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주민들에게 폭염과 한파와 같은 극한적인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을까? 나는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것이 현재 너무나 고달픈 삶을 넘어 이런 경험이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고, 그로 인해 무감각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쪽방촌의 많은 주민들은 쪽방 이전에도 난방이나 냉방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주거 환경에서 살아왔다. 에어컨과 난방이 잘 작동되는 집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이지만, 쪽방촌의 많은 주민에게 이는 일반적이지 않다. 앞서 문을 열어두면 시원한 바람이 분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던 B씨의 사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60대인 그는 태어나서부터 보육원에서 살다가, 10살 때 보육원 내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이기지 못해 도망쳐, 처음 동자동으로 왔다. 그 후 성인이 될 때까지 당시 동자동에 있던 근로재건대에서 넝마주이로 강제 부역했다. 성인이 된 스무 살 이후로부터는 동자동의 쪽방으로 나왔고, 그렇게 40년을 쭉 살아왔다. 이런 그에게 쪽방과 같은 열악한 주거 환경은 너무나 당연하였을 것이다. B 씨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과거 경험이 극단적인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동자동에서 주민조직 활동가와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민들은 (일반적인 주거) 환경을 몰라요.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걸 몰라요. 혹여나 그렇게 살아봤던 분들은 . 이곳이 지옥 같은 곳이니까. 결국 나가시는 거고. 옛날부터 너무 가난해서 그러셨던 분들은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00 이모님도… 지금보면 보일러 같은 것도 작동을 못 하시잖아요.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거야. 보일러를 쓸 일이 없었던 거지… 모르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삶에 대해서 상상할 수도 없는 거고…그러니까 덥고 추운지에 대해서… 못 느끼고 그런 거지…
주민 활동가가 언급한 00이모님은 40년 넘게 동자동에서 살아온 60대 후반의 주민으로, 얼마 전 주민활동가들의 도움으로 동네에 비교적 시설이 좋은 쪽방으로 이사했는데, 처음으로 보일러 온도 조절기가 있는 방에 살아본 것이다. 이처럼 많은 쪽방촌 주민은 과거 경험, 혹은 겪어보지 못한 경험으로 인해 남들이 재난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일이 자신에게는 재난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D씨와 인터뷰에서도 쪽방촌 주민들의 과거 경험이 현재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그를 포함해 여럿의 주민들과 쪽방에서 경험하는 폭염과 한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비교 기준이 과거 거리에서 노숙하던 시절인 걸 알 수 있었다. D씨 역시 과거 거리 노숙하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좋은 환경이고 비록 쪽방이라도 지금은 자신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서울시의 조사에 따르면 쪽방촌 주민들의 절반 가까이는 과거에 거리노숙의 경험이 있다.
필자: 다른 주민분들하고 이야기해 보면 여름에 쪽방이 힘들다 겨울에 힘들다~ 뭐 이렇게 크게 문제라고 생각 안 하시는 것 같아요. D씨: …여기는 다 노숙을 해봤고, 고생을 해봤고, 바퀴벌레가 바글바글한 데도 뭐 더럽다 그런 거는 (익숙하지)... (우리 주민들은) 내색을 안 하잖아… “아이고 나는 불편하네 못 살겠네” 그런 소리를 해봤자... 다 그 사람들 사연이 있고 아픔이 있잖아.
한 나라에서는 재난으로 간주되는 상황이 다른 곳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처럼 쪽방촌 주민들에 어느정도 폭염과 한파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쪽방촌 주민들이 폭염과 한파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보통'의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빈국에서는 설사병이나 급성 호흡기 감염과 같은 질병으로 인한 영유아 사망률이 높으므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만약 비슷한 피해가 부유한 나라에서 발생한다면 이는 재난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각주:2]
이와 마찬가지로 B씨처럼 보육원에서 도망 나와 근로재건대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평생 쪽방에 살았거나, 난방이 되는 주택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거나, 오랜 기간 밖에서 생활하며 만성적인 노숙을 경험하는 등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쪽방촌 주민들이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 있는 것이다. Anderson(1968)은 그의 연구에서 위험이 만성적인 것으로 인식될수록, 그런 사실이 해석 틀의 일부가 되고, 이는 “위험의 정상화(normalization of risk)”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각주:3] 이처럼 많은 쪽방촌 주민들이 재난과 같은 상황을 일상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일상이 재난'과 같은 환경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랫동안 이런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쪽방촌 주민들이 폭염과 한파와 같은 극한적인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단지 과거의 경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과거의 경험과 더불어 변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체념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홈리스 옹호를 위해 일해오며 동자동 쪽방촌의 주민조직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한 활동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폭염과 한파에 대해 무감각한 주민들의 반응이 과거의 경험에서 기인했다는 건) 사실 절반의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적응하기 위해서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워딩이기도 하고 또 하나는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음에도 이제 현실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못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사실은 이제 또 실제로 적응이 일어나기도 하고… 내성이 생긴 거… 체념.. 이런 것들이 좀 크다고 봐요.” 현재 상황이 워낙 열악하고 이렇게 때문에 뭔가 이제 바꾸는 것보다 내가 여기 적응하는 게 훨씬 나를 위해서 빠른 전략이라고 생각하시고… 그건 사실 거리 홈리스들에게도 기자들이 와서 “왜 이렇게 사세요?” 물어보면 “그냥 이게 편해”라고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그의 설명처럼 불평등이라는 구조적인 모순을 변화시킬 수 없기에 체념하고 이 주어진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고 살다 보니 내성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언론이나 외부에서 인식하는 폭염과 한파와 같은 외부 재난에 무기력한 쪽방촌 주민들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환경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은 적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회구조적 환경이 아닌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었을 때 쪽방촌 주민들은 무기력한 단순한 약자, 도움받아야할 집단 정도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주민들을 삶을 살펴보면, 폭염을 이겨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가령 더울 때 문을 열어두고 가만히 있으면 바람이 들어온다는 B씨는 누워서 가만히 있는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가 누워서 가만히 있는다는 말은 다시 보면 그냥 누워있는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일 수 있다. 얼핏보면 가만히 있는 운동이지만 엄청난 힘을 요하는 플랭크 운동을 생각해보자. 이렇게 보면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순응적인 게 아니라 매우 의도적인 행위로 열악한 환경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한 주민의 말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며 버티고 있지만 변화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고 있지만, 안타깝게 현실은 변화하지 않아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내성이 생긴 것이다.[각주:4]
쪽방의 삶이 ‘일상이 재난’이기 때문에 폭염과 한파에 대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아닌 것인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징조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실제로 열악한 주거환경인 쪽방에, 특히 대부분의 주민들이 건강에 이상이 있는 노인들이 다수라는 점에서 폭염과 한파는 매우 위험하다.
우리는 흔히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 빗대어 자주 쓰는 표현으로 냄비 속의 개구리를 예로 든다. 끓는 물에 개구리가 들어가면 깜짝 놀라 뛰쳐 나오지만, 만약 개구리가 처음부터 냄비 안에 있고 물 점점 따뜻해져 끓게 되면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죽는 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실험은 과학적인 오류라고 밝혀졌지만, 폭염과 한파와 같은 것에 무감각한 쪽방 주민들에게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들이 '일상적인 재난'에 서서히 잠식되어 잠재적으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극한 상황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하다는 것은 실제 위험이 일어났을 때 더 큰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위험의 일상화가 1995년 시카고 폭염과 같은 재앙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현지조사를 하면 지냈던 기간 여름 동자동 주민만을 위해 지역 사회복지기관이 설치한 야간 무더위 쉼터의 이용도는 매우 낮았다. 주민이 1,000여 명으로 알려진 곳에서 2개월 통틀어 야간 무더위 쉼터 방문 횟수는 총 29회에 그쳤고, 두 번 이상 방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주민들이 무더위 쉼터를 이용하지 않는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하지만 그 중 하나는 주민들이 현 상황을 위급하거나 위험하다고 인식하지 않기 때문일 수 도 있을 것이다.
나가며
기후위기가 현실이 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경각심을 느끼고 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기후변화가 초래한 해수면 상승으로 물이 무릎 정도로 차오른 상황에 사람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허둥지둥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 이런 마음으로 기후불평등을 연구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폭염과 한파를 경험하는 주민들의 경험을 보여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을 갖고 현지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 역시 얼마나 근시안적인 사고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미 ‘일상이 재난’으로 해수면이 목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살고 있었던 쪽방촌의 주민들에게 약간의 해수면의 상승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는 단지 온도가 더 높고 낮고로 규정되는 폭염이나 한파의 문제를 넘어, 폭염이라는 재난으로 규정되는 시야와 담론이 그동안 얼마나 편형된 감각에 의해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이런 감각으로 쪽방촌의 삶을 보고 쪽방촌의 삶을 재현시켰을 때, 주민들의 실제의 삶을 왜곡시켰는지 돌이켜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폭염/한파와 같이 기후변화와 관련된 어떠한 재난에 관해서 ‘일상이 재난’이라는 맥락을 제거된 채 재현하고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빈곤하고 권력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피해를 악화시킬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폭염과 한파라는 외부 재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일상에서의 건강, 주거환경, 생활환경, 사회적 관계 등 취약계층이 직면한 다양한 일상의 재난이 더위/추위/코로나/기후 관련 재난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면밀히 고민해보고 연결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끝)
본글은Kang, J. (2024). “Every day is a disaster”: Climate vulnerabilities and disaster subculture of jjokbang‐chon in Seoul, Korea and its implications for social work. International Journal of Social Welfare.을재구성하여작성한것임을 밝힌다.[본문으로]
Bull-Kamanga, L., Diagne, K., Lavell, A., Leon, E., Lerise, F., MacGregor, H., Maskrey, A., Pelling, M., Reid, H., Satterthwaite, D., Songsore, J., Westgate, K., & Yitambe, A. (2003). From everyday hazards to disasters: The accumulation of risk in urban areas. Environment and Urbanization, 15(1), 193–204. https://doi.org/10.1177/095624780301500109[본문으로]
혹자는표면적으로는 ‘이가없으면잇몸으로씹는’ 쪽방촌주민들의모습이회복탄력성(resiliency)과끈기를보여주는것이라고할수도있다. 반은맞고반은틀린이야기다. ‘일상이재난’과같은삶을살아내고있는것이 ‘일상이재난’인상황을정당화할수없기때문이다. Harnisch et al. (2020) 는이를강압적인회복탄력성이라고정의한다. 이처럼 외부 환경과맥락이 만들어내는 강압성에 대한 논의가 없이 회복탄력성만 강조될 경우개인의노력으로문제를대응해나가는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