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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의 형성 서양과 동양의 비전들>, 서문과 1장

원제: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 Visions from the West and East

 

 

알란 맥팔레인(Alan Macfarlane)

번역: 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저자 소개

앨런 맥팔레인은 1941년 출생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런던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뒤 중국, 일본, 네팔 등 전 세계를 여행하며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한 인류학자다. 1971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인류학, 문화인류학 교수로 재직했다. 초기에는 14~19세기 영국 사회, 네팔 중부의 구룽족, 버마-인도 국경 지대의 나가족에 관해 연구했고, 후기에는 비교 연구방법론에 근거해 자본주의의 기원과 과정, 개인주의와 근대 세계의 등장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대 정보 검색 시스템과 시각 중심 미디어에도 관심이 많다. 20권 이상의 저서를 집필하였고, 대표적으로 Witchcraft in Tudor and Stuart England: A Regional and Comparative Study(Routledge, 1970), The origins of English individualism : The Family, Property and Social Transition(Blackwell, 1978), Marriage and Love in England: Modes of Reproduction 1300-1840(Blackwell, 1986), The Culture of Capitalism(Blackwell, 1987), The Riddle of the Modern World: Of Liberty, Wealth and Equality(Palgrave Macmillan, 2000),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Visions from the West and East(Palgrave Macmillan, 2002)이 있다. 한국에는 에세이 릴리에게, 할아버지가(이근역 옮김, 2015, 알에이치코리아)가 번역되었다. 자신의 연구를 아카이빙하고 소개하는 홈페이지(http://www.alanmacfarlane.com/)와 유뷰트 채널(https://www.youtube.com/@ayabaya)을 운영하고 있다.

 

 

 

간략한 책 소개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Visions from the West and East(Palgrave Macmillan, 2002)은 근대 세계를 사유하는 데 커다란 이정표를 세운 두 사상가인 영국의 F. W. 메이틀런드와 일본의 후쿠자와 유치키를 다룬다. 여기서 맥팔레인은 메이틀런드가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과 신탁(trust)을 탐구함으로써 근대라는 이상한 세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다음으로 유키치에 관해선 근대 일본의 제도적 기틀을 세운 인물로, 서구 밖에서 자본주의와 산업 문명의 핵심에 관해 통찰력 있는 논의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책이 출간되던 시점은 세 번째로 맞이하는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때였다. 맥팔레인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부를 토대로 삼은 거대한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변화를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 세계의 기원, 과정, 결과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중 메이틀런드의 작업은 근대 세계와 자본주의의 제도적 기반인 신탁에 주목하도록 하며, 근대 이전의 세계를 형성했던 어소시에이션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근대 세계와 자본주의의 본질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책의 원문이 수록된 PDF 파일은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다. 아래 링크에서 다운 받을 수 있다.

https://monoskop.org/images/e/e7/Macfarlane_Alan_The_Making_of_the_Modern_World_2002.pdf

 

** <신탁의 정치학> 코너에서 번역, 소개할 본 챕터의 원문 목차

Part I. F. W. Maitland: The Nature and Origins of the Modern World
Preface to a Study of F.W. Maitland
1. F.W. Maitland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2. The Legacy of Sir Henry Maine
3. Life, Work and Methods
4. Power and Property
5. Social Relations
6. The Divergence of Legal Systems
7. Fellowship and Trust
8. Maitland and Durkheim
9. Maitland Assessed

 

 

 

파트 1. F. W. 메이틀런드: 근대 세계의 본성과 기원

 

F. W. 메이틀런드의 연구를 위한 서문

 

이 책에서 제시하는 F. W. 메이틀런드의 작업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려면, 내가 어쩌다 그의 사상에 주목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 영국 개인주의의 기원 : 가족, 재산 및 사회적 전환(the Origins of English Individualism; the Family, Property and Social Transition, 1978) 』 에서 나는 근대 세계의 기원을 탐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책에서 몇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그중 하나가 근대 개인주의의 정확한 연대와 출처에 관한 것이었다. 근대 개인주의가 어디에서 왔는지, 왜 영국이 유럽 대륙의 대다수와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하지 못했다. 또한 권력관계의 더 넓은 맥락, 특히 봉건주의 내에서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놓쳤다. 내가 발견했던 사람들처럼, 개인주의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들을 성취했는지에 관한 질문도 다루지 못한 영역 중 하나였다. 내 연구는 중세 농민의 본성에 관한 특정 이론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다른 극단으로 나아갔으며 영국인을 로빈슨 크루소 같은 형상으로 축소해버렸다. 당시에는 이게 건전한 수정이었을지 모르지만, 근대 문명들을 작은 조각들로 쪼개는 것만큼이나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근대 문명들의 힘과 영향력을 설명하기 어렵다.

 

이 책의 첫 번째 파트는 내가 과거를 다시 사유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받았고, 이전 책에 영감을 준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원천이었던 한 사람의 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메이틀런드의 작업을 연구함으로써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난제를 탐구하고, 영국 개인주의에 관한 앞선 내 연구를 넘어서는 일련의 후기 연구의 시도를 확장하려고 한다.1) 나는 메이틀랜드를 개인주의와 어소시에이션이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는 문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한 사람으로 여긴다.

 

따라서 이는 논쟁적인 작업이며, 그렇기에 아주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연구인 것처럼 이 글을 읽어서는 안 된다. 주지하다시피 나는 메이틀런드를 무척 존경한다. 하지만 불가피하게도 나는 내가 찾던 바로 그 메이틀런드(the Matiland)를 발견했고, 그의 사상을 내 주장과 경험에 끼워 맞추었다. 그럼에도 그의 연구가 지나치게 왜곡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또한, 부득이하게도 그의 사상에 관한 내 미사여구와 의역 그리고 요약이 때때로 그가 말했을지도 모를 내용을 생략해버리거나 그의 메시지를 지나치게 단순화할지도 모른다. 나는 백여 년 전에 그가 사용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 문구나 단어를 거듭 사용한다. 이 모든 것과 관련해 독자들에게 주의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독자들이 내 해석의 대부분을 메이틀랜드가 쓴 본문과 대조해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글을 충분히 인용했길 바란다.

 

내가 메이틀런드에게 매료된 건 그가 단순히 기술적, 법적, 역사적 문제 이상의 무언가를 두고서 평생을 고군분투한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자유, 평등, 박애를 어떻게 화합시킬 것인가라는 더 포괄적인 문제를 마주했다고 생각한다. 메이틀랜드가 여러 위대한 사상가들이 직면했던 문제인 (신분에 기반한) 집단주의 문명과 (계약에 기반한) 개인주의 문명 사이의 이분법을 그 누구보다 만족스럽게 해결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메이틀런드는 근대 사회를 살았던 사람들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의 이면에 있는 경직성과 유연성의 강력한 혼합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메이틀런드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전에 그에 관해 글을 쓴 거의 모든 사람의 해석과 다르다. 나는 메이틀런드를 위대한 역사학자나 법학자로 취급하는 대신(물론 둘 다 논쟁의 여지 없이 옳다), 암묵적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그를 위대한 정치 철학자 세 명, 즉 몽테스키외, 애덤 스미스, 토크빌과 같은 자리에 위치시키려 노력했다. 철학에 관한 그의 초기 관심을 고려하고 그의 저술들 이면을 살펴보면, 메이틀랜드가 이 위대한 사상가들과 동급이며 같은 관심사를 공유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국을 핑계 삼아 민주주의근대성에 관해 글을 썼던 토크빌처럼, 메이틀런드도 궁극적으론 영국법의 역사를 현대 세계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서문 각주

1. 후기 작업 중 일부를 참고하려면, 맥팔레인의 결혼과 사랑(Marriage and Love)(특히 결론부), 자본주의의 문화(Culture of Capitalism), 평화의 잔인한 전쟁들(Savage Wars of Peace), 근대 세계의 수수께끼(Riddle of the Modern World)를 보라.

 

F. W. 메이틀런드(1850-1906)

 

 

1F. W. 메이틀런드와 근대 세계의 형성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장학금을 받기 위해 메이틀런드는 <홉스 시대부터 콜러리지 시대까지 영국 정치 철학의 이상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역사적 스케치>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했다. 그는 25세에 이 논문을 자비로 출판했다.1) 메이틀런드는 이 장문의 학술 논문에서 홉스, 로크, , 애덤 스미스, 루소, 칸트, 콜러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밀 등의 저작을 포함해 200년 전 자유에 관해 논의한 위대한 사상 대부분을 요약 및 분석했다. 중심 주제는 개인이 더 큰 집단에 포함되는 방식이었다. 이런 초기 작업을 통해 철학적 문제들의 밑그림을 그려두었기에, 말년에 이르러 그가 영국의 역사적 기록들을 탐구함으로써 근대적 자유(the modern liberty)가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재검토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봉건 시대에서 이어지는 국가와 시민의 관계, 앵글로색슨으로부터 기원하는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 그리고 가족과 개인의 관계를 조사했다.

 

메이틀런드는 특히 재산(property)과 권력(power)과 관련해, 영국에서 개인의 독특한 자유(a peculiar liberty)가 아주 일찍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헨리 메인 경(Sir Henry Maine)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시대 사람들과 달리, 그는 모든 사회가 공동체(Community)에서 어소시에이션(협회, Association)로 이동한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는 영국에는 앵글로색슨 시대 이래로 기본적인 자유(basic liberty)와 개인주의가 존재했다고 봤다. 따라서 그는 자유(freedom)와 행동의 자유(liberty of action)가 당시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던 특이한 영국 구조의 핵심적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인이 더 포괄적인 집단에 통상적인 방식으로 묻어들어 있지 않다면, 두 번째로 큰 통합하는 힘인 위계(hierarchy)는 어떻게 되는 건가?

 

기본적으로 메이틀런드는 평등과 불평등의 본성과 그 함의라는 토크빌의 중심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영국의 법과 사회 구조의 본성상 출생에 따라 물려받는 차이 같은 건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항상 그래왔다는 걸 보여준다. 사회적 지위, 부모의 권력, 성별를 막론하고 모든 차이는 계약의 결과, 즉 현대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타고나는 게 아니라 성취한 결과다. 따라서 그는 과거의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경쟁적이고 유동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그림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가 알고 있었듯, 이 모든 것은 매우 이례적이고 매우 중요하다.

 

메이틀런드는 자유와 평등의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자세히 분석하는 일로 평생을 보냈고, 실제로 일어난 일에 비춰볼 때 신분에서 계약으로의 이행에 대한 유명한 이론들 대부분이 심각할 정도로 지나치게 단순화된 설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지만, 말년에 이르러 중대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토크빌이 깨달았던 것처럼, 사람들이 (공동체, 사회적 지위 또는 가족에서) 타고난 신분에 의해 결속되지 않는다면, 무엇이 그들을 응집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함께 행동하여 무언가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이건 몽테스키외와 애덤 스미스 또한 고민했던 문제였지만, 세 사상가 중 누구도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메이틀랜드가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거의 무시되었던 회사(corporations)와 신탁(Trusts)에 관한 그의 주장에서 말이다.2)

 

그가 다룬 또 다른 문제는 영국이 유럽 대륙에 이웃한 국가들 대부분과 다른 모습을 갖게 된 이유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토크빌을 비롯한 그의 전임자들의 통찰, 즉 영국이 섬이라는 사실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을 확장하고 부연하며 실증한다. 섬이라는 특성은 여러 결과를 가져왔는데, 메이틀런드는 그중 일부를 특이한 형태의 봉건제와 의회 제도의 발전과 같이 권력 균형 내의 긴장과 관련지어 탐구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한 가지 징표는 그가 유럽 대륙에서 로마법이 복원되는 것과 달리, 영국에서는 보통법과 형평법이라는 상이한 발전이 일어난 것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는 또 다른 주요 특징인 변화하는 동일성’, 즉 연속성과 변화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해서도 강한 흥미를 느꼈다. 그는 통상적으로 빠지는 함정 대부분을 피하면서 연속성을 지닌 변화에 대해 섬세하게 설명하는데, 이는 역사에 대한 비진화적, 비혁명적 접근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처럼 메이틀런드는 56세의 나이로 불의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영국(그리고 미국) 문명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자유, 평등, 박애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지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다. 흥미로운 건 그의 연구 결과들과 비전이 전문적인 법학자들 사이에서는 보존되고 있지만, 일반적인 역사가와 대중들 사이에서는 거의 잊혀졌다는 점이다. 나 역시 1960년부터 1966년까지 6년 동안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메이틀런드를 마주친 기억이 없다. 이러한 기억상실증은 패러다임 전환을 논의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것, 즉 높은 수준의 초기 지식이 조용히 잊혀지는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3)

중세 도시의 풍경

 

***

메이틀런드가 실제로 오랜 계몽주의 전통의 일부였고 자유·평등·박애의 본질과 기원에 관해 커다란 물음을 던졌다면, 우리는 그의 공헌을 논하기 전에 그가 따른 선구자들에 관해 더 많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처음부터 메이틀런드에 관한 원고를 몽테스키외, 애덤 스미스, 토크빌이라는 세 사상가의 사상을 고찰하는 긴 저작의 마지막 부분임을 염두하며 썼다. 이 세 사람에 관해 다루자면 그 자체로 한 편의 책을 써낼 정도이나, 그들의 사상과 누적된 관련 연구 결과를 요약하는 건 메이틀런드의 탐구 여정과 그를 다루는 내 논의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4)

 

이 세 사상가가 한 일은 직관과 한정된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이전 세계로부터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강한 가설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용할 수 있는 자료 범위 내에서 로마 제국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며 탐구했다. 로마 문명에 관한 그들의 연구는 로마가 민주적 이상을 버리고 일상 깊숙이 위계적이고 절대주의적인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세 사상가는 근대적 자유와 평등의 뿌리가 다른 곳에 놓여 있다고 믿었다. 몽테스키외는 그 뿌리를 로마 제국을 유린한 독일 숲의 유목 부족들에서 찾았고 서유럽에 그 민주적 기원의 제자리를 되돌려준 걸로 유명하다. 유목 부족들은 호전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평등주의적이었다. 이들은 놀랍도록 발전한 화폐 의식(money-consciousness)과 사법 체계를 바탕으로 옛 로마의 땅 곳곳에 안정된 소왕국들을 세웠다.

 

그들은 12세기까지 서유럽이 일률적으로 봉건적이었음을, 인위적인(artificial)’ 봉건적 계약, 의지의 행위, 특정한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양도하는 합의가 사회의 기초였음을 시사했다. 출생에 따른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중심부가 지나치게 강하지 않았으며, 친족 관계는 정치에 있어 부차적이었고, 종교는 중요했으나 너무 센 영향력을 갖진 않았다. 다시 말해, 유럽 국가들은 제도적 힘,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 통치자, 성직자, 민중의 야망들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지 않도록 균형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이 균형 잡힌 긴장의 시기에 기술적, 예술적, 지적 성장이 급속히 이루어졌다. 말과 쟁기를 활용하는 농업의 확장, 수력과 풍력의 보급, 이슬람을 통한 그리스, 인도, 중국 과학의 수용, 대학 설립, 도시와 무역의 성장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다른 국가들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할지라도, 잉글랜드는 세력 균형의 극단적인 예다. 잉글랜드는 섬에 자리했기에 왕권이 비정상적으로 강력해졌고, 이후 앵글로색슨족 왕들에 의해 중앙집권적이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이지는 않은 군주제가 등장했다. 노르만 왕가(Normans)와 앙주 왕가(Angevins)의 귀재들이 이러한 구조를 공고히 하고 동질화하여, 13세기까지 잉글랜드를 급속히 발달하는 기술, 상호 연결된 무역, 강력한 군대, 호황을 누리는 도시를 갖춘 부유하고 강력하며 잘 통치되는 땅으로 발전시켰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는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 봉건제가 더 발달한 게르만 왕국이었다.

 

몽테스키외(1689-1755)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약 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봉건문명 단계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문명으로 가는 관문을 제공했다. 크고 다양한 농경 문명은 경쟁하는 작은 준(quasi)-국가들로 분열되었다가 기독교 아래에서 통합되었지만, 각자의 차이점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시스템은 출신에서의 차이가 아니라 계약상의 유대, 소속보다는 성취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점점 커지고 있었고 교회와 국가의 권력은 서로 적대하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어느 쪽도 지배적이지 않았으며 아직 긴밀한 동맹을 형성하지도 않았다. 한때 친족 관계(kinship)가 누렸던 권력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곤란하고 인구마저 부족한 환경에서 노동력을 절약하기 위한 기술 혁신이 권장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업과 마을도 장려되었다. 사상과 회복된 지식은 강한 영향력을 지닌 성직자들의 질투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들은 이후 500년 동안 유럽 대륙 대부분에서 균형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농업 구조의 정상적인 경향들과 곤경들, 증가하는 지식과 부가 제공하는 유혹들과 수단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통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의 위협, ‘이단’(십자군 전쟁과 알비겐파 Albigensianism)의 위협, 부를 창출하는 자들을 앞지르려는 욕망, 이 모든 것이 균형을 기울이는 힘이었다.

 

절대주의 국가와 교회를 출현시킨 제도적 메커니즘은 잘 알려져 있다. 가톨릭 종교 재판,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로마법의 수용, 카스트와 같이 귀족을 위한 것인 출신에 따른 특권의 등장, 무역 길드와 도시 정부(town government) 등 모든 중간 조직체(intermediary bodies)자유(liberties)’의 파괴, 상비군과 중앙 관료제의 규모 증가, 이 모든 것이 연구를 통해 일련의 목록으로 만들어졌다. 본질적으로 유럽 문명은 계약(contract)’의 유연성에 기반한 봉건적문명에서 신분(status)’에 기반한 앙시엥 레짐으로 옮겨갔다. 영역들(spheres) 사이의 긴장과 분리가 사라졌다. 구심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즉 모든 게 위쪽으로, 중심을 향해 끌려갔다.

 

그러나 국가적 또는 지역적 차원 모두에서 예외가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자유 도시가 부상한 것이 좋은 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무너졌고 이러한 경향은 계속되었다. 18세기에는 통상적인 장벽들, 즉 전쟁, 기근, 질병, 점점 더 빈곤해지는 농민, 기생하는 귀족, 보수적인 성직자, 독단적이고 전제적인 법, 거대하면서도 무기력한 관료제, 이를 유지하기 위한 무거운 세금, 상인과 생산자들에 대한 약탈의 증가 등이 널리 퍼져 있었다.

 

17세기 후반까지 이로부터 명백히 벗어난 예외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1인당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던 네덜란드였고, 다른 하나는 잉글랜드였다. 네덜란드의 사례는 경쟁 세력 간의 균형이 어떤 이점을 가져다주지를 잘 보여준다. 분리와 균형, 정치적·종교적 자유의 장려, 권력의 분산, 극단적인 계층화의 방지와 같은 자유주의적 노선이 부의 급속한 성장을 촉진하였으며, 작은 나라가 그러한 선순환 구조를 가짐으로써 서구에서 가장 큰 제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여러 이유로 이러한 높은 수준의 상업 경제를 넘어서는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

 

***

이 세 작가는 잉글랜드가 어떻게든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예외라고 믿었다. 1200년 당시 잉글랜드는 중앙집권화되고 합리적으로 잘 통치되었다는 점에서 서유럽 패턴의 모범이었다. 우리는 이로부터 잉글랜드가 급속한 기술적·생산적 발전과 결합해,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는 보통의 경향에 의해 조숙한 형태의 함정, 즉 극도로 절대주의적이고 계층화되어 있으며 불관용적인 종교 재판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 빠졌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1739년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때, 몽테스키외는 잉글랜드가 나머지 유럽과 거의 닮지 않았다고 믿었다.

 

지난 50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토록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되었으며,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본질적으로 이 차이점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유럽 대부분을 휩쓸었던 세 가지 커다란 경향이 (잉글랜드에선) 발생하지 않았다. 법 위에 통치자가 있으며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없는, 이른바 정치적 절대주의와 중앙집권주의가 확립되지 않았다. 존 왕, 헨리 8, 찰스 1, 제임스 2세 때와 같이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군주제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그때마다 실패했고, 짧은 기간의 절대주의적 통치는 마그나 카르타, 엘리자베스 시대 의회의 등장, 왕실 토지의 매각, 국왕 참수, 휘그의 왕정복고 등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민주주의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하원(서민원, the Commons)의 권력은 점점 커졌고 몽테스키외 시대에는 압도적으로 비교될 정도에 이르렀다.

 

유럽 대륙의 대다수 지역에서 생겨났던 절대주의의 트래핑과 메커니즘은 발전할 수 없었다. 대규모 중앙 관료제가 없었고, 대신 자경단(constable)이나 치안 판사와 같은 자발적이고 명예로운 권력 보유자들의 복합체를 통해 (중앙에서 지역으로) 권력이 이전되었다. 조세는 비교적 부담이 낮았고, 그러한 조세 방식은 하원에 의해 빈틈없이 보호되었다. 상비군은 없었고 고용된 용병도 거의 없었다. 게르만 침략자들이 물려준 법률 체계인 영국 관습법이 유지되었으며, 직권탐지주의적이고 독단적인 후기 로마법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권력의 부패라는 보통의 경향이 없었다는 징후이자 연관된 특징이다. 놀랍게도 그 나라는 꾸준히 부유해졌음에도, 부가 분배되었고 재산은 안전했으며 사람들은 권리를 가졌고 왕은 법 아래에 머물렀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종종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기적은 일어났다.

 

 

둘째, 기독교의 권력이 커지고 세속적인 당국과 조약을 맺는 경향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국가와 교회 사이에는 깊은 갈등이 남아있었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제압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토마스 베케트부터 수도원 해산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 왕실은 교회를 견제했다. 왕실과 교회 모두 14세기 종교 재판의 발흥이나 16세기 유럽 대륙의 반()-종교개혁에서 성직자 권력이 대대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모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열렬하고 보수적인 세력으로 뭉치는 대신, 롤라드파(he Lollards)와 같은 종교개혁 이전의 독립적인 종파가 등장했고 종교개혁을 통해 개인을 종교의 중심에 두었고 신권정치(theocracy)의 중재가 약해졌으며, 마침내 종파주의가 성장하고 종교가 개인적인 문제가 된 균형 잡힌 관용의 시대가 열렸다.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 아니라 최종적인 분리가 이뤄졌고, 종교 역시 경제적 삶에서 물러났다. 다시 말해, 경제적 삶은 개인의 양심에 맡겨졌다.

 

세 번째는 중대한 것인데, 타고난 서열 사이에 카스트와 같은 장벽이 생기고 그게 점점 더 경직되는 식의 일반적인 형태를 띤 내부의 사회적 약탈 경향의 부재였다. 특히 토크빌이 훌륭하게 주장했듯이, 상류 귀족, 하층 부르주아지, 몰락한 농민으로 나뉘는 정상적인 계급 분할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혈통보다는 부와 성취된 지위를 기반으로 하는 전례 없는 사회 구조가 등장했다. 실질적으론 매우 불평등한 체계(inegalitarian)가 여전했지만, 그 안에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 또한 소수의 특권층이나 문맹인 농업생산자 대중이 아니라, 나머지 인구 대다수가 중간 계층에 자리했다. 잉글랜드 유산계급(젠틀맨)의 독특한 등급인 요먼(yeoman)’이라는 예외적인 신분의 존재, 높은 지위를 누린 상인과 장인, 영지(country) 거주자의 번영 등 이 모든 것은 고대 카스트나 신분 제도(estate system)가 아니라 특이한 무언가, 즉 시원적 계급(protoclass)의 징후들이었다. 이러한 부와 권력, 자유의 광범위한 확산은 분명히 정치적 절대주의의 가능성을 반영하고 있었고 그에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에선 이러한 현상이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다.

 

하지만 앵글로색슨 문명에서 상당히 유사한 기원을 가진 영국이 왜 정상적인 경향을 거스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와 관련해 서로 연관된 두 이론이 제기되었다. 하나는 몽테스키외가 개발하고 스미스가 확장한 것으로 물질적 부, 특히 무역과 소비의 숨겨진 효과에 관한 것이었다. 가장 조잡한 형태의 이 이론은 다른 모든 조건이 같을 때 한 국가가 장기간 물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군주와 교회가 권력을 획득하려는 경향은 탐욕에 의해 그 향방이 좌우될 거라고 보았다. 군주들은 가신(retainer)보다는 소비 물자를 선호하게 되면서 군사적 협상력을 잃게 된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탐욕에 눈이 멀어 지상에 보물을 쌓으면서 백성들의 사랑을 잃고 수도원처럼 거의 모든 영향력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물론 권력자들이 변형된 약탈을 선호하거나 심지어 생산에 손을 댈 수 있을 정도로 전환할 때까지, 이러한 수준의 성장을 충분히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어려웠다. 보통 그런 일은 짧은 기간만 그리고 피렌체나 시에나 같은 도시 인근의 제한된 지역에서만 일어났다. 그러나 그러한 안식처는 곧 외부의 약탈자들에게 노출되었고 영주와 사제들의 약탈에 기반한 일반적 형태의 지배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이 이론은 수준 높은 유럽 대륙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고 충분히 큰 섬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잉글랜드의 독특한 특징과 관련이 있다. 잉글랜드는 자신을 방어하고 내부적으로 많은 다양성과 교역을 창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컸다. 잘 갖춰진 함대로 방어하는 한, 공격하거나 위협하기 어려울 정도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일본은 100마일이 아닌 20마일 정도로 대륙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달리) 더욱 고립되었다. (잉글랜드의) 가장 큰 약점은 섬 북쪽에 더 호전적인 민족, 즉 스코트랜드 지역의 하이랜더 부족과 인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행히도 하이랜더들은 그 수가 많지 않았고 때때로 습격해오는 성가신 존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03년 왕조가 통일되면서 지상을 통한 침략 위협이 완화되었고, 1715년과 1745년의 사건은 잉글랜드가 영토 방어를 얼마나 소홀히 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커다란 육지에 사는 호전적인 이웃이 없다는 것은 엄청난 이점이었다. 기본적으로 약탈의 유혹과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잉글랜드와 같은 나라는 몽골이 겪은 것과 같은 평원의 재앙을 겪지 않았기에 기반 시설의 분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 남부는 전쟁으로 인해 정점에서 끌어내려졌는데, 교전 중인 군대로 인한 그와 같은 파괴적인 결과가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 노르만족의 침략, 장미 전쟁(the Wars of the Roses),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은 대륙 국가들이 겪은 일반적인 경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둘째,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균형이 바뀌었다. 나라 밖 침략자들의 위협과 그에 대한 지속적인 적대감 덕분에, 지배자들은 민중들에게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세금과 복종을 강요할 수 있었다. 민중들은 정치적 절대주의의 가장 강력한 수단, 1640년대 영국에 존재했다면 유럽 대륙 식의 절대주의를 불러일으켰을 상비군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도 되었다. 비무장한 민중들은 비무장한 지배자, 또는 강력한 해군만으로 방위 체제를 갖추었던 통치자에게 맞설 수 있었다.

 

세 번째 결과는 외적 팽창에의 유혹이다. 12~14세기 동안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서 열성적으로 약탈을 벌였는데, 이러한 약탈은 합스부르크 왕가나 루이 14세를 유인했거나 고대 로마의 민주주의를 파괴한 주요 요인이 되었던 것과는 다른 본성을 띠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목표가 한정되어 있었고 그건 특정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모험을 장려했던 왕조의 요구는 그러한 모험이 필수품이 아니라 사치품이었음이 분명했다. 왕이 십자군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싶었던 것처럼 그런 식의 모험을 하고 싶었다면, 영주와 하원의 바람에 부응하는 식으로 일정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한 전쟁이 왕권의 강화로 이어지진 않았다. 대신 (전쟁으로 인해) 세금이 인상되고 민중들이 위협을 받게 되자, 호전적인 모험가 왕들은 (다른 집단과 비교할 때) 민중들에게 가장 많이 양보하였다. 모든 양허(concession)는 균형을 무너뜨렸다. 예를 들어, 수도원의 땅을 몰수하는 등 일시적으로 재정을 회복시킬 수 있었지만, 엘리자베스처럼 모험심이 있거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 지배자는 너무 확고하게 제약받았기에 가문의 은(왕조의 영지, the demesne lands)을 파는 것, 자신의 후계를 강력한 제3신분(third estate)의 손에 맡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느 시점, 아마도 1650년 이후부터 이 과정은 어느 정도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생산에서의 새로운 개선은 내부를 약탈하는 게 아니라 생산의 증대로 이어졌다.

 

헨리 8세(1491-1547)

 

잉글랜드의 독특한 역사를 설명하는 또 다른 가설은 이상의 설명과 중복되나 거기에 깊이를 더한다. 노르만족의 정복 이전의 잉글랜드에는 특정한 최초의 차이점이 있었다. 노르만 침공 이후 한 세기 동안, 이 섬나라의 세계는 이미 달라졌고 국가의 해체가 없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북유럽·서유럽 봉건주의 모델과 비슷해졌다. 강력한 군주제는 법률 시스템에 대한 통제력를 유지했지만, 봉건적 연결 고리들을 통해 권력을 아래로 위임했다. 이렇게 잉글랜드는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1200년경에 이르면, ‘유럽은 기본적인 유사성에서 벗어나 로마법을 받아들이고 혈통 귀족과 광범위한 농민층이 성장하면서 점점 더 다른 형태로 변화해 갔다. 잉글랜드는 로마법의 조직적 특징 일부를 (기존의 법체계로) 편입시켰지만, 부활한 후기 로마법 체계의 실질적 내용은 거의 모두 거부했다. 이는 잉글랜드의 경제, 사회, 정치적 구조가 유럽 대륙의 많은 지역과 점점 더 불일치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몽테스키외와 토크빌은 잉글랜드가 계급화정치적 중앙집권화라는 필연적인 경향을 대부분 피했다고 추측했다.

 

영국이 바다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면, 이런 특이한 상황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나 네덜란드처럼 바다라는 경계가 없는 곳들은 한동안 잉글랜드의 자그마한 복제가 될 수 있었지만, 육지에 둘러싸인 국가로 수백 년 동안 그러한 균형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수많은 섬이 극적인 발전 없이 존재해왔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었던 역동적인 유럽 대륙에 가까이 있지만 너무 가깝진 않은 곳에 있다는 행운을 누렸던 건 오직 잉글랜드뿐이었다. 세상을 바꾼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놀랍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힘들의 특유한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왜냐면 어느 지점에서 피드백 루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군사력 때문에 생산력 향상이 이뤄지기 보다는 높은 수준의 생산력이 군사력 강화에 동력을 제공하는 이상한 연금술이 시작된 것이다. 강자가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부자가 강자가 되었다. 초과 생산은 권력의 증대로 이어졌고, 잉글랜드는 유럽의 풍부한 발명품과 상품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것까지 점점 더 빨아들일 수 있었고, 비로소 농업의 덫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를 촉진할 수 있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잉글랜드는 가장 강력한 포식자가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바로 이것이 수수께끼이자 가설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게 서유럽에서 생겨났고, 토크빌이 사망할 무렵에는 미국에도 전이된 게 분명했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liberty)’, ‘평등’, ‘기타 등등과 같은 일반적인 용어를 부여하는 관계들의 특정한 세트로 구성되었다. 그 기원은 로마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매우 깊었다. 세 명의 위대한 분석가 모두 그것이 본질적으로 잉글랜드에서 발전했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의 추정 중 역사적 부분을 더 발전시킬 수 없었다. 유럽에서 전문 역사학이 부상하면서 그들의 착상을 확인하거나 반박할 수 있게 된 것은 토크빌 사후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그러므로 메이틀런드에 관한 이 장들은 내가 그들의 후계자 중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간략한 개요에 해당한다.

 

세 편으로 구성된 그의 학위 논문에서 알 수 있듯이, 메이틀런드는 이들의 작업을 잘 알고 있었다. 메이틀런드는 그들의 망상에 기반해 더 깊은 수준의 질문을 형성했고, 그 물음은 J. S. 밀의 연구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그는 또한 가까운 동시대 사람들, 즉 자기보다 한 세대 위인 사람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 한 명인 헨리 메인 경(Sir Henry Maine)은 메이틀런드처럼 법학과 인류학 그리고 철학적 관심사를 결합한 세계적 수준의 사상가였다. 메이틀런드의 아이디어가 생겨난 광범위한 맥락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선 메인의 아이디어 중 일부를 간략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1장 각주

1. 이 글은 메이틀런드 선집(The Collected Papers of Frederic William Maitland)의 첫 번째 작품으로 재출판되었다.

*역자주: 2000년에 Liberty Fund에서 메이틀런드의 학위 논문인 A Historical Sketch of Liberty and Equality을 단행본으로 출간했으며, PDF 파일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 받을 수 있다.

https://oll-resources.s3.us-east-2.amazonaws.com/oll3/store/titles/870/0085_LFeBk.pdf

 

2. 이 책을 완성한 후 내가 발견한 한 가지 예외는 데이비드 런시먼(David Runciman)의 훌륭한 저작인 다원주의와 국가의 인격성(Pluralism and the Personality of the State, Cambridge, 1997)5장과 66~70페이지다. 거기서 런시먼은 메이틀런드의 작업 중 일부와 관련된 법적 배경과 신탁 및 법인에 대한 논의를 자세히 설명한다.

 

3. 그럼에도 메이틀랜드가 완전히 잊혀진 건 아니었다. 200114, 그는 전문 역사학자로서는 최초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코너에 기념비가 건립된 불멸의 인물이 되었다.

 

4. 이 장의 나머지 부분은 맥팔레인의 저서 근대 세계의 수수께끼(Riddle of the Modern World)227~284페이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최근에 그 작업의 결론을 읽은 독자는 이 장의 남은 부분을 건너뛰고 싶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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