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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Writing/In Moving Zone

러시아의 신자유주의 도입 하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의 정체성 이행: 빅토르 펠레빈의 『P세대』를 중심으로

by 인-무브 2025. 12. 6.

러시아의 신자유주의 도입 하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의 정체성 이행

: 빅토르 펠레빈의 『P세대』를 중심으로

 

황유경서교인문사회연구실

 

 

1. 

 

  1991년 12월 26일, 지상 최대의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했다. A. 유르착(A. Yurchak)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원하리라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진’ 날이다. 이 날은 70년 가량을 존속해온 과거의 세계에 대한 완전한 부정과 외부 세계의 돌연하고 전면적인 유입의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단절의 감각이 팽배했던 개혁의 시기에 러시아에서 성장하고 형성된 신러시아인 세대는 ‘P세대’로 명명된다. 이 명칭은 1993년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빅토르 펠레빈(Виктор Пелевин)의 동명의 소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P’는 펩시 콜라를 의미한다. 즉 P세대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기 직전, “바다 멀리 저쪽의 금지된 세계가 자신들의 삶으로 들어오기를 꿈꾸었”[i]으며 “그들의 부모가 브레즈네프를 선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펩시를 선택했”[ii]던, 다시 말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으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서구의 세계를 상상하고 열망하면서도 그것을 자신들에게 익숙한 기존 사회의 구조적 방식으로 흡수할 수 밖에 없었던 소비에트의 젊은 세대를 지칭한다. 

  이 글은 펠레빈의 『P세대 (Generation П)』를 분석 텍스트로 삼아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Everything Was Forever, Until It Was No More)』에서 제시된 소비에트 삶의 주체성에 대한 유르착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적용하여 1990년대 초 소련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본격적인 도입이라는 격동적인 상황 속에서 주인공 바빌렌 타타르스키로 대변되는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해나가는지 추적하고자 한다. 소설 속에서 영원성과 정체성의 문제는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또한, 정체성은 ‘쓰기’의 차원을 통해 만들어진다. 영원성이 담보되는 단단한 세계에서 시 쓰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려던 타타르스키는 기존 세계의 붕괴, 즉 영원성에 대한 공동의 믿음의 붕괴를 겪으며 이후의 줄거리 속에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광고 문구를 작성하며 자신과 러시아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탐색을 전개해나간다.

 

(좌) 소련의 첫 번째 펩시 공장을 방문하는 브레즈네프 (노보로시스크, 1974년)/ (우) 졸업을 축하하며 펩시를 마시는 학생들 (모스크바, 1981년)

 

  펠레빈의 소설에서 대두되는 영원성, 정체성, 그리고 언어의 문제는 유르착의 저서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을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유르착의 문제의식은 서구라는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소련의 이미지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실제 소비에트의 삶이 너무나도 달랐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는 시스템의 내부에서 국가의 공식적 이데올로기와 관계를 맺으며 소비에트의 정치적 공간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채 살아간 후기 사회주의 소비에트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에 주목하여 소비에트 삶의 주체성을 재인간화한다. 유르착은 소비에트의 공식 담론과 사회주의 현실이 흔히들 생각하는 공식-비공식, 억압-저항, 허위-진실 등의 이원론적 범주에 입각하여 작동하지 않았음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소비에트의 이데올로기적 진술들은 문자 그대로 무언가를 ‘의미(mean)’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역할을 ‘수행(perform)’하는 방식으로 ‘의미’와 ‘행위’의 차원으로 구분되고 복잡하게 얽히는 관계를 형성했다. 요컨대 소비에트의 공식 담론은 일상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수행되며 새로운 의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냈으며, 이러한 일탈의 시공간은 공식 이데올로기의 외부가 아닌 ‘내부의 한가운데’에서 발생했다. 즉, 소비에트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바깥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영원한 듯 보이는 억압적인 공식 이데올로기를 반복적하며 ‘수행적 전환(performative shift)’을 만들어나가는 가운데 새롭고 다양한 삶을 창출하며 그들만의 자유를 영위해 나갔던 것이다.

  유르착이 차용하는 ‘권위적 담론’이라는 용어는 바흐친으로부터, ‘수행’의 개념이 언어의 진술적·진위적 발화와 수행적 발화를 구분하는 존 오스틴(John Austin)의 화행이론으로부터 비롯된 만큼, 그의 저서는 2장과 3장을 중심으로 언어의 문제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담론이 지닌 언어 형식을 반복하는 일과 같은 행위가 만들어낸 예기치 못한 효과들에 대해 다루는 3장은 『P세대』에서 타타르스키가 당 간부였던 과거의 상관과 술을 마시는 장면에 대한 인용과 함께 시작된다.[iii] ‘강렬한 수사적 형식과 불명료한 의미가 합쳐진 이데올로기적 텍스트들’을 적어냈던 과거 당 간부의 능력에 대한 언급은 후기 사회주의 시기 권위적 언어에 발생했던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며[iv], 유르착의 문제 의식이 펠레빈의 소설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지점은 유르착은 어디까지나 후기 사회주의, 즉 소비에트 붕괴 이전의 상황을 포착하고 있는 반면 이 글에서는 소비에트 붕괴 이후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던 1990년대 초반의 러시아의 상황을 다루는 펠레빈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의 정체성을 탐색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비에트의 인간이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겪은 붕괴의 감각을 경제·사회·문화적 측면에서 톺아보고 세계에 대한 그들의 감각이 어떻게 재편되었을지 추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2.1. 소비에트-러시아의 신자유주의 도입과 서구와의 경제적 역학 관계 재편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은 정치체제뿐만 아니라 경제체제 또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뒤바뀜을 의미했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한 후 일주일이 막 지난 시점이었던 1992년 1월 2일, 러시아 연방이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 옐친 대통령은 예고르 가이다르와 함께 경제적 ‘충격요법’을 시행하며 해외 무역, 가격과 통화의 자유화, 국영기업 민영화 등 경제 자유화를 명령했다. 이때 시행된 충격요법이란 개발도상국의 신자유주의 도입과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1989년 존 윌리엄슨이 제시한 워싱턴 컨센서스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국제 경제기구와 미국 정부의 견해가 반영되어 시장 친화적 경제 정책과 정부 개입의 최소화 및 시장 기능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정책적 지침이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직후 러시아 정부에서 실시한 경제 정책의 맥락에서 모든 변화는 서구 중심적으로,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으로 쉬이 여겨지나, 실상 러시아의 경제적 변화를 그리 예기치 못한 것으로만은 볼 수 없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전에도 자본주의 체제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서구 국가들이 차례로 신자유주의 국가로 변모함에 따라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에도 신자유주의의 멍에가 서서히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재원(2020)은 산업화 시대로부터 탈피하며 정보화 혁명을 겪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계를 강화하는 서구 국가들의 발전 경향이 세계의 경제 구조를 서구 국가들의 중심부와 이들을 제외한 국가들의 반주변부, 혹은 주변부로 나누었다고 주장한다. 이때 사회주의 국가들은 경제적 침체기를 겪으면서도 서구의 선진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석유와 가스 등의 원자재와 농업 생산물들을 수출해야 했으며, 이러한 방법으로도 경제를 되살릴 수 없어 1970년대부터 서구 국가와 IMF 등 국제금융기구로부터의 대규모 차관에 의존하기 시작했다.[v] 서구 자본에 대한 이와 같은 의존적이며 종속적인 경향은 1980년대 들어서 더욱 강화되었고, 이처럼 서구 중심의 세계자본주의체제로 재편입된 소련을 비롯한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다시 공산주의 시대 이전의 주변부 자본주의 구조로 복귀했다. 

  1992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직후 러시아는 서구의 권고에 따라 신자유주의 체제전환 방식을 공식적으로 채택하며 가격에 대한 국가 통제 철폐, 서구 금융자본들에 의한 국영기업들의 급속한 사유화, 공공지출의 대대적 삭감 등 경제 부문에 있어 국가의 개입을 빠르게 퇴각시킨다. 하지만 이때 국가의 역할이 아예 사라졌던 것은 아니다. 국가의 개입은 기존과는 다른 방향에서 나타났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금융 자본이 러시아의 에너지 관련 국영기업을 사유화하는 가운데 러시아 내 신자유주의 관료 세력은 그들과 결탁하며 국제 경제의 역학 관계를 국내에도 이식시켜 국내 계급과 정치권력을 재생산하는 대리자 역할과 자본을 집중시키는 과정을 수행했다. 이러한 자본 축적의 과정은 생산 외적 영역인 상업, 금융, 범죄적인 비공식 부문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범죄조직이 러시아 내 새로운 과두 지배 세력으로 대두되었다. 이들은 국가자산을 헐값에 매입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국가는 철저하게 극소수의 신흥 과두지배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로 변모했다. 

 

옐친의 가격 자유화에 반대하는 집회 (1992년 1~2월)

 

  자본가가 아닌 국가의 주도 하에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신자유주의는 서구의 신자유주의와 달랐다. 옐친 시기 러시아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서구의 여타 나라들과는 달리 주변부적이며 종속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의 특징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에 더하여 러시아적 특수성인 정경유착, 연고주의와 결합한 ‘연고(crony)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여 효율성 제고라는 상대적 장점마저 제거되었다. 정치적 지배 세력은 경제 엘리트와 결탁하며 그들과의 상호유착관계를 형성했고, 이렇듯 국가 능력이 붕괴되고 정부의 통치력이 약화된 가운데 국가의 재산을 사적으로 점유한 지대추구집단은 자본주의적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로 변모했다.[vi]

  즉, 서구의 경제 논리는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기 이전에도 점차 소비에트 사회를 잠식하며 세계 경제의 시스템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을 주변부로 위치시키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붕괴 이전에 국가의 정치권력이 정치적 이데올로기 하에 경제권력을 온전히 조정하고자 했다면, 붕괴와 더불어 서구 금융자본이 급속도로 침투하며 국가의 경제권력은 무력하다시피 서구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신자유주의는 ‘시장 원리의 극대화를 위한 국가의 개입 최소화’라는 이론과는 달리 ‘시장 원리의 확산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의 방식을 통해 유입된 측면이 크다.[vii] 이와 함께 러시아의 정치권력은 서구적인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권력과 결탁하며 극소수의 신흥 과두지배세력을 대변하게 되었고, 이는 소비에트 시기의 권위적 담론을 대체하는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러시아 사회에서의 새로운 강제력이자 지배의 언어로 대두된다. 

 

 

2.2. 소비에트의 담론 구조와 탈영토화, ‘상상적 서구’

 

  1992년의 충격요법을 통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급속도로 러시아 사회에 침투함으로써 큰 변화를 일으켰으나 실상 붕괴 이전에서부터 소비에트 사회는 서구의 경제 논리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에서 유르착의 논의가 시작되는 지점과 맞물리는 부분이 있다. 유르착은 대부분의 후기 사회주의 시기 소비에트 사람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을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사태로 여기면서도 막상 그 상황을 인식하자마자 자신들이 그 변화를 조금씩 준비해오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는 역설에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출발한다. 

 

 

  후기 사회주의의 이러한 역설은 시스템의 권위적 담론이라는 변하지 않는 형식에 광범위한 대중이 참여하여 재생산할수록 해당 시스템은 내적인 전치를 경험하게 된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1950년대 스탈린은 권위적 담론의 외부, 즉 메타 담론의 위치에서 소비에트의 지적·과학적·정치적·미학적 담론의 여러 분야에서 권위적 담론의 정확성을 평가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판단하기 위한 그의 기준과 규칙은 사전에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스탈린의 개입은 역설적으로 그의 개입을 가능케 했던 권위적 담론 외부의 위치를 약화시키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메타 담론의 실종을 야기했다. 1950년대 후반 흐루쇼프의 스탈린 개인 숭배 규탄과 함께 권위적 담론에 대한 외적 위치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는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초규범화하여 모든 형태의 지식을 이미 확립된 지식처럼 제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초규범화된 권위적 담론이 지배적인 현실에서 권위적 담론이 의례화되어 재생산되는 과정은 담론의 수행적 차원이 지닌 중요성을 증대하고 진술적 차원이 가지고 있던 고정적인 의미를 형식화하며 재해석해 예측 불가능한 창조적 의미들의 생산을 가능케 하였다. 이로써 나타난 새로운 삶의 방식은 권위적 담론을 온전히 지지하지도, 배치되지도 않는 것이었으며. 시스템 내부에서 담론에 대한 지지와 거부를 모두 회피하는, 즉 담론의 바깥쪽과 안쪽에 동시에 자리하는 탈영토화된 특수한 위치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의 삶이 영원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감각은 소비에트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내적 전치를 겪고 탈영토화되기 위해 필요한 구성요소였다. 일반적인 소비에트 인간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체적으로 ‘정상적인’ 삶을 경험했으며, 그렇기에 그들에게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인 동시에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에 따른 담론적 구조의 폭로와 함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한편, 소비에트의 후기 사회주의 시대에 일상적 사회주의의 세계를 내부로부터 탈영토화하는 데에 기여했던 것은 소비에트 마지막 세대의 삶에 등장했던 ‘상상적 서구(Imaginary West)’라는 문화적·담론적 현상이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서구의 문화적 영향을 부르주아적 가치로 비판함과 더불어 민족 예술과 문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를 칭송했다. 이때 소비에트 인민들은 자신들의 공산주의적 이상이 국제주의적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으나 소비에트의 국경 너머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해외(заграница)’란 “인식 가능하면서 획득 불가능한, 실재하면서 추상적인, 익숙하면서 이국적인 상상의 장소”[viii]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소비에트 인민들에게 바다 너머의 ‘서구’란 실제 서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그것을 만나지 못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오로지 그것에 관련한 그들의 지식에만 기초해 만들어진 상상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창조된 상상적 서구의 세계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윤리와 미학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소비에트 시스템 내부에서 탈영토화된 일상적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또한, 소비에트 정부는 재즈나 록 같은 음악, 패션 등의 외국 문화 형식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동시에 소비에트 사회에서 그로 인해 출현하는 문화적 생산물들을 장려하고 발전하도록 하는 양태를 보였다.

 

소련의 생활 양식을 거부하고 서구의 자유로운 문화를 추종하는 젊은 '스틸랴기(стиляги)'를 비판하는 풍자화 (1970년대)

 

  유르착에 따르면 소비에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권위적 담론과 그것의 수행적 재생산을 통해 배태되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만들어내는 순환적 구도는 1985년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의 주도 하에 펼쳐진 개혁 정책과 함께 파열되었다. 그는 기존의 조치들이 작금의 상황을 타개시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자신의 연설에 끼워 넣음으로써 이전 서기장들의 연설에서 나타났던 순환적 서사 구조를 깨뜨렸다.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질문은 권위적 담론 외부의 담론, 즉 1950년대 스탈린의 사망과 함께 파괴되었던 메타 담론의 위치를 재도입하는 것이었다. 메타 담론의 도입은 후기 사회주의의 수행적 전환의 원칙을 약화시켰고,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권위적 담론과 시스템의 붕괴를 자연스레 이끌었다. 

  

 

2.3. 담론 구조의 재편에 따른 포스트소비에트 삶의 변화

 

  유르착의 논의는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기 이전의 담론 구조를 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펠레빈의 소설 『P세대』를 분석하기 위한 틀로 그의 논의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다. 『P세대』는 1993년의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하며, 여기에서 드러나는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석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새로이 구성된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의 권력 구조를 정치와 결합된 경제·사회·문화적 층위에서 추적할 필요가 있다. 

  앞서 본론의 1절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1970~80년대부터 서방 중심의 금융기구로부터 자금을 융자해왔다. 이는 어디까지나 세계의 변화하는 산업 구조에 뒤떨어지지 않고 서구 국가들과 나란히 자신들의 정치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그들이 서구 중심의 세계자본주의체제에 종속되며 주변부로 위치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과 함께 러시아 연방에 전면적으로 도입된 신자유주의 체제는 서구와는 달리 러시아의 토양에서 사상사적인 발전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하였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지적 기반을 구축하기보다는 시장물신주의를 조장[ix]하는 등 사회주의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잡았으며, 이와 같은 양상은 러시아의 정치적 권력과의 결탁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 서구 자본의 논리는 세계 경제구조의 주변부에 위치한 소비에트-러시아의 경제구조를 강한 인력으로 끌어당기는 중심의 논리의 수준을 넘어 국가의 정치적 구조와도 끈끈하게 달라붙어 분리시킬 수 없는 시스템 내부적 논리로 발전하였다.

  유르착은 후기 사회주의를 살아가는 소비에트 인민이 소비에트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권위적 담론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가운데 어떻게 일상의 사회와 문화 속에서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만들어나갔는지 보여준다. 소비에트의 이데올로기를 견지하면서도 자신의 일상에서 창조적인 의미를 만들어나가는 소비에트의 평범한 인간의 정체성은 권위적 담론의 안쪽도 바깥쪽도 아닌 탈영토화된 공간에서 구축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탈영토화된 공간의 대표적 예시가 ‘상상적 서구’였던 바, 포스트소비에트 사회는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상상적 서구의 세계의 붕괴 또한 겪으며 자본과 함께 급속도로 러시아를 향해 밀려들어온 실제 서구를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더 이상 상상 속 허구의 공간이 아니라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의 삶 속에 침투해 들어온 ‘실재’로 변모한 서구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영원성과 불변성의 믿음이 파괴된 포스트소비에트의 사회·문화적 기치의 공동(空洞)을 본격적으로 잠식하며 지배적 담론으로서 맹위를 떨친다. 

1990년대 모스크바 거리의 풍경 (좌측 하단) "세상은 바뀐다"

 

  요컨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정치적 세계의 붕괴는 그 내부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들의 공식적 이데올로기와 배치되지 않는 긴밀한 연관성 속에서 구축해가던 상상적 타(他)의 세계의 외연 또한 파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소비에트 체제의 공인된 차원 하에서 절대 실제로 접촉할 수 없었으며 오직 모호한 힘이자 상상으로만 경험될 수 있었던 서구는 사라지고, 그 존재는 붕괴 이후 경제·사회·문화적 층위에서 모두 러시아의 현실을 지배하는 강력한 실재로서 경험된다. 이러한 상상적 세계의 붕괴는 일상적 삶과 창조적 삶의 붕괴 또한 의미했으며, 후자는 포스트소비에트 국가와 인간의 정체성 문제 또한 불러 일으킨다. 즉, 70년 동안 건재했던 소비에트 사회가 몰락하고, 금지되었던 서구 세계의 논리가 권위적 담론으로 출현함으로써 서구가 더욱 실재적인 것으로 거듭나는 한편 러시아라는 신생 국가는 오히려 그 정체성에 있어 모호한 불안한 외피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 구조의 재편은 포스트소비에트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에서도 위기를 겪는 상황을 촉발한다.

 

 

2.4.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의 정체성 모색과 좌절

 

  펠레빈의 소설 『P세대(Generation П)』에서는 기존 체제의 붕괴,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함께 순식간에 몰락해버린 러시아의 경제 상황과 만연한 소비주의의 행태, 그 안에서 살아가는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젊은 세대의 생존 문제와 정신적·도덕적 가치의 혼란 등이 나타난다. 소설의 주인공인 타타르스키는 소비에트 시절 문학대학에 다니던 시인 지망생으로, 급격하게 변화한 사회적 현실로 인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거리 가판대의 점원으로 일하던 중 동기의 제의로 광고 회사에 들어간다. 그는 서구 자본주의 문화와 러시아 고유의 문화를 언어와 이미지의 차원에서 넘나들고 유희하며 수입 담배, 술, 패션 등의 광고 카피를 작성하고 업계 최고의 카피라이터로 승승장구한다. 그의 출세가도는 마약, 뇌물, 사기, 살인 등 당시 러시아의 혼란한 사회상을 대변하는 온갖 불법적인 행위들 또한 수반한다.

  『P세대』는 서구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도입되며 소비주의와 광고 마케팅 전략이 사회를 잠식하던 1990년대 초반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의 상황을 제시하는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주인공이 자신과 러시아의 정체성을 탐색해나가려는 과정 또한 보여준다. 소설의 제목과 동명의 첫 장[x]에서 화자는 펩시 콜라로 대표되는 서구의 자본주의 문화가 물밀 듯이 유입되며 소비에트 권력의 몰락과 함께 문학의 위상이 동반 추락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또한, “영원성[xi] 을 위한 창조적 노동”으로서 시작(詩作)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하는 바빌렌 타타르스키가 영원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며 시 쓰기를 포기하고 새롭게 도래한 시대에 자신의 존재가 어긋남을 인식하는 과정을 제시한다.

 

소련의 펩시 광고 "새로운 세대는 펩시를 선택한다(Новое поколение выбирает Пепси)"(1990)

 

소련의 펩시 광고 "새로운 세대는 펩시를 선택한다(Новое поколение выбирает Пепси)"(1991)

 

 즉, 영원하리라 기대되었던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는 창조와 문학을 통해 스스로를 찾고자 했던 타타르스키의 열망 또한 단념시키며 그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xii] 공허한 정체성을 경험하던 타타르스키의 직업 바꾸기는 순전히 경제적 이유에서 발생한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가장 구하기 쉬운 일자리인 거리 매점의 점원이 되었으며, 큰 돈을 만지기 위해 친구의 제안에 따라 광고 카피라이터로 직업을 전향한다. 하지만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기로 결심하고 광고 문구를 ‘쓰기’ 시작하며 자신의 정체성 탐색에 대한 타타르스키의 추구는 다시금 발생한다. 

  서구 자본의 논리와 소비주의가 잠식한 사회에서 광고계에 종사하며 광고 문구를 만든다는 것은 권위적 담론에 복무하며 그것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일일 것이다. 타타르스키가 채용되기 전 초반에 기획하고 창작하는 광고 문구는 이러한 권위적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 권위적 담론의 반복적 수행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타타르스키는 문학 텍스트를 광고 문구에 삽입함으로써 문학 대학 학생이자 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복권시키려 한다. 그가 제일 처음 구상하는 두 편의 광고는 수입 담배 광고로, “조국의 연기는 달콤하고/ 유쾌하다(И дым отечества нам сладок и приятен)”라는 팔리아멘트 담배의 광고 문구는 18세기 러시아의 작가 그리보예도프(А. Грибоедов)의 희곡 『지혜의 슬픔(Горе от ума)』를 인용한 것이며, “지혜가 많으면 슬픔도 많고/ 지식이 늘면 비탄도 는다(Во многой мудрости много печали, и умножающий познания умножает скорбь)”라는 다비도프 라이트 담배의 광고 문구는 전도서 1장 18절의 구절을 변주한 것이다. 러시아의 전통적 문학을 기반으로 한 타타르스키의 이와 같은 창작은 “이제는 유물이 된 일종의 소련 정신의 백색 소음 같은 것”인 “편집자나 출판업자들의 문학 중심주의 잔재”[xiii]를 이어가려는 노력으로 묘사된다. 즉, 타타르스키가 하는 창작의 행위는 서구로부터 유입된 자본의 논리가 지배적인 현실 내부에서 무의미한 허상이 되어버린 고급 문학과 과거 러시아-소비에트의 유산을 호출함으로써 창조를 위한 새로운 주체적 공간을 만들어나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구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권위적 담론으로 대두된 시대적 상황 내부에서 러시아-소비에트적인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통해 창조적 의미가 배태되는 탈영토화된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좌)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로 인해 불탄 국회의사당 건물과 수입 담배 광고 "미국과의 만남"/ (우) 팔리아멘트 광고 패러디 "조국의 연기는 달콤하고 유쾌하다"

 

  하지만 광고 카피라이터로 취업에 성공한 후 자신의 정체성 형성에 대한 타타르스키의 시각은 변화한다. ‘호모 자피엔스(Homo Zapiens)’라는 이름의 장에서 저자는 텔레비전이 광고를 통해 자본 중심의 권위적 담론을 확산시키는 주요 미디어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시청자와 텔레비전의 관계를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제시하며 이때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논한다. 그는 텔레비전 화면이 꺼져 있을 때는 시청자와 텔레비전을 각각 주체 1번과 객체 2번으로, 화면이 켜져 있을 때는 주체 2번과 객체 2번으로 명명한다. 주체 1번은 현실이 물질적인 세계라는 사실을 믿고 있으나 주체 2번은 현실이 텔레비전을 통해 보이는 물질 세계라고 믿는 실재하지 않는 주체이며, 편집자-감독 그룹이 이끄는대로 자신의 주의력을 통제하는 가상의 시청자에 해당한다. ‘호모 자피엔스’라는 명칭은 광고를 보지 않으려고 텔레비전 채널을 재빨리 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 ‘재핑(zapping)’에서 비롯된 것으로, 제2유형의 주체를 일컫는다. 재핑은 텔레비전 방송의 토대인 광고-정보의 영역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어떠한 내적 본성도 없는 주체 2번의 자기 정체성(самоидентификация) 구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된다.

 

“자기 정체성은 소비된 상품의 목록을 통해서만 규정되며, 변형은 목록의 변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광고에 나오는 대부분의 대상들은 특정한 개인 유형, 성격의 특징, 경향성이나 특성과 연관된다. 그 결과 실제 존재하는 개인이라는 인상을 만들어내는 특성, 경향성, 특징의 전적으로 확실한 조합이 생겨난다. (...) 광고는 이것을 다음처럼 공식화한다. ‘나는 냉정하고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빨간색 슬리퍼를 사겠다.’”[xiv]

 

모든 것은 돈으로 귀결되고 주체는 온전히 기계적이며 비실재적인 제2유형의 상황에서 광고를 통해 주체가 구성하는 정체성은 아이덴티티(identity)로 명명된다. 소비주의에 입각한 대기업들의 행태 속에서 개인(личность)의 자리를 대체한 아이덴티티는 거짓 자아이며,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덴티티를 뚫고 자아로 되돌아가는 일은 ‘부르주아적 사고’로 간주된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작동하고 문학 텍스트를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저속하게 사용하는 광고의 양상은 텔레비전을 통해 권위적 담론을 직접 생산하고 유포하는 위치에 다다른 타타르스키에게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큰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에게 더욱 중요해진 현실은 텔레비전 화면이 꺼져 있는 제1유형의 세계가 아닌 텔레비전 화면 속 제2유형의 세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적 글쓰기 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이전의 노력은 그에게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광고안이 처음으로 채택된 직후부터 곧바로 전통을 저속하게 모방한 유사한 형태의 광고를 만들기 시작한다. 타타르스키가 이전의 태도를 버리고 시장 논리를 철저하게 내면화한 인간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은 “타타르스키는 자신이 아주 최근까지도 시장 민주주의 시들이 이미 오래전에 버린 무의미한 각운을 찾아내느라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는 화자의 묘사에서도, 자신이 처음으로 구상했던 팔리아멘트 담배 광고에서 그리보예도예프의 작품 인용을 삭제하고 그 대신 미국의 뮤지컬 영화 제목인 “올 댓 재즈”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8장, ‘조용한 항구’는 “러시아의 부르주아를 이미지의 바닷속에 가라앉힙시다!”[xv]라는 타타르스키의 건배사로 끝맺는다. 그의 건배사는 ‘푸쉬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을 현대의 기선에서 던져버리자’고 외치며 구시대 문학의 종말을 선언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학의 힘을 천명했던 20세기 러시아 미래주의자들의 선언문의 구절을 상키시키며, 타타르스키가 기존의 문학 언어에서 완전히 벗어나 텔레비전 광고의 이미지 언어에 귀속된 “상당히 급진적인 시장경제 옹호자”[xvi]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다른 이가 제출한 광고 콘티에 대한 내부 검토서에 이렇게 적는다.

 

“지나치게 문학적임.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가가 아니라 크리에이터다.”[xvii]

 

“문학 평론가를 신러시아인으로, 푸시킨과 크릴로프와 차다예프도 다른 신러시아인들로 대체하는 것만 확인. (...) 문학 연구는 그만하고 실제 고객을 생각할 때가 되었음.”[xviii]

 

  한편 자신의 새로운 주체적인 정체성 모색에 실패하고 문학에 대한 이상을 저버리는 타타르스키의 행보는 러시아의 관념(русская идея)를 찾고자 하는 그의 시도가 번번이 실패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타타르스키의 동료 보브치크는 러시아의 관념이 정교, 전제정, 민족성에서 공산주의로, 그런 다음 민족적 정체성이 부재한 작금의 상황에서는 돈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음을 언급한다. 그의 말을 들은 타타르스키는 러시아의 관념에 대해 써보려고 시도하나 그 시도는 그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완벽한 실패”[xix]로 끝난다. 이는 서구 자본 중심의 경제적 논리와 끈끈하게 밀착한 러시아 사회 내부에서 민족적 관념, 러시아만의 독자적인 국가적 정체성은 상상의 세계에서조차도 획득되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결국 타타르스키는 러시아의 관념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이렇게 쓴다. 

 

“언론 매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건강하고 민족적인 ‘무언가’를 미국 팝 문화나 동굴 자유주의의 지배에 대비시켜야 한다고 선전해왔다. 여기서 문제는 이 ‘무언가’를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다. 외부 관점은 배제한 내부 검토에서 우리는 그것이 완전히 부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광고 콘셉트 작가들은 이러한 의미론적인 결함을 졸로타야 야바 갑으로 틀어막고 있으며,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잠재적인 소비자들을 대단히 유리한 심리적 결정화(結晶化)의 과정으로 이끌 것이다. 이는 소비자가 담배를 피울 때마다 러시아 관념이라는 행성의 승리에 조금씩 다가간다고 무의식적으로 믿게 되는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 어쩔 수 없이 서구 선전의 본래적인 우수성에 관해, 보다 넓은 의미에서 내향적인 사회가 외향적인 사회와 정보 경쟁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xx]

 

  위의 인용문에서는 언론 매체와 광고에서 주창하는 “건강하고 민족적인 ‘무언가(что-то)’”는 사실 부재하며 광고에서 꾸며내는 ‘러시아 관념’이라는 것은 소비자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허울에 불과함을 인식한 타타르스키의 단념과 함께 서구 사회 앞에서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사회가 갖는 무력성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인식은 러시아의 경제·사회·문화가 실제 서구의 논리에 잠식된 상황 속에서 러시아라는 국가의 민족적 정체성은 불안정하고 획득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소비에트 사회 내에서 상상적 서구가 행했던 역할과는 달리 수행적 전환이 발생하는 탈영토화의 공간으로서 포스트소비에트인들에게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이 자신과 국가의 정체성을 모색하려는 기대는 이렇듯 계속하여 좌절된다.

 

영화 『P 세대』(2011) 공식 예고편

 

 


3.

 

  “중산층의 영전에 바친다.”[xxi] 『P세대』는 이렇게 시작한다. 작품의 말미에 다다라 타타르스키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낸 온갖 허상의 이미지들로 점철된 광고를 찍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작가는 “러시아의 중산층이 민족주의적 사고를 멈추고 어디서 돈을 벌까 고민하기 시작한 바로 그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xxii]을 명시한다. 중산층으로 대변되는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의 평범한 인간들의 사고에서 민족과 국가에 대한 관념은 소멸되었으며 그들의 사고는 오로지 금전적 이익에 대한 관심에 귀속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그들의 정신적 죽음과 다를 바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말하는 중산층의 대표자격인 주인공 타타르스키는 작품의 초반부, 이미 소비에트 체제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이 붕괴하고 서구 자본의 논리가 러시아를 잠식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쓰기를 통해 공허해진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한다. 이때의 ‘쓰기’란 자신이 창작하는 수입 상품들의 광고 문구에 전통적인 문학 텍스트들을 접목시키는 것으로, 서구에서 유입된 자본의 논리와 소비주의가 권위적 담론으로 부상한 상황에서 해당 담론을 수행하면서도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의 공간을 마련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타타르스키가 동시대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텔레비전을 통해 보여지는 이미지의 세계가 그에게 현실보다 더욱 중요한 세계로 부상하면서 문학적 글쓰기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중단된다. 자신의 정체성 모색에 있어 타타르스키의 실패는 그가 광고업에 종사하면서 절대로 러시아적인 무언가를 찾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과거 소비에트인들이 ‘상상의 서구’와 같은 탈영토화된 지대를 통해 공식 이데올로기 하에서 주체적인 삶을 만들어나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소비에트 인간 타타르스키는 소비에트가 붕괴하고 서구가 실재로서 러시아에 도래한 상황에서 러시아적인 무언가를 찾음으로써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만들어낼 수 있는 탈영토화된 지대를 구축하고자 했으나, 그러한 공간은 당시의 상황에서 구성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서구는 소비에트의 후기 사회주의 시기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소비에트인들의 삶에 유입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서구는 경제·사회·문화적 층위에서 모두 모호한 힘, 상상적 세계로나마 소비에트인들의 일상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시절부터 이미 서구 세계와 그 논리를 자신의 일상적 삶 속에서 조금씩 내면화하고 있었던 포스트소비에트의 인간들은 서구적인 요소가 제거된 온전히 러시아적인 상상적 세계를 만들어낼 수 없었으며, 이러한 사실이 포스트소비에트 인간의 정체성 모색을 불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자기 정체성과 국가적 정체성 모색에 실패한 타타르스키는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디지털화되어 시각 이미지 시퀀스로 변환되고 스스로 광고의 화신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주인공의 형상을 통해 펠레빈은 서구 세계와 자본의 논리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했던, 영원성에 대한 믿음과 함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며 흔들리던 1990년대 초반 포스트소비에트 인간들의 현실을 냉소적이며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참고문헌

 

- 1차 문헌

 

빅토르 펠레빈(2012) 『P세대』, 박혜경 옮김, 문학동네.

알렉세이 유르착(2019)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Пелевин, В.(1999) Generation Пhttp://pelevin.nov.ru/romans/pe-genp/.

 

 

- 2차 문헌

 

김수환(2012) 「소비에트 마지막 세대의 눈으로 본 후기사회주의: 알렉세이 유르착(Alexei Yurchak)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제41권, 한국러시아문학회, pp. 187-199.

______(2018) 「공산주의와 기호 – 언어 통치에서 수행적 전환으로」, 『기호학 연구』 제57권, 한국기호학회, pp. 27-57.

남혜현(2015)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언어장의 (반)소비에트성 연구: 언어문화에 대한 담론과 언어정책을 중심으로」, 『슬라브학보』 제30권 제2호, pp. 97-126.

라승도(2005) 「언어의 혼란: 펠레빈의 <P세대>에 나타난 신화의 담론 구조」, 『외국문학연구』 제21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pp. 73-91.

박태성(2013) 「러시아 P세대의 등장과 사회적 특징」, 『동유럽발칸연구』 제35권,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캠퍼스) 동유럽발칸연구소, pp. 245-277.

성원용(1999) 「체제전환기 러시아의 신자유주의와 경제발전전략에 관한 연구」, 『러시아연구』 제9권 제2호,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pp. 241-281.

정재원(2014) 「러시아 사회복지정책의 변화: 세계자본주의체제와 국가 신자유주의의 영향」, 『중소연구』 제38권 제2호,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pp. 201-241.

______(2020) 「탈사회주의 국가 연구를 위한 시론」, 『슬라브연구』 제36권 제4호,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캠퍼스) 러시아연구소, pp. 27-56.

최은경(2025) 「빅토르 펠레빈(Виктор Пелевин)의 P세대(Generation П)에 나타난 포스트 소비에트의 욕망 –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모방 욕망(Mimetic desire)’을 중심으로 -」, 『슬라브연구』 제41권 제1호,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캠퍼스) 러시아연구소, pp. 199-227. 



 

[i] 빅토르 펠레빈(2012) 『P세대』, 박혜경 옮김, 문학동네, p. 12.

[ii] 펠레빈(2012), 12.

[iii] 유르착은 5장의 마무리와 6장의 제사(題詞)에서도 소비에트 현실 내부에서 구축되었던 상상적 세계와 영원성이 전복된 상황을 예시하기 위해 『P세대』를 인용한다. 알렉세이 유르착(2019)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pp. 385-389.

[iv] 유르착(2019), 151-153.

[v] 금융 자본은 체제전환 이전에 상업차관의 형태로도 구 소련에 유입되었는데, 1991년 당시 이미 그 액수가 628억 달러에 달했다. 정재원(2020) 「탈사회주의 국가 연구를 위한 시론」, 『슬라브연구』 제36권 제4호,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캠퍼스) 러시아연구소, p. 37.

[vi] 정재원(2020), 30-48.

[vii] 정재원(2014), 「러시아 사회복지정책의 변화: 세계자본주의체제와 국가 신자유주의의 영향」, 『중소연구』 제38권 제2호,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p. 201.

[viii] 유르착(2019), 304.

[ix] 성원용(1999) 「체제전환기 러시아의 신자유주의와 경제발전전략에 관한 연구」, 『러시아연구』 제9권 제2호,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pp. 250-251 참조.

[x] 신화의 담론 구조에 따라 소설 『P세대』를 분석하는 라승도(2005)는 소설의 제목과 동일한 제목의 첫 번째 장이 작품 전체의 서사 구조를 내포하며 예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라승도(2005) 「언어의 혼란: 펠레빈의 <P세대>에 나타난 신화의 담론 구조」, 『외국문학연구』, 제21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p. 80.

[xi] 이때 영원성이란 하나의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들이 그것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며 결속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영원은 타타르스키가 진정으로 믿는 한에서만 존재하며, 사실 믿음의 경계 너머에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영원을 진정으로 믿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이 믿음을 공유해야 했다. 아무도 공유하지 않는 믿음은 정신분열이라고 불렸다.” 펠레빈(2012), 17.

[xii] 유르착 또한 『P세대』를 인용하며 붕괴에 따른 기존 세계 구조의 재편이 삶에 대한 포스트소비에트 인간, 타타르스키의 감각에 변화를 일으켰음을 언급한다. 그는 상상의 서구와 함께 창조성의 세계마저도 상실되었다고 얘기하는데, 타타르스키의 정체성에 있어 시작(詩作)으로 대표되는 창작은 그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상상의 서구는 더 이상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상실된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사회주의 현실의 뗄 수 없는 일부분으로서 사회주의의 ‘정상적’ 삶의 형태를 구성했던 의미와 창조성의 친밀한 세계들도 함께 상실되었다. (...) 빅토르 펠레빈의 소설 『P세대』의 주인공은 1990년대 포스트-소비에트의 시각에서 소비에트의 가까운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가 “평행 우주”라고 부르는 소비에트 현실 내부의 상상적 세계들이 지나가 버렸음에 유감을 느낀다.” 유르착(2019), 385.

[xiii] 펠레빈(2012), 79.

[xiv] 펠레빈(2012), 146.

[xv] 펠레빈(2012), 182.

[xvi] 펠레빈(2012), 252.

[xvii] 펠레빈(2012), 261.

[xviii] 펠레빈(2012), 263.

[xix] 펠레빈(2012), 234.

[xx] 펠레빈(2012), 264-265.

[xxi] 펠레빈(2012), 5.

[xxii] 펠레빈(2012), 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