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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Writing/In Moving Zone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텍톨로지』

by 인-무브 2026. 2. 8.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텍톨로지:

로드리고 누네스의 <조직화의 관점으로부터: 보그다노프와 아우구스티누적 좌파>의 번역에 부쳐

 

김수환 | 한국외대

 

 

이번에 번역 소개할 글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Aleksandr Bogdanov, 18731928)의 주저 텍톨로지 에세이 Essays on Tektology의 포르투갈어 판본인 Ensaios de Tectologia: A Ciência Universal da Organização (Machado, 2025)introductory essay로 실린 조직화의 관점에서: 보그다노프와 아우구스티누스적 좌파 From the Organizational Point of View: Bogdanov and the Augustinian Left이다. 이 글은 2025e-flux 저널(Issue #152, 153)1, 2부로 분할 연재되었다.

 

 

 

이 글을 쓴 로드리고 누네스(Rodrigo Nunes)는 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 정치이론 및 조직화 분야 선임강사로 재직 중이며, Neither Vertical Nor Horizontal: A Theory of Political Organisation (Verso, 2021)The View from Brazil: The Far Right and the Acceleration of Disintegration (Verso, 근간)의 저자다. 누네스는 이 글에서 보그다노프의 텍톨로지와 관련된 주요한 이론적 이슈들을 선명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그다노프의 사상이 인류세를 둘러싼 오늘날의 각종 논의들에 가져다 줄 수 있는 당대적 유효성의 지점을 매우 탁월하게 짚어내고 있다. 보그다노프 사상의 ‘21세기적 재방문에 관심을 둔 이들이 일독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여기에 소개한다. 한국에서 보그다노프의 사상은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일부 측면에 국한해 접근되어 왔기에, 번역문 게재에 앞서 간략한 소개를 덧붙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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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다소 진부한 표현이 되었지만, 지난 세기 러시아(소비에트)의 사상가 가운데 르네상스형 지식인이라는 칭호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주저 없이 보그다노프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가 중대한 공헌을 남긴 연구 분야를 단순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기나긴 목록이 필요할 정도인데,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분야에서 그가 아마추어가 아닌 탁월하고 독창적인 성과를 남긴 학자이자 실천가로 활약했다는 점이다.

 

보그다노프는 모스크바대학교 자연과학부에서 생물학, 화학, 물리학을 전공하고, 하르코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자연 과학자이자 의사였다. 그는 1894학생운동으로 체포되어 추방된 유배지 툴라에서 블라디미르 바자로프와 함께 세 권짜리 마르크스 자본번역을 내놓았던 경제학자였으며, 1908년에 (장인의 이름이었던) 보그다노프라는 필명으로(그의 본명은 말리노프스키였다) 최초의 SF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붉은 별을 발표한 소설가였다.

 

볼셰비키 공산당 핵심 리더로 활동하던 중 레닌의 혹독한 비판(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을 받고 당에서 축출된 후, 카프리에서 루나차르스키, 고리키와 함께 정치조직 전진Vpered”을 결성해 노동자 교육 및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1917년 혁명 이후에는 사회주의 과학 아카데미의 교장을 맡는가 하면 프롤레트쿨트(Proletkult)”로 알려진 프롤레타리아 교육 문화 조직을 창설했다.

 

1920년에 프롤레트쿨트가 해산되자, 보그다노프는 1922년까지 시스템 분석의 시초이자 사이버네틱스 이론의 선구로 간주되는 세 권짜리 주저 텍톨로기야: 보편조직학의 집필에 몰두한다. 1926년에는 세계 최초의 수혈 연구소를 설립해 젊은 제자들과 함께 수혈을 통한 회춘rejuvenation” 연구를 했는데, 이 연구소는 158명의 환자에게 총 213번에 걸친 성공적인 수혈을 시행했다. 1928년 혈액 관련 질병을 앓고 있던 제자에게 수혈을 실시하다가 사망했다.

 

마지막 이력과 관련해 검색을 하던 중 아래의 재미있는 동영상을 발견했다.

https://voda.donga.com/3/all/39/1662847/1 (동영상 링크)

불로장생을 꿈꾸는 남자 '알렉산더 보그다노프

[신비한TV 서프라이즈] 856, 20190310

 

언제나처럼 재연 배우들의 신실한연기는 무척이나 감동적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내용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보그다노프의 수혈 실험은 불로장생따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개체의 단위를 넘어서는 일종의 생리학적 집단주의의 기획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피를 나누는 일, 상호 수혈의 혁명적 의미는 직접적인 생물·물리적 협력을 통해 한 유기체가 다른 유기체의 생명 요소를 지원함으로써 파괴적 요소에 맞서 싸우는데 있다. 소설 붉은 별에는 화성인이 지구인 레오니드에게 이를 직접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 사이의 상호 수혈을 실행했습니다. 각 개인들이 다른 이로부터 자신의 기대 수명을 높일 수 있는 요소들을 주고받는 것이죠. 이런 교환은 각각의 순환계를 연결하는 도구를 이용해서 한 명의 피를 다른 이에게 공급하고 되돌려주는 과정을 거칩니다. [……] 지구의 의학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혈은 가끔 자선의 느낌이 납니다. [……] 우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체적인 체계와 비슷하게, 우리 동지들이 일반적으로 삶을 교환하는 방식은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을 넘어 생리적인 영역으로까지 뻗어나가기 때문이지요 [각주:1].

 

 

말하자면, 혈액 교환은 상호영향력 원리의 보편성을 시험하고, 두 생명체가 어떻게 접합 단계에 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수평적 유형의 자기조절 협력의 생명정치적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이버네틱스원리의 이와 같은 생명정치적 번역작업은 심각한 난관에 부딪혔다. 11명과의 성공적인 교환 수혈을 마친 보그다노프는 열 두번째이자 마지막 수혈 실험, 잠복 결핵을 앓고 있던 제자 레프 콜도마소프와 혈액을 교환한지 2주만에 사망했다. 자신이 결핵에 저항력이 있다고 믿었던 보그다노프는 자신의 면역력을 제자에게 전달하고 싶었지만, 시술 직후 두 사람 모두 급성 반응을 일으켰다. 결국, 동지적 삶의 교환은 한 방향으로만 작동했던 바, 콜도마소프는 회복되어 결핵을 완치하고 저명한 기후학자가 되어 1980년대 중반까지 살다 죽었다. 이후 보그다노프와 콜도마소프 사이에 적혈구 부적합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콜도마소프의 장수가 보그다노프와의 동지적 생명 교환의 결과인지는 불분명하다.

 

 

문학, 경제학, 정치학, 의학, 생물학 등 온갖 학문분야에 걸쳐있는 보그다노프의 사유 대부분은 당시로서는 수십 년을 앞서간 선구적인 것들이었다. 그 중 어느 하나를 그의 주 전공 분야로 특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가운데 철학이 중심을 차지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역설적인 것은, 정치 활동가(프롤레트쿨트), 생체 실험가(수혈연구소), 그리고 시스템과학 이론가(텍톨로지)로서의 위상과 평가에 비해, 그의 초기 사유를 지배했던 철학적 탐구가 상대적으로 덜 연구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번에 번역하여 소개할 글에서 로드리고 누네스도 주목하고 있듯이, “경험일원론(Empriomonism)”이라 불리는 보그다노프의 초기 철학은 당대의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와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중대한 특이점을 갖고 있다. 에너지와 힘의 작용이 물질을 구성한다는 현대 물리학의 연장선상에서 에른스트 마흐의 강한 영향 하에서 만들어진 보그다노프의 철학은, 주체-객체 이원론 대신에 요소들의 연결성을 강조하고, 물질을 수동적 실체나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힘과 저항의 연쇄(concatenation)” 과정의 흐름으로 바라보는 관계의 존재론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의 경험일원론절대적인 진리, 인과관계, 절대적인 시공간, 나아가 절대적인 윤리적 가치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엄격한 경험주의의 입장과 더불어, 이제껏 대개 분리되거나 심지어 대립하는 것으로 취급되어온 용어들, 이를테면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인간과 비인간,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 자연과 문화, 행동과 지식을 사유할 수 있는 단일한 프레임을 찾아야 한다는 요구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개체는 일종의 (하위) 시스템으로서 그것이 속한 환경, 그러니까 무한히 작거나 무한히 큰 생명 과정의 복합구조에 포함된 채로 그것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공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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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프롤레트쿨트가 해체되고 이듬해 조직 중앙위원회에서 강제로 해임당한 보그다노프는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세 권짜리 대작의 집필에 몰두한다. “우주에 대한 유일한 일원론적 이해를 표방한 이 대작은 보편조직학(universal organization science)”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 핵심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무기물에서 생명 물질에 이르기까지의 우주 전체는 부분들의 끊임없는 조직화, 해체, 재조직화로 구성된 자기-조직화된 현상(self-organized phenomenon)이라는 것이다. , 그것은 에테르의 미지 요소들로부터 인간 집단과 항성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형태와 조직 수준들이 무한히 펼쳐지는 직물이며, “그것들의 뒤섞임과 상호 투쟁, 그리고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부분적으로는 무한히 분열되어 있으나 전체로서는 연속적이고 단절이 없는, 보편적인 조직화 과정을 창출한다.” 보그다노프를 자기 시대를 훌쩍 앞질러간 사상가,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뿐만 아니라 이후 루트비히 폰 베르탈란피의 작업을 통해 시스템 이론이라 불리게 될 분야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든 저작이 바로 (영어로는 'Tektology'로 불리는) 대작 텍톨로기야(Тектология)(1913, 1917, 1925-28).

 

 

현재 『텍톨로기야』 의 영어 번역본은 2종이 존재한다. 조지 고렐릭(G. Gorelik)이 번역해 1984년 출간한 Essays in Tektology. The General Science of Organization (Seaside, California: Intersystems Publications Limited, 1984)은 원전을 발췌한 축약본이다. 1996년에 출판된 Tektology. Book 1, trans. by A. Kartashov, V. Kelle, P. Bystrov (Hull: Centre for Systems Studies Press, 1996)1989년에 모스크바에서 출간된 러시아어 원전 Тектология: Всеобщая организационная наука. В 2-х кн. (Москва: Экономика, 1989)의 제 1권을 번역한 것이다. 그밖에 독일어, 일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번역본이 존재하며, 중국어, 폴란드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로 부분 번역되어 있다.

 

한편, 보그다노프의 초기작인 경험일원론2014년에야 러시아어로 정식 출간되었는데[Богданов А. Эмпроиомонизм Статьи по философии (Москва 2014)] 이를 번역한 영어본이 네덜란드의 저명한 국제학술 출판사 브릴(Brill)이 기획한 보그다노프 저작 번역 출판 프로젝트인 역사적 유물론 책 시리즈” 2권으로 2020년 출간되었다[Bogdanov, A. Empiriomonism: Essays in Philosophy, Book 13, trans. David G. Rowley (Leiden, Boston: Brill, 2020)]. 10권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 중 현재 2, 3, 8권이 출간된 상태이며, Tektology9권으로 예정되어 있다. 이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Alexander Bogdanov Library” 사이트( https://bogdanovlibrary.org/)는 보그다노프 주요 저작의 러시아어 원문 텍스트를 비롯한 최근 연구물과 관련 소식들이 망라되어 있는데, 이런 기획과 사이트의 존재 자체가 오늘날 보그다노프 재방문의 현황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21세기 들어 영어권에서 보그다노프 사상의 동시대적 전유의 시도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는 메켄지 워크의 Molecular Red: Theory for the Anthropocene (Verso, 2016)가 있다. 새로운 행성 시대를 사유하기 위한 철학적 도구를 정련할 것을 표방한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각각 보그다노프와 플라토노프가 다뤄지고 있는데, 저자는 보그다노프를 인류세 시대의 사상가로 명명하면서, 그의 사상이 갖는 각별한 동시대적 함의를 (특히 노동과 자연의 관점에서) 부각시킨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보그다노프의 글 3편이 포함된 Russian Cosmism (MIT Press, 2018)을 출간하여 러시아 우주론사상의 재방문을 주도한 바 있는 보리스 그로이스는, 자신의 새 책 Philosophy of Care (Verso, 2022) 마지막 챕터(12)를 보그다노프에 할애해 분석했다. 그는 텍톨로지의 핵심 개념 쌍 중 하나인 '이그레션(egression)'과 '디그레션(degression)' 개념을 각각 '자기-돌봄(self-care)'과 '돌봄(care)'에 대응시키면서, 보그다노프가 실행한 생명정치적 기획이 각종 사회적 기제(골격)를 통한 보호의 시스템에 해당하는 디그레션으로부터 벗어나 이그레션의 우위를 다시금 확보하기 위한 혁명적 돌봄(Revolutionary Care)”의 사례에 해당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렇듯, 보그다노프 사상을 향한 동시대의 새로운 관심과 접근은 다방면에서 확인되고 있다. 지난 2023년에 러시아 출신의 신진연구자 마리야 체호나드스키가 출간한 단행본 연구서 Alexander Bogdanov and the Politics of Knowledge after the October Revolution (Palgrave MacMillan 2023)은 이를 증명하는 사례로, 이 책은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인식론의 포괄적 맥락에서 보그다노프 사상의 전모를 흥미롭게 탐구한 바 있다.

 

지금까지의 소개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유기계와 물리계, 그리고 인간계를 포괄하는 보그다노프의 조직화된 존재론(organizational ontology)”21세기 들어, 특히 물질적, 존재론적 전회이후 도래한 각종 새로운 유물론()’의 맥락에서 각별한 재조명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에 번역 소개할 글의 저자 로드리고 누네스 또한 인류세의 보그다노프라는 제목을 단 두 번째 파트에서, “보그다노프를 우리의 동시대인처럼 보이게 만드는일련의 요소들을 열거하면서, 일원론의 관점에서 비롯한 그의 조직화의 관점이 그 본질상 거대한 평준화(leveling)” 관점주의(perspectivism)”, 그리고 행위주체성(agency)을 인간의 범위 너머로 확장한다는 아이디어를 애초부터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사이버네틱스의 선구자혹은 인류세 시대의 사상가와 같은 교과서적인 명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해당 사상가의 사유의 기본 골격과 특이점을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한국어로 처음 소개되는 이 글이 보그다노프 사상의 윤곽을 파악하고, 그것이 21세기를 사유하기 위한 중요한 지적 자원으로서 가지는 각별한 의의를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 다음 회: 로드리고 누네스의 <조직화의 관점으로부터: 보그다노프와 아우구스티누적 좌파> 1부

 

  1.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붉은 별: 어떤 유토피아, 김수연 옮김, 아고라, 2016, 115~116(번역 일부 수정). 진정으로 정의로운 사회주의라면 동지들 간의 삶의 교환 방식이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을 넘어 생리적인 영역으로까지 뻗어나갈 필요가 있으며, 그러려면 피를 나누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보그다노프는 생각했다. 물론 그의 실험과 사유에 불멸에 관한 지향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럼에도 그것은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의 불로장생의 꿈 따위와는 거리가 먼, 니콜라이 표도로프 우주론의 영향 하에 형성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혁명의 넝마주이(문학과지성사, 2022) 2부를 참조하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