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 사이디야 하트만은 아프리칸-아메리칸 문학 및 아메리칸 문학, 문화사, 노예무역사 및 노예제, 흑인됨(blackness) 등을 연구하는 미국의 연구자이자 작가이다. 하트만은 2008년 공개 이후 2,000회 가량 인용된 이 글에서 '비판적 우화화'라는 글쓰기 방법론을 개념화한다. 이 글에서 단 한 번 언급되는 그 개념은, 폭력과 과잉으로 점철된, 이미 언제나 권력의 배치-작동을 반영하는 (노예제) 아카이브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 나아가 그로부터 무엇을 말해낼 (수 있고, 무엇을 말해낼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한 하트만의 고민으로 다듬어진다. 폭력, 스캔들, 무절제가 범람하는 아카이브의 언설들을 단순 재생산하는 것으로는 상실된 삶을 되찾을 수 없다면, 그런데 동시에 아카이브를 경유하지 않고는 사라진 삶에 대해 쓸 수 없다면, 아카이브에서 침묵하는 자들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 요컨대, 아카이브에 온전히 따를 수도, 반할 수도 없다는 딜레마로서의 불가능성은 어떻게 전유되어야 하는가? 재앙적 폭력에 노출돼 아카이브에 별다른 목소리를 남길 수 없었던 존재를 서사로서 구조하는 일, 그리고 그 구조나 재현의 한계를 보이는 일에 관해 하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회복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역사이다. 이는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있었을 수도 있는 일에 관한 서사이다. 이는 아카이브와 함께, 아카이브에 반해 쓰인 역사이다."
*초록 이 글은, 대서양 노예제 아카이브의 어느 곳에나 있는 비너스의 존재를 탐구하고, 그녀에 관한 것 중 이미 말해지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의 불가능성과 씨름한다. 대서양 세계 내 노예된 여성의 상징적 인물로서 비너스는, 리비도적 노예제 경제에서의 공포와 쾌락 간의 수렴을, 또한, 문학적 스캔들 및 과잉과 역사 간의 친밀성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말할 수 없는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의 한계에서 쓰인 이 글은, 아카이브의 폭력을 흉내냄과 동시에 그것을 바로잡길 시도한다. 비너스의 모습을 결정하고 그녀에게 침묵을 지시하는 조건들을 가능한 완전히 기술(記述)함으로써 말이다.
이 현현(顯現, incarnation)에서 그녀는, 흑인 소녀 둘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 받았던 한 노예선 선장에 대한 기소장에 언급된 죽은 소녀로서 노예제 아카이브에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한 선박의 차변계정 원장(元帳)[1]이나 “어젯밤 나는 디도와 땅바닥에 누웠다.”라고 쓴 한 노예 감시인의 일지에서 그녀를, “신사가 선물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담을 정도로” 유연한 지갑을 가진 해리스의 코벤트 가든 숙녀 목록(Harris’s List of Covent-Garden Ladies)[2]에서의 요염한 불륜녀처럼, 또는 한 수리남 용병 서사에서의 연인처럼, 또는 한 여행자의 바베이도스 매춘부 장부에서의 포주처럼, 또는 19세기 음란 소설의 조연처럼, 쉽게 마주칠 수도 있었다.[3] 해리엇, 피바, 사라, 조안나, 레이첼, 린다, 샐리로 다양하게 불린 그녀는 대서양 세계 전역에서 발견된다. 노예 수용소, 노예선의 공동(空洞), 흑사병 환자 격리 병원, 유곽, 우리, 외과의 실험실, 감옥, 사탕수수밭, 주방, 주인의 침실 – 정확히 똑같은 장소로 밝혀진 이 모든 곳에서 그녀는 비너스라 불린다.
이 밖에 또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그녀의 운명은 다른 모든 검은 비너스의 운명과 똑같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그녀가 한 말을 기록하거나,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 거부했던 것을 관찰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4] 그녀의 운명은 실패한 목격자에 의해 전해졌던, 시기를 놓친 이야기이다. 이는 그녀가 “그녀의 혀를 애써 움직이길”[5] 허락받은 때로부터 수세기 전의 일일 것이다.
한 저명한 철학자에 따라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수많은 외양을 띤 비너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녀와 권력의 마주침의 기록에 불과”한 정도라고, 그리고 그것은 “그녀 존재의 흐릿한 스케치”[6]만을 제공한다고. 재앙이나 우연의 행위(act)는, 예상되는 평범한 경로로부터의 비가시적인 것의 분기나 이탈을 생산했고, 그녀를 담론의 지하에서 표층으로 내던졌다. 일상의 어떤 모습도, 그녀의 생각으로의 어떤 길도, 그녀의 얼굴의 취약함이나 그러한 얼굴을 보는 데 요구될지 모를 무언가에 대한 어떤 일별(一瞥)도 내주지 않는 터무니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녀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예의 원장에 관한 분석에서 추론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그녀의 노획자나 주인의 세계에서 빌려와 그녀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뿐이다. 그 터무니없음조차도, 노예된 자의 삶 쪽으로 난 창을 그녀의 삶이 전반적으로 제공하게끔 하기 위해, 전형적으로, 또는 모범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비너스가 누구인가?”라고 물을 수는 없다. 그 같은 질문에 답하기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황을 공유하는 다른 수백, 수천의 소녀가 있고, 그러한 상황은 몇몇 이야기를 낳아왔다. 현존하는 그 이야기들은 그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차라리 그들의 삶을 붙들던, 그들을 물건과 시체로 바꿔놓던, 모욕과 무신경한 농담으로 대충 지어진 이름으로 그들을 정체화하던 폭력, 과잉, 허위, 이성에 관한 것이다. 이 경우에서 아카이브는, 사형선고, 무덤, 유린된 몸의 전시, 재산 목록, 임질에 관한 의학 논문, 창녀의 삶에 대한 몇몇 구절, 역사의 거대서사에 딸린 별표이다. 이러할진대, “[이 삶들을] 그들에게 다시 쥐여주기란, 마치 그들이 ‘자유의 신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처럼 의심의 여지 없이 영영 불가능한 일이다.”[7]
세계의 밖과 뒤
하지만 나는 이 이상을 말하고자 한다. 아카이브에 이러한 자취들을 남겨둔 폭력을 상술하는 것 이상을 하고자 한다. 나는, 내 서술 행위(act)에서는 추가적인 폭력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잠든 채 남아있는 것 – 현재에 대해 그들의 삶을 취득하는 것이나 현재에 대한 그들의 삶의 권리 - 을 되찾을 수 있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이는 불가능성 – 말해지지 않은 것을 듣는 것, 잘못 이해된 말을 해석하는 것, 망가진 삶을 재건하는 것 – 에 입각한 이야기이자,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의도에 입각한 이야기이다. 그 목표란, 담론의 파편, 암호, 숫자들(numbers, ciphers, and fragments of discourse)[8]을 생산했던 폭력을 바로잡는 것이며, 이는 우리가 포로된 자나 노예된 자의 전기를 다루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끔찍한 언사, 그들을 가치 단위로 정체화했던 회계장부, 그들을 재산으로 간주하는 운송장, 그들에게서 인간의 특징을 빼앗아버리는 진부한 연대기와 분화될 수 없는, 또 얽혀있는 삶들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러한] 말의 충격은”, 푸코가 쓰고 있듯, “두려움과 섞인 아름다움의 특정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가?”[9] 우리는, 누르베세 필립[10]이 시사하듯, “텍스트의 중심부에 자리한 어떤 부재, 즉, 인간으로서의 아프리카인의 부재로부터 무언가 새로운 것을 불러낼(conjure)[11] 수 있는가?”[12] 만약 그러하다면 이 새로운 서사의 특징은 무엇인가? 바꿔 말하자면, 이미 예언되고 기대된 죽음에 관한 연대기를, 죽은 주체들의 집단적 전기로, 인간의 반(反)-역사로, 자유의 실천으로 어떻게 다시 써낼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서사는 삶을 말로써 담아냄과 동시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존중할 수 있는가? 신음과 비명,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 수수밭의 불이 타닥거리는 소리, 죽은 자를 향한 애도가, 승리의 함성, 어떻게 이들을 듣고 그 모두에 말을 할당할 것인가? “불가능한 발언의 근원지”로부터 이야기를 구성하거나 폐허로부터 삶을 부활시키는 일은 가능한가?[13] 아름다움은 불명예에 대한 해독제를 줄 수 있는가? 또, “땅속에 묻힌 비명을 파내고” 죽은 자를 되살리는 방법을 과연 아름다움이 사랑할 수 있는가?[14]
아니면 서술은, 과거를 극복하고 죽은 자를 죽은 것이 아니라 되돌릴 때 실현 가능한 것의 전부로서, 그 스스로에게 선물이자 목적인가? 그나저나, 이야기는 대체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재앙이나 파괴의 후유증 속에서 세계를 살아가는 어떤 방법? 훼손되고 유린된 자아를 위한 세계 안의 어떤 집(home)?[15] 그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 우리를 위함인가, 그들을 위함인가?
포로 생활과 노예화에 대한 아프리카인 서사의 희소성은 예의 질문들이 갖는 압박감과 엄중함을 약화한다. 중간 항로(the Middle Passsage)[16]에서 살아남은 여성 포로의 자전적 서사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아카이브의 이 같은 침묵은, 유치장이나 유폐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에피스테메로서의 노예 수용소나 요새의 견고함과 맞물려, 노예무역사 문헌학의 초점을 정량적 문제와 시장 및 교역관계에 관한 쟁점에 대체로 집중시켰다.[17] 상실은 갈구를 낳을진대, 이 상황에서 이야기가 보상, 또는, 심지어 배상[18]의 한 형식으로 간주됨이 허무맹랑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때 그 보상이나 배상은 아마도 우리가 앞으로 받게 될 유일한 것일 터이다.
이야기를 전하는 데 몸 바친 한 명의 작가로서, 나는 이름 없는 자와 잊힌 자의 삶들을 재현하기 위해, 상실을 사고하기 위해, 알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존중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노예제의 반-역사들을 서술하는 일은 내게 언제나, 내가 해방 노예의 위태로운 삶이라고, 즉, 조기사망 및 이유 없는 폭력 행위에 대한 취약함으로 규정되는 어떤 조건으로서의 삶이라고, 그리고 미완된 자유의 기획이라고 부른 것들에 의해, 현재의 역사(a history of present)를 쓰는 일과 불가분한 것이었다.[19] 내가 이해한 대로라면 현재의 역사(a history of the present)는, 우리의 경험과 죽은 자들의 삶 간의 친밀함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우리의 지금을 마치 그것에 이 과거가 틈입하는 것처럼 쓰고자, 자유로운 상태를 포로 및 노예 생활 이전의 시간이 아니라 이 글에 기대되는 미래로 상상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이 역사가 나를 형성해왔기 때문에, “타자의 앎은 내게 흔적을 남기기”[20] 때문에,아카이브 조각과의 마주침에서 내가 겪었던 고통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잇고 아무것도 아닌 것 – 빈방, 침묵, 쓰레기가 되어버린 삶 - 의 생산을 돋보이게 하고자 내가 만들어온 이야기의 성질들 때문에, 이 글은 개인적이다.
죽음과 이처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자들에 관해/의해 말해지는 이야기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 로맨스? 비극? 대사나 노래가 된 비명? 반-역사, 즉, 폭력적 발언의 반복과 고문 절차의 재묘사에서 오는 위험에 대한 예방조치에 그치지 않는 어떤 염원으로서 쓰인 서사들을 빚는 규약이나 한계는 무엇인가? 폭력의 문법에 대한 복제 없이, 주체화의 장면에 어떻게 다시 방문할 것인가? 프레드 모튼[21]이 제안하려는 듯했던 것처럼, 그 같은 장면에 거주하는 “끔찍한 아름다움”은 치료제 같은 무언가인가?[22] 그가 헤스터 이모의 비명[23]이나 에밋 틸의 부서진 얼굴을 찍은 사진[24]에서 포착한 끔찍한 음악이나 끔찍한 아름다움은, 전자에서는 대저택농장[25]의 노래로, 후자에서는 기꺼이 열린 관 안을 들여다볼 용의로부터 생겨나는 “예민한 관심”[26]으로 변형된다. (다시) 보는 것이 주는 가능성은 그로 인한 위험을 무릅쓸만한 것인가?
“아카이브를 읽는 것은 영안실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는 노예선의 노예 화물칸(the slave hold)[27] 속으로 막 사라지려 하는 자들을 한 차례 마지막으로 볼 수 있게 하며, 그들에 대한 종국적 일별을 허락한다.”[28]라는 말이 옳다면, 관을 열어두는 것은, 또, 죽은 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악담의 재발화, 음담패설, 손실과 이익의 나열, 포로로서의 삶을 새겨넣고 또 끝내는 가치척도 등과 관련된 오염의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무엇인가? 죽은 자를 새로운 위험과 이차적 폭력에 종속시킬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노예상의 말이, 죽은 자들에 닿는, 또는, 그들이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성경의 무덤에 닿는 다리이기라도 한가? 역사적 재현의 윤리에 관한 이러한 우려가, 부분적으로는, 제목의 “두 행위”를 풀이한다. 나는 비너스의 죽음에 관한 “죽은 책”[29]에서의 내 설명을 재론 및 수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두 행위는, 현재에 출몰하는(haunts the present) 자로서의 “유령(haint)”[30]과 마음대로 처분 가능한 삶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의 비너스의 필연적 귀환을 선언하는 말이다. 사망자 수에 관한 노예상의 보고는 그러한 재상연(the repetition)의 필연성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우울감, 이질[31], 앞과 같음, 앞과 같음. “깡마른 소녀”나 “쓰레기 같은 소년” 등의 구절을 선을 그어 지우려 했던 헛된 노력보다는, 예의 간략한 기록으로 원장은 또 다른 죽음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는 죽은 자들을 “그들이 세계 바깥으로 쫓겨나던 그 모습 그대로”[32] 우리에게 돌려준다.
열린 관, 아카이브의 스캔들
스캔들과 과잉이 아카이브에 범람하고 있다: 사망자 수 보고서에 등장하는 날 것 그대로의 숫자들, 선장의 항해일지에서 보이는 전략적 얼버무림과 에두름, 향수병에 걸린 노예상들이 노예무역항에서 써 보낸 현란한 문체의 감상적인 편지들, 노예해방론자들이 쓴 충격적인 폭력에 관한 주술적인 이야기들, “품위가 [그들에게] 공개하길 금했던 것”을 누설하고 싶어하는 용병들의 매혹적인 목격보고서들, 마치 법처럼 모셔진 신체 절단, 교수형, 매질, 고문의 절차들. 폭력에의 리비도적 투자는, 과거에 관한 우리의 앎을 결정짓는 문서, 진술, 제도의 어느 곳에서나 뚜렷하다. 비너스에 관해 말하여져 온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공상, 욕망, 폭력 간의 이 같은 교통(traffic)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를 확인해주는 사례들은 아주 많이 있다. 죽음의 공간과 그곳에서 주어지는 쾌락의 공존을 증언했던 앨비언 프리깃 호[33]의 선장, 제임스 바봇의 사례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즐거움과 쾌활함이 가득한 젊고 발랄한 처녀들이 차고 넘칠 정도로 기력을 돋웠”[34]기에 노예선에서 성(性) 관련 통제를 시행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고 바봇은 고백했다.
희생자와 애인 사이의, 잔혹한 무절제와 사랑의 행위 사이의 미끄러짐을 세세히 진술하며, 팔콘브릿지[35]는 이를 재청(再請)한다: “몇몇 선박의 선상에서는 보통 선원들에게도, 그들이 동의를 구할 수 있는 흑인 여성과 성교하는 것이 허락됐다. 그들 중 일부는 연인의 그 비일관성에,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을 정도로 크게 마음을 다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예선에서 자행된 상습적 폭력을 로맨틱한 표현에의 의존 없이 묘사한 것은 올라우다 에퀴아노[36]뿐이다: “여성 노예들의 순결에 대해 폭력적 약탈을 저지르는 것은, 우리 선원들과 여타 백인들에게는 관행이나 다름없었다. … 나는 우리의 친구들이, 단지 기독교도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 망신스러운 것일 정도로, 이 행위들을 가장 추잡하게 저질렀음을 안다. 나는 심지어 그들이 그들의 잔혹한 욕정을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여성들로 채웠다는 것도 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이 혐오스러운 짓들을 스캔들이라 할 정도로 과하게 행했고, 이에 우리 선장 한 명은 그 친구를 비롯한 몇몇을 해고했다”(강조는 인용자).[37]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이 상황은 악화된다. 토마스 티슬우드[38]의 연이은 강간과 대변을 이용한 벌은, 삶에 대한 파괴와 괄시로부터 뽑아내어지는 쾌락에 관한 생생한 설명을 내놓음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기술(記述)의 파멸적인 힘으로부터 노예화된 삶을 회복하는 일의 어려움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에게 적당히 채찍을 휘두르고, 벌어진 상처에 식초와 소금을 잘 비벼주고, 헥터로 하여금 그의 입에 대변을 누게 하여 그의 입이 가득 찼을 때 즉시 재갈을 물린 다음 4시간이나 5시간 동안 그것을 벗지 못하게 한다.”[39] 이 정도의 학대에 관한 매일의 기록이 노예제의 역사를 구성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글 아래 묻힌 삶들을 파내는 것이나, 피바와 디도는 이러한 말들의 유폐 안에서만 존재하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역사에 진입하는 방법임을 차라리 받아들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들을 처음 우리에게 소개했던 가당치 않은 기술들로부터 그들을 해방함이 이상적이다. 티슬우드 같은 남성을 싫어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더 어려운 일은, 그의 일지 위에 쏟아진 잔혹한 라틴어구들을 우리에게 남겨진 것으로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가, 딜리아, 드라나, 렌티, 잭의 음울한 얼굴과 옷이 벗겨진 상반신을 놀라 바라봐서, 아나카의 훼손된 몸에 움찔해서, “가장 훌륭한 옷조차도 우아함을 더할 수 없을”[40] 정도로 사랑스러운 발가벗은 다이애나를 찬미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런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노예제 아카이브에서는 일상적 관행의 외양을 띤다. 다른 자들은 담론의 압박과 조장 하에서 나타난다: 채찍질하는 사람과 호텐토트 사람[41]. 샐쭉한 계집. 죽은 흑인 여성. 매독에 걸린 창녀.
부적절한 발언, 가당치 않은 언사, 위험한 명령들이 우리가 아카이브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인물들을 낳는다. 우리가 그들을 찾아낸 그 조건을 고려할 때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들은 끝내 소멸하고, 그들을 쥐려는 우리의 손을 빠져나가며, 연구의 압박 아래 무너질 것인 바, 우리가 그들을 또다시 잃어버리리라는 점이다. 이것만이 비너스에 관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괄시당한 것과 불명예스러운 삶에 대한 것으로서, 기쁘지도 흥겹지도 않으나 또 다른 글쓰기 양식을 향해 감히 나아가는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가능한가?
만약 스캔들을 폭로하는 것이 더는 충분치 않다면, 이 아카이브에서 기술들의 다른 집합을 생성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있었을 수도 있는 일을 상상하기? 이 진술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그려보기? 흑인됨(blackness)의 상태와 해방 노예의 삶을 규정하는 예의 폭력적 장면들이 필연적으로 재생산되기에, 이 같은 노력에 수반되는 위험들은 일괄적으로 다뤄지거나 회피될 수 없다. 반면 그 위험들은, 내가 전하길 택했던 이야기들과 피했던 이야기들 모두에서, 내 작업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엄마를 잃다[42]에서 내가 전하고 싶지 않았거나, 전할 수 없었던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는 비너스에 관한 이야기이자, 리커버리 호[43]에서 죽은 다른 소녀에 관한 이야기이며, 내가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쳤던 자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행위
리커버리 호 선상에서 소녀 둘이 죽었다. 선장 존 킴버는 “범죄의 의도를 갖고, 부정한 마음으로, 그리고 살의를 품은 채 한 여성 노예를 때리고 고문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녀의 죽음을 야기한 죄로” 기소됐고, “또 다른 여성 노예의 죽음을 야기한 죄로 재차 기소됐다.”[44]
1792년 6월 7일, 위 피고인의 변호사인 피곳 씨는, 존 킴버 선장이 한 흑인 소녀를 살해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리커버리 호 승조원 출신 목격자 2인 중 1인인 외과의 토마스 다울링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비너스의 이름을 외쳤다. 이 외과의의 증언에 따르면, 선장은 채찍을 써서 반복적으로 그리고 “며칠을 연달아서, 매우 가혹하게” 그녀를 매질했고, 이것이 그녀의 죽음을 초래했다.[45]
하지만 비너스는 이 흑인 소녀가 아니라 선장의 손에 죽은 다른 소녀, 재판 중 간략하게만 거론된 그런 소녀였다. 피곳은 그녀에 관해 외과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질문: [노예상] 재커매크리에게서 사들인 소녀 한 명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말해온 소녀와 같은 상태에 있던 그런 소녀 말이죠.
“리커버리 호 선상에는 또 다른 소녀가 있었다 … 그들이 비너스라 부른 그녀 역시 매독을 앓고 있었다.”[47]
선장은 첫 번째 소녀를 살해한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고, 두 번째 죄목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첫 번째 공소 사실을 지지했던 증거 외에는 두 번째 공소 사실을 지지하는 증거가 전혀 없었으므로, 배심원단은 이에 대해서도 피고인에게 무죄를 평결했다.”[48] 재판 중 비너스에 관해 언급된 것은 이뿐이었다.
나는 “죽은 책”에서, 윌버포스[49]의 침묵 뒤에 내 침묵을 감추면서 비너스에 대한 문장 두 개를 썼다. 나는 그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비너스, 그러니까 죽은 소녀 두 명 중 다른 한 명에 대해 말하지 않길 택했다. 그 같은 애칭은 성적 방탕함을 허가해줬으며,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처럼 들리게끔 했다.”[50]
나는 그의 탓으로 돌린 것들과는 다른 이유들 때문에 비너스에 관해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내가 창작해 버릴지도 모를 무언가를, 로맨스였을 그 무언가를 두려워했다.
내가 기소장에서 이름 이상의 것을 불러낼 수 있었더라면, 내가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비너스를 상상할 수 있었더라면, 내가 원장에서 추방된 작은 기억들을 상세히 다룰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겁먹고 외로운 두 소녀 사이에서 피어났을 수도 있는 우정을 재현하는 일이 내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배에 탄 자들(Shipmates). 비너스는 죽어가는 친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그녀의 귀에 편안함을 속삭이면서, 약속의 말로 그녀의 몸을 흔들면서, “곧, 곧이야”라고 그녀를 달래주면서, 그녀에게 좋은 일이 있길 바랐을 수도 있다.
생생히 그려보라, 그들을: 두 소녀의 유품, 다른 소녀를 어르고 재우는 소녀, 강탈당한 순결; 한 선원이 그들을 알아챘고, 그는 후에 그들이 친구였다고 했다. 세계에 속하지 못한 두 소녀는 서로의 품에서 발 디딜 땅을 찾았다. 좌절과 공포 옆에는 다음의 것도 있었으리라: 아름다움에 대한 일별, 가능성의 순간.
이야기의 상실은 그들을 향한 갈망을 벼린다. 틈을 메우는 일은, 어떤 종지부도 없는 곳에 그것을 찍는 일은, 그렇기에 매력적이다. 애도가 금지된 곳에 애도의 공간을 창조하는 일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죽음의 목격자를 직조하는 일도.
자유의 신분에서는 친구의 죽음을 돌보고 그 상실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소녀들에게도 가능했겠으나, 노예선에서는 비탄에 빠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그러한 사실이 적발됐을 시에는 그것을 뿌리뽑기 위해 고문 도구들이 활용됐다. 그러나 이러한 바라봄 – 두 소녀의 포옹으로부터 인식되고 애도되는 삶 - 이 주는 위로는, 노예선의 파멸적 폭력 및 내가 지금껏 써온 사실상의 모든 것과 불화한다. 처음에 나는 내가, 두 소녀를 친구로 상상함으로써, 그들에게 서로를 줌으로써, 노예선의 공동에서 끊어지고 복구된 관계를 재현하길 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다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서양 바닥에 가라앉은 두 소녀의 사체 외의 것을 바라보아, 노예선의 노예 화물칸에서 달아나고 나 스스로를 위로하길 내가 바랐다는 것.
결국 나는 비너스에 관해, 내가 그녀의 친구에 관해 말해왔던 것 이상을 말할 수 없었다: “내게는, 이른바 한 흑인 소녀 살해 사건이라는 적은 수의 말들로부터 존재를 구조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51] 나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 소녀는, 그녀가 살해당하게끔 둔 ‘말들의 위태로운 거처 바깥에서는 결코, 어떤 식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52]
나는 이와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없었다. 그러니 내가 찾아냈던 그 모습 그대로 그들을 두는 것이 더 나은 일이었다. 두 소녀로만, 고독하게.
[2] (역자주) 조지 왕조 시대 영국의 런던에서 일하던 매춘부들에 관한 연례 책자로, 1757년부터 1795년까지 발행됐다.
[3] “Last night cum Dido.” 자메이카의 노예 감시인 토마스 티슬우드는, 노예가 된 여성들에 대한 그의 성적 착취를 라틴어로 기록했다: “Cum sup terr”(“나는 땅바닥에서 그녀를 덮쳤다”). 본 문장의 인용 문헌은 다음과 같다: Douglas Hall, ed., In Miserable Slavery: Thomas Thistlewood in Jamaica 1750–1756 (Kingston: The Press University of the West Indies, 1998), 31. Samuel Derrick, Harris’s List of Covent-Garden Ladies, or Man of Pleasure’s Kalendar for the Year 1793 (London, 1793: reprint Edinburgh: Paul Harris Publishing, 1982), 83. John Gabriel Stedman, Stedman’s Surinam: Life in an Eighteenth-Century Slave Society, ed. Richard Price and Sally Pric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2).
[4]비너스가 처한 곤경에 관한 추가적 설명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Janelle Hobson, Venus in the Dark: Blackness and Beauty in Popular Culture (New York: Routledge, 2005).
[5]다음을 보라: M. NourbeSe Philip, She Tries Her Tongue, Her Silence Softly Breaks (London: The Women’s Press, 1993).
[6] Michel Foucault, “Lives of Infamous Men,” in The Essential Foucault, ed. Paul Rabinow and Nikolas Rose (New York: New Press, 2003), 284.
[8] (역자주)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여겨져 직역했다. 우선, ‘cipher’는 ‘무가치한 것/사람’이라는 뜻도 가지며, 이를 고려하면 ‘numbers’는 예컨대 ‘(의미 있게) 세어진 것/사람’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단, 이 경우 앞의 두 단어가 이미 서로 대조적이라는 점에서 ‘fragments’의 등장은 조금 어색해진다. 한편, ‘numbers of’은 ‘다수의’라는 뜻도 가지므로, 예를 들어, ‘다수의 담론을 생산하는 폭력을 바로잡는 것’이 불가능한 목표의 하나로 언급됐다고 볼 수도 있는데, ‘ciphers of’나 ‘fragments of’은 특별히 숙어로 쓰이지 않으므로 이 해석 역시 완전히 매끄럽다고 보기는 힘들다.
[14] Assia Djebar, Fantasia: An Algerian Calvacade, trans. Dorothy S. Blair (London: Heinneman, 1993).
[15]딸의 유린된 몸을 찾는 한 아버지가 등장하는 사’아닷 하산 만토의 이야기 “Khol Do(역자주: 파키스탄과 인도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공용어 우르두어로 ‘열어라’라는 뜻)”를 읽고 비나 다스는 이렇게 쓴다: “그녀 몸의 부분들은 그녀가 당한 잔혹한 폭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도, 이 아버지는 그의 딸이 살기를 바란다. … 그는 그의 언사[“내 딸이 살아있다 - 내 딸이 살아있어.”]를 통해 그녀의 훼손되고 유린된 자아를 위한 집을 창조해낸다.” Veena Das, Life and Words: Violence and the Descent into the Ordinar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7) 39, 47. (역자주: 사’아닷 하산 만토는 20세기 중반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활동했던 파키스탄의 작가, 극작가로, 우르두어로 다양한 작품을 집필했다. 비나 다스는 인류학 연구자로, 폭력의 인류학, 국가, 사회적 고통 등의 주제를 연구했다.)
[17] Stephanie Smallwood, Saltwater Slaver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18] (역자주) 구분하자면, 보상은 적법한 행위에 따른 손해의 발생을, 배상은 위법한 행위에 따른 손해의 발생을 전제한다.
[19]Achille Mbembe, On the Postcolon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1), 173–74. 여기서 음벰베는 “아무 것도 아닌 것, 텅 빈 형상으로 일전에 정해졌던 무언가를 세계에서 붙잡아 죽음으로 밀어넣는 일에서의”(189) 식민권력의 자의적이고 변덕스러운 본성에 관해 쓰고 있다.
[21] (역자주) 미국의 문화 이론가이자 시인으로, 비판이론, 흑인 연구, 수행성 등을 연구한다.
[22] Fred Moten, In the Break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2003), 14–22, 198–200.
[23] (역자주) 각주 22에 언급된 In the Break의 서장의 제목이 Resistance of the Object: Aunt Hester’s Scream이다. 19세기 미국의 저명한 노예해방론자이자 흑인 작가였던 프레데릭 더글러스는 1845년에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를 출간했다. 해방 노예들이 쓴 당대의 노예 서사 중 하나인 이 책에서 그는, 헤스터 이모가 주인의 채찍질에 피를 흘리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장면을 어렸을 때 본 기억을 써두고 있다. 여기서 하트만은 이를 인용한 모튼을 다시 인용하고 있는 셈이다.
[24] (역자주) 1941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난 에밋 틸은, 1955년 미시시피주의 친척들을 방문했다가 한 식료품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틸은 백인 여성 가게 주인인 캐롤린 브라이언트에게 휘파람을 불고 그녀를 건드렸다는 등의 의심을 받았다. 그가 식료품점에 들르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캐롤린 브라이언트의 남편 로이 브라이언트는 그의 이복동생 J.W.밀럼을 대동한 채 친척 집에 머물던 틸을 납치했고, 다시 며칠 후 틸은 근처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총상이 있는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얼굴은 구타로 인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 틸의 어머니 메이미 틸은 사람들이 그런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아들의 관을 열어둔 채 공개 장례를 치렀다(틸의 시신 및 장례식 사진 등은 인터넷에 공개돼있다). 두 용의자는 체포됐지만, 백인 배심원단이 배석한 재판에서 무죄를 평결받았다. 한편, 미시시피주는 일리노이주와 달리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연방을 탈퇴해 남부연합에 가담했던 주이다.
[34] “A Voyage in the Albion Frigate,” in Churchill’s Voyages, vol. 5 (1732), reprinted in George Francis Dow, Slave Ships and Slaving (New York: Dow, 2002), 81.
[35] (역자주) 알렉산더 팔콘브릿지는 1782년부터 5년간 네 차례 노예선에 올랐던 영국의 외과의로, 1788년에 노예무역의 실태를 고발한 보고서(각주 37 참조)를 출간하는 등 노예해방론자로 활동했다.
[36] (역자주) 1745년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난 올라우다 에퀴아노는, 1756년에 노예상에게 납치돼 영국 해군에 노예로 팔렸다. 해전에 참가하고 노예선에서도 일한 결과 자신의 몸값을 치를 수 있게 된 그는, 자유인이 된 후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각주 37 참조)을 써 영국의 노예해방론에 영향을 미쳤다.
[37] Alexander Falconbridge, An Account of the Slave Trade on the Coast of Africa (London: J. Phillips, 1780), 23–24. Olaudah Equiano, The Interesting Narrative (1789; reprint, New York: Penguin, 1995), 104.
[38] (역자주) 앞서 각주 3에서도 간단히 언급된 토마스 티슬우드는, 영국에서 태어나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자메이카로 이주한 플랜테이션 농장의 주인이자 노예 감시인이었다.
[40] Stedman, Stedman’s Surinam, 248. 딜리아, 드라나, 렌티, 잭은 루이 아가시의 다원발생설 연구의 피사체였다; 아나카는 산부인과학의 창립자인 매리언 심스의 실험 대상으로 쓰인 11명의 노예된 여성 중 한 명이었다. 다음을 보라: Harriet Washington, Medical Apartheid: The Dark History of Medical Experimentation from Colonial Times to the Present (New York: Harlem Moon, 2006). (역자주: 루이 아가시는 19세기에 활동한 스위스 출신의 미국 지질학자, 동물학자이다. 그는 당대의 사진술인 다게레오타입을 이용해 흑인 노예들의 사진을 찍었고, 이를 다원발생설(서로 다른 인종이 서로 다른 기원을 갖는다는 가설) 및 흑인의 열등성에 대한 지지 근거로 활용했다. 한편, 매리언(Marion) 심스는 원문 각주에 모튼(Morton) 심스로, 아나카(Anarcha)는 아란크나(Aranchna)로 오기된 것으로 보인다. 아나카 웨스콧은, 방광질루 및 직장질루 치료를 목적으로 19세기에 매리언 심스가 진행한 일련의 수술 실험에 마취 조치도 없이 동원된 여성 노예였다.)
[41] (역자주) 호텐토트는 남아프리카의 토착 유목 민족인 코이코이인을 일컫던 말이며, 오늘날에는 인종차별적 의미를 담은 공격적 단어로 간주된다.
[47]Trial of Captain Kimber for the Murder of a Negro Girl (1792), 19.
[48]Trial of Captain John Kimber for the Murder of Two Female Negro Slaves, 36; The Trial of Captain Kimber for the Supposed Murder of an African Girl, at the Admiralty Sessions (1792),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