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인은 왜 극우가 되었는가: 애국청년들의 서사에서 보는 극우화의 감정과 사회심리
2025. 2. 21. 11:36 - 인-무브개신교인은 왜 극우가 되었는가:
개신교 애국청년들의 서사에서 보는 극우화의 감정과 사회심리
김현준_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최근 사회 일부와 개신교의 극우화, 그리고 이른바 "애국청년(들)"의 정체에 대한 우려가 커졌습니다. 이러한 최근 정세와 관련하여 여전히 시의성이 있다고 판단한 글을 인무브에 공개합니다. 이 글은 김현준의 2018년 청어람아카데미 강연 원고입니다(제목 수정). 여기서 필자는 일부 개신교 우파 청년들의 이야기에서 반지성주의와 문화적 콤플렉스에 연동된 피해의식, 모욕감, 박탈감이라는 극우화의 사회심리적 동인을 읽어냅니다. 즉 반지성주의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사회적, 종교적 박탈감에 의한 분노의 감정이고 극우화는 이러한 부정적 감정들과 반지성주의, 문화지체 등이 결합된 현상입니다. 이러한 논의는 신자유주의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탈진실(post-truth)이 글로벌 현상이 되었고 미국적 반지성주의 현상인 반 PC주의(정치적 올바름)와 반 워키즘(workeism)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개신교를 위시한 극우세력 역시 우리 사회 상식과 가치규범에 대한 반지성주의적 분노를 키워왔습니다. 최근 탄핵반대 집회와 차별금지법 반대 등을 주도하는 손 모 목사는 개신교 대안학교 교육을 통해서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자고 합니다. 강남의 대형교회 이 모 목사도 사회주의적인 한국의 공교육을 고치자고 말합니다. 민주주의의 풀뿌리에서 극우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 경향이 더 짙어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극우화의 기작들을 분석하고 차단하기 위한 논의가 촘촘히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장면 1. (유투브 동영상) 우파정치관념 형성서사: 전라도의 딸이 어떻게 우파가 되었는가?
“(가난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좌파친구를 보니 “불평불만 많은 좌파.” 성공시대 다큐를 보면서 긍정적인 생각을 함. 진짜 세상은 어떤 것인가 너무 궁금해서 책을 덮고 양말장사 시작. 그 돈으로 대학 등록금과 주식투자. 직접적 계기는 세월호 사건과 박근혜 “사기파면”, 미중갈등,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을 계기로 한국 현대사 조사한 결과 대한민국 민주화는 민주화가 아니라, 분단 때부터 숨어든 빨치산과 간첩질 해서 된 결과가 지금 우리나라. 미중무역전쟁에서 이기는 편, 미국에 서야한다. 이 패권갈등이 실제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 현재 한국은 “종북주사파친중빨갱이정부” 때문에 망할 우려. “반북, 멸공 합시다!”
장면 2. 여기 평범한 지방대생, 눈치밥 먹던 취업준비생으로 자기 소개의 서두를 연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평범한 한 젊은이가 지방대를 나옵니다. 특별한 학과도 아니었기에 그 젊은이는 취업준비생이 되었고, 그 취업준비생은 어디를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 그런데 그 젊은이가 […] [북한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어] 삶을 바꾸게 됩니다. […] [북한의] 육신의 가난과 영혼의 가난 […] 북한의 어둠이 남한을 정복할 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19대 대선이었는데요. 그래서 움직여야 했습니다. 두려웠지만 북녘의 어둠이 남한을 덮지 못하도록 […] 행동하고 싶었습니다. […] [‘광주청년이 홍준표를 지지하는 세 가지 이유’ 상영] […] 지방대였던 학생이 [서울의 A] 대학교 석사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석사과정 한 학기의 비용이 450만원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 지방대 학생을 아무것도 모르는데 조교로 세워주셔서 […]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취업준비생이 중간의 모든 직급을 건너뛰고 바로 [소셜벤처] 대표가 되었죠. […] [소셜벤처 SNS에] 동성애에 대한 모든 것 […] 콘텐츠를 올리면 매주 일만명 이상은 보게 되었습니다. […]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작은 것을 했더니 비로소 자유케 되어진 청년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지방대에서 국내 10위권 대학으로, 취준생에서 소셜벤처 CEO로, 베스트셀러만 읽던 독자에서 칼럼니스트, 해외현장취재기자, 예비작가로” 성공을 한 이 “평범한 청년”은 자신과 같은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이 특별하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간증한다. 그는 북한에 대한 진실, 북한에 대한 두려움도 갖게 되었고, 애국의 가치를 깨달음으로써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반북반공의 가치는 자신의 현실적 처지를 넘어 보다 큰 사명에 헌신할 수 있게 해 주는 동력이 되었다. 북한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했더라면 자신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누리는 성공과 자유는 진리와 애국의 댓가인 셈이다. 그에게 있어 개신교 신앙은 두려움을 깨닫게 해주었으면서도 동시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 신앙은 공포나 불안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어떤 대상과 용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애국-반공주의와 반동성애와 같은 극우주의적 담론은 오늘날 어떤 청년들에게는 주어진 현실과 그 처지에서 오는 불안을 극복하는 동력으로서 유용한 자원이 되고 있다.
장면 3. 또 들어보자.
“젊은이가 ‘보수’라고 말하면 ‘개념 없다’라고 돌팔매질 당하는 좌파독재 세상에서 일베가 총대를 멨다. […] 청년 우파는 좌파가 비난하는 소위 “우파 수구”의 자식들이 아니다. 오히려 ‘젊은 보수=개념 없음’의 공식이 지배하는 우리사회에서 자유를 외치는 자유주의자들이다. ‘나는 여당에 찬성합니다’, ‘좌파는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그들의 강요에 당당하게 저항하는 진짜 진보인 것이다.”
‘평범한’ 청년이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입장을 특정 집단 내에서, 또는 공론장에서 표현했을 때, 그녀가 느끼는 감정과 사회적 압력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특히 자신의 보수적인 정치색이나 종교색이 자신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느껴지는 집단의 틈에 있다고 생각될 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이며, 또 그로부터 추동되는 행동은 무엇일까. 아니면 직접적으로 보수적인 생각을 드러내거나 정치적, 종교적 ‘커밍아웃’을 했을 경우에 청년들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
이 청년은 ‘보수’에 대한 사회적 비난을 의식했고, 또 실제 그러한 감정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돌팔매질”은 그/녀가 받았을 매우 큰 상처를 상징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사회적 압력을 그/녀는 “좌파독재”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좌파를 비판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좌파독재” 사회가 자신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개념없는” 청년이라는 인식에 저항하면서 할 말을 하는 “자유주의자”임을 선언한다.
장면 4. 아래 화자는 소위 좌파기독교인들로부터 비난이나 꾸지람을 받았고, 그 경험이 매우 불쾌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불쾌한 경험은 지성을 부정하고 대신에 “신이 부여한 것으로 여겨지는” “직관에 기초한 ‘지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한다(호프스태터). 이러한 직관의 선호는 반지성주의와 공명한다.
“뭘 딱 얘기하고 선포하려고 하면, 공부 많이 하신 분들이 그러시더라구요. 그것도 신학공부를. 확신하면 안된대요 […] 인본적으로 봤을 땐, 얼마나 겸손한 거예요 […] 진보, 보수 가치와 상관없어요. 주님은 주님이세요 […] 종북좌파 그리스도인 […] 대화가 안돼요. 왜 대화가 안돼냐. 기본적으로 이들이 터잡고 있는게 몇가지 있어요. 이단들이요. 악한 영이 붙잡고 있는건데. […] 악한 영이 붙잡을 수 있는 장소 제공을 죄나, […] 터를 내줘야지만 귀신이 딱 붙잡을 수 있잖아요. 마찬가지에요. 보통 이단들 […] 공통적으로 붙잡고 있는 터는 뭐냐면, 지식적 교만입니다. […] 또 다른 건 뭐냐면 불만이에요. […] 현 정부에 불만이 있던 세력에 귀신이 가서 붙잡은 거예요. […] 진리에 대한 사랑이 행동의 동기가 아니라, 기득권에 대한 증오, 권력에 대한 미움이 그들의 동기예요. […] 그걸 깨닫게 해줘야 해요. […] 성경말씀 이렇게 얘기하는데, [종북좌파 그리스도인이-필자 주] 꼭 하는 얘기가 있어. ‘공부 더 해와 임마’, ‘네가 몰라서 그래 임마, 공부를 하라고’ […] 지식적 교만이 이렇게 와요. 똑같은 성경 구절을 보고도 우리는 성령을 따라서 이렇게 해석하는데 그들은 혼미케 하는 영을 따라서 다르게 해석하죠. ‘나[종북좌파 그리스도인-필자 주]는 니가 모르는 이걸 알고 있어, 임마’ 이게 지식적 교만이 돼서 딱 붙잡고 있는 겁니다 […] 공부해서 알거면, 우리가 신천지도 아니고. 주님께서 은혜로 알려주시는 거지. [아멘!-청중] 공부하래 자꾸.”
1. 개신교 우익청년대중운동
위 사례들은 대부분 에스더기도운동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다. 우익청년들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조직체를 통해 그 역량을 증폭시키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서로 참조하고 네트워킹하며 연대하고 있다. 최근의 운동전략이 기존의 보수개신교의 사회참여나 정치적 행동주의와 차별성을 갖는 지점은 신앙훈련과 정치적 행동주의의 통합(교육), 신앙심과 행동적 급진성(적극성과 과격성)의 비례, 직관적 언어프레임의 제공, 미디어를 통한 우익 의제 및 허위정보 유통망 구축하는 것 등에 있다.
이 우익운동에서 소수자 혐오 담론은 감정을 통해 조직을 집결시키고 연대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생각이 엔진이라면, 감정은 가솔린이다”(김찬호). 동성애는 그 자체로 의미화되지 않고 맑스주의=공산주의=주체사상=종북 개념과 동일한 것으로, 동시에 애국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계열화되면서 우익 정치와 가치관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이른바 ‘종북 게이’와 같은 용어나 반퀴어문화축제에서 이들이 사용하는 자극적 표현들은 소위 ‘국민 정서’에 호소해서 혐오 감정을 대중적으로 부추기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공동의 적’을 만드는 혐오 담론을 통해 보수우익 개신교 내부 세력들 간의 차이를 넘어 연합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익정치에서의 효용과 기능은 이렇다: ‘샤이(shy)’ 보수 개신교인의 결집과 급진화(직접행동 강화), 혐오실천의 본보기(공론장에 혐오를 전시해도 된다는 긍정적 신호를 줌), 미디어 활용능력을 통해 허위정보(가짜뉴스)를 유포하고 프레임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여론을 구성하는 것 등이다.
일반적으로 보수 개신교나 복음주의 우파가 정치세력화를 꾀하는 이유는 주로 교회의 양적 성장 정체나 감소, 공신력의 추락, 사회적 위상 및 특권 감소라는 위기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교세 감소를 만회하고 사회적 위상의 복원과 더 나아가 그것의 확대를 추구하기 위한 생존 동기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혐오정치는 교회(그리고 사회)의 내부적 위기요인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일종의 ‘희생양 만들기’이면서 종교적 세계관이나 가치의 위기, 그리고 정체성 위협에 대한 ‘수세적 반격’이나 ‘문화적 방어’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자면, 보수우익 개신교의 정치적 행동은 사회 속에서 정체성 위협에 대응하는 인정투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종교적 신념은 인정투쟁의 자원이 된다.
2. 반지성주의와 문화적 콤플렉스
장면 4의 화자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지식(인)이 자신를 멸시한다는 감정이다. 반지성주의와 모욕감은 동전의 양면이다. 반지성주의는 처음부터 가질 수도 있지만 지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좌절함으로써 나타나기도 한다. (나름대로 노력한) 나의 무지에 대한 타인의 지적이나 비난은 모욕감을 주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복수심을 불태운다. 타인의 지식을 교만하거나 ‘힙’한 것으로 폄하하면서 반지성주의는 강화된다. 미국 반지성주의의 복음주의적(2차 대각성) 기원에 대해 기술한 역사학자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에 따르면, “‘반지성적’이라고 일컫는 태도나 사고에 공통되는 감정은 정신적 삶과 그것을 대표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심이며, 또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언제나 얕보려는 경향이다.” 오늘날 지배적인 반지성주의는 처음부터 지성을 배제하는 태도라기보다는 역설적이게도 지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1) 지성의 추구 (2)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수치심 (3) 남이 (나보다) 아는 것에 대한 질투 (4) 지적 삶에 대한 폄하, 지적 삶이 가져오는 행복과 쾌락에 대한 평가절하 (5) 결과적으로 타인의 지적 삶의 쾌락을 부정하거나 빼앗아서 관철시키고자 하는 하향평준화적 평등주의.
우익청년들에게서는 소위 ‘힙하고 세련된’ 좌파/지성에 대한 콤플렉스도 찾아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소위 “힙스터 좌파”란 “노동자를 사랑할 것, 동성애를 지지할 것, 비정규직을 옹호할 것, 정부를 비난할 것 등등. 몇 가지 정치 공식만을 ‘세련된 것’, ‘우월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들을 마이러니티리그의 의식있는 비주류로 포장”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생각은 청년들만의 것은 아니다. <조갑제닷컴>의 한 기고문에 따르면, “정치목사 및 신부는 […] 젊은 사람들에게 국가권력에 순종하는 것은 ‘수구꼴통’이요, 도전하는 것은 ‘쿨’(cool)한 것으로 가르쳐 왔고, 현재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에게 동조해온 비극적 상황이 벌어져 왔다”는 것이다. 최근 청년우익들을 “댄디우파”라고 명명한 것은 바로 개신교나 우파의 문화지체적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3. ‘좌파독재’와 모욕감
이 청년들이 생각하는 종북좌파(기독교인)란 어떤 사람일까. 영적 지식을 깨닫지 못하는 종북좌파 기독교인들은 지적으로 교만하고, “진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혼미케 하는 영을 따라” 불평불만, 증오, 미움이 많으며, 지식과 교만함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고 탄압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종북좌파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사랑, 인권, 평화 같은 가치는 엘리트의 지식적 교만에 불과한 것이다. 이 화자는 심지어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도 박해를 받게 된다고 생각한다.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보수꼴통”, “대화 안 통하는 인간”, “사랑없는 자”로 취급 받아, “박해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 청년들은 모종의 피해의식을 갖고 있고, 자신들이 받는 대우가 부당하다고 느낀다. 이런 감정에는 분노가 함께 하고 있다. 이것이 모욕감 또는 모멸감이다. 다시 말해 모욕감이란 “상대방이 나를 대하는 방식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화가 나는 감정”이다(김찬호). 모욕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자아상(또는 정체성에 대한)의 공격이며 ‘사회적 거부’의 증거이기 때문이다(윌리엄 어빈). 단지 개인적 모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거부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고립감과 소외감을 거쳐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공모하고 있다는 일종의 음모론적 상상으로 이어지기 쉽다. 바로 “좌파독재”는 고립되었다는 이들의 상황판단을 정당화하는 말인 동시에 시민사회적 상식에 대해 저항하고 싶지만 그러기 어려운 자신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표현이다. 게다가 개신교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용어를 갖고 있다. 바로 “핍박”, “박해”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핍박이나 박해는 당대 기독교의 ‘소수자성’, 즉 ‘약자’의 위치와 결부되어 있었다. 극우 청년들은 자신들이 박해받는 소수라고 여기는 반면, 좌파-동성애자들은 권력을 가진 다수자라고 생각한다.
기성 우파(올드라이트와 뉴라이트)가 비교적 반공교육과 유사기억에 의한 반공주의-종북좌파 증오를 체화했다면, 최근의 청년우익들은 어떤 사회적 억압의 경험으로부터 ‘좌파’, ‘소수자’와 같은 증오의 범주를 소환한다. 한국 공교육의 특성상, 청년들은 대개 청소년기까지는 정치적 이념에 대한 무관심(으로서 자연화된 보수 이데올로기 체화)을 유지하다가, 성인이 되고 사회로 나오면서 갑자기 생소한 이데올로기적 선택의 장에 던져지게 된다. 사회적 경험(구조의 힘)을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틀을 갖추지 못한 채(보수적 이념을 자연화한 채), 체감되는 사회적 힘들은 개인적 고통들을 더욱 심화시키게 된다(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언어화할 수 없는 고통은 더욱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사회적 관계와 제도들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모욕감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그들의 의문은 정당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어떠한 형태로든 제시되어야만 한다. 이 때 종북좌파, 적그리스도, 동성애, 무슬림 등등은 자기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고 그 책임을 전가시키기에 더 없이 좋은 익명적 타자들이다. 자신들을 모욕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익명적 타자)에게 부여한 이름이 바로 ‘좌파’이다.
모욕감은 기본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좌절되는 데에서 온다. 문제는 이 인정욕이 분노를 품는 데에 있다. 청년들은 인정에 목말라 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소위 “극우”라고 지칭하는 청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대다수의 청년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 사회적 인정을 받기 어려운 상황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 이른바 ‘을’들. 모욕감은 기본적으로 ‘을’의 감정이지만, ‘갑’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을’의 지위로 떨어졌다고 느낄 때에도 체험되는 감정이다. 극우 청년들은 왕, 통치자, 절대주권자, 주님,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기독교 신앙에서 ‘갑’의 자존감을 찾는다. 전쟁조차 진정한 ‘갑’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길 수 있다. 북진통일은 가능하다. 갑의 감정과 을의 감정 간의 파고는 욕망과 현실의 괴리에 다름 아니다. 이 긴장과 괴리는 불안정한 자존감과 자아상을 만들지만, 보수우익 개신교인들이 믿는 하나님, 신적 질서, 신정국가의 비전은 청년들에게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유용한 자원이다. 모욕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자들을 응징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에 있다. 이 땅과 북한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세상이, 반기독교세력이 자신들을 조롱하고 모욕한다고 생각한다. 개신교나 이들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면 할수록 극우 개신교인들의 믿음과 행동은 더 강해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의 정서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정서를 공감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사회의 구조와 개신교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비판은 거기서부터 작동될 수 있다.
이 청년들이 느끼는 억울함과 박탈감에 대한 기반한 모멸감은 납득되는 측면이 있다. 대개 그저 평범하게 보수적인 신앙생활을 해왔고 보수적인 교회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보수적 정서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신들의 생각이나 의견이 부정당하고,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억울하지 않았을까. 자신들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배우기를 힘쓰지 않는 사회에서 어느날 갑자기 정치적/시민적 주체가 되라는 요구는 너무 가혹한 것인지 모른다. 사회적/공적 가치의 사회화가 상대적으로 부재한 한국사회에서 그 공백은 무엇으로든 반드시 메워지기는 해야 한다. 종교는 언제나 그 틈을 메울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진보적인 것이든 보수적인 것이든 말이다. 우익 청년들은 사회적 현실의 고통과 감정의 긴장 속에서 다만 개신교 안에 깊게 착근되어 있는 보수적 신념과 언어를 재활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개신교 우익단체들은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과 성과주의 시스템에 의해 시달리는 청년대중의 사회경제적 불안과 그들의 피해의식을 ‘이용’하여 우익 헤게모니를 조립해내고 있는 것이다(단지, 일방적인 ‘이용’이라기보다는 우익청년들은 우익공동체 속에서 일종의 구원을 얻는다).
4. 보수개신교의 내셔널리즘과 극우주의 혐오서사, 그리고 담론 접합
역사적으로 보면, 보수우익 개신교의 정치적 행위와 메시지는 부정선거로 말미암아 좌절된 이승만의 ‘기독교 국가 건설’의 꿈 또는 ‘개신교 독주체제’를 복원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전략적인 선택의 산물이다. 교세 위축과 남한사회가 친북반미사상을 지닌 이들에 의해 점령당해 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은 이러한 극우적 혐오 메시지를 정당화하는 근거이자 이유였다. 그리고 여기에 ‘(좌파이론에 물든) 소수자’는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통일국가 건설과 '북한해방'을 훼방하는 존재로서 그려지며, 국가적, 사회적, 종교적 위기를 심화시키는 원인 제공자로서 등장한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우익 이념의 중심에는 ‘독실한 크리스천’ 이승만이 있다. 이승만은 오늘날 보수 우익 정치 세력 전체를 아우를 뿐만 아니라, 에스더기도운동 네트워크 세력을 비롯한 이른바 ‘극우’ 세력이 재발견한 우익 이데올로기와 국가론적 비전의 비조(鼻祖)이다. 극우 개신교인들은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북진통일로 규정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기독교적으로 세운 인물로 추앙한다. 한국이 미국처럼 애초에 기독교 국가로 세워졌다는 이들의 믿음은 한민족도 ‘이스라엘’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는 것이다. ‘애국기독교’ 집회에 선민의 상징 이스라엘 국기가 나부끼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동일시된다. 보수우익 개신교인들은 기도로 시작된 제헌국회와 이승만 정권기의 향수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승만의 국가 비전을 이어받고, 그가 꿈꾸었던 나라를 오늘날에도 실현하고자 한다. 에스더기도운동은 이승만(기독교입국론)을 재발견, 재강조함으로써 우익정치운동을 신앙적으로 가치있는 정치 행위로 의미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일반 신자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행동주의로 바꾸어낸다.
정치(국가주의)와 종교(신성성)이 만나는 방식을 이론화하는 정치종교(political religion)의 관점에서 한국 개신교 우파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교권중심(한기총), 정당운동과 시민운동(기독교 뉴라이트), 극우적 대중 프로파간다(에스더기도운동), 이렇게 대략 서너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이념형적 모델은 분화/발전했으면서도 앞선 시기의 지배적 전략과 유형을 토대로 진화하면서 현재까지 공존하고 있는 이념형적 행위양식들이다.
시기 | 지배적 정치종교 전략 | 주요 세력/행위자/단체 | 신학 | 교회와 정치사회, 종교성과 정치적 행동주의의 관계 |
70-80년대 | 표면적 정교분리(야합) | 한기총/선교단체(CCC) | 근본주의 | 양자의 분리, 국가조찬기도회 |
90년대 |
교권중심세력 | 한기총/기독당 | 근본주의 | 광장(동원)정치, 이익집단화 |
2000년대(2005) | 시민사회조직 | 기독교뉴라이트/기독당 | 복음주의 사회참여신학 | 세속화된 정치종교운동 |
2010년대(2007) | 극우대중정치운동/네트워크 | 에스더기도운동 | 신비주의, 원시주의 | 양자의 통합, 대중교육, 미디어 전략, 여론전, 선동 |
2020년대 | 국가 전복의 극우정치 | 전광훈 | ? | 지역 풀뿌리, 유튜브 |
(2020년대를 추가함)
보수우익 개신교는 70~80년대 ‘국가조찬기도회 정치’를 시작으로, 90년대 한기총의 ‘광장정치’와 기독당을 거쳐, 2000년대 역시 기독당과 기독교 뉴라이트라는 ‘전문적 사회운동조직’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2010년전후 에스더기도운동이라는 혐오와 차별 기반의 전방위적 세력으로 그 전략적 형태를 바꾸며 발전해왔다. 그 과정에서 극우 논리는 상대적으로 보다 치밀해졌고, 개교회와 하위 집단 내의 극우 이데올로기는 강화되어왔다. 기본적으로 개신교 보수주의는 반공주의와 근본주의를 그 핵심으로 하는데, 최근의 극우적 보수주의는 반공주의에 동성애혐오, 여성혐오(반여성주의), 이슬람/이주민혐오(인종주의)를 추가하며, 혐오와 차별 주장을 국가적 이익, 즉 ‘공공성’ 담론으로 포장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러한 배타주의와 내셔널리즘은 극우 이데올로기의 주요 특성이다. 극우 이데올로기는 자기 집단의 속성을 기준으로 정상/비정상, 국민/비국민을 구분하고 후자를 배제함으로써 자기 집단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구성하는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개신교 신앙도 기본적으로 항상 신자/불신자, 천당/지옥, 선민/이방인이라는 차별 구도 속에서 작동한다. 반공주의 역시 이러한 구도를 공유한다. 반공이념은 “같은 동포라 할지라도 공산주의자는 같은 민족으로 여기지 않”으며, 공존을 거부한다(정성한). 때문에 “‘종북 게이’라는 신조어는 얼마든지 다른 얼굴고 대체되어 좀비처럼 질기게 살아남아 사회 주변부의 다른 그룹들을 덥칠 수도 있다는 것,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조민아, 2017). 이것은 극우 개신교인들이 갖는 오염의 공포, 즉 소수자에 대한 혐오감을 설명해 줄 수 있다.
극우 개신교인에게 국가주의 또는 내셔널리즘이라고 하는 국가론적 비전은 기독교적 가치와 너무나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정치적으로 극우주의는 정치적 행위자로서 국가 중심의 성격을 지녔고, 개인의 윤리나 성적 정체성 등을 공통체적 규범에 종속시키며, 사회적 동일성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성향은 반-이민자 정책, 반-다문화주의, 제노포비아와 같은 배타주의와 이어진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한’ 공동체의 이익에 관심을 갖는다. 극우주의는 가치 다원적 사회의 가치갈등이 극대화되는 와중에 종교 근본주의로도 나타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세속적 극우주의와 종교적 극우주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극우주의의 핵심은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펼치는 혐오 담론이다. 혐오는 국가주의적 맥락에서 타자를 배제하는 감정이고, 이주민이나 비시민에 대한 구체적인 혐오의 정치는 국가주의를 확장/이용하는 보수주의 정권의 전략이다. 그러므로 혐오는 개인이 체험할 수 있는 극우의 집단적 감정이자 동시에 정치적 (의식적, 무의식적) 배제의 전략이다.
가령 인종주의는 극우주의의 대표적인 현상이다. 동성애 혐오도 인종 혐오와 동일한 심리적 기제로 간주할 수 있다. 특히 개신교는 자신의 정체성을 민족적, 인종적으로 인식하기 쉽다는 점에서 타인종으로 간주되는 비기독교나 성소수자에 대한 상징적 배제 - 혐오의 정치 - 가 작동하기 쉽다. “혐오란 냉전 시대의 반공주의가 선보였던 것과 같은 강력하고 절대적인 적대가 제거된 시대에 어떤 집단적 정체성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등장하게 되는 타자화인 셈이다. 즉, 성적 소수자성이란 그 자체로 이성애 남성 한민족이라는 낡은, 그리고 환상에 불과한 정체성에 균열을 내겠다고 위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성소수자의 시민권을 의제로 내건 운동들은 그에 적극적으로 균열을 내기 때문에, 혐오 대상이 된다”(손희정 2015).
이렇듯 국가주의-민족주의-소수자혐오-반공주의 등은 쉽게 결합한다. “국가주의를 팽창시키고 있는 보수정권 아래에서 혐오의 정치는 성장하기 좋”은 것이다(명숙). 이를 증명하는 듯이, 최근에 동성애 혐오는 보수정치세력 입장에서는 반공주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통한 보수정권 유지(또는 재창출)와 시민사회 헤게모니를 강화를 위한, 개신교 입장에서는 영향력 확장을 위한 전략적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종교사회학자 강인철(2016)은 박노자와의 대담에서 “한국 개신교는 시민사회의 대로와 골목마다 단단한 진지를 구축해놓고 퇴행적 가치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그럼으로써 보수 기득권구조의 영속화에 기여하는 강고한 보수 풀뿌리조직으로서 계속 역할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사회학자 엄한진(2004)은 2003년 ‘친미반북집회’를 분석하면서 이미 극우 일반의 특징으로서 희생양 만들기, 이론의 빈곤, 군국주의, 미디어의 중요성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면서 당시 “한국의 급진적인 우파는 소수집단의 배척을 체계적으로 주장한다든기 비중있는 대안 정치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고, 개신교 보수의 정치화에서 “종교적 파시즘”을 말하기는 어려운 “초보적 단계”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여년 뒤, 우리는 소수자에게 차별과 혐오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개신교 세력을 목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극우개신교이다.
한국 보수 개신교의 정치세력화와 사회참여 양상이 1970년대 미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기 위한 대중정치참여 운동인 기독교신우파(the Christian New Right)나 제리 폴웰(Jerry Falwell)의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의 기독교연합(Christian Coalition) 등이 등장했던 맥락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낙태, 동성결혼, 공립학교에서 진화론 교육 등 1960년대 세속주의와 인권운동의 문화충격 때문에 생겨난 위기의식으로 미국 복음주의가 우파정치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문화전쟁’(Culture War) 프레임은 객관적 위기에 문화적, 상징적, 감정적 해석을 부여함으로써 종교 우익의 행동주의를 견인한다. 즉 교세 감소나 사회적 신뢰도 감소 지표의 객관적 인식만으로 우익대중의 행동주의가 추동되는 것은 아니다. 위기(지표)를 대중의 ‘사회적 상상’이나 박탈감, 혐오와 같은 정서로 변형시키고 내재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의 매개, 해석, 증폭의 기능과 행동주의의 동력이 드러나는데, 반동성애 담론과 종북담론(반공주의)은 교세 위기와 국가적 위기, 사회적 위기와 종교문화적 가치의 위기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으로서 부각된다. 이 담론들은 단지 관념적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혐오와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실천감각의 양태로 신자들의 일상에 착근된다. 결과적으로 한국 보수 개신교는 교세 감소가 사회의 좌경화와 포스트모더니즘 - 세속화, 다원주의, 상대주의, 해체주의, 페미니즘, 퀴어이론 등 - 이라는 반기독교적 조류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동성애 문화’와 ‘성정치 이데올로기’는 교회와 사회를 ‘세속화’(탈기독교화)하고 ‘성해방’, ‘성혁명’을 해서 세계를 전복시키려는 ‘네오-맑시스트’의 문화혁명전략이고, ‘성소수자’라는 용어는 ‘네오 맑시즘’에 맞게 변형된 용어라고 보고 있다. 또 인권, 나눔, 포용, 배려, 사랑, 평등, 정의, 차별금지법, 페미니즘, 젠더/퀴어 이론 모두 한국사회를 전복하고 적화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기만전술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교세 감소와 ‘세속화’는 교회의 공적 의의를 폄하시키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개신교 우익들은 이러한 주장을 단지 종교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사회적,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시킴으로써 한국사회 일반에 우익 논리를 제공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나눔’이란 예를 들어서 불법체류자도, 난민도 내국인들과 똑같이 복지 혜택을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은 세금을 내고 의무를 다하고 그에 상응하는 복지를 받는 것이지만 불법체류자, 난민은 그 어떤 의무나 책임은 다하지 않는데도 똑같은 복지를 받아야 하고, 만약 이 혜택을 쟁취하지 못하면 인권변호사에게 달려가라고 가르칩니다. 결국 서구 사회가 난민을 ‘나눔’, ‘인권’이라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국고가 탕진되고, 난민들이 폭동으로 치안질서가 파괴되는 위치게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막시즘은 근본적으로 국가소멸론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자본주의의 국가가 망하는 것을 전세계가 하나가 되는 공산주의가 완성되는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이렇게 동성애와 좌파의 존재는 국가와 인류 문명 전체의 위협으로 재현된다.
5. 맺으며
모욕감을 탐구하는 철학자 윌리엄 어빈은 자존감이 낮아도 모욕감을 쉽게 느끼지고 또 타인에게 쉽게 모욕을 주지만, 사회적이고 객관적인 자아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지나치게 높은 자존감을 가져도 모욕을 주게 된다고 경고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모욕에 쉽게 상처받으면서 그 자신이 남을 모욕하는 일도 많다. 남을 경멸하는 것은 거부 당할 것을 예상해 자존감의 훼손을 막으려는 사전 조치, 방어 기제이다. 어빈은 모욕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존감만 높아서는 안되고 안정적인 자아상, 즉 사회적 피드백과 성찰을 반영한 사회적이고 객관적인 자기정체성의 구성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안정적인 자아상은 자라면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의미있는 피드백을 받음으로써 형성된다. 그런데 자존감은 높지만 건강한 자아상을 갖지 못했을때, 자신들의 무지에는 만족하면서도 자아도취에 빠져 타인을 모욕하기 좋아하게 된다.
이러한 청소년 세대를 관찰한 어빈 식으로 보자면, 개신교인들도 자존감은 높지만 자신들의 신앙을 제대로 피드백 받지 못해 자신들의 실제 모습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모욕감을 타자에 대한 분노로 드러내면서 그것을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개신교의 보수적 신앙습속은 자존감만을 높이고 사회적 피드백은 잘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개신교인들은 개신교 신앙의 훈련체계 내에서 대체로 개신교 신앙의 강점만 배우지, 이것의 약점은 거의 다루어지지지 않고, 따라서 인식되지도 않는다. 개신교 신앙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고 믿어진다(단지 잘못 실천한 탓일뿐?).
개신교 신앙의 훼손이 두려워서 개신교 신앙의 강점과 자부심만 내세운 결과, 개신교인들은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개신교인으로서 자아상(정체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성찰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핵심은 사회적 피드백의 수용과 이를 통한 자기객관화이다. 이러한 아동-청소년 교육학적 방법은 후기세속사회의 종교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사회가, 이웃이, 비종교인들이 제시하는 도전 과제에 연이어 실패하고 있다. 그 도전 과제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혐오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인권을 증진시킬 수 있는가, 사랑의 실천을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가, 차별금지를 제도화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개신교는 이 한국사회에서 정말 가치있는 의미와 감정의 제공자가 될 수 있는가.
주
1) 미국 개신교 우파의 정치세력화에 대해서는 정태식, 「기독교 재구성주의의 미국 국가주의의 형성과 복음주의 정치화와의 관계에 대한 종교사회학적 일고찰」, 『신학사상』 174권, 2016, 113-152. 정태식, 『거룩한 제국: 아메리카, 종교, 국가주의』, 페이퍼로드, 2015. 이진구, 「미국의 문화전쟁과 ‘기독교미국’의 신화」, 『종교문화비평』, 26권, 2014, 79-115. 배덕만, 『미국 기독교 우파의 정치운동』, 넷북스, 2007을 참조하라.
2) James Davison Hunter, Culture Wars: The Struggle to Define America(New York: Basic Books), 1991. 한국 개신교 우파 이념의 미국적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류대영, 「한국 기독교 뉴라이트의 이념과 세계관」, 『종교문화비평』, 15권, 2009, 43-71.
'In Moving Zon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문사회 학술생태계의 파국과 미래 (0) | 2024.11.05 |
---|---|
올루페미 타이워 <방 안에 있다는 특권: 엘리트 포획과 인식적 존중> (0) | 2024.06.14 |
워크-인종자본주의가 새로운(그리고 새롭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 "워크워싱"과 대표/재현의 한계 (0) | 2024.05.29 |
카렌 버라드, 양자역학, 그리고 상호배타성의 역설 (2) (0) | 2024.05.28 |
카렌 버라드, 양자역학, 그리고 상호배타성의 역설 (1) (1) | 2024.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