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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의 형성>, 6 법적 체계들의 분기

원제: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 Visions from the West and East

 

알란 맥팔레인(Alan Macfarlane)
번역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파트 1. F. W. 메이틀런드근대 세계의 본성과 기원

 

6장 법적 체계들의 분기

 

메이틀런드의 모든 논의를 종합해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그림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다. 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 12세기 무렵까지 오랜 기간 동안 북서부 유럽 대부분의 법적, 정치적, 사회적 체계는 대체로 유사했다. 세 차례에 걸친 튜턴족(앵글로색슨족, 바이킹족, 노르만족)의 침략을 겪었고, 대부분의 유럽 대륙에 비해 로마화가 덜 진행되었기 때문에, 북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와 함께 게르만적 체계의 극단적 사례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영국에 특별한 점은 없었다.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영국과 대륙 간의 차이가 분명해졌는데, 그건 주로 영국에서 왕과 영주, 백성 간의 관계가 균형을 유지하고, 계약에 의해 재산권을 보유하였으며, 친족의 권리가 재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 대륙의 많은 지역이 고도로 계층화된 농민카스트제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영국은 개별화되고 개방적인 사회 구조로 발전했다. 이는 토크빌의 설명과 매우 유사하다.

 

물론 문제는 왜 영국이 대부분의 대륙 국가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냐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메이틀런드의 해답은 정치와 법의 영역에 있는 듯하다. 그 중심에는 왕권 문제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영국이 차별화되기 시작한 것은 왕실(the Crown)을 중심으로 한 강력하고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법적 체계였다. 그러나 메이틀런드는 사법적 중앙집권화가 몽테스키외와 토크빌이 유럽 대륙에서 보았던 행정적 중앙집권화와 정치적 절대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막은 수많은 중간 기관(intermediary bodies)’과 견제와 균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한다. 영국의 왕실은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전제적이진 않았다. 스텁스(William Stubbs)[1]의 견해를 따라, 메이틀런드는 왕실이 권력과 법 양자의 원천이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사실의 본질을 포착하는 일련의 역설적 발언들을 통해, 여러 차례 왕권의 위상을 규정하였다. ‘왕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법을 어길 수 있다. 왕은 누구의 아래에도 있지 않으며 어떤 법정의 아래에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법 아래에 있다.’1 따라서 왕의 권리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그 정도에 있어서만 차이가 나는 것으로 이해된다.’2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는 단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왕은... 신과 법 아래에 있으며... 왕은 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러한 견해는 15세기 포테스큐(John Fortescue)[2]에 의해 탁월하게 정교화되었으나, 그에 앞서 브랙턴에 의해 예시된 바 있다.

 

따라서 모순이 존재한다.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이고 법에 근거해 통치되는 나라로, 모든 시민이 왕의 재산을 보유하는 것처럼 왕권이 모든 시민의 수준까지 깊이 침투해 있다. 반면에, 대규모 관료제나 상비군이 없고, 막대한 권력 위임이 이뤄졌으며, 강력한 중간 계층의 자유(liberties)가 향유되고 있다. 메이틀런드는 몽테스키외와 토크빌이 대략적으로 그린 밑그림을 채우면서, 그 틀거리가 어떻게 작동하고 진화했는지 보여주었다. 그는 때때로 우리 민족적 특성에 깊이 뿌리내린 몇 가지 원인들’4에 대해 암시하지만, 그런 모호한 개념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일련의 역사적 우연들(accidents)’에 초점을 맞춘다. 섬나라라는 우연성, 노르만 정복이라는 우연적 사건, 앙주가 출신의 통치자가 지녔던 천재성 등이 그 예다. 이중 어느 것도 종족(race)’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고, 게르만적 기원에 의해 결정된 것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기원과 관습, 언어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은 이 작은 섬에서 점점 더 기묘한 상황을 만들어낸 특이한 화학작용의 일부였다.

 

구조적이고 우연적인 원인들의 혼합을 통해 이러한 기이한 특징이 왜 그리고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어떤 의미에서는 영국의 상세한 역사를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메이틀런드가 관심을 갖고 추구했던 두 가지 주제, 즉 영국법과 로마법의 관계, 그리고 기업과 신탁의 발전을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 중 일부에 다가갈 수 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메이틀런드의 답변에 대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

 

영국법과 로마법의 점증하는 분기에 관한 메이틀런드의 언급은 그의 작품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는 대륙법을 깊이 연구했고, 여러 주요 로마법 학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심지어 가장 위대한 비교법 철학자 중 한 명인 오토 폰 기어크(Otto von Gierke)의 저작 일부를 편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틀런드의 언급들은 대체로 암시적이고 간략하다. 영국에 대해서 했던 것처럼, 대륙 각국의 법적 전통에 대해 상세히 조사했다면, 그의 연구는 지나치게 과장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법체계 비교에 관한 그의 언급들은 당시에 이용 가능했고 그 이후로 출판된 대륙법과 영국법의 비교에 관한 수많은 다른 연구들의 맥락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5 그는 주로 영국 측의 차이점을 살펴보았고, 대륙의 측면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였다. 하여 혹자는 그가 차이점을 과장하거나 왜곡했던 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후대의 위대한 비교사학자 중 한 명인 마르크 블로크가 제시한 프랑스 측의 평가를 보완하려 한다. 메이틀런드의 연구는 또한, 몽테스키외, 스미스, 토크빌이 행했던 이전의 상세한 비교 연구들과 본질적으로 일치하므로, 그들의 맥락에서 독해되어야 한다.

 

메이틀런드는 12~16세기 동안 북유럽의 많은 지역이 새롭게 쇄신된 로마법에 의해 다시 정복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가 말한대로, ‘영국인들은 대륙 국가들이 항상 대륙법(, 로마법)’의 지배를 받았다는 전통적인 믿음을 버리고, 쇄신된 로마 교리가 파리 의회의 법학에 얼마나 서서히 적용되었는지, 독일에서 로마법의 실질적인 계수이 얼마나 오래 지체되었는지, 한때 우리 보통법이 프랑스의 관습법(coutume)과 얼마나 유사했는지 배워야 한다.’6

 

13세기가 되자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영국이 변해서가 아니라 로마법이 영국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영국 법은 뚜렷하게 영국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로마 법학이 프랑스 북부에 서서히 침투하고 있었을 뿐이고 독일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지만’, 13세기에 이르러 많은 영국인들이 이제는 유럽 전체가 로마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대조적인 느낌은 더욱 두드러졌다.7 확실히 16세기까지 영국은 로마법이 지배하는 육지에서 떨어져 있는, 고대 게르만법 체계를 유지하고 있는 섬이었다.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진 사례는 많다. 예를 들어, 계약법과 관련하여 늦어도 13세기에는 우리 영국법이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8 상속과 관련하여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로마의 관념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했지만 '중세 시대 동안 영국에선 로마 체계가 관찰되지 않았다.’9 가족 토지에 대한 일가친족의 광범위한 청구권은 유럽 대부분에서새로운 법학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영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10 노르만족과 앙주가가 영국에 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서서히 생겨난 것과는 다른 체계를 다시 시행하고 수정하며 발전시켰다. ‘우리는 우리의 놀라운 상속법에 대한 책임을 노르만족에게 노르만족이라는 이유로 지울 수 없으며, 앙주가 또한 앙주가라는 이유로 비난할 수 없다.’11 따라서 ‘13세기 이후의 어느 시기를 다룰 때, 영국법의 역사가들은 로마법과 교회법에 대해 침묵할 수 있었다... 그 법들이 엄격하게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고, 특별 법정들에 의해 집행되었으며, 영국의 보통법에 거의 혹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12

 

이러한 차이가 불러온 결과는 엄청났으며, 메이틀런드는 그 중에서도 영국에서 정치적 절대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믿었다.

 

영국의 보통법은 억셌다. 그건 역사상 가장 질긴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법이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 시대에 그랬던 건, 영국으로선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더 단순하고, 더 합리적이며, 더 우아한 체계는 전제적 통치에 적합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왕은 언제든지 법관들을 해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법관들은 왕의 명령에 쉽게 복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투박하고 번거로운 체계는 구부러질 순 있어도 결코 부러지진 않았다. 그 체계는 항상 어설프게 반동하면서 자신을 통제하려는 국가통치술이 틀렸음을 입증하곤 했다. 가장 강력한 왕, 가장 유능한 장관, 가장 무례한 군주-수호자조차도 이 지독한 잡동사니(ungodly jumble)’를 제어할 수 없었다.”13

 

혹은 메이틀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오래된 법은 그 연속성을 유지했다... 결정적인 16세기를 무사히 통과했고, 17세기에는 전제정치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외국을 살펴보면, 이러한 제도들 없었다면, 우리의 고풍스러운 민족적 법률이... 완전히 무너졌을 것이고, ‘지독한 잡동사니가 로마 법학과 전제주의에 자리를 내어주었을 것이라는 타당한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14 대신, 왕은 누구에게도 아래에도 있지 않지만 법 아래에 있다는 모호하면서도 강력한 전제를 가진 보통법이 유지되었다.

 

로마법과는 다른 대안적인 법 체계의 유지와 발전이 영국 특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건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여기서 우리는 널리 흩어져 있는 메이틀런드의 힌트들 중 몇 가지를 요약할 수밖에 없다. 처음 주목해야 할 점은 토크빌이 말했듯이, ‘기원의 지점이다. 노르만 정복 이전에 이미 차이가 두드러졌다. 이건 부분적으로 게르만족 침략이 각 지역에 서로 다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는 로마 문명이 철저히 휩쓸려 버렸다. 그러나 고트족(Goths)과 부르군트족(Burgundians)이 세운 왕국들에선 침입한 게르만족들이 인구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그들 중 대부분은 갈로로마인(Gallo-Roman)[3]이었다. 그리고 야만인들은... 황제의 신하 또는 동맹으로 들어왔다...’15 이러한 차이점은 로마 문명이 법과 종교, 언어의 형태를 띠고서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로 귀환한 반면, 영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국에는 로마니(Romani) 대중, 즉 타락하고 저속한 형태의 로마법에 따라 살아왔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법을 법전(Code)과 법학제요(Digest)에서 찾아 배워야 했던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았다.'16

 

 

유럽 대륙과 영국의 상황을 대조해보면, 그 차이가 명확해진다.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법이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야만족의 침략 이후에도 로마법은 여전히 정복된 지방들에서 인법(人法, personal law)’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크족, 롬바르드족 등 (로마에) 승리한 부족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게르만 관습에 따라 살았고, (로마에) 정복당한 부족들은 로마법에 따라 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다수 주민의 인법이 그들이 살던 나라의 영토에 적용되는 법률(territorial law)이 되었다. 로마법은 다시 한번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서 일반법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순수성을 잃고, 저속하고 통속적이게 되었다. 그 결과로 정통적인 문헌들보다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더 많이 발견되었으며, 그에 관한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2세기 초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볼로냐의 한 법률학교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Justinian)가 편찬한, 황금 시대의 위대한 법학자들의 지혜를 담은 법학제요를 연구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과학이 볼로냐에서 밖으로 퍼져나갔다.”17

 

앵글로색슨 시대 동안 영국에서의 상황은 이와 달랐다.

 

세심하게 훈련된 눈으로 앵글로색슨 법률 문헌들을 면밀히 조사해도, 교회 영역 밖에서는 로마 규율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내지 못했다. 근대적인 연구들에 따르면, 교회 영역 내에서도 게르만적인 관념들이 중세의 교회재산법(the church-property-law), 즉 교회의 성직록(聖職綠, benefice)’[4]에 관한 법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이 규명되고 있다. 이건 갈리아와 이탈리아에서도 사실이었으며, 기독교가 한동안 사라졌던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영국에서 작성된 법은 처음부터 영국인들의 언어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매우 오래되고 야만적인 살리카법전(Lex Salica)조차 라틴어로 된 문서였음에도 그 안에 많은 고대 프랑크어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것들은 게르만 부족법(folk-law) 연구자들의 눈에 독특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였다. 또한, 우리는 그리고 이게 상당히 중요한데 영국에는 로마니들이 자신들만의 법에 따라 살려고 하다가 튜턴족 출신의 통치자들에게 고초를 겪은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18

따라서 노르만 정복 당시에는 이미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했다. 이 차이는 영국의 크기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 따라서 메이틀런드는 영국의 비정상적으로 일관된 법적, 정치적 체계를 설명할 때, ‘우리는 영국이 작고, 평탄한 지형, 명확한 경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썼다. 이는 매우 강력한 배경 요인으로 계속해서 작용했다. ‘이 생각은 실제로 우리가 탐구하는 과정에서 자주 되풀이되어야 한다. 영국은 작다. 그래서 획일화된 법의 지배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게 일반적인 입법을 초래한 것 같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영국의 왕권이 일단 존재하게 된 후부터는 그 통일성을 유지했으며, 형제나 사촌들 사이에 분할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교회와 국가 간의 밀접하고 혼잡한 결합은 국법(the law of the land)에 대립하지는 않더라도 그와 대조를 이루는 독특한 교회법 체계가 발전하는 걸 막았다.’19

 

그러한 지리적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영국이 하나의 국가이자 하나의 주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메이틀런드는 12세기와 13세기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프랑스 역사의 도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민족적 통일(de l’uniténationale)의 재구성이 영국에서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좋든 나쁘든, 로마 문헌들은 중앙집권적이고 군주제적인 권력에 강력한 도움을 주었다. 영국에서 새로운 학문이 작고 동질적이며, 잘 정복되고 많은 통치가 이뤄지는 왕국, 강력하고 입법의 권한을 가진 왕권과 만났다. 그것은 곧 우리에게 다가왔고,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런 후에 외국의 교리에 대한 유익한 저항이 있었다.’20

 

많은 통치를 받는 왕국(much governed kingdom)’에 대한 언급은 메이틀런드의 마지막 두 가지 주요 이론으로 이어진다. 노르만 정복과 그에 뒤 이은 앙주가 왕권의 발전은 영국을 더욱 동질적이고 단결된 국가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왕의 법정에서의 관습은 영국의 관습이며, 후에 보통법이 되었다.’21 또는 더 자세하게 말해, ‘우리의 체계는 단일 체계이며, 웨스트민스터 홀을 중심으로 돌아간다.’22 영국에서 국가(nation)는 연방을 이룬 공동체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곳에서는 왕이 모든 것 위에 있으며, 모든 개인을 직접적으로 지배한다.’23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인 지배는 영주들의 억압에 맞서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166년의 새로운 점유 침탈(신규 강탈, new dispossession)에 관한 법령(the statute of novel disseisin)에 따르면, ‘자유토지보유의 점유권(seisin of a free tenement)은 어떤 영주가 보유하든 관계없이, 왕에 의해 보호된다고 규정하고 있다.24

 

그러므로 메이틀런드의 대답 중 일부는 왕이 너무 막강해서 윗사람뿐만 아니라 교회나 가족의 강력한 청구권들(claims)로부터도 개인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이곳 영국에서는 군주의 청구권으로 인해 오래된 가족 제도가 산산조각이 났다.’25 규정된 친족 집단이 부재한 탓에 가족과 종교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것처럼, 가족과 법 사이에 중첩되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한 간극은 종교 체계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건 게르만인들이 채택한 기독교는... 가족의 가정생활을 중심에 둔 종교가 아니었다... 상속자는 속죄의 희생 제의를 드릴 수 없었고, 그의 집에서 희생 제의를 올릴 수도 없었으며, 제사장직이 그에게 승계되지도 않았다’26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12세기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로마법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서 메이틀런드는 예방 접종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매우 절묘한 주장을 전개한다. 영국은 로마법의 몇 가지 요소, 다시 말해 체계화와 명확성을 어느 정도 흡수하여 자국 법체계를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충분했기 때문에, 차후에 로마법 전체의 계수를 예방했다.

 

 

***

 

메이틀런드는 12세기, 특히 13세기에 로마법이 영국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3세기 이후 유럽 전역에서 로마법은 그 이전의 모든 것을 압도하며 확산되었다. ‘13세기에 파리 의회는 북부 프랑스의 지방 관습을 조화롭게 하고 합리화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그 작업은 로마화함으로써 이뤄졌다. 16세기 문예 부흥이후 이탈리아 법학이 독일을 장악하고 그 이전의 고대 민족법 중 상당 부분이 일소되어 버렸다. 로마법은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약한 사법 체계와 만나기만 하면, 어디에서든 쉽게 승리를 거뒀다.’27

 

영국에 로마법이 일찍 도입되었으며’, 하여 자랑할 정도로 로마법 학파의 역사가 오래된 대학은 옥스포드 외엔 거의 없다.’28 따라서 ‘12세기 중반부터 13세기 중반까지 잠시 동안로마법의 영향력은 강력했다.’ '몇 가지 중대한 격언과 몇 가지 구체적인 규칙들이 채택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들여온 것은 법조항보다는 논리, 방법, 정신이었다.’29 중세 영국 최고의 법률가인 브랙턴의 작업에서 이러한 영향의 범위와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성직자이자 대교구장이었으며, 수년 동안 왕의 재판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법학을 깊이 공부하였는데, 주로 볼로냐의 유명한 법학 박사인 아조(Azo Porcius)의 저작을 탐독했다. 거기서 그는 법률서(lawbook)는 무엇인지, 어떻게 법을 배열하고 서술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고, 격언들과 몇 가지 구체적인 규칙들을 차용하여 우리 영국 법체계의 빈틈을 메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로마화의 방식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30

 

브랙턴은 주로 영국의 보통법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그 이유는 영국의 수많은 영장들(writs)과 판례들(precedents)에서 전문적 재판관들로 구성된 왕의 법정이 그런 건 정복되지 않은 땅 어디서든, 어떤 외국 땅이든 이와 유사한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영국의 보통법을 빠르게 진화시키고, 엄격하고 공식적인 절차의 관례를 확립하며, 이후의 모든 판사들의 손을 묶어두는체계를 보았기 때문이었다.'31 결과적으로 브랙턴의 작업은 로마법을 도입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를 야기했다. ‘브랙턴 시대 이후로 로마법은 영국 보통법에 미미하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도 매력에 이끌린 것보다는 반발에 의한 결과였다. 영국법은 초기에 이미 로마법을 충분할 정도로 흡수하였기 때문에, 향후에 이뤄진 모든 공격을 견딜 수 있었고, 중대한 분기점인 16세기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32 브랙턴이 그의 저서를 쓴 직후인 에드워드 1(1272-1307)의 통치 기간에 영국의 제도들은 마침내 앞으로 몇 세기 동안 유지될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33

 

브랙턴의 연구가 이뤄진 배경과 로마법이 특이하게도 영국에선 더 이상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는 다른 많은 요인에 기인한다. 그중 하나는 앙주가의 왕들이 입법 능력을 발휘하고, 왕의 사법권을 확대한 것이다. 메이틀런드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한다. 만약 앵글로색슨 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영국의 법체계는 무수히 많은 지역 관습으로 분열되었을 것이고, 훗날 영국인들은 참을 수 없는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로마의 영원한 법으로부터 찾았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헨리 2세 치하에서 왕의 법정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열었고, 사법적인 목적으로 가끔 모이는 호전적인 남작들의 임시 모임이 아니라 전문적인 법관들로 구성된 법원이 되었으며, 순회재판관(Eyre)[5]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모든 카운티에 주기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럼으로써 왕의 법정에서의 관습이 영국의 보통법으로 확립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34 이렇게 ‘12세기 중반에 헨리 2세는 영국 사법 체계 전체를 법적 전문성을 갖춘 판사들로 구성된 법원으로 집중시켰다. 이를 통해 헨리 2세는 세수를 벌 수 있었고(중세에는 아무도 공짜로 사법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봉건 가신들의 법정을 통제하고 말라죽게 만들 수 있었다. 왕이 나라에 제공한 왕의 사법권은 강력하고 건전한 상품이었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즉 요먼(yeomen), 소작농들(peasants)이 오래된 지방 법원을 지나 웨스트민스터 홀로 찾아가서 자신들의 사소한 문제를 호소하고 해결을 요청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35 메이틀런드는 헨리 왕과 그의 유능한 각료들이 매우 적절한 시기에 등장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너무 지체된 것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즉 영국법은 통일되었겠지만, 로마화되었을 것이다고 생각했다.36 영국의 체계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의 정치적 측면, 곧 로마법이 계수되면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절대 군주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가 경험들 속에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실수를 거듭하며 지혜에 이르게 된 것은 아마도 우리 자신과 세계 전체를 위해서 잘된 일이었다.'37

 

메이틀랜드에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6세기, 특히 독일에서 로마법이 부활하고 확산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영국이 같은 세기에 다시 로마화될 뻔한 걸 간신히 피했다고 암시했다.38 이후 수많은 역사가들이 이 문제를 조사한 결과들은 필립 2(Philip II)의 침략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로마법의 계수가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걸 시사하기 때문에, 그의 우려는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39 따라서 메이틀런드는 13세기 말에 이르러 영국과 유럽 대륙의 궤적이 결정적으로 분기했다고 주장하였다.

 

로마법 계수의 부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정치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 종교에 변화를 가져왔다. 메이틀런드는 자신의 후기 에세이 『몸의 정치(The Body Politic)[6]에서 영국과 대륙이 분기한 원인에 대해 몇 가지 추가적인 이유를 고찰했다. 그는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저지대 국가들(네덜란드, 벨기에 등), 프랑스, 그리고 영국을 언급하며, ‘1150년에서 1300년 사이의 결정적인 시기에, 이 모든 국가 중에서 영국만이 유일하게 이단자들을 박해하지 않았고, 박해할 이단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썼다. 이는 법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다른 모든 곳에서는 이단 재판을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3(Innocent III)가 고안한 심문 절차가 세속 법정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이게 분기점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고 인정했다. ‘더 얘기하자면, 12세기 영국을 모든 유럽 국가들 중에서 통치가 가장 잘 이뤄지고, 가장 널리 이뤄지는 나라로 만든 원인에 대해 논해야 할 것이다. 만약 토크빌이 1200년에 우리를 방문했다면,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영국의 문명과 영국의 관료제에 대해 그의 동포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서 그는 카타리파(Cathar)[7] 이단을 언급할 때, 분기의 극도로 중요한 원인을 짚은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언급했다. 또한, 카타리파 또는 알비파(Albigensian)[8] 이단이 남부 프랑스’, 특히 랑그도크 지역에서 풍토병처럼 만연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이 부분을 외면하기로 결정하고, 영국의 역사가 비록 분기되었지만 다른 역사와 마찬가지로정상적이었다고 주장하며 논의를 끝맺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증하는 분기의 원인들을 더 폭넓게 고려할 때, 메이틀런드의 마음은 로마법과 종교, 또는 심지어 섬이라는 요인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동안 간과되었지만 매우 중요한 분기의 원인을 조사하는 게 가능하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6장 각주

1 Maitland, History, I, 515–16.

2 Maitland, History, I, 512.

3 Maitland, Constitutional, 100, 198–9.

4 Maitland, History, I, 344.

5 예를 들어, Vinogradoff, Roman LawStein and Shand, Legal Values을 참고하라.

6 Maitland, History, I, xxxvi.

7 Maitland, History, I, 188.

8 Maitland, History, II, 185.

9 Maitland, History, II, 361.

10 Maitland, History, I, 344.

11 Maitland, History, I, 266.

12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30–1.

13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84–5.

14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95–6.

15 Maitland, History, I, 13–14.

16 Maitland, History, I, 24.

17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39–40.

18 Maitland, Selected Essays, 100; 이와 유사한 설명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라.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28–9.

19 Maitland, History, I, 20–1.

20 Maitland, History, I, 24.

21 Maitland, History, I, 184.

22 Maitland, Collected Papers, I, 483.

23 Maitland, History, I, 688.

24 Maitland, History, I, 146.

25 Maitland, History, II, 445.

26 Maitland, History, II, 257–8.

27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41.

28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41.

29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43.

30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44.

31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44.

32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44–5.

33 Maitland, Selected Essays, 105.

34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34.

35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38.

36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38.

37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39.

38 Maitland, Selected Essays, ch. vii.

39 Elton, Maitland, 79–88 여기서 몇 가지 주장들을 요약한 걸 볼 수 있다.



[1] 윌리엄 스텁스(1825~1901)는 성공회 체스터 교구와 옥스퍼드 교구의 주교를 지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근대사 강의를 담당한 교수(Regius Professor)였다. 노르만족의 정복부터 1485년까지 영국법의 발전 과정을 추적한 그의 영국헌정사(Constitutional History of England)』는 오랫동안 법제사, 정치사 등 관련 분야의 교과서로 널리 읽혔다. 봉건주의와 관련해, 스텁스는 봉건적 관계에서 군주에 대한 봉사의 대가로 주어진 봉토와 그에 수반된 권리들이 오히려 영주들의 탐욕을 부추기고 영주들 간의 갈등을 조장하여 내전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1세 치하에서 가신들에게 봉건적 증여를 왕실 지급금으로 대체하자 영주가 왕에게 충실히 복종한 것을 주요 증거 중 하나로 들었다. 이러한 스텁스의 주장은 훗날 20세기 초중반 중세 후기 영국의 역사 연구로 명성을 떨친 맥팔레인(K. B. McFarlane)에 의해 반박되었다. K. B. 맥팔레인은 ‘Bastard feudalism’이라는 논쟁적인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봉건적 관계가 왕과 영주 사이에 공통의 이해관계를 형성하도록 하여, 체제을 안정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K. B. 맥팔레인은 단순히 재정적 측면만이 아니라 복종과 봉사의 대가로 주어지는 다양한 것들의 유용한 효과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후대 영국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여전히 핵심 쟁점을 이루고 있다.

 

[2] 존 포테스큐 경(1394~1479)은 헨리 6세가 통치하는 동안 재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왕의 대법관(Lord Chancellor)을 지냈다. 영국법의 체계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영국법에 대한 찬양(1470년경, De Laudibus Legum Anglie)>의 저자로 유명하다. 여기서 그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로마에서 유리한 대륙법을 평가절하하고, 영국의 법제도들을 높이 평가하면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영미법 체계의 배심원 제도의 기본적 원칙으로 남아 있는 무고한 사람이 벌을 받는 것보다 죄인이 도망치는 것이 낫다라는 도덕적 명제를 세웠다. 나아가 영국의 헌정 체제를 연구하면서 절대 군주제와 입헌 군주제를 비교하는 등 이후 영국의 입헌주의 전통, 자유주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3]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서 로마화된 갈리아인들을 가리킨다.

 

[4] 성직자는 직무를 맡으면서 특정 임지와 그에 따른 수입을 부여받는다. Benefice, 즉 성직록은 성직자가 직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받은 땅과 거기서 나오는 경제적 수익 일체를 가리킨다.

 

[5] 영국의 사법 체계는 10세기 동안 정비되면서 초기 모습을 갖추었는데, 법정은 크게 국가적 사안을 다루는 특별법정과 그 외 여러 사안을 다루는 일반법정으로 구분되었다. 일반법정은 관할 범위와 권한 주체 등에 따라 주 법정, 영주 법정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헨리 2세때부터 국왕이 임명한 재판관들이 지방법정을 자주 열기 시작하였고, 이들 재판관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각 지방에서 재판을 열었다. 이들을 가리켜, 순회재판관이라고 부른다. 순회재판은 왕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사법권 집행을 가능하게 해주면서도, 각 지방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시행되었다. 순화재판관은 담당 사건이 발생한 지방 관습을 참고하여 심리하였고, 각 지방의 관습을 비교하여 판결을 내렸다. 이 판례들이 이후 사건들에서 점차 법적 효력을 갖게 되면서, 보통법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영국 내 사법권이 획일성과 통일성을 형성 및 행사토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다른 한편, 에드워드 1세 시대에는 기존의 순회재판소에 더해, 형사사건을 주로 다루는 왕의 법정, 소유권-점유권 분쟁이나 채무 다툼과 같은 민사사건을 주로 다루는 일반청원법정, 횡령과 사기 등 경제사범을 다루는 재무성법정을 설치하여 왕의 사법권 행사를 다양하게 강화하였다.

 

[6] 이 글은 메이틀런드의 여러 저술을 편집하여 출판한 The Collected Papers of Frederic William Maitland의 제3(The Collected Papers of Frederic William Maitland, vol. 3)p.285-303에 수록되어 있다. https://oll.libertyfund.org/titles/fisher-the-collected-papers-of-frederic-william-maitland-vol-3

 

The Collected Papers of Frederic William Maitland, vol. 3 | Online Library of Liberty

Vol. 3 of a three volume collection of the shorter works of the great English legal historian, including many essays on aspects of medieval law and some biographical essays.

oll.libertyfund.org

 

[7] 카타리파는 12세기에 툴루즈를 거점으로 삼아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에 널리 활동했던 종교 집단이다. 이들의 어원은 청정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타로스(καθαρὀς, katharos)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선과 악, 신과 악마, 천국과 현세, 영혼과 육체 등을 뚜렷하게 대립시키는 이원론을 주장하였고, 영지주의적 색체가 강했다. 물질 세계에 갇힌 영홍이 속세를 떠나 영적 세계인 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어서, 구원을 받으려면 악한 세상과 관계를 완전히 끊고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 외에 당시에 기존 가톨릭 교회에 대항해 활동하던 바타리니파, 랑그도크파, 알비파 등이 있는데, 이들이 동일 그룹인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등은 불명확하다. 12세기 후반 이들의 교세가 강력해져 기존 교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122년에 카파리파 신도의 첫번째 처형이 이뤄졌고, 결국 1179년에 열린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금지하는 결정이 공식적으로 내려졌다.

 

[8] 알비파는 12-13세기에 남부 프랑스 알비(Albi)를 중심으로 생겨난 종교 집단으로, 카파리파에서 파생하였다. 이들 또한, 카파리파와 유사하게 기존 교회의 모든 교리를 배척하였으며, 이원론을 따랐다. 선과 악이 세상을 구성하는 두 가지 원리로 영원히 대립하며, 육체와 물질은 악의 원리에서 온 것이다. 하여 그들도 카타리파와 마찬가지로, 육체와 물질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도 인간을 구원한다는 건 곧 악의 원리인 육체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따라 육신과의 결합을 상징하는 결혼, 육식 등을 죄악시하는 엄격주의를 주창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여러 포교 활동을 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1208년 교황 특사 살해 사건을 계기로, 알비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알비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그들을 학살했다. 이후 1233년 그레고리오 9세가 도미니코회에 알비파를 단죄하는 종교재판을 대대적으로 열었다. 그걸 끝으로 알비파는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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