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으로서의 자연: 가능한 것들의 유혹
저자: 디디에 드베즈(Didier Debaise)
영어 번역: 마이클 헤일우드(Michael Halewood)
한글 번역: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도서 정보
Nature as Event: The Lure of the Possible, 2017, Duke University Press.
https://www.dukeupress.edu/nature-as-event
Nature as Event
"Nature as Event is a remarkable rendering of Whitehead's most difficult points of philosophy. With his slow, light, and extremely clever touch, Didier Debaise has a unique ability to make speculative philosophy understandable to everybody, artists as well
www.dukeupress.edu
L’appât des possibles: Reprise de Whitehead, 2015, Les presses du réel
https://www.lespressesdureel.com/EN/ouvrage.php?id=3496&menu=0
Didier Debaise : L'appât des possibles - Les presses du réel (book)
www.lespressesdureel.com
*마이클 헤일우드가 번역한 영어판을 기준으로 번역하였고, 프랑스어 원저를 일부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목차
서문
1장 근대인의 우주론
2장 보편적 마니에리슴
3장 경험의 강화
서문
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물려받아 우리의 모든 사유에 스며든 근대적 자연 개념과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생태적 변화 사이에 점점 커지는 긴장으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1] 이 긴장은 오늘날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른 듯 보인다. 우리가 전개하는 개념들, 우리가 구성하는 추상화들, 우리의 사유 방식 자체가 더 이상 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심화시키거나 발전시키지 못하며, 오직 그 의미를 흐릴 뿐이다.
이 책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정 명제들을 되살려, 자연에 대한 다른 사유 방식의 조건들을 개략적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이러한 화이트헤드로의 회귀는 다소 뜻밖으로 보일 수 있다. 그의 우주론에 관한 작업은 베르그손(Bergson), 듀이(Dewey), 메를로-퐁티(Merleau-Ponty), 들뢰즈(Deleuze) 등 여러 철학자에게 높이 평가받았지만, 이러한 몇몇 사례들을 제외하면 그의 작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영향력도 미미했다. 아마도 현대 철학의 주요 흐름에서 벗어나 있던 게 최근 몇 년간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관한 관심이 새롭게 고조되고 있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주변부의 지위에 머물렀던 이유가 정확히 그의 작업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요소인 거 같다. 마치 그를 움직인 질문들의 낯섦, 그의 작업 전반에 걸쳐 있는 사변적이고 우주론적인 주장들이 한때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리고 모든 예상을 뒤엎고 오늘날 주요 관심사의 중심이 된 것처럼 보인다.[3] 나는 화이트헤드 철학에 관한 최근 텍스트들을 발전시킴으로써, 그의 작업이 자연 개념의 근대적 발명을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들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 내가 ‘보편적 마니에리슴(universal mannerism)’이라고 부르려 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조건들을 확립한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책은 두 가지 목표를 가진다. 첫째, 근대적 자연 개념이 어떤 진정한 존재론적 입장(이원론적이거나 일원론적인 입장)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조작적인(operative) 개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연에 대한 특정한 표상이 어떻게 그 자신을 우리에게 강요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조작(operation)의 지위를 추적하고 질문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조작의 핵심, 그 구성적 몸짓(constitutive gesture), 그것의 표식은 자연을 두 개의 이질적인 실존 양태(modes of existence)로 나누는 것이며, 그 전형적인 표현은 “제1”성질(primary quality)과 “제2”성질(secondary quality) 사이의 차이다. 이 구별로부터 존재들 사이의 모든 분할, 그들의 속성과 양상 사이의 모든 대립, 즉 존재와 가치, 실재적 자연(real nature)과 외관적 자연(apparent nature), 사실과 해석이 파생된다. 두 번째 목표는 “보편적 마니에리슴”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이 조작이 부과하는 구속을 넘어서기 위한 방식을 제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나는 존재와 양식(manner)이 뒤섞여 있다는 점을, 자연에는 경험하고 느끼고 이해하며 중요성을 부여하는 모든 방식만큼이나, 다양한 실존 양태들이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가치, 중요성, 목적의 감각 – 이것들은 우리의 근대적 자연 경험에서는 정신적 첨가물, 즉 인간이 자연에 투사하는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자연이 결여하고 있는 걸로 여겨지는 - 은 미생물의 가장 기초적인 생명 형태부터 반성적 의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사변적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자연 안의 존재 방식의 다수성(multiplicity)에 마땅한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1장 근대인의 우주론
나의 주된 목표는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이분화(the bifurcation of nature)”라 부르는 것에 대한 그의 항의를 계승하는 동시에 갱신하려는 것이다. 이 문구는 언뜻 보기에는 다소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이는 근대적 자연 개념의 기원에서 나타났던 일련의 경험적, 인식론적, 정치적 조작의 집합을 지칭하며, 이 개념의 효과를 오늘날까지도 느낄 수 있다. 본격적인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맥락을 먼저 짚고자 한다.
“자연의 이분화”라는 문구는 화이트헤드의 첫 번째 본격적인 철학 저서로 1920년에 출판된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에 등장한다. 그때까지 이미 화이트헤드는 중요한 연구 업적들을 쌓았다. 그는 수학 분야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함께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공동 집필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자연의 개념』은 전환점을 표시했다. 이 책에서 화이트헤드는 향후 전개될 자신의 모든 철학을 특징짓게 될 과제를 처음으로 정립했다. “본서(『자연의 개념』)와 이전 저서(『자연 인식의 원리』)의 목적은 사변적 물리학을 재조직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가 되는 자연철학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입니다.”[1] 화이트헤드의 초기 저술들에서 『자연의 개념』으로 이어지는 아이디어를 명확히 찾을 수 있다. 특히 1919년에 출간된 『자연 인식의 원리(An I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1920년의 이 저서에 이르러서야 과학의 추상화에 관한 체계적인 탐구를 시작하였으며, 이는 그 이후에 경험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도록 발전하고 확장되었고, 특히 그의 대표작인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서 두드러졌다. 현재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1920년의 이 저작에서 화이트헤드가 자신을 과학자로서 내세우며, 자신의 분야, 즉 자연과학이 근본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완전한 방향 전환이 불가결했다. 이것은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부단한 집착 중 하나며,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근대세계(Science and the Modern World)』라는 이후 저작에서 그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제시한다. “과학의 진보는 이제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물리학의 안정적인 토대가 무너졌다. 그리고 생리학은 이제 쓸모없는 잡동사니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효과적인 지식 체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학적 사고의 낡은 토대는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시간, 공간, 물질, 질료, 에테르, 전기, 기계, 유기체, 배치, 구조, 패턴, 기능, 이 모든 것이 재해석을 요구하고 있다.”[2]
그러나 근대 과학의 맥락 안에 이분화를 위치시키는 것은 이 개념의 중요성을 한 특수한 분야로 제한하지 않는다. 근대 철학 전반이 이분화의 오류에 맞닿아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 점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에 근대 과학에서 근대 자연철학 전체로의 전환을 포함해 우리 스스로 이 이분화의 함의를 파악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구절에서 이분화의 지위를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될 두 가지 요소를 식별할 수 있다. 첫째, 중요성은 상대화된 것으로 보인다. 중요성은 자연에 대한 경험의 역사를 관통하는 상수가 아니며, 자신을 어떤 초월적 형태로 정립하여 자연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이 단지 그것의 모습이나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는다. 대신에 중요성은 역사적으로 위치한다. 이분화의 절대적 기원을 재현하는 하나의 찰나(moment)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역사적 영향들이 있으며, 그 개념적 조건들은 먼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이분화가 그 효력에 있어서 진정으로 역사적으로 위치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약화시키진 않는다. 암묵적으로 이는 시대적 또는 역사적 자연 이론의 문제다. 둘째, 화이트헤드는 이분화에 선험적으로 무제한적인 것처럼 보이는 적용 범위를 부여하는데, 그는 근대 시기가 이 이분화에 의해 “모조리 물들어”[3] 있다고 말한다.
이분화 개념은 근대 과학의 발전에서 유래했다. 이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화이트헤드는 근대 과학의 발명과 과학사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에 관해 분석하면서, 그것의 구성적 조작 방식을 식별하기 위해 그 용어를 만들었다. 비록 그 기원을 실험적 실천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분화의 문제는 근대 경험의 특정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수준의 경험에서 일어나는 전 지구적 전환의 기원이다. 화이트헤드는 다른 저술들에서 “우세한 관심”[4], 즉 자연에 대한 인식론 경험부터 미적, 도덕적 경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에 영향을 미치면서 모든 우주론의 근원이자 표현으로 작용하는 것에 관해 얘기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은 향후 자신의 다른 기능들을 구성하게 될 첫 번째 기능을 수행한다. “철학에는 몇 가지 기능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여러 우주론을 비판하는 일이다. 철학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상이한 직관들을 조화시키고 개조하며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 철학은 궁극적인 여러 관념들을 면밀하게 따져서 우리의 우주론적 도식을 형성할 때 이용되었던 증거 전체를 그대로 보존하도록 역설해야 한다.”[5] 따라서 이 두 측면은 일치한다. 이분화를 특정 시대에 위치시키는 일은 그것을 “역사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위치 지정 덕분에 화이트헤드는 이분화에 모든 수준의 경험에서 작동하는(operates) 독보적인 시계(scope)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이분화의 몸짓
이분화 개념이 유래한 맥락을 명확히 짚었으므로, 이제 그 구성(constitution)에 대해 더 상세히 살펴보고, ‘자연의 이분화란 정확히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직접 던질 수 있다. 『자연의 개념』의 첫머리에서 화이트헤드는 항의의 형식으로 이 개념의 정의를 제시한다. “제가 철저하게 항의하고 있는 것은 설령 실재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의미에서 실재적인 두 가지 실재 체계로 자연을 이분화하는 것입니다. 그중 한 실재는 사변적 물리학의 탐구하는 대상인 전자(electron)와 같은 존재자일 것이다. 이것은 지식(knowledge)에 대해서 존재하는 실재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론에서는 그 실재가 결코 알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알려진 것은 다른 종류의 실재, 즉 정신의 부산물(byplay of the mind)이기 때문입니다.”[6]
이 구절은 이분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일련의 오독과 오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분화가 제기하는 문제에서 뭐가 중요한지를 더 잘 파악하고, 그로부터 적절한 방식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이 인용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어쨌든 첫인상은 이분화가 우리를 “이원론(dualism)”으로 되돌아 가게 한다는 것이다. 사용된 용어와 대립 구도는 확실히 이원론과 유사해 보인다. “지식을 위한 실재”와 “정신의 부산물”에 의해 확립된 실재 사이의 차이, 혹은 마찬가지로 “인과적 자연”과 “외관적 자연” 사이의 차이는 우리를 연장과 사유, 물질과 정신의 구별로 되돌아가게 하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분화는 단순히 이원론에 대한 새로운 사유 방식, 더 나아가 이원론 철학, 주로 데카르트의 이원론 철학과 그것이 근대 시대에 끼친 영향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킬 새로운 접근 방식이 되지 않을까? 만약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이런 식으로 읽는다면, 이원론에 대한 다른 비판과 근접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득을 볼 수 있겠지만, 그 대가로 화이트헤드 사유의 독창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분화를 이원론에 대한 새로운 비판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우세했다. 이런 해석은 메를로-퐁티(Merleau-Ponty)가 화이트헤드의 철학를 다룬 강의[7]와 장 발(Jean Wahl)의 연구[8]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펠릭스 세슬랭(Félix Cesselin)이 이를 가장 극명하게 지적한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그가 자연의 ‘이분화’를 거부하면서 궁구한 바에서 출발하는 수밖에 없다. 자연의 이분화는 곧 이원론이며, 특히 데카르트적 이원론이다.”[9] 이러한 해석은 결코 드문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화이트헤드의 독자 대다수가 이분화에서 발견했다고 믿는 바를 가장 명료하고 간결하게 표현한다.
나는 이분화와 이원론 사이에 근본적(radical) 차이가 있음을 단언함으로써 이 개념을 계승하는 다른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는 이분화에 대한 기존 해석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해석들이 이분화의 중요성을 축소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분화 개념이 진정한 힘(force)을 발휘하려면, 다른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 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세 가지 요소를 도입하려 한다. 첫째, 화이트헤드는 그의 저술에서 종종 이원론, 특히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언급하지만, 동시에 이분화와 그 구성 요소들, 그리고 그것이 근대성의 경험에 끼친 영향을 얘기하면서도 이원론과의 관계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만약 이분화가 정말로 이원론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고, 화이트헤드가 근대 과학의 발전에서 이원론의 구성적 역할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면, 왜 그는 어떤 식으로든 그 둘을 연결하는 일에 공들이지 않았을까?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이 두 문제가 화이트헤드에겐 너무나 다르게 보여서 굳이 그 구별에 대해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그 둘 사이의 차이가 명백하다고 봤던 것 같다. 둘째,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유일하게 가능한 관계는 전도의 관계다. 화이트헤드가 이분화와 이원론을 연결하는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를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 “데카르트와 그 후계자들의 손에서 부활한 철학은 그 발전과 더불어 과학적 우주론(자연의 이분화)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으로 모조리 물들었다.”[10] 이건 특히 중요한 언급으로 주의 깊게 독해할 가치가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분화를 이원론과 동일시하기는커녕, 데카르트적 이원론과 더 일반적으로 모든 이원론이 이분화에 관한 물음에 의존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자연의 이분화라는 우주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게 바로 데카르트 철학이다. 드물게 등장하는 이분화와 데카르트 철학 사이의 연관에 관한 이러한 언급은 화이트헤드의 입장을 명백하게 드러내지만, 그는 그 함의를 길게 풀어내지는 않았다. 셋째, 여기서 제시된 위 구절의 해석은 이분화가 궁극적으로 그것의 표현 중 하나에 불과한 이원론보다 훨씬 더 폭넓고 근본적인 개념을 개략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을 함의한다. 가장 직접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로 볼 때, 이 두 관념은 근본적으로 다른 실재들을 지시한다. 이분화는 차이화의 움직임(a movement of differentiation), 곧 과정(process)에 대한 사유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자연이 두 개의 뚜렷이 구별되는 가지들(branches)로 분기하는 궤적을 가리킨다. 위의 구절은 어떻게 이 분기가 일어났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걸 야기했는지에 대해선 훨씬 더 적게 얘기하지만, 이원론과 관련하여 일차적이며 결정적인 차이를 이미 지적하고 있다. 이원론이 실체들의 이중성 – 그것들이 어떻게 특징지어지든 간에 - 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된다면, 이분화는 그와는 전혀 다른 것, 즉 어떻게 단일한 실재인 자연이 두 개의 뚜렷하게 구분된 영역들(realms)로 나뉘게 되었는지를 가리킨다.
나는 자연의 이러한 분할을 설명하기 위해 “몸짓(gesture)”[11]과 “조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이분화의 특정한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물음은 자연이 진정 그 자체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속성들(attributes)을 가진 두 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여부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속성들의 차이화가 확립된 수단의 문제다. 자연에 대한 이원론적 비전에서 표현된 결과가 아니라 분할의 작동 방식(modus operandi), 즉 이러한 분할의 구성적 몸짓(gesture of the constitution)을 다루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분화의 기원은 사유와 연장, 정신과 물체, 실재적인 것과 외양적인 것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물체들(bodies) 그 자체의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 이분화는 일련의 질문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 의미를 획득한다. ‘자연적인 물체란 무엇인가?’, ‘그것의 성질들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물리적 물체와 생물학적 물체의 다수성에서 공통적인 특성들을 식별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 특성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상속받은, 근대적 자연 개념의 기원에 놓여 있는 물체의 제1성질과 제2성질 사이의 구분으로부터 제기된 질문과 동일하다.
물체의 성질들 사이의 차이를 가장 명확하게 진술하고, 화이트헤드의 이분화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는 데 있어 기초를 제공한 고전 텍스트 중 하나가 로크(John Locke)의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이다. 물론 로크의 이 저작이 그 문제를 발명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예컨대, 1666년에 출판된 보일(Robert Boyle)의 『입자철학에 따른 형상과 성질의 기원(The Origin of Forms and Qualities according to the Corpuscular Philosophy)』은 의심할 여지 없이 로크의 사유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 텍스트는 물체의 성질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핵심 사항을 담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건 이분화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당면한 과제는 이 개념이 어떻게 분산적으로 발명되었는지, 어떻게 이 개념이 실험적 실천과 그것에 개념적 표현을 제공한 텍스트 내에서 공고화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로크의 『인간지성론』, 특히 「단순 관념들에 관한 그 밖의 고찰(Some Further Considerations concerning Our Simple Ideas)」이라는 장은 이런 의미에서 전형적이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첫째, (이렇듯 물체들 안에 있는 것으로 고려되는 그러한 성질들은) 물체가 어떤 상태에 놓이든 물체들과 전혀 분리될 수 없는 주된 성질들(Primary qualities)이다. […] 나는 이 성질들, 즉 고체성, 연장, 형상, 운동 또는 정지, 수를 물체의 본래적인 또는 제1성질들(original or primary qualities)이라 부른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성질들이 우리 안에 단순 관념들(simple ideas)을 산출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사실상 물체들 자체에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 안에 물체들의 제1성질들, 즉 부피, 형상, 질감, 미세한 부분들의 운동에 의해 우리 안에 다양한 감각(sensations)을 산출하는 힘(power)이 있는 성질들이 있다. 색깔, 소리, 맛 등이 바로 이런 성질들이며, 나는 이것들을 제2성질이라고 부른다.[12]
이 구절에서 로크는 물체의 성질들을 두 개의 서로 다른 영역에 할당한다. 첫째, “물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제1성질이다. 여기서 ‘1차적’이라는 용어는 강한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성질들이 물체에 근본적이며, 물체의 가장 심층적인 실재를 규정한다는 걸 나타내기 때문이다. 제1성질은 물체가 겪을 수 있는 어떠한 변이에도 꾸며지지 않은 정화된 상태를 표현한다. 로크가 이 인용문에서 열거한 성질들, 즉 고체성, 연장, 형상, (수), 운동, 정지는 모두 물리-수학적 성질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자연적 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 자연적 신체란 곧 물리-수학적 성질 간의 특수한 절합(articulation)이다. 로크는 잘 알려진 예시를 제시한다. “밀알 하나를 가져다가 두 조각으로 나누어 보라. 각 부분은 여전히 고체성, 연장, 형상 그리고 운동성을 지닌다. 그것을 다시 나누더라도 여전히 동일한 성질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감지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나누어도, 나뉜 것들 모두는 각각 그 모든 성질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13] 밀알의 색깔, 특정한 질감, 그리고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느끼는 감각과 같은 현상적 변이는, 그것들과 연관된 제1성질들의 지위를 절대 훼손하지 않는다. 심지어 물체를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분할되어 더 이상 경험을 산출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러한 성질들은 특정한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비주관적인 측면이라고 불리는 것을 지칭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여전히 모든 물체 경험의 구성적 요소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러한 제1성질이 없다면 자연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이 단지 끝없이 이어지는 물질의 무의미한 야단법석일 뿐”[14]이라고 주장해야 하는 이유다. 이걸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적 접근 방식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의 유산은 여전히 현대 과학 안에서 발견된다. 화이트헤드가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말했듯이,
그러나 이 시기 전체에 걸쳐(지난 3세기 동안 줄곧) 하나의 과학적 우주론이 확고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이 우주론은 유동하는 배치들 속에 들어 있으면서 공간 전체에 퍼져 있는 환원 불가능하고 이성과 감정이 없는 물질(irreducible brute matter) 또는 질료를 하나의 궁극적인 사실로 전제한다. 그러한 물질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감각도 가치도 목적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그 자신의 본성에서 비롯되지 않는 외적인 관계가 부과한 고정된 루틴을 따라서, 자신이 하는 일을 할 뿐이다. 이 가정을 가리켜, 나는 “과학적 유물론”이라 부른다. 그리고 나는 이 가정이 우리가 현재 도달한 과학적 상황에 전혀 적합하지 않기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15]
그러므로 이분화에 대한 비판은 유물론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과 연결된다. 화이트헤드의 가장 독창적인 독자 중 한 명인 레이몽 루이예(Raymond Ruyer)는 화이트헤드가 비판하는 유물론에 대해 “기묘하고” 거의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제공한다. 루이예는 칼라일(Thomas Carlyle)을 떠올리며, 자연의 이분화의 상속자인 유물론자의 눈으로 본 법정을 상상한다. “그것은 기묘한 변태(metamorphosis), 일종의 발가벗겨짐을 겪는다. (...) 의미, 본질, 가치의 후광, 그 장면의 물질성을 변형시키지만 거의 간과되는 이 모든 것이 평범한 관찰자에게는 안개처럼 흩어진다.”[16] 유물론자에게 남는 것은 “일종의 복잡한 기계의 기능뿐인데,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에 완전히 주어져 있으며, 물질 조각들은 서로를 밀어낸다. 한 사람이 말한다. 그의 뇌 상태가 그의 말의 물리적 발화형식(formulation)을 통제한다. 공기의 진동이 신경계의 다른 요소들을 수정하고, 움직임 또는 움직임의 준비를 제어한다. 의도는 뇌의 현재 상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의도도 목적도 장면의 단계(the phases of the scene)를 인도하지 않는다.”[17]
루이예는 다른 가능한 경로, 다른 접근 방식과 방향을 도출하기 위해 물리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유물론적 경향을 희화화(caritcature)한다.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의 과학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은 그가 때때로 “유기체설(organicist)”[18]이라고 부르는 우월한 유물론에 대한 긍정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이분화로 되돌아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디드로(Diderot)나 스피노자(Spinoza)와 같은 사상가들의 철학과 관련이 있다.[19] 화이트헤드가 비판하는 유물론은 한편으로는 “감각 없고, 가치 없고, 목적 없는 물질”을 상정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정화된 물질에서 배제된 모든 성질을 넘겨받는 현상적 경험들 - 그러한 경험들에 마땅한 자리가 주어져야 하기에 –을 가정하는 유물론이다. 제1성질과 그에서 비롯되는 유물론은 모두 이른바 주관적인 요소들, 즉 어떻게든 자연적인 물체를 가리는 모든 감각, 가치, 존재 양태를 거부하기를 원한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다. 물체의 이러한 1차적 영역을 설정한 뒤, 로크는 그가 실제로 “제2-”라고 부르는 2차적 영역으로 넘어간다.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 그는 색깔, 소리, 맛 등과 같은 몇 가지 예시를 든다. 여기서 미묘한 논점를 지적하는 게 중요하다. 제2성질은 지각하는 주체가 경험되는 물체와 완전히 외재적이라거나 관련 없는 형태나 인상을 투사하는 것처럼 단순히 정신이 물체에 투사하는 것으로 기술되지 않는다. (앞서 등장한 법정의 예시를 떠올려보라) 바로 이것이 『인간지성론』에서 인용한 구절의 마지막에서 제시되는 어려움이다. 여기서 그는 제2성질이 “제1성질에 의해 우리 안에서 여러 가지 감각을 만들어내는 힘”[20]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썼다. 로크는 의존과 차이의 복잡한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제1성질이 변형되어 그에 대한 우리 경험의 다양한 측면을 형성하게 되는 지각 활동에, 정신은 분명히 관여한다. 하지만 정신의 능력(capacity)은 영향을 미치는 제1성질들의 힘(power)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요컨대, 제2성질은 제1성질과 근본적으로 구별되지만, 그것들의 한 측면으로서 그것으로부터 파생된다. 제2성질은 “정신적 첨가물”의 영역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을 구성한다. 유물론은 이러한 첨가물을 통해서만 주관적인 경험에 자리를 내줄 수 있다. “우리는 적절한 시간과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관성과 적절한 경도를 가지고 적절하게 운동하는 붉은 당구공을 지각합니다. 그러나 붉은 당구공의 붉음과 따스함, 세게 부딪치는 소리는 정신적 첨가물, 즉 정신이 자연을 지각하는 방식일 뿐인 제2성질입니다.”[21]
이분화의 맥락에서 정신적 첨가물 이론은 제1성질과 제2성질 사이에 연결고리를 확립할 수 있게 한다. 이 이론은 비현상적 성질들의 질서 안에 후자를 새겨넣음으로써 물체들에 대한 현상적 경험에 자리를 내주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직접적 경험(immediate experience)에서 우리는 물체의 힘에서 파생되었지만 정신에 의해 변경된 혼성적인 성질들만 접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보다 현대적인 용어로 우리는 앞서 제시된 예들을 다시 읽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지각에서 주어지는 것은 푸른색의 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의 성분으로 알고 있는 객체입니다. 정신적 첨가물 이론은 그 푸르름을, 지각하는 정신에 의해 채워지는 정신적 첨가물로 취급합니다. 그리고 자연에는 정신이 그러한 지각을 향하도록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분자들과 복사 에너지만을 남길 것입니다.”[22]
근본적인 것은 제1성질과 제2성질 사이의 구분이 밀알, 붉은 당구공, 푸른 풀, 법정과 같은 경험적인 기반각에서 시작하여 비지각적 성질과 전자(제1성질)의 파생물로 추정되는 주관적 성질을 구별하는 동시에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분화의 작동(operation)에서 핵심이다. 바로 여기에 이분화의 찰나가 위치한다. 이분화는 직접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그 경험을 두 가지 실존 체제(two regimes of existence)로 분할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게 하면서 이분화는 자연의 일차적인 경험을 구성하는 것들을 파생적인 현상 영역에 배치한다. 일단 이러한 이분화가 확립되고 두 가지 실존 체계가 안정화되며 주관적 경험이 부차적인 현상으로 여겨지면, 비록 제1성질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이 사실상 영구히 유예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지식은 당연히 – 제2성질만이 사실상 우리가 아는 유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 제2성질에 대한 지식을 파생하는 식으로 허용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물체 그 자체에 대한 지각을 탐구하는 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분화의 작동에서 파생된 모든 인식론의 근저에 있는 지식의 과정을 제2성질(단순한 외양)과 제1성질(순전히 추측되는 것) 사이에서 상관관계가 작동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게 가능해진다.
제가 반대하고 있는 이 이론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은 자연을 두 영역, 즉 알아차림(awareness)을 통해 포착된 자연과 알아차림의 원인인 자연으로 이분화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통해 포착된 사실로서의 자연은 그 안에 나무의 푸르름, 새들의 노래, 태양의 따뜻함, 의자의 단단함, 벨벳의 감촉을 담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원인으로서의 자연은 겉으로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알아차림을 낳도록 정신을 촉발하는 분자와 전자의 추측 체계입니다. 이 두 자연이 만나는 지점이 정신인데, 인과적 자연은 (정신에) 유입하고, 나타나는 자연은 (정신으로부터) 유출합니다.[23]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근대적 자연의 발명이 존재론적 입장, 즉 이원론적 입장이나 일원론적 입장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물체들을 자격화(qualification)하는 국지적인 조작(local operation)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인의 존재론은 물체들과 그것들의 성질들을 분할하는 몸짓을 영구히 반복하면서, 이 조작을 계속해서 감추려고 시도해온 방식을 포함한다. 요컨대, 이 존재론은 분할의 몸짓들, 기술들, 조작들을 전제한다.
이는 실험 장치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1608년에 출판된 노트들에서 갈릴레오(Galileo)가 기술한 경사면 발명은, 이분화의 기원에 있는 조작적 장치들이 훗날 그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이론보다 어떻게 우위를 점하게 되는지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스탕게스(Isabelle Stengers)가 『근대 과학의 발명(The Invention of Modern Science)』에서 썼듯이,
이 도식은 근대적 의미에서의 실험 장치를 나타내는데, 그 용어를 강한 의미로 사용해 갈릴레오가 저자(author)인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예의 사실들(facts of art)”을 산출하는 인위적이고 사전에 계획된 설정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이 장치의 특이성(singularity)은 이 장치가 그것의 저자가 물러나게 하여 운동이 그(저자)의 자리에서 증언하도록 허용한다는 점이다.[24]
따라서 그 장치는 운동을 설명하는 방식들 사이에 차이를 도입하는 기능을 하는, 서명과 날짜가 적힌 완전히 발명된 인공물이다. 그 장치는 직접 관찰한 것을 다른 스케일로 재현하지 않으며, 국지적인 현상을 일반화하거나 확대하지도 않는다. 실험 장치는 유사성, 정합성 또는 복제(reproduction)라는 모든 직접적인 관계를 단절한다. 그것이 단지 주장된(purported) 경험을 가시화하는 것만으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건 확실하다. 이 장치의 성공은 다른 곳, 즉 운동 자체의 증언을 위해 (그 장치의) 창조자를 퇴장시키는 데 달려있다. 이런 의미에서, “갈릴레오가 제안한 허구의 세계(fictive world)는 단순히 갈릴레오가 심문하는 방법을 아는 세계가 아니라, 그 누구도 그와 다르게 심문할 수가 없는 세계다. 그 세계는, 그의 실험 장치의 범주가 실용적(practical)이기에 범주가 되는, 그런 범주들로 구성된 세계다.”[25] 지금까지 이 문제를 정립해왔던 용례를 따르면, 실험 장치가 인공물을 구성함으로써 자연을 두 가지 갈래, 즉 운동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자연의 제1성질과 그러한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주어지는 자연의 제2성질로 자연을 이분화하는 동시에, 이러한 조작 방식의 구성된 특성을 지워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제1성질과 제2성질 사이의 이분화가 근대적 자연 경험의 구성적 조작이라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그러한 성질들에 대한 논쟁에 정당한 중요성을 부여하려는 최근 시도 속에 내 주장을 확고히 자리매김하도록 해준다. 예컨대, 퀭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는 『유한성 이후(After Finitude)』에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차이에 관한 논쟁이 쓸모없게 되었다고 개탄한다. “제1성질과 제2성질의 이론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시효를 상실한 철학적 과거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26] 이는 그 책에서 반복되는 주제로, 몇 줄 뒤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오늘날의 독자에게 그러한 구분은 근본적인 철학적 쟁점이 부재하는 스콜라적 형식주의의 교묘함으로 비춰질 수 있다.”[27] 나는 근대 경험의 구성에 관한 이 논쟁의 중요성에 대해서, 메이야수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앞에서 전개한 논의의 주된 목표는 물체의 성질들 사이의 이러한 차이가 중요하다는 걸 가능한 한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점에서 메이야수의 접근 방식과 거리를 두고 싶다. 첫째, 나는 성질들 사이의 차이가 폐기되었다거나 오랜 과거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인상이 곧 그것이 현대 사상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들었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오히려 그 구분은 현대 사상의 조건으로 명확히 남아 있다. 이러한 성질들 사이의 분할은 모든 존재론적 입각점(standpoint)이 정교해지는 데 앞서 경험의 모든 영역 안에서 암묵적으로 기능하며, 배경으로 남겨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이 구분의) “재활성화(rehabilitation)”가 의미가 있다면, 그건 결코 현대 사상 안에 괄호쳐져 있던 프로젝트를 되살리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면 이 구분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재활성화”는 오직 계보학적 의미만 지닐 뿐이다. 여기엔 이 몸짓과 조작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그것들이 내포하는 이론적, 존재론적 가정들을 더 잘 식별하는 일이 포함된다. 둘째, 메이야수는 “사유와 절대자의 관계”[28]를 쇄신하는 조건은 새로운 형태의 유물론에서 그것의 완전한 표현을 찾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이게 이러한 차이화의 현재 유산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때 그가 취하는 방향이다. 나는 이분화에서 생겨나는 유물론이 본질적으로 형식적인 것이라는 걸 입증하려고 했다. (이에 관한 논의는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룰 것이다) 그것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 형식을 순전히 조작적인 분할의 두 갈래 중 하나로 위축시키는 걸 포함한다. 이러한 조작들은 국지적인 효과들을 냈지만, 그것들을 더 일반적인 존재론적 형식으로 물화(reification)하는 것은 자연에 존재하는 실존 형식의 다원성이라는 근본적인 측면을 희생시켜야만 달성될 수 있다. 오늘날 제1성질과 제2성질 논쟁에 대한 명확하고 지속적인 분석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한, 유일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이러한 대립과 그로부터 파생된 자연 개념을 넘어서기 위해서다. 만약 새로운 유물론이 출현한다면, 그것은 이분화의 유산 안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데서 생겨날 것이다.
물질의 국지화
이분화는 그 뒤에 혼탁한 구역을 남기는데, 이는 이분화 자체의 작동으로 생겨난 것이다. 자연에 대한 모든 근대적 경험은 이러한 이분화 속에 거하며, 물체의 제1성질을 가리킨다. 이 제1성질들은 경험을 구성하면서도 경험에는 접근할 수 없기에, 이러한 자연적 물체들 자체에 대한 보다 상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이 제1성질이 그 자체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 혼탁한 구역에 의해 중심 무대에 놓이게 되고 극적으로 묘사되며 최대한으로 강화된다. 그러나 이분화는 물체들이 그들의 현상적 차원에서 분리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열어놓는다. 이분화의 작동은 물체의 성질들을 다양한 분야 – 물리, 생물, 사회 분야 – 로 분리하는 것을 영구히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계속해서 적절한 대답을 얻지 못하는 일련의 질문들로 되돌아간다. 제2성질들로부터 분리된 물체란 무엇인가? 우리는 오직 제2성질에만 접근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러한 물체를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떤 종류의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관찰 불가능한 성질들의 내부로 침투할 수 있게 해주는가? 앞서 제시한 해석에 따르면, 제1성질에 대한 특징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은 근대적 자연 개념의 약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개념의 강점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바로 이 어려움을 극적으로 각색하는 것이 이 근대적 개념을 구성한다. 근대 우주론의 구성 요소인 두 번째 조작에 적절한 무게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극단으로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다. 화이트헤드는 그것에 “물질의 단순 정위(simple location of matter)”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다. 이것이 자연적 물체들을 다루는 데 필요한 추상화들을 제공할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이를 설명하는 긴 구절을 인용해보자.
한 조각의 물질이 단순 정위한다는 말은, 그 물질의 시공간적 관계를 표현할 때, 그것이 공간의 유한하고 한정된 범위에 그리고 시간의 유한하고 한정된 지속 동안 위치한다는 걸 진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 물질 조각과 다른 공간 범위, 다른 시간 지속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 참조 없이도 가능하다. 또한, 이 단순 정위 개념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간의 논쟁과는 무관하다. 공간이나 시간에 관한 어떤 이론이든, 특정한 공간 범위와 특정한 시간 지속이라는 개념에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의미를 부여할 수만 있다면, 단순 정위 개념은 완벽히 명확한 의미를 갖는다.[29]
화이트헤드는 근대적 자연 개념에서 국지화 가능성, 즉 단순 정위를 가질 수 있음이 물질의 특성이라고 단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요지를 오해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 명제는 그보다 더 급진적(radical)이다. 물질은 오직 국지화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위 구절의 핵심 요소다. “근대적 경험에서 물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국지화 가능한 점”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의 정의이지만, 그 효과는 급진적이다. 왜냐하면 물질의 기원, 형식, 본성에 관한 질문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질문, 즉 “그것은 어디에 위치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이몽 루이예의 말을 빌려, “과학을 특징짓는 것은 (...) 그것이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에 관한 지식이라는 점이다.”[30]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마치 정신적 첨가물로부터 분리된 물체(the body)는 시공간에서 국지화 가능한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적 유물론은 물질과 시공간에 대한 정의의 순환성을 고려할 때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이게 물질을 국지화될 수 있는 요소로 환원시킨다. “공간과 시간 모두에 공통된 특징은 물질이 공간 내 여기에, 시간 내 여기에, 또는 시공간 내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걸 설명하기 위해 다른 시공간 범위들에 대한 어떠한 참조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완벽히 명확한 의미에서 그러하다.”[31]
여기- 와 지금- 의 다수성이 존재하며, 이는 물질의 구역과 그것을 우주의 다른 부문들로부터 분리하는 경계들을 정확히 구분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하나의 시공간은 그 자체로 충분하며, 다른 시공간들에 대한 어떤 참조도 필요로 하지 않다. 따라서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17세기의 응답은 다음과 같았다. “세계는 질료나 물질 - 또는 일반적인 물질보다 더 미묘한 것들을 포함하고자 한다면, 에테르와 같은 것 - 의 순간적 배열들의 연쇄다.”[32] 화이트헤드는 뉴턴 물리학을 이러한 우주론적 관점(outlook)의 가장 중요한 사례 중 하나로 꼽는다. “뉴턴 물리학은 각 물질 조각의 독립적 개체성에 기초한다. 각각의 돌은 다른 물질 부분에 대한 참조 없이도 너끈히 진술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그것은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 균일한 공간의 유일한 점유자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돌일 것이다. 또한 그 돌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어떤 참조 없이도 충분히 기술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현재의 찰나 안에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서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진술될 수 있다.”[33]
화이트헤드의 “단순 정위” 개념에 대한 비판은 근대성의 우주론을 이루는 세 가지 전제를 명확히 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으며, 이는 더 자세히 분석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전제는 물질은 오직 하나의 시공간만 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 이유는 이 전제가 단순 정위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순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국지화 양태, 즉 근대 사상에서 심오한 위치를 차지하는 속성을 묘사한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물질은 공간적으로 여기에, 그리고 더 나아가 시간적으로 지금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단지 공간적, 시간적 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자연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연은 모든 존재의 물체와 장소를 형성하는, 국지화 가능한 물질적 점들의 다수성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는 국지화의 첫 번째 전제를 거부하고, 물질의 단순 실존은 신화, 또는 더 정확히는 재앙적 결과를 초대한 추상화라고 말한다. 발(Jean Wahl)이 말했듯이, “순간들의 연쇄로서의 시간은 내가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것에도 상응하지 않는다. 나는 선 위의 점들의 연쇄, 또는 특정 미분 방정식에서 독립 변수의 값의 집합과 같은 비유의 도움을 받아서만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시간적 연장을 가진 자연의 지속이다. 현재는 그 안에 선행하는 것과 후행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선행하는 것과 후행하는 것 자체도 시간적 연장을 갖고 있다.”[34] 공간과 시간을 점과 순간으로 나누는 건 추상화 작업으로 인해 가능하며, 많은 경우에 유용하다. 그런데 그것이 일반화되어 물질 자체의 원리로 받아들여질 때, 무수한 난점과 잘못된 문제를 야기한다. 이 첫 번째 전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화이트헤드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대성 이론을 발전시키도록 이끌 것이다.
두 번째 전제는 물질의 다른 실존 양태들이 오로지 현상적이기만 하다는 것이다. 단순 정의가 자연의 이분화와 맺는 관계가 이 전제에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실재의 두 질서 간의 동일한 차이화 몸짓들이 여기서도 발견될 수 있는데, 이제는 더 기술적인 틀 안에 위치한다. 한편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국지화 가능한 점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속 기간, 물질의 존속, 그리고 존재의 변동과 강화와 같은 모든 파생된 형태들이 있다. 이는 정신적이고 현상적인 첨가물과 함께 다른 수준에서 재배치된 이분화이지만, 항상 단순 정위의 물질적이고 이성도 감정도 없는 실존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러한 축조물(construction)은 “상당히 단순하다. 그러나 이것은 실재하는 사물들 사이의 상호연관을 아예 무시한다. 그래서 각 실체적 실재는 다른 실체적 실재에 대한 참조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35]
세 번째 전제는 물질이 더 구체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이이야말로 과학적 유물론의 역설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에 대한 모든 설명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요구되는 물질의 궁극적 실재인 물질적 점들은 시공간의 형식화 없이는 사유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의 점을 위치시키고 하나의 순간(instant)을 설정하는 게 가능한가? 공간과 시간을 미리 또는 동시에 가정하지 않고 이러한 점과 순간이 성립될 수 있을까? 이 전제는 유물론과 형식주의 사이의 관계 중 한 측면을 보여준다.
(과학적 의미에서) 물질은 이미 공간과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특징들을 생각함이 없이 개체적 존재자(individual entity)의 벌거벗은 개념에 도달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사고의 단순한 절차에 불과한 것을 자연의 사실로 불러들이는 혼란을 야기한 것이 바로 이 거부입니다. 공간과 시간의 성질을 제외한 다른 모든 특성을 벗은 존재자는 자연의 궁극적 질감으로서의 물리적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그렇게 자연의 경로(the course)는 그저 물질이 공간을 거치며 모험하는 중에 겪는 운(the fortunes)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36]
시공간의 기하학적 형식들은 물질의 실재하고 구성하는 구조들이 된다. 루이예는 이 점을 탁월하게 요약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이제 유물론의 진수를 인지한다. 그것은 단순한 조작적 추상화를 최고의 실재로 간주하는 교리이며, 물질의 원자라는 이름으로 관계들의 종점(the endpoint)을 실체화하는 두 개의 장(fields) 사이의 상응이다.”[37]
위에서 제시한 해석에 따르면, 이분화는 그것을 완성시키고, 그것에게 형식적인 도구들을 제공하는 국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내가 개략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세 가지 전제는 이분화와 국지화 사이의 이 관계가 그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축들을 형성한다. 화이트헤드의 입장은 명확하다. “나는 우리의 직접적 경험(immediate experience)에서 파악되는 자연의 일차적 요소들(the primary elements) 가운데 단순 정위의 특성을 보유한 요소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38]
각주
*저자가 직접 인용하는 구절들 중 한글 번역본이 있는 경우엔 가능한 한글 번역본을 따라서 번역하려 했으며, 그중 일부 용어나 문구를 다듬어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아래 각주에서 *으로 표시한 내용은 드베즈가 인용한 자료의 또 다른 판본의 서지사항 및 페이지 또는 한글 번역본의 서지사항 및 페이지를 적은 역주다.
서론
[1] 이 주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Emilie Hache의 Ce à quoi nous tenons: Propositions pour une écologie pragmatique (Paris: Les Empêcheurs de penser en rond, 2011)을 참고하라.
[2] 순수하게 철학적인 분야를 넘어서, 나는 Conrad Hal Waddington의 The Strategy of Genes: A Discussion of Some Aspects of Theoretical Biology (London: George Allen & Unwin, 1957), Joseph Needham의 The Refreshing River (Nottingham, UK: Spokesman, 1943), 그리고 또한 Ilya Prigogine과 Isabelle Stengers의 La Nouvelle alliance: Métamorphose de la science (Paris: Gallimard, 1986)와 같은 저작들을 고려하였다.
[3]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Isabelle Stengers의 Thinking with Whitehead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를 참고하라.
[4] 이것은 내가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The Fold)』에서 라이프니츠의 접근법을 양식들의 철학(philosophy of manners)으로 설명한 것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스토아학파와 라이프니츠는 처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이후에는 데카르트의 본질주의(essentialism)에 반(反)하는 마니에리슴을 발명했다. 바로크를 구성하는 것로서의 마니에리슴은 당시에 스토아적 마니에리슴을 계승하여 우주로 확장했다. 사건의 세 번째 위대한 논리는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올 것이다.”(Gilles Deleuze, The Fold, London: Athlone Press, 1993, 53). 들뢰즈는 또한 라이프니츠의 『신인간지성론(New Essays on Human Understanding)』에서 발췌한 구절을 인용하는데, 라이프니츠는 “완전성의 종류(kinds)와 정도는 무한히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근본(foundations)은 어디서나 동일합니다. 저에게 있어 그것은 저의 철학 전체를 지배하는 근원적 공준(fudamental maxim)입니다. [...] 그러나 이 철학이 원천(resources)에서는 가장 단순하다면, [효과의] 종류에서는 가장 풍부하합니다”(The Fold, 150)고 썼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 프로젝트를 화이트헤드나 타르드(Tarde) 또는 루이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신-모나드론(neo-monadology)의 형태로 마니에리슴 철학에 위치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이찬웅 옮김, 2004, 문학과지성사, 101; 같은 페이지 각주 27.
**『신인간지성론 2』, 이상명 옮김, 2020, 아카넷, 372-373. (G. W. Leibniz, New Essays on Human Understanding, ed. Peter Remnant & Jonathan Bennet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19)
1장
[1] Alfred North Whitehead, The Concept of Natur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20] 1964), 7.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preface), x-xi
**『자연의 개념』, 안호성 옮김, 2025, 갈무리, 8.
[2] Alfred North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New York: Pelican Mentor, [1925] 1948), 17–18.
* 『과학과 근대세계』, 오영환 옮김, 2008, 서광사, 41-42.
[3]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
*『과학과 근대세계』, 43.
[4] Alfred North Whitehead, Modes of Though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8), 34.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38] 1968), 17.
**『사고의 양태』, 오영환·문창옥 옮김, 2012, 도서출판 치우, 47.
[5]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Preface, viii.
*『과학과 근대세계』, 10.
[6] Whitehead, Concept of Nature, 30.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21.
**『자연의 개념』, 52.
[7] Maurice Merleau-Ponty, Nature: Course Notes from the Collège de France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03).
[8] 예를 들어, Jean Wahl, Vers le concret: Etudes d’histoire de la philosophie contemporaine, William James, Whitehead, Gabriel Marcel (Paris: J. Vrin, 2010); and Jean Wahl, Les philosophies pluralistes d’Angleterre et d’Amérique (Paris: Empêcheurs de penser en rond, 2005)을 참고하라.
[9] Félix Cesselin, La philosophie organique de Whitehead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50), 21.
[10]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 이와 관련해서는 『사고의 양태』에서, 그중 주로 제3부 <자연과 생명> 강의7 "생명 없는 자연"에서 다른 간략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다.
[11] 나는 이 용어를 Gilles Châtelet의 작업, 그중에서 특히 Figuring Space: Philosophy, Mathematics, and Physics (Dordrecht: Kluwer, 2000)에서 가져왔다.
[12] John Locke,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London: Penguin Books, 1997 [1690]), book 2, chapter 8, 135.
*『인간지성론 Ⅰ』, 정병훈·이재영·양선숙, 2014, 한길사, 200-201.
[13] Locke,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35.
*『인간지성론 Ⅰ』, 200-201.
[14]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56.
*『인간지성론 Ⅰ』, 102.
[15]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8.
*『과학과 근대세계』, 42-43.
[16] Raymond Ruyer, “Ce qui est vivant et ce qui est mort dans le matérialisme,” trans. M. Halewood, Revue philosophique 116, nos. 7–8 (1933): 28.
[17] Ruyer, “Ce qui est vivant,” 28.
[18] 유기체주의에 관한 물음은 과학과 근대 세계에서 폭넓게 논의된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주의적 접근 방식이 현대 생물학 분야에 미친 영향에 대한 분석은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Crystals, Fabrics, and Fields(Berkeley, CA: North Atlantic Books, 2004)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 Isabelle Stengers, “Diderot’s Egg,” Radical Philosophy 144 (2007): 7–15.
[20] Locke,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book 2, chap. 8, §10.
*『인간지성론 Ⅰ』, 201-202.
[21] Whitehead, Concept of Nature, 42.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28.
**『자연의 개념』, 68.
[22] Whitehead, Concept of Nature, 29–30.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20.
**『자연의 개념』, 50-51.
[23] Whitehead, Concept of Nature, 31.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21.
**『자연의 개념』, 52.
[24] Isabelle Stengers, The Invention of Modern Science, trans. Daniel W. Smith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0), 84(강조는 원문을 따랐다).
[25] Stengers, Invention of Modern Science, 85(강조는 원문을 따랐다).
[26] Quentin Meillassoux, After Finitude (London: Continuum, 2008), 1.
*『유한성 이후』, 정지은 옮김, 2010, 도서출판b, 11.
[27] Meillassoux, After Finitude, 1.
*『유한성 이후』, 11.
[28] Meillassoux, After Finitude, 1.
*『유한성 이후』, 11.
[29]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58.
*『과학과 근대세계』, 106-107.
[30] Ruyer, “Ce qui est vivant,” 28–49.
[31]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50.
*『과학과 근대세계』, 93.
[32]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51.
*『과학과 근대세계』, 94.
[33] Alfred North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3), 200–201.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67), 156.
**『관념의 모험』, 오영환 옮김, 1996, 한길사, 255.
[34] Wahl, Vers le concret (2010), 133.
[35]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132–133.
*또는 (The Free Press, Paperback Edition, 1967), 169–170.
**『관념의 모험』, 224.
[36] Whitehead, The Concept of Nature, 20
*또는 (Cambridge Philosophy Classics edition, 2015), 13.
**『자연의 개념』, 38.
[37] Ruyer, “Ce qui est vivant,” 28–49.
[38]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58–59.
*『과학과 근대세계』,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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