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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강좌(1990)와 수전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 

연대에 이르지 못한 우정에 관하여 2

 

 

김수환 | 한국외대

 

2-2. 파국적 불일치: 냉전의 클리셰

 

파국적 균열은 강좌의 주제를 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이미 불거졌다. 소비에트에서 학술회의 제목을 붙이는 행위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벅-모스는 선택의 권한을 모스크바 측에 위임했는데, 뜻밖에도 그들이 제안한 제목은 포스트모던 담론의 철학적 문제들이었다. 이 제안이 불러일으킨 당혹감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당시까지만 해도 포스트모던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킬만한 (설익은) 개념이었을 뿐 아니라 해당 용어의 지지자와 비판자 모두에게 (후기)자본주의와 그것의 소비주의적 문화형태로 간주되기 일쑤였다(1984년에 처음 발표된 제임슨의 논문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가 확장된 버전의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게 이듬해인 1991년이었다). 그런데 시뮬라크르적이고 소비주의적인 후기자본주의는커녕 자본주의조차 겪어본 적 없는 소비에트 연구자들이 이런 제목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이 문제를 되돌아보는 벅-모스의 관점은 다분히 반성적이다. 그녀는 어쩌면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용어에 (후기)사회주의를 포함시키는 일이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어야 할 수도 있다[각주:1]라고 고백한다. 회고적 성찰의 핵심은 첫째, 이 용어를 서구식 자본주의 이외의 영역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각주:2], 둘째, 어떻게 보면 소비에트의 경우 포스트라는 개념의 사용이 (서구보다) 더 적절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에 있다. 전자가 두 개의 근대,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공통적 뿌리에 관한 벅모스의 입장과 연결된다면, 후자는 이미 실현된 혁명의 이후(post),’ 그러니까 스탈린의 이름으로 대두된 혁명의 테르미도르 이후를 살아가야만 했던 소비에트의 경험과 관련된다.

 

게다가 포스트모던적인 문화에 관해서라면 소비에트연방이 자본주의적인 서구 이전에 이 역사적 단계를 획득함으로써 나머지 세계보다 더 앞서 갔다고 주장할 방법이 있었다. 정치적 냉소주의, 반유토피아주의, 모든 전체화하는 담론에 대한 불신은 탈스탈린주의의 지적 유산의 일부분으로서 소비에트의 반체제 문화에서 일찍이 잘 확립된 포스트모더니티의 특징들이 아니었던가?[각주:3]

 

앞서 언급한 포도로가 추모 논문에서 벅모스는 이 평가를 다른 각도에서 반복한다.

 

미국에서 마르크스 저작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급진적(radical) 사고의 최전선에 서 있다고 상상했다. 돌이켜보면 그들[소비에트 동료들]은 혁명적 급진주의가 낳은 역사의 실제 결과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미 혁명적 급진주의에 대한 부검(postmortem)을 시행하며 더 앞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4].

 

한편, 혁명을 대하는 이 차이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베르토프 대 에이젠슈테인의 구도로 발현되기도 했다. 두브로브니크 세미나에서 포도로가는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영화에 나타난 (신체적) 폭력의 이미지에 관해 발표했는데, -모스는 당시 본인의 관심이 에이젠슈테인보다는 베르토프에게 더 많이 쏠려 있었다고 고백하면서, 이 차이를 혁명의 상이한 두 가지 이미지로 풀어낸다.

 

당시 그런 이미지들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면서 우리가 했던 것이 혁명의 이론화였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닫게 된다 [...] 베르토프의 카메라는 현실과 유희하고 가짜 경험을 창조하고 우연한 효과들을 포착하려고 했다. 그 카메라는 인간 눈의 ‘보철물(prosthesis)’, 이제껏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를 드러낼 수 있게 하는 지각의 기관(organ)이었다. 그것은 다르게 구축된 사회에서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정신을 개방했다. 혁명은 내게 여전히 사고실험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발레리는 혁명적 입법의 폭력,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세계의 변형을 위해 요구되는 잔인함(brutality)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각주:5].

 

말하자면 여기서 두 감독은 혁명의 상이한 두 가지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다. 특별한 지각장치로서 베르토프의 영화가 분해와 재조립의 몽타주를 통해 영화적 매개 없이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케 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창의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 곧 창조적 사고실험으로서의 혁명을 가리킨다면, 포도로가가 말하는 에이젠슈테인의 카메라는 그 자체로 관찰의 폭력을 기록하는 수단,” 강렬한 정동을 수반하는 잔인함과 고통의 현상학적 표현으로서, 실현된 혁명, 곧 잔인한 폭력적 입법으로서의 혁명을 가리키고 있다.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

 

 

서구 모더니티를 따라잡고 앞질러야만 했던 후발 근대국가 소비에트, 단지 사고실험이 아닌 폭력적 입법으로서의 혁명을 직접 체험했던 소비에트가 근대 이후마저 가속도를 붙여 서구를 앞질렀는지의 여부[각주:6]는 일단 차치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세계의 공통적 뿌리에 관한 전자의 문제의식에 관해서는 좀 더 상세히 부연할 필요가 있다.

 

두브로브니크 강좌 이후 10년 만에 출간한 저서 꿈의 세계와 파국의 서문에서 벅모스는 이 책의 기본 아이디어가 모스크바 철학계와 긴밀하게 협력하던 기간에 생겨난 것[각주:7]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벅-모스의 모스크바 방문의 직접적 결과물로서 만일 후자가 없었다면 전자도 없었으리라 단언할 수 있다. 대중유토피아로서의 꿈의 세계파국이라는 두 개념이 동과 서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를 비교하겠다는 발상을 뒷받침하는 기본 전제는 상반된 정치 체제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공통성, 더 정확하게는 불가분의 상호조건성에 걸려 있다. 훗날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 생각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바 있다.

 

동서 양 진영은 어떻든 상호 보충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때론 대립하기도 했고 때론 협동하기도 했던, 역사적으로 볼 때 양자는 서로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으며, 상대편 없이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비록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각각 따로 다루고 있지만, 기실 양자는 공통의 기획의 서로 다른 부분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서로 간의 공통점이 무엇이었던가를 밝혀내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가 『꿈의 세계와 파국』을 쓸 때 가장 염두에 두고 있던 점입니다 [...] 두브로브니크에서의 논의도 마찬가지였지요. 그것은 이미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다양성 가운데 공통성을 사유하려던 시도, 대중 사회의 상이한 형식들, 의사소통의 다양한 형식들 등이 의제화되었죠. 세미나 자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요.....[각주:8].

 

세미나 자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그녀의 말은 과거를 반추하는 비판적 지식인 특유의 겸양 섞인 평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동서 진영 학자들 사이의 파국적 균열은 엄연히 존재했던 바, 참여자들의 회고에 기초해 볼 때 구조적 불평등 문제를 훌쩍 넘어서는 본질적 균열은 무엇보다 언어의 불일치로 나타났다[각주:9].

 

이 언어적 불일치의 특이한 점은 그것이 상대편의 언어에 통달해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상대편 언어를 지향하는 대화 참여자들 사이에서 불거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점에서 이는 예견 가능한 사태였을 수도 있는데, -모스나 제임슨을 비롯한 서구 학자들의 언어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있었다면, 포도로가 그룹을 포함한 동구 학자들의 언어는 동시대 서구 이론에 깊게 천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대편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과거(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근대)를 비판하려는 각 진영의 시도가 서로에게 몹시 의심스러운 클리셰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제임슨의 냉정한 사후 평가가 상황을 간명하게 요약해준다.

 

간단히 말하자면, 동구 쪽에서는 권력과 억압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기를 바랐던 반면에 서구에서는 문화와 상품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기를 원했다(...)공통분모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각 진영이 선호하는 언어로 엉뚱한 답변을 웅얼대는 촌극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각주:10].

 

훗날 벅-모스와의 대담에서 리클린은 이 상황을 좀 더 명확하게 부연 설명했다.

 

두브로브니크의 세미나에서 처음부터 날카롭게 지각되었던 충격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나중에 프레드릭 제임슨도 말했는데, 소비에트 측 참가자들이 이야기했던 ‘고통의 역사’ 같은 것은 어쩐지 냉전 시대의 클리셰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제임슨이 언급했던 후기 산업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 역시 동유럽 지식인들에게는 또한 마찬가지로 냉전 시대의 클리셰에 정확히 대응했다는 것이죠. 이미 수십 년간 지겹도록 듣고 말해 오던 맑스주의적 테제의 반복이었다고나 할까요[각주:11].

 

말하자면 이는 냉전 시대의 전형적인 양극화를, 이번에는 뒤집힌채로 재연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동구는 서구의 언어와 개념을 통해, 서구는 동구의 그것들을 통해 스스로를 비판하고 있는데, 전자의 전체주의 과거 비판과 후자의 자본주의 상품문화 비판이 각기 상대편에겐 지겨운 클리셰의 반복으로 밖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다. 서구의 (좌파)학자들은 동구의 소비에트 체제 비판이 전형적인 서구 우파의 전체주의 비판처럼 들리는 순간 즉시 흥미를 잃어버렸고, 동구의 학자들은 서구의 자본주의 상품문화 비판이 익숙한 소비에트식 서구 비판의 프로파간다처럼 들리는 순간 즉각 이어폰을 꺼버렸다. 2006년에 푸른 소파저널에서 마련한 포도로가 그룹과의 대담에서 제임슨은 이런 상황 인식을 여전히 고수한다.

 

우리에게 전체주의의 수사학, 전체주의라는 개념 자체[...]는 서구에 존재했던 우익, 반좌파, 반사회주의 그룹들의 고전적인 주장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첫 번째 반응은 동구로부터의 이런 비판을 거부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냉전 시기 서구에서 시작된 고전적인 우익 선전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제가 생각하기에 바로 이것이 그 시절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지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파 선전의 입장에 맞서서 자본주의와 경제를 이야기했던 반면에 당신들은 정치, 당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동구에서의 일상적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이런 것들은 다른 차원, 서로 교차점이 없는 다른 평면에 자리한 것들이었죠[각주:12].

 

2006년. 페트롭스카야, 포도로가, 제임슨.

 

 

자신들은 자본주의 체제와 경제를 말했지만 동구에서는 국가와 정치, 일상을 이야기했다는 제임슨의 진단은 그 자체로(, 현상적으로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측면 하나를 방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당시 그들이 상대편의 말을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외려 냉전의 스테레오 타입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상대편의 이 아니라 그것을 듣고 있는 자신들의 가 아니었을까?

 

단순하게만 생각해봐도 사태의 진상이 제임슨의 요약에 비해 훨씬 더 심오하고 복잡한 것이었다는 점이 곧장 드러난다. 가령, 프레드릭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적 (후기)자본주의 비판이 과거 소비에트에서 유통되던 관제 마르크스주의 서구 비판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면, 제임슨 자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당시 세미나에서 제임슨은 인지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라는 개념을 제안했는데, 알다시피 그것은 이미 달라진 세계속 지식인의 입장에 대한 철저한 자의식에 입각해 있는, 말 그대로 철저한 안으로부터의 자기비판이었다. 하지만 그와 똑같은 논리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포도로가가 주장했던 권력의 파국적 기계(catastrophic machine of power)” 개념 또한 냉전 시대 수사학이 전제했던 전체주의적 억압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모스도 지적하듯이, 그것은 분명 멈퍼드, 들뢰즈, 가타리의 작업에 빚지고 있는색다른 과거 읽기의 시도였고, 그런 점에서 클리셰와는 가장 동떨어진 작업이었다[각주:13].

 

요컨대, 보다 정확한 진단은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두브로브니크의 파국과 균열은 단지 연구 대상과 주제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양 편 모두의 본질적 한계, 상대편 언어의 역사적 맥락과 두께를 전혀 헤아리지 못한 채로 단지 피상적 인상에 근거해 그것을 쉽게 기각해버렸던 그들 모두의 치명적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한편, 앞선 제임슨의 진단은 이중으로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실상 여기서 그는 30년 전 두브로브니크에서 상대편 언어의 구체적 맥락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전히 현상적 대립을 넘어선 더 깊은 차이와 공통성에 관해 숙고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후자의 측면과 관련해 특별히 시사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벅-모스의 사례다. 그녀는 두브로브니크의 실패, 바로 그 불통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무려 10년에 걸쳐 그것을 곱씹었으며, 그 결과 370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 한권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과 더불어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가령, 30년 전의 시도는 어째서 실패했는가라는 일차원적인 질문을 넘어 다음과 같은 물음들로 나아가보는 것이다.

 

두브로브니크의 경험이 벅-모스에게 남긴 직접적인 영향은 무엇인가? 파국적 균열을 뼈아프게 경험했던 그녀는 그 실패로부터 무엇을 끌어냈을까? 저 불발된 대화 이후 서로의 언어를 떠받치는 근본적 토대와 조건을 되묻고 그것들을 다시금 새롭게 대면시키려는 그녀의 지향은 어떤 결론에 이르렀을까?

 

- 3편에서 계속!

 

* * *

사실 위의 물음들에 온전히 답하기 위해서는 두브로브니크 ‘이후’ 벅-모스와 포도로가 두 사람이 거쳐 간 사유의 궤적 전반에 대한 면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10년 만에 발표한 『꿈의 세계와 파국』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벅-모스가 “마취학(anaesthetics)”으로서의 근대미학 및 지각의 “보철물로서의 영화 스크린”(Screen as prothesis of perception)“ 개념을 중심으로 한 고유한 시각문화론을 정련하기까지 신체와 폭력의 이미지를 둘러싼 포도로가의 관점(특히,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이미지)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마마르다슈빌리의 의식의 현상학에서 출발했던 포도로가 역시 “신체적 텍스트 읽기”라는 “분석적 인류학(Analytic anthropology)”의 방법론을 거쳐 2000년대 초반 극히 독창적인 “미메시스(Mimesis)” 개념을 창안하기까지 두브로브니크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영향에 대한 철저한 규명은 별도의 상세하고 정치한 분석 작업을 필요로 하기에 여기서는 필수 서지 사항만을 밝혀둔다.
 
Susan Buck-Morss:
  “Aesthetics and Anaesthetics: Walter Benjamin’s Artwork Essay Reconsidered,” October 62 (Autumn 1992), pp. 3-41.
  “The Cinema Screen as Prosthesis of Perception. Historical Account,” The Senses Still, edit. C. Nadia Seremetakis (Boulder/San francisco/Oxford: Westview Press, 1994), pp. 45-62.
  “The City as Dreamworld and Catastrophe,” October 73 (Summer 1995), pp. 3-26.
 
Валерий Подорога:
  Феноменология тела. Введение в философскую антропологию. Материалы лекционных курсов 1992–1994 годов, ред. А.Т. Иванов. (М.:Ad Marginem), 1995.; Словарь аналитической антропологии, Логос. Философский журнал, 1999. № 2. cc. 26–88.
  Мимесис. Материалы к аналитической антропологии литературы в 2 т. Т. 1. Н. Гоголь, Ф. Достоевский, науч. ред. Е. Ознобкина (М.: Культурная революция, Логос, Logos-altera), 2006.
  Valeri Podoroga, Mimesis. The Analytic Anthropology of Literature, Translated by Evgeni V. Pavlov (Verso, 2022).

 

 

  1. Buck-Morss 2000: 232(284). [본문으로]
  2. -모스는 아이자즈 아마드(Aijaz Amad)의 책 In Theory: Classes, Nations, Literatures (New York: Verso, 1992)을 읽고 이런 생각을 결정적으로 굳히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3세계 문학론을 향한 신랄한 비판으로 잘 알려진 아마드는 포스트모더니티 개념을 세계자본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의 맥락에 국한해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다. [본문으로]
  3. Buck-Morss, Ibid, 233(285). [본문으로]
  4. Buck-Morss 2021: 33. [본문으로]
  5. Buck-Morss, Ibid: 35 [본문으로]
  6. 나는 유르착의 연구서에 붙인 옮긴이의 글에서 후기사회주의 말기(1980년대)에 나타난 뚜렷한 포스트적 뉘앙스를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거론한 바 있다. 유르착, 앞의 책, 633-634쪽. [본문으로]
  7. Buck-Morss 2000: xi(13). [본문으로]
  8. 리클린, 앞의 책, 328-329쪽. [본문으로]
  9. 여기서의 구조적 불평등(structural inequality)”은 지적 권력의 불균형을 말하는 것으로, 인터유니버시티 센터의 공식 언어가 영어였다는 점, 달러로 제공된 같은 금액의 출장비가 서구와 동구 참여자들에게 다른 가치를 가졌다는 점 등을 가리킨다. “소비에트에서 온 참가자들은 달러로 받은 출장비를 쓰지 않는 편을 선호했고, 그래서 달러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담소를 나눌 때 마실 커피나 맥주도 포기해야만 했다.” Buck-Morss, Ibid, 234(286) 훗날 리클린은 제국주의에 맞선 투사 제임슨이 홀로 제국Imperial’ 호텔에 투숙했던 반면에 자유시장 경제를 지지했던 동유럽의 투사들은 기숙사에 머물렀다고 말하며 이 상황을 꼬집기도 했다. [본문으로]
  10. Buck-Morss 2000: 237(289). [본문으로]
  11. 리클린, 앞의 책, 332쪽. [본문으로]
  12. Фредрик Джеймисон, “Утопия и диалектика,” Синий диван. Вып. 9 (М.: ТРИ КВАДРАТА, 2006), c. 54. [본문으로]
  13. Buck-Morss, Ibid, 238(289). -모스에 따르면, 루이스 멈퍼드의기술과 인간의 본성과 들뢰즈· 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는 포도로가의 글의 명백한 출처에 해당한다. 331(4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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