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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계의 형성>, 5 사회적 관계들

원제: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 Visions from the West and East

 

 

알란맥팔레인(Alan Macfarlane)
번역박기형(서교인문사회연구실)

 

 

파트 1. F. W. 메이틀런드근대세계의본성과기원

 

5장 사회적 관계들

 

공동체와 개인

 

19세기 후반 사회 이론가들의 조직화에 관한 저명한 관념들 중 하나는 퇴니에스(Tönnies)가 제시한 공동체에서 어소시에이션으로의 이동이라는 관념이었다. 마르크스, 모건, 메인 등 많은 이론가들의 연구가 대부분 이러한, 이른바 획일적인 운동에 집중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메이틀런드의 연구를 살펴보면, 그가 이 가정에 도전함으로써 전임자들이 직면했던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틀런드는 『영국 헌정사(The Constitutional History of England)』에 실린 1883년 강연에서 타운십의 기원에 대한최근 역사가들의 이론과 관련하여, ‘현재로선 설명할 수 없는 매우 큰 어려움을 지적했다. 그들은 타운십이장원보다 훨씬 더 오래된 공동체, 즉 영국 역사에 관한 한 우리가 시원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동체, 아마도 친족으로 묶여 있는 남성 집단 또는 가족 집단, 토지의 소유자이거나 한때 소유자였으며 집단 농업 체계를 통해 토지를 경작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영주의 지배 아래에 놓인공동체라고 주장했다.1 1893년 한 기사에서 그는토지는 개인 소유가 되기 전에 공동체가 소유했다는 이론에 대해 훨씬 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메이틀런드는 이 주장을 직접적으로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진 않았지만, ‘이 교리는 마치 산술의 첫 네 가지 규칙이 미적분보다 더 현대적이라는 주장만큼이나 증명되지 않았고 가능성도 낮다'고 생각했다.2 공동체에서 개인 소유로의 진화에 대한 그의 본격적인 공격은 후속 저작에서 이뤄진다. 『영국법사』에서 그는공동체의 의미를 신중하게 정의하면서 12세기에는 카운티와 타운십이 법적 공동체를 구성했지만,3 ‘공동체의 개념은 그보다 더 복잡하다고 결론 내렸다. ‘중세를 학습하는 이들은 처음에는 어느 곳에서든 공동체주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곳에 만연한 원리처럼 보인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통치 체계의 주요 단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기만적이다. ‘조금만 경험을 쌓으면 이 공동체주의를 의심하게 될 것이고, 거칠고 무례한 개인주의의 얇은 외피로 여기기 시작할 것이다.’4 물론 타운십이공동체(communita)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공동체주의가 있는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겉으로 보기에는 황무지와공통목초지에공통에 관한(in common)’ 권리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권리들이공통적인 권리(communal)’인가? 물론 여기에는공동체라는 요소가 있다. ‘공통의 권리란 다른 사람과 함께 무언가를 누릴(enjoy) 권리, 영주와 동료 테넌트의 가축들이 풀을 뜯어먹는 목초지에서 자신의 가축들을 함께 풀어놓을 권리, 나무에서 장작을, 습지에서 잔디를 가져오고,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을 권리이며,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다’. 그러나 이것은 공통적인 소유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 아마도 그 권리는 개인의 여러 권리, 몇몇 공인된 법적 권리(title)에 근거해 획득한 권리, 그의 동료 커머너들(fellow-commoners)에 맞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 동료 커머너들의 도움 없이도 낯선 사람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 동료 커머너들이 거의 또는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권리일 것이다.’5 그리하여 메이틀런드는 이 문제를 더 자세히 설명한 후, ‘이건 공동체주의가 아니라 최고도의(in excelsis) 개인주의다라고 결론지었다.6 마찬가지로, 그에 관한 부연 설명을 담은 주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설명한다. ‘장원의 관습은 공통적인 권리가 아닌 몇 가지 권리들을 부여한다.’ ‘조사해보는 순간, 타운십의 권리들은 사라진다.’7 그는 그에 대한 표현이 아무리 길더라도 만약 그것이 존재해왔다고 할 때 공통적인 소유권이라고 부를 있는 모든 것은, 정확한 문서들이 유통되기 시작하기 전에 이미 희귀하고 이례적인 것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8 공통 재산권의 정복에 대한 증거는 없다. 그러므로이번 장에서 우리는공동체주의(communalism)’개인주의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거창한 도그마에 찬성하기 전에 고심해야 할 만큼 충분한 논거들을 살펴보았다. 오래된 법의 겉보기에만 명백한 공동체주의는 깊고 오래된 뿌리를 가진 개인주의를 은폐하고 있다.’9

 

촌락 공동체이론을 옹호하는 이들이 내세운 또 다른 주장은 지조(地條, strips)[1]가 뒤섞여 있는 개방 농지 농업(open-field agriculture)은 공동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함께 농작물을 심고, 가축들을 방목하는 등의 일을 해야 한다면, 분명히 어떤 공동체 조직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메이틀런드는 여러 곳에서 이 주장을 반박했다. 예를 들어, ‘고대 공동체의 생존에 관한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의 선구자들 중 일부는 개방농지제 경작에 필연적으로 내포된 공동체주의의 총량을 과장할 위험에 처해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는 영주의 통제가 거의 허울에 불과한 시대에도, 이 체계가 심지어 18세기와 19세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를 갖고 있다. 나는 또한, 이 체계가 법정이나 공동 회의도 없는 촌락에서 수 세기 동안 지속될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적 조례(bye-laws), 게다가 공동체적 관습에 대한 법적 인식도 농업의 일상적(wonted) 과정을 유지하는 데 전혀 필요하지 않다. 불법적인 침해 행위(trespass)에 관한 보통법이 그걸 유지한다.”10

 

이 효과는공동체의 권리나 조례에 의해서가 아니라다른 개인들의 권리에 의해 이루어진다.11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은 공동 경작자들과 비슷하게 행동해야 하며, 만약 규칙을 어겨 잘못 행동할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의 농작물을 잃거나, 침해 행위에 대해 통상의 관습법이 발부하는 영장(writ)에 근거해 제재 받을 것이다. 이 과정에공동체는 개입하지 않는다.12

 

 

메이틀런드는 『둠스데이 북과 그 이후(Domesday Book and Beyond)』에서노르만 정복 이전의 영국에서의촌락 공동체에 관한 장에서 이 문제를 분석했다. 그는 통렬한 비판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대중적인 이론은 토지가 개인의 소유가 되기 전에 공동체에 속했다고 가르친다. 이 이론은 모호하고 탄력이라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다…’ 그 이론은 토지를 사람들(men)이 소유하기 전에 법인들(corporation)이 먼저 소유했음을 암시하는 것 같지만, 정작 그 사실을 명확하게 말하는 걸 두려워한다.’ 메이틀런드는 계속해서 우리는 이렇게 주저하는 걸 이해할 수 있다. 법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라면, 토지 소유권이 개인보다 허구적 인격(fictitious persons)에 먼저 귀속되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고 덧붙인다.13 여기서 그는발전 단계들의 정상적인 순서라는 인류학자들의 이론을 공격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적어도 게르만인들 사이에서 토지가 개인들이나 가구를 구성하는 그들의 소집단에 의해 소유되기 전에 지속적으로 경작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는 게르만인들이 한때 유목민으로 살았던 지역이나 그들이 정복한 켈트족과 로마의 땅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경작 가능한 토지를 개별적으로 할당 받아야 한다는 관념을 갈리아와 영국에 들여왔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발견한 농업 구조의 틀에 자신들을 맞추었고, 다른 경우에는 그들이 떠나온 옛 고향의 촌락과 무척 유사한 촌락을 형성했다. 그러나 모든 징후로 볼 때, 심지어 그들의 옛 고향에서도 촌락이 형성되고 주변에 땅을 경작하자마자, 촌락의 호주들이 그 경작지들에 구획된 지조들을 개별적으로 소유했다.”14

 

그러므로 처음부터 토지는 어떤 더 커다란 단위가 아닌 개인들이나 가구들에 의해 소유되었다. ‘우리의 증거는 농업에서 이뤄진 협력을 시사할 수 있지만, 수확물의 공동체적인 분배(division)를 가리키진 않는다.’ 주석에서 메이틀런드는 시봄(Frederic Arthur Seebohm)[2]의 관념을 거부하고, 앵글로색슨의 십호반(tithing)[3] 체계가가장 철저한 개인주의와도 양립 가능하다고 설명했다.15

 

계속해서 메이틀런드는그러므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절부터, 게르만 촌락은 개인주의의 견고한 핵심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16 그는커먼즈(commons)’를 고찰하여, 그것이 가옥과 경작 가능한 직조에 대한 특정한 소유권에 결부되어(attached) 있었으며, ‘그러한 공통의 권리들(rights of common)’이 아마도 13세기 영국에서 볼 수 있는 극히 개인주의적인 형태를 띠었음을 발견했다.17 이처럼 그는 1893년의 저술에서 다룬 내용을 반복하며, 촌락 공동체에는법원도 없고 사법권도 없었다는 걸 의미하는촌락 공동체의 허약함이라는 부제를 달았다.18 1066년 이후에도 이러한 체계는 장원 제도의 발전 가운데서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메이틀런드가 오웰(Orwell) 장원 사례로부터 인용하는 증거들은촌락의 중심에 놓인 개인주의의 핵심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가옥들과 경작 가능한 지조들은 개별적으로 소유되었으며, 이들 가옥과 지조들에 부속된 목초지에 대한 권리는 개인들의 권리였다...’19 가족만큼이나 촌락 공동체 역시 영국 사회의 정치적, 법적 또는 경제적 기반을 제공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공동체에서 개인으로의 이동, 혹은 심지어 그 반대로의 이동이라는 저명한 가설을 거부했다. ‘결국, 발전의 공식은공동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또는 그 반대가 아니라, ‘모호함에서 명확함으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20

 

이처럼 메이틀런드는 개인이 친족이나 공동체의 압도적인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freed)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는 통상적으로 개인을 얽매는 다른 제약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지위와 권력의 구조적 불평등의 강력함으로,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갖는, 그래서 도전할 수가 없는, 우월하거나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개인의 자유(liberty)를 고찰해오면서,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평등과 불평등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사회적 신분들

 

상위 신분과 관련해, 메이틀런드의 일반적인 논거는 그의 저서 『영국 헌정사』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남작(the baronage)의 본성을 평가하면서, ‘우리가 반드시 살펴봐야 할 부분은 토지보유권이다. 즉 귀족 계급(nobility)의 혈통에 대한 관념은 토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21 그는 혈통 귀족에 대한 관념이충분히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 전역에 걸쳐 우리 종족의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났음을 인정했다. ‘에얼(귀족, Eorl)과 케얼(자유민/자유농민, Ceorl)의 구분은 태어날 때부터 귀족인 사람들과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만 귀족이 아닌 사람들 간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노르만 정복 이전의 오랜 기간 동안’, 즉 아마도 앵글로색슨 시대 말까지, ‘혈통에 근거한 귀족 계급은 토지 보유와 공직에 따른 귀족 계급으로 대체되었다.’ 이처럼사인(thane)은 왕과의 관계 때문에 귀족이 되었으며, 이 관계는 토지 보유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걸 근거로 혹자는직접수봉자(tenants-in-chief)로 구성된 귀족 계급, 즉 왕의 봉신들(vassals)’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노르만 정복은이러한 귀족 계급의 형성을 방해했다.’ 왜냐하면, ‘직접수봉자 집합체는 무척 잡다한 구성원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매우 고귀한 인물들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매우 비천한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층은 상당히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있었으며, 어느 한 곳을 정해 명확한 경계를 그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왕에게는 그러한 경계가 설정되지 않는 것이 무척이나 유리했을 것이다. 왕은 가까운 명문 귀족(aristocracy)에 의해 제약되지 않으려 했으며, 상위의 봉건 영주들에 맞서기 위해 좀 더 하위의 직접수봉자들에 의존했다.22

 

메이틀런드는 왕권과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별도의 태생 귀족(nobility of birth)이 출현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프랑스와 상황을 비교하면서, ‘귀족(peers) 가문들이 사회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그건 우리의 법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 우리는 결코귀족 사회(noblesse)’를 가진 적이 없다고 썼다.23 그 상징이자 핵심 중 하나는 모든 자유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으로, 이는 적어도 13세기부터 영국법의 중심 교의였다. 밀섬(Milsom)은 메이틀런드의 통찰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했다. ‘메이틀런드의 실제 논의에 부합하는 세계는 평등한 이웃들이 거주하는, 본질적으로 평평한 법적 세계다. 영주의 권력은 그저 다른 사람의 토지에서 부역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 내용은 고정되어 있고 경제적 성격을 띤다. 봉역과 부대 권리의〮무들은 중요하지만, 그에 관한 법은 다른 문제들과 연관이 없는 독립적인 것이다.’ 이러한평평한 세계는 나머지 대륙에서 발전한 불평등이라는 가정에 기반한 위계적인 세계와는 정반대다. 그런데 이런 평등한 세계는 언제 발전했을까? 밀섬은메이틀런드의 책이 다루고 있는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세계가 그가 본 것과 같았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분명히 했다.24 메이틀런드의1307년에 끝난다. 그러므로 밀섬은 13세기 후반에는 우리가 평평한 법적 세계에 있었다는 메이틀런드의 주장에 동의한 것이다.

 

메이틀런드 자신이 말했듯이, ‘만약 우리가 1272년의 서유럽을 볼 수 있다면, 아마도 영국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조숙함일 것이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균일했으며, 모든 사회적 지위에 걸쳐 고르게 적용되었다. ‘영국에서 고귀한 사람들을 위한 법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법이 되었다. 그건 왕의 법정이 관습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25 따라서영국법은 균일성, 단순성, 확실성에서 근대적이었다.’26 법은 궁극적으로 계약 관계에 기초하며, 지위에 기초하지 않는다. 이것이 봉건주의의 본질이며, 메인이 깨달은 바였다. 이 원칙은 영국 일대기의 모든 측면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메이틀런드는영국법에서 서자는 지위나 상태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서자는자유롭고 합법적인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모든 면에서 그는 자유롭고 합법적인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다.’27 이 상황은 유럽 대륙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같은 원칙이 자녀들에게도 적용되었으며, 그들은 나이와 가족 내 지위 때문에가부장적권력 아래 있지 않았으며, 여성도 성별을 이유로 열등한 존재로 대우받지 않았다.

 

신분, 출생, 귀속(ascription)이 일반적으로 작용하는 두 가지 영역은 일반법(the normal law) 위에 있는 특권을 가진 귀족과 그 법 아래에 있는 농노(serfs)이다. 메이틀런드는 이 두 영역 모두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을 발견한다. 그는 <사람들의 종류와 조건>이라는 장에서 13세기에귀족은 아니지만 자유로운, 성년이 되었으며 범행이나 죄로 인해 권리를 박탈당한 적이 없는 평민인 영국 사람이 법의 전형적 인간, 전형적 인격이라고 명시하며 논의를 시작한다.28 물론 귀족과 비자유민, 성직자, 유대인, 외국인 등 다른 특수한 유형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평민 질서와 관련해서프랑스나 독일의 현대 법률과 비교해볼 때, 우리 법에서 신분에 관한 부분이 빈약해 보일 수 있다. , 인간의 계급이나 지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유민이거나 농노일 뿐이며, 그 이상 말할 건 많지 않다. 토지보유권과 비교하면,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29 이처럼우리의 토지법은 우리의 신분법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30 그는 영국의 저술가들에겐 라틴어의 ‘status’라는 단어를 번역하는 일이 어렵다고 지적한다.

 

특히 상류층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 법은 귀족이나 신사 계급을 거의 알지 못한다. 모든 자유민은 법 앞에서 대체로 평등하다.’31 메이틀런드는 노르만족들이 영국을 정복했던 걸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말한다. ‘정복된 나라는 평등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볼 때 예외적인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32 그러나 이러한 평등은 존재한다. 강력한 영국 왕들 아래 소수의 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대장원을 가진 세속적 영주, 즉 얼스(백작)과 바론(남작)'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이를 결속시키는 원리는 귀족 혈통의 전승보다는 오히려 토지 보유권과 왕의 의지다.’ 그들이 가진 유일한 특권은 정치적인 것으로, 왕에게 자문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어떤 특권도 거의 갖지 않는다. 남작이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자녀들에겐 어떤 특권도 없으며,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남작으로서 귀족이 된다.’ 귀족들의 특권은 극히 적었으며, 그 중 하나가 모든 자유민이 그들의 귀족들(이 경우엔 다른 귀족들)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를 가졌다는 거였다. 메이틀런드가 설명했듯이, 그마저도 대단한 특권은 아니었으며 다소 모호했다. 이 외에도, ‘귀족과 비귀족을 구분하는 절차상의 규칙은 거의 없다.’33 따라서영국의 고귀한 신사들(gentix hons)은 법적 특권이 없으며, 영국의 백작들(counts)과 남작들은 매우 적게 갖고 있다.’34

 

기사들(the knights)에게로 눈을 돌려보면, ‘기사 작위는 법적 신분이라고 할 수 없다.’35 그들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행정법에서 기사는 몇 가지 특별한 의무를 지고 있으며, 다른 면에서는 단순한 자유민과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병역과 병역면제세(scutage, 병역 대신 납부하는 세금)도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토지보유권의 문제로 바뀌었다...’36

 

사회적 위계의 다른 극단에 위치한 농노에 대해서도 알고 싶을 것이다. 메이틀런드는그러니, 대체로 모든 자유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렇기에 자유민과 비자유민 사이의 경계가 매우 뚜렷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메이틀런드는 영국의 농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1890년에 작성한 편지에서 영국의 농노제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적었다. ‘저는 농노제에 대해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만, 법이 농노를자신의 영주 외에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취급하는 방식에 당혹스러웠습니다.’37 비론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된 결론은 귀족제가 왕영주토지(보유권) 사이의 계약 관계인 것처럼 농노제도 두 개인 사이의 계약 관계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농노제는 대부분의 문명에서신분으로 간주되는노예제와는 대조된다. 중세 영국에서 농노제는 현대의 문헌들에서 만나는 노예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많은 부분에서 충돌한다고 메이틀런드는 말한다. 위대한 영국 법학자 브랙턴에 대해, 메이틀런드는이 주제를 다룰 때, 브랙턴은 농노제의 상대성을 자주 강조한다. 그에게 농노제는 신분이라 하기 어렵다. 그건 농노와 영주라는 두 인격들 사이의 관계다라고 설명한다. 사실농노는 그의 영주에 대해서 적어도 원칙적으론 아무 권리를 갖지 못하지만, 다른 인격들에 대해선 자유민의 권리 전부 혹은 거의 대부분을 가진다. 그들에게 그가 농노라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메이틀런드는 이러한 상대적 농노제를 노예제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인류 전체로 볼 때, 농노는 결코 단순한 물건(thing)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이다고 말한다.38

 

영주와의 관계에서도 상황은 그리 명쾌하지 않다. ‘농노는 그의 영주에 맞서 소유주의적 권리들을 가질 수 없다.’39 그러나 실제로영주는 자신의 법정에서 으레 농노를 동산(chattels)의 소유자로 취급하며, 심지어 그들이 유언을 작성하는 것도 허락한다...’40 메이틀런드는이 사실을 고려하면, 농노의 상태를 권리 없음(rightlessness)보다는 보호받지 못함(unprotectedness)으로 설명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평가한다.41 다시 말해, ‘그런데 권리 없음을 보완하는 또 다른 조건이 제시된다. 브랙턴은 영주가 농노와 맺은 협약(agreement)이나 서약(covenant)에 구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여러 차례 제기한다. 이 물음에 그는그렇다고 답하는 경향이 있다.’ 브랙턴은농노는 단 하나의 목적, 즉 어떤 약속된 이익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자유민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42

 

 

다른 이들과 관련해선, “영주를 제외한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농노의 지위는 간단하다. 그는 자유민으로 대우받아야 한다. 영주가 관여하지 않는 한, 형법은 자유민과 노예를 차별하지 않는다...”43 이러한 자유는 재산권과 관련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농노는 토지와 재화, 재산과 점유물, 그리고 그에 적합한 모든 구제 방법을 가질 수 있다.’44 농노 해방에 대해서도 브랙턴은 간명하게 대답했다. 브랙턴이 으레 그러하듯 농노제를 단순한 관계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영주가 그 관계를 파괴하면 농노제도 무너진다고 보았다.

 

이 모든 것이 매우 흥미로운 중간 지점, 즉 농노제가 신분과 계약의 생경한 혼합을 가리킨다. 메이틀런드는농노제의 상대성이라는 핵심 관념은 낯설다. 이건 인위적인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고대의 사실들을 근대적 이론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법률가들의 수작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46 법률가들은단순히 상대적인 농노제라는 법적 호기심에 대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상대적 농노제도 복잡하다. ‘영주가 농노인 자신의 토지보유자가 사망하면 자신에게 최상급 가축을 가져갈 권리가 있음을 법에 적시하도록 지시한다면, 그는 자기 농노의 동산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압류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쪽에 매우 근접한다.’ 따라서 메이틀런드는우리는 심지어 농노를 자신의 영주와의 관계에서도 '권리 없음'의 상태로 설명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고 썼다.47

 

농노의 수를 추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토지보유권이 신분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의 조사 기록은인격적으로 자유로운 사람과 인격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데 그리 신중하지 않았다고 메이틀런드는 지적한다.48 이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게다가, 메이틀런드는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가 법적 서열에서 어느 쪽에 속하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썼다.49 경계의 테두리가 그 정도로 흐릿하다면, 결코 크게 격차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 인구의 절반 이상이 비자유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50 그게 무엇을 의미하든 관계없이 말이다.

 

이 모든 게 추가적인 조사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이론적으로 농노는 영주에 의해 동산으로서 팔릴 수 있었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을까? 경제사학자인 소롤드 로저스(J. E. Thorold Rogers)[4]내가 읽은 수천 건의 법정 집행관(bailiffs)의 기록과 장원 장부들에서 농노가 팔린 사례는 단 한 건도 본 적이 없다고 썼다.51 또한, 그는 농노가 보장된 지위였으며, 심지어 영주에 대해서도 완전한 권리 없음의 상태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52 이 모든 것들이 영국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침묵들 중 하나, 즉 어떠한 공식적인 해방도 없이, 어떤 눈길을 끌만한 활동도 없이 농노제(Serfdom)와 농노적 토지보유(villeinage)가 사라진 방식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마치 껍질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변형된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메이틀런드는 토크빌이 상술한 영국의 특이성을 전적으로 보증하며, 거기에 역사적 정확성을 더했다. 12세기에서 14세기 사이의 중요한 시기에 프랑스와 독일이 계약(봉건주의)에서 신분 혹은 토크빌의 용어로카스트(caste)’로 이동한 반면, 영국은 이러한정상경로를 따르지 않았다. 이 특이한 분기는 이후 계급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최근에 서거맨(Sugarman)영국의 젠트리(gentry)는 다른 나라의 하급 귀족들과 이 중대한 측면에서 제도적으로 달랐다. 오직 정당한 자격이 있는 귀족만이 특정한 아종(亞種, subspecies)으로 분류되며, 그들은 오직 자신과 같은 질서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차상위 계급 전체가 법에서 특권을 누리는 나라들과는 다른 중요한 법적 차이라고 지적했다.53

 

부와 혈연 기반 신분상의 불평등은 농경 사회에서 삶을 조직할 때 흔히 사용되는자연스러운불평등 중 두 가지일 뿐이다. 나이와 성별은 가족 내에서 가장 강하게 표현되는 또 다른 두 가지 불평등 요소다. 메이틀런드는 가족 관계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는 우리들에게 그의 관점이 초기 이론가들의 견해와 어떻게 일치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킨다.

 

 

가족 관계

 

대부분의 농경 사회에서는 재산권을 개인이 소유하지 않는 것처럼, 개인이 독자적인 법적 권리를 소유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가족은 단일한 법적, 정치적 단위이며, 가장 연장자인 남성, 아버지가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over), 구체적으로 말해 남성이 여성에 대해, 부모가 자녀에 대해, 그리고 아버지가 모두에 대해 상당히 절대적인 권리를 가진다. 이는 가부장적 형태, 즉 가장권(家長權, patria potestas)[5]으로, 단순한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로마법에 명시되어 있으며, 앙시엥 레짐(ancien régime)하의 서유럽 대부분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면 메이틀런드의 영국사 분석은 이러한 단순화된 모델과 어떻게 비교될까?

 

색슨 시대와 관련하여, 메이틀런드는 노르만 정복 이전의 시기를 얘기할 때조차도, 영국에선 아버지에게 성년인 아들들에 대한 항구적인 가장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건 결코 확실하지 않다고 느꼈다.54 이후 시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명확하게 입장을 밝힌다.

 

어느 때였든 만일 우리 영국법이 로마법과 비교될 만한 항구적인 가장권을 알았다고 해도, 그 시기는 브랙턴 시대보다 훨씬 오래 전에 지나간 것이다. 13세기의 법은 19세기의 법이 그랬던 것처럼, 유년기나 미성년기를 많은 법적 결과를 수반하는 상태로 알고 있었다. 유아는 특별한 불이익을 받는 동시에 특별한 혜택을 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유아의 법적 역량은 아버지의 생사 여부에 거의 혹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며, 성년이 된 남자나 여자는 어떠한 종류의 부권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우리 법은 해방이라는 걸 알지 못하며, 단지 성년에 도달한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55

 

그만큼 중요한 점은, ‘유아는 아버지가 살아있더라도 소유주의적 권리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소년과 소녀들은 종종 어머니나 모계 친족으로부터 토지를 상속받는다. 이 경우 아버지는 대개 영국법에 따른 테넌트(tenant)'로서 평생 동안 토지를 보유하게 되겠지만, 그 봉토권(fee)은 자녀에게 속한다. 만약 상반된 이해를 다투는 청구인이 등장하게 되면, 아버지가 해당 토지를 대리하여 소송에 참여해선 안 된다. 대신, 자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보증을 요청해야 하며, 이에 자녀는 독립된 인격으로 법정에 출석할 것이다. 더 나아가 자녀가 상속받은 토지에 대해 아버지는 아무런 권리를 갖지 않으며, 어떤 영주가 그 토지의 후견(wardship, 재산 관리와 양육 보호 등에 대한 권리와 의무)을 맡게 되는 경우도 있다.”56

 

더구나 미성년자(infant)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다만,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대리하기에 적합한 인격을 내세운다. 엄밀히 말해, 그는 후견인이 있다 하더라도 법정에서 후견인에 의해대표되는 것이 아니다.’57 미성년자의 친구'가 소송을 제기하고 그 미성년자를 법정에 데려오는 경우에도 그 소송은 친구의 소송이 아니라 미성년자의 소송이며, 법정은 미성년자의 사건이 적절하게 다뤄지고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13세기에 이 절차가 정식화되었을 때, ‘미성년자 곁에 있는 친구가 반드시 미성년자의 친족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가족의 유대가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알 수 있다.’58 이 모든 것은 가장권 모델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미성년자가 별도의 재산을 상속받고, 독자적으로 소송을 제기하며, 부모의 범죄에 대해 책임지지 않거나, 부모 역시 어린 시절이 지난 후부터는 자녀의 범죄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는 관념은 대다수 문명의 기준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남성과 여성 간의 관계는 더욱 이례적이다. 메이틀런드는 여러 주요 구절에서 그들의 지위에 관한 문제를 다루며, 자신의 설명 전반에 걸쳐 여성의 신분이 한때 낮았다가 자신이 살던 시대에 이르러 점차 진화했다는 이론을 일관되게 거부한다.59 그는 영국법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남편과 아내를 별개의 인격으로 취급했음을 보여주며, 그 렇기에 영국은 오래 전에 개인주의적 경로를 선택했다고 주장한다.60 그는 노르만 정복 직후부터 여성들이 심지어 보유자가 왕에게 군역을 제공해야 하는 재산까지도 상속받을 수 있었음을 입증한다.61 메이틀런드는 13세기부터 혼인 생활에서 결혼한 여성이 일부 권리를 상실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보통법에 따라서 남편은 아내의 후견인(guardian) 역할을 했으며, 이게 우리가 근본적 원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항상 아내의 동의(consent)를 필요로 했다.62 다음으로, 남성과 여성의 신분을 설명하는 세 가지 대목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노르만 정복 이전의 여성 아동의 지위와 관련해, 메이틀런드는 우리가 아는 한, 여성이 영속적인 피후견(tutelage)이라고 불러야 할 그 무엇에도 종속되어 있지 않았다고 썼다. 어린 소녀들은 원치 않게 결혼하거나, 심지어 불가피한 경우 노예로 팔릴 수 있었지만, 남성 아동과 마찬가지로 여성 또한 성년이 되었을 때 독립적인 지위가 주어졌다. 앵글로색슨 토지대장에서 여성들이 증여를 받고, 유언장을 작성하며, 증언하고, 후견인의 개입 없이 법정에 출석하는 모습이 나타난다.63 ‘노르만 정복 이후에도, 영국에서 남편이 없는 성년 여성은 모든 사법적 목적에 있어서 완전한 법적 역량을 가진 독립적인 인격이었다. 그녀는 소송을 걸거나 당할 수 있으며, 봉토를 양도하고(feoffments), 법적 계약에 날인하는 등 이 모든 걸 후견인 없이 처리했다.’ 이 모든 게 우리 시대의 가까운 시기에 유럽 대륙에서 찾아볼 수 있는유물인여성에 대한 영속적 후견과는 매우 달랐다.64

 

 

남편과 아내 간의 복잡한 관계와 관련해, 메이틀런드는 훨씬 더 평등했던 관계가 14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부분적으로 약화되었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12세기와 13세기 사이에 걸쳐, 기혼 여성들이 후대의 법에서는 유효하게 할 수 없었던 행동들을 하겠다고 공언하는 걸 상시적으로 발견한다.’65 그러나 혼인 조정(the marriage settlement)[6] 체계와 형평법(equity) 법정 체계를 통해, ‘영국의 아내는, 만약 그녀가 부유한 계급에 속해 있었다면, 남들보다는 더 두드러지게 배우자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현대 법률은 이러한 자유를 모든 아내에게까지 확대하였다.’66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영국의 보통법과 형평법 체계와 14세기부터 유럽 대륙에서 생겨난 외관상으로 평등주의적인 체계 사이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후자에선 남편과 아내가 그들의 재산권을 합치거나 완전히 공유하도록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들을 독자적인 권리를 가질 수 없는 함정으로 몰아넣었다. 메이틀런드는 영국 여성들의 근대적 자유가 단지 불쾌하거나 부정의한 법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근대법이 만들어지려면, 중세 시대와 중세 종족의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났던 공동체라는 관념을 중세 법률가들이 거부해야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그 관념을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다면, 그 결과로 만들어진 체계는 깊이 뿌리내렸을 것이며, ‘기혼 여성의 해방에 우리의 보통법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공동체가 성장하고 번창하며, 로마주의(Romanism)의 모든 공격을 견뎌내고 근대 법전에서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67

 

13세기 사법(私法)과 관련하여, 메이틀런드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들은 이제 모든 사법(私法) ‘에 있으며, 남성과 동등하다. 상속법에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차이는 매우 크지 않다. 딸은 사망한 남성의 형제를 대신할 수 있으며, 후견과 결혼에 관한 법에서도 남성과 여성 피후견인 간에 차이를 두기는 하지만, 양쪽 모두에게 거의 동등하게 엄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는 병역의 대가로 수여 받는 토지까지도 보유할 수 있으며, 동산을 소유하고, 유언장을 작성하고, 계약을 체결하며,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을 당할 수 있다. 여자는 후견인의 중재 없이 직접(in person)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을 당할 수 있으며, 그녀 스스로(with her own voice) 변론할 수도 있다. 게다가그리고 이는 강력한 사례인데이따금씩 기혼 여성이 남편의 변호인으로 출석하기도 한다. 과부는 종종 자신의 자녀들의 후견인이 되며, 귀부인(lady)은 때때로 그녀와 연관된 테넌트들의 자녀의 후견인이 되기도 한다.”68

 

그러나 공적 기능들과 관련해, 여성은 거의 모든 공적 역할에서 배제되었다. 메이틀런드는 이를 다시 요약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적인 권리에 관해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수준에 있지만, 상속의 계율(the canons of inheritance)[7]에서 후순위로 밀리며, 그들은 아무런 공적 직무도 맡을 수 없었다. 병영에서, 의회 위원회에서, 의원석에서, 배심원석에서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69

 

따라서 여성은 중간자적 신분을 갖게 된다. 독신녀(spinsters)과 과부의 사적 지위는 오늘날과 유사하지만, 기혼 여성은 남편의 후견아래 있었다. 공적 업무에서 여성들은 거의 배제되었다. 앵글로색슨 시대 이후로 이들의 지위가 향상되었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13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대륙 유럽의 많은 여성들에 비하면, 그 정도가 훨씬 덜했다. 토크빌이 미국에서 보았던, 여성들의 비교적 높은 지위는 바로 이러한 전통이 후대에 직접적으로 이어진 결과다. 여성의 사적 역할과 공적 역할 간의 극명한 분리에 관한 토크빌의 분석은 메이틀런드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한다.

 

봉건제, 가족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메이틀런드의 접근 방식을 고려할 때, 그가 몽테스키외, 스미스, 토크빌의 추론을 풍부하게 하고 구체화하는 그림을 정교하게 제시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영국의 몇 가지 구조적 특이점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서 개인은 더 자유롭고 사회 구조는 더 유연했다. 무엇보다도 메이틀런드가 앵글로색슨 시대의 영국에서 존재했다고 생각한 경제, 친족, 정치 간의 중대한 분리가 특유한 형태의 봉건주의로 살아남았으며, 이 봉건주의는 유럽 대륙의 봉건사회들 대부분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화했다. 따라서 메이틀런드는 영국에서는 경직성을 향한 광범위한 경항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보여줌으로써 이전의 추측들을 보완하는 서사를 개괄하였다.

 

메이틀런드의 해법은 우리에게 더 많은 질문들을 불러일으키며, 특히 1200년 이후의 중요한 시기에 왜 영국은 유연성과 권력 분립을 유지한 반면, 대륙 유럽 대부분은 중앙집권화된 권력, 정치와 경제, 정치와 종교의 재결합, 그리고 신분 기반 사회의 성장으로 나아갔는지를 궁금하게 한다. 메이틀런드는 영국이 특이하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이제 그는 영국이 왜 달라졌는지, 더 중요한 건 왜 그렇게 유지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5장 각주

1 Maitland, Constitutional, 51.

2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313.

3 Maitland, History, I, 534, 564.

4 Maitland, History, I, 616.

5 Maitland, History, I, 620–1.

6 Maitland, History, I, 623.

7 Maitland, History, I, 629.

8 Maitland, History, I, 630.

9 Maitland, History, I, 688.

10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360.

11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360.

12 같은 맥락을 다룬 다른 문헌상의 논의를 참고하려면, 다음을 보라. Maitland, Township, 25.

13 Maitland, Domesday Book, 340–1.

14 Maitland, Domesday Book, 346.

15 Maitland, Domesday Book, 346, 그리고 같은책, n. 1.

16 Maitland, Domesday Book, 348.

17 Maitland, Domesday Book, 348.

18 Maitland, Domesday Book, 349.

19 Maitland, Domesday Book, 353.

20 Maitland, Collected Papers, II, 362.

21 Maitland, Constitutional, 79.

22 Maitland, Constitutional, 79–80.

23 Maitland, Constitutional, 171.

24 Maitland, History, I, xlvii.

25 Maitland, History, I, 224; 그리고 같은 책, II, 402.

26 Maitland, History, I, 225.

27 Maitland, History, II, 396–7.

28 Maitland, History, I, 407.

29 Maitland, History, I, 407.

30 Maitland, History, I, 408.

31 Maitland, History, I, 408.

32 Maitland, History, I, 408.

33 Maitland, History, I, 409, 411.

34 Maitland, History, II, 446.

35 Maitland, History, I, 411.

36 Maitland, History, I, 412.

37 Maitland, Letters, no. 86.

38 Maitland, History, I, 415.

39 Maitland, History, I, 416.

40 Maitland, History, I, 416–17.

41 Maitland, History, I, 417.

42 Maitland, History, I, 418.

43 Maitland, History, I, 419.

44 Maitland, History, I, 419.

45 Maitland, History, I, 428.

46 Maitland, History, I, 429.

47 Maitland, History, I, 430.

48 Maitland, History, I, 431.

49 Maitland, History, I, 432.

50 Maitland, History, I, 432.

51 Rogers, Six Centuries, 34.

52 Rogers, Six Centuries, 44.

53 Sugarman, ‘Law’, 40.

54 Maitland, History, II, 437.

55 Maitland, History, II, 438.

56 Maitland, History, II, 439.

57 Maitland, History, II, 440.

58 Maitland, History, II, 441.

59 Maitland, History, II, 403.

60 Maitland, History, II, 432.

61 Maitland, History, I, 262.

62 Maitland, History, II, 406.

63 Maitland, History, II, 437.

64 Maitland, History, II, 437.

65 Maitland, History, II, 411.

66 Maitland, History, II, 433.

67 Maitland, History, II, 433.

68 Maitland, History, I, 482.

69 Maitland, History, I, 485.

 



[1] 중세 영국에서 대개 촌락의 농지들은 삼포 윤작을 특성으로 하는 개방농지제로 운영되었고, 촌락민들의 보유지는 농지들 위에 기다란 지조(strips)의 형태로 분산되어 있었다. 영주의 직영지(demesne) 또한 커다란 하나의 땅덩어리가 아니라 지조로 이뤄져 있었고, 농민 보유의 지조와 혼재되어 있었다. 경우에 따라 교회가 보유한 지조도 별도로 존재했다. 모든 지조들은 길고 좁다랗게 형성되어 있었고, 그 결을 따라 멍에를 멘 말이나 소가 쟁기를 끌도록 하여 경작하였다. 각 지조의 경계에는 밭둑만 존재하고 울타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농지 체계를 가리켜 개방농지제라고 불렀다. 지조들은 촌락민들 사이에 어느 정도 공평하게 분할되고 균일하게 배치되어 있음으로 해서, 중세 농민 계층의 동등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2] 프레드릭 아서 시봄은 1883에 태어나 1912년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역사학자로, 사회경제사를주로 연구하였고 로마 시대와 앵글로색슨 시대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883년 대표작인 English Village Community을 출판하였다. 이 책 출간 이전에는 고대 앵글로색슨 사회가 토지를 공동으로 보유하는 자유민(freemen)들의 공동체적 그룹들로 구성되었으나, 원주민들 간의 갈등과 외국으로부터의 이민족의 침략이 지속되면서 촌락 공동체가 붕괴하고 자유롭던 임차농(the tenants)들이 농노(serfs)로 전락하는 위계적 사회, 즉 봉건 사회로 전환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시봄은 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당시 영국에 자유로운 공동체가 존재했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충분치 않다는 걸 입증하였다. 대신 시봄은 로마의 촌락(villa)과 중세 영국의 장원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장원이 로마의 촌락과 게르만의 부족 체계가 융합된 된 결과로 등장했다는 주장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3] 십호반은 중세 잉글랜드에서 이웃한 10가구(또는 10/10 hide이라고도 함, 여기서 결/하이드는 1가구를 부양할 수 있는 토지면적으로 산정되는 토지 단위 겸 가구 단위임)를 한 개 조로 묶은 일종의 지역 조직이었다.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tithing으로, 노르만 시대에는 Frankpledge라고 불렸다. 십호반은 십일조 납세와 함께, 치안유지와 벌금 납부 등에 관해 연대책임을 지는 등 여러 의무를 공동으로 부담하였다. 그러나 독자적인 사법권을 갖진 못했으며, 장원에 관련된 사건이나 여러 송사는 다른 사법 체계를 통해 해결해야 했다.

 

[4] 제임스 에드윈 소롤드 로저스는 1880년부터 1886년까지 하원 의원을 지낸 영국의 경제학자, 역사가, 자유주의 정치인이었다. 6권에 달하는 영국 농업과 물가의 역사: 1259년부터 1795년까지(A History of Agriculture and Prices in England from 1259 to 1793, 1866–1902), 지난 6세기 동안의 노동과 임금: 영국 노동사(Six Centuries of Work and Wages: the history of English labour, 1884)』 등을 저술하였다. 후자를 작업하기 위해 20년 간 사료 수집에 전념했다. 여기서 확인되듯, 그는 당대 고전학파의 추상주의(the abstractionism)를 비판하였고,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분석하기 위해 역사통계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자유 무역, 유럽에 대한 비개입주의, 제국 팽창 종식을 옹호하는 리처드 콥든(Richard Cobden)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다.

 

[5]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는 고대 로마의 가족과 관련한 법률 용어로, 흔히 가장권 또는 가부권(家父)이라고 번역한다. 는 한 가정에서 자식과 노예를 벌할 수 있는 징계권뿐만 아니라, 자식과 노예를 물건처럼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모든 가족 구성원에 대한 아버지의 권위를 함의한다.

 

[6] 혼인 시, 부부가 혼인 전부터 가진 고유재산 등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부부 간 재산권의 조정 및 합의를 위한 법적, 행정적 절차를 밟게 된다. 이러한 계약 과정과 그 결과를 가리켜 혼인 계승적 재산권 조정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맥팔레인의 표현을 따라서, 혼인 조정이라고 번역하였다.

 

[7] 상속의 계율은 재산이나 자산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물려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규칙이나 원칙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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