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본 바와 같이, 메이틀런드(Maitland)의 가장 깊은 관심들 중 하나는 자유의 발전에 있었다. 이 주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가 법률가로서 받은 교육이 명백한 구심점을 이뤘으며, 그를 그의 저명한 선조들인 몽테스키외, 애덤 스미스, 토크빌과 연결해 준다. ‘그는 방대한 세부 사항 뒤에 숨겨진 패턴을 보는 데 있어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직관과 한때 연결되었던 사실들을 설득력 있는 사례들로 엮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더욱이 밀섬(S. F. C. Milsom)이 쓰듯이, “또한, 나는 메이틀런드의 글이 지닌 놀라운 직접성이 그의 법률가 및 법학 교수로서의 배경과 관련 있다고 확신합니다 ... 주요 요소는 어떤 상황들을 실제 사람들의 대화로 생생하게 재현하는 습관입니다.”34 법률 교육에는 이보다 더 많은 게 있는 거 같다. 법률 교육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사물의 본질이나 구조를 통찰하는 능력과 힘들의 균형을 살피면서 사실을 이상형(ideal-type) 모델과 비교하는 관계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에 접근하는 능력을 주었다. 몽테스키외, 스미스, 토크빌과 마찬가지로, 그는 귀납과 연역을 결합했다. 그토록 많은 새로운 ‘사실’을 마음껏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고, 그의 기억력이 매우 좋았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영감을 통해 사실들을 새로운 상상적 패턴으로 형성해냈다. 그는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고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렇게 그는 탁월함과 에너지, 통찰력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몽테스키외에서 시작된 패러다임을 완성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전체론적이고 관계적이었으며, 과거의 모든 다른 측면을 하나의 틀 안에서 다루었다. ‘영국 법의 역사를 영국 일대기의 전체 흐름 중 한 측면으로 구상함으로써 그는 법의 역사를 정치적, 헌법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했다.’35 사실상 그가 한 일은 영국의 중심 제도인 법으로 가닥을 잡아 영국 사회의 모든 다른 특징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중세 시대에 집중했지만, 앵글로색슨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전체 시기를 강의하고 가르쳤다. 그럼으로써 그는 산업혁명에 이르는 1,000년에 걸친 영국 문화의 패턴이나 정신에 대한 최초의 위대한 문헌 기반 분석을 제공할 수 있었다.
메이틀런드의 목표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부와 자유의 발전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답이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법적 기록의 더미에 묻혀 있다고 확신했다.
“법의 역사의 단단한 껍질 속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기술적인 종류의 문서인 법적 문헌들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역사, 도덕성의 역사, 실천적 종교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가진 최고의 증거이며, 때로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중세 후기 영국인 대다수의 상태, 촌락 거주민들의 상태와 같은 광범위한 주제를 잡아 보십시오. 그것들에 관해 모든 세부 사항을 현실 그대로 묘사할 수 있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측면 모두를 드러낼 수 있으며 모든 진보나 퇴보의 경향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곧 증거의 공급은 무궁무진합니다...”36
혹은 그는 다음과 같이 더 간결하게 썼다. ‘대략적으로 말해, 오직 법적 문서 속에서만, 법적 형식 아래서만 먼 옛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배열이 우리에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37 그러나 그 어려움은 엄청났다. 필체, 변칙적인 라틴어, 법률용 불어, 절차의 난해한 형식과 기술 용어를 모두 습득해야 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고, 그러려면 막대한 헌신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는 단순히 문서를 읽는 것만이 아니라, 문서를 이해하기 위해 이미 사라진 세계관을 재구성해야 했다. 특히 사라져버린 특정 법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예를 들어, 교회 법원(ecclesiastical court) 기록과 관련하여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로서는 우리 교회 법원의 상세한 역사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 역사를 쥐어짜서 기록물로 출판하려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방대하다 ... 그 임무를 완수한 사람들은 지난 3세기 동안 영국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많은 것을 배워야 하며, 어쩌면 너무 자주 가르쳤던 많은 내용은 잊어야 할지도 모른다.”38
이와 관련해, 시대착오(anachronism)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여기서 메이틀런드는 자신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역사를 앞과 뒤 모두의 방향에서 써야 한다는 생각을 도입했다. 아래 구절은 그의 문체를 보여주는 예일 뿐만 아니라 역사 재구성의 목표와 위험성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보여주는 예로 충분히 인용할 가치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법의 역사는 관념들의 역사여야 한다. 단순히 사람들이 행했고 말했던 것뿐만 아니라 지난 시대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걸 재현해야 한다. 고대의 관념들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위험하며, 점진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처음부터 서두른다면, 그 길을 놓칠 것이다.’ 특히, 지적인 시대착오를 경계해야 한고 강조했다.
“이제 여러 종류의 시대착오에 맞서 우리 자신을 지킨다. 우리는 의복, 갑옷과 건축, 단어와 발화 형태에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조심하는 건 시대에 맞지 않는 관념의 침범을 막는 것보다 훨씬 쉽다. 특히, 미개인들의 사고를 세련된 언어로 재단할 위험이 항상 따라다닌다. 그런 실수를 범하긴 쉬우며, 저지른다면 치명적이고 근본적인 실수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페르소나 픽타(the persona ficta)[1]를 너무 일찍 도입한다면, 우리는 헹기스트(Hengest)와 호르사(Horsa)[2]에게 기관총을 주거나, 성 비드(the Venerable Bede)[3]가 인쇄 교정을 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건 무너질 기초 위에서 집을 짓는 것과 다름없다.”
어떻게 이러한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 “이 오류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역사를 앞 방향뿐만 아니라 뒤 방향으로도 읽는 것, ‘고대(archaic)’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중세를 확실히 이해하는 것, 어두운 밤 속으로 나아가기 전에 황혼의 어스름에 우리의 눈을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39
만약 성공한다면, 상상력의 재구성이라는 궁극적인 목표, 즉 단순히 우리 자신이 왜곡시킨 걸 반영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와 다른 시대를 드러내는 것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노르만계 성직자들이 산산조각 냈던 마을들과 수백명의 사람들’을 ‘재구성하여 지도에 묘사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서서히 우리 선조들의 사유, 평범한 것들에 관한 그들의 공통된 사고를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40
이러한 시대착오나 편견의 또 다른 측면은 역사가 자신의 신념과 종종 검토되지 않은 정치적 성향에 의해 야기되었다. 메이틀런드는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썼다. “영국의 ‘자유 공동체’를 믿는 사람은 아마도 매우 보수적일 것이다. 내가 말하는 보수는 토리당(Tory)이나 귀족이 아니라, 보수적이라는 의미다.” “반면에 우리 중 대중에 대한 가장 찬란한 희망을 품은 사람은 과거에서 계급 지배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것은 보편적 진리가 아니지만, 불안 요소로 다가온다.”41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메이틀런드는 자유와 평등뿐만 아니라 ‘자유 마을 공동체’에 대한 질문에도 깊이 몰입했기 때문에, 그가 이 문제를 인지했다는 것을, 그리고 밀(John Stuart Mill)과 시지윅(Henry Sidgwick)을 거쳐 토크빌에게서 물려받은 그의 계보와 영감을 유념하는 게 중요하다.
또 다른 핵심은 올바른 시작점을 찾는 것, 즉 구조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메이틀런드의 접근은 토크빌이 평등을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미국의 패턴을 파악한 것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메이틀런드에게는 중세의 토지보유권(tenure) 개념에 대한 이해가 나머지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였다.
“우리는 어떤 법에서도 근원적(elementary)이라고 할 수 있는 특정한 관념들과 규칙들을 찾을 수 있다. 그 근원적 특성 탓에, 우리 연구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선 그것들에 숙련되어야 한다. 만일 다른 곳에서 시작한다면, 우리는 잘못된 장소에서 시작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봉건 시대의 법에 관한 한, 토지보유법(the law of land tenure)이 가장 근원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에 주목하는 걸 잘못이라고 할 순 없다.”42
그것들은 대단히 복합적이기 때문에, 여기서 근원적이라는 말은 단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본적임(basic)을 뜻한다. 메이틀런드는 또한 ‘근원적’ 혹은 초기 형태들과 단순성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자주 우리는 시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게 명료해지고, 어떻게 단순한 아이디어들이 세부적인 것들과 기술적인 것들 아래에서 질식되어 갔는지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단순성은 기술적 세부 사항의 결과물이다. 즉 그것은 출발점이 아니라 목표다. 뒤로 갈수록 우리는 익숙한 윤곽은 흐려지고, 관념이 유동적이게 되며, 단순함 대신 불확실함을 발견하게 된다.”43
또 다른 핵심은 영국을 비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메이틀런드는 “역사는 비교를 수반하며, 자기 체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영국 법률가는 법의 역사라는 관념에 거의 접근하지 못했다.”44 메이틀런드는 독일 및 프랑스 법에 대한 지식이 매우 풍부했고, 로마법에 대해서도 깊이 알고 있었다.45 따라서 위대한 선배들처럼 그는 영국 사례에서 무엇이 특이하고 무엇이 공통적인지를 명확히 볼 수 있었다. 그는 결코 ‘작은 영국주의자(Little Englander)’가 아니었으며, 패트릭 워몰드(Patrick Wormald)가 언급했듯이, “자신들의 섬 이야기가 지닌 독특성에 대한 영국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46 앞으로 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영국이 다르다고 느낄 때는 그러한 사실을 말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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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는 변화와 연속성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며, 바로 이 이론적 영역에서 우리는 메이틀런드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몽테스키외에서 토크빌에 이르기까지, 영국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유별나게 연속적이며 점점 더 색다른 역사를 경험해왔다는 느낌이 있었다. 메이틀런드도 어느 정도는 그 구조에서 연속성을 발견했거나 근대 초기에 어떤 극적인 혁명이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지 않았을까? 영국 역사에서 특정 시점에 거대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 중세 영국과 근대 영국으로 나누었다는 믿음의 흔적을 메이틀런드의 여러 저작에선 찾을 수 없다. 대신, 기본 원리의 측면에서 영국의 법적, 사회적 구조가 이미 13세기에 확립되었다는 그의 견해를 여러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헨리 2세가 사망할 무렵인 1271년에, ‘영국법은 통일성, 단순성, 확실성 면에서 근대적이었다.’47 14세기 이후의 법률가들은 ‘형법과 사법의 큰 윤곽은 영원히 고정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20세기에도 여전히 법학도들은 실무를 위해 에드워드 1세의 법령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48 메이틀런드는 유럽 대륙 국가들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던 이러한 연속성이 영국 역사가들에게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고 봤다.
“지난 6세기 동안 영국의 법적 일대기는 매우 연속적이었으며, 그 때문에 중세 후기의 법은 우리 사이에서 결코 잊혀진 적이 없었다. 그것은 법원과 실무 법률가들의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오늘날 독일 역사가들이 중세 독일의 법을 발굴하고 재구성하는 것과 같은 고되고 임시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발굴하고 재구성할 필요가 없었다.”49
이러한 연속성은 특정 주제를 다룰 때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메이틀런드는 보통법의 소송 형태를 분석할 때, 1307년부터 1833년까지를 하나의 시기로 간주했다. 그는 이것이 ‘엄청나게 긴’ 시기임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우리의 현재 목적을 위해 이 기간을 세부적으로 나누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썼다.50
가장 중요한 영역은 재산법(property law)이었다. 여기에 가장 깊은 연속성이 있었다. 메이틀런드는 ‘매우 현저한 특징’, 즉 ‘아마도 영국 사법의 매우 현저한 특징인,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부동산계산법(calculus of estates)’이 매우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훨씬 더 오래된 관습에서 비롯하여 13세기 후반에 ‘명확한 형태’를 갖추었고, 지난 6세기 동안 영국 사법의 특징을 이루었다. 이러한 연속성은 단순히 ‘역사상 만들어진 것 중 가장 억센 것 중 하나’였던 보통법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었다. 메이틀런드는 앵글로색슨 시기부터 1880년대까지를 다룬 그의『영국헌정사(Constitutional History of England)』에서 연속성에 대한 스텁스(William Stubbs)의 일반적인 비전을 크게 수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중세 말기에 존재한 어떤 제도든지, 1800년에 존재한 어떤 제도 - 그것이 의회, 추밀원(Privy Council), 그 어떤 법원 – 든지 우리는 에드워드 왕의 통치에 이르는 일련의 명확한 변화를 거슬러 추적할 수 있다.’51 영국의 헌정적, 법률적 원칙이 매우 일찍 확립되었기 때문에, 그는 영국법의 역사에서 13세기 이후로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다.
메이틀런드의 연구는 단지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앵글로색슨 시대에 대해서도 깊이 알고 있었다. 영국 헌정사 강의에서 그는 앵글로색슨과 11세기 후반 영국 간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는 노르만 정복이 매우 중요했지만, ‘영국법이 노르만법에 휩쓸려 가거나 그것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여겨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노르만족이 완성된 법체계를 갖고 왔다고 가정해선 안 된다. 그들만의 성문화된 법은 거의 없었을 것이고, 만약 있다 하더라도 매우 적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영국인들보다 훨씬 뒤처져 있었다.’52 결국, ‘그들은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켈트족을 지배하는 스칸디나비아 출신 정복 귀족이었다.’ 따라서 ‘윌리엄 1세가 새로운 사법 체계를 가져온 걸로 생각해선 안 된다.’53 메이틀런드는 영국법의 법적 골격이 12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걸 상세히 보여준다. 결국, 윌리엄 1세는 단순히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의 정당한 후계자로서 영국에 왔을 뿐이다. 즉 ‘윌리엄 1세는 에드워드 왕의 지위를 계승했다.’54 따라서 ‘노르만 정복이 우리에게 준 귀중한 것은 국가 통합을 가능케 한 강력한 왕권이다.’55
노르만 정복 이후의 영국법의 연속성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다음 10년간의 메이틀랜드의 연구에서도 손상되지 않았으며, 『영국법의 역사(History of English Law)』에서도 반복되었다. 그는 노르만 정복의 결과가 서서히 느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제로 1066년부터 매년 우리의 역사를 읽는다면, 법의 영역에서 정복이 큰 변화를 일으켰는지가 오랫동안 의심스러워 보일 것이다. 영국의 노르만족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윌리엄 1세는 새로운 신민들에게 외국 법률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노르만 법전은 존재하지 않았다.’56 따라서 ‘우리는 윌리엄 1세가 영국법을 일소하고 노르만 법으로 대체하려 했다고 아무런 지장 없이 말할 수가 없다. 반대로, 그는 모든 사람이 에드워드 왕의 법, 즉 옛 영국법을 따르고 지켜야 한다고 명했다 ... 우리가 아는 한, 그는 매우 적은 사안들에 대해서만 명시적으로 입법했다.’57 분명히 ‘정복, 몰수, 토지 재분배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차지한다는 관념에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지배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메이틀런드가 프랑스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한 배심원 제도에 관한 관념의 싹과 마찬가지로,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58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가 자세히 보여주었듯이, 노르만 왕가와 앙주 왕가는 앵글로색슨 법의 초기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그것을 개정하고 단순화하고 강화했다.59
실제로 메이틀랜드는 그 책을 집필할 당시까지 700년 동안의 연속성과 변화의 혼합을 잘 포착해냈다.
“거의 모든 규칙이 변했지만, 지금 우리 사이에서 살아있는 법체계는 18세기의 블랙스톤( William Blackstone), 17세기의 코크(John Coke), 15세기의 리틀턴(Thomas Littleton), 13세기의 브랙튼(Bracton), 12세기의 글랜빌(Ranulf de Glanvill)이 설명한 것과 동일한 법체계다. 지난 700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법원에서 내려진 모든 판결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중 대부분을 여전히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연속성과 동일성은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이다. 다...그 일대기가 아무리 다사다난했을지라도, 그것은 단일한 삶이었다.”60
메이틀런드는 그러한 흔적을 쫓아 ‘게르만 숲’의 경계로 되돌아간다.
“지난 7세기 너머에는 단편적이고 불완전하게 밝혀진 다른 6세기가 놓여 있으며, 그중 한 세기에서 노르만 정복이라는 커다란 재앙이 영국과 영국법에 닥쳤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야기의 실마리를 완전히 놓치지 않았다. 어느 경로로든 우리는 그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로마 지방을 침략하고 구세계의 문명과 접촉했던 야생의 게르만족 정착지에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있다. 여기서 흔적이 멈추고 희미한 황혼은 어둠으로 바뀐다. 우리는 사람들이 법을 거의 쓰지 않던 시대에서 전혀 쓸 수 없었던 시대로 넘어간다. 그 너머에는 추측의 영역이 놓여있다.”61
바로 이것이 ‘알프레드 대왕의 시대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국법의 역사에 독특한 연속성을 부여한다.’62
영국 헌정사를 구성하는 강의에서 메이틀런드는 영국의 초기 앵글로색슨 법전을 다뤘다. 약 600년경의 에셀버트(Ethelbert) 법전은 ‘튜턴어로 쓰인 법전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그건 이미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원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에 제정된 690년의 이네(Ine) 법전과 약 890년의 알프레드(Alfred) 법전은 ‘지난 2세기 동안 법적 성격이나 사회의 법적 구조에 큰 변화가 없었음을 보여준다.’63 그 후로 노르만 정복 때까지 연속적인 법률 세트가 존재했다. 이 법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유언장의 도입처럼 기독교에 영향을 받았음도 불구하고, ‘로마법의 영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라는 점이다.64 그런 뒤에 ‘정복한 종족의 가장 훌륭하고 강력한 제도를 자기 삶에 흡수하여 상황에 적응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던 종족’인 노르만인들이 왔다.65
따라서 초기 게르만족 침략자들은 아마도 '헌드레드(hundreds)'66라는 중요한 행정상 구획[4]과 봉건제의 중심 개념, 즉 최고 지배자에 대한 충성을 도입했을 것이다. 메이틀런드는 ‘봉건제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토지와 사람 사이의 사적 관계는 실제로 오래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우리 종족 역사의 첫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타키투스(Tacitus)가 묘사한 게르만족의 군장(princeps)과 그의 코미테스(comites)[5]사이의 관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67 이것은 영토에 기반한 앵글로색슨족의 ‘테인(thegn)’[6]으로 발전하였고, 이 원칙이 확장되어 ‘사람과 군주 사이의 관계가 사회 구조의 모든 부분에서 발견된다.’68 또한, ‘나는 봉건제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본질적인 모든 것을 사적 법원(the private court), 즉 토지와 함께 상속되고 매매될 수 있는 법원보다 잘 보여주는 건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법정을 개최할 권리는 노르만 정복 이전부터 개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69 그는 ‘8세기나 심지어 7세기에도’ 영국에선 자기 영토 내에서 사법권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으며, ‘9세기와 10세기에 ‘공통된 형식’의 문제로서 왕실의 토지 하사가 일반적으로 이뤄졌고, 거기엔 사법권의 양도가 포함되었다’라고 설명한다.70 따라서 결론적으로 ‘거기에 봉건제의 사실들이 존재한다. 부족한 건 이러한 사실들을 표현할 이론이다. 그것은 노르망디에서 우리에게 왔다.’71
10년 후, 『영국법의 역사』에서 메이틀런드는 영국법의 근간인 게르만적 기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 노르만 정복 이전에 영국에서 통용되던 법은 ‘우리의 견해로는 ... 주로 순수한 게르만법이었다.’72 따라서 ‘알려진 역사의 견고한 토대에 이르면, 우리는 우리의 법이 주로 튜턴의 관습에서 형성되었고, 로마법 체계로부터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일부 내용이 도입되었으며 형식의 상당한 추가나 수정이 이뤄졌음을 발견한다.’73 최초에 앵글로색슨이 추동한 흐름이 그 후에 나타난 다른 튜턴적 원천들의 여러 물결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제 이 각각의 게르만적 요소들, 순수한 앵글로색슨족, 스칸디나비안, 프랑크족’이 중요했으며, 그들의 상대적 영향을 측정하는 것은 어려웠다.74 따라서 이렇게 묘사된 그림은 메이틀런드의 선배들이 그린 것과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여기에는 몽테스키외가 언급한 초기 게르만적 뿌리가 있다. 토크빌이 주장한 것보다 더 이른 시기, 즉 11세기에 영국과 북부 프랑스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존재한다. 메이틀런드의 통찰은 지속성과 변화, 유사성과 차이의 그림을 모두 제공할 정도로 균형 잡혀 있다. 곧 살펴보겠지만, 초창기 게르만적 기원은 특히 중요한데, 그건 메이틀런드가 게르만법과 게르만족의 사회 구조가 재산과 가족 관계에 대해 특이한 태도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속성과 변화의 혼합이라는 통찰에서 메이틀런드는 포스트 다윈 시대(the post-Darwinian era)에 점점 지배력을 얻은 진화론적 패러다임, 즉 다윈의 핵심 사상을 왜곡하여 모든 사회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련의 ‘단계’를 제시하는 이론을 명시적으로 공격했다. 그러한 틀의 거부한 것은 그가 몽테스키외, 스미스, 토크빌의 독단적이지 않은 개방적인 전통을 어떻게 따랐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는『영국법의 역사』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모든 민족의 가족법이 반드시 같은 경로를 거쳐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가설이다. 후진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모든 제도적 배열을 포함하여 연속적 단계들의 운명적인 도식을 구성하는 일은 절망적인 작업이다. 그들의 후진성으로부터 부자연스럽지 않게 추론할 수 있는 건,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들이 더 성공한 종족들이 걸어간 길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75
그는 단일한 선형 또는 단일한 단계의 진보라는 19세기 후반의 복음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이 지역에서 엄청난 일반화가 반드시 가능해야 하며, 야만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혼인법의 모든 변화가 아내에게 유리했다는 상식적인 가정에 항의하기 전까지는’ 조사를 시작할 수 없었다고 했다.76 단계적 진화론의 교리에 대한 메이틀런드의 핵심적인 공격은『둠스데이 북(Domesday Book)』에 등장한다. 그는 당대 인류학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인간 종족을 위한 정상 프로그램을 규정하려면 그리고 인류의 모든 독립적인 부분이 만약 조금이라고 달라지려면, A단계, B단계, C단계 등으로 지정될 수 있는 일련의 운명적인 단계들을 거쳐야 한다고 천명할 만한 자료를 그들이 갖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신속하게 진보한 그룹들이 독립적이지 않았고, 자기를 스스로 구원하진 못했으며, 외부의 낯선 사상을 받아들여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A단계에서 X단계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앵글로색슨 조상들은 일련의 긴 ‘단계’를 거쳐 알파벳이나 니케아 신경(the Nicene Creed)[7]에 이르렀던 게 아니다. 그들은 한 단계에서 다른 한 단계로 도약했다.77
그는 이어서 이렇게 얘기했다.
“실제로 우리는 인류의 모든 부분에 대해 정상적인 프로그램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하고 비과학적이라는 걸 배우고 있다. 우선 한 가지는 우리가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독립적인 것으로 다룰 수 있는 부분이 매우 적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 활동의 복잡성과 상호 의존성 때문에, 어떤 영역의 인간 활동이든지 간에 일련의 연속적 단계들로 공식화할 과학 법칙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적 제도만 다루고 소유주의 제도(proprietary arrangements)를 무시하는 법이나, 재산권(property)만 다루고 종교를 무시하는 법은 찾을 수 없다. 표면 아래로 침투하자마자 우리의 법을 귀납적으로 추론하려 했던 각 사례가 매우 독특해 보이기 시작할 것이며, 우리는 한 민족의 역사에서 발생한 공백을 몇몇 다른 방면들에서 관찰된 제도들과 과정들로 채우기 전에 오랫동안 주저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종족의 사람들을 알려진 ‘단계들’ 전부를 지나도록 성급히 몰아붙인다면, 그리고 다루기 까다로운 우리 선조들을 부계 씨족 집단(agnatic gentes, 남자 혈통에 기반한 집단)과 가족 공동체 등을 비롯한 모든 단계를 거치도록 강요한다면, 인류를 위한 우리의 정상적인 프로그램은 기괴한 잡동사니 모음이 되고 말 것이다.”78
그렇다면 메이틀런드가 어떤 변화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을까? 그는 평소에 그 문제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종종 유기적 성장 모델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간접적으로 제시했다. 다만, 그때도 어떤 일이 반드시 특정한 방식으로 일어나야 할 필요성은 없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의 예는 영국 역사에서 핵심적이고 지속적인 특징 중 하나인 지방 정부 시스템을 다루는 그의 저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메이틀런드는 ‘역사적 위대함에 대한 안목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치안위원회(Commission of the Peace)가 매우 놀라운 제도라는 건 분명하다. 그 제도는 꾸준히 성장하며, 자신을 새로운 형태로 정교하게 발전시키고, 끊임없이 새로운 요구를 충족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전혀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 그토록 다사다난하면서도 완벽히 연속적인 일대기를 살아온 다른 정치적 단위를 찾기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라고 썼다.79 여기서 메이틀런드는 ‘새로움’과 ‘정체성’이 시간이 갈수록 섬세한 균형을 이루게 되는 과정과 ‘다사다난하지만’ 또한 ‘연속적인’ 제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우리는 기이한 역설로 인하여 어떤 것들이 동일한 것으로 유지되면서도 동시에 변화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접근의 효과는 ‘단계들’의 필연적 코스를 투사할 것을 강요받지 않고, 연속성과 변화를 모두 조사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 방법은 13세기와 19세기 사이의 변화에 대한 ‘거대한 단절’ 이론을 무효화시켰다. 16세기와 17세기의 ‘혁명’을 통해 ‘봉건/농노’의 ‘단계’가 ‘근대/자본가’ 단계로 대체되었다는 영국 역사에서의 구조적 전환은 메이틀런드의 손아귀에서 소멸해 버렸다. 그는 더 깊은 구조적 연속성을 찾아 13세기와 그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하여 그는 영국이 13세기와 그 이전 시대까지도 유사하게 ‘근대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17세기에 이르기 전에 영국은 이미 ‘근대’ 사회였다는 토크빌의 통찰을 입증 및 확장하였다.
3장 각주
34 Milsom, ‘Review of Elton’, 225.
35 Hazeltine, ‘Maitland’.
36 Maitland, Collected Papers, I, 485–6. 37 Maitland, Collected Works, II, 3.
45 그 외 Plucknett, ‘Maitland’, 185; Vinogradoff, ‘Maitland’, 288. 그리고 Paul Hyams은 Hudson (ed.), History of English Law, 217 에서 메이클런드의 학문적 폭과 유럽대륙의 자료들에 대해 논평했다.
46 In Hudson (ed.), History of English Law, 13. 47 Maitland, History, I, 225. 48Maitland, Selected Essays, 123.
49 Maitland, History, I, xxxiv.
50 Maitland, History, II, 210; I, 225; Maitland, History, I, civ; Maitland, Forms, 43.
51 Maitland, History, II, 10–11; Maitland, Constitutional, 20.
52 Maitland, Constitutional, 6–7.
53 Maitland, Constitutional, 7.
54 Maitland, Constitutional, 154.
55 Maitland, Constitutional, 9.
56 Maitland, History, I, 79.
57 Maitland, History, I, 88. 58Maitland, History, I, 93–4.
59 See Maitland, History, I, 104–7.
60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18.
61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418.
62 Maitland, Selected Essays, 98.
63 Maitland, Constitutional, 1–2.
64 Maitland, Constitutional, 5.
65 Maitland, Constitutional, 122.
66 Maitland, Constitutional, 44.
67 Maitland, Constitutional, 148.
68 Maitland, Constitutional, 148.
69 Maitland, Constitutional, 151.
70 Maitland, Domesday Book, 282.
71 Maitland, Constitutional, 151.
72 Maitland, History, I, xxix.
73 Maitland, History, I, xxx.
74 Maitland, History, I, xxxi.
75 Maitland, History, II, 255.
76 Maitland, History, II, 403.
77 Maitland, Domesday Book, 345
78 Maitland, Domesday Book, 345–6; 이와 유사하면서 더 상세한 비판은 다음을 참고하라. Maitland, Collected Papers, III, 294–9. 79 Maitland, Collected Papers, I, 470.
[1]페르소나 픽타는 인위적 인격, 형성된 인격, 법인격을 가리키는 라틴어다. 영어로는 juridic, juristic, artificial, legal, or fictitious person이라고 불린다. 통상 법인격은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격과 그러한 자격을 가진 인격(person) 또는 법적 단위(legal entity)를 가리킨다. 법적 단위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의 인간(human)을 가리키는 자연인(natural person 또는 physical person)과 비-인간(non-human)을 가리키는 법인/법인격이다.
[2]헹기스트와 호르사는 5세기경 주트족(Jute)의 우두머리로, 앵글로색슨 시대를 열었다고 알려진 형제다. 수도사 길더스(Gildas)의 기록인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De excidio et conquestu Britanniae)』과 9세기에 작성된 『앵글로-색슨 연대기(The Anglo-Saxon Chronicle)』 등에 등장한다. 신화 속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브리튼 섬은 북부에서 픽트족(Pict), 동부 해안에서 색슨족의 습격과 약탈에 시달렸다. 남부 브리튼을 통치하던 켈트족 우두머리 보티게른(Vortigern)은 침략자들을 막아내기 위해 대륙의 유틀란드(Jutland) 북부(현재 덴마크 인근)에 정착해있던 게르만족의 한 부류인 주트족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때 헹기스트와 호르사가 주트족을 이끌고 브리튼 섬으로 건너와 가는 곳마다 픽트족을 비롯한 침략자들을 물리쳤다. 이들 형제의 초대를 받은 앵글족, 색슨족이 이주해왔고, 헹기스트와 호르사는 보티게른의 통치가 약해진 틈을 타 브리튼 섬을 차지하고자 했다. 몇 차례 대결 끝에 결국 켈트족이 밀려났고, 그 이후 브리튼 섬에서 앵글로-색슨 시대가 시작되었다.
[3]성 비드는 노섬브리아(Northumbria, 현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동부 지역) 출신의 성직자, 역사가, 문법학자다. 673년에 태어나 735년에 작고했으며, 라틴어로는 Beda Venerabilis라 하여 ‘성 베다’라고도 불린다. 731년에 완성한 『잉글랜드 인들의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국역본의 제목은 『영국민의 교회사』(2011. 이동일·이동춘 옮김. 나남)임)를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며, ‘잉글랜드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음악, 운율학, 자연 과학, 성서 주석 등 다방면에 걸쳐 저술 활동을 하였다.
[4]헌드레드는 중세 영국의 행정구역 중 하나인 소규모 촌락, 면 단위의 구역을 가리킨다. 상위 행정 단위로 샤이어(shire)가 있다. 예컨대, 백년전쟁 전후 잉글랜드에는 약 40개의 샤이어가 있었고, 각 샤이어는 평균 15개의 헌드레드로 세분화되었는데 약 630개의 헌드레드가 있었다고 한다.
[5]라틴어로는 코미타투스(Comitatus)로 불린다. 게르만족의 전사 문화에서 군장을 수행하는 무장 호위 종사들을 가리킨다. 또한, 게르만족 족장들과 그 종사들 사이의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이들은 충성의 맹세로 자기 종족의 우두머리에게 군복의 허리띠를 바쳤는데, 이 허리띠를 가리키기는 용어이기도 하다. 대신 우두머리들은 군사적 복무의 대가로 그들을 보호하고 보상을 하였다. 봉건제도의 원천 중 하나로 평가된다.
[6]테인은 앵글로색슨 시대 잉글랜드나 중세 초기 스칸디나비아에서 왕이나 영주의 개인 수행원 또는 가신이었던 자들에게 부여된 칭호다. 이들은 왕이나 영주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의 군대에 복무한 대가로 땅을 하사받아 보유했다.
[7]니케아 신경(라틴어로는 Symbolum Nicaenum)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 또한 신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한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여러 주장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성 상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여 기독교 신앙의 정통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 교회가 채택한 신앙 고백문이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 신경을 보완 및 개정한 것으로 전해지는 게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다. 현대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후자를 가리켜, 니케아 신경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