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 Visions from the West and East
알란 맥팔레인(Alan Macfarlane) 번역: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파트 1. F. W. 메이틀런드: 근대 세계의 본성과 기원
4장 권력과 재산권
영국 봉건주의의 특이한 본성
영국이 유럽 대륙의 대부분 지역들과 분기했던 계몽주의 이론의 결정적인 시기는 10세기에서 15세기 사이였다. 이 시기는 유럽의 봉건주의가 점차 다른 무언가로 변모하던 고전적인 시기였다. 따라서 근대 영국 사회가 어떻게 출현했는지에 관한 메이틀런드의 해법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를 따라 영국 봉건주의의 본질과 특성, 그리고 그것이 대륙의 이웃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상당히 기술적인 논의를 통해 살펴봐야 한다. 이것은 비록 복잡하지만, 그의 분석의 핵심이다. 그는 이 섬에서 나타난 체제의 독특한 성격, 즉 중앙집권적이면서도 탈중앙화된 성격을 보여주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한다. 봉건적 유대의 일부를 논리적 극단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영국은 큰 결속력을 얻었고, 권력을 지방에 이양함으로써 유연성과 일정한 수준의 시원적 민주주의(proto-democracy)를 누릴 수 있었다. 이처럼 메이틀런드는 토크빌, 메인 등이 단순히 추측하고 개략적으로 다뤘던 것들을 자세히 설명한다.
메이틀랜드는 먼저 봉건주의를 정의하는 어려움에 대해 탄식했다. '봉건주의라는 단어 앞에 놓인 불가능한 과제는 어떤 단일한 관념으로 세계사의 매우 큰 부분을 재현하는 것, 즉 8세기 또는 9세기부터 14세기 또는 15세기에 이르는 모든 세기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을 설명하는 것이다.’1 그 결과는 혼란이었다. 메이틀런드는 이러한 상황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봉건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관계로의 소유권(ownership)의 기묘한 혼합이었다. 봉토(fee) 또는 은대지(beneficium)는
“왕이 자신의 영지에서 토지를 증여한 것(a gift of land)으로, 수증자(the grantee)는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특별한 의무를 지게 된다... 이렇게 창조된 권리를 표현하기 위해 일련의 전문 용어가 개발되었다. 수증자 또는 봉신(the feudatory holds)은 그의 영주, 즉 증여자의 토지를 보유한다(A tenet terram de B). 토지의 완전한 소유권(The full ownership, dominium)은 그대로 A와 B 사이에 분할된다. 혹은 봉신이 토지의 일부를 제3자에게 증여하여 그로 하여금 보유하게 할 수도 있으므로 A, B, C 사이에 분할될 수 있으며, C는 B의 것을 증여 받아서 보유하고, B는 A의 것을 증여 받아서 보유하는 식으로 무한히 분할될 수 있다.”2
메이틀런드는 '봉건주의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이 '서로 다른 몇몇 사람들이 다소 다른 의미에서 동일한 토지를 보유한다(holding)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했다.3 그러나 똑같이 특징적이고 필수적인 다른 요소들도 있다.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권력과 재산이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봉건주의는 단순한 토지 소유 체계일 뿐만 아니라 통치 체계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군사적 보유지(military tenure)의 도입'을 '봉건적 체제의 확립'이라고 보았지만, 사실 '장원 재판(seignorial justice)과 비교할 때, 군사적 보유지는 표면적인 문제일 뿐이며 뿌리 깊은 원인이라기 보다는 여러 효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4 그는 '봉건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사법권의 사적 소유(jurisdiction in private hands), 영주 법정(the lord’s court)'이라고 설명한다.5 권력과 재산, 공과 사의 통합은 메이틀런드의 다른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6
그의 정의 중 하나는 전체 인용할 가치가 있다. 봉건주의란
"주요 유대가 영주(lord)와 봉신(封臣, man) 사이의 관계로 이뤄진 사회 상태다. 이 관계는 영주가 (봉신에게) 제공하는 보호와 방어를, 봉신이 (영주에게) 제공하는 보호, 봉역(封役, service) 그리고 존경을 함의하며, 봉역에는 병역(兵役, service in arms)도 포함된다. 이러한 인격적 관계는 토지 보유라는 소유적 관계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 봉신은 영주의 토지를 보유하고 그 토지에 대한 대가로 봉역을 부담하며, 영주는 토지에 중요한 권리들을 가지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토지의 완전한 소유권은 봉신과 영주 사이에 나뉜다. 영주는 그의 봉신에 대한 사법권(jurisdiction)을 가지며, 그들을 위해 법정을 열고 봉신들은 그 법정에 출석할 의무가 있다. 사법권은 재산권(property)으로 간주되며, 영주가 그의 땅에 대해 갖는 사적 권리로 여겨진다. 국가 조직(The national organization)은 이러한 관계들의 체계이며, 그 정점에는 모든 이의 영주인 왕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그의 직접적인 봉신들, 즉 직접수봉자(tenants in chief)가 있고, 그들은 다시 봉신들의 영주가 될 수 있으며, 이렇게 최하위의 토지 보유자까지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법정이 영주의 봉신들로 구성되듯이, 왕의 법정도 그의 수봉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왕에 대한 헌법상의 통제권이 있는 한, 그 권한은 이들 봉신 집단에 의해 행사된다."7
메이틀런드는 영국의 '봉건주의'가 공통의 조상에서 비롯되었지만, 적어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고유하고 색다른 형태로 발전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봉건주의를 논할 때, ‘놀라운 유사성뿐만 아니라 엄청난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국가와 시대를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지금 봉건적 체계에 대해 말한다면, 프랑스의 봉건주의는 영국의 봉건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며, 13세기의 봉건주의는 11세기의 봉건주의와는 매우 다르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서 얘기해야 한다.’ 영국의 경우, ‘모든 국가 중에서 영국이 가장 봉건적이거나 가장 덜 봉건적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8 이 역설은 봉건주의를 측정하는 두 가지 핵심 기준이 있다는 점을 기억할 때 해결된다. 토지법의 측면에서 볼 때, 영국은 가장 완벽하게 봉건화된 사회였다. 모든 토지보유권이 봉건적이었다. 메이틀런드는 ‘봉건주의를 단순한 재산법으로만 본다면, 영국은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봉건화된 나라’라고 썼다.9 따라서 ‘노르만 정복으로 인해 이 나라에서는 이론의 한 부분이 일관성 있게, 전례가 없을 정도로 엄격하게 실현되었으며, 모든 토지가 토지보유권 이론의 테두리 안에 들어왔다. 영국의 물권법(real property law)은 봉건적 토지보유에 관한 법이 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자유로운 세습사유지의 소유자(allodial owner)를 발견할 수 있지만, 영국에서는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다.’10 예를 들어, ‘영국에서 통용된 절대적이고 타협 없는 장자상속제의 형태는 일반적인 봉건주의가 아니라, 왕이 가장 강력한 봉신들의 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봉건주의에 속하는 것이다...’11 따라서 토지보유권의 측면에서 영국은 가장 봉건적인 사회였다.
반면에 공법 및 사법과 정치 권력의 더 중요한 영역, 즉 정부 측면에서 영국은 독특한 방향, 즉 국가의 해체가 아니라 일정 수준의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향해 나아갔다. 메이틀런드는 '우리의 공법(public law)은 봉건화되지 않았다. 봉건주의의 힘은 모든 방향에서 다른 사상에 의해 제한되고 억제되었다. 영국인의 공적 권리와 공적 의무는 단순히 봉신과 영주 사이의 봉건적 계약의 결과물로 간주되지 않으며 간주될 수도 없다'고 지적한다.12 메이틀런드는 공적 봉건주의(public feudalism)의 이러한 제한이 지닌 주요 특징을 개괄한다. ‘무엇보다도, 토지보유권의 유대 외에는 봉신들 사이에 어떠한 정치적 유대도 없다는 것이 결코 법이 된 적이 없었다... 어느 중간 영주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충성을 바치더라도, 봉신은 자신의 주군인 왕에게 진 신의(信義, the faith)를 명시적으로 남겨 두었다."13 따라서 자신의 영주를 위해 왕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그의 봉건적 의무(duty)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반역을 범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강력한 신하들은 이 체계로부터 정당성을 얻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이 너무 중요하기에, 메이틀런드는 그걸 다양한 방식으로 정성 들여 설명했다.
‘영국법은 어떤 사람이든 그의 영주를 위해 싸울 의무가 있다는 걸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군사적 봉역에 의해 봉토를 보유하는 하위 봉신(sub-tenant)은 그의 토지보유권에 의해 결속되어 있는 한 왕을 위해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 또한, 주군의 깃발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으며, 오직 나라의 군대에 속했을 때만 그렇게 한다. 그에게 영주의 다툼에 동참해야 할 의무는 전혀 없으며, 특히 왕과의 분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적 전쟁은 결코 합법화될 수 없으며, 그건 범죄이자 평화 위반이다.’14 ‘봉신은 자신의 영주가 내린 명령에 따라 대단한 인물(왕)에게 ‘맞설’ 수 없다… ‘중죄(felony)’를 범하지 않고는 그럴 수 없다.’ 메이틀런드는 ‘말하자면, 보통법(Common law), 왕실법(royal law), 국법(national law)은 봉건주의의 성채 그 자체를 차지해왔다’고 썼다.15 메이틀런드는 이것의 모든 특이성을 드러내기 위해선 ‘프랑스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며 '프랑스에서는 정당한 싸움에서 가신(the vassal)은 직속 영주를 따라야 하며, 심지어 왕에 대항하는 것일 지라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 명확히 법으로 간주되었다'고 설명한다.16 영국에서는 '왕 외에는 누구에게도 군사적 봉역을 질 수 없으며, 이게 바로 영국 봉건주의를 프랑스 봉건주의와 매우 다른 것으로 만든 것'이었다.17
이 핵심적인 특징을 가능하게 하고 이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다른 차이점들이 있다. 영국에는 왕을 위한 대안적인 군대가 존재하며, 이는 왕이 봉건적 수봉자(feudal tenants)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걸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왕은 군사적 봉역(military tenures) 덕분에 군대를 공급받았으나, 봉역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은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게 법이 된 적은 결코 없었다. 셰리프(the sheriffs)[1]가 지휘하는 국가의 군대(national force)라는 오래된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왕의 관리들 아래에 평민(the common folk)으로 구성된 이 조직은 항상 봉건주의의 군사 체제에 대응해 평형추의 역할을 맡았고, 왕에게 철저히 복종했다.’18 중앙 권력의 또 다른 힘의 원천은 ‘조세가 봉건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메이틀런드는 ‘한동안 왕은 영주의 개입 없이도 나라에 조세를 부과하고, 하위 봉신들에게 세금을 걷고, 인민 대중과 토지, 재화를 직접 징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했다'고 말한다.19 따라서 왕은 군대이나 자금 면에서 강력한 영주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다.
또한, 조언을 구할 때도 전적으로 영주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왕의 법정(Curia Regis)은 ‘절대로 봉건적인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누구든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왕의 권력은 컸다.’20 마지막으로, 왕은 사법적 권력을 자신의 직신(直臣, the barons)들에게 위임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법 행정은 결코 완전히 봉건화되지 않았다. 옛 지방 법원들은 생존했으며, 그것들은 봉건적 입법기관이 아니었다.’21 그 결과, ‘봉건 법정의 사법권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형사 사법권은 왕의 명시적 허가가 없는 한 존재할 수 없었으며, 대체로 왕은 그러한 허가를 내리는 걸 꺼렸다. 실제로 어떤 영주도 유럽 대륙에서 매우 낮은 수준의 사법권으로 간주되는 것 이상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22 왕은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서 ‘자신의 사법권을 급속히 확장했다. 13세기 중반 이전에 그의 법원은 사실상 전국의 1심 법원이 되었고, 헨리 2세 이후론 왕의 순회 재판관들(itinerant justices)이 전국에 보통법을 전파했다'23.
이렇게 해서 모순이 해결된다. 봉건적 유대 관계의 한 측면, 즉 각 개인이 토지보유권과 권력의 측면에서 자신 위에 있는 인격과 연결되어 있다는 관념을 논리적 한계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영국의 체계는 특유한 무언가로 발전했다.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의 프랑스 봉건주의 모델을 기준으로 하면, 영국은 가장 덜 봉건화된 나라였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영국은 최고위 영주(the chief lord)에게 토지 보유와 사법(司法, justice), 권력이 모두 극도로 집중되어 있는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봉건 사회였으며, 다른 봉건적 체계들은 권력이 너무 많이 분산되어 있어서 결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한 견해다.
메이틀런드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봉건제의 중요한 요소는 대부분 노르만 정복 이전의 영국에 이미 존재했으며, 특히 친족과의 출생 관계보다 영주와의 계약 관계가 더 우위에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다가 노르만 정복 이후 약 1세기 동안 실질적인 군사적 토지보유권 체제가 존재했다. ‘대략적으로 말해, 군사적 토지보유권 제도가 실질적으로 군사적 성격을 띤 것은 한 세기(1066-1166년) 동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24 같은 기간에 강력한 지방 법원들이 존재했다. 이 시기는 훨씬 더 중앙집권적이었으나, 영국과 프랑스의 '봉건주의'가 가장 비슷해 보였던 때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 체계는 앞서 설명한 것으로 멀어져 갔다. 늦어도 1266년경에는 ‘우리가 봉건적이라고 부르는 군사 조직은 이미 붕괴되었고, 더 이상’ 왕실을 위해 ‘군인이나 돈을 제공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25 마찬가지로, 군주를 위한 별도의 법정이라는 봉건적 원칙을 회피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들이 사용되었다.26 ‘왕의 신하인 봉신들이 왕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법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가장 중요한 종류의 사법이 되어, 나라의 가장 먼 구석까지 도달한다.’27 모든 것이 중앙집권적 법에 의해 스며들었으며, 법은 토지보유권이라는 특이한 개념, 즉 비혈연적 관계에 의해 무언가 또는 다른 것을 보유하는 계약 관계를 통해 스며들었다. 따라서 ‘중세에는 토지법(land law)이 모든 공법의 기초가 되었고 ... 사법 체계는 토지보유권의 영향을 받았고, 의회 체계도 토지보유권의 영향을 받았다'28.
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은 퍼즐의 중심에 정치적-경제적 관계들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만약 영국이 서유럽에 국한된 독특한 뿌리 위에 특이한 형태의 중앙집권적 봉건주의를 발전시켰다는 메이틀런드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그의 지적 선구자들 대부분이 직면했던 문제의 열쇠를 발견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영국의 친족 관계와 재산권
마르크 블로크는 로마 멸망 이후 서유럽에서 봉건주의가 발전한 것은 유별나게 유연하고 '약한' 친족 체계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친족 유대가 ‘그 본질상 봉건주의의 특징인 봉신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고 썼다.29 서유럽에서 친족의 ‘상대적 약점’은 ‘봉건제가 존재했던 이유를 설명한다.'30 또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친족 관계가 충분하지 않았을 때 봉건 관계가 제대로 발전했다'31 블로크의 가설은 메이틀런드의 앞선 설명에서 충분히 예견된 바였다.
메이틀런드는 헨리 메인 경의 연구 사례와 같이, 당시 인류학계의 정설이 튜턴족을 포함한 모든 사회가 부계 친족(agnatic kinship), 즉 남성 혈통을 통해 계보가 이어지는 시기를 거쳤으며, 이는 강력한 씨족(clans) 또는 인류학자들이 단선 혈통 집단(unilineal descent groups)의 형성으로 귀결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32 그러나 타키투스(Tacitus)의 기록과 앵글로색슨족의 법령 및 기타 자료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이러한 진화 순서를 뒷받침하지 않았다. 메이틀런드는 먼저 13세기에 쓰인 브랙턴(Henry de Bracton)[2]의 원전으로 돌아가서, 오늘날 영국에서 사용되는 것과 동일하게 가계도를 남성과 여성 모두의 방향에서 규명하는 작업을 시작했다.33 그런 다음, 앵글로색슨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분석을 진행했다. 그는 ‘고대(Antiquities)’를 다룬 한 섹션에서 양성(兩性)을 활용해 가계의 유래를 따져 봄으로써 앵글로색슨의 친족 관계가 부모 양쪽의 가계로 이뤄졌거나(bilateral) 같은 혈족으로 이뤄졌으며(cognatic), 그러므로 정치적 및 법적 행동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배타적 집단 또는 씨족의 형성이 불가능했다는 걸 입증하였다.
그는 가장 초기의 규칙들을 보면, 피의 복수에 관한 배상금(the blood-feud payments)[3]을 나눠 갖는 사람들이 ‘일부는 아버지를 통해 그와 관련된 사람들로 구성되고, 일부는 어머니를 통해 그와 관련된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개념에 비춰볼 때, ‘자녀를 아버지의 형제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형제와도 연결’시키기 때문에, ‘상호 배타적인 씨족 체계는 각 씨족이 엄격하게 근친혼을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해당 대목의 각주에서 ‘영국에는 씨족이 없다’고 명시했다.34 따라서 ‘우리는 씨족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영국법은 열거하고 명명할 수 있는 상호 배타적인 단위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많은 ‘피의 복수가 가능한 집단들(blood-feud groups)’이 존재하기 때문이다'35 그러한 집단은 정치-법률 체계의 토대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기록되지 않은 초기의 역사가 어떠하든, ‘분명해 보이는 것은 우리 종족에게 ‘부권’이나 ‘모권’의 배타적 지배는 역사의 극한 너머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36 그는 가부장적 가족 또는 부계 가족의 부재는 기독교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그것이 출현하는 건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37 영국에서 보존된 남성과 여성 양쪽 계보를 통해 혈통을 추정하는 게르만적 방식은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도 후기 로마 제국의 특징인 남성 계보만을 통해 추정하는 방식과는 매우 달랐다.38
2년 후 메이틀런드는 앵글로색슨의 친족 관계가 정치적 충성(political allegiances)의 기반이 될 수 없다는 자신의 핵심 결론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로마 제국이 멸망했을 때 영국에 정착한 사람들은 친족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피의 복수라는 신성한 유대로 사람들(men)을 하나로 묶는 게르만의 친족 체계는 아버지를 통해, 그리고 어머니를 통해 혈연이 유래될 수 있기에, 지역 거주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친족에 대한 피의 복수’를 허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촌락 공동체는 부계 씨족(gens, 남성 혈통에 기반한 집단)이 아니었다. 피의 결속은 신성했지만, 게르만인들은 상호 배타적인 씨족으로 묶이지 않았다.’39
이후에 여러 인류학자들이 확인했듯이, 앵글로색슨족이 기록된 역사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즉 기원후 1세기에 대한 타키투스와 카이사르의 기록에서 앵글로색슨족은 남성과 여성의 혈통에서 동시에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40 따라서 블로크가 주장한 것처럼 친족 관계는 법적, 정치적 체계의 토대로 작용하기에는 너무 약하고 파편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시원적 봉건제(proto-feudalism), 순회 판사(travelling judges) 및 기타 장치들을 통해 정교한 대안을 개발했다.
따라서 친족 관계는 정치적 기반을 제공하지 못했고, 메이틀런드와 블로크 모두가 주장한 것처럼 그 약점은 법원과 근대적 영토 국가가 '봉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러허한 친족 관계의 기묘하게 파편화된 본성은 경제에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에 잇따라 우리가 거칠게 '상업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특이한 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가 '소농 사회'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농업 체계에서 재산법의 본질은 가족과 토지 재산권 간의 연결이다. ‘가내 생산 방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은 부모와 자녀의 공동 소유(co-ownership)를 기반으로 한다. 한 가족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생득권(birthrights)을 갖는다. 그들은 공동 소유자이자 법인 집단(corporate group)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상속권을 박탈' 당할 수 없다. 마르크스와 베버가 옳게 주장했듯이, 부모나 자녀가 각각 독립된 권리를 갖는 사적 소유권(individual ownership)의 부상은 근대 자본주의적 재산 관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흔히 15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족주의적 재산권이 파괴된 것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모든 상품 소유자가 자신의 상품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을 토지 소유자도 토지에 대해 할 수 있다는… 법적 견해는... 오직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한 근대 세계에서만... 생겨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봉건적 토지 재산권, 씨족 재산권, 소농 재산권'을 근대의 개인주의적 소유권으로 전환시킨다.41
메이틀런드의 작업은 가족주의적 소유권의 놀라운 부재를 보여준다. 자유보유 재산권(freehold property)[4]과 관련하여 메이틀런드는 ‘13세기에 단순 소유권(fee simple)을 가진 소작인은 살아 있는 존재들 간의(inter vios; between the living) 계약 행위에 의거해 자신의 토지 전체를 양도함으로써 자신의 상속인이 될 사람을 실망시킬 수 있는 완벽한 권리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 법은 ‘Nemo est heres viventis(살아있는 사람에게 상속자는 없다, 누구도 살아있는 사람의 상속인이 될 수 없다'라는 격언을 잘 이해하고 있다.'42 실제로 그는 ‘사람들이 13세기 중반에는 그러한 권력(즉, 유언으로 부동산을 남길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순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43 비록 글랜빌(Ranulf de Glanvill)이 상속인을 위한 다소 모호한 안전 장치를 마련했지만, 13세기에 브랙턴은 그걸 생략했고 왕의 법원(the King’s courts)은 부모 재산의 일부에 대한 자녀의 청구를 지지하지 않았다. 13세기와 16세기 사이의 유일한 주요 변화는 1540년 유언장 법령(Statute of Wills)[5]에 따라 아버지가 생전에 매각하거나 증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언으로 자신의 미망인에겐 갈 수 없었던 자유보유 부동산의 3분의 2를 그녀에게 남김으로써 자신의 상속인(heirs)에게 완전히 상속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모든 자유민은 자신의 토지와 소작지 또는 그 일부를’ 교회나 다른 영구적인 재단들에 매각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매각하는 것은 합법적이다’라고 명시한 1290년 토지 거래에 관한 법령(Statute of Quia Emptores)에서 정식화되고 있었다.44 이 중요한 대목에서 영국 보통법은 대륙법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메이틀런드가 말했듯이, ‘상속인의 동의가 없이 자유롭게 양도하는 것이 장자 상속의 흔적 속에서 등장할 것이다. 우리 영국법을 가장 가까운 친척인 프랑스 관습과 구별시켜주는 이 두 가지 특징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상 상속인의 권리가 점차 가계의 구속(the restrait lignager; restraint of the line)이라는 형태를 띠었다. 토지 소유자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예상 상속인의 동의 없이 토지를 양도할 수 없으며, 그러한 경우에도 상속인에게 매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45
따라서 영국 관습법에 따르면, 자녀는 생득권이 없으며 빈털터리로 남겨질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상속권 박탈(disinheritance)’의 문제가 아니었다. 16세기의 살아 있는 사람에겐 상속인이 없으며 완전한 유류분이나 재산권이 있었다. 유일한 제한사항은 생존해 있는 동안 그의 아내가 부동산의 3분의 1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아들들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어떠한 권리도 가지 않으며,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공동 소유자가 아니었다. 16세기에 자유보유 부동산의 경우엔 자녀에게 자동으로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다. 장자 상속의 관습이 장남에게 다른 자녀들보다 더 큰 권리를 부여할 순 있었지만, 결국 장남조차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한, 한사상속(限嗣相續, entail)[6]이라는 인위적인 장치에 의해 상속자가 공식적으로 명시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이러한 한시상속 제도조차도 아주 쉽게 무효화될 수 있었다.46 그 결과, 17세기에 체임벌린(Edward Chamberlayne)이 언급했듯이, ‘아버지들은 상속되지 않은 모든 재산(유산, Estates)을 자녀들에게서 떼어내어 어느 한 자녀에게만 줄 수 있었다'47
‘자녀들은 부모의 비자유보유 재산(nonfreehold property)에 대해 더 강력한 권리를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48 메이틀런드가 주장한 바와 같이, 영국에서 가계의 구속(restrain lignager), 즉 자녀는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자녀들의 재산을 처분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관습이 없었다는 점이 이를 잘 드러낸다. 이러한 제약의 부재는 메이틀런드의 여러 구절에서 확인된다.49 그는 이 고유한 특성을 의아해했지만, 그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50 설령 제약이 있었다고 해도, 토지를 가족 내에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51
상속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러한 기이함의 또 다른 측면이었다. 메이틀랜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헨리 3세의 치세 말기(즉, 1270년대)에 상속에 관한 보통법은 빠르게 그 최종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 주요 골격은 우리에게 여전히 친숙한 것들이었으며, 그 중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상속을 요구할 수 있는 첫 번째 부류는 사망자의 직계 자손들이며, 다시 말해 그가 ‘그의 몸의 상속인(heir of his body)’을 남기지 않으면 다른 누구도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52
이것은 조숙해 보일 수 있지만,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메이틀런드가 깨달은 것은 이게 더 광범위한 친족의 상속권을 배제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친족을 남기지 않더라도, 내 아버지나 어머니, 더 먼 조상도 나의 상속인이 될 수 없다...’53 우리에게는 ‘윗사람은 상속할 수 없다는 기묘한 신조'가 있는데, 상속은 사회적 중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만 흘러야 한다.54 예를 들어, 형제들은 서로의 상속인이 아니었다. 자녀가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직계 조상이 (재산을) 처분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다. ‘상속인은 혈통에 근거해 조상이 처분하지 않고 남겨둔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조상이 양도(또는 처분]한 것에 대해선 요구할 수 없다.’55
따라서 메이틀랜드는 가족과 토지 사이의 강한 연결 고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장원의 영주가 가하는 어떠한 제약도 찾지 못했다. 그는 초기 강연들에서 ‘우리는 영국법에서 소작인이 양도를 할 때, 영주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조문을 찾을 수 없다... 왕실 판사(the royal judges)들도 모든 법률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양도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56 그는 『영국법의 역사』에서 이러한 견해를 확고히 하면서, 가족 소유권이라는 중요한 물음과 관련해 영국은 개인주의적 재산권 체계를 보존한 반면, 대륙에서는 이것이 포기되고 포기하고 재산권과 영주권이 성장했음을 설명한다. 메이틀런드는 영주와 관련한 제한 사항에 대해, ‘봉건적 임차인(the tenant)은 영주의 이익을 심각하게 손상시키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합법적으로 할 수 있다’면서, ‘그는 합리적인 증여는 할 수 있지만, 불합리한 증여는 할 수 없었다. 증여의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the gift)은 영주의 법정에서 판단할 문제이며, 봉건적 임차인은 그의 동료들의 판결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메이틀런드는 이 체계가 ‘다른 나라들을 고려할 때... 소작인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노르만 정복이 한동안 ‘토지의 자유 거래’에 유리한 지형을 조성했을 것'임을 시사한다.57 여기서 중요한 건 13세기 전반에 영국이 대륙과 분기하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만약 영국의 법률가들이 영주의 권리 요구에 귀를 닫고 있다면, 그들은 또한 친족의 권리 요구에도 귀를 닫고 있다. 그때 노르망디와 다른 국가들에선 영주의 권리 요구와 장래 상속인의 권리 요구가 새로운 판례들을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 결과를 우리 왕실 사법 체계의 조숙한 성숙 때문이라고 하든, 아니면 우리의 민족적 성격에 깊이 뿌리 박힌 어떤 원인 때문이라고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영국법이 봉건적 제한(retrait feudal; feudal restraint)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한 가계의 구속도 알지 못한다.”58
이 중요한 구절은 거대한 분기를 요약해서 보여준다. 비록 일부 비평가들이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든, 메이틀런드의 논의를 우회할 방법은 없다.59
위의 구절들에서 메이틀런드는 노르만 정복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논의를 펼친다. 약 1066년에서 1200년 사이에 영국과 대륙의 많은 지역에서 토지가 영주와 가족의 지배에서 분리되었다. 나중에 그것들은 대륙에서는 통합되었지만, 영국에서는 통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이렇게 매우 특이한 체계가 어디에서 기원했냐는 것이다. 11세기에 새롭게 생겨난 것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뿌리를 둔 것일까?
메이틀런드는 ‘우리가 ‘가족 소유권’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자녀가 출생 시 또는 어쩌면 청소년기에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땅에 대한 권리를 취득하는 것이다. 어쨌든 자녀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땅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는 데, 그건 증여(gift), 유증(bequest), 상속(inheritance) 또는 근대 법에서 알려진 어떤 법적 권리(title)에 의한 것이 아니다’고 설명한다.60 그는 영국과 서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그러한 권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로마 제국이 멸망했을 때 서유럽을 정복한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록을 보면, 이미 재산권을 개인에 속한 것(belonging)으로 취급하였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타키투스는 로마 독자들에게 게르만인들은 유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에게는 무유언 상속(intestate succession) 규칙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규칙은 개인주의적이었다. 즉, 한 사람의 죽음을 단순히 공동 소유 집단을 구성하는 인격들의 수가 줄어든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소유자가 죽음으로써) 자유로워진 부를 사망한 자와 서로 다른 정도의 관계들을 맺고 있는 인격들로 구성된 어떤 몸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친족들은 계급별로 상속의 부름을 받았으며, 처음에는 자녀, 그 다음에는 어머니, 그리고 형제, 삼촌 순이었다. 살리카 법전(Lex Salica)[7]에는 무유언 상속에 관한 법률이 있다. 그에 따르면, 자녀, 어머니, 형제 자매, 그리고 어머니의 자매 순으로 상속의 부름을 받는다. 이러한 규칙들은 이동 가능한 재화(동산)에만 적용되고 토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게 존재했더라도 아직까지는 새로운 것이었던 때에, 동산의 승계에 대한 개인주의적 법률이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면, 우리는 모든 종족의 역사에서 ‘가족 소유권’이라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상당히 신중할 필요가 있다. 가족이 토지를 영구적으로 점유(possession)하게 되었을 때, 가족은 이미 무유언 상속 규칙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그건 함께 거주하는 집단 내에서 ‘내 것(mine)’과 ‘네 것(thine)’이 존재했다는 걸 암시한다.”
그것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나타났다.
영국의 앵글로색슨 시대에 대한 증거 또한 흥미로운데, 그에 관해 메이틀런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제 앵글로색슨족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들 사이에 ‘가족 소유’라고 불릴 만한 어떤 것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이론을 입증할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법률, 헌장, 소송 기록 어디에서도 토지가… 가족, 가구, 또는 이와 유사한 친족이… 소유하고 있다는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가 종종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진 가족(familiae)에 대해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은 특히 주목을 끕니다. 그러나 그때의 가족은 친족 그룹이 아니라 수도사나 성직자의 수도원이다.’62 그러나 더 나아가,
"법령(doom)과 토지 대장에는 일반적으로 가족 소유의 잔재로 간주되는 특징들이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노르만 시대에 조인된 봉토 수여 증서(a charter of feoffment, 즉 개인에게 지대나 수수료를 수취할 권리를 부여하는 문서)를 얻는다면, 증여자의 장래 상속인이 증여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발견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앵글로색슨 시대의 토지 대장을 보면, 상속인의 동의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해제 조항(The denunciatory clause)에서 상속인이 언급될 수 있으며, 그 조항은 상속인이 증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그들을 파문할 것이다. 그러나 해제 조항은 일반적으로 수증자의 공인된 법적 권리를 공격하는 모든 사람과 개인을 저주할 것이며, 어떤 이유로든 양도 증서(conveyance)에 결함이 있는 경우 상속인들이 토지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법체계에서든 수증자는 다른 사람들 보다 증여자의 상속인을 더 두려워할 것이다. 때때로 여러 명의 공동 소유자가 함께 증여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사망한 자의 모든 아들이 아버지가 남긴 토지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경우를 고려할 때, 그에 부합하는 사례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드물다. 공동 소유와 공동 상속(co-parcenary)은 항상 존재해왔다. 우리는 그 존재를 13세기에도, 19세기에도 확인할 수 있다. 놀라운 건 그러한 경우가 앵글로색슨 시대의 토지 대장 보다 9세기와 10세기의 토지 대장에서 더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63
물론 장래 상속인들은 자신들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땅을 되찾으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도 메이틀런드는 19세기보다 앵글로색슨 시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더 큰 권력이 있었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노르만 정복 이전에 사망자의 상속인은 자신이 양도했던 땅이나, 상속인이 자신에게 양도했다고 부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으로부터 땅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가끔 있었다. 13세기에는 자주 그런 일이 벌어졌고, 오늘날에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현재는 어떤 사람의 장래 상속인은 그 사람이 살아있는 한 그의 증여에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13세기에도 행해지지 않았고, 정복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64 메이틀런드는 ‘가족 소유권에 관한 마지막 언급’에서 조심스럽게 결론 내렸다. ‘우리가 주장하는 결론은 오직 하나다. 현재 우리가 가진 지식에 비춰볼 때 ‘가족 소유권’, 즉 강력한 형태의 ‘생득권’이 한때 영국에서 널리 통용된 제도였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자료들을 근거로, 우리에게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65 제가 아는 한, 메이틀런드의 견해가 반박된 적은 없다.
메이틀런드는 전체적인 개요를 제시한다. 개인 소유권은 가장 이른 기록인 타키투스의 문헌에서부터 원칙이었다. 물론 상속의 규칙이 존재했지만, 그건 재산을 '소유한’ 살아있는 사람이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권력을 제한하지 않았다. 이렇게 매우 특이한, 비-가내 생산 방식(non-domestic mode of production)은 5세기부터 12세기까지 북서부 유럽 대부분에서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 그 방식은 대륙 전역에서 친족과 영주들의 압력 하에 장원과 가족 재산권으로 전환되었다. 오직 영국에서만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나중에 영국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재산권 체계의 토대가 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과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국경이 없는 영국이라는 섬에서 세력 균형이 달랐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겨났다. 따라서 메이틀런드는 모든 사회가 거쳐야 하는 일련의 필수적인 발전 단계, 즉 가족 재산권에서 개인 재산권으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기존에 통용되던 견해에 다시 한번 도전했다.
4장 각주
1 Maitland, History, I, 67.
2 Maitland, Constitutional, 152, 153.
3 Maitland, History, I, 237.
4 Maitland, Domesday Book, 258
5 Maitland, History, I, 68.
6 Maitland, History, I, 230.
7 Maitland, Constitutional, 143–4.
8 Maitland, Constitutional, 143.
9 Maitland, History, I, 235.
10 Maitland, Constitutional, 163–4; 자유로운 세습사유지의 재산권(allodial property)은 절대적 소유권(absolute ownership)을 갖는다.
11 Maitland, History, II, 265.
12 Maitland, Constitutional, 164.
13 Maitland, Constitutional, 161.
14 Maitland, Constitutional, 161.
15 Maitland, History, I, 303.
16 Maitland, Constitutional, 162.
17 Maitland, Constitutional, 32.
18 Maitland, Constitutional, 162.
19 Maitland, Constitutional, 162.
20 Maitland, Constitutional, 163.
21 Maitland, Constitutional, 162.
22 Maitland, Constitutional, 162–3.
23 Maitland, Constitutional, 163.
24 Maitland, History, I, 252–3.
25 Maitland, History, I, 253.
26 Maitland, History, I, 172; 예를 들어, 12세기의 침탈부동산점유회복(novel disseisin)에 대한 중앙집권적 재판과 부동산상속점유회복에 관한 소송(the assize of mort d’ancestor)이 있다. Maitland, History, I, 146–8.
*26번 각주에 대한 역주: 여기서 메이틀런드가 언급하는 두 가지 종류의 소송은 중세 영국의 중요한 사법 절차들에 속한다. 이들은 중앙집권적 사법 권력을 통해 재산 분쟁과 상속 문제를 다룬 사례로 영국 봉건주의에서 중앙집권적 요소의 발달을 잘 보여준다.
27 Maitland, History, I, 84.
28 Maitland, Constitutional, 38.
29 Bloch, Feudal, I, 138.
30 Maitland, Feudalism, i, 142.
31 Bloch, Feudal, II, 443.
32 Maitland, History, II, 240–1.
33 Maitland, History, II, 269ff, 296–7.
34 Maitland, History, II, 241.
35 Maitland, History, II, 242.
36 Maitland, History, II, 243.
37 Maitland, History, II, 243.
38 Maitland, History, II, 386–7.
39 Maitland, Domesday Book, 349.
40 예를 들어, Radcliffe-Brown, Kinship, 15을,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Fox, Kinship, ch. 6.을 참고하라.
41 Marx, Capital, III, 616.
42 Maitland, History, II, 308.
43 Maitland, History, II, 27.
44 Simpson, Land Law, 51.
45 Maitland, History, II, 309, 313.
46 Blackstone, Commentaries, II, 116–18에서 한시상속 제도를 무효화할 수 있는 몇 가지 장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7 Chamberlayne, Present State, 337.
48 Macfarlane, Individualism, 83.
49 Maitland, History, II, 12–13, 446; I, 647.
50 Maitland, History, I, 344.
51 Maitland, History, II, 312.
52 Maitland, History, II, 260.
53 Maitland, History, II, 286.
54 Maitland, History, II, 286
55 Maitland, History, II, 19.
56 Maitland, Constitutional, 29.
57 Maitland, History, I, 343–4.
58 Maitland, History, I, 344.
59 이에 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나의 응답은 Macfarlane, Culture, 192–7을 확인하라.
60 Maitland, History, II, 248.
61 Maitland, History, II, 250–1.
62 Maitland, History, II, 251.
63 Maitland, History, II, 251–2.
64 Maitland, History, II, 252.
65 Maitland, History, II, 255.
[1]셰리프는 중세 시대 특정 지역, 즉 한 주의 다양한 법적, 행정 업무를 책임지고 총괄하는 고위 관리를 뜻한다. 주장, 주장관(州長官)이라고도 번역된다. 유럽 대륙에서 비슷한 역할을 맡은 자의 작위는 자작(viscount)이다.
[2]헨리 드 브랙턴은 13세기 헨리 3세 치하에서 활동한 영국의 성직자이자 법률가, 재판관이다. 로마법과 교회법의 전문가로, 『영국의 법과 관습에 대하여(Bracton on the Laws and Customs of England)』라는 미완성 저서를 저술하였다. 여기서 브랙턴은 영국 중세의 보통법을 체계화하려고 시도했다. ‘국왕이라 하여도 신과 법 아래에 있다’고 하는 법지상주의를 주창했으며, 이는 훗날 17세기에 영국 스튜어트 왕조에 맞서 1628년 권리청원을 주도한 에드워크 코크(Edward Coke)의 의회주의, 자연법-성문법 등 법의 우위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3]오늘날 형법상 책임은 개인책임이 원칙이다. 그에 반해, 고대 사회에서는 발생한 범죄에 대한 책임을 친족이나 집단에 귀속시키는 집단 책임의 사고방식이 관습으로 존재했다. 물론 대개 집단 책임이 적용되는 범위는 상해, 강도, 살인 등의 중범죄에 한정되었다. 이 경우, 집단 책임을 묻는 방식 중 하나로, 법적 처벌 외에 사적 제재가 관습상 통용되었다. 예컨대, 고의로 A가 B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면, B의 친족인 C에겐 A에 대해 피의 복수(blood feud, ‘사적 보복’이라고도 함)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A 한 사람에게만 (저지른 범죄와 동등한 수준으로, 예컨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으나,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 A를 포함한 A의 친족에게까지 책임을 묻는 것이 허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피의 복수의 한 대안적 유형으로 직접적 처벌 행위를 대신해 A에게 배상금(속죄금)을 청구하는 방식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때, 피해자의 친족들이 배상금 청구권을 갖는 당사자의 지위를 가졌으며, 가해자의 친족들은 그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었다. 본문에서 메이틀런드는 이러한 ‘피의 복수에 관한 배상금’의 청구권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청구권자의 지위가 어디까지 적용되었는지에 따라 친족 관계의 특성과 범위, 친족으로 분류될 수 있는 기준 등을 판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4]재산권은 여러 종류로 구분될 수 있는데, 그중 크게 2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바로 자유보유(freehold) 재산권과 한정보유(less-than) 재산권이다. 중세 봉건주의 하에서 왕은 봉신들에게 자유보유 토지, 달리 말해 토지를 자유롭게 보유할 권리인 자유보유 재산권을 수여하였고, 이러한 토지 또는 재산권을 가진 자는 왕이 인정하는 가신으로서 사회적 지위, 부와 권력을 보장받았다. 자유보유 재산권을 가진 이들은 수여된 토지를 항상 무한정의 기간 동안 항상 점유할 수 있었다. 또한, 자기가 소유한 토지가 타인에 의해 침탈당했을 때, 정당하게 권리구제/복구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받았다. 이에 반해, 한정보유 재산권은 정해진 기간 내에만 점유할 수 있었고, 완전히 자유로운 권리 행사가 불가능했다. 즉 토지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없었고, 침탈당한다 해도 온전한 권리구제를 보장받지 못했다. 한정보유 재산권은 봉신들에게 소작료나 지대를 지불하고 일정 기간 재산권 행사를 양허받은 권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정보유 재산권은 자유보유 토지의 재산권자로부터 특정 기간 동안 토지를 빌려와 사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한정보유 재산권은 소유권의 행사 기간이 한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보유 재산권과 구분되지만, 자유보유 재산권과 마찬가지로 그 기간 내에서는 소유권을 인정받는다. 그래서 예컨대, 한정보유 재산권으로 일정기간 점유하고 있는 토지나 건물은 시장에 사고 팔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동산(물건 등)을 일정 기간 빌려주고 빌리는 임대차(tenancy, 차용, 소작 등도 해당)와 구분된다.
[5] 1540년 유언장 법령은 영국의 토지소유자에게 서면 유언장을 통해 토지를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영국 의회가 1540년에 유언장 법령을 제정하기 전에는 토지 소유자는 장자 상속 원칙에 구속되었고, 자신이 사망할 시 누가 자기 토지의 새로운 소유자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사망한 토지 소유자에게 권리를 갖고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후손이나 친척이 생존해 있을 때만 토지가 상속되었다. 만약 어떤 토지소유자가 사망했을 때, 그에게 아무런 자신의 재산을 상속할 상속인(즉 후손이나 친척)이 없다면, 그의 땅은 왕의 소유로 귀속되었다. 이렇듯 봉건적 토지 관계에서 토지가 수증자의 소유에서 수여자의 소유로 반환하는 걸 escheat라고 불렀다. escheat는 중세에 널리 인정된 관습법적 원칙으로,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은 채 부동산이 방치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이와 달리, 1540년 유언장 법령은 토지소유자에게 토지를 상속할 사람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이 법에 따라 토지 소유자는 서면 유언장만 있으면 재산의 3분의 2를 누구에게나 상속할 수 있게 되었다.
[6]한사상속이란 상속 조건에 특정한 제약이 있는 걸 뜻하며, 재산을 물려줄 때 피상속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음 세대의 상속인을 미리 지정해놓는 것을 가리킨다. 무조건 모든 후손들에게 재산이 상속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조건을 갖춘 적법한 자녀나 후손들만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몇 대에 걸쳐 재산이 상속되더라도 유실되거나 흩어지지 않고 가계에 묶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시상속은 통상 장자상속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장자상속과 등치되기도 한다.
[7]살리카 법전은 서로마 제국의 문명을 수용하는 동시에 프랑크족의 관심과 삶을 이어받은, 라틴어로 된 성문법이다. 프랑크족의 일파인 ‘살리족’이 사용하던 법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6세기 경에 프랑크 왕국을 건국한 클로비스 1세(Chlodovechus Ⅰ)가 편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