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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의 형성>, 7장 단체와 신탁 (1/2)

원제: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 Visions from the West and East

 

알란 맥팔레인(Alan Macfarlane)

번역: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파트 1. F. W. 메이틀런드: 근대 세계의 본성과 기원

 

7장 단체와 신탁 (Fellowship and Trust)

 

메이틀런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유, 평등, 부의 균형을 고려하면서, 사회 진화에 대한 대부분의 생각에 기초였던 19세기의 유명한 이분법의 한 측면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렸다. 그는 개인이 공동체 안에 편입되고, 계약이 지위에 전적으로 종속되며, 계서제와 가부장제가 보편적이었던 세계에서 모든 문명이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유명한 변화의 반대편 끝지점을 재구성하지 못한다면, 그의 장대한 업적은 불완전할 것이다. 그는 계약, 개인주의, 절대적 평등으로 구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근대 세계의 본성을 재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메이틀런드는 이러한 재고찰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계획을 간략히 구상했다. 그는 이 계획을 세부적으로 실행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는 메이틀런드가 젊은 시절 자유(liberty)와 평등에 관한 논문에서 씨름했던 저 거대한 모순들, 즉 애덤 스미스의 ‘자기애(self love)’와 ‘사회애(social love)’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평등을 자유와 화해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토크빌의 문제를 마침내 화해시켰던 방식에서 그가 남긴 힌트들을 찾을 수 있다. 저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메이틀런드는 세계에 기여한 영국의 법정 공헌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믿은 ‘신탁(Trust)’에 대한 탐구를 진행했다. 신탁은 로마법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우연히 탄생한 제도였다. 하지만 신분, 계약과 동등한 수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사회 조직의 세 번째 중대한 원리가 되었다. 근대 자유, 부, 평등의 토대를 제공한 것은 바로 신탁 제도(the Trust) - 와 그게 빚어낸 신탁들(the trust) - 였다.

 

***

 

메이틀런드는 정치적 자유, 경제적 번영, 법적 구조(framework) 사이의 연결 고리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토크빌은 그 해답의 일부를 따로 떼어냈다. 그는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중앙 권력이 모든 중간조직체들을 폐지하려는 경향, 즉 이전에 타운들(towns), 지방의회들(local assemblies), 의회들(parliaments)에 부여되었던 모든 권한(franchise)을 철회하는 경향이 점차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국가로부터 권력을 얻은 어떤 법인 집단이든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그들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결국, 국가와 개인만 남게 되었고, 그 사이에는 거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이 국가의 질투를 받지 않고 연합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종교적, 경제적 분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예배, 무역, 제조 등 하위 단위들(sub-units)의 형성이 필요했기 때문에, 소규모 집단화(the smaller grouping)를 제거하려는 이러한 경향은 종국에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자유를 폐지하고 부를 향한 진보도 폐기하게 될 것이었다.1

 

토크빌은 또한 어떤 한 국가가 다른 경로를 따라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 대한 연구에서 미국인들이 끊임없이 설립한 자유로운 결사체들(free associations)을 매우 강조했다. 이러한 결사체들은 미국인들의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역동성의 핵심이었다. 그것들이 없다면, 부와 자유는 다시 사라졌을 것이다. 이렇듯 토크빌은 사회적, 법적 형태들을 종교적, 경제적 자유와 연결시키는 구조적 메커니즘의 일부만을 찾아냈다. 그는 무엇이 이러한 발전의 ‘출발점’인지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중세 유럽법에 깊은 지식을 갖추었거나 충분히 훈련받지 못했다. 그는 다른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했지만, 그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없었다. 우리는 메이틀런드에게서 해답을 얻는다.2

 

메이틀런드는 로마법에 근거한 법인(corporation)의 발전에 대해 설명하면서, 개인 수준을 넘어서는 어떤 유형의 집단에 대한 보편적 필요성을 제기했다.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이른 모든 법체계는 인간사(人間事)의 복잡성이 날로 증가함에 따라 인간들이 아닌 인격들을 만들거나, 혹은 (아마도 이게 더 정확한 표현일 텐데) 그러한 인격들이 실존해 왔고 실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고서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규제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3 그는 설립해야 하는 것, 즉 법인 또는 ‘육화(embodiment)’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소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인간들의 어떤 조직화된 집단이 구성원 전체 또는 일부의 권리와 의무가 아닌 다른 권리와 의무를 가진 하나의 단위로 취급되는 것이 그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에 대해 참인 것이 부분의 합에 대해 참일 필요는 없으며, 부분의 합에 대해 참인 것이 전체에 대해 참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법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지만 그 토지는 법인 구성원들의 합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그 법인의 모든 구성원이 어떤 물건의 공동 소유자라면 그 물건은 법인의 소유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률가들은 13세기 이후로 지금까지 법인에 ‘허구적(fictitious)’이거나 ‘인위적인(artificial)’ ‘인격성(personality)’을 습관처럼 늘 부여해왔다.”4

 

‘1243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 즉위한 시니발드 피에스치(Sinibald Fieschi)가 ‘협회는 가상의 인격이다(the association is a fictive person; the universitas is persona ficta)’라는 말을 처음으로 선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5

 

 

이렇듯 법인은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질문은 이러한 권력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다. 메이틀런드는 영국 자치구들과 관련해, ‘법인 설립(incorporation)은 왕실 특허장(royal charter)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왕은 무언가를 만든다. 그는 법인체와 정치체 그리고 그것들의 행위, 사실, 이름(in re, facto et nomine)을 구성하고 설립한다’고 주장했다.6 메이틀런드는 이탈리아 모델에 기반한 법인 이론의 발전에 관해 더 자세히 설명했다.

 

이 신성한 문헌들은 연합적이지 않은(unassociative) 사람들의 법이었다. 로마 법학은 공법(公法)과 사법(私法)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에서 출발해 ‘절대주의적 공법과 개인주의적 사법’에서 최고의 발전을 이뤘다... 이 원천에서 파생된 법인 이론은 (아마도 그게 가장 직결되는 경로일 텐데) 왕권 절대주의로 치달을 수도 있고, 단순한 집단주의(이 맥락에선 개인주의의 다른 이름인)로 나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집단들을 사유할 여지는 없었다. 때문에 ‘원자적’이고 ‘기계적’이라고 비난을 받는다.”7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법적인 방법으로, 유기적 집단이 거주할 수 있는 안락한 집을 짓고 유지하도록 하며 군주가 그들에게 어쩔 수 없이 넘겨줄 모든 ‘결사의 자유(liberty of association)’를 향유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면, 로마주의자의 공유(co-ownership; condominium, Miteigentum)와 로마주의자의 조합(partnership; societas, Gesellschaft)을 통해 약간은 할 수 있겠지만, 아주 조금에 불과할 거다. 우리가 배운 대로, 이 두 범주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범주에 속한다. 심지어 영국법의 다른 유사한 범주들보다 훨씬 더 개인주의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안에는 ‘합동성(jointness; Gesammthandtschaft)’이 없기 때문이다.”8

 

이는 ‘양허 이론(Concession Theory)’으로 귀결된다. 즉, ‘법인은 국가의 창조물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법인은 국가가 그것의 콧구멍 속으로 허구적 삶의 생명력을 불어넣어야만 살아 숨쉴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생기 있는 몸이 아니라 개인주의적 먼지에 불과할 것이다.’9 이렇듯 ‘법인은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나 왕, 교황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10 기본적으로 ‘법인의 인격성이 법적 허구라면, 그것은 군주의 선물이다.’11 그는 ‘법인은 프랜차이즈다’라는 고전적 정의를 인용하며, ‘프랜차이즈는 국가의 권력들 중 일부가 피통치자들의 손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12

 

메이틀런드는 국가에서 파생된 절대주의적 요소를 명확히 설명하며, ‘법인에 대한 로마의 교리는 중세 국가(the medieval nation)를 근대 국가(the modern state)로 변형시키는 세력들에게 적합한 지렛대였다. 중세 사회의 연방제적 구조가 위협받고 있다. 더이상 우리는 몸의 정치를 공동체 속의 공동체(communitas communitatum)로, 즉 집단들의 체계, 궁극적으로는 집단들 각각이 집단의 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바라볼 수 없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은 파생적이고 불안정하게 실존할 뿐이다.’13 역설적이게도, 법인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개인을 강화하는 게 아니라, 피지배자들을 약화시키는 간접적인 수단이 되었다. 몽테스키외와 토크빌이 일찍이 깨달은 것처럼, 프랑스는 이런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프랑스에서는

 

아마도 인간과 국가 사이에 개입하는 모든 걸 분쇄해버리는 경향, 즉 여러 세기에서 걸쳐 작동하면서 그것들을 무력화시키고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모든 영광의 순간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군주제의 과업이 혁명 의회의 과업으로 공표된다. 1792년 8월 18일의 유명한 선언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국가는 자기 품 안에서 어떠한 법인도 묵인해선 안 된다. 비록 그 법인들이 공적인 훈령에 따라 헌신하고 나라에 공로가 있다 해도 그러하다’고 공포했다. 절대적 국가는 절대적 개인과 마주 보았다. 바로 이게 근대적 절대주의의 좌우명 중 하나였다.”14

 

메이틀런드가 1900년 헨리 잭슨(Henry Jackson)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에서 이러한 절대주의 경향과 로마의 법인 개념이 그걸 뒷받침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제가 심사숙고하고 있는 주제는 법인들의 저주받을 운명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들이 저주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위대한 작품을 기대하며 편지를 마무리한다. ‘그럼 위대한 논문이 될 『유니버시타스의 저주받을 운명(De Damnabilitate Universitas)』를 위하여…’15

 

 

 

그럼 미국 협회주의(associationalism)의 활기찬 세계로 이끌었던 것이 로마법의 법인이 아니었다면, 그 열쇠는 어디에 있었을까? 메이틀런드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 그 해답을 발견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우연하고 예상치 않은 기회였다. 로마법에서 유래하지 않았지만, 로마법의 부적절함과 13세기 영국 사회의 구조적 긴장 등 여러 힘들의 부산물이었던 어떤 장치의 발전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는 신탁의 기원이 로마법에 있다는 이론을 검토했지만, 1894년에 이르러서는 ‘나는 로마법에서 우리 유스(use, 신탁으로 이어진 장치)[1]의 기원을 발견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고 오래전부터 확신하고 있었다...’고 적었다.16 작고하기 전까지 진행했던 형평법(equity)[2]에 관한 강의에서 그는 청중에게 ‘저는 유스가 우리들 밖에서 온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에 로마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유스가 고대 영국적 요소들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믿습니다’고 말했다.17 그는 강의 후반에 다음과 같이 관련 증거들에 대해 논평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확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유스에 관한 새로운 법학이 로마법에서 차용한 것으로, 영어의 유스 또는 신탁이 역사적으로 신탁유증(the fidei commissum)[3]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은 그 연관성을 믿지 않습니다. 제가 이 연관성을 불신하는 한 가지 이유는 곧바로 중요한 요점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초창기 왕의 챈슬러들(the Chancellors)은 유스수혜자(the cestui que use, 신탁이 수행되는 인격들 또는 그 대리인들)의 권리를 토지에 대한 부동산권(estate)과 매우 유사하게 취급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문제들을 부동산상속(descent)이나 그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서 영국 토지법의 규칙들을 적용했습니다.”18

 

메이틀런드는 자신이 특별하고 강력한 무언가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분 기반 사회에서 순수하게 원자적이며 개인주의적인 계약 관계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어떻게 이행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그는 근대 세계의 특이한 본성에 대한 수수께끼의 열쇠를 발견하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흥분했다. 1902년 존 그레이(John Gray)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 즉 자선 신탁(charitable trusts)에 관한 우리 법이 지닌 극도의 자유로움(liberality)’에 대해 논하면서, ‘저는 머리가 로마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그런 조치를 시행하지 않을 것이며 시행할 수도 없다는 걸 대륙법이 입증한다고 생각합니다.’19 개인은 마치 왕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자선 신탁을 만드는 개인은 인위적 인격을 창조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걸 행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국가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20 이듬해 그는 다시 그레이에게 편지를 쓰면서, ‘저는 신탁에 관한 우리의 법(혹은 형평법)이 다른 곳에서는 소멸했을 ‘법인화되지 않은 몸들(unincorporated bodies)’을 계속 살아남도록 했는지를 설명하는 글을 독일의 어느 학술지에 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21

 

일찍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메이틀런드는 신탁이 아마도 영국의 모든 법적 공헌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신탁이라는 개념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 익숙해서, 아무도 그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영국인들이 법학 분야에서 이룬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인 업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수세기에 걸친 신탁 관념의 발전이라는 답보다 더 나은 대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썼다.22 이런 생각은 1903년 11월 존 그레이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다시 한번 메아리 쳤다. ‘누군가는 우리의 신탁을 전 세계에 설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신탁의 구성이 우리 종족 사람들이 법학 분야에서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만, 반드시 해내야만 합니다.’23 그러나 메이틀런드는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 이 과제를 완수하지 못한 채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 주제에 접근하려 했는지, 그리고 왜 이 주제를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단서를 남겼다.24

 

메이틀런드는 독일 법률가 친구들과 여러차례 대화를 나누면서, 신탁이 영국에만 존재하는 특유한 것이며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메이틀런드는 사망하기 전까지 진행한 일련의 강의에서 그의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신탁은 ‘아마도 영국 법률가들의 가장 독특한 업적을 이룰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문명에 거의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외국법에선 그와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독일 민법전(civil code) 어디에 신탁이 존재하는가? 어디에도 없다. 영국 법률가의 눈에는 커다란 구멍이 보인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런 구멍이 있다는 걸 보지 못한다. 기어크는 내게 ‘저는 당신들의 신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25 대륙법과의 격차가 얼마나 컸는지를 또 다른 발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근대 사회의 많은 부분이 계약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메이틀런드는 독일인 친구(기어크)에게 그들의 법체계에는 신탁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고 불만을 표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법에서) 신탁을 찾아보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신탁을 생략하는 건 계약을 생략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일입니다.’26 그 독일인 친구는 이러한 메이틀런드의 발언들과 ‘외국인들은 신탁 없이도 잘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래야만 합니다’27와 같은 다른 발언들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 친구는 이에 대해 ‘음, 우리를 탓하기 전에 당신들의 그 멋진 신탁이란 게 무엇인지 좀 알려주십시오’28라고 답했다. 메이틀런드는 기꺼이 이에 응수했고, 실제로 신탁과 법인에 대한 자신의 가장 긴 분석들 중 하나를 독일어로 발표했다. 그는 ‘형평법의 모든 성과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신탁의 발명과 발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는 데 강한 열의를 보였다.29 결론적으로 ‘비록 사법(private law)의 세부 사항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영국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우리의 신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30 신탁 개념 그 자체도 매우 충격적이었지만,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아이디어들 또한 주목을 끌만큼 놀라웠다. 예를 들어, ‘지금은 토지로, 이때는 통화로, 그때는 주식으로, 이제는 채권으로 옷을 갈아입는(투자되는) 신탁 펀드에 대한 관념은 현대 영국 법학이 발전시킨 가장 놀라운 관념들 중 하나인 것 같다.’31

 

 

***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신탁한다는 관념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여러 게르만 사회에서 발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확실히, 메이틀런드는 유스, 즉 오푸스(opus)에 대한 관념이 앵글로색슨 시대 영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노르만 정복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 교회의 유스를 위해 주교에게 토지를 양도했다는 말을 발견할 수 있다...'32 상위 권력에 의해 창조된 법인이라는 관념과 함께 로마법이 부활하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의 법인화되지 않은 몸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어떤 자산을 보유한다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영국에서 법인의 인격성에 대한 뚜렷한 이론이나 이러한 인격성이 주권 권력의 어떤 행위에 기원을 둬야 한다는 주장을 발견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영지수탁자들(feoffees)[4]이 보유한 땅을 유스하기 위한 비법인 집단의 실존도 함께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33 따라서 신탁에서의 제3자의 유스와 비정부 단체(non-governmental body)의 창설에 대한 관념의 싹이 이미 현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탁의 공식적인 제도화가 세계를 변화시킬 정도로 대규모로 본격화된 것은 13세기부터였다.

 

이러한 발전에 작은 기여를 한 것 중 하나는 종교적 요인일 수 있다. 메이틀런드는 13세기 초 영국에 새롭게 들어온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행했던 특이한 청빈 서약의 효과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했다. ‘그들의 존재 원칙은 그들이 그 어떤 것도 소유해선 안 된다는 소유에 대한 금지였다... (대신) 어떤 놀라운 계획이 채택되었다.’ 그건 수도사들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재산을 ‘수도회 공동체가 ‘사용’하거나 ‘거주할 수 있도록’, 후원자(benefactor)가 수도회 공동체에 양도하는 것이었다.34 그러나 신탁의 발전에 대한 주된 기여는 다른 데서 생겨났다.

 

메이틀런드는 제도화된 신탁이 어떤 한 가지 딜레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국인은 자신의 땅을 유언으로 남길 수 없다. 토지의 경우, 12세기에 유언 권력의 모든 싹이 무자비하게 밟아 뭉개어졌다. 그러나 영국인은 자신의 땅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의 죄 많은 영혼을 치유하고, 자신의 어린 딸과 아들을 부양하기를 원하였다. 이게 문제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법은 죽음의 순간에 그에게 엄격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그가 귀족의 일원인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만약 그가 성년의 상속인을 남긴다면, 상속인은 영주에게 상속세(relevium)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가 미성년의 상속인을 남기면, 영주는 아마도 20년 동안 토지의 이익을 수취할 수 있으며, 상속인의 결혼을 매매할 수 있다. 그리고 상속인이 없으면, 땅은 영주에게 영구히 귀속, 즉 '몰수(escheats)'된다.”35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 소유자는 자신의 땅을 몇몇 친구들에게 양도한다...’ ‘그들은 이 땅을 ‘그의 유스(그 아들의 oes[5])’를 위해 보유한다. 그들은 토지 소유자가 살아있는 동안 그가 이 땅을 누리게 해줄 것이고, 그는 사후에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들에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그가 자신의 땅을 한 명의 친구가 아니라 몇 명의 친구들에게 양도한다고 했다. 이게 중요한 점이다. 한 명의 소유자, 단일수탁자(feoffatus)만 있다고 할 때, 만일 그가 죽어버리면, 영주는 자신의 통상적인 권리를 청구할 것이다… (그런데) 다섯 명 또는 열 명의 친구에게 영지를 나눠주는 경우엔... ‘공동 테넌트(joint tenants)’로서… 그들 중 한 명이 죽으면, 상속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나머지의 몫이) 계속해서 증가(accrescence)할 뿐이다. 영주는 아무것도 청구할 수 없다.’36 이 아이디어는 앵글로-프렌치(Anglo-French) 법에서 나왔는데, ‘로마 서적에는 14세기 영국인들이 이 장치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없다.’37

 

토지 소유주들은 장자 상속제와 왕권의 엄격한 결과를 피하려 했다. 이러한 그들의 욕망은 가장 강력한 왕실 관리 중 한 명인 챈슬러의 발전하는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챈슬러는 형평성 제도를 통해 보통법을 보완할 새로운 법적 유연성을 제공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챈슬러는 자신에게 이러한 명예로운 이해관계, 소위 ‘유스, 신탁 또는 신뢰’를 강제로 집행할 의향이 있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신의(faith)를 지키지 않는 수탁자(trustee)를 감옥에 보내고자 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에피소드다. 민족 전체가 법을 회피하기 위해, 즉 스스로 개혁할 용기가 없는 자신의 법을 회피하기 위해 어떤 거대한 음모에 가담한 것 같았다. 챈슬러, 법원, 의회 모두 이 음모에 연루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론 음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뿐이었고, 그때그때 닥친 일들을 처리해 나가기에 급급했다. 하여 그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했다.’38 이 수탁자들은 영구적인 법인이 아니었고, 국가에 의해 설립되거나 ‘법인화’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공동성(jointness)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법에 의해 인정된 ‘가상의 인격’이었지만, 국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 장치의 성장은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형평법’의 성장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보호받았다.39 처음에는 무해해 보였던 이러한 발전에 대해, 왕권과 법률가들 모두 눈이 멀었다. 마치 장자 상속의 관습처럼, 상류층을 위한 장치로 출발했던 것이 중산층으로 확산하면서, 그 목적 또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서, 내가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계승적 재산권 처분(settlement)’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즉 토지 귀족에서 신흥 부자 계급으로 전파되었고, 마침내 상당한 부를 가진 남녀가 ‘계승적 재산권 처분’ 없이 결혼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 되었다.’40 결국, ‘신탁은 영국에서 가장 흔한 제도들 중 하나가 되었다. 거의 모든 부유한 남자들은 수탁자였다...’41

 

신탁이 왕권과 재정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헨리 8세는 1535년 유스 법령을 제정해 신탁을 분쇄해버리려 했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다. 메이틀런드는 그에 관한 복잡한 이야기를 몇 줄로 요약했다.

 

‘왕은 그 과정에서 꾸준히 손해보고 있던 단 한 사람이었으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무 늦게 알아챘다. 헨리 8세는 과거에 벌어진 일을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어설프나마 최선을 다했다. 그는 주저하는 의회를 억지로 몰아붙여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지난 역사의 벽은 그 위대하고 강력한 왕에게도 너무 높았다. 그 법령은 비참한 실패를 맞이했다. 몇 마디의 교묘한 말장난으로 그 법령을 우회할 수 있었다. 판사들의 적극적인 묵인 덕분에, 챈슬러들은 과거에 해왔던 대로 신탁으로 알려진 채권채무관계들(obligations)을 집행할 수 있었다.’42

 

신탁은 계속 발전해 나갔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단순히 재산을 대대로 물려주는 것을 넘어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의미 있고 지속적인 시민들의 결사체를 형성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방법들이 개발되었다. 특히, 자선과 선행을 위해 단체를 설립하는 데 있어, 신탁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었다.

 

 

***

 

메이틀랜드는 이러한 발전이 가져온 구조적 이점, 특히 법인이나 유니버시타스(universitas)의 개념을 보완하는 측면에 주목했다. ‘신탁은 우리에게 인격화된 기관들에 관한 법을 대체할 자유주의적인 대안을 제공했다.’43 그는 대략 1500년부터 1900년 사이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개괄했다. ‘지난 4세기 동안 영국인들은 “우리에게 신탁을 허락해달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실제로 법인에 관한 법과 이론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영구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걸 막진 못할 것이다. 그 집단들은 수탁자들의 보호막 뒤에서, 심지어 수세대에 걸쳐, 충분히 행복하게 살면서 자신들의 비법인성(unincorporatedness)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노첸트 교황과 로마 군대가 앞쪽 계단을 지키고 있다면, 우리는 뒤쪽 계단을 통해 걸어 올라갈 것이다.”’44

로마법 아래에선 모든 것이 국가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달랐다. 로마법학자들에게는 ‘삶과 죽음의 문제였던 것이 영국에서는 단순한 편의와 비용의 문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 축복받은 뒤쪽 계단은 매우 넓었다. 신탁 증서가 길어질 수 있었고, 변호사의 비용 청구서는 그보다 더 길어질 수 있었으며, 종종 새로운 수탁자가 필요할 수도 있었고, 때로는 난처한 장애물을 교묘하게 피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조직된 집단은 살아남아 번창할 수 있었고, 근엄한 법적 구속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더욱 자율적일 수 있었다.’45 신탁의 다양성과 모호성은 신탁이 다채롭게 번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자선 신탁을 하나하나 다룰 때, 우리 법원은 그것들을 심각하게 분류하도록 강요받지 않았다.’46 법에 저촉되지 않으며 신탁을 이용하는 사람들(수탁자 이외의 사람들)에게 상호 이익이 되는 범위 내에서, 유용하고 넓은 의미의 '자선'이라면 무엇이든 추구할 수 있었다.

 

이렇듯 신탁은 국가나 다른 이들의 감시로부터 보호받는 비법인단체(법인화되지 않은 신체)들의 발전을 가능케 했다. Genossenschaft(Fellowship, 단체)는 ‘도둑과 악당 그리고 다른 나쁜 사람들이 가득한 사악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악의와는 별개로 우리가 저항해야 할 근거 없는 요구들, 즉 이웃들이나 국가가 제기하는 권리주장들에 반박해야 할 필요도 생길 것이다. 이 민감한 존재는 단단한 외피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 신탁은 그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외피를 제공한다.’47 그리하여 ‘우리는 신탁의 가장 큰 장점을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신탁은 법인화되지 않은 Genossenschaft를 부적절하고 개인주의적인 이론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해왔다.’48 그러나 외국인들에겐 ‘우리의 모든 법적 제도들 중 가장 영국적 특징을 지닌... 신탁’이 여전히 불가사의했다. 여기에는 아직 육화되지 않은 비-신체(non-body) 또는 누구도 아닌 것(nobody)이라는 일종의 역설이 존재했다. 메이틀런드는 이 모순을 유럽 대륙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려고 했다. 신탁에는 ‘수탁자들의 벽을 쌓는 장치’가 있는데, 이를 통해 ‘기술적으로는 법인이 아니면서도, 개인주의 이론의 공격으로부터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는 신체들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신체들의 인격성은 – 이 점을 분명히 짚어야 하는데 - 비록 법학자들에 의해 명시적으로 부인되었을 지라도, 실제로는 꽤나 전반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한 가지 간단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동안 우리 법령집에는 ‘비법인단체(법인화되지 않은 신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49

 

메이틀런드는 이것이 불가사의하고 심지어 비논리적임을 기꺼이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이 작동하면서 효과를 발휘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언젠가 역사가들은 영국법의 진정한 가상의 허구는 법인이 인격라는 것이 아니라, 비법인단체(법인화되지 않은 신체)가 인격이 아니거나 (당신이 그렇게 암시적으로 말했듯이) 아무도 아니었다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50 그러나 이 ‘누구도 아닌 것’은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단순한 파트너십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부활한 로마법 하에서 부유층이나 법률가들에게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장치와 일견 동등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엄밀한 법적 맥락에서 로마의 소시에타스(societas), 프랑스의 소시에떼(société), 독일의 게젤샤프트(Gesellschaft)는 영어의 파트너십(partnership)으로 번역되어야 하며 다른 단어로는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면, 영국인은 정치적 이론의 역사에서 한 지점을 놓치고 말 것이다.’51 실용적이고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파트너십은 상호 확신, 신뢰 또는 헌신을 많이 창출하지 못했지만, 신탁은 달랐다. ‘법적으로 인격성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도덕적으로 가장 많은 인격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종종 저를 놀라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클럽을 정직할 뿐만 아니라 명예로운 생명체로 생각하는 반면에, 주식회사에 대해선 그저 돈을 넣고 배당금을 받는 일종의 기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52

 

메이틀런드가 깨달은 것처럼 신탁은 매우 특이한 무언가, 신분과 계약,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여 그들의 간극을 메워주는 매우 특이한 무엇이었다. 비록 신탁이 사람들을 강력한 집단들로 형성하지만, ‘그것은 계약의 모든 일반성(generality)과 모든 탄력성(elasticity)을 가지고 있다.’53 ‘그것은 큰 탄력성과 일반성을 가진 ‘제도화된 관습적 원리(institute)’로서, 계약만큼 탄력적이고 일반적이다.’54 이러한 모순되는 두 가지 원리들을 혼합하기 위해서는 유럽 대륙의 법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며, 설명하기 어려운 묘수가 필요했다. 메이틀런드는 아마도 기어크를 다시 한번 언급하며 이렇게 썼을 것이다.

 

“’저는 당신들의 신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든 종류와 유형의 법에 익숙하며 높은 학식을 갖춘 독일 역사가가 쓴 편지에서 이 말을 보았다. 이런 어려움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이른바 ‘일반 법학(general jurisprudence)’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궁극적으로 대인적 권리(ius in personam, 즉 채권채무관계에서의 급부)[6]로 보이는 권리가 실제적인 목적에 있어서는 대물적 권리(ius in rem)[7]와 동등하게 취급되고 있으며, 습관적으로 일종의 소유권, 즉 ‘형평법상 소유권’으로 여겨졌다. 혹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독일법을 새로운 법전으로 편찬한 방식대로 영국법을 정돈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탁법에 한 가지 딜레마를 제시해야 한다. 즉 신탁법은 채권법(the Law of Obligations) 또는 물권법(the Law of Things) 중 하나에 속해야 한다... 신탁은 중세 주석가들이 설명했던 로마법을 마음 속 깊은 곳에 새기지 않았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55

 

 

메이틀런드는 챈슬러가 어떻게 해서 이 두 가지를 혼동하게 되었는지를 대략적으로 설명한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압니다. 챈슬러들이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이러한 ‘형평법상의’ 권리를 가능한 한 단순한 대인적 권리들(iura in personam)과는 다르게, 대물적 권리들(iura in rem)과는 같게 만드는 데 열중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한 아이디어는 많지 않다. 그런 아이디어들은 영국의 것들이며, 챈슬러들에게 적합하다고 여길 수 있는 로마법에 대한 지식에서 파생된 건 확실히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권리들의 내적 특성이라 불릴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보통법에서 유추하는 방식을 엄격하게 추구했다”56

 

메이틀런드는 신탁을 두 가지 원리가 결합된 것으로 구상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신탁의 보유, 보호, 체결 및 집행은 계약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발적인 방법에 따라 이뤄졌다. ‘아니요, ‘채권채무관계의(obligatory)’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유스(use)’라는 이름 아래에서 이뤄지고, 조금 후에는 ‘확신(confidence)’과 ‘신뢰(trust)’라는 이름으로 이뤄집니다.’57 다시 말해,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유스, 신뢰 또는 확신은 합의(agreement)에서 기원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수탁자의 약속에 대응해 가치 있는 대가를 원하는 것과 관련하여, 비록 약속자(계약자)인 수탁자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하더라도, 피약속자(수약자)인 위탁자가 법적 권리들, 재산과 소유물(possession)을 포기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피약속자에게 손해가 있다고 하는 게 공정하다고 봅니다.’58 이러한 자발적인 외부의 관점에서 보면, 인격적 권리들의 집합이 신탁자와 수탁자, 그리고 신탁을 체결한 인격들 사이에 형성된다. ‘수탁자는 소유자, 즉 그 물건의 완전한 소유자이며, 신탁수혜자(cestui que trust)는 해당 물건에 대해 아무런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건 꽤나 명확하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계약이 아니라 신탁(trust)과 채권채무관계(obligation)에 기반해 인격들 사이의 관계가 설정되었기에, 이 관계에 대한 것들은 법률이 아니라 형평법에 따라 집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탁의 구체적인 징표는 수탁자가 권리들을 갖고 있다는 것, 즉 그 권리들을 신탁수혜자의 이익을 위해, 또는 어떤 특정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59 이렇듯 어느 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대인적 권리에 속한 인격적 관계들로 고찰할 수 있다. 바로 이게 신탁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약속과 합의를 지켜야 하며, 그렇게 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며, 틀림없이 매우 간단한 원칙이다. 하여 당신들은 챈슬러가 물권(real right), 즉 대물적 권리(jus in rem)가 아니라, 인격적 권리(personal right), 즉 대인적 권리(jus in personam)를 집행하기 시작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사실상 계약적 권리, 곧 약속에 의해 창출된 권리를 집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이 이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많은 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유스수혜자(cestui que use) 또는 신탁수혜자(cestui que trust)의 권리는 대인적 권리의 존재에 근거해 개시된다. 그러다 점차 대물적 권리와 유사한 무언가로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결코 대물적 권리가 된 적은 없으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러하다.”60

 

그러나 말하자면, 그 틀은 인격적 권리들의 집행이지만, 내용은 대단히 정교한 계약적 토지법 체계, 즉 메이틀런드가 초기 저작에서 13세기 영국에서 발전했음을 입증했으며, 전 세계에 ‘사물’에 대한 권리들을 명확히 규정했던 바로 그 계약적 토지법 체계를 모델로 삼아 채워졌다. 따라서 메이틀런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동산권(estates, 물질적 재산에 대한 권리)과 이권(利權, interests)에 관련해서는, 토지에 대한 보통법이 모델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부류의 권리들은 챈슬러가 만들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대물적 권리(토지에 대한 재산권)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진다. 이는 그 장치를 사용하는 당사자들의 실제 바람과 조화를 이룬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유스를 부동산권과 이권이 실존하는 어떤 비물질적인 것, 즉 일종의 무형화된 토지 조각으로 전환한다. 이것은 완전히 합법적인 ‘사물 만들기(thing making)' 과정이며, 항상 일어나는 과정이다.’61 그리하여 신탁의 내용인 ‘유스’는 이토록 보기 드문 탄력성과 복합성을 갖게 되었으며, 보통법 아래에서 발전된 새로운 종류의 재산권 체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메이틀런드의 말에 따르면, ‘유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존재물(entity), 즉 토지에서 창출될 수 있는 것과 유사한 부동산권, 소유권(possession)과 잔여권(remainder) 그리고 복귀권(reversion)에 연관한 부동산권, 이런 저런 식으로 유증할 수 있는 부동산권이 내재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존재물(entity)로 여겨졌다.[8]

 

그 결과, 일관성 있게 신분이나 계약, 순수하게 대인적 권리나 대물적 권리 중 어느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이종교배(hybrid)가 탄생했다. 메이틀런드는 이 두 가지를 매우 확고하게 구분했던 로마법에서는 그러한 체계가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대인적 권리와 대물적 권리 사이의 구분이 매우 분명하게 형성되어 있고, 그 구분을 자신들의 법적 체계의 주요 골격 중 하나로 삼았던 사람들 사이에선 신탁이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63 이 점이 수 세기에 걸쳐 로마법을 계수했던 유럽 대륙의 동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법학자들은 사적 권리들을 대물적 권리 또는 대인적 권리라는 이분법적 방식으로 구분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했다. 이 두 가지 부류의 전형은 전자의 경우 도미니움(dominium)[9]과 소유권(ownership)이고, 후자의 경우 계약의 이익, 즉 부채(debt)다. 그렇다면 신탁, 즉 신탁수혜자의 권리는 어느 범주에 속할까? 어느 쪽에도 쉽게 속하지 않는다. 그건 두 가지 모두에 조금씩 포함되는 것 같다. 그 이방인(기어크)은 묻는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들 법령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까요? 물권법(Sachnrech; Sachenrecht)에 넣어야 하나요? 아니면, 채권법(Obligationenrecht)에 둬야 하나요?’64 실제로 신탁은 양쪽 모두를 아우르며, ‘근대’ 세계와 ‘고대’ 세계를 나누는 기준선으로 여겨졌던 공동체와 협회, 신분과 계약,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메운다. 이 체계가 신분에 기반한 것인지 계약에 기반한 것인지 묻는다면, 서로 엇갈린 답을 내놓을 것이다. ‘가장 좋은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아마도 궁극적으로 분석해보았을 때, 신탁은 채권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수많은 중요한 목적들을 위해) 신탁은 물권과 매우 유사하게 취급된다. 주로 특정 인격(certa persona), 즉 수탁자에게 유효한 권리지만,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권리, 즉 - 그런데 오직 형평법에서만 존재하는 - 도미니움과 소유권과 거의 동등하게 취급된다. 그리고 이는 아주 먼 옛날부터 그래왔다.’65

 

메이틀런드는 이 간극을 메우고 위대한 이분법을 통합함으로써, 자신의 전임자였던 메인을 암묵적으로 반박하고, 19세기 후반의 고전 사회학의 많은 부분을 전복시켰다. 그는 문명의 두 가지 형태 사이에서의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 한 형태의 문명에서 다른 형태의 문명으로의 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대의 역동성이 이 두 가지 원리를 혼합함으로써 나타났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인관계의 따뜻함과 신뢰, 헌신, 그리고 적절한 양의 탄력성과 자발적 결사들의 꽤나 괜찮은 균형을 창조했음을 보여주었다. 메인의 유명한 논문을 인용하며, 메이틀런드는 신탁이 다른 위대한 법적 제도인 계약만큼이나 중요하며, 근대성이 신탁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진보적 사회는 신분에서 계약으로 행진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떤가? 이제는…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알려준다. 전진의 선이 더이상 신분에서 계약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계약을 통하여 계약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즉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해 설명하자면 조직된 집단의 인격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걸 말이다.’66 신탁이라는 장치를 통해 설립된 것은 국가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 창조된 존재물(entity)이었다. 다르게 말해, 인격적 권리가 재산에 대한 권리(property right)로 전환되었다. 이는 로마법의 정신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왕이나 의회에 간청하지 않고도 진리와 증서로 법인들을 만들었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67

 

 

7장 전반부 각주

 

1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저서 Trust: The Social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 (1996)에서 이러한 일반적인 관점을 잘 확인할 수 있다.

2 그의 연구 배경, 특히 독일 법학과 기어크의 연구와의 관계에 대해선 데이비드 런시먼(David Runciman)의 Pluralism and The Personality of The State(1997, Cambridge University Press) 중 특히, 3-5장을 참고하라.

3 Maitland, History, I, 486.

4 Maitland, History, I, 488.

5 Maitland, Township, 18.

6 Maitland, Township, 18.

7 Maitland, Political Thought, xxviii.

8 Maitland, Political Thought, xxx.

9 Maitland, Political Thought, xxx.

10 Maitland, History, I, 490.

11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10.

12 Maitland, Political Theories, xxxi.

13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10.

14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11.

15 Quoted in Fisher, Life, 124–5.

16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03.

17 Maitland, Equity, 6.

18 Maitland, Equity, 32.

19 Fisher, Life, 134.

20 Fisher, Life, 134.

21 Letters, ed. Fifoot, no. 364; 11월 15일자로 날짜가 같은 편지도 참고하라.

22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272.

23 Fisher, Life, 147.

24 메이틀런드의 힌트는 대부분 숨겨져 있다. 하여 정상적인 통찰력을 지닌 존 버로우(John Burrow)조차도 ‘협회/결사의 정신(the spirit of association)’과 신탁(trust)의 본성에 대한 메이틀런드의 연구를 다룰 때, 메이틀런드가 이 주제를 ‘클럽 회원으로서의 자격(clubbability, 사교성)’이나 ‘도서관 책을 반납하는 윤리적 태도’와 거의 동등한 것(Burrow, ‘Village Community’, 280)이라고 주장했다.

25 Maitland, Equity, 23; 메이틀런드는 오토 폰 기어크의 저작 중 일부(정치 이론들)을 번역했는데, 기어크는 근대의 법이론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 한 명에 속한다.

26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23.

27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273.

28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23.

29 Maitland, Equity, 23.

30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22.

31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277.

32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04.

33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283.

34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07–8.

35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35.

36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35–6.

37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37; 이 이야기의 또 다른 버전을 보려면,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라. Maitland, Equity, 26–7.

38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92.

39 이 이야기는 다음 자료에도 잘 나와있다. Maitland, Equity, 1–6.

40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54.

41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54.

42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93.

43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279.

44 Maitland, Political Thought, xxix.

45 Maitland, Political Thought, xxxi.

46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65.

47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68.

48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67.

49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17.

50 Maitland, Political Theories, xxxiv.

51 Maitland, Political Theories, xxiii.

52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83.

53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22.

54 Maitland, Equity, 23.

55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272–3.

56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275.

57 Maitland, Equity, 31.

58 Maitland, Equity, 29.

59 Maitland, Equity, 47–8.

60 Maitland, Equity, 29–30.

61 Maitland, Equity, 31.

62 Maitland, Equity, 33.

63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25.

64 Maitland, Equity, 23.

65 Maitland, Equity, 23–4.

66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315.

67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283.



[1] 여기서 말하는 유스(use)는 영국의 use 제도를 가리키며, 이때 use는 라틴어 usus가 아니라 opus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유스 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선 라틴어 ad opus(무엇을 위한)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Ad opus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은 ‘for the benefit of beneficiary(수혜자의 이익을 위하여)’이다. ‘ad opus meum(나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to my use’로 번역된다. 따라서 use는 일반적으로 ad opus는 관행 내지 제도의 의미로 사용되며, 13세기 초에 많이 활용되었다.

 

[2] 형평법은 영미법 체계에서 보통법과 대립하는 법을 가리킨다. 법체계가 규칙을 정립하기 위해 요구되는 법적 확실성을 유지하면서도, 개별 상황에서 공정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추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달리 말해, 엄격한 법체계인 보통법만으로는 각 사안별 특수성이나 사회 변화에 탄력적으로 적응하기 어렵다. 따라서 상황과 시대에 따라 적합한 법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중세 영국의 법원에선 이러한 유연성을 확보하여 보통법에 근거한 법적 판단을 보충하고자 형평의 원리에 입각하여 재판하기 시작하였고, 거기서 형평법이 유래했다.

 

[3] 신탁유증(fidei commissum)은 로마법과 시민법 체계에서 유증(legatum)에 관한 엄격한 제약들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상속인이 유언으로 자신의 유산 일부 또는 전부를 특정인(유언집행인, 수탁자 등에 해당함)에게 맡기는(증여하는) 대신, 추후 특정 시점이나 특정 조건 하에(달리 말해, 목적한 바를 달성함과 동시에) 해당 재산을 자신의 자녀 등 피상속인(최종 수취인)에게 이전할 의무를 부과하는 걸 가리킨다. 최종 수취인의 대표적 예로는 법적으로 재산을 직접 수령할 능력이 없거나 적어도 지정된 금액만큼은 수령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4] Feoffee는 영국의 봉건적 체계에서 최종 수취인 또는 수혜자를 위해 영지나 자유보유 토지 등의 재산을 증여 받아, 보유하고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렇듯 증여자의 목적을 따라서,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토지를 보유하는 경우를 가리켜, cestui que use라고 부른다. 이 표현이 추후 cestui que trust로 변하는 게 확인된다.

 

[5] Oes는 영어 Use에 해당하는 고대 프랑스어 단어다.

 

[6] 대인적 권리는 “사람 사이의 합의를 뜻한다… 타인과의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특정’ 계약 당사자 사이에서만 행사되며, 그 권리의 내용도 계약을 통해 구체적으로 명시된다.” *참고: 김종철. 2019. 『금융과 회사의 본질』. 개마고원, p.34-35

[7] 여기서 rem은 영어 thing에 해당하는 라틴어다. 대물적 권리, 즉 “물권은 다른 사람들이 간섭할 수 없는 절대적 권리이다. 물권을 가진 사람들은 그 물건을 통해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관계 맺는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하고 배타적이고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 물건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는 ‘No’라는 의사를 전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온 세상에 대하여 주장할 수 있는 권리라는 의미로 ‘대세적 권리’라고도 번역된다. *참고: 김종철. 2019. 『금융과 회사의 본질』. 개마고원, p.34

 

[8] 이와 관련해, 메이틀런드의 논문, <신탁과 법인의 역사(Trust and Corporation)>의 4장을 참고하는 게 도움이 된다. “신탁수익자는 토지 자체가 아니라 유스에 대한 부동산권을 갖고 있었다. 이 부동산권은 단순봉토권이거나 생애권이거나 잔여권이거나 그 외의 여러 종류의 권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유스’는 무체물(無體物)이자 땅의 무형 부분에 속한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무체물 속에 토지의 실체적으로 유형(有形)한 부분이나 실질적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리, 즉 ‘부동산권’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동산 및 단순 청구권도 신탁으로 개시”되었다. *참고: F. W. Maitland 저. 현병철최〮현대 역. 『신탁과 법인의 역사』. 세창출판사, p.38-39 (메이틀런드의 논문집인 Collected Papers 제3권에 수록된 논문의 국역본임)

 

[9] Dominium은 재산을 자유로이, 즉 타자의 개입을 전적으로 배제한 채 온전히 자기 뜻대로 사용, 향유,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소유권을 뜻한다. 예컨대, 로마의 가부장제 하에서 물건이나 노예에 행사되는 가부장의 권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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