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히스토리 트러블 (2/2)

조앤 W. 스콧과의 인터뷰

 

인터뷰어: 가엘 크리코리안, 필립 망조, 아델 폰티첼리 & 피에르 자우이

인터뷰이: 조앤 W. 스콧

번역: 황유경

 

* 원문 vacarme.org/article2325

 

History trouble - Vacarme

« Femme », « Homme », « Genre », « Français », « Musulman » : ces catégories, par lesquelles se constituent et s’identifient des sujets politiques, n’ont pas de sens fixe. C’est que « les mots ne sont jamais que les batailles

vacarme.org

 

-> 히스토리 트러블(1/2)에서 이어집니다

 

 

당신이 젠더라는 개념을 사용하게 된 이래로 그 개념에 대한 견해가 발전한 바 있을까요?

젠더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었습니다. 젠더란 사회적으로 정립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가리킵니다. 섹스는 해부학과 생물학에 관련된 것이죠. 주디스 버틀러는 섹스를 구성하는 것은 젠더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생물학적인 차이도 있으나, 그 차이는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으며, 열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젠더가 생물학적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이러한 견해를 완전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로 인해 여성과 남성에게 귀속된 역할이 탈자연화(dénaturaliser)되고, 해부학이 곧 운명이 아니게 되며, 해부학적인 차이에 의해 정당화되었던 불평등한 대우에 맞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제게 있어 정신분석학이 작용하기 시작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정신분석학은 제 자신이 젠더 개념을 고찰하는 방식에 있어 가장 큰 유연성을 제공한 바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역할이 아닌 영구적인 문제로 만듭니다. 이는 성차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측면을 강조합니다. 프로이트, 라캉, 라플랑슈는 이러한 차이를 상징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규칙, 이상, 신화, 이야기 등으로 상징화 하려는 시도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차이는 불가해한 것으로 남아있으며,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젠더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를테면 정답 없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는, 결코 확정되지도, 결코 결론에 다다르지도 못하는 시도입니다. 이 시도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내 관심을 끕니다. 즉 성적 경계의 정치적, 사회적 질서로서의 젠더란 성차에 따른 불안감의 협상이자, 절대 공고해질 수 없는 이 차이의 의미를 매번 공고히 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신은 젠더의 역사를 영구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경계들을 재정의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역사 속에서 관찰해오고 있습니다.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Only Paradoxes to Offer)』 중 제3공화국 시절 여성 투표권을 위해 힘썼던 대단한 운동가였던 위베르틴 오클레르(Hubertine Auclert)를 다룬 장에서 저는 그녀가 투표소에 침투하여 투표함을 엎고 부숴버렸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녀의 재판 중에 증인석에 섰던 한 증인은 그때 자신이 메두사라도 본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무엇보다도 시민권의 범위에서 여성을 배제하면서 성별 간의 경계를 유지하는 것은 남성성을 보장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비단 남성이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남성으로서의 그들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투표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여성들이 공공장소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침략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거세 행위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여성 운동가들이 남성들을 향해 커다란 가위를 휘두르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 몇 점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고정될 수 없는 경계들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차의 이러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에는 끝이 없습니다. 제 아들이 다섯 살이었을 때, 그 아이는 바지를 입길 거부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저희가 지하철을 타고 있었는데, 한 여성분께서 이 ‘예쁜 여자 아이’에게 칭찬을 해주더군요. 그러자 제 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제 이름은 헨리예요. 저는 남자아이고요. 저는 원피스를 더 좋아해요. 이게 더 예쁘거든요.” 그러니까 제 아이는 정체성이 아닌 선호의 측면에서 대답을 한 것이죠. 그 여성분께서는 아연실색을 해서는 이 괴물이 생겨난 게 제 탓인 양 저를 쳐다보며 지하철에서 내렸습니다. 그 여성분께 육체의 의미에 대해 묻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성차란 무엇인지 묻지 못한 것은 당연하고요. 그걸 물은 건 제 아이였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런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아이의 친구들은 대부분 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 위베르틴 오클레르가 투표함을 엎고 있다, 1908년



그러니까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없다 뿐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성별 체계가 작동하고 있고 답변이 통제 하에 있다면 질문은 제기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꾸준하게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은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것이며, 환상, 인지, 상상을 통해 주어집니다. 저항, 위반,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은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합니다.

 


당신의 연구에 정신분석학이 개입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특정한 날짜를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점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죠. 젠더 범주의 유용성에 관해 다룬 1986년의 제 논문에서, 저는 정신분석학이 역사 분석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범주를 경직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강의를 하며 제가 정신분석학을 공부해야만 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잘 알지 못하는 텍스트들에 대해 강의를 진행해야 했으니만큼 더더욱 정신분석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었을 뿐더러, 이는 정신분석학적 접근 방식이 역사의 영역에까지 관여해가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프로이트를 읽었던 해가 기억납니다. 그 해, 저는 “해부학은 운명이다”라고 말했던 프로이트에 대해 큰 적개심을 품고 있던 페미니스트 여대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프로이트를 읽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우리는 강의마다 50페이지 정도씩 라캉의 글을 읽기에 몰두했습니다. 강의 전날이면 저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글에서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만 같았죠. 강의실에 도착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저도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우리 함께 길을 찾아보죠.” 저는 제 자리를 학생들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 제가 했던 강의 중 최고의 강의였을 겁니다! 정신분석학, 젠더, 그리고 역사에 대해 함께 고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게 나타났던 것은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신분석학 개념에 있어 뿌리를 뒤흔드는 전환이 아닌가요? 어쨌든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학이란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고, 오이디푸스나 햄릿처럼 신화와 시원적인 것을 요구로 하니까요. 역사적 영역에 포함될 수 없는 성차의 개념을 역사적 지형에 옮겨놓음으로써 일종의 밀렵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요?

저는 성차에 대한 보편적이며 불가해한 질문에 답을 하려는 시도들을 역사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무의식은 일정 시기의 유연한 문화적 표상들과 함께 작동합니다. 젠더는 그저 일정 순간에 역할들을 고정시킴으로써 질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답변을 생성해내려 시도하는 규범적인 제어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러한 시도들의 역사를 다룰 수 있는 이유입니다. 성차의 가변적인 의미에 대한 역사 말이죠.

 


그렇다면 2011년 교과서에 ‘젠더’라는 단어를 도입하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젠더의 측면에서 정신분석의 대상이 되겠군요...

물론이죠! 더군다나 저는 바로 이 논쟁으로 인해 젠더 연구의 개념적 틀이 적절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단어가 성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국내 및 국제기관의 담론에서까지 그것의 비판적인 실효성이 희석된 것처럼 보였을 때 말입니다. 프랑스에서 이 논쟁을 일으켰던 가톨릭 신자들이 뭐라고 하든, ‘젠더 이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젠더 이론’은 바티칸 수사학에서 공산주의를 대체하는 발명품입니다. 젠더에 대한 연구, 즉 질문들은 존재합니다. 단어란 언제나 그것을 정의하기 위한 투쟁일 뿐입니다! ‘젠더’에 반대하는 이들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 즉 그들에 따르자면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는 상호보완성에 대해 자신들이 부여하는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연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로 간주되는 것 간의 투쟁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이 투쟁의 지형이 바로 우리가 젠더라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달리 정의할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당신은 역사 속에서의 차이에 대한 문제를 당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정신분석학에 준거하여 성차에 대한 별도의 결론을 마련해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적인 것에는 환원할 수 없는 어떠한 특수성이 있을까요? 다른 것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요?

젠더에 관해 연구를 시작한 이래로 제가 어떤 특정한 관점을 취하게 됐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연구를 하며 예컨대 젠더 문제와 인종 문제가 교차하는 지점을 종종 맞닥뜨렸습니다. 이 둘은 모두 정립되는 것(construction)입니다. 저는 제가 차이를 간과했다는 혐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베일 논쟁에 관해 다룬 저의 책, 『베일의 정치학(Politics of Veil)』 중 ‘인종차별주의’라는 제목의 장에서는 무슬림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된 방식에 대해 분석합니다. 저는 알제리의 식민지화에 대한 현대 담론에서 베일 벗기기와 침투의 은유가 가진 함축성, 제국 통치와 성적 통치가 서로 겹쳐진 방식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최근 논쟁에서 벌어지는 성애화(sexualisation)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논쟁은 물론 이민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성과 그들의 육체, 그들의 ‘과시적인’ 노출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식민지 이후 이민 온 사람들은 자신의 피부색이나 이름으로 인한 차별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화 실패의 책임을 이민자들에게 돌리기 위해 여성의 베일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죠.

요컨대, 저는 인종 정체성을 젠더 정체성과 분리하여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둘은 함께 정립되는 것이며, 각각은 서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성차에 부여한 지위에 있어 당신께서 어떠한 긴장감, 혹은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발견했다면 이 또한 틀림없이 옳습니다. 저는 민족적 차이와 역사적으로 관련된 의미들이, 정체성의 관점에서 성차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기초하여 정립된 의미들과 완전히 동일한 문제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육체와 연관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제가 매달려야할 문제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메아리-환상(écho-fantasme)’이라는 개념을 착안해냈을 때에도 당신은 또 다시 정신분석학에 준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어떠한 긴장감이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환상은 무의식에 종속되는 것이며, 무의식은 시간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상의 반복이라는 구조는 역사적이지 않습니다. 역사가는 환상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나요?

환상의 역사란 없으며, 환상은 역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작동하는 환상, 구현된 환상을 발견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제게 메아리-환상의 개념은 집단 정체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데 있어 유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역사’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적으로 만드는 역사적 차이 너머 여성들 사이 그들의 공통분모가 있으리라는 발상이었습니다. 이 공통분모의 존재는 공통분모에 대한 호소에 앞서는 것이 아닙니다. 공통분모의 출현은 이러한 메아리-환상들, 상상된 유사성의 반복이기도 한 이러한 상상적 반복들에 의해 보장됩니다. 역사의 여러 순간에서 페미니스트 투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회고록을 읽을 때, 저는 그들이 자기 자신, 자신의 꿈,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는지 주의를 기울여 읽습니다. 그리고 저는 되풀이되는 현상들을 발견합니다. 예컨대, 여성 연설가의 경우가 있습니다. 잔 드루앙(Jeanne Deroin)은 자신을 다른 모든 여성들과 다른 존재로 표현하며, 스스로를 남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이 사실이 발각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남성이 아니며 우주의 화신도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군중 앞에서 발가벗고 있는 꿈을 꿉니다. 다시 말해, 저는 환상의 요소가 작동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을 관찰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역사적 지반은 바로 프랑스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임금 평등, 베일, DSK 사건, 국가 정체성 등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여러 논쟁에 개입한 바 있습니다... 당신을 여기로 이끈 것은 무엇인가요?

그건 다소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중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대학에 들어가 19세기 프랑스 혁명 운동에 대한 연구로 제 연구의 첫 걸음을 내딛으며 그때 배웠던 것을 유용하게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물론 고등학교에서 미국사를 가르치던 제 부모님과는 다른 길을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건 1960년대에 제가 공부했던 위스콘신 대학교의 미국사학과 학과장 때문이었습니다. 그 과는 완전히 남성적이었고, 그 분위기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학과장은 남학생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 있다는 구실로 여학생들을 자신의 세미나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루소를 읽을 때나 볼 수 있던 말이었죠! 제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제 연구 분야를 정해줬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서 프랑스 역사가가 된 것입니다! 저는 카르모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롤랑드 트랑페(Rolande Trempé)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광부에 관한 훌륭한 학위논문을 쓴 전적이 있었고, 그것이 그녀의 전문 분야였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제게 유리공들에 관해 쓰라고 했던 거죠!

그러나 저는 이러한 우연의 연속을 이내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꽤나 텃세를 부리는 나라였고 특히나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적 역사는 저와 같은 젊은 좌파 미국인을 고무했습니다. 제가 이전까지 훈련해보지 못했던 철학적 도구와 방법론을 사용하여 역사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방식 또한 존재했습니다. 그 후 제가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를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접했던 비판적 사고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죠.

 


프랑스가 당신에게 정체성과 차이의 패러독스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훌륭한 훈련장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때 이미 염두에 두고 계셨던 건가요?

그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이 질문들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할 무렵, 이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 되리라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린 건 사실입니다! 이 나라에서 공화주의의 역사는 추상적 개인의 보편성에 의해 극도로 확언된 개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차이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늘 힘든 일이죠. 그와 동시에 이 나라는 성차에 대해서도 똑같이 경직된 몇몇 개념들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를 집필할 때 관찰했던 내용입니다. 여성들은 성적인 차이라는 명목으로 시민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오랫동안 박탈당해 왔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여성들이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 딜레마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여주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여성적인 것, 즉 비(非)남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다양한 개념들에 대해 매번 협상해나가며 더 이상 여성으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여성으로서 참여했던 투쟁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젠더 문제를 다루자면 이 나라는 무궁무진한 곳입니다! 임금 평등, DSK 사건, 베일 논쟁! 연구할만한 새로운 사례들이 늘 생겨나죠!

 

 
베일 논쟁에 관한 당신의 책은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분석한 것입니다만, 임금 평등을 다뤘던 책 등등과는 달리 프랑스에서 출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제게 이 책이 팔리지 않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특히나 외국 사람이 쓴 책이라면 더욱 그럴 거라고요... 이 책의 처음 두 장에서 미국 대중을 위해 프랑스인들이라면 매우 잘 알고 있을만한 역사에 대해 요약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은 확실히 너무도 비판적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저는 이슬람과 ‘프랑스 정체성’의 특정 상상계에서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표상되는지 그 차이점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무슬림에게는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들에게는 공공장소에서 남녀 간의 분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특히나 중요합니다. 한편 프랑스 상상계는 유혹을, 즉 성차에 대한 협상을 국가적 성격으로 만듭니다. 반면 이와 동시에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과 그 기반이 되는 권력 관계는 등한시되는데, 왜냐하면 프랑스는 젠더 평등이 보장되는 장소임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DSK 사건 때에도 어땠는지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곳엔 일종의 ‘국가 정체성’의 특성으로서,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문제라는 사실에 대한 부정이 존재합니다. 베일을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들은 매우 다양한 이유로 성차와 섹슈얼리티가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 인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공화주의나 페미니즘의 몇몇 담론에서 인종차별주의나 권력 관계에 대한 무지를 발견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폭력적인 반응을 받았다면 이는 어디로부터 나온 것일까요?

저는 단 한 번도 ‘프랑스’를 비판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보편적, 공화주의적 사상에 따라 인종차별주의와 차별적 행위를 정당화했던 프랑스인들을 비판했을 따름입니다. 저는 극우 정당이 이러한 페미니즘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태가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든 ‘미국인 다문화주의자’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종차별주의와 차별을 몰아내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미국에서도 이와 같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나요?

물론 여성들이 베일을 착용하도록 강요하는 무슬림 마초 남성들에 대해 복합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담론을 펼치는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반(反)이슬람 담론은 샤리아법이 미국에 도입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반면 젠더 평등은 주장하지 않는 우파와 종교적, 복음주의적, 혹은 유대교 극우파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한편, 저는 프랑스의 경우와는 달리 페미니즘으로 가장한 인종차별주의가 미국의 국가 담론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의 식민지 과거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국으로 이민하는 무슬림은 프랑스로 이민하는 것보다 안정적인 상황을 보장받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존재는 덜 위협적으로 경험됩니다.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흑인입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혼잡한 생활상, 문화적 불일치 등의 문제에 대해 불평하거나 그들이 공공 사회복지 혜택을 누리는 것에 대해 비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성 불평등에 대해 뭐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흑인 목사들의 호모포비아가 밝혀졌을 때 그들의 피부색보다는 종교가 비난받은 바 있습니다. 요컨대 ‘인종차별주의’라는 단어는 여기저기의 다양한 현실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성 평등은 미국 인종차별주의 담론의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올해 프랑스의 페미니스트들은 페멘[각주:1]의 과격한 행동주의에 대해 태도를 표명해달라는 요구를 받은 바 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국가에서의 구체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활동을 개시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모델을 수출하고 이를 통해 국제적인 페미니스트가 탄생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페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그렇기에 의견을 표명하기도 어렵습니다. 행동주의적인 페미니스트 활동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요. 제가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어떠한 단체들이 똑같은 이름 하에서 똑같은 유형의 행동을 하더라도 이는 여러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영향과 효과로 해석될 것이라는 사실 말이죠. 이게 바로 제가 『페미니스트 역사의 환상(The Fantasy of Feminist History)』에서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전쟁 중 발견됐던 이스라엘에서 탄생한 분산적 운동, ‘우먼 인 블랙(Women in Black)’[각주:2]에 대해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우먼 인 블랙 활동가들은 중앙기관을 만들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했는데, 이는 그들이 단 하나의 의미만을 갖길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프랑스에서의 라 바르브(La Barbe)[각주:3]의 활동을 매우 좋아합니다. 활동의 효과와 이유의 관점에서, 그들의 활동은 멕시코의 라 무스타슈(La Moustache) 운동과 유사하긴 하지만 매우 다른 것입니다. 푸시 라이엇(Pussy Riot)[각주:4]은 러시아에서 특수한 단체입니다. 만일 푸시 라이엇이 다른 곳에서 등장한다면 그들은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페미니스트 운동엔 역사적 연속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리적 혹은 국가적 연속성 또한 없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불충분한 해석, 혹은 메아리-환상의 측면에서 고려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역사가로서의 당신의 비판적 연구에 대해 불충분할 수는 있으나 유익하게 정치적 혹은 실천적 해석을 한 사례가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스코티즘’의 책임을 전가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웃음). 하지만 분석이나 이론이라는 한편과 실천적 행위라는 또 다른 한편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각각은 서로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지만 이들이 서로 겹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제기하는 비판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저는 기껏해야 틈을 만들어내고, 대화의 물꼬를 틔우고, 가능성을 열 수 있을 뿐입니다. 직접적인 정치적 차원에서 이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데리다는 민주주의가 노선도가 아니라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발언이 제가 필요하다 생각할 때, 예컨대 오늘날 합법적인 선을 넘어 우려가 될 지경인 우파와 극우파에 대항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을 막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연구에 있어 늘 제가 가진 정치적 신념을 복합화하기 위해 제가 노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것이 역사 속에서 유동적이고 복수적인 범주임을 보여줌으로써 저는 여성의 목적론적인 역사, 자의식의 능력 상승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라는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에 저항했습니다. 제게 늘 원동력을 불어넣었던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내게 중요하고, 내가 인정하는 목표를 가진 그룹의 여러 사항을 받아들이길 비판적으로 거부하는 것. 이게 제가 가진 패러독스입니다! 비판의 정신-역학과도 같은 것이죠!

 

사진: 세바스티앙 돌리동

 

  1. 페멘(영어: FEMEN, 우크라이나어: ФЕМЕН)은 2008년 우크라이나에서 탄생한 급진적 페미니스트 단체. 상의 탈의 시위로 유명하다. 2013년 2월 12일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퇴위와 프랑스 하원의 동성결혼 허용 법안 가결을 기념하기 위한 시위를 벌였다. (역자) [본문으로]
  2. 1988년 1월 이스라엘에서 탄생한 국제 여성 네트워크로, 중앙 기관 혹은 공식 회원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반전(反戰), 반(反)폭력, 반(反)군사주의를 위한 침묵시위를 조직한다. (역자) [본문으로]
  3. 2008년 탄생한 프랑스 페미니스트 단체. 남성 중심적 행사에서 가짜 수염을 달고 급습하는 형태로 의견을 표출하며, 이는 현대 문화에서 여성이 충분히 포함되지 않는 상황을 비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역자) [본문으로]
  4. 2011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페미니즘, 반정부 성향의 펑크 록 그룹. 러시아의 정치 상황을 고발하는 내용의 즉석 공연을 펼친다. [본문으로]
댓글 로드 중…

최근에 게시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