈을 상징하는 장식물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핼로윈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통념상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핼로윈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없애는 일은 참사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를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 으레 따라오는 조치는 문화예술 공연의 취소다. 한국 사회에서는 참사 이후 “애도”라는 명목으로 많은 공연을 취소하거나 없애는 일이 다반사다. 공연자가 개인적으로 너무 마음이 아파서 공연을 못 하겠다고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엄숙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취소해야만 한다.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 왜 공연과 행사를 취소해야 하는 걸까? 예술 공연이 애도를 방해한다는 연구 결과라도 있는 걸까?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 문화예술 공연을 못 하게 막는 것은 슬픔과 비통함을 제외한 그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게 하려는 조치로 보인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고, 배우의 연기를 보며 약간의 즐거움이라도 느끼는 것은 옳은 애도의 방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공연장이라는 공간은 앞에서 누군가 애도와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쉽고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슬픔을 나누고, 위로받기도 좋은 공간이다. 공연이 끝난 후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기도 좋다. 이걸 없애는 건 애초에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눌 가능성 자체를 없애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세월호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참사 때마다 연기되거나 취소되지 않은 것은 수능뿐이었다. 수능을 3주 앞둔 수험생들은 과연 슬퍼할 여유나 있었을까? 정말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주려고 했다면 수능은 좀 미뤄도 되지 않았을까? 한국 사회에서의 애도는 이처럼 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의무는 없애지 않고, 엄숙할 것, “슬플 것”만을 강조한다. 핼로윈은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일 년에 한 번 있는 특별한 명절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가족들 얼굴 안 봐도 되고, 먹지도 않을 음식 잔뜩 하느라 힘만 들고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되고, 오로지 즐겁기만 하면 되는 유일무이 한 날이었다. 이런 날이 사라졌다. 이태원 참사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가도, “앞으로 핼로윈 축제 갈 수 있을까? 가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내가 너무 비윤리적인 인간처럼 느껴졌다. 참사를 앞에 두고 놀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나는 정말 슬픔을 모르는 인간인 걸까? ‘사회적 참사와 애도’ 대한 논의가 제대로 된 적 없는 한국 사회에서는 애도가 곧 슬픔이고 슬픔은 곧 즐거움, 행복과는 함께 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닐까? 

 

슬픔만을 강조하며 참사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애도하기를 제안하는 것은 연이은 참사와 사건들을 지나며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로감만을 남겼다. 세월호 이후 가장 커다란 재난인 코로나는 사람들에게 더욱 노골적으로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했다. 공부와 일을 제외한 모든 활동은 대의를 위해 당연히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번 핼로윈 파티는 코로나 이후 마스크 없이 즐길 수 있는 최초의 핼로윈이었고, 즐거운 연말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오랜 시간 가만히 있기만 한 것에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며 다시 일과 공부를 제외한 모든 것을 금지하는 것은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는 외침이 더욱 노골적으로 터져 나오게 했다. 이 외침 속에는 “국가가 정해 놓은 방식대로 애도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있지만 “나는 하나도 안 슬프고 아무 생각 없으니까 애도 하라고 하지 말라.” 도 있다. 이 두 문장의 의미는 매우 다르지만 결국 “국가가 강제하는 슬픔”을 그대로 따르지 않겠다는 의미는 같다.

 

버틀러에 따르면 “슬픔은 타인과의 관계로 인해 우리가 처하게 되는 속박의 상태를 드러낸다. 슬픔은 우리가 꼭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자아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종종 방해하는 방식으로, 또 우리가 자율적이고 통제권을 갖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 속박의 상태를 드러낸다.”[각주:1] 버틀러가 좀 어렵게 썼지만, 풀어서 말하면 슬픔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고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울지 말고 서론, 본론, 결론 순서대로 논리적으로 말해야지!”라며 스스로 다짐하지만, 결국 입을 떼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와 원래 하려던 말은 절반도 못 한다. 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타인(애도의 대상)으로부터 유발되는 감정이다. 슬픔에 대한 통제권은 타자로부터 나온다. 이처럼 슬픔을 느끼려면 어느 정도 대상과의 관계가 필요하다. 이런 관계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특히나 애도를 위해 혼자 가만히, 조용히 있을 것을 강요하고 여럿이 모여 이야기하고,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수학여행, 공연, 행사) 자체를 없애 버리게 되면 타자와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질 기회 또한 없어진다. 타자와 나의 관계가 아예 없는데 슬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애도는 슬픔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애도는 오히려 다양한 감정과 기억, 이야기가 혼합되어 쌓여가는 과정이다. 참사에 대한 이야기가 쌓이기도 전에 슬픔을 느끼고 애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애도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슬프기만을 허용하는 것은 애초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제안된 애도의 방식은 결국 애도 자체를 금지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애도가 불가능한 사회에 살고 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참사 이후에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더 많은 모임과 더 많은 공연, 더 많은 행사를 장려했으면 좋겠다. 그 속에서 함께 울기도 했다가 웃기도 하면 좋겠다. 참사에 대해 정말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함께 이야기하면서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계속 쌓아갈 수 있으면 한다. 참사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슬프지만은 않게 계속되어야 한다. 애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이 인용한 버틀러의 말을 나도 인용하자면 애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어쩌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각주:2] 우리가 참사로 인해 영원히 변하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려면 슬픔과 비통함만으로 어우러진 일주일이 아닌, 참사에 대해 충분히 곱씹어보고, 이야기하며 다양한 감정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앞으로의 핼로윈은 이전과 절대 같을 수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즐거울 수 있는 날이길 바란다. 참사에 대해 추모하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길 바란다.

 

 

 

  1.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51, 2018 [본문으로]
  2. Ibid. 4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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