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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Writing/인-무브 서평

순간에서 지속으로, 자연에 대한 혁신적인 이해 - 『자연의 개념』 서평

by 인-무브 2025. 9. 14.

순간에서 지속으로, 자연에 대한 혁신적인 이해
- 공간도 시간도 <관계>와 <과정>의 사건 존재론으로

 

미선 정강길

 

 

“『자연의 개념』 이 작품은 자연 철학에 관한 가장 심오한 저작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 앙리 베르그송

  

“우리는 점들이 아닌 지속들 속에 살고 있다.” - A. N. 화이트헤드

 

 

화이트헤드의 중기 시절 대표작 중 하나인 『자연의 개념』(The Concept of Nature, 1920)은 1919년 11월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행한 타너 강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전 저작인 『자연 인식의 원리에 관한 탐구』(1919)와는 한 짝을 이루는 서로 보완적인 책이다. 당시 이 책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철학자는 흥미롭게도 화이트헤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었다. 베르그송은 1922년에 썼던 『지속과 동시성』에서 화이트헤드의 『자연의 개념』에 대해 언급하길, "자연 철학에 관한 가장 심오한 저작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고 평가한 바가 있었다.[1]

 

그렇다면 당시의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가 서로 일치하며 공명했던 그 지점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은 과정process”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은 “자연의 추이passage”로도 명명될 수 있다고 봤던 바로 그 부분에 있다. 단지 양자 간의 차이는 ‘시간’이라는 단어 사용 정도만 달리할 뿐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이 학설이 베르그송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봤었다(85쪽). 그러자 이후의 베르그송 역시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개념』에서 주장한 “자연의 전진(advance of Nature)”이 자신의 관점과도 연결된다면서 “최근의 한 훌륭한 책”이라며 긍정적 평가로 화답했었다.[2] 중기 시절의 화이트헤드가 볼 때, 근본적인 사실들은 자연이라는 과정 또는 사건들의 추이, 그 전개, 창조적 전진이었던 것이다.

 

우선 이 책에서 표명된 ‘자연’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화이트헤드가 말한 자연이란,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에서 관찰하는 것으로, 우리의 감각지각(sense-perception) 속에 사고(thought)는 아니지만 사고로부터 자립적인 어떤 것에 대한 알아차림을 한다는 것이다(14쪽). 그는 이러한 점을 감각-알아차림(sense-awareness)이라고 했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보는 자연이 인간의 사고와도 독립적일 수 있는 자립성을 갖는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자립성은 마음[정신, mind]으로부터도 닫혀있는 상호 관계들의 계(system)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가 보는 자연은 인간 경험의 총체성마저 훌쩍 넘어선 그 이상의 실재(reality)인 것이다.

 

오늘날 사변적 실재론 그룹에 속하는 큉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에 따르면 존재는 필연적으로 사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1세기 초에 등장했던 사변적 실재론 학파들은 인간 경험과 독립적인 객관적 실재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면서 칸트 이후의 칸트 철학에 영향을 받은 인식론 중심의 사조들에 대해 <상관주의>correlationism에 갇혀 있다며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이미 한 세기 전에 자연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탐구 작업은 일찌감치 이들의 <상관주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노선을 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이후의 화이트헤드의 행보를 보더라도 그의 대표작 『과정과 실재』에서도 표명한 것처럼, 후기 철학의 작업 방향이 왜 <칸트 이후>가 아닌 <칸트 이전>으로 다시 회귀한다고 말한 것인지 그리고 그가 내세운 유기체 철학의 도식이 왜 칸트 도식의 역전인지도 미리 짐작케 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자연에 대해 ‘동질적으로(homogeneously)’ 사고할 수도 있지만 자연에 대해 ‘이질적으로도(heterogeneously)’ 사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감각지각 속에 개시되는 자연의 이원적인 두 양상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일몰을 바라볼 때, 자연의 활동성은 빛이라는 전자기파와도 관련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mind)에 정서적으로도 부가되고 있는 일몰의 따스한 붉은색 역시 자연 속에 포함된다. 이 점에서 우리 앞에는 피하기 힘든 <자연의 이분화>bifurcation of nature라는 문제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자연과학의 탐구 대상인 객체들은 주로 전자에 맞춰져 있는 반면에 후자는 우리의 가변적인 주관적 투영으로 여겨져서 과학의 탐구 대상에선 종종 배제된다. 이른바 물질적인 자연과 비물질적인 마음[정신]이라는 두 실재계로 갈라치기가 된 사태가 우리 안에 자연 탐구의 프레임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라는 전자기파도 자연의 일몰에 속하지만, 붉음과 따뜻함이라는 우리의 주관적 느낌도 엄연히 자연에 포함되고 있는 명백한 신체적 사실에 해당한다. 이 두 영역의 이분화를 놓고선 <인과적(causal) 자연>과 <외견상의(apparent) 자연>, 또는 <알아차림의 원인으로서의 자연>과 <알아차림을 통해 파악된 자연>, 또는 <추측(conjecture)으로서의 자연>과 <꿈(dream)으로서의 자연> 이렇게도 나누어보는데,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 두 자연의 접점을 마음(mind)이라고 했었다(52쪽). 그렇지만 화이트헤드의 기본 작업 방향은 바로 이 <자연의 이분화에 대한 항거>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존 로크는 물질의 일차 성질과 이차 성질이라는 분류로 대처한 바가 있었지만, 정작 화이트헤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간 것인가? 물론 그 핵심 키워드는 다름 아닌 <관계>와 <과정>이다.

 

이 문제를 풀어내는 발단의 시초는 화이트헤드가 버트란트 러셀과 함께 공동 작업을 했던 수학의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가 1906년에 쓴 “물질 세계의 수학적 개념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라이프니츠의 공간 상대성 이론을 끌어들여 적어도 공간의 점들(points)이 고려되어선 안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3] 알다시피 공간을 다루는 기하학에서 그 기초는 점이었다. 부분을 갖지 않는 <점>에 대한 정의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적 기초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공간 이론은 절대 시공간 개념을 상정했던 뉴턴과 달리 물질 간의 상대적 위치 관계의 총합으로 표현된 거여서, 화이트헤드는 이를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었던 것이다. 즉 화이트헤드는 뉴턴이 아닌 라이프니츠의 통찰로부터 공간 자체도 물질 요소들 간의 관계들로 표현될 수 있고 또 그 점에서 고전 과학에서 요구되는 공간의 점 역시 불필요할 수 있음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화이트헤드의 그 난해한 논문은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진 못했었다. 그럼에도 이후의 화이트헤드는 계속해서 <공간의 관계 이론>에 천착하다가 급기야 <시간의 관계 이론>마저 생각해 내기에 이른다.

 

화이트헤드의 전기를 썼던 빅터 로우(Victor Lowe)의 증언에 따르면, 화이트헤드가 시간의 <순간>에 대한 개념을 언제 바꾼 것인지는 1911년 9월 3일 러셀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면서 그 내용에는 시간도 공간과 같은 관계론적 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는 점, 그럼으로써 시간에서의 <순간>instant이라는 개념이 폐기된다는 점을 소개해 주고 있다.[4] 사실 라이프니츠도 공간에 대해선 관계론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지만 시간 개념이나 역학에 대해선 온전히 언급된 바가 없었기에, 화이트헤드는 시간에 대해서도 공간과 마찬가지로 관계론적 접근으로 시도해 볼 수 있음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로써 이후의 화이트헤드의 작업은 시간에 있어선 <순간>이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대신에 <지속>duration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지속은 순간과 달리 존재의 단절이 없는 자연의 <추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은 시간의 두께를 갖고 있으며 선행자와 후행자가 있다. 따라서 지속 개념은 화이트헤드가 표방한 “자연은 <과정>”이라는 전망에서 볼 때도 매우 적합한 개념으로 채택된 것이다. 다만 지속에 대한 언급은 이미 『자연의 개념』보다 앞서 나온 『자연 인식의 원리에 관한 탐구』에서 먼저 다루어졌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존재의 연속성은 존재의 단절이 없는 <지속>을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도 지속인 것이며 이 순간들(instants)은 단지 사고의 필요성 때문에 도입된 것으로, 사실상 절대 시간은 절대 공간처럼 형이상학적인 괴물과 다름없다고 봤던 것이다.[5]

 

『자연의 개념』에서 이 지속은 <동시성>simultaneity에 의해 제한된 자연의 일정한 전체를 의미하며, 달리 표현하기를 자연의 <구체적 판>concrete slab이라고도 했었다(84쪽). 또한 이 지속은 감각-알아차림에 의해 우리의 인식에까지 직접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반면에 감각-알아차림에 의해 상정된 <한 순간에서의 자연>nature at an instant이란 건 없다는 것이다(89-90쪽). 이런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시간 이론은 순간을 폐기하고 <지속>으로 대체했다고 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지속으로부터 <찰나>moment[6] 개념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이 찰나는 지속과 달리 시간적 연장을 갖지 않는다. 이 책에선 찰나를 ‘한 순간에서의 모든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89쪽). 그러나 공간에 있어 크기는 없고 위치만 갖는 점이란 일종의 추상물이며 그러한 점들의 집적 역시 논리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또한 시간에 있어서도 지속이 없는 순간이라는 개념 역시 추상물이다. 결국 시공 연속체라는 자연의 연속성을 설명하려면 경험의 직접적 사실에 근거된 <연장 추상화의 방법>method of extensive abstraction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중기 시절의 화이트헤드가 경험의 일반적 사실로서 채택한 것은 <사건>event이라는 개념인데 이것은 『자연의 개념』 에서 <시간의 한 주기 동안의 장소>로 정의된다(82쪽). 그러다가 후기 형이상학에 이르러서야 이 <사건> 개념은 <현실 존재>actual entity 또는 <현실 계기>actual occasion라는 원자론적 개념으로 보다 정밀하게 정식화되었고, 이를 통해 연장의 이론 역시 『과정과 실재』제4부에서 다시 다루게 된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방법적 접근은 과학과 근대 세계󰡕(1925)에서 “시간과 공간의 상태에 대한 분석(analysis of the status of space and of time)”에서 출발된 것임을 그 스스로 밝힌 바가 있다(SMW 65). 화이트헤드는 애초 <순수 수학>이 아닌 <응용 수학자>로서 출발했었고 그는 실제적인 경험과 연결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를 뿌리 깊게 추적해왔던 학자였었다. 중기 시절에 출간한 『자연의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추적 과정의 중간 단계의 결실인 셈이다.

 

또한 이 시기의 화이트헤드는 당대의 아인슈타인과 또 다르게 시공간 및 중력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모색했었고 이것은 󰡔상대성 원리󰡕(1922)로 선보이게 된다.[7] 사실『자연의 개념』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근본적인 물리 관념인 임페투스[impetus, 원동력] 개념도 이후의 『상대성 원리』에서는 보다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이미 『자연의 개념』에서도 밝혔었지만 아인슈타인과 서로 갈라지는 지점은 주로 그의 불균등한 공간 이론이나 빛 신호의 고유한 기본 특성에 대해 가정하는 것을 화이트헤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7쪽). 또한 『자연의 개념』에서 <순간성>과 구별하며 중요하게 다뤘던 <동시성>simultaneity 개념도 정작 아인슈타인의 입장에서는 작동상 적용될 수 없다는 봤었기에 화이트헤드는 나중에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이라는 용어로 대체한 점도 있다.[8] 그럼에도 상대성 원리에 대한 화이트헤드와 아인슈타인과의 입장 차이 문제는 지금도 계속해서 논의되는 중에 있다. 특별히 화이트헤드와 아인슈타인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했던 연구자로도 알려진 로널드 데스멧(R. Desmet)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해석에서 고전 물리학의 이분화(bifurcation)가 재확인되고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이분화에 맞서 일반 상식의 전제와 일치하는 것으로 대체했었는데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시공간 기하학이 중력 물리학과는 독립적이면서 균일하게 적용된 것임을 지적했었다.[9]

 

사실 중기 시절의 화이트헤드는 1918년 일어난 아들 에릭의 전사(戰死)로 상당한 비극적 슬픔을 겪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걸로 짐작된다. 전작인 『자연 인식의 원리』(1919)는 아들 에릭을 추모하는 헌사로 시작되어 있다. 그럼에도 화이트헤드는 물질, 공간, 시간에 대한 탐구 및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멈추지 않았었고 더 큰 생산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하는 여정으로 계속해서 전진해가고 있었다. 2015년에 영어권에서도 재발행된 『자연의 개념』의 서문을 썼던 마이클 햄페(Michael Hampe)의 소개에 따르면, 화이트헤드의 이 책은 칸트 이후와 헤겔 이후 새로운 실재론의 정신 속에서 그리고 뉴턴 이후의 과학적 배경에 반하는 새로운 자연의 개념을 공식화하기 위한 시도로 평가했다(CN ⅶ). 이 『자연의 개념』은 자연이 근본적으로 <과정>이라는 사실과 함께 사건들의 상호 관계야말로 시간과 공간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봤던 화이트헤드의 혁신적인 자연 이해를 드러낸 소중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번역상의 약간의 사소한 점을 언급하자면, 화이트헤드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연 인식의 원리』 제목처럼 knowledge는 주로 ‘인식’으로 번역되곤 했지만 이 책에선 주로 ‘지식’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반해, intellectual knowledge는 ‘지적 인식’으로 그리고 주로 ‘인지’로 번역되는 recognition는 ‘인식’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미세한 혼동 느낌으로 다르게 다가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점은 매우 사소한 것이라 번역상의 중대한 수고를 생각할 때 전혀 흠이 된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오히려 열악한 국내 환경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수고가 더욱 고마울 따름이다.

 

게다가 화이트헤드의 중기 저작들은 수학과 과학 이론에 대한 전문성을 요구하는 점이 있다. 예컨대 이 시기의 저작들에 나오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텐서(tensor) 개념은 전공자들조차 어려워하는 개념으로 함수, 스칼라와 벡터, 공변벡터에 관한 연산 이해까지 요구되는 점도 있어서 여간 까다롭지 않다. 다행인지 『자연의 개념』은 화이트헤드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수학적 표기법을 피했기에 중기 시절의 다른 책들과 달리 어려운 수식들 없이 화이트헤드가 자신의 이론을 펼친 책이어서 좀 더 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이 책을 대중적인 책이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힘들 만큼 쉽지 않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책들이 제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여전히 널리 읽힐 수 있도록 계속적인 번역의 시도와 수고들이 앞으로도 더 많이 나와야 한다는 점은 더욱 강조되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자연의 개념』의 역자인 안호성 선생에게 깊은 감사를 드며 글을 맺고자 한다.  


 

[1] Henri Bergson, Herbert Dingle(Editor)ㆍLeon Jacobson(Translator), Duration and simultaneity, with reference to Einstein's theory (New York: Bobbs-Merrill, 1965[1922]), 62.

[2] Ibid 62.

[3] A. N. Whitehead, “On Mathematical Concepts of the Material World,”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Series A (Baltimore: Johns Hopkins Press, 1906), 467.

[4] Victor Lowe, Alfred North Whitehead, the Man and His Work, Volume I: 1861–1910 (Baltimore: The John Hopkins University Press, 1985), 299.

[5] A. N. Whitehead, 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Natural Knowledg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9), 8.

[6] 영어의 instant와 moment는 둘 다 한국어로 번역할 때 ‘순간’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화이트헤드 철학의 맥락에서 이 두 낱말은 다소간 차이를 갖고 있어 구분해서 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번역자 역시 instant를 ‘순간’으로 moment를 ‘찰나’로 번역하여 이를 구분해 놓았었다. 챗GPT에 물어보니 instant는 시간의 "점", 정확히 찍힌 찰나를 말하며 물리적ㆍ기계적인 느낌을 준다고 한다. 반면에 moment는 시간의 "의미 있는 조각", 즉 감정이 담긴 짧은 시간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instant는 정확한 시간의 한 점이라면, moment는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일말의 간격 구간이 있다는 점을 차이로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영어의 ‘스타일(style)’처럼 워낙 많이 쓰는 용어이기도 해서 그냥 ‘모멘트’라고 해두는 것도 괜찮다고 여겨진다.

[7] A. N. Whitehead, The Principle of Relativity, with Applications to Physical Scie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22). 화이트헤드는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그의 중력 이론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중력장을 시공간의 곡률로 표현했던 아인슈타인과 또 다르게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 화이트헤드의 중력 이론은, 그의 생전엔 에딩턴의 도움으로 한때 경쟁적인 중력 이론으로 인정받기도 했었지만, 세월이 흘러 그의 사후에 확인된 심각한 오차 문제로 인해서 더 이상의 큰 관심을 끌진 못했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도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과 또 다른 새로운 중력 이론의 개발은 여전히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물론 중력파의 관측 발견에도 힘 입어 여전히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은 가장 큰 대세를 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정체 모를 암흑물질을 가정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고 또한 양자물리학과도 통합하기 힘든 어려운 난제도 남아 있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에는 아인슈타인과 또 다른 새로운 중력 이론을 찾는 과학자들도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수정 뉴턴 역학(Modified Newtonian Dynamics, MOND)이나 중력을 근본적인 힘으로 보질 않고 엔트로피의 효과로 보는 엔트로피 중력(entropic gravity) 이론을 들 수 있다.

[8] Rémy Lestienne, Alfred North Whitehead, Philosopher Of Time (Singapore: World Scientific Publishing, 2022), 146. 레스티엔의 설명에 따르면,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은 경험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시간이 더 넓게 분할된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함축한 것이라고 한다(Ibid). 참고로 국역판 『과정과 실재』에서는 ‘동시성’으로 번역되어 있다.

[9] Ronald Desmet, “Whitehead’s Principle of Relativity,” in Whitehead—The Algebra of Metaphysics, ed. R. Desmet and M. Weber (Bruxelles: Chromatika, 2010), 210.