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즈와 사회 전환
권범철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커먼즈(commons)라는 말이 자주 보이고 들린다. 아무래도 생소한 말이니 — 한국어가 아니다 —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커먼즈라는 운동 혹은 삶의 양식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인류에게 공통적인 것이다.[1] 그럼에도 그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외국어여서만은 아니다. 그 용어가 가리키는 삶의 양식이 우리에게 낯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우리는 공통의 삶보다는 각자도생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것 같다. 하지만 커먼즈는 사라졌다기보다는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며 가끔씩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우선 그 용어를 살피면서 시작해 보자. 그 단어 안에 우리가 놓치고 있던 삶의 영역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커먼즈, 함께 움직이기
요즈음 영어 commons는 한국어에서 아주 다양하게 표현된다. 공유지, 공유재, 공동자원, 공동자원체제, 공통재, 공통장, 공통계, 공통체 아니면 그냥 음역해서 커먼즈(커먼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는 그냥 공유지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많은 용어가 생겨났을까? 우선 이렇게 다양한 용어가 있다는 건 그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났으며 그래서 자주 이야기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용어를 선택한다는 건 그에 대한 이해가 서로 조금씩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 공유지라는 말 하나로도 크게 무리가 없었던 그 영역은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많은 말들이 덧붙여지면서 다양한 관점을 내포한 여러 용어들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공유지라는 말로는 왜 불충분한가?
공유지는 한자로 共有地라고 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를 간단하게 "두 사람 이상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땅”으로 풀이한다. 한자를 그대로 옮긴 말이라고 해도 좋겠다. 우리말샘 사전도 이와 같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은 조금 다른데 “둘 이상이 공동으로 소유하거나 이용하는 땅”이라고 정의한다. 앞 두 사전과 다르게 “이용하는”이 추가되어 있는데 이 차이가 중요하다. 소유와 이용은 큰 차이가 있고, 많은 커먼즈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커먼즈는 공동으로 소유하기보다는 이용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커먼즈는 함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부정이다. 역사적인 사례에서 그 흔적을 살펴보자.
커먼즈라는 용어가 처음 중세 잉글랜드 재산법에 등장했을 때, 이것은 공동체가 사용했지만 소유하지는 않은 목초지, 어장, 숲, 토탄지 등의 자산을 뜻했다. 공통인(commoner)[2]은 이 자원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관습적으로 그리고 집합적으로 사용하고 관리했다.[3] 이러한 커먼즈, 특히 숲은 중세의 자급자족 경제 단위인 장원에서 중요한 경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중세 연구자 비렐에 따르면 당시 나무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것보다 훨씬 널리 사용되었다. 나무는 건물을 짓고 가구를 만들며 불을 지피고 요리를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토탄과 석탄이 연료로 이용되긴 했지만 나무에 비하면 이용량이 매우 적었고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 또한 나무는 경작지에 울타리를 치거나 삽, 갈퀴, 괭이, 도리깨 같은 도구를 만드는 데도 필수적이었다. 숲이 농촌 공동체에 제공한 가치는 목재의 공급에 그치지 않았다. 숲은 말과 소, 양을 방목하기 위해 필요한 초지를 제공했으며, 도토리와 너도밤나무 열매가 있는 돼지 먹이의 공급처이기도 했다. 이처럼 숲은 무수한 필요에 부응했다. 숲의 “나무가 바로 에너지의 원천이었다.”[4] 그러나 이러한 이용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소작인들은 무상으로 혹은 낮은 비용으로 나무와 목초지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지주의 시각에서 볼 때 그러한 공통권(common right)은 자신의 소득 증대를 막는 장벽이었다. 따라서 공통권은 다양한 압박을 받았고 그에 따라 영주와 공통인들 간의 분쟁이 자주, 때로는 폭력적으로 일어났다.[5] 이처럼 중세 장원은 각 신분이 사회질서에서 주어진 위치를 받아들인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무대였다.[6]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커먼즈가 공동의 소유라기보다는 소유에 대한 부정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숲이 있다고 커먼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숲에 대한 소유권은 없지만 — 사실 숲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 없는 일이지만 — 그 숲을 함께 이용하기 위해서 싸우는 과정을 통해 그 숲은 커먼즈가 된다. 그러니까 커먼즈는 우리가 공유하는 재화만은 아니다. 숲이 그렇듯 어떤 재화든 저절로 커먼즈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필요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 — 공동체라고 해도 좋겠다 — 이 소유와는 다른,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대상과 관계 맺을 때 커먼즈가 생겨난다. 그래서 커먼즈에는 어떤 재화와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활동이 뒤얽혀 있다. 여기서 “사이”는 재화와 사람 사이이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이기도 하다. 혹은 우리가 시야를 좀 더 넓혀 재화라고 명명된 자연, 예를 들어 숲 속의 숱한 생명을 고려한다면 동물과 식물과 돌과 흙과 물 등등의 사이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커먼즈의 역사가 피터 라인보우의 말처럼 커먼즈는 “사회적 관계인 동시에 물질적 사물”이다.[7] 이것은 커먼즈가 명사보다는 동사에 가깝다는 걸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외연을 가진 물질을 대상으로 할 때에도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우리의 관계 맺기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어 common은 (현대의 영어 사전에는 명사와 형용사 용법만 나와 있지만) 본래 동사 용법으로도 사용되었다. 여기서 잠깐 common의 어원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는 그 단어가 가리키는 삶의 영역을 좀 더 풍부하게 알려준다.
형용사로서 common은 1300년경 “모두에게 속한, 공동으로 소유되거나 사용되는, 일반적인” 등을 의미했다. 이는 비슷한 뜻을 가진 프랑스어 comun(현대 프랑스어로는 commun)과 라틴어 communis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 라틴어는 “공통으로 보유된”이라는 뜻의 원시인도유럽어 ko-moin-i-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ko-는 “함께”를, moin-i-는 “변화하다, 가다, 움직이다”(를 뜻하는 어근 mei-에 접미사가 붙은 형태)를 뜻한다.[8] 따라서 common은 본래 ‘함께 변화하다, 함께 가다, 함께 움직이다’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으며,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말이 커먼즈를 가장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같다. 한 마디로 커먼즈는 함께 움직이며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moin-i-는 “의무, 공적 의무, 기능”을 뜻하는 라틴어 munia의 어원이기도 하다.[9] 그래서 우리는 ‘함께 함’에 들어있는 또 다른 의미도 알게 된다. 우리가 함께 움직인다는 것, 혹은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 ‘우리’ 안에 있는 서로에게 — 여기에는 함께 하는 사람뿐 아니라 다른 생명도, 사물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 의무를 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무는 우리가 전적으로 혼자 살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존재의 타고난 취약성 — 혼자 살 수 없다 — 으로 인해 우리가 서로 의존하고 서로를 돌볼 수 밖에 없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돌봄은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커먼즈를 다시 이렇게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뜻하는데 그 과정은 서로를 돌보는 일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돌봄은 커먼즈를 구성하는 원리로 나타난다. 한편 common의 동사 용법과 명사 용법도 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14세기 중반 그 용어는 “공동으로 참여하다, 관계를 맺다 또는 거래하다”는 의미의 동사로 사용되었으며, 명사로서 1300년경에는 “동료애 또는 형제애”를, 14세기 초에는 “공동체나 마을의 사람들, 자유민, 시민”을, 15세기 후반에는 “공동으로 보유한 땅”을 의미했다.[10] 이 모든 것은 커먼즈가 ‘함께 함’이 품고 있는 속성 — 형제애, 즉 연대 — 이나 그 양태 — “공동으로 참여하다, 관계를 맺다” — 혹은 그로 인한 주체적 특징 — “공동체나 마을의 사람들” — 을 포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여러 의미를 포괄하는 그 성격 때문에 공유지라는 말은 커먼즈를 담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중세 장원의 숲 커먼즈만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공유되는 재화나 자원이라기보다 공동으로 자원을 관리하는 시스템에 가깝다. 공유지라는 단어로는 불충분한 이유다. 커먼즈 연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인 엘리너 오스트롬은 이러한 공동자원 관리 제도로서의 커먼즈에 대한 연구로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그는 주로 연안 어장, 소규모 목초지, 지하수 지대, 관개 시설, 그리고 지역 공동 산림 등의 사례를 조사하여 현실 세계의 커먼즈가 (하딘이 이야기한 ‘비극’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원을 관리하는 공동체와 그들이 스스로 설정한 규칙에 따라 잘 관리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자원을 공동으로 잘 관리한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커먼즈는 지역의 소규모 자연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점에서 중세의 숲 커먼즈와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이전의 숲 커먼즈가 자급 경제의 일환이라면 오스트롬이 연구한 소규모 공동자원 관리 제도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일환이다. 한 마디로 커먼즈가 놓여 있는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전자가 땅 없는 이들이 스스로 생계를 꾸리는 순환 경제의 터전이라면, 후자는 그 경계 안에서는 자원을 공유하는 수평적인 조직일지라도 결국 시장에서 소비되는 상품을 생산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 커먼즈는 국제 시장에 의해 좌우되는, 자본주의 상품경제의 한 마디가 된다. 그래서 커먼즈 내에서 (비)인간 생명 및 사물과 어떻게 관계 맺느냐도 중요하지만 커먼즈가 자신의 외부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 역시 중요하다. 후자를 망각할 때 우리는 커먼즈의 정치적 의미를 놓치기 쉽다. 커먼즈 내에서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맺더라도 결국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현상 유지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닷가재 어장에서 알프스 산의 목초지까지 상품을 생산하는 커먼즈다. 조지 카펜치스는 오스트롬이 연구한 그러한 커먼즈를 친자본주의적인 커먼즈라고 불렀다. 그는 오스트롬과 그 동료들이 커먼즈를 좋은 제도 설계의 문제로 이해한다고 본다.[11] 그 설계가 더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의 문제에는 무관심한 채 말이다.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 커먼즈는 기존 질서를 단순히 보완하는 수준에 그치기 쉽다. 오늘날 위기를 감지한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체제 전환과 같은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되기보다는 말이다.

커먼즈와 사회 변화
그러면 커먼즈가 단순히 기존 사회의 보충물에, 따라서 결국 현상을 유지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을 바꾼다는 과제에 있어 사회 운동은 전통적으로 기존의 질서를 폐지하는데 주력해 왔다. 법과 제도를 바꾸고 국가와 기업을 상대로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반대하는 것, 혹은 더 나아가서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바꾸는 것 혹은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 혹은 ‘구조’를 바꾸려는 활동이다. 이와 대척점에 있는 운동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보다 스스로 변화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새로운 사회를 ‘위해’ 제도를 바꾸고 법을 만들기보다 새로운 사회를 지금 여기에서 구성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는 “예시적 정치”라는 말로 불리기도 하는데,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를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형식의 사회성을 창출하여 이미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직접행동의 원리”[12]로 정의한다. 짐작한 대로 커먼즈는 후자에 가깝다. (불법)점거 공간을 뜻하는 스쾃(squat)은 흔히 예시적 정치의 도시 커먼즈 사례로 종종 언급되는데 스쾃에 대한 존 홀러웨이의 언급은 예시적 정치의 성격을 잘 정리하고 있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세계에서, 아직 실존하지는 않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사는 시간이다. 우리는 아직 실존하지 않는 세계를, 그 세계를 삶으로써 창조한다. … 스콰터들은 빈집에서 살기 위해 사적 소유와 지대의 폐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빈집에서 살 뿐이다.[13]
이처럼 커먼즈는 무언가를 ‘위한’ 활동이라기보다 구성적이며 수행적인 실천이다. 이는 그 활동의 결과물이 과정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그림을 그릴 때, 그리는 과정과 그 결과물인 그림은 분리된다. 그림은 붓질 ‘이후에’ 완성되어 갤러리에 걸린다. 이와 달리 연극은 그것의 수행 과정이 결과물이다. 무대에서 표현되는 대화와 몸짓들, 그리고 그것들이 얽혀 상연되는 과정 자체가 결과물이다. 예시적 정치란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라는 그레이버의 말에서 우리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커먼즈는 연극과 같다. 어떤 사회를 ‘이후에’ 만들기보다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이다. “아직 실존하지 않는 세계를” 연기하듯이. 그래서 커먼즈는 내가 생각하기에 —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제도라기보다 삶의 양식이다.
오늘날 도시에서 중세의 숲과 같은 커먼즈를 찾을 수 있을까? 물론 같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도시에서도 다양한 모습의 커먼즈를 찾을 수 있다. 가령 『커먼즈란 무엇인가』(빨간소금, 2024)를 쓴 한디디는 도시에서 나타난 다양한 함께 살기 실천들을 커먼즈의 사례로 보고한다.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 <빈집>, <경의선공유지>, <빈고> 등 그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서로를 돌보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이 사례가 알려주듯 커먼즈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함께 움직이는 순간 어디에서나 생겨난다. 흥미로운 건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많은 커먼즈들이 비슷한 원리를 공유한다는 점이다. 맛시모 데 안젤리스는 공통화의 형태로 사회적 노동을 가동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먼저 공동 노동이 공통인들의 공동체가 회의에서 정한 특정한 공동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사회적 노동이라면, 또 다른 방식인 호혜 노동은 호혜성이나 선물 혹은 상호부조에 대한 지각과 얽혀 있는 사회적 노동형태다. 이 두 노동은 구별되지만 상호보완적이다. 공동 노동이 특정 목적을 위해 공동체가 협력하는 노동을 나타낸다면, 호혜 노동은 호혜성의 순환을 통해 공동체의 사회 구조를 짜는 것이다. 가령 마을에서 사람들이 함께 빈 터를 정리하거나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 공동 노동이라면, 품앗이는 호혜 노동이다. 데 안젤리스는 농경 사회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던 이 두 가지 공통화 형태가 현대 도시에서 새롭게 재발명된다고 이야기하면서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로 나타났던 미국과 스페인의 주택 압류 반대 운동을 예로 든다. 활동가 집단은 거주민이 은행 집행관에게 저항할 수 있도록 돕고 그 다음에는 도움을 받은 그 거주민이 투쟁에 참여하도록 요청(혹은 초대)하여 같은 조건에 있는 다른 사람을 돕도록 이끈다. 여기에는 압류에 저항한다는 공동의 사업과 도움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저항에 힘을 보태는 호혜성이 함께 있다. 데 안젤리스에 따르면 “이러한 유형의 네트워크는 메트로폴리스의 개인화 경향에 중대한 파열을 나타낸다.”[14] 한디디가 언급한 그 사례들 역시 도시의 개인화 경향에 일어난 “중대한 파열”로서, 새로운 사회를 스스로 살아가는 실천들로 보아도 좋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파열들은 사회 변화에서 어떤 의의를 가지는 걸까? 펠릭스 가타리는 사회 변화와 관련하여 구조가 아닌 국지적인 영역에 주목하는데 후자에서 발생하는 특이한 욕망들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제 본질적인 것은 무수히 다양한 분자적 욕망의 접속이며, 이것은 ‘눈덩이 효과’를 지니며 대규모 힘 대결로 나아간다.”[15] 가타리가 생각하는 사회구조는 “외부에 설립된 불변항의 견고한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미세한 삶과 국지적인 영역의 욕망과 연결되어 있는 관계망의 일부”인 것이다.[16] 우리가 구조를, 그리고 국가를 이렇게 우리의 삶 및 욕망과 연결된 관계망의 일부로 이해한다면, 분자적 욕망의 접속과 그에 따른 눈덩이 효과의 강도가 임계점을 넘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사회적 변화를 경험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덧붙일 이야기
특이한[17] 욕망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멋지고 신난다. “그들은 단지 빈집에서 살 뿐”이라는 홀러웨이의 말 역시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 그래서 종종 인용한다 — 덧붙여야 할 이야기가 있다.
우선 강조하고 싶은 건 부정과 구성의 연결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전통적인 사회 운동과 예시적 정치의 대비는 분명해 보인다. 전자가 기존의 질서를 부정한다면 후자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아니라 연결해야 할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 전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즉 정부/기업의 활동을 저지하고 의제를 제도화하기 위한 입법 활동이나 대중을 상대로 한 캠페인 등은 여전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활동이다. 하지만 제도에 주력하는 운동에서는 대안적인 일상, 삶의 양식에 대한 고민이 누락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외부와 단절된 채 “실존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공동체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고 중요하지만 종종 스스로 그은 경계에 갇히곤 한다(이럴 경우 ‘눈덩이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높은 경계를 쌓더라도 외부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을 뿐더러 스스로 고립된 그들의 공동체는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큰 의미가 없다.
요컨대 이 두 부류의 운동은 각각 부정과 구성에만 집중함으로써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니 비록 커먼즈를 구성과 가까운 것으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둘 사이의 연계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정이 기존 제도와 관련된 것이라면 구성은 새로운 삶에 대한 것이다. 구성이 없는 부정은 역설적으로 기존 질서에 갇힐 수밖에 없고 부정이 없는 구성은 자기기만적일 수 있다.
그럼 이 두 활동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언급한대로 많은 사회 운동은 제도를 바꾸거나 새롭게 수립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여겨왔다. 저소득층을 보조하기 위한 제도,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 소수자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제도, ... 물론 이 제도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의 수립만으로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한국에서 대책없이 진행되는 각종 개발 사업을 보자. 이 사업들이 계속되는 건 제도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자본의 대리자로서의 권력자가 마음을 먹은 순간 기존의 규제는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법 바깥에서 기존의 규제를 해제하거나, 특별법을 만들거나, 사업 관련 영향평가를 조작한다. 기존의 제도를 우회할 방법은 법/제도 기술자들에 의해 늘 마련된다. 힘들게 마련한 제도는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제도와 법은 그냥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들의 묶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제도와 모델과 규칙만이 아니라 그것이 올바로 작동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다. 배치와 관계망의 변화가, 즉 커먼즈의 구성이 중요한 이유다.
이와 관련하여 둘째, 공적인 것을 공통화하는 실천이 중요하다. 커먼즈 담론에서는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을 구별한다. 가령 페데리치와 카펜치스는 공적인 것을 “국가에 의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소유, 관리, 통제, 규제되는 것”[18]으로 정의한다. 반면 공통적인 것은 “우리 삶에 대한 기본적인 결정을 내리고, 집합적으로 그렇게 하는 힘을 되찾는 것”이다.[19] 이들의 말처럼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겠지만 둘 사이를 떼어놓기보다는 공적인 것을 어떻게 공통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해 보인다. 달리 말하면 공적인 영역을 국가의 관리에만 내버려두지 말고 커먼즈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여러 현장에서 국가가 책임지라는 요구를 종종 접한다. 국가가 돌봄을, 교육을, 의료를, 주거를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해당 영역을 국가가 알아서 조직하라는 요구여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들을 돌보는 공간을 직접 조직해서 이에 대해 국고를 지원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아이를 아예 국가에 맡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에 우리는 삶에 대한 자율을 유지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국가의 관리에 크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20] 결국 우리가 원하는 삶은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다. 커먼즈는 이러한 욕망에서 출발한다.
나가며
그래서 이 모든 이야기는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금 우리에게 펼쳐지고 있는 기후 위기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올바로’ 작동한 결과다. 그런데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많은 경우 그 시스템이 나와 동떨어져 객관적으로 작동하는, 혹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로 여기기 쉬우며, 그에 따라 자신은 늘 피해자로 남는다. 이는 우리에게 개입할 여지를 남기지 않고 자신의 연루를 스스로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본세는 관계성에 의해 만들어졌” [21] 다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을 떠올리면서 문제의 시스템을 객관적인 구조가 아닌, 내가 이미 충분히 접속된 관계망 혹은 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가해자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위기에 책임이 있다’와 같은 무의미한 이야기를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집합적 주체가 조직되는 방식에 문제가 있으며 그것이 오늘날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커먼즈는 다른 무엇보다 그 ‘우리’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돌보며 ‘우리’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그 ‘우리’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커먼즈는 물론 ‘우리’를 만들어가는 일이지만 ‘우리’에 갇혀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활동이 만들어낸 균열선을 따라 계속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은 ‘권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배 질서를 그 내부에서 ‘오염’시키는 아래로부터의 전략일 것이다.
[1]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커먼즈(the commons)라는 말이 자본주의 이전의 공유된 공간들을 지칭하기 때문에 마지막의 ‘-s’를 떼어내고 공통적인 것(the comm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그 용어가 가리키는 양상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발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글 역시 커먼즈를 단지 지나간 것만이 아니라 새롭게 늘 생성되는 것으로 이해하며 이런 점에서 커먼즈와 공통적인 것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2] 영어 사전에서 commoner는 (귀족이 아닌) 평민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커먼즈 담론에서 이 용어는 커먼즈를 함께 만들고 이용하고 관리하는 집합적 주체를 가리킨다. 국내에서는 공유인, 공통인, 혹은 음역하여 커머너로 불리는데 이 글에서는 공통인으로 쓴다. 참고로 이 글은 common으로 시작하는 여러 표현들을 (commons를 커먼즈라고 쓸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통’으로 옮긴다.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이 표현이 커먼즈를 가장 적절하게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3] Caffentzis, George. 2016. “commons.” Keywords for Radicals :The Contested Vocabulary of Late-Capitalist Struggle. ed. Kelly Fritsch, Clare O’Connor, AK Thompson. AK Press.
[4] 피터 라인보우. 2012. 『마그나카르타 선언: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 정남영 옮김. 갈무리. 64.
[5] Birrell, J. 1987. “Common Rights in the Medieval Forest: Disputes and Conflicts in the Thirteenth Century.” Past & Present (117): 22-49.
[6] 실비아 페데리치. 2011. 『캘리번과 마녀』. 황성원·김민철 옮김. 갈무리. 53.
[7] 라인보우, 앞의 책, 22.
[8] Online Etymology Dictionary. ‘common’ 항목. https://www.etymonline.com
[9] ibid.
[10] ibid.
[11] Caffentzis, George. 2012. “A Tale of Two Conferences: globalization, the crisis of neoliberalism and question of the commons.” Borderlands 11(2).
[12] 데이비드 그레이버. 2016.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나현영 옮김. 포도밭출판사. 25.
[13] 존 홀러웨이. 2013. 『크랙 캐피털리즘』. 조정환 옮김. 갈무리. 346-7.
[14] De Angelis, Massimo. Omnia Sunt Communia: On the Commons and the Transformation to Postcapitalism. Zed Books. 2017. 219.
[15] 펠릭스 가타리. 2004. 『분자혁명』. 윤수종 옮김. 푸른숲. 66.
[16] 신승철, 2019. 『모두의 혁명법』. 알렙. 407.
[17] 여기서 ‘특이하다’는 단순히 남다르다는 의미를 가진 일상 용어가 아니라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를 뜻하는 용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지배적인 질서로 완전히 포섭되거나 흡수되지 않는 활동을 가리킨다.
[18] 실비아 페데리치 · 조지 카펜치스. 2020. “자본주의에 맞선 그리고 넘어선 커먼즈.” 권범철 옮김. 『문화/과학』 101. 189.
[19] 같은 글. 188.
[20] 실비아 페데리치. 2013. “가사노동에 대항하는 임금.” 『혁명의 영점』. 갈무리.
[21] 도나 해러웨이. 2021.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최유미 옮김. 마농지.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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