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스터디>(캐서린 R. 스팀슨, 길버트 허트 엮음) 읽기 세미나에 참여하신 백소하님께서 요한나 옥살라의 2018년 논문 「페미니즘,자본주의,생태」를 번역해 주셨습니다. <젠더 스터디>의 13장 "자연"을 읽으면서 페미니즘 담론에서 자연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게 되었는데, 옥살라의 논문을 통해 마르크스주의-페미니즘-생태의 연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옥살라는 작년에 같은 제목의 저서(Feminism, Capitalism, and Ecology.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23)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미처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그 작업의 시작점이 되는 논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Oksala, Johanna. "Feminism, Capitalism, and Ecology." Hypatia 33, no. 2 (2018): 216-34.
- 편집부
이 글은 페미니즘,자본주의,생태를 이론적으로 연결하는 서로 다른 방법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나는 사회주의 생태페미니즘이라는 기존의 전통을 내 출발점으로삼으며,이 분야의 문헌에서 자본주의,여성의 종속,환경 파괴 사이를 연결한 서로다른 두 가지 방식,즉 유물론 생태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생태페미니즘을 개괄할것이다.나는 여성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이론화한 이전의 일부 형태들에 비해 이 입장들에서 나타나는 정치적·이론적 진전을 설명하나,동시에 철학적 비평 아래 놓을것이다.나는 마르크스주의 생태페미니스트 입장이 자연을 자본화하기 위한 기제들을설명하기 위해 어떻게 갱신되고 수정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자연을 자본화하는 서로 다른 기제들은 이따금 모순적이기도 하며,오늘날에는 돋보이는 것들이다.나는 특히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생명 공학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발전을 강조할 것이다.나는 페미니즘 투쟁과 생태 투쟁이 자본주의에 맞서 현대적 정치 동맹을 건설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들을 종합하며 글을 맺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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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페미니즘이라는 말은 1970년대, 떠오르는 대규모 환경 운동이 페미니즘과 같은 다양한 사회 정의 운동과 교차하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생태페미니즘은 1980년대에 걸쳐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발판으로 발전하였고, 여성과 자연의 교차하는 억압에 관한 획기적인 분석들을 만들어냈다.[각주:1]그러나 생태페미니즘은 1990년대에 본질주의, 자문화 중심주의, 반지성주의라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생태적 관점에 관한 페미니즘 이론의 인간 중심주의적 비평을 보충하고 교정하여 페미니즘 이론의 필수적인 측면으로 자리매김하는 대신, “생태페미니스트”는 조롱의 꼬리표가 되었다. 미국의 생태페미니스트 그레타 가드가 도발적으로 쓰듯이, 생태페미니스트들은 “지구를 여성으로 잘못 묘사하고 세계적 비거니즘을 위한 총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지령을 내리는 반지성주의적 여신 숭배자들”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Gaard 2011, 32).
하지만 생태페미니즘의 근본적 재평가는 오늘날 정치적, 이론적 이유 모두에서 중요해 보인다. 첫째로, 우리 시대에 적합한 페미니스트 비평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중대한 생태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한다. 환경 위기, 특히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는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정치적 위기 가운데 가장 크다 할 수 있는 것을 제기하며, 따라서 어떤 정치 운동도 그 중요성을 부정할 여력이 없다. 페미니즘이 생태를 중요하게 다루고 환경 보호주의와 맺는 관계를 철저히 사유하지 않으면, 21세기에 우리의 미래를 유의미하게 빚을 수 있는 적절한 정치적 동력을 인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내 계산이다.
둘째로, 학계에 이론적 전환이 있었다. 환경 문제는 이제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만 고려되지 않는다. 인문학 및 사회학 연구자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환경 문제가 심오한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환경 문제에도 중요한 젠더적 차원이 있고, 젠더 평등에 따른 구체적인 정치적 결과도 존재한다. 이는 기후 정의, 식량 안보, 에너지 정의같이 다양한 문제들에도 해당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생태적인 분석과 페미니스트 분석 모두를 필요로 한다. 고로 페미니스트 이론이 오늘날 인문학 및 사회과학에서 환경 문제에 관해 발전하고 있는 논의에서 강한 목소리를 형성하는 것은 중요하다.
셋째로, 오늘날 페미니즘과 환경 보호주의를 결합하려는 유망한 경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현대 페미니스트 비평을 통해 부상하고 있다. 오늘날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여성 종속의 현대적 형태를 이해하는 비판적인 틀을 자본주의가 구성해야 한다는 통찰로 점차 귀환하고 있다. 낸시 프레이저가 적듯이, 자본주의라는 말이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저술 밖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다양한 부류의 비평가들은 이제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에 관해 공개적으로 우려하고, 전 세계의 활동가들은 자본주의의 실행에 대항하여 집결한다(Fraser 2014, 1). 이를 지적이거나 정치적인 전환으로만 이해하는 대신, 프레이저는 이를 “우리를 둘러싼 (재정적, 경제적, 생태적, 정치적, 사회적인) 이질적인 사회적 병폐들로부터 공통의 구조적 기초를 추적할 수 있고, 이를 다루는 데 실패하는 개혁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증상”(1)이라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및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학문의 이러한 부활이 페미니즘, 자본주의, 생태 사이의 이론적 연결을 재검토할 흥미로운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내 글의 목표는 그러한 프로젝트를 위한 철학적 바탕을 놓는 것이다. 이 논증은 네 단계로진행된다. 나는 내 출발점으로 이미 존재하는 사회주의 생태페미니즘의 전통을 취할 것이며, 이 분야에서 자본주의, 여성의 종속, 환경 파괴를 연결한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을 개괄할것이다. 나는 경험적 기초에 있는 유물론 생태페미니즘과 자본주의, 젠더 억압, 환경 파괴 사이의 연결에 관한 구조적 논거를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생태페미니즘을 구별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이론적 입장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논의의 단순화일 수밖에 없으며, 여기서 이 개괄의 목적은 반자본주의 생태페미니즘을 옹호할 서로 다른 철학적 기초를 비판적으로 철저한 검토에 노출시키는 데 있을 뿐이다. 세 번째 부분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 생태페미니스트 입장이 자연을 자본화하기 위한 기제들을 설명하기 위해 갱신되고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자연을 자본화하는 이 서로 다른 기제들은 이따금 모순적이기도 하며, 오늘날에는 돋보이는 것들이다. 나는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생명공학의 발전이라는 두 가지 발전을 특히 강조할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 투쟁과 생태적 투쟁이 자본주의에 맞서 현대적 정치 동맹을 건설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들을 요약하며 글을 맺을 것이다.
유물론 생태페미니즘
생태페미니즘에 대한 비평은 주로 그것이 존재론적이고 방법론적인 본질주의라는 데 향했다. 1990년대에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유 양식이 지배하자, 여성 범주의 단일성은 이미 고도의 비판 아래 놓였다. 생태페미니즘은 여성 범주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여성과 자연의 등치를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도 했다. 여성과 자연 사이의 연결이 생물학적으로 이해되었든 아니면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되었든, 이는 전통적으로 여성억압의 중심적 도구로 작동하였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어째선지 남성보다 자연에 가깝고, 따라서 예컨대 덜 이성적이고, 교양이 덜하고,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숙의의 가능성이 덜하다는 발상에 힘겹게 맞서 싸웠다. 생태페미니즘은 여성과 자연 사이의 불가피한 연결을 강조하여 이러한 주장을 뒤집고, 이로써 가부장적 지배의 형태들을 강화하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외의 문제는 당대 생태페미니스트 이론화의 다수에 내재한 방법론적 본질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당대의 생태페미니스트 이론화는 자신의 주장과 이론이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특히 서양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맥락들이 대개는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방식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이 제3세계 여성에게 존재한다고 하는 자연에 대한 “착근성(着近性)”과 이들이 자연에 관해 갖고 있다고 하는 더욱 전체론적인 이해에 관한 관념론적이고 무비판적인 이해를 조장한다는 것이 흔히 제기되는 혐의였다.[각주:2]이러한 이유로 생태페미니즘은 기껏해야 사회적 불평등을 다루는 페미니즘의 참된 작업들로부터의 중요하지 않은 일탈이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억압의 한 형태였다.
유물론 생태페미니스트들은 더 제한적이고 경험적인 주장을 던져, 이러한 위험을 뒤집을 수 있었다. 이들은 여성과 자연 사이의 영적, 추상적, 총계적 연결을 모두 부정함으로써 본질주의라는 혐의를 피했고, 대신 구체적인 지리 · 문화적 맥락의 여성들이 처한 사실적인 물적 조건들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강조점에 기초하여, 남반구 저개발국의 많은 지역의 여성들이 “자연과 더욱 가까운” 것은 이들이 대개 물을 길고 나무를 해와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소규모 자급 농업을 도맡는다는 매우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의미에서만 그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환경 파괴에 가장 먼저 희생을 당하는 것이 대개 남반구 저개발국의 여성들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그레타 가드와 로리 그루언은 유물론 생태페미니즘을 변호하고자, 환경 악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배타적으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은 여성과 아이들이 환경 악화의 결과에 고통을 받기 때문에 이것이 페미니즘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세계적으로 여성이 식량 공급의 80%가량을 생산하며, 이 이유로 인해 식량 및 연료 부족과 수자원 오염으로 가장 심한 영향을 받는 것은 여성이다.”(Gaard and Gruen 2005, 163) 따라서, 이들에 따르면 혹독한 물적 조건 아래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환경 운동은 자기방어의 한 형태일 뿐이기에, 자연을 보호하려는 여성의 경향에 관한 비유적이거나 본질주의적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필요하다(예컨대 Mellor 1992, 7 참고). 기후 변화의 결과에 관한 UN 인구 기금(UNFPA)의 연구에서도 유사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여성, 특히 빈곤국의 여성은 남성과는 다르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여성이 많은 국가에서 농업 노동 인구의 더 큰 몫을 구성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수입이 더 적은 기회에 여성이 접근하는 경우가 많기에, 여성은 기후 변화에 가장 취약한 이들에 속한다. (…) 가뭄과 불규칙적 강우는 여성이 자기 가정에 식품, 물,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도록 강제한다.”(UNFPA 2009) 다시 말해, 유물론 생태페미니즘은 특정한 여성 집단이 환경과의 일상적 상호작용을 통해 환경과 특유한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을 승인하는 데 기초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구체적인 사례들에서, 최소한 페미니즘과 환경 보호주의가 힘을 합칠 명확한 전략적 유인은 존재한다. 환경을 지키는 것이 빈곤층 여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발전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적이고 경험적으로 정초한 주장이 정치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중요할 수 있기는 하나, 이는 생태페미니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기에는 불충분하다. 젠더 억압과 환경 파괴의 체계적이거나 구조적인 연관성을 밝히는 대신, 이들은 그저 현재 얽혀있다는 점을 기술할 뿐이다. 환경 문제는 이미 존재하는 사회 문제를 악화시키곤 하는데, 이는 가장 힘없고 취약한 집단이 환경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자원을 가장 덜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관성에 관한 더욱 체계적인 설명이 주어져도, 설명은 대개 실망스러울 정도로 모호한 말로 정식화되며, 여성과 자연에 대한 한 쌍의 지배라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여성과 자연 사이의 역사적이고 개념적인 연관은 가부장적 지배의 중요한 정당화를 형성하기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고려된다. 자연의 여성화와 여성의 자연화는 뒤따르는 여성과 자연의 종속의 이데올로기적 필요 조건으로 기능하는, 단일한 역사적 과정의 두 측면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그윈 커크는 “자본 축적에 복무하여, 백인 지배적인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는 (…) ‘타자성’을 창조”하며, 타자성이 여성과 자연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유색인 및 빈민”도 억압하며, “대상화의 이러한 지속적 과정이 계급, 인종, 젠더, 민족에 기초한 억압 체계들의 기저에 있는 중심적 기제”라고 주장한다(Kirk 1997, 349). 메리 멜러는 “산업주의, 자본주의,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 가부장제는 여성, 빈민, 지구의 숨통을 틀어쥔 다두(多頭) 히드라의 서로 다른 발현”이라고 상세히 논한다(Mellor 1992, 155). 가드와 그루언은 “현재의 세계적 환경 위기는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계급 차별주의, 제국주의, 종 차별주의, 자연주의라는 서로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들의 결과”라고 비슷하게 적고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들은 “복잡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강화하는 억압 체계들을 서로 교차하는 역장”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Gaard and Gruen 2005, 170).
억압의 이데올로기들을 나열하고 이들이 서로 교차하거나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이 이데올로기들이 분명 일종의 사회적 총체성 속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점에서는 유효하다. 이렇듯 전체를 아우르는 설명은 페미니스트들이 지배의 서로 다른 축들이 교차하는 경험이나 사례를 기술할 때 도움을 줄 수도 있으나, 상이한 축들이 특정한 형태로 함께 나타나는 방식과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각주:3]만약 생태페미니즘이 억압과 불평등의 모든 형태를 아우르는 듯 보인다면, 이는 명확한 이론적 초점과 정치적 목표를 잃을 위험까지 짊어지게 된다. 유물론생태페미니즘은 기껏해야 “친연성의 정치”의 한 사례, “행성의 생존과 평등주의적 미래”라는 한 쌍의 목표 뒤에 있는 서로 다른 수많은 이론적 · 정치적 입장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유연한 형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Carlassare 2000, 101).
따라서 나는 우리가 젠더 억압과 환경 파괴를 묶어주는 자본주의라는 체계적 논리에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기제들을 밝혀낼 수 있다는 통찰이야말로, 생태페미니즘 프로젝트에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이 한 주된 공헌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 생태페미니즘은 젠더 억압과 환경 파괴 사이의 연결이 역사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특수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젠더 본질주의를 거부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어째서 이 연결이 구조적이기는 하나 그저 역사적으로 불확정적이거나 우발적일 뿐인 것은 아닌지에 관해 힘 있는 논거를 제공할 수 있다. 자연의 여성화와 여성의 자연화는 지배의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논리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로만 기능하지 않으며, 젠더화된 사회 · 경제적 실천과 노동 분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구체적으로 구조화한다. 여성 재생산[각주:4]노동의 자연화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수행하는 대체 불가능한 기능을 우리가 인지하게 되면, 젠더 억압과 환경 파괴 사이의 연결이 갖는 체계적 성격은 확연히 나타난다.
마르크스주의 생태페미니즘
여성의 재생산 및 돌봄 노동에 관해 저술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의 대다수는 이를 노동의 한 형태로 이론화하였고, 착취 기제들을 폭로하기 위한 마르크스주의적 틀을 전유하였다. 예컨대 가사 노동 논쟁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가사 · 재생산 노동이 생산적 노동이고 잉여가치를 생산하는지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예컨대 Benston 1997; Federici 2012; Vogel 2013). 그러나 이 분야의 특징적인 흐름은 이 대신 본원적 축적이라는 개념에 집중하였다. 본원적 축적 개념은 인간 노동의 생산성에 관련되지 않고, 대신 그 필수적 전제 조건들에 집중하기에, 생태페미니스트 이론화에 더욱 쉽게 사용되었다. 본원적 축적 개념은특정한 활동 및 자원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에 포함하였다. 이 활동 및 자원들은 중요한 사용가치를 생산하나 교환가치를 생산하지 않았고, 따라서 상품시장으로부터 구조적으로배제되었다.
본원적 축적은 자본주의적 축적이 노동력 착취와 잉여가치 전유라는 기제들만 가지고 작동한 적이 없다는 통찰을 가리킨다. 자본주의적 축적은 언제나 명백한 약탈과 절도에 크게 의존하였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권에서 자신의 견해를 유명하게 정식화하였듯, 자본은 “머리에서 발가락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Marx 1976, 435; 맑스 2020, 1261). 본원적 축적은 본질적으로 잔혹한 수탈 과정으로, 여기서 수탈은 자원을 추출하고, 이를 무상으로, 혹은 적절한 배상 없이 전유하는 것이다. 공유지의 인클로저, 강제 이주, 노예 매매가 이 사례로 될 것이다. 자연의 지배와 천연자원의 추출 역시 본원적 축적의 한 가지 사례로 볼 수 있다. 자연적으로 생산된 사용가치가 원료로서의 생산적 소비를 위해 수탈되고, 가치증식과정이라는 자본주의적 순환 속에서 상품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식민주의는 역사적으로 이러한 수탈의 효율적인 정치 전략으로 기능하여, 북반구를 부유하게 하고자 금, 상아, 고무 등의 자원이 남반구에서 추출되었다.
본원적 축적이 완전한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의 확립을 선행하는 역사적 과정인지, 아니면 지속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지는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마르크스는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경제가 부상하게 된, 자본주의의 주변부로부터 중심으로 부가 이동한 역사적 과정으로 본원적 축적을 설명하나, 많은 현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그 지속적 성격, 그 필수적이고 구조적인 자본주의와의 연결을 강조한다.[각주:5]이 “지속적인 본원적 축적”이라는 개념은 마리아 미즈 같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에게 중심적이다. 미즈는 자신의 주저에서 자연과 여성의 재생산 노동이 자본주의하에서 모두 “자유재”로서 수탈된다고 주장하였다(Mies 1986/1998; 미즈 2014). 미즈는 자본주의, 식민화, 산업화를 통한 자연의 종속, 그리고 동시에 벌어졌으며 유럽의 마녀 사냥으로 특징이 지어지는 여성의 신체적 자결권의 파괴 사이에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연결을 주조한다. 즉, 식민지, 자연, 여성은 백인 자본가 남성에 의해 구조적으로 유사한 방식으로, 그리고 자본주의적 축적이라는 목적에 의해 추동되는 동일한 역사적 과정의 일부로서 지배당하고, 통제당하며, 잔인하게 수탈당한다.[각주:6]
여성을 남성과 자본축적과정 아래 폭력적으로 종속시키는 일이 대대적으로 수행된 것은 유럽의 마녀 사냥이 그 시작이었다. 이 일을 기반으로 해서 이른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수립되었다. 말하자면 노동력을 소유한 이들과 생산수단을 소유한 이들 사이의 계약 관계가 수립된 것이다. 큰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은, 강제적으로 종속된 여성이나 식민지 노동력의 이런 기반이 없었다면, 자유 프롤레타리아의 강제적이지 않은 계약 노동관계의 수립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과 식민지인은 재산과 자연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은 자유로운 주체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의 세계로 진입하지 못했다. 둘 다 무력과 직접적인 폭력을 통해 종속되었다. (Mies 1986/1998, 170; 미즈 2014, 362)
미즈는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 착취가 폭력적인 수탈 과정에 의존하는 방식을 표현하기 위해 빙산의 비유를 사용한다. 자본주의는 자본과 임금 노동이 GDP로 계산되는 가시적 경제를 형성하고, 여성의 재생산 노동, 식민지 노동, 자연의 생산이 공적 경제로부터 외부로 축출되어거대한 수면 아래의 부분을 형성하는, 하나의 빙산 경제이다(xi). 외부로의 축출이라는 필수적인 과정은 여성과 식민지의 “자연화”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된다. 이들은 통제 불능의 위험하고 야만스러운 자연이며, 힘으로 진압되어야만 한다(90; 206). “지난 4~5세기 동안 여성, 자연, 식민지는 외부로 축출되었다. 문명사회 외부에 있는 것이라고 규정되고 밀쳐졌다. 그래서 빙하의 수면 아래 부분처럼 보이지 않게 되면서 또 동시에 전체의 토대를 구성하는 존재가 되었다.”(77; 180) 이러한 외부로의 축출 과정의 이유는 간단했다. 외부로의 축출 과정은 자본가들이 내야 할 수도 있던 비용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여성과 식민지 신민의 노동이 천연자원으로 간주되자, 이는 공기나 물처럼 공짜로 쓸 수 있게 되었다(110; 245). 미즈에 따르면, 초기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수탈과 동일한 과정은 자본주의의 구조적이고 필수적인 측면이기에 지속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의 팽배, 특히 남반구 저개발국에서의 팽배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전제 조건을 이루는 지속적인 본원적 축적의 논리에 대한 비판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미즈의 사례들은 노예제나 성매매 같은 명백한 사례들부터 우편주문 신부, 열악한 저임금 노동, 성 관광 같은 더욱 복잡한 현상들까지를 포괄한다.
낸시 프레이저는 최근에 유사한 주장을 제기하였다. 프레이저 역시 자본주의적 착취의 필수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과정을 강조하며, 이 과정이 자본이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구매하는 계약적 관계를 통해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수탈은 능력과 자원을 몰수하고 자본의 가치 순환으로 징집함으로써 작동한다. “몰수는 대서양 노예 무역처럼 노골적이고 폭력적일 수도 있고, 현대의 고리대나 압류처럼 상업이라는 가장을 두르고 있을 수도 있다. (…) 몰수된 자산은 노동, 토지, 동물, 도구, 광물, 보관해둔 에너지일 수 있으나, 인간, 인간의 성 및 재생산 능력, 아이나 장기일 수도 있다.”(Fraser 2016, 166) 즉, 어떤 주체들은 노동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지녀 자신의 노동을 팔 권리가 있고 시장 내에서 경쟁할 능력이 있더라도, 다른 이들은 자신의 몸, 땅, 심지어 생명까지도 수탈당하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종화는 젠더와 교차하여 이 두 집단 사이의 경계를 긋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기능하였고, 계속해서 기능하고 있다.[각주:7]
이 단락을 요약하자면, 자본주의가 임금 노동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의 전유에 더해, 여성, 토착민, 비인간 동물, 생물권의 지속적이고 잔인한 수탈에 의존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주장이다. 여성 재생산 노동의 수탈은 고로 천연자원의 추출과 구조적으로 유사하고 역사적으로 동시적이다. 역사상 다양한 시대에, 그리고 오늘날 여러 정도로, 여성은 자신의 신체와 재생산 능력에 대한 자주적 권리를 포기하도록 잔인하게 강요당하고 있으며, 이러한 능력들과 이에 관련된 노동은 여성들로부터 공짜로 추출되어 자본 축적에 유리하게 배치된다. 이 과정은 여성을 “자연화”하는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과정, 여성을 덜 문명화되고, 덜 이성적이며, 자연에 더욱 가까운 이들로 이해하는 과정에 의해 은폐되고 정당화된다.
그러나 여성 억압을 환경 파괴와 연결하는 이론적이거나 체계적인 바탕은 일차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것이다. “여성”과 “자연”은 수탈 기제에서 유사하고 대체불가능한 기능을 지닌다. “여성”과 “자연”은 착취 기체가 수탈이라는 비가시적 토대에 의존하는 자본 축적 논리에서 비슷한 위치를 점한다. 다시 말해, 여성과 식민지는 “자연”으로 상상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서 착취되기까지 한다.
생태페미니즘의 자문화 중심주의 및 여성과 자연의 연결을 본질화하는 경향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평으로는 Agarwal 1992; Braidotti et al. 1994; Nanda 1997; Agarwal 2001 참조. [본문으로]
교차성 이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비평은 특히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예컨대 새라 패리스는 교차성 이론이 인종 억압 및 젠더화된 억압을 이차적인 억압 형태로 다루기를 거부하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지만, 약속된 종합적 이론을 제공하는 데는 미진하다고 주장한다(Farris 2015). 교차성 이론의 주저로는 Crenshaw 1989; Collins 1990 참조. [본문으로]
(역자주) 이 글에서 “재생산”(reproduction)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에서 쓰인다. 글 전체적으로는 생식이라는 생물학적 기능과 돌봄이라는 역할 두 가지를 아우르는 식으로 쓰이나, 소제목 “자연의 실질적 포섭”을 위시한 여러 부분에서는 생식 기능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만 쓰인다. 이 점을 유의하고 읽기를 바란다. [본문으로]
예컨대 데이비드 하비는 본원적 축적을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고 다시 명명한다(Harvey 2003). [본문으로]
아리엘 살레의 저술은 마르크스주의 생태페미니즘의 기초를 놓는 데 중심적이다. 『정치로서의 생태페미니즘』에서, 살레는 초국적 자본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적, 사회주의적, 생태적, 토착적 투쟁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정치적 목표를 논한다(Salleh 1997). [본문으로]
마이클 도슨은 노예제, 식민주의, 아메리카 땅의 도둑질, 인종학살에 필요한, (인종으로 부호화된)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의 존재론적 구분에 대한 이해가 자본주의의 기초를 이해하는 데 요구된다고 주장한다(Dawson 2016, 14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